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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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소망(고전15:1~58)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진리의 복음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사망 권세에 영원히 갇혀서 소망을 잃어버린 모든 인류의 절대적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부활이 GOOD NEWS인 것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꼼짝없이,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삼일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기적,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또한 부활은, 세상을 장악한 마귀권세와 그의 하수인들의 힘과 계획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퀘거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이 세상 神인 악한 영들에게 비참하게 모든 것을 강탈당한 것(질병, 불신앙, 우상섬기는 일, 미래의 소망까지 빼앗긴 인생들)을 다시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은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역전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타락한 세상의 힘과 질서를 거스르는 도전이며 이를 응징한 大事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에게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려 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 대사건이어서 부활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고, 역전을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통의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신앙이며, 억울한 순간에도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영성을 갖춘 영적인 존재, 즉,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남이다. 진정한 부활신앙은 먼 미래의 그 종말적 재림의 그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께 연합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과 성도들이 부활의 큰 사건과 위대함을 너무 가벼운 일회성 행사로 전락시킨 면을 안타까워해야 할것이며 더 크고 위대하게 선포하며 전해야 할 것입니다. 안일하게 타협하며 내세지향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지켜져 온 것이 아닌가, 그저 나의 죽음 이후를 보장하고, 우리 성도들의 죽음에 조금의 위안을 주는 단순한 일회성 절기로 소홀이 취급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재림의 그날의 부활, 나의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다시 오늘 살아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성경적인 부활은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죄와 더불어 먹고 살았던 육적인 모습, 자신의 죄 된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자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부활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을 선하신 하나님께로 고정하고 나의 존재를 의의 도구로, 성품을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20~58)/유향교회 목사·예장 합동개혁측 대전광역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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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03-28
  • [설교] 최고의 역전 드라마, 부활
    김 학겸 목사    극적인 드라마를 보면 그 안에 반전이 있습니다. 인류 최고의 역전 드라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모습을 보기 전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요20:1).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요20:2). 그리고 두 제자도 달려가서 빈 무덤을 보고 시체가 도난당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열린 무덤은 그저 놀라운 사건에 그칠 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주님을 위한 걱정이나 열정도 그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요20:16). 마리아는 눈으로 볼 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을 귀로 듣고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리아의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요20:21).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다음 세대가 부활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각자 받은 사명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달란트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지 말고,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평강과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요20:21-22). 우리의 능력과 가진 것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실력과 소유가 아닌 예수님의 성품과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사명 받은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감과 죄책감 등으로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주신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상처 입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가지고 괴로워하는 모습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명 감당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죽음 너머에 위대한 부활이 있었음을 믿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새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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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03-22
  • [설교] 건축자들이 버린 돌
       성경 시편 기자는 시편118편 22부터 23절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118편 22절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면서 자주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 구약의 성경구절의 예언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은 교만한 지도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지도자들인 건축자들은 이 돌이 쓸모 없다고 버립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지을 성전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재료라 생각하고 버렸습니다. 건축자들은 성전을 짓는 최고의 기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최고의 기술자들이 보기에 성전은 튼튼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한 재료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절 2절 “여기에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건축자들이 건축한 이 성전은 로마 군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처럼 벽돌 하나도 남김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전만이 존재할 뿐 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옮겨 다닐 수 없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성전이 되어 어디든 옮겨 다닙니다. 여기도 저기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이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성전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건축공사에서 제일 먼저 놓이는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이 돌은 건축하고자 하는 벽의 방향과 길을 결정해 주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린 돌이 되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성전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머릿돌 위에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따르고 믿고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행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 삶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 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다시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그 믿는 사람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여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기적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인생이 풍요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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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03-04
