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① -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

기독교중심, 민족을 향한 사랑으로 일제에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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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1.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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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①.jpg▲ 2·8독립운동 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의 근촌 백관수선생 동상 이 동상은 백선생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 건립되었으며, 1983년 8월 15일 제막식을 거행했다.(제막식 날 백선생 가족과 친지들·왼쪽부터 다섯 번째는 백선생 자녀 부부인 백경순여사와 한양대학교 설립자인 김연준박사)
 

근촌 백관수 등 2·8독립운동 정신을 잇는 미래상 제시

실천적·혁신적·지성적인 성격의 독립운동으로 평가


100년 전 한민족은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3·1운동을 통해 일제의 폭거에 저항하고 세계만방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내비쳤다. 이때 한국교회는 만세운동을 이끌면서 초교파적인 단합을 통한 민족헌신의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한국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의 독립과 자주정신을 일깨웠던 믿음의 선조들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를 향한 일반사회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하다. 과거와 달리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만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한 3·1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대두되고 있다.


민족종교로서의 기독교

3·1운동 당시 한반도내 종교인 중 기독교인 수는 2%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민족애로 하나되어 민족혼을 지키는 데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이덕주교수(감신대)3·1운동과 기독교 - 준비단계에서 이루어진 종교연대를 중심으로란 논문을 통해 한국교회가 3·1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첫째는 한국교회가 민족주의 성격을 띤 채 성장했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통해 전해진 자유와 평등 사상의 유입은 수평적 시민사회를 구현하는데 중심이 됐다. 구한말 한민족의 근대화에 기여한 기독교가 일제의 억압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자명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는 민족문제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됐다.


둘째는 한국교회가 식민통치 상황에서 민족문제를 논의하는 민족운동의 공간이 된 점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보호아래 치외법권적 영역이 되었고, 총회와 연회, 지방회나 노회를 중심으로 총독부의 발길이 닿지 않는 연락망을 갖추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대한 자료가 지방에 전해져 전국적인 시위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각지에 퍼진 연락망 덕분이다.


셋째는 초교파적 연합운동이 전 민족적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1903~1907년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여파로 초교파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러한 연합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3·1운동 당시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했고, 각 지방에서 교파를 초월해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이렇듯 3·1운동 당시 교계 지도자들은 민족교회로서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시대적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민족을 사랑했던 이들에게 있어서 교파의 벽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는 점, 또한 한국교회에 큰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3·1운동을 기념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본받는다면, 그들의 의지 또한 이어야 하겠다. 한편 최근 3·1운동이 진행되는 데에 기폭제가 됐던 2·8 독립선언에서 기독교계가 큰 역할을 맡은 사실이 조명을 받고 있다.


3·1운동의 기폭제 2·8독립운동

19192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진행한 2·8독립운동은 근촌 백관수선생이 단장으로 있었던 조선청년독립단에 의해 주도됐다. 이전까지의 독립운동은 민족 전반의 관심을 받지 못했거나 일부 지역에 국한된 저항에 그쳤다. 하지만 2·8독립운동은 처음으로 한민족 전체의 의지를 담아 일제에 저항한 항쟁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근촌 백관수선생은 선언서낭독을 통해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하의 해독과 좋지 않은 사정의 불행으로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규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에 있을 줄을 확신하노라고 말했다. 또한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한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어찌 동양평화의 화근이 아니리요라며,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리라고 선언했다.


2·8독립선언서가 지닌 논조에 대해 윤재근박사(전 한양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2·8독립운동의 참여한 이들이 품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우러나온 것으로 보았다. 윤박사는 “2·8독립선언서는 패기와 열정을 가득 안고 있다, “근촌 백관수선생이 낭독한 2·8독립선언서는 민족 사랑으로 가득 찬 애가이자 민족의 진일보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눌러담은 명문이다고 역설했다. 이어 “2·8독립운동은 춘원 이광수를 포함해 독립선언에 함께한 이들의 역량이 합쳐진 결과이다, “이를 위해 2·8독립운동을 위해 주도적으로 선언문을 작성하고 조직을 이끌었던 근촌 백관수선생의 선구자적 식견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2·8독립운동은 3·1운동으로 계승되어 한민족이 더는 식민지배의 압제에서 벗어나 일어날 것을 주문했다, “2·8독립운동은 독립 이후 한민족이 건설해야 할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짚은 민족의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8독립운동과 근촌 백관수선생

