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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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선거와 한국기독교 3
    배덕만 교수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대한 날카롭고 예언자적인 태도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선거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서, 각 선거에서 개신교가 참여ㆍ대응했던 방식도 함께 검토했다. 이제. 이런 역사와 제언을 토대로 곧 총선을 앞둔 개신교인들을 향해 몆 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이번 선거을 통해, 개신교는 특정 이념 및 정당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동일시 해왔던 오랜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분단과 냉전을 배경으로 남한에서 재구성된 개신교는 ‘반공, 친미, 친자본’의 전위대로 맹활약을 해왔다. 덕택에, 특정 권력층이 부여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특권적 지위를 획득ㆍ유지하기 위해, 개신교는 복음을 타협하고 예언자적 책임도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던 특정 정권 및 이념과의 밀월관계도 청산하고 철저하게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래야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착오적 극우세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둘째, 당분간 광장에서 함성을 멈추고, 골방에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분명히,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를 선도하고, 정치와 경제를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수와 양은 여전히 소박했지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은 비범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개신교는 몸집이 급속도로 거대해지고 힘도 막강해졌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법안을 폐기시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전성기가 막을 내리자, 광장에 모여 폭언과 망언의 말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장에 빈번히 다수가 모여 막말을 쏟아낼수록, 사회의 반응은 싸늘해지고 혐오감은 급상승했다. 동시에, 개신교 내부의 모순과 오류가 만인의 상식이 되면서 어느 새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분명히, 개신교가 담대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광야와 골방으로 물러날 때가 아닐까? 분명히 세상이 듣도록 함성을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셋째, 이익집단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ㆍ공적 종교로 성숙해야 한다. 그동안 선거에서 개신교가 보여준 모습은 과거에 향유하던 특권을 유지 혹은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치 집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선거의 존재 이유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순간 개신교는 자신이 또 하나의 이익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상에서 보편적 가치와 공적 진리를 전파하여 상생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등종교의 본질이고 사명이다.    그런 숭고한 책임과 역할을 포기하는 종교는 단지 미신과 사이비일 뿐이다. 따라서 개신교가 이기적 욕망에 집착하여, 보편적ㆍ공적 가치를 외면할수록 한국사회에서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반면, 타자를 존중하고 공동체적 이상에 충실할수록,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용기 있게 내려놓을수록, 한국사회는 개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이번 선거가 개신교에게 성숙과 변화의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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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신학] 위기의 한국교회와 하나님나라의 문화공동체
      김선일 교수                                                   오직 교회만이 자신들 밖의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복음의 문화와 구원의 문화가 교회 내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두 문화의 확립을 토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핵심 실천인 선교와 전도의 문화가 조성된다고 볼 수 있다.  ‘선교’의 원래 뜻은 세상으로 보냄 받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도는 개인의 회심을 목표로 한다. 선교는 세상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삶이라면, 전도는 그 복음에 기초한 개인을 위한 구원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여성 선교학자 데이나 로버트(보스턴대)가 비유한 것처럼, 선교와 전도는 몸과 심장의 관계와 같다. 선교가 총체적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전도는 생명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심장과 같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선교 사역에는 교육, 의료, 환경운동, 정의구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교적 실천들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는 인간으로 거듭남이 없이 선교는 지속적인 추동력을 지닐 수 없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유기체적 이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는 추동력을 강력하게 견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선교적 방향성을 겸비하게 해준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나 레슬리 뉴비긴 등에 의해서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세상과 이웃에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한 민감한 관심과 참여라는 인식을 기초로 최근 선교적 교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선교적 교회론이 ‘하나님의 선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에서 기본 착상을 빌려온 것은 맞지만, 복음주의 권의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님-세상-교회라는 구도에서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하나님-교회-세상이라는 구도를 확대 갱신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은 하시는가?’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욱 근본적으로 던진다. 선교적 교회론이 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선교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선교적 교회론은 선교적 문화, 즉 선교적인 공동의 생활 양식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에게는 선교적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게 할 것이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다”라는 심오한 선언을 남겼다. 나치에 항거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또한 “교회는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 교회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리듬이 지역과 이웃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선교적 문화를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위한 몇 가지 선한 실천들을 간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타인을 향한 관심과 환대의 리듬이 형성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건물과 집회 지향의 삶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웃을 돌아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실천이 아닌, 소그룹과 공동체가 함께 헌신하고 상상하며 참여하는 생활의 양식이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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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웨슬리신학연구소서 3월 설교연구모임
