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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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하나님나라 신학과 한국교회 ③
    김형국 목사 행정 조직적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적 교회구조로 전향 필요    만인제사장주의가희석화된것은교회가하나님나라사상을잃었기때문이다.그결과로평신도와 목회자라는구분은평신도와사제라는구교적분리에서크게다르지않게한국교회안에자리를잡고있다.사역자가부르심을받아교회를세우는일에전적으로헌신한일군으로서전문성도있고 그필요성도있지만,사역자가일반성도들보다우월하지도않고,교회를세우는일에사역자의역할과성도의역할이동등 되게있음에도불구하고,성도들은평신도로서사역자를기껏해야보조하는 모습으로전락했다.   한국교회는우리모든성도가하나님나라의백성이며,그하나님나라백성가운데어떠한위계도있지않다는사실을신학적으로정돈해야한다.이는유교적위계질서를하나님의권위와동일시한많은한국교회로서는매우어려운과제이다.그러나이제라도교회를세우고,교회사역을감당하는일에있어서성도의일반적역할과사역자들만이담당해야할전문성이정리되어야한다. 성경은다만 자비량또는타인 또는공동체의후원을받으며전적으로사역을하는사역자가있음을보여주고있는데,그들은성도들보다우월한것이아니라,부르심을따라성도를세우고,성도들이교회를세우게한다고말한다(엡4:12-13).   교회를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자들의공동체라고볼때,교회속에서성도와 사역자의역할을하나님나라의관점에서정립하고실행하는일이시급하다.현재의상태를지속한다면, 하나님나라가드러나는교회보다는일반종교에서보이는사제와일반성도의구분이개신교속에서도그대로보여,하나님나라 운동공동체로서의교회의모습은전혀부각되지않고,하나님나라가갖는급진성역시약화될것이다.뿐만 아니라,하나님께서성도하나하나에게주신잠재력이 그대로 사장되어버리고,교회공동체는교회의최고지도자인목사의한계를넘어서지못해서,하나님나라의운동성은교회라는조직속에갇혀버리고결국사장되어버릴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이땅에오심으로말미암아하나님나라가시작되었고,그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 사람들의공동체가바로교회라는신약성경의가르침은로마가원시기독교를합병한이후로천년이넘는세월동안왜곡되었다.교회는종교기관과조직이되어버렸다.이러한문제를극복하기위한공동체운동들이구교속에서도일어났지만,구교의전체적인흐름을주도한것은정치조직화된 기관으로서의카톨릭교회였다.종교개혁은만인제사장주의등을내세워새로운출발점을만들었으나,불행하게도이렇게정치조직화된교회의모습의한계를극복하는일을완성하지는못하였다.   대부분의개신교는구교가가지고있던교회론에 약간의수정을가하였지고세월이지나가면서종교개혁의정신이승화발전시키기보다는구교의큰틀에서벗어나지못했다.위에서살핀평신도와사역자를나누는구분이이러한변혁하지못한구교의대표적전통이라고할수있다.개신교는다양한교파가생겨나고,그교파는교파나름의조직을위해서교단을형성하고그교단내에서는중립적인의미의정치가있을수밖에없었다.그러나 결국세월이지나면서,개신교의대부분의교단과그교단에속한교회는삶의현장에서사랑을주고받으며살아가는공동체적성격보다는종교조직으로서정치적구조를갖춘기관으로전락하였다.                                                                                                                                                          / 하나님나라복음DNA네트워크 대표, 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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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신학]마틴루터의 경제 이야기
    김현관 교수   경제 우선주의는 기독교 공동체성을 약화시킨다.       마이클센델(하버드대 철학)과 장하준교수(케임브리지대 경제학)는 각자 다른 학문적 관점에서 오늘날의 경제 체제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장 지상주의는 공동체성을 약화 시키고, 공동선의 추구를 좌절시키며 복지국가의 이상향을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더 나은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경제 성장논리에 충실한 체제가 아니라, 가난한 자의 필요를 돌아보며 공동체의 복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분배 논리에 충실한 체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에, 16세기의 경제적 상황에서 루터가 보여준 경제관은 오늘날의 교회에게 분명한 교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루터의 경제관은 우선, 경제정의와 공동체 경제 윤리를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을 경제 인식 원리로 가지고 있기에,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패러다임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윤리적 기반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바른 경제적 실천 원리로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제시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신앙과 이웃 사랑이 통일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각자가 자발적인 동기로 서로를 섬기는 사랑을 통하여서, 경제적 약자의 필요가 충족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상적인 성경적 실천 원리들을 제시함과 동시에 냉철한 현실 인식도 가지고 있었기에, 두 왕국론에 근거한 세속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오른손과 왼손이 조화롭게 세상을 통치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기에 복음으로 치리해야 할 사적인 영역과 법과 무력으로 통제해야 할 공적인 영역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고, 정부차원에서 행해져야 할 합리적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경제관의 원리들은 그의 자선관과 동일한 접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 안에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루터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는 종교개혁의 초기부터 경제적 약자를 돌아볼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이웃 사랑이 접합을 이룰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지점이었다. 또한 그는 분명한 마음의 동기로 자선을 행해야 할 것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중세의 시혜적 자선사상을 타파하고,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이웃 사랑에 의한 자선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선의 문제를 개혁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두 왕국론 사상은 정부 차원에서의 구제 시스템 개혁과 관계법령의 제정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루터의 자선관은 개인적이고 교회 중심적인 자선 행동의 차원에서 공적이고,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사회복지 제도로의 변경을 가져왔으며 이웃사랑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랑의 확고한 제도화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루터의 복지 원칙과 영향은 16세기의 중앙화된 빈자구호를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즉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에서 루의 사고를 종교 개혁과 함께 받아들였다. 홍주민교수(디아코니아대)는 서로 간의 역사의 다양성 때문에, 이들 각 나라에 관해 통일된 디아코니아적 모델을 말할 수는 없지만,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사회복지 국가를 형성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 서울한영대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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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신학] 하나님나라 신학과 한국교회 2
    김형국목사   전도는 교회에 사람들을 유입시키기 위해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행사활동으로 전락    교회가 더 이상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그래서 회심자의 숫자가 거의 없다 시피하는 현상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복음전도가 가져온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이다. 현실의 삶속에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 보다 죽은 후에 간다는 천당에 집중된 이러한 전도는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불편하게 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기독교 외에도 택할 수 있는 정신적 종교적 대안들이 다양해진 현대 문화 속에서 죽은 후에 천당을 간다는 복음전도는 전도자들의 열정과 자신감과 설득력을 잃게 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미 임했다는 선포이다.    예수께서 메시야로 이 깨어진 세상을 방문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 인류에게 선명하게 전달해 주었고,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메시야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셨고, 이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초청하고 계시다는 선포인 것이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미 임했다는 선포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영혼을 얻는 사역을 넘어서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막1;15)라는 선언이다. 이러한 선언은 듣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현재의 삶의 모습을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선명하게 갖지 않는 목회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불신자를 만나 복음을 전하는 일이 거의 사라져 버린 목회자들도 많다. 결국 전도는 교회에 사람들을 유입시키기 위해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행사활동으로 전락해 버렸다. 목회자들은 복음의 최전선에 서 있는 전도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치고, 전략을 수립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도 이벤트를 진행하는 관리자의 위치에 거한다.    종교개혁이 가르친 매우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가 ‘’만인 제사장주의‘이다. 곧 사제가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지 않고, 우리 모든 신자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우리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순종할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서로를 목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우리 모두가 함께 세워나간다는 가르침이다. 더 나아가 우리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들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드는 제사장이 되었다는 영광스러운 가르침이다. 만인이, 곧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되었다는 가르침은 구약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에게 사명을 주실 때부터 꿈꾸셨던 것으로 교회가 제사장 나라가 됨으로 완성된 것이다 (창12:1-2; 출19:6; 벧전2;9; 계1:6; 5:10).     모든 성도는 하나님나라 안에서 차별이 없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상속자, 곧 예수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대부분의 구성원인 성도가 배제되고 목회자 몇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 한계를 태생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 하나님나라복음네트워크DNA 대표, 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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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신학] 마틴루터의 경제 이야기 ⓶
