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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오늘날의 신학동향 – 현대 선교학
    임동현목사    변화하는 세계 선교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략들이 필요  오늘날의 선교 상황은 복합적이며 세분화, 다각화를 이루고 있다. 그에 따라 선교현장에는 사회 각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들을 필요로 한다. 변화하는 세계 선교 환경에 걸맞은 선교사들의 더 많은 자원(自願)과 도전이 필요한 작금의 때에 선교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확장하고 천국 복음을 전할 일꾼들과 사명자들을 지금도 부르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구별하여 불러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사용하신다.   선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온 땅과 세계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세계만물을 지으셨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에 이 땅을 다스리신다(창1:28). 온 세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다(출 19:5).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선교하신다(마28:19-20). 선교의 통로이자 도구로서의 인간은 선교지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비즈니스를 하나의 선교 도구로 사용한다.   비즈니스와 선교는 하나의 통일된 사역 모델의 중요한 두 축이다. BAM(Business as Mission)은 최근 몇십 년간 새롭게 주목받는 선교 모델이지만 그렇다고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진 모델은 아니다. BAM 선교는 과거에 없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방법으로써 현대 교회가 재발견한 선교전략이다. 서구 열강은 새로운 경제적 이익을 위한 판로를 개척하고자 식민지를 정복하고 제3세계 국가에 서구 신문물과 기독교를 함께 전파하였다.   비즈니스는 교회가 재발견한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다  서구 열강의 제3세계에 대한 선교는 엄밀히 말하면 주객이 전도된 ‘비즈니스를 위한 선교’였다. 이는 오늘날 문화 상황화를 무시한 선교로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에 대한 반성으로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선교를 위한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시대로 변화하였다. 비즈니스는 선교를 위한 도구로서 더욱 가치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비즈니스 선교, BAM 선교는 보다 많은 비즈니스 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한 다각화와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조기 은퇴한 전문인들과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BAM 선교 활성화 방안과 사례들을 찾고자 한다.   BAM 선교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주류이자 대세의 선교 방식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는 인공지능 AI와 사물인터넷, 빅데이터와 같은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사회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일컫는 말이다. BAM 선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더욱 정교하고 세분화된 전문가 집단의 선교 방식을 유도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정보통신기술과 융합하여 더욱 효과적인 선교를 이루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김성욱교수(총신대)는 그의 저서 <21세기 기독교 전문인 선교신학>에서 BAM 선교에 대해 “현대 선교의 효율적인 전략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선교전략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평신도 전문인 선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저자는 “전문인 선교사란 세상에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의 기회를 가진 자들로서 헌신되고 훈련된, 체험적인 그리스도인들로 자신의 세상의 직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섬기는 자들이다”고 정의하였다.                                                                                                                        / 아델포이교회, 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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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4-10-10
  • [신학] 오늘날의 신학동향 – 기독교 리더쉽
     리더는 선한 사업에 부를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미국은 아메리칸드림의 나라이다.카네기, 록펠러, 에디슨은 모두 가난한 흙수저 집안에서 자라나 꿈과 비전을 실현시켜 각각 철강왕, 석유왕, 발명왕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카네기는 일모작 인생에서 부를 일군 후, 이모작 인생에서 자신이 축적한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 규모는 전 재산의 90%에 이른다. 그는 “부자인 채로 죽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경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라고(딤전 6:17-18)”권고한다. 부는 쌓아두고 즐기거나 소망을 두는 대상이 아니라 선한 사업을 하고 풍성히 나눠주는 선행의 도구로 사용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   록펠러의 재산은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300조 원에 이르고 자선단체에 기부한 돈은 절반인 145조원에 이른다. 그의 재산은 2024년도 세계최고 부자인 일론 머스크의 263조원 보다 더 많다. 이재용삼성그룹 회장의 재산이 약15조원에 불과하다면 1937년에 사망한 록펠러의 재산은 아무도 넘볼 수 없다. 그 비결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에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용돈 20불을 받으면 2불은 교회 십일조로 바쳤다. 닭이 계란을 낳으면 10개당 1개는 하나님 몫으로 떼어 놓았다. 자립심을 심어주기 위해 이웃집 농장에서 감자캐는 일을 거들게 하고 일당으로 1달러 50센트를 받으면 15센트는 십일조로 구분했다. 록펠러는 십일조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세상 복리법이 아니라 하늘나라 복리법으로 되갚아주신다는 진리를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깨달았다. 석유사업으로 손대는 곳마다 성공하게 되자 아예 십일조만 담당하는 직원을 고용하고 수입의 10분의 1은 무조건 교회에 바쳤다.   리더는 카리스마가 아닌 온화하고 신뢰감을 주는 태도  아이젠하워에 의하면 리더십이란 잘못된 것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고, 성공한 것에 대한 공로는 부하에게 돌릴 줄 아는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전투과정에서 부하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반면 히틀러는 아무도 믿지 못했고, 모든 결정권을 혼자 행사했다. 그 결과 아이젠하워는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미국 3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이젠하워는 공직에서 퇴임 후 전 재산을 기부하고 낡은 포드자동차 한대와 하루 세끼 식사가 가능한 정도의 재산만 남기고 여생을 보냈다. 피터 드러커는 “리더는 히틀러와 같이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리더는 아이젠하워같이 온화하고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마가가 도중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생을 모르고 살아온 마가는 선교에 따르는 어려움을 감내할 용기가 없었다. 이러한 마가의 나약함은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갈라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이 반대했음에도 실패한 마가를 믿고 권한을 주었다. 그후 마가는 오랜 연단기간을 거쳐 다시금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공헌을 세우고 위신을 회복하였다. 사역이 마쳐질 때 바울은 다시 마가를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딤후 4:11). 이와 같이 권한을 위임해 주는 리더는 사람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 미드웨스트대학원 신학교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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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30
