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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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하나님의 딜레마(호세아 6장 1~3절)
       몇해 전 바둑기사 이세돌와 AI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대결이 있은 후, 우리에게 이제 AI는 삶의 영역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이 AI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율주행차로 하여금 피할 수 없는 기로에 서도록 하여 운전자나 보행자 간에 희생자가 발생하도록 가상의 상황을 연출하여 결정케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이것을 ‘Trolley Dilemma’실험이라고 합니다. 성도분들께서는 이런 기로에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사실 ‘딜레마’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사용합니다. 딜레마의 뜻은 ‘진퇴양난에 빠지다’라는 뜻인데 조금 전 AI가 선택의 기로에 섰던 것처럼 어떠한 손해를 보더라도 결국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서는 것을 ‘딜레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딜레마가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도 딜레마에 빠지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다른 것은 딜레마의 해답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유난히도 호세아서에는 “벌하시겠다 용서하겠다, 죽이겠다 살리겠다, 심판하겠다 사랑하겠다”는 복잡한 심경의 변화가 드러나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은 혹여나 변덕쟁이가 아니신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실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욥기 34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본문에서 갈팔질팡 하실까요?   그것은 그분의 위치와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위치상 판결하시는 분입니다. 호세아 4장 1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논쟁’은 법정용어로 마치 검사가 피고의 죄를 나열하는 듯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상 그분의 목소리를 불호령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딜레미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마음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위치는 공의이신데 마음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 러한 의미에서 오늘 본문 1절은 이러한 주님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에게 매를 드시지만, 다시 낫게 하신다는 것은 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완곡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자주 표현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을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본심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말고 그분의 마음을 다른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때리셨지만 때리고 싶어서 때린 것이 아닙니다. 찢으셨지만 함께 찢어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함께 찢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싸매실까요? 2절은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를 부활의 예표로 보기도 합니다. 다시말해 무엇으로 싸매실까요? 아들을 내주시는 은혜로 우리를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내주신 은혜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등학교 시절 거짓말 안해본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되도않는 거짓말을 해서 담임선생님이 시말서와 함께 부모님을 데려오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하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떨려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때 어머니께서 함께 울어주시고 용서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무말 없이 가장 귀한 존재를 주셔서 우리를 안아주시는 것이라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제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생명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른 태도는 그분을 더욱 알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러한 모습이 넘쳐나길 축원합니다./일산하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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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소망(고전15:1~58)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진리의 복음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사망 권세에 영원히 갇혀서 소망을 잃어버린 모든 인류의 절대적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부활이 GOOD NEWS인 것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꼼짝없이,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삼일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기적,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또한 부활은, 세상을 장악한 마귀권세와 그의 하수인들의 힘과 계획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퀘거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이 세상 神인 악한 영들에게 비참하게 모든 것을 강탈당한 것(질병, 불신앙, 우상섬기는 일, 미래의 소망까지 빼앗긴 인생들)을 다시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은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역전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타락한 세상의 힘과 질서를 거스르는 도전이며 이를 응징한 大事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에게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려 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 대사건이어서 부활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고, 역전을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통의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신앙이며, 억울한 순간에도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영성을 갖춘 영적인 존재, 즉,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남이다. 진정한 부활신앙은 먼 미래의 그 종말적 재림의 그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께 연합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과 성도들이 부활의 큰 사건과 위대함을 너무 가벼운 일회성 행사로 전락시킨 면을 안타까워해야 할것이며 더 크고 위대하게 선포하며 전해야 할 것입니다. 안일하게 타협하며 내세지향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지켜져 온 것이 아닌가, 그저 나의 죽음 이후를 보장하고, 우리 성도들의 죽음에 조금의 위안을 주는 단순한 일회성 절기로 소홀이 취급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재림의 그날의 부활, 나의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다시 오늘 살아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성경적인 부활은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죄와 더불어 먹고 살았던 육적인 모습, 자신의 죄 된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자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부활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을 선하신 하나님께로 고정하고 나의 존재를 의의 도구로, 성품을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20~58)/유향교회 목사·예장 합동개혁측 대전광역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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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설교] 최고의 역전 드라마, 부활