    김현관   루터,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이어야 한다     루터가 살았던 15세기 말과 16세기는 그전의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경제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시기로서, 현대자본주의는 이 시기 이후의 유럽의 경제 체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진정한 자본주의 생산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유입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필요를 충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자본이 축적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6세기부터였다. 해외무역과 상업의 증가, 그리고 그로 인한 화폐 경제의 발전은 루터가 살던 지역에도 새로운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만들어 냈다.     거대한 상업을 위해서는 자본축적이 필수적이었고 이를 위해 해외로부터 많은 양의 귀금속들이 유입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물가 상승을 야기했고, 그로인해 가장 피해를 본 계층은 바로 소작농들이었다. 그러나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당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지않고 고리대금을 금지했던 기존의 교회 입장을 선회하여 고리대금이 정당화 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 두었다. 은행가로부터 돈을 빌린 상인이 은행가에게 위험의 대가로 약간의 돈을 돌려주는 일은 굉장히 공정한 일이라고 교회는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공동체를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대칭사회’로 보았다. 교회는 세속적 신분들에 좋은 모범이 되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단지 고리대금업자들과만 연관시키지 않고, 교회가 교회로서 전체 사회의 악과 투쟁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정부를 향해서도 돈벌이에 열중하는 고리대금업자에 반대해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이제 “루터는 이자를 통해 자본을 확보하는 것이 더 이상 나쁜 일이나 죄가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덕이며, 명예로서 칭찬받는 세기적인 전환기에 대항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초기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빚어내는 사회 문제들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았다. 신학자로서, 그리고 성직자로서 루터는 성서에 근거한 경제정의와 공평성에 대하여 선지자적 목소리를 외친 것이다. 그의 비판의 창끝은 당시의 관행을 무비판적으로 순응해갔던 제도권 교회와 고리대금을 일삼았던 거대 상인집단들을 향해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이자를 통한 자본증식이 점점 정당화 되어가고 있었던 독일 사회 전체에 대한 규탄이었다. 중요한 것은 루터는 개혁의 초기부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분명하게 주장했다는 것이며 그의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을 넘어서, 철저히 사회 개혁적인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본 주제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루터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할 때, 단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으로만 접근하는 것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루터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정의와 공평성을 달성할 책임성을 정치적 권력에게로 돌린 것이다. 특별히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그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 차원에서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그는 교회는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서 사회 공동체 차원에서의 구제 시스템의 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루터와 그의 동료 칼슈타트로 인하여 비텐베르크 시는 1522년 예배 개혁과 사회보장이 법제화 되었으며, 이와 같은 개혁은 짧은 시간에 그와 비슷한 시도를 위한 모델이 되었다.                                                           / 서울한영대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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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5년 동안에 해외선교사 6천명 감소
    자료: 한국세계선교협의회 KWMA           현재 지구상 80억의 인구 중에 기독교인은 26억이다. 비율로는 32%에 다다른다. 나머지 54억의 인구는 이슬람 20억, 불교 5억 5천만, 힌두교가 10억 등 많은 타 종교인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를 볼 때 여전히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인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명령을 따라 선교사역에 계속 매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간 한국교회는 통계적으로, 국가의 인구에 비례해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들을 선교지에 파송해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활동들에 몇 가지 문제점들이 보인다.    양적인 선교서 질적 선교로 전환해야 할 대안 마련 절실   ◆코비드19로 인한 선교사 감소· 한국세계선교협의회(이사장=이규현목사)가 2023년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 파송 장기선교사는 총 169개국 22,204명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 통계는 동 단체의 2019년 통계인 28,039명과 비교하면 5년 정도 사이에 6천명 정도의 선교사 수가 줄었다는 결과를 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대표적인 이유는 코로나19가 그 원인이다. 이 기간을 지나며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 위기를 지나 많은 선교사들이 복귀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피해를 온전히 복구하고 있지 못하다.   ◆한국교회 성장세의 큰 하락 · 최근 한국기독교의 성장세는 가파른 하락을 보이고 있다.한국기독교목회자연구소는 한국사회의 탈종교화가 가속화되고, 개신교는 최악의 경우 10년 뒤엔 총인구의 10%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2017년 국민의 20%에 달하던 기독교 인구는 현재 15%까지 하락했다. 개신교인이 신앙을 포기하는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었다. 종교활동이 없는 사람들의 이전 종교는 개신교가 66%로 타종교에 비해 3배 이상 높게 나타났고,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도 30%로 나타났다. 이러한 기독교 전체의 상황은 선교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교회의 축소는 곧 선교지에 대한 물질적, 인적 지원감축으로 이어지고, 약화된 지원에 견딜 수 없는 선교사들은 사역에서 철수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많은 교회에서 최근 십 수년간 나타나고 있다.   ◆ 청년층 선교사들의 부재 심각 · 또 청소년과 청년층의 선교지원자가 감소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 장기 선교사의 연령 분포를 살펴보면 50대 이상이 전체 선교사의 65%를 차지하고 30대 이하는 8%에 불과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한국기독교의 ‘선교자원 부흥의 시대’였다. 특히 선교단체들이 십대와 이십대를 대상으로 펼친, 활발한 선교동원 행사에서 많은 선교자원이 배출되었다. 또 한국경제의 성장 맞물려 교회들의 단기 선교여행이 보편화되며 많은 선교사들이 배출되었다. 지금 활동하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 당시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전체적인 성장 하락세에 있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계층이 젊은 층이 되었다. 다음세대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 세대에서 선교지원자를 배출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지금의 한국교회 선교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문제가 된다. 여러 방향의 논의가 진행 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부터 접근해서 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효과적인 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젊은 선교사를 미충원시 20년후 선교사 65% 감소 위기   ◆양적선교에서 질적선교로 전환 절실 · 한국세계선교협의회 강대흥사무총장은 양적인 선교보다 질적인 선교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숫자 중심으로 선교사 파송을 목표로 삼는 등의 일은 코로나19를 거치며 비관적으로 여겨졌고, 현장의 선교사들로부터도 목표 숫자에 집착한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며, “양적선교에서 내실이 있는 질적선교로 한국교회 선교의 궤도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궤도를 수정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이미 선교지에 세워진 많은 교회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들을 더 강화하고 이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국가 다른 지역에 선교사를 보내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도록 자립시키는 일이다. 더 이상 몇 개의 나라에 몇 개의 교회를 세웠다는 식의 ‘홍보성 뉴스레터’는 필요하지 않다. ◆ 다음세대에 맞는 선교지원 노력 필요 · 또 십대와 청년세대에 적합한 선교지원이 필요하다. 한국선교연구원(원장=홍현철선교사)은 40대 이하의 젊은 선교사가 충원되지 않으면 ‘20년 뒤에는 선교사의 65%가 감소’될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령화에 대한 문제와 다음세대에 대한 고민과 투자는 과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는 ‘다음세대 선교동원’ 문제를 해결하고자 청년 사역 주체들과의 모임을 주선하고 있다. 캠퍼스 선교단체와 교회목사와의 만남, 그리고 학원복음화협의회와 함께 ‘청년 미래 선교 써밋’을 개최하기도 한다. 지난 해 한동대에서 열린 선교한국 대회도 참석자 1,400여 명 중 650명이 선교지 파송을 약속했다. 젊은 선교자원들이 해외 선교지 소재 대학에 유학을 가도록 돕고, 각자의 전공대로 현지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선교사로 쓰임 받도록 하는 청년 맞춤형 선교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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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1
  • [신학] 마틴루터의 경제 이야기 ①