  • 제4차 로잔대회, 인천 송도에서
    ◇ 제4차 로잔대회가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개회했다.   2024 제4차 로잔대회가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지난 달 22일부터 28일까지 갖고, 새로운 선교전략으로 복음주의운동을 전개시키기로 다짐했다.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란 주제를 가지고 열린 이번 행사는 전 세계 202개국에서 5000여 명의 기독교 리더들이 참가해 선교역량 결집에 주력했다. 동대회는 로잔운동 국제본부가 주최하고 한국과 아시아 로잔위원회가 주관한 행사로 1989년 제2회 마닐라 대회에 이어 두 번째 아시아에서 열리는 대회가 됐다. 또 이번 제4차 대회의 특징은 1974년 스위스 로잔, 1989년 필리핀 마닐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이은 로잔의 50주년 기념 대회이다.   이번 대회의 준비위원장 이재훈목사(온누리교회)는 행사를 시작하는 자리에서 "먼저 기념비적인 4차 대회를 개최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첫인사를 전했다, 이목사는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사무엘 마펫선교사가 한국의 부흥역사를 전하며,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알렸다“며,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은 세계적인 기독교 강국이 되었다. 사무엘 마펫선교사의 비전의 결실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전 세계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제4차 대회가 복음을 전세계로 빠르게 확장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성경이 말하는 의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번 대회는 매일 오전 사도행전 성경강해를 시작으로 소그룹 토의, 주제 강의, 회의, 이슈네트워크, BAM, 지역 네트워크 등 다양한 모임이 이어졌다. 또 매일 저녁 회개, 기쁨, 성찰, 새로움, 화해 등을 주제로 집회가 진행됐다. 성경강해 주요 강사로는 페미 아델레예(랭햄 파트너십 디렉터), 패트릭 펑(OMF 대사), 필립 라이큰(휘튼칼리지 총장), 앤 자키(카이로 장로교신학교 교수) 등이 진행했다.   전체 일주일의 기간 동안 진행된 이번 제4차 로잔대회의 의미는 로잔언약에 나타나는 두 가지 핵심 가치가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할 가치로 제시되었다는 평가다. 로잔대회 측은 이번 한국대회의 의미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을 회복 △다극화된 선교적 영역을 조망하며 전략을 제시하는 선교대회 △복음을 향한 열정을 사도행전적 교회의 삶으로 증명하도록 도전하는 선교대회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비전은 연합해야 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대회 △다음세대 선교의 로드맵을 만드는 대회 △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는 듣고, 모여서 함께 행동하기 위한 로잔운동의 중요한 지점이다.   로잔대회는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였던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가 주축이 되어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진행된 대회가 시초였다. 이 대회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운동으로 확장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로잔운동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는 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전 세계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아이디어들을 연결하는 것을 핵심 사역 방향으로 삼고 있다.    또한 당시 강력하게 일어나던 자유주의 신학 사조에 대한 대안으로 복음주의 지도자인 빌리 그래함과 칼 헨리가 서구 신학의 빠른 변화에 대처하여 국제적 규모의 복음주의 진영을 연합하는 대회를 조직하였고 교회의 복음화 과업을 수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후에 존 스토트가 참여해 1974년 첫 번째 로잔대회가 개최되었고 그 시작은 이번 2024 서울대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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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5
  • [신학] 오늘날의 신학동향
      오세열교수, 목사    스마트폰은 편리한 문명의 이기이지만 깊이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는 노모포비아라는 증후군이 생겨났다. 이쯤되면 스마트폰은 더 이상 스마트하지 않다. 언어애호가들은 모든 단어를 두려움과 결합하여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구글에서 phobia list를 치면 A부터 Z까지 124개의 두려움목록이 나온다.    예를 들어 고소공포증, 주사공포증, 패쇄공포증, 전염병공포증 등이 있다. 성경에는 365번 두려워하지말라고 한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루스벨트 전미대통령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자체다”라고 말했다. 두려움은 모든 진취적인 마음을 마비시키고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나쁜 기억, 굴욕적인 사건 등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가만히 두어도 생생하게 불현듯 떠올라서 괴로움을 겪었던 경험들이 다 있을 것이다.      승리의 비결은 약점을 고치는 것보다 장점 강화에 있다 나쁜 추억들은 떠오르는 즉시 세 발자국을 떼기 전 휴지통에 버리도록 하자. 그리고 그 자리에 아름다웠던 추억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채우자. 그 순간 두려움은 날아가 버린다. 마리퀴리는 “인생의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이해해야할 대상이다”고 말했다. 영어에서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는 558개이다. 이 중 부정적인 단어가 62%인데 비해 긍정적인 단어는 38%에 불과하다. 인간은 부정적인 것에 집착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일을 한 위인들의 삶을 보면 동서를 불문하고 고난을 통과했다. 조선시대 정약용은 정쟁의 모함을 받고 강진땅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18년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실학사상에 몰두하여 500여권의 책을 집필하고 후세에 그 이름을 남겼다. 허준도 유배가지 않았으면 동의보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귀머거리의 역경을 극복하고 위대한 곡을 작곡했고, 에디슨, 링컨, 밀턴, 헬렌 켈러등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자들이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 위대한 열매를 얻는다고 제시한다 마리퀴리여사는 우라늄보다 수백 배 강한 방사능원소인 라듐을 발견하여 1차세계대전시 100만 명의 생명을 살려냈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 위대한 열매를 얻는다고 지적한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성공적인 리더의 품성으로는 성실함, 인내심, 신속함, 유머, 통찰력, 헌신, 유연성, 용기, 분별력, 매력, 검소, 열정과 몰입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품성과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실상은 실패자의 품성이 있다. 그것은 완벽주의, 변화에 대한 저항, 빨리빨리 신드롬, 경박스러움, 근시안적 사고, 일중독, 변덕스러움, 무모함, 맹목적 비판, 속임수, 구두쇠, 맹목적 충성 등이다.    올림픽종목 중 펜싱은 체구가 크고 팔길이가 긴 서구선수들이 독주했던 종목이다. 한국 펜싱선수들은 체구가 적지만 대신 발놀림이 빠른 장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일에서 승리비결은 장점을 강화하는 데 온힘을 기울이는데 있으며, 약점을 고치는 데 있지 않다. 빠른 발놀림을 강화하다 보면 약점은 저절로 고쳐지게 된다. 오상욱선수는 유연한 발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파리올림픽 2관왕을 달성했다.                                                                                                                                                                               / 미드웨스트대학원 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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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5
  • 기독교학술원, 젠더주의 세계관 비판