      ◇서울신학대 웨슬리신학연구소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김성원교수)는 지난 6일 이 대학과 온라인에서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란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주제와 동일한 제목의 존 웨슬리의 설교를 함께 읽고 그 의미를 모색했다. 특히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임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소 소장인 김성원교수는 “성경을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시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다. 존 웨슬리 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주제로 설교한 것은 성경말씀에 충실한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면서, “웨슬리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서 발견한 윤리적 교훈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즐거워하라고 하는 마지막 권면은 우리에게 특별히 귀중한 영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파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라는 교훈도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의 더욱 깊은 가르침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동행이며 교제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면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를 어디에서나 감찰하시지만, 그 눈은 우리를 가시덤불 속에서 발견하고 구원하시려는 선한 목자의 눈길임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나님의 편재는 궁극적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면서, “연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며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토의시간에서 강춘이전도사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웨슬리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동의하며 성령님의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최병은목사는 “당장 강당에 올라가서 그대로 읽고 전해도 웨슬리의 설교는 현재성을 갖고 있고, 설교를 읽을 때 감동이 있으며 역동성이 있다. 코람데오의 신앙은 요셉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코람데오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죄의 유혹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은 주님과의 독대시간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는시간을 통해 이루어 갈 수 있다”고 밝혔다.    류재성목사는 “오늘날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적용과 질문들이 필요하다”면서, “웨슬리가 편재성에 대한 설교를 당시 18세기 영국사회에 대한 것으로 적용했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적용이 필요해 보이는데, 예를들면 소외, 불안, 분열, 갈등 등을 겪는 자들에게 그들 가운데도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회복을 우리는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류박사는 “편재하심은 부활신앙에도 중요한데, 이 부활신앙은 도마와 막달라마리아와 같이 경험될 수 있다”. “예수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 본 도마가 있는가 하면, ‘나의 몸을 만지지 말라’라는 명령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의 경험을 강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처럼 편재하심이라는 것도 손에 쥐는 것(도마)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어줌, 비어주는 것(막달라마리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교계종합
    • 일반
    2024-03-10
  • 사단법인 느헤이먀 사역을 소개한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신학 연구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구현과 한국교회 발전과 개혁에 헌신   사단법인 느헤미야(이사장=이문식목사)는 ‘하나님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이란 비전으로 2010년 시작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성장해, 2019년에 공신력을 가진 단체로 법인화된 이름이다. 이 단체는 처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퇴보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을 목도하던 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며,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개의 벽돌을 쌓는 마음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무리의 사람들로 시작한 움직임이 이제는 수많은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다양한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배우고자 몸부림치는 동역자들로 확장되고 있다.   창립 당시 기독연구원은 한국교회가 연약해진 이유가 신학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후에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 역시 필요하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이제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교의 입문 과정부터 신학대학원의 석사 수준의 다양한 과정이, 학식과 인격에 깊이 있는 교수진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기독연구원은 매 학기제로 수업이 진행 중이며, 진지하고 심도있는 신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느헤미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명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 ’를 구성하게 된 과정이다. 교회협의회는 기독연구원의 신학적 성과들을 공유하면서 각 교회 현장에 적용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기독연구원에서 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나가게 될 목회자 후보생들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하여, 바른 목회자로 세우는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동단체는 평신도를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무장하여 교회개혁의 주체로 세우는 일과 더불어,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일꾼들을 안수하고 잘 훈련시켜, 각자의 소명에 맡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단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약해져 가는 한국교회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명에 지속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라는 두 날개로,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 단체는 △교회 및 단체, 교육기관의 연합사업 △전도, 국내선교외 사회선교 △교회개척 사업 △신학교육 및 목회자 재교육 △남북통일사업과 남북교회의 협력사업 △소속기관의 권익보호와 법률적 보호 △성서연구와 교육 및 보급 △청소년 및 청년 선교사업을 주요사업으로 헌신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구하고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동역자들에게 함께 하자고 손짓하고 있다. 이 단체는 「이 작은 사역의 한 걸음이 한국교회의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우는 귀한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이 사역에 동참할 교회와 성도를 초청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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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신학] 마틴루터의 경제 이야기 4
    김현관 교수  ‘산상수훈’은 오늘 날의 경제문제에 이상적이며 실천 가능한 대안   루터의 이와 같은 관점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들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루터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경제활동이 곧 자선활동이 되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제활동은 과연 가장 약한 자들의 삶의 필요성에 부합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무분별한 소비를 조장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소비 행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며, 고아와 과부 및 나그네를 붙드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재정의 주인 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좀 더 책임감 있는 경제활동을 하도록 도전하며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여 준다. 둘째로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상적 교훈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 실천원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산상수훈은 이상적이거나 불합리한 명령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것은 기계적인 원리에 의한 행동 원칙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의 동기로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서 산상 수훈의 가르침의 본질을 추구한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문화와 상대적인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분명한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루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루터의 관점들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자본체제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루터가 살던 세기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다양한 경제 주체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전되고 복잡하게 얽혀져 있지만, 루터가 당대에 대면했던 세상의 초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초래한 문제점들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성격은 다르지 않다.    루터가 가진 관점들은 신자유주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복지 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신자유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를 뛰어 넘는 자유이다. 화폐 증식의 경제를 통하여서 개인의 부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자유보다 더 위대한 것은 기꺼이 자신의 부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자 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질이 회복되고 기독교의 정수가 드러나는 곳마다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는 사회 전체를 변혁시켜 왔다. 로마제국에서의 초대교회가 그러했고 중세시대에 종교개혁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경제적 영역에서 성서적 목소리를 선포하여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복음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이것이 세기의 경제적 상황에서 루터가 외친 예언자적 목소리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메아리쳐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 서울한영대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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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신학] 하나님나라 신학과 한국교회 ③