    김 학겸 목사    극적인 드라마를 보면 그 안에 반전이 있습니다. 인류 최고의 역전 드라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모습을 보기 전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요20:1).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요20:2). 그리고 두 제자도 달려가서 빈 무덤을 보고 시체가 도난당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열린 무덤은 그저 놀라운 사건에 그칠 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주님을 위한 걱정이나 열정도 그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요20:16). 마리아는 눈으로 볼 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을 귀로 듣고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리아의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요20:21).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다음 세대가 부활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각자 받은 사명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달란트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지 말고,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평강과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요20:21-22). 우리의 능력과 가진 것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실력과 소유가 아닌 예수님의 성품과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사명 받은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감과 죄책감 등으로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주신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상처 입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가지고 괴로워하는 모습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명 감당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죽음 너머에 위대한 부활이 있었음을 믿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새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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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설교] 건축자들이 버린 돌
       성경 시편 기자는 시편118편 22부터 23절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118편 22절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면서 자주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 구약의 성경구절의 예언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은 교만한 지도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지도자들인 건축자들은 이 돌이 쓸모 없다고 버립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지을 성전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재료라 생각하고 버렸습니다. 건축자들은 성전을 짓는 최고의 기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최고의 기술자들이 보기에 성전은 튼튼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한 재료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절 2절 “여기에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건축자들이 건축한 이 성전은 로마 군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처럼 벽돌 하나도 남김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전만이 존재할 뿐 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옮겨 다닐 수 없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성전이 되어 어디든 옮겨 다닙니다. 여기도 저기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이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성전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건축공사에서 제일 먼저 놓이는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이 돌은 건축하고자 하는 벽의 방향과 길을 결정해 주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린 돌이 되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성전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머릿돌 위에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따르고 믿고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행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 삶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 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다시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그 믿는 사람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여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기적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인생이 풍요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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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달콤한 소통(사도행전 5장 38절에서 42절)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전에는 두려워하고 절망하면서 다락방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세주라고 목소리 높여 선포하기 시작했고, 앉은뱅이나 눈이 먼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소리를 높여서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개해서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원로답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번 보아왔듯이 제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하나님께서 곧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좀 두고 보자. 이렇게 제자들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을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옥되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채찍 맞고 걸어 나오는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편해졌을 때 망합니다. 신앙은 마침내 부활이요 승리지만 그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행복·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고난을 생략하면 기독교는 망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가는 것이 전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일만 되면 일을 시키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뚫고 교회 나오는 것은 매주 전쟁이었습니다. 때로는 빗자루로 얻어맞고 여성들은 머리도 막 잘리면서도 교회에 갔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신앙이 진짜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교회 가는 것 때문에 아무런 고난이 없습니다. 다 편합니다. 교회에 와도 목회자가 쓴소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 나올까 봐. 결국, 희생이나 헌신 없이 달콤한 열매만 추구하게 되면 그 신앙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움직여지고 선교 공동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성도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정상적입니다. 너무 합리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시간과 건강과 노동과 물질을 드리면 나는 당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돈 쓸 곳이 여러 군데인데 못 쓰니 고통입니다. 근데 그 고통을 기뻐하게 된다는 것은 거룩한 중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어떤 고통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전통입니다. 이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달콤한 고통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주민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2-05