     ◇ 김영한교수가 기독교학술원 포럼에서 개회사를 전하고 있다.   젠더주의는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교수)은 지난 20일 양재온누리교회에서 「젠더주의 세계관 비판」이란 주제로 제47회 영성학술포럼 기도회 및 발표회를 진행했다. 이번 행사의 1부는 오성종박사(전칼빈대신대원장)의 인도와 이윤희목사(전한국군목회이사장)의 기도 그리고 정기철원로목사(여수성광교회)의 설교로 진행됐다. 정기철목사는 설교에서 “젠더주의 혹은 젠더 이데올로기라는 성 해방 문화혁명이 인권운동의 탈을 쓰고, 동성애 합법화와 차별금지법제정을 촉구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양성 가정과 사회적 기본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전통적인 양성 구조의 가치 체계가 붕괴되기 때문에 젠더주의 세계관을 비판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2부 발표회에서는 김영한원장이 개회사를 통해 “젠더주의 세계관은 오늘날 제3의 인류문화적 혁명 이데올로기로서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며, “유엔 내 젠더 세력이 추진하고 있는 젠더 주류화 운동은 1789년 프랑스혁명, 1917년 볼세비키 혁명과 더불어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제3의 역사적인 혁명’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이 봉건적 신분제에 대한 혁명이었고, 볼세비키 혁명이 사회적 경제체제에 대한 혁명이었다면, 젠더 주류화 운동은 인간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결혼과 가정의 기본 질서를 부정하는 문화인류학적 혁명이다”며, “이는 인간에게 양성 즉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양성을 근본적인 창조질서로서 주신 하나님 창조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신론적이며 무신론적인 이데올로기로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현숙경교수(침신대)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영향: 영문학 연구의 반성경적 전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란 주제로 주제발표를 진행했다. 그는 “전통적인 영문학 연구는 주로 텍스트의 내적 구조와 미적 가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형식주의와 신비평 같은 접근법은 문학 작품을 자율적이고 독립된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며 그 안에 담긴 보편적 진리와 인간 경험을 탐구했다 이러한 접근은 문학이 가진 예술적 가치를 강조하고 작품의 다층적 의미를 발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며, “그러나 20세기 후반 특히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이론이 도입되면서 영문학 연구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젠더 이론은 젠더와 성적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하며 문학 텍스트를 사회적 규범과 권력 구조를 반영하고 비판하는 도구로 전환시켰다. 이로 인해 문학 연구는 본래의 예술적 깊이와 독창성을 잃고 정치적 이념에 종속된 해석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고 제시했다.    교회는 하나님 뜻에 맞는 성에 대해 전하는 것이 중요 현교수는 젠더이론의 대표주자인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성경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버틀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고정된 자연적 사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 구조와 사회적 규범이 이를 형성하고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젠더를 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인 것으로 보고 기존의 성 역할을 해체 하려고 한다”며,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성별은 창조 질서의 일부로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점에서 성별의 고정성과 이분법적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남성과 여성 각각의 고유한 역할을 강조하며, 이는 창조 때부터 정해진 질서로 이해된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현교수는 “버틀러의 이론은 남성과 여성의 창조 목적을 약화시키고 그 고유한 역할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성경적 질서와 상충한다”며,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은 각자에게 부여된 고유한 책임과 역할이 있으며, 이는 창조주가 부여한 절대적이고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고 정리했다.       이어 한상화교수(아신대)는 「성혁명의 섹스 이데올로기, 젠더 이데올로기 그리고 트랜스젠더주의의 기독교적 비판」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성혁명의 도전을 마주하는 한국 교회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정신이 성에 끼치는 영향과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사탄적 행위에 대하여 명확히 알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며, “이와 같은 때에 교회는 본래 기독교가 가르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참 인간됨의 모습을 보여주며 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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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1
  • [신학] 오늘날의 신학동향 – 기독교 리더십
    오세열   리더는 교회·직장·가정에서 창의성을 구현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크리스천리더는 교회와 직장과 가정에서 항상 지혜롭게 창의성을 구현해 나가야 한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서 각 생물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9-20)” 수많은 생물이 아담 앞을 지나갈 때 그 생물의 특성에 맞게 그리고 하나도 중복되지 않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아담의 아이큐는 매우 높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가장 자유로웠고, 지혜와 창의성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 우리의 마음은 상실되고, 혼미하고, 허망하게 되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롬11:8). 그러므로잠언에서는 반복해서 상실한 지혜를 구하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잠 4:22)”이 된다고 했다. 지혜는 지식을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좋은 지식을 많이 가져야 한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지식을 풍성히 가져야 하기 때문에 성경은 지혜 못지않게 지식과 명철을 구하라고 한다.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2:2-5).” 지혜는 통찰력을 가지고 문제해결을 하기 위한 지적 능력이며, 지식의 도덕적 적용의 결과로 얻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욥35:10)”시다. 터키의 타루르스 산맥에 서식하는 두루미는 날아가는 동안 무척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멀리서 독수리가 듣고 날아와 두루미를 잡아먹는다. 현명한 두루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안 가득히 자갈을 물고 독수리를 피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날아간다.    지혜는 문제해결을 하기 위한 통찰력·지적능력이다  미물이라도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잠 18:6)’한다는 말씀대로 행동한다. 북태평양 흑고래의 사냥방식은 두 가지이다. 첫째, '팀웍 사냥'이다. 10마리 정도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원을 만들어 버블을 낸다. 고래가 입으로 산소가 있는 거품을 만들면, 기포가 있는 곳으로 물고기들이 몰린다. 거품을 따라 고기떼와 멸치 떼가 모이면 한 마리씩 돌아가면서 천천히 입을 벌려 식사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고래에게 준 지혜이다. 또 다른 사냥방식은 ‘점프 사냥’이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흑고래들이 공중으로 10미터이상 치솟았다가 바다에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공원의 돌고래 쇼도 아니고 아무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서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까. 무게가 수 톤에 이르는 흑고래가 치솟았다가 바다 표면에 떨어지면 그 충격은 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반경 수 십 미터에 있던 물고기들은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게 된다. 이때 흑고래 들은 유유자적 돌아다니면서 정신을 잃은 고기들을 포식하게 된다. 우리에게 공중의 새와 고래보다 더 큰 지혜를 주시는 이에게 명철과 지혜를 구하자.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욥 38:36)”라고 성경은 말한다.                                                                                                                / 미드웨스트대학원 신학교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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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실시간 신학 기사