  • 달콤한 소통(사도행전 5장 38절에서 42절)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전에는 두려워하고 절망하면서 다락방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세주라고 목소리 높여 선포하기 시작했고, 앉은뱅이나 눈이 먼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소리를 높여서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개해서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원로답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번 보아왔듯이 제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하나님께서 곧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좀 두고 보자. 이렇게 제자들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을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옥되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채찍 맞고 걸어 나오는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편해졌을 때 망합니다. 신앙은 마침내 부활이요 승리지만 그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행복·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고난을 생략하면 기독교는 망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가는 것이 전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일만 되면 일을 시키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뚫고 교회 나오는 것은 매주 전쟁이었습니다. 때로는 빗자루로 얻어맞고 여성들은 머리도 막 잘리면서도 교회에 갔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신앙이 진짜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교회 가는 것 때문에 아무런 고난이 없습니다. 다 편합니다. 교회에 와도 목회자가 쓴소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 나올까 봐. 결국, 희생이나 헌신 없이 달콤한 열매만 추구하게 되면 그 신앙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움직여지고 선교 공동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성도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정상적입니다. 너무 합리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시간과 건강과 노동과 물질을 드리면 나는 당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돈 쓸 곳이 여러 군데인데 못 쓰니 고통입니다. 근데 그 고통을 기뻐하게 된다는 것은 거룩한 중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어떤 고통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전통입니다. 이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달콤한 고통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주민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2-05
  • [금주의말씀] 교회에서 찾을 영광
       신학교 재학 시절, 캠퍼스 안에 기숙하고 있던 학생들과 ‘뉴욕 곰탕집’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신학교로 돌아오면서, 차 안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드셨어요?” 모두들 잘 먹었다고 하는데 한 학생만 “아니요!”라고 답을 합니다. “왜?” 되물었더니, “짜장면이 맛이 없어요” “아니, 곰탕집에 갔으면, 곰탕을 먹어야지, 짜장면을 먹고 맛이 없다고?”하며 모두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썼던 C.S 루이스는 크리스천으로 회심을 한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교회에 대한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만큼이나 교회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의식에서 시작 된 것으로 신경이 무척 쓰이는 ‘같이하기’ 행사였다”고 하며,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개인적인 탐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크리스천의 삶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인간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여, 어디에 속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교회 안에 분명한 표징을 두었다.” 그러면, 교회에만 있는 그 무엇, 교회에서 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2c-3절 말씀처럼,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변형’(transfigured)의 뜻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사회의 상황과 각자의 생활 속에 바쁘게 살면서, 예수님도 그 모든 영향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마음과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모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4-6절 말씀처럼, 성경 속의 인물·사건·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7절에서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은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광된 체험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입니까? 변화 산 자체가 특별하고, 유명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변화 산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영광 된 교회입니다.   또한 2절에 ‘따로’, ‘높은’, ‘올라가셨더니’의 단어처럼, 우리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를 특별히 구별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 나를 따로 구별하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또 8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현실에 충실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된 변화 산과 교회에서, 생활 현실로 돌아와 충실 하십시오. 내 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맛을 보았으면, 그 힘으로 내 삶이 영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세상에서, 일상생활에서 그 영광의 능력을 발휘하시길 축원합니다./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30
  • [설교] 기도
    김국현목사    우리는 보통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제일 쉬운 일은 숨 쉬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쉬운 것이 누워서 숨쉬기입니다. 교회가 생명력이 있다면 살아있는 기도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성도들이 소유한 능력의 원천이며, 동시에 건강의 척도입니다. 성도는 어마어마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거머쥐신 분의 능력을 청구해 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능력을 주시는데, 그 연결선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아무리 잠재적인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참 무력해 보입니다.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없으면 참 무력해 보입니다. 반면 몇 명 모이지 않는 교회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기도가 있으면 역사를 움직이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2~14).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들은 나의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더 큰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장막 안에 금향단이 있습니다. 이 금향단에 성도의 기도가 담겨져 하나님 앞에 올라갑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주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기도하고 이 기도의 응답으로 이 땅 위에 종말의 증거을 보이십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도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행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땅 위에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행해집니다. 이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알리는 사인입니다.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도 다시 오십니다. 기도에 이렇게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악한 마귀는 잘 압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기도를 못하게 만듭니다. 바쁘게 만들고, 이유를 만들고, 어떨 때는 핍박을 통하여 하여튼 기도만은 못하게 하려고 획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난관을 뚫고 나아가서 기도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그분이 주시는 사랑을 받는 아주 단순한 일입니다. 