    김형국 목사 행정 조직적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적 교회구조로 전향 필요    만인제사장주의가희석화된것은교회가하나님나라사상을잃었기때문이다.그결과로평신도와 목회자라는구분은평신도와사제라는구교적분리에서크게다르지않게한국교회안에자리를잡고있다.사역자가부르심을받아교회를세우는일에전적으로헌신한일군으로서전문성도있고 그필요성도있지만,사역자가일반성도들보다우월하지도않고,교회를세우는일에사역자의역할과성도의역할이동등 되게있음에도불구하고,성도들은평신도로서사역자를기껏해야보조하는 모습으로전락했다.   한국교회는우리모든성도가하나님나라의백성이며,그하나님나라백성가운데어떠한위계도있지않다는사실을신학적으로정돈해야한다.이는유교적위계질서를하나님의권위와동일시한많은한국교회로서는매우어려운과제이다.그러나이제라도교회를세우고,교회사역을감당하는일에있어서성도의일반적역할과사역자들만이담당해야할전문성이정리되어야한다. 성경은다만 자비량또는타인 또는공동체의후원을받으며전적으로사역을하는사역자가있음을보여주고있는데,그들은성도들보다우월한것이아니라,부르심을따라성도를세우고,성도들이교회를세우게한다고말한다(엡4:12-13).   교회를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자들의공동체라고볼때,교회속에서성도와 사역자의역할을하나님나라의관점에서정립하고실행하는일이시급하다.현재의상태를지속한다면, 하나님나라가드러나는교회보다는일반종교에서보이는사제와일반성도의구분이개신교속에서도그대로보여,하나님나라 운동공동체로서의교회의모습은전혀부각되지않고,하나님나라가갖는급진성역시약화될것이다.뿐만 아니라,하나님께서성도하나하나에게주신잠재력이 그대로 사장되어버리고,교회공동체는교회의최고지도자인목사의한계를넘어서지못해서,하나님나라의운동성은교회라는조직속에갇혀버리고결국사장되어버릴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이땅에오심으로말미암아하나님나라가시작되었고,그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 사람들의공동체가바로교회라는신약성경의가르침은로마가원시기독교를합병한이후로천년이넘는세월동안왜곡되었다.교회는종교기관과조직이되어버렸다.이러한문제를극복하기위한공동체운동들이구교속에서도일어났지만,구교의전체적인흐름을주도한것은정치조직화된 기관으로서의카톨릭교회였다.종교개혁은만인제사장주의등을내세워새로운출발점을만들었으나,불행하게도이렇게정치조직화된교회의모습의한계를극복하는일을완성하지는못하였다.   대부분의개신교는구교가가지고있던교회론에 약간의수정을가하였지고세월이지나가면서종교개혁의정신이승화발전시키기보다는구교의큰틀에서벗어나지못했다.위에서살핀평신도와사역자를나누는구분이이러한변혁하지못한구교의대표적전통이라고할수있다.개신교는다양한교파가생겨나고,그교파는교파나름의조직을위해서교단을형성하고그교단내에서는중립적인의미의정치가있을수밖에없었다.그러나 결국세월이지나면서,개신교의대부분의교단과그교단에속한교회는삶의현장에서사랑을주고받으며살아가는공동체적성격보다는종교조직으로서정치적구조를갖춘기관으로전락하였다.                                                                                                                                                          / 하나님나라복음DNA네트워크 대표, 신학박사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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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한박사의 '역사적 예수 시리즈'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I. “구하라 주실 것이다”: 어떠한 일에도 간절히 기도할 것을 가르침.   열 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 나사렛 예수는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누가는 다음같이 기록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예수는 간절히 그에게 구하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딸이 더러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이 다가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는 간청을 예수는 처음에는 거절하신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4). 이에 대하여 이 여인은 슬기롭게 간청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5). 이에 예수는 이 이방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며 말씀하신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9-30).   여리고로 나가실 때 걸인 소경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가 지나갈 때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한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더욱 소리를 지른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며 말씀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예수는 하나님에게 구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는 간절히 구하는 자의 소원을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꾸준히 기도하셨다. 예수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을 비유로써 가르치신다. 밤중에 친구가 와서 떡을 빌려 달라 할 때 이미 밤이 깊고 침상에 누웠으니 일어나 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친구가 간절히 청하기 때문에 들어 준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그리고 예수는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면서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번거롭게 하니 이 재판관은 마지 못해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다. 예수는 그처럼 하나님은 간절히 간구하는 성도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고 가르치신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6-7). 기도는 무속신앙의 기도처럼 단지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며 그와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뜻에 나의 의지와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III. 기도의 내용: 감사, 기원, 중보기도, 교제   예수의 기도는 감사, 기원, 중보기도, 교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다락방에서 떡을 떼면서 감사하였고,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눅 22:17-26). 그리고 구할 것을 기원하고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셨다. 예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변화산에서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고 그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하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9)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아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가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한다(눅 9:31). 이에 베드로와 함께 간 제자들이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체험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들은 구름 사이에서 들려오는 성부의 음성을 듣는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눅 9:35). 변화산의 사건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本體, the very nature)라는 것을 드러내는 지상에서의 유일의 사건이었다.   생활 속의 기도도 있다. 중세 수도사들은 노동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였다. 그러나 골방에서나 깊은 산 속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의 시간도 필요하다. 이러한 깊은 명상 속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차원의 교제를 가질 수 있다. 보다 깊은 명상 속 기도의 내용은 자기의 욕망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여태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먼저 나 자신이 가정, 교회, 이웃,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중보자가 되어 저들의 회개와 안녕과 행복과 복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웃을 위한 중보자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보적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보다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보적 기도를 하였고(출 32:11~14; 신 9:25~29),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인류의 대속자가 되기 위한 중보적 기도를 하셨고(마 26:36), 사도 바울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적 기도를 하였다(롬 9:3).   