  • 한국Q학회에서 ‘불트만학파’ 연구
    ▲ 사렛 예수의 말씀을 연구하는 Q학회에서 불트만과 불트만학파에 대한 페린교수의 연구가 발표됐다.   신약학자 불트만에 대한 상반된 평가에 대해 심층연구 불트만 제자들은 스승과 달리 부분적으로 역사성 주목   루돌프 불트만(사진)은 한국 신학계에서 이중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신약학을 넘어 조직신학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친 ‘탁월한 신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복음본질을 파괴한 ‘위험한 신학자’라고 생각한다. 한국Q학회에서 페린(N. Perrin)교수의 ‘불트만학파’ 연구가 발표돼 관심을 받았다.       페린은 모든 불트만의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가 묵시문학적 개념이며, 포함된 기대는 초자연적인 것, 즉 외계로부터 역사 안에 오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기대라는 것에는 스승과 일치한다. 그러나 불트만의 제자들은 이 기대의 초역사적 본질에 대해서는 스승 불트만만큼 강조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   페린은 “보른캄은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역사 안에서 성취될 것으로 보며, 푹스는 불트만이 예수의 선포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변증법적일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하면서 불트만의 견해의 ‘수정’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의 나라 개념 자체에 대한 새로운 연구 때문에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전반적으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강조의 약화에 기인한 것이다”고 전한다. 즉 “하나님이 이미 예수의 사역 안에서 그의 통치를 시작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역사 안에서 경험되는 것으로 보려는 새로운 경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역사적인 성격에 대한 강조를 약화하는 필연적인 관계를 가져온다”고 페린은 지적했다. 페린에 위하면 불트만은 예수가 미래에 있을 결정적인 사건을 기대한 것으로 보며, 바울이 이 사건을 바로 전의 과거에서 돌이켜보는 것으로 말한다. 반면 보른캄은 마태복음 11장12절을 세례자 요한이 ‘두 세대 사이의 경계를 지키면서 서 있는 자’이며 ‘숨겨진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말과 행위들 안에서 침입하고 있는’ 예수에 의해 아직 가려져 있는 자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서 예수의 사역 안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페린은 “불트만의 견해는 예수의 사역 안에 이미 성취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측면과 아직 미래적인 하나님나라의 측면 사이의 긴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거를 올바르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비판되어 왔다”며, “불트만의 제자들은 강조점의 변화에 있어서 이 증거에 대한 측면을 정당히 취급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캐제만과 보른캄과 콘첼만의 견해를 비교한다.   캐제만은 “예수가 마태복음 11장 12절의 말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예수 자신의 말들 안에서 그의 청중들에게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주장한다. 보른캄은 “현재가 궁극적인 미래의 결단들을 포함하는 것에 의하여 예수 안에 이미 현존하는 갈등과 승리에 대해” 말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사역 안에서 현재하는 것이며 숨겨져 있지만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미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자에 대해 구원이며 하나님의 현재는 구원의 때”이다.  페린은 콘첼만이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현재와 미래의 요소들을 종합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논의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시간적 요소를 계속 강조하려는 그런 시도는 반드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또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기대 속에 있는 임박함의 정도를 예리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인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선포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설교는 구원의 선포”이기도 하다. 페린은 이러한 강조의 변화가 푹스의 작업에서 가장 급진적이라고 설명한다. “푹스는 예수를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에 직면하여 회개하도록 촉구한 자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자신과 함께 찬양하는 집단으로 모아들인 자로서 쿰란 종파와 대조시킨다”고 페린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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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5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7)
    예수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그의 해를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 위에 비추고 비를 ……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위의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사랑의 가르침을 토대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성을 기초로 예수의 제자들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여기서 부성의 신학이 커다란 지위를 얻게 된다. 부성의 신학이란 자연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연신학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유의 신으로 창조하신 만물이 보존되고 재창조되도록 자비를 베푼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듯이 해도 비추고 바람도 불게하고 비도 내린다. 이런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계시와 통한다. 그러나 부성의 신학은 특별계시이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일반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과는 달리,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통로인 성경에 기초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요즘 여성신학이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하는 것에 저항하여 하나님을 어머니라고까지 칭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성경적 표현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단 중에서 영지주의는 ‘하나님 어머니’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가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 이레네우스가 저마다 ‘이단논박’이란 책을 통하여 그리고 에스파니우스가 ‘파나리온’이란 책을 통하여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미 고대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제명된 것을 자유주의 신학이 고개를 들어 다시 여성신학이 그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이념적으로 ‘하나님 어머니’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더구나 요즘 사회가 개방되면서 인권이라는 이념하에 동성애를 지지하면서 성경을 허무맹랑하게도 퀴어신학으로 풀어내는 목사들이 있다. 