기도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기도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우리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주리고 목마르십니까? 우리의 삶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렘 2:13)와 같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럴 때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말씀하신 주님의 초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주께로 나아가십시오. 갈급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아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 홍천 풍성한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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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적(막16:14~20)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표적(表迹, the signs)이란 ‘겉으로 나타난 흔적’이다.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른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우리의 믿음을 무기력한 믿음으로 방치하지 말고, 삶 속에서 표적을 경험하는 믿음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먼저, 영혼 구원의 표적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인생의 많은 표적 중에 최고의 표적은 내 영혼이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하나님은 오직 예수 이름만을 구원의 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둘째, 대적을 물리친 표적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수 6:20). 여리고 성은 그들 앞에 놓인 엄청난 난제였다. 하지만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졌다.   셋째, 절망을 극복한 표적이다.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8).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수 4:20).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 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사 38:5). 믿는 자들에게 병을 회복하고, 수많은 역경을 극복한 표적들이 반드시 나타난다.   넷째, 기도 응답의 표적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기도는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최선의 방편이다.   다섯째, 삶이 변화된 표적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2-14). '안악골 깡패' 김익두가 목사가 돼 770회에 이루는 부흥집회를 열었으며 150개소의 교회를 신축했다. 믿음은 인간의 근본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을 경험하는 원동력이다. 날마다 표적을 경험하며 승리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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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2
  •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 (눅22:24~34)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 시대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큰 자가 될 수 있는지에 혈안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고 말씀하고 있다.   말씀을 통해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인지 깨닫고 주어진 매일의 삶에서 깨어 준비하는 자가 되길 축원한다.        첫째:섬기는 자(24~27)  떡과 잔을 들어 피와 살을 나누어 준다고 말씀하셨고, 식사 중에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요13:4~10)을 씻겨 주시기까지 했지만 그들은 정작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리석은 제자들을 꾸짖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는데 이유는 제자들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보여 주셨음에도 우리에게 섬김이 없다는 것은 제자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하늘에서 큰 자는 자신의 본성을 따라 높아지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낮아지며 섬기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함께 하는 자(28~30)  함께 함이란 즐겁고 기쁘고, 성공을 이룰 때만이 아니라 본문의 말씀처럼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자’(28절)가 핵심이다.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순간에는 도망치며, 저주하며 부인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이 굳은 결의와 각오만 가지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고 하시면서 어느 순간이든지 함께 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이루어가는 일에 헌신하는 자가 될 때 비록 시험과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천국을 향한 소망을 통해 이겨내게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셋째:굳게 하는 자(31~34)  ‘너도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절)는 말씀은 구원받은 자의 책임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다. 형제를 굳건하게 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에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성령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말씀에 순종할 때 형제를 굳게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야고보 사도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약10:24~25)고 권면하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지를 알고 돌이키는 자가 다른 이들을 굳게 세우는 자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라 인정받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믿음을 위해 핍박을 받고,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간 자들이 더 큰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해 같이 빛나는 그곳에서는 시기하고 질투하기 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머물러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하는 순간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 그 우편의 강도처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는 축복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은혜이지만 이미 구원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 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큰 자로 세워질 수 있는 믿음의 소망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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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9
  • 나는 존귀한 자다(창세기1:27~28)
      미국의 한 사회심리학자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검사한 사람의 약 95%정도가 열등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생에 몇 번이 아니라 늘 지속적으로 심하게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숫자도 상당합니다. 심한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은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노력해 보다가 안 되면 ‘역시 나는 안돼. 