      김현관 교수   신자유주의경제 질서가 역사적으로 양산해 내고 있는 일련의 폐해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체제는 성장 한계점에 도달한 세계 경제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단기간에 걸친 급속한 경제 성장과 두 차례에 걸친 금융위기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출한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 논리가 가장 잘 설명되는 모범국의 예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경제신학자 울리히 두크로교수는 그의 책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 한국의 경제적 상승은 전혀 자유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상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그들이 말하는 자유하다는 개념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경제적인 자유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에게 경제적 구속과 부자유스러움을 갖게 한다. 시간이 갈수록 빈부의 큰 격차를 가져오게 되며 또한 이익 추구가, 윤리적인 면죄부를 얻어, 당연스러운 경제목적으로 자리하면서 끝도 없는 탐욕과 성장, 발전이라는 이념에 개인의 삶을 함몰시킨다. 이것은 브레이크 없이 일반도로를 달리는 고장난 자동차와 같은 모습이다.   마틴루터가 말하는 기독교인의 경제관 이 글이 다루려고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에 대하여 비판을 한다거나 경제학적으로 유용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않다. 그러한 논의는 본 논문의 전개 범위를 벗어날뿐더러 자본주의 체제 내에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존재하는 한 적절한 경제 시스템 자체에 대한 대안은 규제와 자율의 양축을 기점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의 신학 논문으로서 본 논의가 우선적으로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부분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내는 경제적 현실을 대면하여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성서적 원리들을 그들의 삶 안에 녹여내야 할 것인가’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무엇보다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개개인이 거듭날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구속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우리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임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삶을 통해 모든 영역에서 악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세상에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기보다는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에 대하여 성서적 경제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책임감 있는 경제 주체자로서 속한 사회와 이웃을 섬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서적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공동체적인 삶을 모색해 낼 수 있는 신학과 실천원리들을 가지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체제가 만들어내는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와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문제들, 특별히 경제 논리에 적합하다는 미명 하에 소외되는 계층에 대하여 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본 글이 제시하고자 하는 답변은 ‘16세기 독일의 경제적 상황에서 루터가 보여준 경제 사상이 오늘날의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교훈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본 논의는 그 시기의 유럽에서 발생했던 급격한 변화에 대처한 루터의 대응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할 것이다. / 서울한영대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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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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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명준박사 ‘올해의 신학자’ 선정
      요한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가 선정한 올해의 신학자 선정 박윤선·신복윤·박형용 등의 개혁신학 영향 받아 조직신학 연구   지난 2020년 제 9회 ‘올해의 신학자’로서 선정되는 영광을 안은 안명준박사(한국장로교신학회회장, 평택대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회회장)는 2021년 더 열정적인 신학자로서의 삶과 학문을 준비하고 있다. 안박사는 “부족한 사람이 2020년 올해의 신학자 상을 받아 한편으로는 매우 기쁘고 한편으로는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며, “2021년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학문연구에 정진해서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좋은 유산을 남기고자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올해의 신학자 상은 요한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있다. 이 기념사업회는 2009년 6월 21일과 22일에 장 칼뱅(요한 칼빈)탄생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장로교 신학회, 한국칼빈학회, 한국개혁신학회가 공동으로 만든 기념사업회로 한국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목적으로 한다. 기념사업회는 매년 칼뱅과 개혁신학 연구에 공헌한 신학자를 선정하여 올해의 신학자 상을 수여한다. 2009년 제1회는 이양호박사, 2010년 제2회 권호덕박사, 2012년 제3회 이상규박사, 2013년 제4회 이승구박사, 2014년 제5회 오덕교박사, 2015년 제6회 이은선박사, 2017년 제7회 장세훈박사, 2018년 제8회 노영상박사가 선정되었다. 전반적으로 기념대회의 정신인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학문적 연구와 논의, 그리고 연합과 일치를 위한 대회였다로 평가되었다. 구체적인 연합과 일치를 위한 실천으로 지속적인 연구와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안명준박사는 독립운동가 안봉순선생의 손자이며,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교수이다.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2009년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기념사업회 실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전공과 연구분야는 조직신학, 칼빈신학, 그리고 간결성과 용이성의 방법으로 논문을 쓴 칼빈의 해석학이다. 한국교회와 해석학 관련 연구자이다.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학회지 《조직신학연구》의 편집위원장을 2002년 9월 19일 창간호 발행부터 2019년 8월 31일까지 맡았다. 개혁교회 종교개혁500주년기념대회의 공동대회장을 역임했다. 안박사는 서울 성도교회 출신으로 옥한흠목사, 장경두목사, 그리고 황성철교수, 방선기 박사, 그리고 박성수회장으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박윤선박사·신복윤박사·윤영탁박사·김명혁박사·박형용박사로부터 개혁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박윤선 박사의 제자인 숭신교회의 장인인 노윤석목사로 부터 목회적 훈련을 받았다.   안박사는 특히 평택대학교의 설립자인 피어선박사의 신학에 대한 권위자이다. 안박사는 “한국기독교의 어려움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거룩을 향한 영적운동으로서 기도의 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환란의 시기에서 A. T. 피어선박사가 주장하는 거룩성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며, “19세기의 위대한 목회자, 신학자이며 선교학자였던 피어선은 19세기에서 지난 반세기의 중요한 영적운동을 검토하였는데, 그 목적은 역사적 고찰보다는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 위한 적극적이며 발전적인 모습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피어선도 가끔 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오늘날의 의미와는 시대적으로 차이점과 강조점에 있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그가 즐겨 사용한 거룩성을 키워드로 택하였다”며, “그 거룩성은 종교적 개념적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삶과 기도와 구제와 선교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또 “피어선이 무엇보다 케직운동에 참여한 것은 거룩성을 향한 그의 영적운동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주도자인 강사로서 참여한 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가르쳐 주었으며 책을 통하여 후대 독자들까지 거룩한 운동의 중요성을 설파했다”며, “1889년 미국의 학생자원동에서 피어선은 영적운동을 세계 속으로 확장하기 위하여 유명한 표어를 제창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이 세대에 세계복음화이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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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 김남준목사 신작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김남준목사(좌)의 연구실 테라스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스승’ 아우구스티누스가 방문객을 맞아준다.(사진 우측은 김목사와 인터뷰한 C헤럴드 이사장 민찬기목사)   저자 삶을 바꾼 아우구스티누수 8문장을 치열하게 사색  감성적·회화적 문장으로 신앙의 진수를 천착하는 변증서   감성적인 문장과 감각적인 언어로 쓰인 기독교변증서가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저자는 목회자로, 학자와 교수로, 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남준목사(열린교회)이며, 그의 근원적인 사색에서 나온 책은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감영사, 2020.12.28.)이다. 부제는 ‘내 인생을 바꾼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덟 문장’으로 달려 있다. 위 문장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단순한 자전적 에세이가 아니라 ‘서양사상의 바다로 나가는 수문’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저자의 근원적이고 시대성찰적인 재해석이다. 저자는 “제가 읽은 그의 수십 권의 책들 중 깊은 감명을 주었던 여덟 문장을 골랐습니다. 그 여덟 문장을 사다리로 삼아 제 인생의 밤하늘에서 별을 따듯이 의미를 따왔습니다”고 고백한다.   8개의 문장 중 세 번째 “만일 지혜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를 보자. 여기서 저자는 먼저 하늘을 나는 갈매기를 가져온다. 그 갈매기는 저자가 고등학교 시절 감명 깊게 읽은 책 <갈매기의 꿈>으로 자유에 대한 메타포이다. “날아라! 날아라! 너의 자유는 비상이다.” 저자는 “철학, 기독교에 귀의한 내겐 액세서리였다”고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보며 “내 생각이 틀렸다. 그 철학은 이 철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생 과제는 하나였다. 그분을 찾아 가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 치열한 염원이 담긴 3부작으로 <고백록>은 “자기 인생을 통해”, <삼위일체>는 “인간 지성 안에서”, <신국론>은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간 발자국이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한 문장을 만난다.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저자의 사색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까지 확장된다. “운동하는 물체. 빛보다 빠르면 거리와 시간 모두 허수가 된단다. 그래서? 빛보다 빠른 물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단다. 어쩌라고? 아아, 그게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저자는 “묻는 건 철학이 해도 답은 사랑을 통해서 듣는다. 정신을 풀어주란다. 