이것도 성경을 왜곡하고, 더 나아가서 양성평등을 교묘하게 바꾼 동성애를 지지하는 그릇된 사회적 젠더 이데올로기로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부성의 신학을 거부하는 이단적 신학이다. 그래서 2018년 9월에 이리 신광교회에서 모인 통합 교단은 “퀴어신학은 이단이다”라고 결의를 하여, 프린스톤을 중심으로 한 미국장로교가 동성애를 받아들임으로써 치명적 교단 분열을 자초한 것에 강력하게 대비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하게 관계를 설정해줌으로써, 다른 대부분의 종교에서 하나님을 멀기만 하고 무서운 존재로 대하는 것과는 달리, 마치 어린 애가 옹알이를 하는 것과 같은 친근한 언어인 ‘아바 아버지’로 하나님을 부르면서 친근하게 다가갈 것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부성을 신학을 일깨워 주신 예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가르치신다. 자연계시를 통하여 모든 이에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일깨우신 후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특별계시의 차원에서 부성의 신학적 관계에서 인간을 아들로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신다. 자비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극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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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5
  • 코클리박사 삼위일체론 연구발표
    ▲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코클리박사가 기도와 욕망과 성을 매개로한 삼위일체론 해석을 발표했다.   올해로 12년차를 맞은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에서 사라 코클리박사(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가 「기도, 삼위일체론의 근원」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삼위일체론에 관한 색다른 접근이어서 학계의 큰 관심을 받았다.  코클리박사는 삼위일체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삼위일체론이 도대체 왜 필요하였는가? 왜 하나님이 ‘삼위일체적(triune)’이라고 처음에 이론화 되었는가?” 4세기 공의회 협상을 통해 결정된 삼위일체적 정통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나의 ‘본체’ 안에 계시는 세 ‘위격들’이라고 규범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비범한 신학적 성취였다”고 코클리박사는 설명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심대한 신학적 및 영적 위험을 초래했다. 왜냐하면 “정통은 적어도 반어적 비정통이 되는 잠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코클리박사는 삼위일체에 대해 ‘단선적 모형’과 ‘포함적 모형’을 구분한다. 단선적 모형은 “성부-성자 관계성에 일차적인 초점을 두기에 성령은 이 관계성을 교회에 이차적으로 조달하는 자가 된다. 이미 주목하였듯이 이 모형은 요한복음에서 막강하게 표현되며, 사도행전의 교회시대 이야기와 함께 확장됨으로써 추가적으로 확증된다”고 코클리박사는 설명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포함적 모형에서는 “성령이 단지 그리스도의 계시를 확장하는 분으로만 이해되지 않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분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성령은 피조영역이 하나님의 삶 안까지 실제로 따라가게 하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코클리박사에 따르면 단선적 모형이 승천과 오순절을 구분하는 사도행전에, 또한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다른 보혜사’에 관한 요한복음 예언에 암묵적으로 근거하는 반면, 포함적 모형은 우선 바울에게 근거하며 특히 로마서 8장에 지대하게 근거한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은 “기도하는 기독교인이 성령의 활기를 북돋워 주고 촉발하여 주시는 사역과 함께 행하는 협력적 활동”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클리박사는 “삼위일체의 본질은 하나님이 창조세계와 함께 지니시는 은혜로운 방식들이다. 즉, 창조세계를 성자의 삶 안으로 이끄시고 그것을 본받게 한다”며,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때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우선순위는 성령에게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이기에 성부의 확장을 가리키는 비유적 이름으로 전혀 환원 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코클리박사는 “기도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미분화된 신과 대화를 하고 그런 다 음에 이 대화를 ‘인격’(성령)으로 ‘위격화하도록’ 요청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의 지속적 행동에 관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기도가 “내면으로부터 인격적으로 및 신적으로 활성화된다는 점을, 그렇지만 그러한 활성화(성령)가 기도의 원천(성부)으로 전혀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로 하여금 주장하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코클리박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에게 근거하는 것이며 또한 그를 어느 정도 넘어서서 명시적으로 삼위일체적 언어로 나아가는 것임이 이미 널리 인정된다”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입장이 아무런 반대도 없이 ‘정통적’ 삼위일체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심오하고 중요한 통찰들이 있다”고 코클리박사는 강조했다. 예를 들면 기도의 대화가 엄밀하게 말해서 개인과 신적 단자(單子) 사이의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 재귀성의 운동이이다. 즉 “기도자 안에서 및 기도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행하시는 일종의 응답이라는 점은 관상적으로든 은사적으로든 기도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식하는 바이다. 만약 내가 옳다면, 여기에는 성령을 ‘위격화하는’ 것으로, 즉 성령을 구별된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하게 타당한 경험의 압력이 존재한다”고 코클리박사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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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5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6)
    ▲ 소기천교수   황금률에 이어서 예수께서는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였다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까지도 그들에게 …하지 않느냐? 그런데 만일 너희가 너희 형제들만 사랑하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말씀으로 차별화를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황금률을 일반화하여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예수말씀의 진가를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 것처럼, 이 말씀도 예수사랑이 지닌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예수말씀이 세리와 이방인을 멸시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던지는 질문은 예수말씀이 지닌 수사학의 특징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곧 상 받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어 갖는 이른바 자기중심적 사랑은 이기적이기에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는 말씀은 수사학적으로 청중들의 반감을 불러오는 화법이다. 이 말을 연거푸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사람만을 챙기는 인간의 일그러진 일상적인 사랑에 충격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사랑이 인종, 혈연, 지연, 학연, 지역 등을 넘어서 편만하게 모두에게 나아가야 갈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한 율법사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읽어보라. 어느 특정인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계와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사랑이다. 