  • [금주의말씀] 교회에서 찾을 영광
       신학교 재학 시절, 캠퍼스 안에 기숙하고 있던 학생들과 ‘뉴욕 곰탕집’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신학교로 돌아오면서, 차 안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드셨어요?” 모두들 잘 먹었다고 하는데 한 학생만 “아니요!”라고 답을 합니다. “왜?” 되물었더니, “짜장면이 맛이 없어요” “아니, 곰탕집에 갔으면, 곰탕을 먹어야지, 짜장면을 먹고 맛이 없다고?”하며 모두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썼던 C.S 루이스는 크리스천으로 회심을 한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교회에 대한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만큼이나 교회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의식에서 시작 된 것으로 신경이 무척 쓰이는 ‘같이하기’ 행사였다”고 하며,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개인적인 탐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크리스천의 삶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인간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여, 어디에 속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교회 안에 분명한 표징을 두었다.” 그러면, 교회에만 있는 그 무엇, 교회에서 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2c-3절 말씀처럼,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변형’(transfigured)의 뜻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사회의 상황과 각자의 생활 속에 바쁘게 살면서, 예수님도 그 모든 영향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마음과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모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4-6절 말씀처럼, 성경 속의 인물·사건·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7절에서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은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광된 체험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입니까? 변화 산 자체가 특별하고, 유명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변화 산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영광 된 교회입니다.   또한 2절에 ‘따로’, ‘높은’, ‘올라가셨더니’의 단어처럼, 우리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를 특별히 구별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 나를 따로 구별하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또 8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현실에 충실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된 변화 산과 교회에서, 생활 현실로 돌아와 충실 하십시오. 내 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맛을 보았으면, 그 힘으로 내 삶이 영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세상에서, 일상생활에서 그 영광의 능력을 발휘하시길 축원합니다./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30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시기와 우연이 있는 인생(전도서 9장 11절)
    전도서 9장 11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시기’는 성경에 ‘에트’라고 하며, 이는 ‘어두움의 시간’을 말한다. ‘우연’은 성경에 ‘페가’라고 하며, 이는 ‘충돌’을 말한다. 인생에 있어서 어둠 속에서의 충돌을 말씀한 것인데, 둘 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서 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이것을 주관치 못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전도서 9장 12절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이 세상은 사람의 힘보다 월등한 ‘큰 임금’이 있어서 이 죄인 된 세상에 매우 견고한 ‘흉벽’을 쌓아 놓은 것을 말씀하셨다.   전도서 9장 14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라고 기록됐다. ‘흉벽’이란, 성경에 ‘마쪼드’라 하며 이는 ‘짐승’을 잡기 위해 펼쳐 놓은 ‘그물’이란 것과, 전쟁에서 사용하는 군수용의 뜻도 있어서 그 견고함이 매우 강하다. 그 누구도 이 흉벽에 잡히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때에 성읍의 한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이 성읍을 구했으나, 이 사람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전도서 9장 15절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됐는데 이 멸망당할 성읍을 구한 가난한 지혜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자기의 공의를 베푸시사 우리를 자녀삼아 그 멸망의 흉벽과 상관없게 해 주신 것이다.   2021년 올해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분들이 이 불행한 흉벽에서 자유하고, 시기와 우연이, 어둠 속에서의 충돌이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전도서 9장 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절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참된 지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동안 사람들 사이를 거니시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어 많은 이들에게 변화를 이끌어내셨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같이 사회적인 입지가 공고한 이들에겐 변화가 미미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 예수의 말씀은 빈자의 지혜로 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기에 스스로 참된 지혜자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호통을 치는 우매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 가치로 말씀을 판단하지 않고 참된 지혜를 전하는 지혜자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대한예수교오순절성회 총회장·만수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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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4
  • 익숙함에서 탈출하라 (요한복음 2장 13~17절)
      심리학 용어 중에 ‘지식의 저주’가 있다. 지식의 저주란,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전하면 상대방도 100% 이해할 거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심리학 박사인 엘리자베스 뉴튼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의 저주는 누구도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이가 가지고 있다.” ‘지식의 저주’는 한마디로 익숙함에서 온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남에게도 익숙할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낯섦과 익숙함이 교차한다. 낯섦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으로 변한다.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도자기 만드는 것을 처음배우는 사람에게 도자기를 빚고 굽는 모든 것은 낯설다. 시간이 지나 도자기 만드는 실력이 늘어서 처음 가졌던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맛은 어떤 맛일까? 어머니의 손맛 아닐까? 그런데 과연 어머니가 해준 것이 제일 맛날까? 물론 음식을 정말 잘하시는 어머니셨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손맛이 최고의 맛으로 느끼는 것은 익숙함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해준 음식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편안함을 준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하지만 익숙함은 우리를 나태하게 만든다. 안일주의에 빠지게 한다. 