가장 높으신 분을 사랑하여 정신을 상승하게 하란다. 거기서 그 사랑으로 다시 하강하게 하란다”고 의미를 밝힌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아는 목사들이 얼마나 될까? 저자의 통찰은 BTS라는 이 시대의 가장 날카로운 문화마저 꿰뚫는다. “사랑을 찾을수록 외롭다. 무엇 때문일까? BTS의 에 몸이 흔들려도 마음은 외롭다. 왜 그럴까? 아, 그래, 그 사랑! 모조품은 땅에 있고, 진품은 하늘에 있다.” BTS를 아는 목사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저자는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의 한 아스라한 기억을 소환한다. 그러면서 “학교는 싫었지만 그 선생님은 좋았다. 가르쳐주는 건 다 배우고 싶었다”며, “선생님 사랑하면 그 과목 좋아하게 된다며? 그분을 사랑하면 우리는 무슨 과목 좋아하게 될까?”라며 의미심장은 질문을 던진다. 3번째 사색은 “깊은 밤. 바람 속에 벌써 겨울이 들어와 있다. 따뜻한 찻물이 끓는다. 뭘 마실까? 채깍 채깍 채깍”으로 끝을 맺는다.   저자 스스로 밝히듯이 이 책은 철두철미하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바탕을 둔 기독교변증서이다. 즉 C. S 루이스의 저 유명한 책 <순전한 기독교>와 같은 ‘과’이다.내용은 매우 깊다.  그러나 술술 읽힌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코어’를 감각적이고 회화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의 탁월한 기독교 변증서이자 안내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한 단락은 저자의 깊은 사색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유채색의 삶. 무채색의 죽음 위에 놓고 봐야 멋있다. 시간은 영원 위에서, 잠시 있을 건 항상 있는 것 아래에서 빛난다. 땅이 하늘 아래 있어 변화도 있는 거다. 사건은 땅에서 일어나고 의미는 하늘에서 주어진다.”   당연히 불신자에게 선물해도 좋다. 베토벤과 바흐와 같은 고전적 음악에서부터 비틀즈의 노래, 그리고 최신의 BTS와 또 가야금 산조까지 함께 들을 노래들이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연극 이야기부터 현대 영화를 망라하는 폭 넓은 문화의 향연도 곁들여 맛볼 수 있는 책이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재료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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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2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3)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눅 13:18-19)   (1)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예수는 겨자씨(the Mustard Seed)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는 갈릴리 지방에서 많이 자생하는 십자화과(科) 식물(눅13:19)의 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지극히 작은 것'(마17:20)의 대명사로 언급되나 성장하면 키가 4-5m나 되는 특징을 가진다. 겨자씨는 이처럼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씨다. 그 안에는 큰 나무가 들어 있다. 겉으로 볼 때 작아서 하찮은 것으로 보고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씨에서 싹이 나와서 줄기가 되고, 더 커서 가지가 되고, 더욱 크게 자라 큰 가지가 되고, 완숙하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 만한 거대한 겨자나무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 나라는 초라하다. 하나님 나라는 무식하고 사회적으로도 낮은 계층들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혀 크게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로마를 거쳐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겨자씨가 겨자나무가 되는 것처럼 되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등록 신자가 모두 참 신자라고 볼 수는 없다. 알곡(참) 신자와 가라지(명목) 신자가 모두 교회 안에 있으나, 이 구분은 종말에나 드러난다.   (2)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전 인류가 믿게 되는 공동체로서 묘사된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작은 아브라함의 가족과 영세(零細)한 12지파에서 시작되어 이스라엘 민족으로 확장되었다가 이스라엘의 배도와 귀양살이로 인해 남은 자들로 수렴되고 예수에게로 집중되었다. 예수로부터 다시 12제자, 120 제자들, 초대교회, 이방전도, 세계선교 등으로 거대한 공동체가 되었다. 나사렛 예수에서 시작한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신자를 가진 종교가 되었다. 신구교 합하여 2014년 기준으로 등록된 기독교인 수는 21억명 정도 된다. 한국에서는 2016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천3백5만명(개신교: 967만명, 천주교:389만명, 2015년 기준) 정도 된다. 한국에서 개신교 19.7%·불교 15.5%로 1995·2005년 순위가 바뀌어 불교에 첫 역전하여 개신교가 1위가 되었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계시를 통하여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을 보고 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6-27). 예수의 비유가 언급하는 겨자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이란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될 이방인들을 염두에 둔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모습과 거기에 속하게 될 이방인을 지시하고 있다.   4) 씨의 성장 비유(막 4: 26-29) (1) 하나님 나라는 씨가 자라 곡식 열매를 맺음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씨의 자람과 같다고 말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 26-29).   하나님 나라는 밭이라는 이 세상에서 씨앗으로 현존한다. 씨앗은 미래를 품은 현재다. 씨앗 안에는 장차 올 것이 숨겨져 있다. 씨앗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현재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으로 스스로 모든 의심과 염려를 물리치고 자란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결실한다. 씨가 뿌려져 싹이 나고 이삭을 맺듯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파되어 결신자를 만들고 이들이 성장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전파자가 된다.   (2)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씨)이 발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으로 하나님 나라 도래 시간을 계산하려고 하고,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율법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의 프로그램에 의한 인위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플로레타리아 독재라는 이상향을 당원들의 전략적 속임수와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실현하려다 70년 이데올로기 실험 가운데서 동구권 공산주의가 무너짐으로 실패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의 이상향을 추구하여, 생물학과 컴퓨터 공학과 인터넷 기술의 결합으로 인위적으로 도출하려고 하나 예기치 못한 여러가지 부작용이 도출되고 있다. 환경과 생태 오염과 파괴, 지구온난화, 인간의 소외, 부익부, 빈익빈 등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이상향 첨단기술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복음의 능력으로 실현된다. 하나님 나라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 복음의 말씀 전파와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심령 가운데서 먼저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공동체 가운데서 파편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그 자체가 가진 능력으로 역사의 추수 때를 가져 온다. 복음의 능력이란 예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의 사랑이다. 예수는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제자들에게 자신의 희생적 죽음을 예언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는 여기서 자신의 십자가 희생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 25-28).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한 알의 밀알로서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하여 그가 지실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심이라고 해석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과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계신다.   (3)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원리(희생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으심은 씨앗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십자가는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취를 결실한다. 죽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서로부터 많은 믿는 신자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심판자와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낫을 가지시고 알곡을 거두어 들이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 낫으로 추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계 14:14).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犧牲)제물(祭物)이 되신 예수는 최후의 심판 때는 흰보좌의 심판자로 나타나신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1-12). 흰 보좌 앞에 죽은 자들이 보좌에 펴진 생명책과 행위책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예수는 최종의 심판에서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나,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   5) 누룩 비유(마 13:33; 눅 13:20-21) (1)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누룩(Leaven)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빵을 구울 때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난 번에 빵을 굽고 남겨 놓았다가 띄운 반죽 한 조각을 뜸팡이로 썼다. 이런 식으로 누룩은 이스라엘의 집에 늘 비치되어 있어서 빵을 굽는 데 사용되었다. 누룩에는 퍼지는 성질이 있다. 이 퍼지는 성질로 인하여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게 하여 빵을 만들도록 한다.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에 퍼져 빵을 부풀게하는 누룩과 같다. 누룩은 발효를 통하여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 같이 변혁(transformation)을 야기한다. 이 변혁이란 복음의 능력에 의한 삶의 방식과 사고와 가치관의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자들은 선한 누룩이 되어 그가 속한 가정과 사회속에서 퍼지는 역할을 한다. 가정과 사회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한다. (2)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는 퍼져나가는 성질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죄로 인하여 죽은 인류가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속죄 공로를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한다. 