IV. 진정한 기도: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는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같이 겟세마네(Gethsemane)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다(눅 22:41). 예수는 제자들과 떨어져 홀로 기도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땀이 변하여 피방울이 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누가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히브리서 저자는 육체에 계실 때에 예수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의 기도를 올렸음을 증언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한 기원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기원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는 시몬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예수는 중보기도를 드리셨다.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V. 영적 안식과 평안을 주는 기도   나사렛 예수는 자기에게 몰려오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마음에 상처받은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와 같은 종교인들, 아리마대 요셉(마 27:57) 같은 부자와 대화하면서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런 바쁜 가운데서도 예수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속에서 안식과 평안을 찾았다. 그래서 예수는 탈진(脫盡)하지 않았다. 겟세마네의 깊은 기도에서 에수는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는” 가운데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고 결정했다. 예수는 아버지 안에서 항상 안식하였고, 평안을 누렸다. 하나님의 성령이 항상 그의 마음에 충만히 거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의 삶은 기도가 우리 인간들이 영적 안식과 평안을 얻는 유일한 통로임을 보여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역사적 예수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같이 증언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히브리서 저자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이 불신 세상과 택하신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오늘도 나사렛 예수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 속에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다음같이 말씀하시며 안식을 주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심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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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4
  • [오늘의 신학동향-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9)
      예수말씀에서 언급된 세례 요한과 관련된 말씀에서 본문에 나오는 광야는 유대광야로 요한의 동굴과 베다니, 세례 터, 엘리야의 승천 터 등이 가까운 곳에 있는 쿰란 지역이다. 요한이 활동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키르벳 쿰란이란 지역에 성서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에 일시에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와는 달리, 쿰란 문서는 거의 10년에 걸쳐서 조금씩 발굴된 문서이다. 바로 이곳에 근거지를 둔 요한을 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쿰란 지역이다. 누가복음 7:24의 우리말 성서에 ‘흔들리는 갈대’로 번역된 단어는 ‘파피루스’로 수정해야 한다. 한민족에게 근동지방에 무성한 파피루스가 낯설기 때문에 갈대로 표현하였지만, 이젠 우리 주위에도 파피루스가 분양되어 자라고 있으니 원문대로 그 의미를 살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파피루스로 종이를 만들어 성서를 필사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쿰란 인근에서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자주 들린 도서관을 언급하신다. 당시 사람들이 유대 광야 끝자락인 쿰란 동굴로 모여든 이유가 파피루스 종이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말씀을 보고 읽고 묵상하는데 관심을 기울인 요한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누가복음 3:2는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빈들은 유대 광야인 쿰란 도서관에서 부지런히 파피루스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요한의 모습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오랫동안 이집트의 나시 파피루스로 알려진 기원전 150년경의 십계명과 신명기의 일부가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사본이었다. 그러나 유대 광야의 쿰란 동굴에서 무더기로 두루마리가 발견되면서부터 나시 파피루스보다 거의 1세기는 앞선 기원전 3~2세기의 것으로 추산되는 180여 구약성서의 사본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 단연 압도적인 것은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공동체 규율인 1QS으로 쿰란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서이고, 제4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로 맛소라 본문보다 앞선 문서이기에 지금까지 2천년을 지켜온 본문비평의 기준을 새로 제시하였다. 곧 1947~1956년, 그리고 2018년에 발견된 쿰란 문서는 맛소라 본문 보다 수 세기 앞선 금세기 최고의 구약성서의 사본으로 평가된다.   유대 광야에 거주한 세례 요한은 거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고 지냈다. 이런 요한에게 누가복음 7:25에 두 번씩이나 언급된 ‘부드러운 옷’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바로 부드러운 웃을 입고 왕궁에 거하던 사람들은 파피루스 대신에 금장이 둘린 화려한 성서를 주로 읽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서가 고급스럽게 포장이 되었지만, 그 화려함과는 달리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장만 하고 있던 상황에서, 필사가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미크베(유대인의 정결예식 장소)에서 목욕을 하고 성서를 필사하여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에게 읽히는 모습은 너무나도 감동적인 장면이다. 지금이야 인쇄술이 발달하여 종이도 사라지고 전자책이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에 파리루스는 일반 대중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유일한 통로이었기에, 요한도 바로 그 말씀 보기 위해서 쿰란으로 간 것이다.   무엇을 보려고 성지에 가는가?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근동의 음식을 맛보고 면세품을 무슨 이삿짐 꾸리듯이 잔뜩 들고 오려고 가는가? 돈만 싸들고 성지를 가는 졸부를 향해서 예수께서는 파피루스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성지에 가라고 일깨우신다. 무슨 전리품 챙기듯 득템(?)에만 욕심내지 말고, 세상을 살리는 예수말씀을 하나라도 품고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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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9
  • 한국Q학회서 어록자료연구 발표
      한국Q학회는 이번 세미나에서 예수말씀에 대해 전반적으로 발표했다. 무엇보다 로마제국의 젠더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 초기 기독교의 여성은 어떻게 리더십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파트는 많은 흥미를 자아냈다.   동 학회는 “특히 주후 2-3세기까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적인 신흥종교이기 때문에 아직 공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독교 공동체가운데 여성의 활동은 그 당시 로마시대의 관료주의 제도권 밖의 종교현상처럼 여겨져서 여성이 기독교가 부흥해 가는데 있어 비교적 자유롭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며, “기독교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들은 여성 지도력이 예수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정을 예배처소로 내어 주고 그곳에서 지도자로서 활동함으로써 교회들이 로마제국의 광활한 영토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3-4세기까지 기독교는 사적인 종교로써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여성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대부분의 현대의 기독교 성도는 초기교회의 발전에 이런 여성들이 기여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초기교회 운동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초기교회 즉 가정교회에서 여성이 현대적인 개념의 성직자로 섬겼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정교회 안에서 아직까지 여성 지도자들의 활동은 로마사회에서 강조된 젠더 역할을 준수하면서 주로 하나님의 가정을 돌보는 지배인, 혹은 후견인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5세기까지 여성들은 예언가, 순교자, 금욕주의 교사, 및 수도원 설립자 등의 역할들을 통해서 지도력을 감당하며 기독교 운동들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동 학회는 기독교 여성 리더십의 등장을 통해서 고대 로마제국에서의 젠더의 역할 및 초기교회가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특별히 “로마제국의 특권층에 속한 많은 남성들이 기독교에 입문하게 됨에 따라서 기독교를 정식종교로 공인화되는 과정에서 로마 종교의 구조들과 체계들이 도용되었다”며, “결국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공인화가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기독교에 행해졌던 공식적인 핍박은 종료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기독교는 교회의 제도화와 제국화를 통해서 여성 리더십에 대한 억압은 더 체계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공인된 종교로서 기독교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여성 리더십은 더욱 제한을 받게 되었다. 