나는 무가치한 존재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실패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세상의 기준으로만 바라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올바른 대처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적인 자아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자아상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 성경학자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했을 때 그 의미를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인격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지, 정, 의를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영혼을 심겨 두심으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영적 통로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사모하는마음을주셨느니라”(전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영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인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마음의 생각과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있었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죄의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죄를 뜻하는 ‘하말티아’는 과녁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우리의 마음이 왜곡되고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의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좋은 소식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우리들 안에 죄로 인해 왜곡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한 번 새롭게 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죄를 전혀 안짓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상태에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간절히 바라기는 세상의 눈으로만 우리를 평가하지 말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존귀한 자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늘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동안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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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스스로 조심하는 자의 자세 (눅21:34~38)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믿음이 조금씩이라도 성숙해지고, 맡겨진 책임이 늘어가며 직분이 주어질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조심하며 또 조심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조심하는 자세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즉 교만이 그 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차고 넘치는 광야에서 우상 숭배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라면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권면하고 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면서 내가 얼마나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닫기를 축원한다.          첫째:마음에 집중하라(34)  마음이 둔하여지면 안 되는 이유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은 내느니라”(마12:34~35)고 말씀하셨다.   본문에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것은 ‘방탕함, 술취함, 생활의 염려’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마음이 둔하여지고 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는 사도 바울이 권면이 각자의 삶에 차고 넘칠 때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둔하여지고,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둘째:깨어 있으라(35~36)  예수님의 많은 비유들이 깨어 있는 자들이 받는 축복과 깨어있지 못한 이들이 후회와 눈물로 그 대가를 치루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에서 알 수 있듯이 잠들어 있는 자는 마귀의 밥이 되고 만다. 오늘 우리는 깨어 있는 자인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보다 무엇을 하면서 깨어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방탕함과 술취함으로, 생활의 염려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시간이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깨어 있음의 참 모습이다.  셋째:나아가라(37~38)  예수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서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기도하시는 일을 쉬지 않으셨고 사람들도 이른 아침부터 성전으로 모여 말씀을 듣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지라도 할 수 있는 선한 일은 멈추지 말고 지속되어야 한다.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6~1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며, 결단하고, 행동하는 자야 말로 멈추지 않고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자이다.  구원이 나의 의로움이나 선한 행실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처럼,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 또한 나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임재를 가운데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고 예수님이 약속해 주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는 자로, 항상 깨어 기도하는 자로,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자로 살아가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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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08-22
  •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면 (눅21:10~1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마지막 때야 말로 알곡과 쭉정이가 걸러지며, 양과 염소로 구별이 되는 중요한 순간을 앞둔 시점이기에 영적으로 절대 잠들지 말아야 하는 때이며 깨어 주의 임재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고 하셨다.   바울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5:12)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마지막 때를 살고 있기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어느 때가 아니라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첫째:징조를 분별하라(10~11)  마지막 때에 대해 예수님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지진, 기근, 전염병,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오는 큰 징조’라고 말씀하셨지만 세상은 문제점들을 찾아내고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책망하시며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12:56~57)는 말씀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를 위한 교훈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2:17)라고 비유하신 것처럼 마지막 때의 징조들에 대해 깨우침도 긴박감도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증거가 되라(12~15)  증거가 되는 삶은 한 마디로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마지막 때가 임박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질은 마주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제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고난이 없는 것이므로 마지막 때일수록 도전하며 부딪치는 믿음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13:11)고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약속은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서 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순간에 성취되었다(행4:13).   일상의 삶 속에서도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바로 마지막 때의 증거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영혼을 지키라(16~19)  믿음 때문에 고난과 환란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인내로 이겨내는 것은 바로 내 영혼을 지키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고 고백하고 있으며 바울도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고 권면하고 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말씀하셨다.   내게 있는 세상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보다 영혼을 지켜내는 일에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살아내야 한다.   시작을 멋지게 잘 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마지막을 의미 있게 잘 마무리 하는 것이 믿음 안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울은 왜 마지막까지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고 잘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마지막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소망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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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08-16