안주하게 한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잊어버린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어서 채찍을 들고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과 상을 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은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변화하기 위해서다. 성장하기 위해서다. 익숙함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성장할 수 없다.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목사는 〈그대 느려도 좋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겨운 나를 만나고 쉽지 않다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나를 새롭게 하려면 나를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익숙한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밀어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을 두려워하는 나를 이겨야 한다.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지 않는 생명은 이미 죽은 것과 같다”   이규현목사는 나를 새롭게 하려면 나를 낯설게 만들라고 한다. 익숙한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밀어내라고 한다. 익숙함과 결별을 두려워하는 나를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익숙함과 결별해야 한다.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한다. 신앙에는 됐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그냥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에다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 데일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내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가만 들고 있으면 바람개비는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바람개비를 잡고 달리면 그 속에 바람이 일어나 바람개비는 돌아가게 된다. 익숙함을 탈출하는 것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을 써야 한다. 가만히 있는 다고 익숙함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개비를 잡고 달려가는 용기를 내야 한다. 믿음의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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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3
  • ‘없음’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하라(사도행전 3장 1~10절)
      이 세상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에 반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도 사람이 있다. 사람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비교의식 때문이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나 형제나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결국 열등감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에 주목하면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 것을 주목하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자오스린의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왜 항상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오스린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정곡을 찌르고 있다. 자오스린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남보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해진 기도시간인 제 구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 이들은 본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지체장애인은 한 푼 얻을까하여 구걸했다. 베드로는 지체장애인에게 자신을 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장 6절)   베드로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을 생각했다. 주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생각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의 이름’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큰 능력이다. 세상 사람들은 은금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권력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지식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세상이 말하는 능력으로는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한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장애인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내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생각할 때 많다. 하나님 앞에 없는 것을 핑계 되며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온갖 핑계를 다 되면서 응할 수 없다고 한다. 보낼만한 자라를 보내라고 한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애굽기 4장 2절)고 물으신다. 모세의 손에는 양을 치던 지팡이가 있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신다.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다시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 뱀은 지팡이로 변했다. 모세는 자신의 ‘없음’을 핑계 삼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였다.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들린 것은 양을 치는 지팡이였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 세계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가운데 우리는 ‘없음’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없는 것 빼고 다 가진 사람이다. 있는 것 빼고 다 없는 사람이다. 어디를 주목하느냐는 우리의 몫이다. ‘없음’에 주목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좌절하게 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건강이 약한데 건강에만 집착하면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있음’에 주목하면 만족할 수 있다. 감사할 수 있다. ‘없음’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하기를 축복한다./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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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 디도서 1장 12~16절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은 마치 디도서에 기록된 그레데인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레데인 선지자는 자기 동족에 대해서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로 살고 있고, 악한 짐승처럼 잔인하게 살고 있으며, 성실하게 일하기보다는 자기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레데인들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 시대 악한 사람들의 삶 가운데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지금 세상은 악한 거짓말쟁이들이 뿌리는 가짜뉴스로 인해서 혼란 가운데 있다. 거짓말쟁이는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그것을 사실로 알도록 왜곡하는 사람이다. 오늘 스마트폰 영상시대가 도래하면서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공공의 선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활용되면 참 좋을 텐데,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얻기 위한 악의적인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어 문제이다. 우리는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짜뉴스인데도 진짜처럼 미화되고, 진짜뉴스인데도 가짜처럼 왜곡하기 때문이다. 진짜뉴스를 가려내려는 진실함의 열정보다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가 기준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가짜뉴스가 진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삶의 최선이라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고난의 심연 가운데 있다. 