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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5.2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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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남수.jpg
 
보통 직장인보다 하루 시작이 늦다. 출퇴근길의 혼잡스러움도 점심 메뉴의 고민도 없다.

다만 퇴근길에 하루를 마감하는 학생들과 뒤엉켜 그들의 욕설과 짜증, 고함에 귀가 좀 따가울 뿐이다. 너희들도 고생했다 싶다가도 귓등을 때리는 험한 말들에 짜증이 솟구치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이어폰이 막아 준다.

나는 학원 수학 강사다. 수학이 밥 먹여 준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수학을 도구로 아이들을 만나고 수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이나 창의적 이해를 소개하거나 돕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 생각대로 혹은 내가 내린 정의대로 정형화되어 진행되지는 않다.

나보다 훨씬 일찍 하루를 시작한 아이들의 노곤함이 보이면 예능인이 되어 주저리주저리 말을 풀어내기도 했다가, 무심히 답을 물어보는 아이들에게는 ‘내가 답지냐’ 핀잔을 주는 답지이기도 했다가, 개념을 이해 못 하는 아이들의 스토리텔러이기도 했다가.

이렇게 그때그때 상황에 맞춘 유연성이 있어야 하는 곳이지만, 적지 않는 돈을 내고 학원을 보내는 부모님의 처지에서는 아이와 맺는 세심한 관계나 이해 혹은 공부하는 호흡을 맞추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들 성적향상, 문제풀이 양, 심화문제 풀이 등의 정확한 피드백이 필요하고, 때로 아이의 상황에 맞지 않는 무리한 요청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 부분이 참 어렵다. 밥을 지으려면 쌀을 씻고 불리고 밥통에 넣고 버튼을 누르고, 또 약간의 기다림의 과정이 필요한데, 쌀이 들어갔으면 이내 밥이 되어 나와야 하는 성급함이 된 밤이나 설익은 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구매자의 입장에서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교육서비스는 기성복이 아니고 아이의 정서와 이해의 체형을 읽고 거기에 맞추어 언어와 행동을 선택해 조금씩 품을 짜야 하는 맞춤복이다. 적어도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투자한 것에 대해 그만큼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학원 강사들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때 ‘아저씨’에서 ‘쌤’으로 호칭이 달라질 수 있다.

나보다 더 나를 들여다보려 애쓰는 사람의 눈빛과 정성이 읽히면 그 후의 학습 패턴은 기존과 다르다. 이제 아이들 스스로가 신뢰관계의 주체가 되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의 실타래가 하나둘씩 풀려가기 시작하고 수학에 재미가 느껴진다면 다음은 이제 아이들의 몫이다.

물론 옆에서 같이 뛰어주는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계속 진행되어야 하지만 혼자 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뛰는 즐거움과 역동을 아이와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면 강사로서 참 짜릿하고 또 즐겁다. 여러 사람을 만나 관계하는 일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리고 돈이 오가는 교육 시장에서 구매자와 판매자의 관계가 퍽이나 건조하겠지만, 내게 주어진 만남에 부족하나마 정성을 다하고 기가 막힌 인연에 감사할 수 있다면 내가 아이들에게 그리고 아이들이 나에게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매일매일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작은 쌤’들은 오늘도 숙제를 못 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거나, 어려운 문제를 풀고 어깨를 으쓱이고 있을 것이다.

 /만나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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