1919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 조선인 대표로 이승만과 민찬호, 정한경 등이 참석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알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 독립열망이 퍼져갔다. 이에 메이지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근촌 백관수선생은 최원순과 정광호, 김안식, 김현준과 함께 조선 유학생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독립의사를 천명하기로 했다. 이에 근촌 백관수선생은 19191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웅변대회를 열고, 조선 독립의 달성에 앞장설 것을 천명하고 유학생들과 함께 조국 독립의 방법을 논의했다.


이후 2·8독립선언서의 작성을 위해 이광수에게 선언서 저술을 요청했다. 이광수의 독립선언서 초안을 본 근촌은 사상과 이념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한 것과 차이가 있다고 보고 고심 끝에 세 차례에 걸쳐 선언서를 다듬었다. 훗날 근촌 백관수선생은 조선청년독립단 2·8선언 약사를 통해 선언서는 본인이 담당하여 이광수군에게 하여금 기초해 재삼차 수정 완료했다고 밝혔다.


2·8독립선언서 작성을 마친 근촌 백관수선생은 독립운동이 고립되면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보성중학교를 나왔던 송계백을 서울로 보내 독립선언서를 전송했다. 당시 전달된 2·8독립선언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에게까지 전달됐다. 선언서를 읽은 손병희는 교단 회의를 통해 3·1운동 궐기를 결의했다.


한편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독립운동을 더욱 조직화하기 위해 근촌 백관수선생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창설했다. 단장으로 추대된 근촌 백관수선생 19192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쟁취한 세계만국의 앞에 독립을 기필코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국군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하에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했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시기에 당연히 바로 잡을 것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세계 개조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솔선 승인하였으므로 이 시기에 구악을 대속할 의무가 있다


이 선언문을 통해 근촌 백관수선생은 일본이 제기한 대동아공영권의 허위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이념과 당위성을 전개했다. 기미독립선언서와 달리 근촌 백관수선생의 2·8독립선언서는 민족애와 젊은이의 열정을 바탕으로 두는 독립 의지를 눌러 담았다.


최팔용과 윤창석, 서 춘, 송계백 등 일본에 머물고 있던 유학생 500여 명이 모여 진행된 2·8독립운동은 조국을 잃었던 서러움과 독립의 환희가 뒤섞여 통곡과 오열의 장으로 바뀌었다. 일본 경찰들은 강당으로 진입하고자 했고, 경찰들의 진입을 막고자 수많은 학생들이 그들과 다툼을 벌였다. 당시 사회를 보고 있던 유창석은 기도를 올렸고 눈물을 흘리던 학생들과 고함치며 폭력을 행사하던 일본 경찰마저 고요해졌다.


유창석의 기도가 끝나자 근촌 백관수선생은 앞장서서 강당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이끌고 도쿄 거리를 누비며 독립만세를 외치고자 했다. 그러나 기도로 인해 잠시 주춤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이 그들을 덮쳤다.


2·8독립운동의 의의

일본 경찰들의 난입으로 강제 해산에 그쳤지만, 2·8독립운동은 1910년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의 의지가 한 데 모여 민족의 등불을 밝힌 거사로 인정받고 있다. 윤재근박사는 2.8독립선언에 대해 논하면서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과 비교했을 때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2·8독립선언서에서 볼 수 있듯 2·8독립운동은 지성적이면서 활력이 넘치는 측면이 강하다고 밝혔다. 또한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해 당시 유학생 신분으로 도쿄에 머물던 이들이 느끼고 있던 역사적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꿈꿨던 민족국가의 모습은 자유주의를 뿌리로 하는 근대국가로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희망찬 미래사회를 그린 것이다고 평했다. 2·8 독립선언서는 한민족 전체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봉건질서 타파와 근대이념의 대중화를 역설했다. 이는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를 시작으로 한국교회가 이루고자 한 가치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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