밀림의 야수들은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고 생존하지만,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를 않는다. 배가 고프면 잡아먹고, 배가 부르면 더 잡겠다는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야수들은 나중에 배가 고플 것을 대비해서 미리 잡아놓는 법이 없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은 먹고사는 충분한 환경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비축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 악한 짐승보다 더 잔인한 셈이다.   바울은 그레데인들의 실상을 증언한 그레데인 선지자의 말이 참되다고 말하면서,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충고하고 있다. 만일 디도가 그레데인처럼 악하게 살고 있었다면, 바울이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꾸짖으라고 했을까? 디도의 악이 악한 사람들의 악과 별 차이가 없었다면, 아니 디도의 악이 오히려 더 컸다고 하면, 바울은 디도를 먼저 꾸짖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디도는 분명 악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단단히 꾸짖으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우리는 분명 세상의 악한 사람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어야 할 텐데, 그리 자신 없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정에 머물지 않는다. 믿음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자매라는 것,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형제자매인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이때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분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연세의료원 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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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7
  •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자 - 창세기 37장 1~11절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 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위해 저희들 오래 참고 있었네”(찬송가 373장)   세상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자부심의 근거와 존재 의미를 느끼게 되며 자랑스럽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교인들입니다. 죄인으로 목적도 정함도 없이 정처 없이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하루살이 같고 벌레 같은 우리를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천국의 후사가 되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어디서 찾아보겠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을 수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들 이어야 하느냐 하면…… 믿음의 선진 요셉의 생애를 통해 은혜되기를 소원한다.   첫째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야곱의 아들로 태어난 요셉은 어려서부터 형들의 시기와 질투의 희생물이 되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13년 동안이나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의 신뢰를 얻어 집안 전체의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는 가정 총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주인마님의 유혹을 받았으나 뿌리치고 오히려 억울하게 성폭행범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랑하셔서 고난 가운데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돌보셨다. 이처럼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가 고난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난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켰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들도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끝까지 굳건히 지켜나가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로마서 4장 5절, 히브리서 11장 5절).   둘째 믿음으로 행함의 사람이어야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그의 말씀대로 살기에 힘썼던 사람이었다. 그는 육체의 정욕과 물질의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강한 유혹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결코 범죄 하지 않겠다는 굳센 믿음으로 죄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의롭게 사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요셉의 믿음을 행함으로 지키는 것을 보시고 그를 사랑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인들도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신명기 6장 2절, 야고보서 2장 25~26절).   셋째 믿음으로 복음전파의 사람이어야 한다. 요셉은 믿음과 행함을 통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항상 그와 함께하심을 나타냈다. 요셉은 옥에 갇힌 죄수들에게나 심지어 지엄한 바로 왕 앞에서도 권능의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요셉을 사랑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땅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어지는 기회를 살려 복음을 전하는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로마서 10장 15절, 고린도전서 9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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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5
  •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다 - 고린도후서 1장 8~11절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마침내 아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아들아! 힘을 내거라. 머지않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다시금 길을 갔다. 이게 웬일인가? 사막 한가운데 무덤이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보자 아들은 절망 가운데 주저앉았다. “보세요, 아버지! 이 사람도 우리처럼 가다가 죽은 거예요. 가다 죽으나 여기서 앉아 죽으나 마찬가지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아들아, 여기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동네가 멀지 않았다는 증거란다. 힘을 내거라”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마을이 나타났고, 거기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사막의 무덤’과 같은 혹독한 시련을 만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사막의 무덤’ 가운데서 아버지처럼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들처럼 절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의 무덤’을 만날 때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절망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도 할 때가 있다. 코로나19라는 상황이 많은 사람들을 절망 가운데 몰아넣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가운데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절망을 하는 것일까?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려운 상황이 계속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은 무수한 끝에서 시작을 반복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끝은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또 다른 출발점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시기 전 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다. 우리의 끝은 또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희망의 시작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린도후서 1장 8~9절)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바울에게 왜 하나님은 이런 환난을 주시는 것일까? 