예수의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를 설립하였고, 거기서 안디옥 교회로 전파되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세우고 희랍교회와 로마교회를 세우고 박해를 거치면서도 로마제국을 점령하여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그리고 서구사회로 퍼져나가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을 이루고 아프리카와 남미에 교회를 이루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아시아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오늘날 지구촌 오지(奧地)의 미지(未知)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이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지고 있다.   6) 밭에 감추어진 보물 비유(마 13:44) (1) 하나님 나라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발견하고 전 소유를 팔아 사는 자와 같다   예수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the Hidden Treasure)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하나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아서 그것은 발견하는 자만 그 밭의 가치를 아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었다. 그러나 그 보화의 가치는 숨겨져 있다. 그것의 가치를 발견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귀중한 것을 산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이 있다.   전도서 저자 솔로몬은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종교의 씨를 심어놓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성, 모든 사람들의 초청됨과 그 진정한 가치의 은폐성을 말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3-4). 이 구절에 의하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론적으로 주어지는 빛이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요 종교의 씨다. 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 어두움이란 세상 내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본성의 상태를 말한다. 부패한 인간은 자기에게 비쳐진 빛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복음 빛의 은폐성이다.   (2) 하나님 나라 보화(寶貨)를 발견한 자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를 구입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 보화가 있는 밭을 그냥 값어치가 없는 일반적인 땅으로 간주하고 지나쳐간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헤롯왕과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베들레헴에 탄생한 아기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 이들은 아기 예수 신분의 존귀성을 알기만 알았으나 그가 메시아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과 생모의 마리아만 예수가 메시아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예루살렘의 의인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그리고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과부된지 38년이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여 기도함으로 섬기다가” 아기 예수에 관하여 말하였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7-38). 시므온과 안나는 당시 마리아와 요셉 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아기 예수의 비밀을 성령의 조명 속에서 알고 이스라엘에 메시아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밭에 감추어진 보물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물과 성령으로 중생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한 자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산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감추인 밭을 자기의 전 소유를 팔아서 산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한 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소유를 모두 처분한다. 그리하고 이 밭을 사게 된다. 하나님 나라 보화는 밭에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발견하는 자만이 밭의 가치를 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항상 일상적인 삶 속에 감추어져 있다. 자연적인 눈을 가진 자에게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복음의 진리를 듣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여태까지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숨겨진 보화가 있는 밭을 산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우리가 가진 모두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모든 세상의 부귀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사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주기철, 손양원, 김관주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이 그들의 삶을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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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0
  • 종말론적 창조론-2
      “어린 양의 생명책”    “생명책”은 히브리어 ‘סֵּפֶר’를 바탕으로 하는 말이다. ‘סֵּפֶר’를 ‘싸파르’로 발음하면 ‘계산하다, 세다’는 뜻의 동사, 또는 왕의 계산을 담당하는 서기관 등의 명사로 쓰는 경우이다. 그리고 ‘쎄페르’로 발음하면 ‘기록된 것’ 또는 ‘책’이라는 명사로 쓰는 것이다. 전자의 예로는 창세기 15:5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뭇별처럼 번성하는 복을 주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데 쓰셨고, 서기관 등의 명사로는 역사서에서 많이 썼다. 후자의 의미로는 다윗이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시69:28) 등에서 ‘살아 있는’ 또는 ‘생명체들’을 의미하는 ‘하이욤’(חַיִּים)을 붙여서 ‘생명책’(סֵּפֶר חַיִּים, 세페르 하이욤)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스어로 쓴 신약성경에는 바울이 빌립보서 4:3에서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τα ονοματα εν βιβλω ζωης)고 말하면서 쓰고 있다.   요한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13:8)고 증언함으로써 창세 이후 살았던 사람들의 “생명책”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어린 양의”(του αρνιου) 것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창세 이래 인간들의 행위를 기록한 하나님의 책들은 모두 “어린 양의 생명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요한에 의하면 그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은 결국 죽었다가 둘째 부활에 살아나서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20:12) 흰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책”은 어떻게 기록되는 것일까?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생명책”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현대인들에게 “어린 양의 생명책”은 그렇게 기록된다고 이해되지 않는다. 현대 과학기술의 토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땅의 인간들보다 뒤떨어지는 방법으로 “생명책”을 기록하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이 다음 세대 컴퓨터로 개발 중인 양자 컴퓨터를 능가하는 초고성능 컴퓨터를 이미 만들어 사용하신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은 전 우주에 빛보다 빠른 온라인 정보통신망을 설치하여 땅에서 살았던 자들의 데이터를 “생명책” 파일에 실시간으로 모두 기록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서 살았던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가 아니라면, 마지막 심판의 날 둘째 부활에 찬여해서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자기 행위” 데이터가 하나님의 컴퓨터에 빠짐없이 기록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   둘째 부활의 심판대 앞에 서는 자의 “생명책” 데이터는 그곳에 설치되는 모니터에 사실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보게 되면, 어떤 누구도 “어린 양의 생명책”의 정확성과 공정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애곡하게 된다.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찌른 자도 둘째 부활의 심판에 참여해서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1:7), 그때 그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행위가 어떤 죄에 해당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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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9
  • 종말론적 창조론-1
      ‘생명책’의 중요성   베드로에 의하면 주 하나님이 “이제 하늘과 땅”을 “보존하여 두”신 것은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한 것이다(벧후3:7). 하나님은 “이제 하늘과 땅”을 불사르신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요한은 심판과 멸망의 날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5)고 썼다. 요한에 의하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했던 인간은 누구든지 둘째 부활에 참여해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때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생을 누린다(계21:3). 그렇다면 창세 이후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내준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20:12) “자기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에 모자란 자들이다.   과학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역시 우리가 거주하는 우주에 종말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빅뱅우주론에서 예측하는 우리우주의 두 가지 종말 가운데 어느 하나는 결국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우리우주가 열린 우주라면, 팽창을 계속하면서 온도가 떨어지다가 마침내 절대온도 0⁰이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때는 물질이 갈가리 부서지고 영원한 열적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우주가 어느 순간 팽창을 멈추고 닫힌 우주가 되면, 빅뱅 이전의 상태로 수축할 것이다. 그런 뒤에 다시 빅뱅이 일어날 수도 있다. 과학은 어떤 종말이 오더라도 수억 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우리우주의 종말이 그렇게 멀지 않았다고 본다.   요한에 의하면 우리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당장 오늘에도 종말의 심판을 진행하실 수 있다. 