즉 “남성중심의 공적인 영역에 여성이 지도자로 참여하여 그 당시 젠더역할에 관한 사회적인 통념을 깨뜨리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교부 신학자들이 교회를 제도화시키는 과정에서 여성 리더십 참여를 반대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고 동 학회는 제시했다.   예를 들면 3세기에 기독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성이 교회 지도자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 남성지도자들이 교회 조직에 대한 지시서인 디다스칼리아(Didascalia)를 작성하여 남성 주교들의 역할을 교육, 설교, 세례, 성례전 집행 등으로 합법화했다. 토저슨에 따르면, 이 지시서에서 주교의 중앙집권 체제하에서의 목회 사역을 합법화시킴으로써 교회 사역에서 과부의 목회 사역을 제외시키고 “권위적인 것, 상위적인 것, 특권, 명예”와 관련된 예언적인 역할에서 여성을 제외시키는 등의 교회 사역에서 여성 리더십 참여를 제한시키는 것을 공식적으로 합법화하게 되었다.   동 학회는 “이렇듯 로마시대 젠더 이데올로기와 기독교의 제도화 과정은 여성 리더십을 계속 제한하는 방향으로 여성의 성직자 안수를 제한할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 속의 여성 리더십을 왜곡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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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19-12-19
  • 김영한박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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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19-12-18
  • [오늘의 신학동향-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9)
      옥중에서 예수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을 던진 요한에게 보낸 예수말씀은 “나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끝을 맺는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예수 때문에’ 넘어진 사람은 가룟 유다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배반자인 그를 칭송하는 유다복음서가 나올 정도로, 초기 교회에서 가인파 이단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인파 이단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가 3장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자 가인이 시기하여 동생을 죽인 이래로, 그를 숭배하는 자들은 가인을 떠받들기 시작하여 오늘날은 사탄 숭배자가 가득하기까지 하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최초로 기록한 이레니우스는 가인파 이단을 가룟 유다에 연결을 지어서 유다복음서를 이단 문서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185년경에 대표적인 교부들인 오리게네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각각 남긴 이단논박이란 책에서도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유다복음서는 에피파니우스가 파나리온이란 책에서 이단 문서로 규정한 이후에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클레어먼트 대학교의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을 중심으로 한 나그 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를 연구해오던 학자들이 1980년대에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다가, 골동품상의 독점권에 막혀서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던 차에 2007년 부활절에 봉쇄조치가 풀리면서 세상에 다시 얼굴을 드러낸 문서이다.   유다복음서는 가룟 유다를 배반자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공생애 사역을 성취해야 하는 일을 제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을 때, 유다만이 그 비밀인 지식(gnosis)을 알고 예수의 사역을 도운 영적인 지도자로 추켜세우고 있다. 사복음서가 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이단적 내용을 전한 유다복음서의 이런 거짓된 주장은 당시 기독교 지성인 가운데 플라톤의 이원론을 유행병처럼 붙들고 있던 영지주의란 이름으로 뿌리를 내리는 듯 하였지만, 초기 교회가 구약성서를 근거로 예수께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손쉽게 물리치게 된 것이다.   이단은 예수 때문에 넘어진다. 여기서 넘어진다는 단어인 헬라어 ‘스칸달’은 오늘날 그 어원과 상관없이 성적 스캔들인 추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오늘 예수말씀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때문에 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단이 왜 이단인가? 처음에는 같다가 끝이 달라지는 것이 이단이다.   박태선과 문선명이 처음에는 교회 안에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결국에는 저도 무너지는 모양으로 막을 내렸다. 모든 이단이 이런 비극적인 길을 걸어가지만, 주위에 있는 신자들은 눈과 귀가 미혹되어서 자기들의 교주가 이단인지를 모른다. 이단 가운데 동성애 이단이 가장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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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 ‘희생양 이론’통해 동성애담론 비판
      ‘기독교의 헤겔’르네 지라르의 사유를 쉬운 내용으로 소개 “성경은 예수의 무죄성과 공동체의 유죄성을 주장하는 텍스트”     정일권박사(인스부르크대·사진)는 울산남부노회 서부시찰 교역자회 총회에서 「르네 지라르와 오늘날의 목회」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정박사는 “21세기 유럽에서 기독교 부흥을 학문적으로 주도해서 기독교를 구했다고까지 평가받고 그렇기에 21세기 교부로도 불리는 르네 지라르의 사유를 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의 학문적 논쟁을 통해서 소개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또한 “20세기 유럽(독일과 프랑스)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칼 마르크와 프로이트의 사유를 지라르의 이론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했다”며,“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융합이 이루어진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과 그 문화마르크스주의 그리고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박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부터 파생된 유럽 68 문화혁명 세대들이 추구했던 성혁명(빌헬름 라이히) 운동과 성해방 운동 그리고 이후의 젠더 이데올로기, 퀴어이론, 동성애 담론 등은 사상누각이라며 지라르의 이론을 통해서 비판했다. 정박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작품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범성욕주의적 오독과 오해로부터 탄생한 것이기에, 최근 학계에서도 이 이론의 전면적 폐기가 주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박사는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르네 지라르, 사회과학의 아인슈타인」이란는 제목으로 지라르의 신화해독과 C. S. 루이스, J.R,R. 톨킨의 신화와 성서에 대한 이해를 비교했던 것을 소개했다. 루이스는 영화 〈나니아 연대기〉의 원작자로 그리고 톨킨은 영화 〈반지의 제왕〉의 원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교수들이다. 루이스의 지적인 회심은 복음서를 지지하는 역사적 증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복음서에는 ‘옥수수 신’(corn god)이 실제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어느 강경파 무신론자의 말을 엿듣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톨킨은 “만약 복음서 이야기가 인류와 인류의 보편적 필요에 대한 참된 스토리라면, 그렇다면 그 보편성은 그 이론의 확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라르는 이들과는 달리 기독교와 신화의 유사성들에 대한 질문을 다르게 접근했다. 정박사는 “지라르가 복음서에 대해서 가장 현격한 것은 그 복음서가 고대의 모든 다른 희생염소 스토리와의 차이라는 점을 보았다”고 강조했다. 그 차이는 “바로 희생당한 예수께서는 무죄하다는 사실이며 이 무죄성이 성경 본문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박사는 “마녀사냥의 텍스트인 세계신화는 희생염소의 유죄성과 공동체의 무죄성으로 구조화된 텍스트다. 하지만 성경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공동체의 유죄성을 주장하는 반신화적 텍스트이다”며, “희생염소 역할을 하는 세계의 수많은 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결코 무죄하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범죄자 신들로 묘사되고 또한 공동체에 의해서 그렇게 믿어진다”고 설명했다.   그 외 양산 통도사가 가까운 곳이어 통도사에서 불교 승려로서 오랫동안 수행하다가 이후 개종해서 순복음교회 목사가 된 목회자는 정박사의 지라르 세미나에 두 번 참여해서 정박사의 불교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여기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예수 그리스도와 희생염소 역할을 하는 세계 종교의 수많은 신들의 급진적인 불연속성도 소개했다”고 정박사는 밝혔다. 정일권박사는 국제 지라르학회인 ‘폭력과 종교에 관한 콜로키움’의 정회원으로서 지라르와 불교 연구에 있어서 국제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19-12-05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8)