왜 이런 절망을 주시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희망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무능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 앞에 절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절망은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한다. 자신의 무능함이 증명되었다면 그 무능함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출발한다. 하나님의 향한 믿음의 출발이 희망의 시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들은 절망 속에 희망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믿는다고 할지라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절망이 절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바로 절망이다.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절망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 시작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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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0-09-16
  • 코로나 극복을 위해 힘써 기도하자 - 사무엘하 24장 18~25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지금 전례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확진자 한 사람을 치료하는데 거의 5천만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여기에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해 수많은 의료인들이 고생과 수고를 다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삼복더위에도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한다.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마스크는 이제 일상이 돼버렸다.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이렇게 우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다. 다윗왕이 이스라엘의 인수조사를 실시했다.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인구조사는 통치의 기본이다. 정확한 인구를 알아야 군인도 뽑고, 세금도 부과할 수 있는 것이다.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했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윗왕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불신하는 조치였다. 다윗은 스스로 이를 깨달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결국 전염병이 내려졌고, 죽은 자가 7만이나 되었다. 방역이나 소독의 개념이 없었던 고대시대에 전염병은 많은 사람에게 혹독한 공포의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재앙이다. 전염병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어떻게 했냐는 것이다. 다윗은 선지가 갓이 명한대로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성경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절)고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 재앙 앞에서 우리는 다윗과 같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먼저 방역의 최전선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하자.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전신 방역복을 입고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의 노력에 우리는 정말 감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을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고 응원해야 한다. 병원과 의료체계는 일반은총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국가와 정치시스템을 통해 사회를 통치하게 하신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병원과 의료시스템을 통해서 병을 막고 사회와 개인의 건상을 유지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하면서 병원에 가 치료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최전선에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일부 교회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길 위해 기도해야 한다. 어떤 교회처럼 국가의 방역체계에 도전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기도하면서 행동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지는 것이다. 힘을 다해 코로나 극복을 위해 기도하자. /목포서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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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1
  • 영적지도자는 단순해야 한다 - 창세기 14장 1~16절
      삶이 단순해야 한다. 삶에서 가장 단순해야 할 것은 생각이다. 생각이 단순해야 삶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의 시작은 지금이다. 곧 지금을 말하는 오늘 하루다.   생각이 단순해야 한다. 삶이 단순해야 한다. 하루가 단순해야 한다. 무엇보다 단순해야 할 것은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이 단순할 때 하나님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럼 단순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만을 사랑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단순함이 답이다. 단순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복잡해지는 순간 세상에 눈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삶이 단순하다.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 왕 등, 네 왕에게 잡혀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카 롯을 구하려 전쟁터로 갔다. 아브라함이 단순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롯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람은 때론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바보가 아니다. 사랑의 마음이 클 뿐이다. 사랑하면 단순해진다. 한 사람만 본다. 사랑할까와 사랑하지 말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 사랑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아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결혼하기로 결정했는데 진짜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남자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나가를 고민했다. 그 때 깨달았다. 복잡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복잡하다는 것은 갈등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 대신 혼란만 가중된다.   삶은 단순해야 한다. 신앙생활도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답을 찾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세운 다윗 왕도 단순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발생하자 단순하게 하나님만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만 찾았다. 단순한 사람이 다윗이 한 고백이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편 16편 1절)   지진이 발생하면 단순해진다. 살길만 찾았다. 난생처음 오사카 전철역에서 지진을 경험했다. 그때 사람들 행동은 단순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건물 밖으로 뛰었다. 나도 따라 뛰었다. 살기 위해 단순해졌다.   불이 나도 마찬가지다. 불난 곳에서 피해야 한다. 불이 없는 곳으로 뛰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전염에 취약해졌다. 전염에 강해지려면 단순해야 한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한다. 마스크를 쓸까 말까를 고민하면 안 된다.   가장 단순해야 할 사람은 영적 지도자다. 예수님, 아브라함과 바울과 같은 영적 지도자는 단순하다. 그들이 단순한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단순함이다.   영적 지도자인 아브라함이 롯을 살리는 것에 단순했다. 예수님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에 단순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망설임 없이 택했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한 헌신에 단순했다. 하나님을 위해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장 31절)고 했다.   찰스 두히그는 〈1등의 습관〉에서 ‘탁월한 팀들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훌륭한 팀을 만드는 것은 팀원이 아니라 ‘규범’이란 것이다. 훌륭한 팀은 규범이 있듯이, 영적 지도자는 지침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지침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 한 분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과 연결통로인 말씀으로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하게 사랑하신다. 오늘 하루의 삶, 단순하게 살았는가란 질문에 ‘예!’ 라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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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1