누구나 자기 몸을 사랑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고작해서 이웃이 ‘세리’와 ‘이방인’처럼 자기들끼리만 형제라고 생각하고 나누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상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이슬람의 형제사랑은 단편적이고 자기 종교만을 감싸는 배타적인 사랑을 꾸란이 노골적으로 두둔하면서 ‘우리는 모두 무슬림’이라는 말이 이슬람교에서 흔하게 쓰인다. 이 말대로 무슬림은 집단 종교적 세력화를 도모하려고 철저하게 타 종교를 등한시한다. “이교도의 목을 쳐라‘는 말이 꾸란에 빈번하게 나오는데, 복음서에 나오는 이방인들에 익숙한 성도들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지만, 사실 꾸란에서 이교도는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 철저하게 기독교를 배제하고, 말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단 한 명이라도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 개종자가 나오면 명예살인까지도 일삼는 것이 이슬람의 일그러진 형제 사랑이다. 이슬람의 성전 곧 거룩한 전쟁이라 일컫는 지하드를 아름답게 미화하는 이슬람 학자들이 있지만, 이는 분명한 거짓 선전이다. 이슬람의 지하드가 아름다운가? 결코 아니다. 지하드의 어원인 아랍어 ‘자하다’는 ‘분쟁’이라는 뜻이다. 물론 ‘전쟁’을 뜻하는 아랍어는 지하드가 아니라 ‘키탈’이나 ‘하브’가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지하드에는 군사적 의미가 강하다. 이슬람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무력이나 군사적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지하드이다. 이런 무서운 폭력적인 지하드가 이슬람의 형제 사랑으로 둔갑하여 타 종교를 철저하게 배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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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1
  • 개혁교회 종교개혁·신학교육 조명
    한국개혁신학회(회장=이승구박사)는 지난 25일 백석대학교(총장=장종현박사) 백석아트홀에서 「개혁교회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신학교육」이란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진행하고, 예배와 학술발표를 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개혁주의생명신학회(회장=이경직박사)와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발제자로 김영한원장(기독교학술원)과 주도홍박사(개혁·장로교회 종교개혁500주년기념대회), 유충국박사(백석대), 한상화박사(아신대), 오현철박사(성결대), 조병하박사(백석대), 우병훈박사(고신대), 김윤태박사(백석대), 박성철박사(총신대), 류성인박사(합신대), 진대경박사(성서침대), 양신혜박사(대신대), 박찬호박사(백석대), 조용석박사(연세대), 김지훈박사(신반포중앙교회), 이상은박사(서울장신대), 김요셉박사(총신대), 박영권박사(장신대) 등이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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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19-05-21
  • 기독교학술원서, ‘성령과 하나님 나라’ 조명
    ▲ 기독교학술원은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포럼을 열었다.   ▲ 김영한박사   성령의 사역은 삼위일체의 구속 경륜 속에서 해석될 필요성 하나님의 나라는 백성으로서 사람의 요소 있는 포괄적 개념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박사·사진)은 월례포럼을 통해 한국교회에서 꾸준하게 영성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5월포럼에서는 성령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국내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심도 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먼저 김영한박사는 「성령 하나님은 창조부터 종말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 위해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일하신다」는 주제발표를 통해 “성령은 창조사역에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셨고, 신앙의 열조 아브라함의 후손들 이스라엘 민족으로 선택했으며, 이들이 하나님 법을 떠났을 때 심판하시고 다가오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오순절에서 결정적으로 임재했다”며,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창조와 구약시대에서 일하시고 신약시대에서 오신 성령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경륜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승현교수(호서대)는 「신구약에 나타난 성령과 교회」란 발표에서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의 역사로 발생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예루살렘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회중 곧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며, “성령으로 충만해진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무리와 구분되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아로 믿고 경배하는 새로운 에클레시아 곧 교회를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재현교수(한동대)는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상관관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통치권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통치권이 미쳐지는 영역과 그 안에 존재하는 백성으로서의 사람의 요소들도 함께 있는 포괄적 개념이다”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속 반역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 반역의 나라에 대한 완전한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성령은 이 모든 과정에 중요한 존재로서 역할을 한다. 창조를 통한 시작 단계에서 하나님의 바람/숨/영으로서 말씀의 창조의 통로이며 능력이며 지혜이다”며, “옛 언약 관계에서 사람들에게 임하여 언약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와 돌봄, 심판과 회복의 일을 한다. 또 새로운 관계를 얻게 하는 과정, 곧 새 창조와 거듭남의 과정에도 성령이 관여한다”고 강조했다.  조영모교수(건신대)는 「누가와 바울이 말하는 성령과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가 기술하는 성령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다분히 한정적이다”며, “적어도 누가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현현은 오히려 기독론적인 면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인식할 수 있는 계시적인 능력이 되며, 동시에 그 성령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수단이 되고 있다. 구원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 사는 삶 그 자체가 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예배에서 조은식박사(숭실대교목실장)는 설교에서 “지금은 1907년 대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의 최대위기다. 이것은 영적 위기 또는 영성의 위기라고 진단하기도 한다”며,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해서 나타난 현상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령의 역사는 계속됨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잘 인식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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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1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5)