여기서 심판의 근거가 되는 “생명책”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각 사람의 “자기행위”를 기록한 데이터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생명책” 데이터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와 “불못에 던져” 불살라질 자를 판정하는 근거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둘째 부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얻느냐, 얻지 못 하는냐는 오직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행위”에 달려 있다. “자기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물론, 사망과 음부까지도 불못에 던져진다. 결국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20:6)과 둘째 부활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얻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창세 이후 살았던 인간들을 모두 심판하시는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선택하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사48:3). 여기에서 하나님이 알게 하신 “처음 일들”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일과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원복음을 주신 일이다(창1:28). 하나님의 “처음 일들”을 알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심지어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까지도 부정하는 자들은 “자기 행위”에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죄를 회개하라고 가르치셨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흰 보좌”에 앉아 둘째 부활한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기 행위”를 기록한 “생명책”을 가지고 재림하신다(계20:11-12). 마지막 재앙의 대접을 가진 일곱째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이미 그의 대접을 쏟아버린 것 같다. 하나님은 “이제 하늘과 땅”과 모든 것들을 불태우실 것이다. 그리고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오직 그의 백성들과 함께 영원토록 거하실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생명책”에 기록되는 “자기 행위”를 “처음 일들”부터 스스로 다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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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8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36
      부활과 천년 왕국   요한이 계시록에서 서술한 “장차 될 일들”의 진행을 보면, 인간들은 반드시 죽었다가 부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살아서 실행했던 “자기 행위”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에 의하면 부활에는 “첫째 부활”(20:4-6)과 둘째 부활이 있다. 요한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이 있다고 했다. 요한은 그들이 살아(부활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는 자들을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라고 했다. 요한은 그때 부활하지 못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고 했다. 요한에 의하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둘째 부활의 기회가 남아있는 셈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구절을 근거로 그동안 소위 예수의 ‘지상 재림’과 ‘지상 천년왕국’에 관련하여 전-후-무천년설, 휴거설, 세대주의적 종말론 등의 숱한 오해와 이단 시비가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지상의 천년 왕국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그 구절 앞에 보좌들에 앉은 자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보좌들에 대해서 하늘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고 24장로의 것들과 둘째 부활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이의 흰 보좌,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이 앉으시는 보좌밖에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심판의 권세를 받은 자들의 보좌들은 하늘에 있는 것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첫째 부활”과 그에 대한 심판은 하늘에서 일어날 일이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도 천년 왕국도 하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첫째 부활”이 땅에서 일어나고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천년 왕국이 땅에서 세워진다면, 하나님 나라는 땅에서 이미 실현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진리와 공의로 통치하는 곳에서 죄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천년 왕국 후에 하나님이 사탄을 옥에서 놓아주셔서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는 기회를 허용하신다면(20:8-9), 하나님은 사탄의 편이 되신다. 그런 오해는 터무니없다. 그 천년 기간에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놓여난 사탄은 땅의 백성을 미혹한다. 요한의 계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건의 장소와 구조를 잘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로 창조하시지 않고, 번거롭게 부활과 심판의 일을 두 번씩이나 하시면서 하늘에 천년 왕국을 세우는 일을 하실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어린 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6:10-11)에 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었다. 그들이 큰 소리로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외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다. 이에 근거하여 “첫째 부활”과 심판이 그들의 청원에 의하여 하늘에서 일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44,000명과 각 족속에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다(7:1-10). 이마와 손에 우상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도 “첫째 부활”에 참여했다고 보여진다(20:4). 하나님은 “첫째 부활”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그리스도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천년이 지나는 동안에 하늘에서는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진노까지 쏟아낸다. 그리스도가 주신 계시에 의하면, 그 뒤에 “이제 하늘과 땅”이 불태워지고(벧후3:7), “흰 보좌”에 앉아 내려오신 그리스도가 “그 수를 채우기까지” “생명책의 기록”에 따라 둘째 부활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0-12-10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35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알파와 오메가”의 계시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한 곳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에 있다(21:1).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 하나님”이시며, “알파와 오메가”(ΑΩ)이시며,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밝히고 있다. ΑΩ는 “전에 죽었었”으나,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1:18). “음부의 열쇠”는 그리스 신화의 신 하데스(Hades, ᾍδης)가 가진 것이다. 그러나 ΑΩ는 그 열쇠를 그의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가 우주만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셨다. 요한은 ΑΩ가 계시를 주시면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19)는 명령에 따라 계시록을 썼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ΑΩ가 요한에게 계시하신 내용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면서 읽어야 한다. ΑΩ는 1:20에서 “네가 본 것”을 부연해서 설명하신다. ΑΩ에 의하면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이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곱 별의 비밀”이라는 말이다. 일곱 교회의 사자는 이제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ΑΩ의 편지를 전달받는 천사들(αγγελοι)이다.   “지금 있는 일”은 2:1에서 요한이 ΑΩ의 말씀을 듣고 에베소교회의 천사에게 편지를 쓰는 일부터 시작한다. “일곱 별의 비밀”은 일곱 교회의 일곱 천사들이 받은 편지 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편지의 내용을 보면, 각 교회의 “지금 있는 일”만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될 일”도 서술하고 있다. “일곱 별의 비밀”을 알려면, 각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과 일치하는 상황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요한이 편지를 쓰는 일은 “지금 있는 일”이지만, 그 내용은 “장차 될 일”에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ΑΩ가 보내는 편지는 그 당시 일곱 교회에게 “지금 있는 일”을 넘어 세계 각 교회에게 “장차 될 일”을 알려주고 대비하라는 메시지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2-3장에 걸쳐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쓰기가 끝나자, 요한은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 하늘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하늘의 광경을 4-5장에 걸쳐 서술한다. “지금 있는 일”을 대개 여기까지로 한정된다. 그러나 6장부터 요한이 보는 ‘일곱 인 떼기’와 ‘일곱 나팔 불기’, 그리고 ‘일곱 대접 쏟기’ 등의 사건들도 요한에게 “지금 있는 일”이다. 요한에게 “장차 될 일”은 요한이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환상 속에 있다. 요한에게 “장차 될 일”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끝난다.   요한계시록을 서술하는 형식은 구약성경의 묵시문학적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장차 될 일”에 등장하는 괴물들과 환상들, 그것들의 상징적 의미, 그리고 그 사건들의 날과 때의 시간적 순서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다르다. 특히 요한이 환상에서 보고 들은 “장차 될 일”과 실제로 인간들의 세상에서 진행되는 역사적 사건을 시간적으로 대비(對比)하고 특정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스도는 이미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마25:13)한다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적 틀에 갇혀 사는 인간이 “장차 될 일”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했다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거짓말이다. 누구든지 “두루마리의 예언”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읽는 자는, 그것에 “더하”거나 “제하”는 오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자칫 실수로 재앙을 초래하거나,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서 제하여 버림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22:18-19).   