  •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자 (눅20:45~47)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누가복음 20: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본문은 스스로를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부분이 참으로 많다.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그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아시는 주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내 주변에 삼가 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끊어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다른 이들에게 삼가 해야 할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믿음의 관계를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군중으로 사는 자(45) 모든 백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성경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45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들려지지만 참된 진리는 오직 제자들에만 전달되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시며 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들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하지만 불법을 행한 것뿐이라 말씀하신다.   구원의 은총부터 그 받은 구원을 잘 유지하며 완성하기까지 정말 필요한 것은 참 제자로서 일대일의 온전한 관계이다.   대중이 아닌 제자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일상속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나가는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둘째:자기를 위해 사는 자(46) 서기관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위한 도구로 율법을 이용할 뿐이었다.   서기관들이 원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고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자신들만이 입는 특별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또한 서기관들이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에 앉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고, 좋아 해야 할 자리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주신 것을 깨우치게 하고 가르치는 자리여야 했다.   하나님의 맡겨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보다는 그 일 때문에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환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이들을 멀리할 뿐 아니라 내가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한다.   셋째:위선으로 사는 자(47) 서기관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며 보살피라고 명령하신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만 겉으로는 길게 기도하며 거룩한 척을 하고 있다. 과부의 재산을 갈취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길게 나올 수 있는가?   정말 힘없고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삶을 살면서도 보란 듯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증거이기에 그의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가 될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절대 듣지 않으시는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고 책망하시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의 사람들의 모습을 열거(딤후3:1~4)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돌아서야 할 자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며 결론적으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고 권면한다.   인생을 살아보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큰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깨닫는 교훈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깨어 있고, 영적으로 민감하다면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기 이전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관계를 맺어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8-09
  • 모두가 전적으로 죄인이다(롬3:9~20)
        사람들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첫째, 인간은 조금 부족할 뿐이고 날로 좋아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둘째, 인간이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시각이다.    셋째, 성경의 견해이다. 인간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견해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 긴 논증을 했다.이방인들의 뻔뻔스러운 탐욕과 불의함을 지적했고,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산다고 여기는 이들의 위선적인 불의함을 증거했다.   또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의 자기 자신과 그들 속에 나타나는 불의함을 지적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그룹을 지적한 이유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다. ‘아래 있다’는 것은 어떤 세력 아래에 정복되어 있고, 지배당하고 있고,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이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없다’는 단어가 계속 반복된다. 하나님과의 접촉점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모습과 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 아래에 있는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죄 아래 있는 상태를 고발하면서 구약 곳곳에 예언되어 있다고 말한다. 매우 의도적이다. 사도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 번 강조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구약 말씀을 인용한다.   인간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거룩하시며 심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사도 바울 당시 이교도들은 바벨론과 헬라 그리고 로마의 수많은 이방신을 두려워 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데,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다.   죄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복음은 기쁜 소식이요, 놀라운 소식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죄 아래 있는지를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고, 심판을 주시는 것이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 아래 있고, 심판 아래 있다는 것과 동등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멸망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 목적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죄 아래 있는 우리를 은혜 아래로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통로이다. 십자가 앞에 나가지 않는 것은 죄 아래 있다는 실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진리이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 완전히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온누리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8-01
  • 악인의 특징 (눅20:19~2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악인들의 모습은 시편 1편을 기준으로 보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 있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기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며(4절), 심판을 견딜 수 없고(5절), 그 길은 망하게 될 것(6절)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악인이라 특정 지을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이나 의도는 어떤 누구보다도 악한 사람들이었다.    본문을 통해 각자 자기의 속사람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19~21)  악인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도 예수를 잡고자 했지만 백성들이 두려워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다(19절).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오히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1절)로 간교하게 접근한다.   