      옥중에서 메시아인지 제자들을 보내 질문한 세례 요한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메시아이다’라고 속 시원하게 직접적인 대답을 하는 대신에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예수의 복음이 지니는 종말론적 사건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요한에게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말하여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는다”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이사야 61장 1~2절을 직접 인용하신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사야 61장을 읽어보라. 예수께서는 단지 이 말씀을 인용하기에 앞서서 “가서 요한에게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말하라”고 하신 것이 전부이다. 많은 이단의 교주가 저마다 이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이단마다 앞장서서 재림주요 하나님으로 자신을 탈바꿈시키고 진리를 가리고 신자들을 미혹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다.   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가 돌연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로 질문을 던진 것처럼, 지금 북한에서는 예수교를 가리고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수령교로 인해서 진리에 대한 혼돈이 가득하다.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735일 만에 가까스로 풀려난 케네스 배는 “북한 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주체사상을 유일한 진리라고 믿었지만, 북한의 참혹한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탓에 ‘과연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다”며, “북한은 주민들이 이러한 물음을 갖는 것 때문에 기독교를 가장 두려워한다”라고 말한다.    한 북한 보위부 조사관이 그를 심문하던 중 ‘내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예수라는 말은 당신한테 처음 들었다’며 ‘그 예수라는 사람이 우리 조선에 사는 사람이냐 중국에 사는 사람이냐’는 질문했다고 한다. 케네스 배는 “성경은 ‘예수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김일성만을 절대화하는 주체사상과 배치되는 것이다”며, “이것이 북한이 예수라는 이름을 말살시키기 위해 노력한 이유다”라고 말한다.   지금 기독교 지식인 중에서 주체사상으로 무장을 하고서 북한을 교묘하게 편드는 인사들이 공공연하게 활동을 하면서 교회를 허물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데, 일반인들은 그들이 겉으로는 이단과 사이비가 아니니까 무관심하게 넘어가고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와 같은 사람들이므로 경계를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듣고 본 것’을 전하라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신다.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언행 심사를 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하신 것이다. 상황 윤리에 근거하여 말이 바뀌고 행동이 달라지는 지도자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북한을 다녀온 교계 지도자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 그들이 누구인지 관심 두고 그들의 언행이 북한방문 전후에 어떠했는지를 주목해보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는다.”라는 예수말씀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나병환자, 귀먹은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말이다. 지금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자들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고, 흑암의 장막에서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사선을 넘어 탈출한 주민을 억지로 북송하는 일이 만연된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적화통일의 야욕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는 북한만을 편드는 거짓 교회지도자들은 회개하고 예수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복음의 전도자인가, 이념의 전도자인가? 거짓 삯꾼인가, 진리의 사도인가?   무릇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짓을 거부하고 거짓을 배격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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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1
  • 송 훈박사, 기독교통일운동 연구 발표
      민중신학, 민족주의,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통일운동 평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연대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이 중요 송 훈박사(숭실대 평화통일연구원·사진)가 한국교회사연구원(원장=박종현박사)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한국기독교회 통일운동의 비판적 고찰」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송박사는 한교회의 통일운동에 대해 민중신학, 민족주의 사관 그리고 보수교회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송박사는 민중신학 진영의 통일담론에 대해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민간 기구로서는 처음으로 통일문제에 대해 발표한 선언문(일명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독교회 선언’)을 주목했다. 그는 “이 선언은 1978년 해외기독교인들이 기독교평화컨퍼런스에 등장했던 조선기독교연맹에 최초로 서신을 보낸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줄기차게 북한교회와 교류하며 그 결과물로 내놓은 공개선언이었다”며, “이는 진보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신학들이 최초로 정리되었던 문서였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북한 문제에 대해 진보와 보수교회가 결별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설립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송박사는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민중의 주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과거 문익환목사는 통일운동 내내 통일운동의 성패는 얼마나 대중들, 특히 민중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운동에 동참하는 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며, “하지만 21세기의 민중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중들이 통일에 대한 관심이 있는 지, 심지어 평화통일에 동의하고 있는 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송박사는 민족주의 관점의 기독교통일운동을 고찰했다.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통일담론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송박사는 ‘한국의 제 1호 여성신학자이자 통일신학자’였던 박순경을 꼽았다. 박순경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같은 민족이며, 민중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도 통일의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 교회 내에서 북한 대중들과 지배층을 분리하여 대중들은 포용하고 지배층은 배제하며 정의를 통한 징벌을 주장하는 것은 통일과정에서의 혼란과 갈등을 부추길 뿐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박사는 “현재의 폐쇄된 민족주의와 민족 동질성의 약화는 더 이상 민족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한 통일신학이 남한 사회에서 예전과 같은 호응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송박사는 보수권으로 분류되는 복음주의권, 특히 한경직목사를 분석했다. 한경직목사는 계속 반공과 대결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1990년부터 북한 땅을 휩쓴 기근으로 인한 일명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대결의 입장에서 선회했다. 한목사는 1990년 그가 주도해 설립한 한국기독교총연합을 중심으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시작했고, 800톤이 넘는 쌀이 북한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송박사는 “통일을 위한 복음주의 교회들은 열정은 통일관련 NGO 수에서 기독교가 여타 기관들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사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복음주의 교회들의 이러한 다양한 통일 운동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선의와 가치들이 한국 사회 내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실정이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결론적으로 송박사는 대한민국 내에서의 통일의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그 당위성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70년 분단의 증오의 기억이 아니라, 한국전쟁과 분단의 와중에서도 대한민국을 이끄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희망의 기억을 다음 세대와 공유해야한다”며, “왜곡된 분단체제 속에서의 폭력과 전쟁임을 인지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연대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교회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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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1