요한계시록을 읽는 기독교인들은 주의 날에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는 곳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행위를 따라”서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ΑΩ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20:11-12)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자기 행위”의 데이터(data)를 입력한 “생명책”에서 자기의 ‘머리털 하나’라도 감출 수 있을까?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0-11-24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XIII. 성결을 그리스도인 삶의 주제로 부각: 성령의 인격적 사역과 그리스도인의 성화 강조   1.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패커는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저작들을 남겼다. 20세기에 흥왕한 오순절 운동(Pentecostal movement)과 은사주의 운동(Charismatic movement)이 성령 본연의 사역을 은사의 나타남으로 왜곡하고 있었다. 이 때, 패커는 성령 사역의 본질이 바로 그리스도인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 과정에서 성령과 협력하는 거룩한 책임을 다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패커는 1967년의 저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에서 성령님의 내주하심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야말로 복음이 제시하는 가장 크고 으뜸 되는 선물이시다.”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이미 부족한 것이 없으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 세례'를 그리스도께서 소유로 삼아 인치신 사람들이 거듭나 구원을 받는 순간에 받는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동일시한다."(James Innell Packer & Alan Marshall Stibbs,The Spirit Within You: The Church's Neglected Possession, Hodder and Stoughton, 1967; 정다올 역,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생명의말씀사, 2010.27). 이러한 저자의 견해는 로이드 존스의 후기 성령론과 다른 입장에 서 있으며 전형적인 개혁주의적 성령론의 입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패커는 성령의 사역을 성경 완성과 연결시키고 성경완성 후에는 특별 사역이 필요없게되었다고 본다: "사도들의 특별한 사역이 끝나고 신약 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그런 현상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James Innell Packer & Alan Marshall Stibbs,『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60.)패커는 "그런 현상들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했다는 사실을 초자연적으로 입증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예언의 은사는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패커는 다른 은사들 역시 신약성경의 완성 이후에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패커의 은사 중지론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커는 전도나 성화를 위해 성령 안에서 신자의 능동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신자들이 흔히 범하는 또 다른 잘못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행동을 취하실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인간이 먼저 행동을 개시할 경우에는 자칫 자아를 의지하려는 육신의 욕구에 치우치기 쉽다고 믿는다. 하지만 신약 서신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새로운 행동을 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거듭 강조한다. 하나님은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성령님을 따라 행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가 행동해야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우리의 경험 속에서 온전히 실현된다."(정다올 역,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31)   패커는 성령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참 자유를 강조한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는 육신의 정욕을 극복하고 거룩한 삶을 향해 매진하는 자유를 뜻한다. 이 자유는 우리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자동차를 모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자 책임이다. 자동차를 우리를 향해 모든 것은 우리의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에는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덕분에 가능해졌다."(정다올 역,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94)   패커는 성령 안에서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는 신자들 가운데 이 문제와 관련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자신의 본성이 연약한 탓에 넘어지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의지를 무가치한 육신에서 나오는 힘으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어 마음을 움직여 주시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올바른 길을 향해 나아가려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존재와 능력을 온전히 의식하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한다."(정다올 역,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95.)   패커는 오늘날 개혁교회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소홀히 여기는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성령은 이미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또 다른 성령님을 구한다. 성령 체험을 일부 교회들이 추구하는 단순한 광적인 현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빠르게 확산되어 가고 있는 오순절 은사 운동은 부분적으로는 제도화된 20세기 교회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했다. 패커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성령 사역의 역동적 개념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패커는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날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짓는 한편, 오순절 은사 운동이 야기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명확히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패커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자신 특유의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잘못 오해되고 있는 성령 사역의 문제점을 파헤치며, 그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패커는 성령의 임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시된 복음의 핵심이자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기업(基業)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2. 성령의 인도함을 받음   패커의 초기 논문은 케직 사경회가 지향하는 성령세례와 소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해 성경적인 입장을 잘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는 후에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더 폭 넓게 아주 잘 정리되어 있다. 『성령을 아는 지식』(Keeping In With the Spirit)은 은사주의 운동에 대한 패커의 독특한 견해와 함께 케직(Keswick) 사경회의 성화론에 대한 논쟁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패커 자신의 회심 이후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케직 사경회의 성화론은 지속적으로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케직의 가르침은 패커에게 깊은 고뇌와 좌절을 경험하게 하였다. 패커는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의 『죄 죽이기』(The Mortification of Sin)라는 책을 읽으면서 케직의 수동적 성화론에서 벗어난다.   패커는 케직의 가르침이 수동성을 명하는 정적주의(靜寂主義)로서 성결을 성취하는 문제를 정신적이고 영적인 테크닉의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하고 있다. 패커가 1955년 성화에 관한 케직의 견해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던 논조와 30여년의 세월이 지나 쓴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의 케직에 대한 논조는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있곤 한다. 패커는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케직의 가르침에 대하여 좀더 협조적이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즉 그 운동이 가졌던 의도들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여러 가지 점에서 그 가르침을 교정하는 방식으로 평가를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패커는 성령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알고자 한다. 철저히 성경말씀을 근거로 시종일관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성경에 가르침에 따라 믿음으로 칭의받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계속되는 성화를 추구하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에 이를 수 없음을 성경이 증거하며 역사가 증거한다는 것을 잘 제시한다. 그리하여 패커는 소위 완전주의(perfectionism)에 대한 성경적 비판을 잘 제시하여 가장 온전한 성경적 성령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패커는 2000년 인터뷰에서 1960년대 영국의 오순절 운동을 복음주의의 한 특징으로 보았다고 피력하고 있다: “은사주의 운동이 1963년 영국의 복음주의 계열을 휩쓸고 있었다. 은사운동 스타일의 찬양대, 기타로 반주하는 복음송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역자라고 강조하는 것이 은사운동의 특징이었다. 어딜가나 이런 것들이 당시 영국 복음주의 계의 특징이었다. 영국 전역에서 복음주의자들이 방언을 말하거나 신유를 행하려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것들이 당시 영국 복음주의계의 특징이었고 나는 그것이 옳다고 본다.”(제임스 패커 인터뷰 1, 「소금과 빛」, 2000년 7월호 특집. 두란노서원, https://cafe.naver.com/ilumok/16)   패커는 영국 IVP로부터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관해 삶과 성령으로 주제로 책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는 은사운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싶어 집필을 하고자 하였다. 