악인들은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할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바울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며 악인들의 모습을 열거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8)고 단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목적이 불의하다(22~25)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22절)라는 질문이 예수님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옳다 그르다고 말씀하기보다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절)고 하시는데 이유는 가이사의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 가르치면서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7)고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인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삶을 잘 살아내야 할 책임이 있다. 정말 궁금한 것이 아닌 불의한 목적을 가지고 원하는 대답을 원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이야 말로 악인들의 특징이다.   셋째:침묵으로 끝난다(26)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 악인의 계획은 치밀하고 빈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빠져 있기에 언제나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려는 하만은 왕의 조서까지 받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신의 집에 오십 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세워 놓았지만 결국 그 장대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하만 자신이 달리게 된다(에7:8).   성경은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24:1)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묵할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에 행하신 놀라운 일들은 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악인들의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이 소망이 있는 것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고 말씀하시며,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넓은 품에 안기는 축복을 누리며 살자.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8-01
  • 그리스도와 함께 (눅19:28~4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세상은 무슨 일을 하고, 어느 자리에 있는지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신다.   그렇기에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면 나의 인생이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으며, 그 길을 함께 가는 믿음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은혜 가운데 이어갈 수 있는지 깨닫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세워가는 일꾼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말씀 안에서(28~32)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관계에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방식에 대해 주저하지 않으셨는데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와 눈을 뜨면 바뀌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으로 삼으며 살아야 한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둘째:순종 안에서(33~36)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준은 순종하는지를 통해서 판명된다.   두 명의 제자 이름과 나귀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은 누구인지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순종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사울왕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게 되는 이유도 순종하기 않았기 때문이다(삼상15:22~23).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나귀의 주인이 제자들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순종을 하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축복의 경험은 다른 이들이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진정한 순종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는 말씀처럼 순종을 넘어 복종의 단계까지 이르러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셋째:찬양 안에서(37~40)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에 대한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이 군중들의 찬양을 그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찬양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알기 원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알지 못하면 바리새인들처럼 딱딱한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도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는 예수님의 책망은 찬양하지 않는 것은 돌보다도 못한 인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찬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자 사명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며 찬양이 입술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함께 말씀 안에서, 순종 안에서, 찬양 안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축복의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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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07-25
  • 매일 경험하는 구원 (눅19:1~1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을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고 말씀하신다.   만약 의인을 찾아 상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 근처에 갈 수도 없기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명령한다.   새 사람을 입고 주신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결단하여 구원받은 자로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축원한다.  첫째:진심으로 행동하라(1~4)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였는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그저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다가갈 수 없을 때 포기하고 돌아갔겠지만 돌무화과 나무에서 올라가서라도 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깊은 아픔이 배여 있는 행동이다. 이러한 진심어린 마음이 담겨 있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고 말씀하신다.   간사함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얼마나 담겨져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둘째:기쁨으로 순종하라(5~7)  예수님은 많은 군중들이 아닌 돌무화과에 메마른 마음으로 올라가 있던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뿐 아니라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다. 양 아흔 아홉 마리 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개의치 않으셨고, 삭개오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이 충만할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매일의 삶에서 구원 받은 자의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그 음성에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셋째:스스로 결단하라(8~10) 삭개오는 예수님이 먼저 명령하시지 않았음에도 할 일을 선포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 집에 구원이 임하였을 뿐 아니라 삭개오를 통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신다.   삭개오가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한 것은 자신의 풍요로움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7~18)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 바로 서 있다면 행함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은혜는 받았지만 아무 결단도 헌신도 없이 그저 더 많은 것들만 채워 달라고 요청만 하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권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여 받은 구원을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협하며 구원의 기쁨을 빼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주변을 맴 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이 내가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순간임을 기억하며 날마다 받은 구원을 경험하는 시간들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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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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