    ▲ 소기천교수   예수말씀은 “너희에게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라. 빌려준 사람에게 다시 갚으라고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잘 알려진 613개의 유대 율례 중에서 부정적인 율례 365개(참고로 긍정적인 율례는 248개) 중에서 234번째에 해당하는 가르침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 자꾸 갚으라고 하지 말라’는 교훈은 ‘다시 갚으라고 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구분된다. 유대 율례는 단지 금전적인 채무에만 국한하고 있지만, 예수말씀에서 ‘구하는 사람’은 궁핍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 전반을 가리킨다. 그는 단지 금전적인 빚이 아니라, 의식주 전반에 걸쳐서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이다. 의식주 가운데 무엇보다도 당장 하루 끼니가 없는 사람의 처지가 가장 다급하다. 옛날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에 농촌에서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너무 풍요로워져서 보릿고개가 어느 언덕인 줄로 아는 젊은이가 있을까 봐 구차하게 사족을 달아본다.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음력 4~5월경이 춘궁기 혹은 맥령기이다. 농민들은 지난 추수 때 걷은 농작물 가운데 소작료·빚·이자·세금 등을 뗀 다음, 남은 식량을 가지고 초여름 보리 수확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이때는 대개 풀뿌리나 소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고,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근래에 와서는 경제성장과 함께 농민들의 소득도 늘어나고, 생활환경도 나아짐에 따라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실감 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와 8·15해방을 지내고 한국전쟁을 치른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보릿고개 때문에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어서 실컷 배불리 먹어보겠다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인구가 대거 몰려들었다. 식구들마저 굶어 죽는 판에 과연 예수말씀대로 빌려준 것을 다시 갚으라고 이웃에게 말하지 않는 삶이 쉬울까? 레위기 19장을 읽어 보라. 예수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그렇게 해주어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황금률로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이런 황금률도 마태복음 7장 12절과 누가복음 6장 31절이 각각 해석을 달리하고 있지만, 예수말씀은 단지 아주 진솔한 언어로 ‘이웃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9절)고 권면을 이어가신다. 정작에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 한 율법사에게 주신 이 말씀은 예수말씀 복음서에는 없는 가르침이지만, 누가복음 10장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으로 집약되기도 한다. 이웃이 내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랄까? 이 질문은 곧바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까?’라는 질문으로 바꾸며, 우리가 이웃에게 받고 싶은 대로 이웃에게 그대로 해주라는 말씀이 된다. 그야말로 내 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다시 갚으라 하지 말고 빌려주고, 이웃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주라는 것이 예수말씀이다. 이 황금률을 공자나 부처 혹은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성현들의 가르침에는 통하는 바가 있다고 일반화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의 황금률은 말 만하고 삶을 전혀 다르게 산 여타 종교의 창시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 그대로 삶의 모범을 보이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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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9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4)
    ▲ 소기천교수   예수말씀은 누가복음 6장 29절 상반절에서 “너희 뺨을 치는… 사람 …에게는, 다른 뺨도 돌려대어라”고 권면한다. 원수 사랑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서 예수께서는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라고 권면하신다. 여기서 ‘돌려대라’는 단어는 우리말의 현재 명령형처럼 보이는 어법과는 달리 과거 명령형이다. 우리말이 뺨을 계속해서 돌려대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헬라어 ‘스트렙손’은 뺨을 맞다가 어느 순간에 일회적으로 돌려대어 상대방에게 경종을 울려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만일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계속해서 참고 뺨을 맞기만 한다면, 이는 제정신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어느 순간에 나를 해하는 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면서 그렇다고 폭력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뺨을 한순간에 돌려대면서 그가 내게 하는 행동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대어 주라”(예레미야애가 3장 30절)는 말씀이나 “너희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름 뺨도 돌려대어라”(누가복음 6장 29절)는 말씀은 상호 유사점이 많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처구니없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이 일어난다.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을 읽어 보라. 특별히 3장 13절은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권면한다. 물론 뺨을 맞는 일이 선한 일이라기보다는 수치스럽고 피하고 싶은 고난이다. 그러나 무고하게 뺨을 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부당한 행동을 합리화하고 더욱더 가리기 위해 급급해하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많다. 이들을 보면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뺨을 돌려대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6장 29절 하반절에서 “너희 겉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너희 속옷까지도 거절하지 말아라”고 권면하신다. 겉옷은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벌건 대낮에 속옷도 줄 수 있을까? 창피를 무릎 쓰고 겉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속옷도 줄 수 있다면, 그는 내공이 보통 인물이 아니다. 유대 풍습에서 겉옷과 속옷은 구분이 없이, 그냥 한 통으로 짠 천을 온몸에 두르는 형식의 의복이다. 그 때문에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은 피할 수 없이 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을 주라는 말씀은 억지로 빼앗으려는 자에게 줄 수밖에 없는 당시 신앙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박해의 삶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편 22편 18절)라는 말씀대로, 십자가상에서 모든 죄인을 위해 그 속옷까지도 모두 내어 주셨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요한복음 19장 23절) 로마의 미신 중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죄수의 옷을 나누어 가지면 행운이 깃든다고 믿었기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의 옷깃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신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자기를 비워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자기 비움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워내게 모든 것을 채워주신 분이시다. 그래서 내 잔이 넘치게 된 것이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이 유일한 나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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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2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3)