패커는 특히 존 스타트 나 딕 루카스처럼 은사운동을 아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영국의 복음주의자들 중의 일부인 존 스타트와 딕 루카스는 오순절 운동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나는 저들처럼 매우 부정적이지 않았다. 나는 오순절 운동이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오순절 운동에는 잘못된 점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표적과 기적이 도를 넘어서서 비성경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곧 방언, 방언 해석, 신유와 예언 등에 대해 그렇다. 그래서 오순절 운동의 본질을 지지하면서도 후자에 대한 것은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오순절 은사운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기 위하여 『성령을 아는 지식』(Keeping in Step with the Spirit)을 썼다.”(제임스 패커 인터뷰 1, 「소금과 빛」, 2000년 7월호 특집. 두란노서원, https://cafe.naver.com/ilumok/16)다른 개혁신학자들과는 다르게 패커는 하나님이 오순절 내지 은사운동을 현대적 상황 속에서 사용하시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의 결점과 약점 그리고 방향을 지적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패커는 성령님 안에서의 삶(Life in the Spirit)을 강조하며 결국 성경을 중심으로 사는 삶을 보이면서, 특히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나가는 삶의 실제를 잘 제시하고 가르쳐 준다. 패커는 복음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영성을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수행했다. 패커는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즉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했다. 패커가 은사운동의 지나친 표적 추구를 비판한 것은 올바른 태도이며, 그렇다고 그가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성령과의 교통 가운데서 성결의 삶을 강조한 것은 성령 사역에 대한 그의 균형잡힌 태도를 보여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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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0-11-17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34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받을 큰 약속: 영생   현대사회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세상의 종말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말세는 성경에서 거룩한 선지자들에 의하여 줄기차게 경고해왔던 문제이다. 말세의 근본 원인을 살펴보면 백성을 인도하는 교회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곧 땅과 생물을 다스리 일(창1:28)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동안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자들이 그 일을 함으로써 창조질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처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목적은 묻혀버리고,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은 추방되었다.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벧후3:3)했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벧후3:10)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니. 그것을 바라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의 처음 창조를 부정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는 베드로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에 종말을 오게 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자들의 안일과 무책임이 가장 큰 이유라고 자책할 수밖에 없다.   베드로는 주 하나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말했다(벧후3:13-15). 베드로가 말한 “속에 있는 소망”은 곧 “영혼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영생의 소망이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알파요 오메가”이신 주 하나님의 처음 창조와 새 창조를 똑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똑바로 알려줄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구약시대의 이사야가 처음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 말하고 있으나, 베드로는 구약시대를 개혁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사야와 다른 관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베드로는 인간이 누구나 그러하듯이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을 소망하는 자라면, 예수를 보지 못했어도 그를 믿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벧전1:9). 베드로에 의하면 모든 일이 드러나는 주의 날에 영혼의 구원을 받을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 앞에 섰을 때, 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고, 그의 말씀을 따라 전도에 나섰다가 로마에서 잡혀 순교했다. 그런 만큼 베드로의 말은 진실하다. 베드로는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의할 일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니”(벧후3:8), 참음으로 주의 날을 기다리라. 둘째,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하는 것처럼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지 말라(벧후3:16).   성경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주의 날과 때이다. 이에 대해서는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마24:36, 막13:32)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큰 약속”을 받아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했다. 그런 소망을 가진 자는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벧후1:4-7). 베드로에 의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1:8)에 넉넉히 필요한 것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3:18)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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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3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33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가 영생할 수 있을까?   하늘과 땅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의 첫 장만 읽어도 알게 되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고 선포하셨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는 말은 옛 하늘과 옛 땅을 버린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대해 구약에서는 이사야서가 기록하고 있고,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와 요한계시록이 기록했다.    그동안 유대교인들은 이사야서를 읽고,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기독교를 창설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새로 창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할 수 있다고 계시하셨다. 이사야서만 읽은 유대교인도, 세 권을 다 읽을 수 있는 기독교인도, 모두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날에 자신은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유대교는 기독교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생은 무신론적 과학의 한계를 초월하여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 하나님의 창조 권능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사야서를 쓴 이사야는 구약시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유다왕국 10대 웃시야 왕부터 13대 히스기야 왕조까지 활동했다. 이사야에 의하면 하늘과 땅과 인간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1:2)고 한탄하셨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을 창조하신 때에 오복과 함께,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창조목적을 알려주셨다(창1:28). 하나님의 한탄은 그가 처음 창조하신 인간과 그 자손들을 자식으로 양육하셨으나, 그들이 창조주를 거역하는 데 대한 분노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거역했던 처음 인간을 심판하여 땅을 저주하신 적도 있었고, 죄악에 빠졌던 그 자손들을 심판하여 노 홍수로 멸절하신 기록도 있다. 그 뒤에 인간은 다시 번성했지만, 하나님의 첫 말씀인 창조목적은 잊어버리고 패역의 길을 걸었다.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한다(9:16).   하나님은 죄악에 빠진 자식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을 내서 “만민의 기치”로 세우실 것이나(11:10), 땅의 주민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24:5)으므로 공허하고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은 환난을 겪으면서도 죽기까지 견디는 그의 백성들에게 메시아가 종의 모습으로 정의를 베풀 것이라고 밝히셨다(42:1).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땅에 하나님의 종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가 예수이시다. 그러나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53:5)다. 하나님을 거역한 자식들과 그 자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죽였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환난을 당한 자들을 그의 백성으로 택하신다. 이사야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까지 대부분 성취된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은 앞으로도 패역한 자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실 것이다(65:7).   하나님은 그가 택한 백성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고 선포하셨다(66:22).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동일한 계시를 주시면서 모든 인간들은 마지막 날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계20:12).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회개”에서부터 믿음-사랑-소망의 “자기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교회는 신자들을 인도하는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자기 행위를 초등학교의 수행평가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에 따라서 교회는 어느덧 이사야가 지적한 것처럼 ‘패역한 자식’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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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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