  • 헤세드 : 하나님의 사랑 - 로마서 8장 28절
      8월 15일 0시를 기준으로 전 세계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는 약 1,174만 명, 사망자는 54만 명을 넘었다. 우리나라도 코로나의 재확산이 심상치 않다. 여러 나라에서 이미 예를 갖춘 경건한 장례식은 옛일이 되었다. 생명의 허망함과 덧없음이 무겁게 공기를 짓누른다. 지금은 슬픔과 불안과 상실의 시대이다. 기도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명령만 하시면 고통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것은[코로나바이러스는] 어느 날... 기적처럼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요행을 바라는 것 같다. 순진한 신앙이다. 하지만 성서의 신앙은 맹목적 확신이 아니다. 막연한 기대도 아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과 악 속에서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본문 말씀과 같이 하나의 주술로 오해되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고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바울이 처음 한 말이 아니다.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스토아 철학 사상가인 플루타르코스의 말이다. 그가 이 말을 처음 했을 때 그 안에는 기계적 낙관주의가 숨어 있었다. 이 말은 본래 스토아 철학가들이 세상의 악을 설명하려고 고안한 말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또 개개인의 좋아함이나 싫어함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이성’의 작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불행이나 악도 결국은 보편적으로 선한 명분에 봉사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바울이 반대했다. 바울은 만물 속에서 역사하면서 선한 결과를 지향하는 존재는 보편적 이성이라는 우주적 원리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구절에서 참 주어는 ‘모든 것’(panta)이 아니다. ‘합력하다’(synergei)라는 동사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모든 것’은 오히려 목적어이다. 이 구절의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 역사하여 선을 이루어가신다’이다. 세상 사물과 일들이 이렇게 저렇게 서로 조화를 이루어 요행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섭리와 의지 속에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오늘 부른 개회 찬송가 66장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독일 개신교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인 좥다 감사드리세좦는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 중에 마르틴 린카르트목사가 기도 시로 작사한 것이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여기서 말하는 ‘옛날부터 주신 복, 이제와 영원히 선물로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이 바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헤세드이다. 이제는 변치 않으시는 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말로 할 수 없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소망은 다른 구원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다.  /이화대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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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1
  • 이 시대 쓰임을 받으라 - 사도행전 3장 1~10절
      21세기는 영성이 강한 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하늘의 능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성령 충만하면 말에도, 찬양에도, 기도에도, 사역에도 능력이 나타난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큰 능력이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오늘 우리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본다. 그는 40여년을 한 번도 일어나 걸어보지 못했다. 나면서부터 서서 걷지 못하는 사람(사도행전 3장 2~3절)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는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의 표본이다. 서서 걷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다. 노동력이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래서 구걸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희망, 기쁨, 은혜, 사랑, 기적,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사도행전 3장 6~7절). 누가 40여 년간 한 번도 서지 못하는, 누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쳤는가? 베드로와 요한인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도구였고, 그를 일으켜 세워 뛰고 달리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답이시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쓰임 받는 존재로 바꾸신다. 예수님은 죄가 많아 쓰임 받지 못하던 수가성 여인을 크게 쓰임 받는 전도자로 세우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미움의 대상이었던 삭개오를 귀히 쓰임 받는 사람으로 바꾸셨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인 무디는 가난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 성경을 읽기도 힘들었고, 말도 어눌한 구두 수선공이었다. 그런 그가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들에게 짐만 되었던 40년 된 병자를 예수님은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만드셨다.   로렌 커닝 햄 박사는 1971년 국제 전도단의 설립자이다. 그런데 그가 21세기에는 한국을 쓰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국에 왔다. 한국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한국 기독교 인구가 겨우 250 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였다. 경제적인 어려운 나라가 어떻게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까? 1996년 25년만에 다시 한국에 와서 놀랐다. 경제적인 발전과 일천만 기독교인들은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역사의 소망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나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이들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천문학자들은 높은 언덕에 있어도 하늘에 그의 시선이 있다. 항해사는 바다에서 항구에 그의 시선이 있다. 천국을 향해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요,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한 사람이 바뀌면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사람인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심으로써 변화되어 가정, 직장, 사회,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쓰임 받는 사람으로 영광돌리시기 바란다./파주시교회시협의회 회장,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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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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