[목회자 칼럼] 열둘을 부르다
2019/07/19 09:2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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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는 이야기로 시작하자. 열두 제자, 열두 사도라고 부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열둘이다. 열둘의 상징이 매우 크기 때문에 마가복음에서는 열둘이라고 칭한다. 제자 그룹을 보면, 열둘 외에도 여성 제자들이 있고, 칠십인 제자가 있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따르면, 오백여 형제도 있다. 하지만 열둘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이들은 예수와 늘 행보를 함께했다. 그야 말로 동거동락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각별한 사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사람인가. 열둘에 들어갈 만큼 출중한가. 요즘 사람을 뽑는 기준으로 보자면, 이들은 뽑힐만한가. 요즘 재벌회사나 공무원 세계에 진입하려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한마디로 순둥이여야 한다. 지시에 고분고분하고 데모나 시위는 일절 해서는 안 되고, 문제제기, 토론, 내부고발, 평등의식 등 민주사회의 덕목은 가급적 축소하고 지워야 한다. 정의를 구하는 데모 한 번 못한 사람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게 안 되면 아비를 잘 만나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런 세속적 기준이 어떤가. 연줄, 인맥, 배경이 좋은가. 그런 단서는 없다. 스펙도 없다. 부름받기 전 하던 일을 보자. 열둘 중 네 명은 어부다. 세리도 있다. 열혈당원도 있다. 경력이 시쳇말로 좀 딸린다. 인성은 어떤가. 별명이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과격한 사람도 있고, 스승에게 멱살잡이하는 제자도 있고 결정적으로 스승을 팔아먹는 제자도 있다. 또 스승이 체포돼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모두 줄행랑을 친 것을 볼 때 의리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 열둘 모두 도긴개긴이다.

이들이 세상 기준으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열둘을 소개하는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서술이 극히 단조롭다. 대개는 간략하게 이름만 말한다. 뭐라도 덧붙이는 말도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형제라든지 누구의 아들이라는 정도다. 좀 특별한 소개도 있다. 하지만 세리, 열심당 아무개라는 서술에서 보듯이 핸디캡에 가깝다. 제일 길게 자세히 소개하는 제자는 유다인데, 그 내용이 유다만이 아니라 예수와 일행 모두에게 치명적이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자기 그룹의 허물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용기가 대단하다. 

예수는 무엇을 보고 열둘을 선발했나. 뭐 하나 어디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을 뽑은 이유가 무엇인가. 모지리들을 뽑아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더 부각되기를 바라서인가. 아니면 모자란 이들을 진짜 사람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기획인가. 

다 아니다. 예수가 이들을 뽑은 오직 한 가지 기준이 있다. 무엇인가. 민중이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예수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세워갈 사람의 제일 철칙은 무엇인가. 민중이어야 한다. 민중 아니면 안 된다. 어째서? 로마제국과 거기에 빌붙은 이스라엘 환경에서 입신양명, 성공출세를 바라며 인생을 저울질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제자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의 품성은 하나님나라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지배세력, 기득권 때를 덜 입은 사람일수록 좋다. 그래야 제국과 다른 세상을 더 잘 꿈꿀 수 있다. 저울질하는 사람은 지배세력에 저항하지 못한다. 열둘이 배움이 부족하고 진중하지 못하고 울뚝불뚝하고 좀 모자라 보일지라도 그들의 품성은 새 세상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하다. 간교하지 않다. 

글을 맺자 해방되자마자 분단세월이 74년이다. 통탄해야 한다. 외국군대 없이 자주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자. 오직 민중인 열둘이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동력이듯이, 이 땅 민중이며 민주시민인 우리가 더욱 주체성을 가지고 미군 없는 주권국가 동력이 되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멘. 
/대구 새민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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