  • 김영한박사의 '역사적 예수 시리즈'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증언이었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불에 관한 메시지는 그의 설교의 중심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계승하면서 세례자 요한이 예언한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 Kingdom of God)가 올 때가 충족되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설교하였다.   I. 때의 충족   예수는 자신의 출현이 “때의 충족”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나 뒤에 오실 자”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모세와 예언자들이 증언한 오실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때가 충족되었음을 말한다. 이 때란 “카이로스”(ό καιρός, kairos)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결정적 시기를 말한다.   스위스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 그의 세기적 저서 『그리스도와 시간』에서 시간의 중심은 나사렛 예수라고 밝힌 것 같이 나사렛 예수는 때의 충족이다. 역사의 의미는 역사 안의 자그만 선인 “구속사”(Heilsgeschichte, salvation history)이다. 구속사란 역사 안에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선(線)이다. 이 구속의 섭리는 영원부터 있었고 창조의 타락과 더불어 이미 역사 안에 나타났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이 증언해주고 있는, 믿음의 열조인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부터 역사 안에서 자그만 선으로 시작되어 신약의 나사렛 예수에게로 집중한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로부터 12제자들의 선택, 그리고 초대교회, 이방선교, 재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보편적인 확장으로 나아간다.   II. 종말론적 실재인 하나님의 나라 1.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설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었다. 예수는 자신을 믿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라고 하였다. 예수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었다. 그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라고 설교하였다. 그는 제자들을 동리에 파송하실 때에도 “어떤 동리에 들어가거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라”(눅 10:8)고 가르쳤다.   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유대인들이 오래 고대하던 사상이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상은 성경과 제2성전 시기의 유대교 내에서 흔한 개념이었다. 구약 예언자 다니엘은 그의 책에서 느부갓네살의 금신상과 뜬 돌을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3:44).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요, 모든 세상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지속하는 메시아의 왕국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나라를 다윗왕권을 가지고 오는 메시아가 세울 하나님의 왕국으로 생각했다. 마카비 왕조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무력을 가지고 이 지상에서 쟁취해서 얻어질 군사적 투쟁의 성취물로 보았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 Kingdom of God)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들어 모두 122번 나온다. 그중 99번이 공관복음서에 나온다. 그리고 이 가운데 90개의 본문이 예수가 친히 하신 말씀의 일부로 나온다. 부활 이전 예수 설교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다.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세상적인 왕국으로 오해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하신 후 시기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 때로 오해하였다. 누가는 다음같이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행 1:6).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제자들의 설교는 전혀 달라졌다. 성령으로 새로움과 권능을 받은 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2.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그러나 예수께서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적인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수행되는 영역이다. 유대인으로서 나사렛 예수는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자신의 인격과 생애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종교적인 율법이나 제사에 의하여 인간에게 다가오시지 않고 이제 메시아인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인간에게 찾아 오신다. 예수는 옥에 갇힌 요한의 질문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20)에 대하여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고 대답하셨다.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그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새롭게 동터오는 평화의 시대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적 통치가 이 세상에서 새롭게 실현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백성을 그분이 신원하셔서 그들에게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다 주신다는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현재인 동시에 아직 완성을 기다린다는 점에서는 미래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받아야 할 영역에 관계된다.   하나님 나라는 의인(義人)을 신원하며(vindicate) 궁극적인 정의를 실현한다. 하나님 나라는 작게 시작하지만 성장 발전하면서 결국 우주적 실재가 된다. 유대인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는 강력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정치적 나라인 데 반하여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성장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될 때까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그 모습은 유대인의 일반적인 기대를 반영하게 된다. 의인들은 원통함을 풀 것이며, 악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 평화가 수립될 것이며 사탄이 패배함으로서 도덕적 윤리적 질서가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실재가 아니라 영적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공동체적인 열매로서 나타난다. 예수의 부활 이후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설립된 초대교회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선교를 통하여 확장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하나님의 때요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말씀하신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요”(행 1:7). 예수는 복음전파의 때가 시작되었고 그 사명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언이 되리라”(행 1:8). 사도행전의 선교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역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영접하는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서 겨자씨 처럼 파편적으로 구현되는 구원과 평강과 희락과 사랑의 공동체이다.   III. 하나님 나라의 복음 1. 복음의 의미   복음(εύαϒϒελίον, Evangelium)이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표현했다. 본래 이 단어는 로마 황제들이 쓰던 언어다. 로마 황제들은 스스로를 세상을 지배하고 구원하는 구세주로 이해했다. 그래서 황제들이 발송하는 소식은 단순한 소식이 아니라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소식이라고 보았고 그 내용이 좋든 나쁘든 모두 복음이라고 불렀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 대하여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스스로 신격화된 황제들이 부당하게 주장하던 구원이 실제로 나사렛 예수의 대속(代贖) 사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황제들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참된 복된 소식을 전해주는 자라는 소식이 복된 소식, 복음(εύαϒϒελίον, gospel)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로마 황제에게 주(kyrios)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을 거절했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kyrios)요 그리스도(Christos)’라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신자들은 황제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화형에 처하거나 짐승에 찢겨 기꺼이 순교했다. 