    ▲ 소기천목사   예수말씀은 누가복음 6장 28절에서 “그리고 너를 비방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여라”고 권면한다. 비방과 기도를 단순하게 대비시킬 때, ‘비방 〉 기도’, ‘비방 〈 기도’, ‘비방 ≤ 기도’, ‘비방 ≥ 기도’ 등으로 구분된다. 비방이 큰지 기도가 큰지 혹은 비방과 기도가 서로 어떻게 상쇄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런 수리·논리적 비교와는 달리 성경은 기도에 대한 접근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잠언 27장 11절의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는 말씀에 감히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를 향해서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중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에게 대답하신다고 가르친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그 자녀들이 거역하지 않고 그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대답하시겠다는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예수말씀은 잠언의 바로 이런 지혜의 말씀을 배경으로 할 때, 제대로 이해가 된다. 예수는 지혜자로 오신 분이시다.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의 가르침을 ‘지혜 교사의 가르침’으로, 제임스 로빈슨은 ‘지혜자들의 말씀들’로 중시하였지만, 예수는 지혜 그 자체이시다. 잠언의 지혜를 잘 알고 계신 예수께서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비방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가르치신다. 기도는 단순한 외침이나 일방적 방언 혹은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아니다. 기도는 대화이고 응답이다. 예수께서는 비방하는 자로 인하여 괴롭고 힘들 때 원망하거나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대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소홀히 여기는 성도들이 많다. 기도하려 하지 않고, 아니 기도만 빼놓고 모든 일을 다 한다. 이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차라리 일하지 말고 가만히 자리를 펴고 앉아서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고 일할 때는 내가 일하지만, 가만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읽어 보라. ‘기도하여라’는 단어인 헬라어에만 독특하게 나오는 중간태 명령형은 ‘주어가 한 행동의 결과도 주어에게 미치게 하는 화법’이기에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곧 나를 비방하는 자를 위해서 참고 인내하면서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정작 비방하는 자에게 아무런 효과를 미치지 못할 때, 그 기도는 결국 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미치게 된다. 왜 비방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그를 변화시키지 못할 때도 내게 기도의 응답이 임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비방하는 자를 위해 계속해서 참고 고동을 감내하면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가 상대방에게 임하지 않을 때도 그 기도가 쌓여서 내게로 응답이 되는 놀라운 비밀의 차원이 있다. 흔히 중보기도를 나와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비방하는 자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특별관리를 하셔서 그 기도가 비방하는 자를 변화시키지 못할 때, 오히려 나를 변화시켜서 내게 응답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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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3
  • 허정윤박사, 새 창조신학착상 발표
      열역학 제1법칙 ‘우주에너지 총량은 영원불변’을 제시 과학적 사실 통해 무신진화론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 과학적 유신론의 권위자인 허정윤박사(〈과학과 신의 전쟁〉 저자, 케리그마신학연구원 연구교수)는 기존의 ‘창조과학’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가한다. 이를 통해 기독교 창조론에 대한 새로운 틀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허박사는 창조론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는 글을 발표했다. 허박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인간이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이다”고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초월적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 우주의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속성에 비교해서 근접할 수 없는 질적 우월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허박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우주와 우리의 생명은 ‘저절로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 우주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왜 그럴까? 허박사는 “무신론자들은 우리 우주가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우리 우주가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우리 우주 안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또한 우리 우주가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 우주 밖에 존재하는 초월세계도 알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초월세계에는 영원불변하는 두 존재가 입증되고 있다. “첫째는 과학의 기초인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는 우주에너지의 총량이 영원불변하게 존재하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이 영원불변하게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허박사는 설명했다. 허박사에 의하면 무신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의하여 대표되고 있다. 그리고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창조자가 한 개 또는 몇 개의 원시생물을 만들었고, 그것이 자연선택에 의하여 각종 생물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또 오파린은 유물론과 다윈의 진화론을 결합하여 무신진화론을 주창했다. 허박사는 “지구의 나이는 과학적으로 가장 길게 보는 것이 46억년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우주가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초월세계의 영원한 시간은 지구의 나이 46억년에 수십억 배를 곱해도 채우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이다”며, “그리고 초월세계의 에너지는 에너지·물질 등가의 법칙(E=mc²)에 의하여 물질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고 설명했다.  또 무신진화론에 의하면 초월세계에서 ‘저절로 우연히’ 생명의 발생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그 생명이 우리우주의 역사보다 엄청나게 긴 영원한 시간 동안 진화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허박사는 “무신진화론에 의하면 초월세계의 생명이 지구에서 진화한 인간들과 비교하여 엄청난 초월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 진화되었다는 합리적 추론 또한 부정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신진화론에 의하여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는 ‘저절로 우연히’가 아니라, ‘저절로 필연적’이라는 것이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초월적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그가 작정한 대로 E=mc² 법칙에 의하여 초월세계의 우주에너지를 우리우주의 물질적 구조로 전환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무신진화론이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며, “이와 같이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추론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진화론이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이론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허박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위와 같이 성경과 과학을 통섭적으로 이해하면, 무신진화론자들의 ‘여리고성’을 함락하는 무기는 바로 무신진화론을 역이용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며, “이제 현대 기독교인들은 무신진화론의 여리고성 함락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무신진화론자들의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나면,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 예루살렘’을 내려주실 것이다(계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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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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