만일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를 경배했다면 기독교는 로마의 재래종교 속에 혼합되어 그 영적 힘을 상실하고 오늘날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결성 보존을 위해 순교한 신자들의 희생의 대가로 기독교 복음은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틴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공인을 받고 마침내 로마의 국교가 되는 것이다.   2.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 약속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창세기 12장에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12지파와 모세에게 동일하게 약속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12:7-8). 열 두 지파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영도를 받아 가나안 복지로 들어감으로써 역사적으로는 구현되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3-4). 그러나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 복지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모형에 불과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이 지역 주민들의 풍습에 물들어 가나안의 토속신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의 약속과 법을 어겼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이 약속받은 축복의 땅에서 쫒겨 나야했다.   바벨론 포로시기에는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등 예언자들은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을 약속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적 차원을 넘어선 실재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는 다가오는 미래의 약속으로 주어졌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실재에서 종말론적 실재가 된 것이다. 미국의 구약학자 존 브라이트(John Bright)가 말한 바 같이 구약은 ‘지붕이 없고 네 기둥만 있는 성전’ 같은 것이다. 구약은 약속만 있고 성취되지 못했다. 이 성취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될 것이다. 이 성취를 증언한 책이 바로 신약이다.   3. 회개와 믿음, 하나님의 나라 시민의 조건   세례자 요한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의 설교를 하였다. 당시 그에게 나아온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물 세례를 받았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 3:5-6).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회개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나라를 소망하고 자기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삶을 살려는 자들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악한 마음과 행실을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고 새 삶을 사는 자들이 들어간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고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이들은 세상의 혈육으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난 자들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요 1:13).   구약의 예언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 다니엘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적그리스도가 일어나 때와 법을 고치며 권세를 가지고 상당기간 박해하는 것을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그러나 하나님은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고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빼앗고 인내와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케 하실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단 7:26-27). 역사의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적그리스도의 권세는 멸망되고 세상의 권세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게 위임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폐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요 모든 권세자들이 그의 지고한 권세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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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5
  • 복음주의윤리학회 박성철박사 논문발표
      관심 얻으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 부각 “거짓을 유포함으로 지지를 얻으려하는 정치운동을 거부해야”     기독교사회연구소 등이 지난달 31일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교회 교인 3명 중 2명은 전광훈목사가 주도하는 기독교정당과 정치운동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박성철박사(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사진)가 한국교회의 극우 정치운동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박박사는 전광훈목사를 중심으로 한 일부의 활동을 ‘배타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으로 규정했다. 박박사는 “이들은 한국의 극우적인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과거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기독교 근본주의의 가치를 현실에서 실현하려 한다. 더구나 사회적 관심과 영향력을 얻기 위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다문화사회에서 그리스도인 저마다의 ‘좋은 정치’에 대한 생각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정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적 다양성을 파괴하고 배타적인 이념이나 가치로 인간을 획일화하려는 억압적인 종교적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반대한다고 박박사는 제시했다.   첫째,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박박사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한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다”며, “하지만 이들은 구원을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으로 둔갑시켜 자신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을 하고 있다. 구원의 상품화는 물신숭배이며 이는 명백한 우상숭배이다”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우상숭배자들이 주도하는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마땅히 거부하고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가짜 뉴스를 통해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사회적 지지를 얻으려 한다. 박박사는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거나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가짜 뉴스를 만들어 유포함으로써 지지를 얻으려 한다. 이는 이들의 정치적 견해가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며,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거하는 자로서 거짓과 가짜의 미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요일 1장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가짜 뉴스라는 거짓을 만들고 유포함으로써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극우적 기독교 정치운동을 마땅히 거부하고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 극우적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이웃에 대한 미움과 혐오 그리고 무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박박사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도움으로써 이웃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기독교적 이웃사랑의 기반은 바로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이다(로마서 9장15절)”며, “하지만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죄악시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미움과 혐오 그리고 무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고 분석했다.   넷째,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네오 기독교파시즘’을 지향한다. 박박사는 “한국의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과거 군사독재를 찬양하고 공공연히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지지한다”며, “그리스도인은 다양성을 억압하고 획일성을 지향하는 운동을 반대해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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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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