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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레모스 영성6] 시험의 땅, 광야
    광야에서 예수에게 다가온 3번째 유혹은 이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 즉 권력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땅의 통치권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역할을 하려면 권력이 필요할 것이고 이것이 현재는 나에게 속해 있으니 내게 절을 하면 너에게 넘기겠다는 말이다. 왕국의 통치권은 왕에게 있고 공화국의 통치권이 국민에게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이 보낸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기름이 부어지고 보냄을 받은 권력 수임자가 바로 메시아이다. 따라서 메시아라는 개념에는 이미 정치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내가 당신에게 통치권을 넘겨주겠다. 여기에 따라오는 영광스러움도 알고 있을 것이다”라는 사탄의 말을 해석하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은 현재 사탄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고 이를 넘겨받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상 거짓이며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이를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고대의 정치체제를 예로 들자면, 사탄을 천자국의 황제로 삼고 그 밑에서 제후국이나 부마국의 왕 자격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를테면 로마 황제와 분봉왕 헤롯의 관계에 해당 될 것이다.   통치를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굴종과 타협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때때로 합리화 될 수 있다. 이는 오늘의 정치가들에게도 끊임없이 요구되는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6:13).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며 이렇게 마무리 한다. “나라(kingdom)와 권세(power)와 영광(glory)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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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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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3
  • 성서와 생활 [18] 그리스도인의 영성- 십자가 죽음의 영성
       사순절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 된다. 묵상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 파이퍼는 <성경읽기>란 책에서 한 신학자의 의견을 제시한다.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스스로 신이 되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 이상의 체험적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십자가를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가 온전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를 우러러 봄으로 죄에 대하여 자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옛사람’이 죽은 것이며(롬6:6), ‘죄의 몸’이 죽은 것이다. 육신의 ‘정욕과 탐심’(갈5:24)이 못 박혔기 때문에 자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갈6:14)라고 말한바 세상에 대하여도 죽은 것이다. 이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건짐받아 세상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는 상태를 체험하게 하신다.    ‘죄에게 종노릇 하지’(롬6:6)않는 삶을 살기 위해 죄에 대하여 알아야한다. 여기서의 의미는 주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벗어난 그 이상을 의미한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피해야 할 죄를 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힌 역사를 믿어야만 한다. 아담에게서 나온 죄의 성향을 십자가로 이겨야 한다. 이러한 죄의 터전이 자신의 선한 의지대도 살려는 자아를 또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라는 바울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고전2:2) 우리가 더 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지금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매우 안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보기만 한다면, 알기만 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위험에 놓여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한다. 보혈의 공로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보신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죄와 무관한 안전함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체험하는 길이 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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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3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0) 건포도 되게 하시는 주님
      환란과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만드시는 분 내게 첫째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영광이 내게 영생이 되도록 책임져 주시는 사과나무 같은 주님이시다.    2:5 건포도 과자로 나에게 힘을 돋우고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낫나이다.    포도송이를 며칠 동안 상온에 두면 썩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물 포도를 햇볕에 바싹 말리면 건포도가 된다. 건포도는 썩지 않는다.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은 물기 있는 포도와 같다. 물기가 있으니 풍성하다. 그러나 그것은 물기 있는 포도와 같이 금방 썩고 마는 것이다. 주님은 내게 있는 세상적인 좋은 것들을 바싹 말려서 건포도 같은 과자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이것을 통해 오히려 환란과 어려움 중에서도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만드시는 분이다.     마치 욥에게 갑절의 복과 영생의 참된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욥을 바싹 말려 주신다. 이는 욥을 건포도 되게 하신 역사이다. 즉 광야에서 큰바람이 불어 욥 집의 네 모퉁이를 치니 무너졌다. 욥의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죽게 하셨다. 부인도 욥을 떠났다. 더욱이 욥 자신의 몸에는 악창이 나고 피부암으로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욥의 친구들과 종까지도 그를 떠났다.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서 오히려 욥을 계속 찌르는 도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욥을 건포도 되게 하신 것이다. 건포도 되어진 욥은 그것으로 멸망했나? 아니다. 결국 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다. 하늘의 영광을 모두 받아 누리는 자가 되었다. 주님이 우리를 건포도 되게 하시려고 바싹 말리는 역사를 할 때 원성이 나오고 불평이 나온다면? 이는 아직 건포도가 안 된 것이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부는 반드시 주님께서 그를 욥과 같이 건포도 되게 하신다. 어떤 환란과 고난이 와도 오히려 찬송하는 자로 만드신다. 그다음은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 하게 된다. 여기서 사과는 3절과 같은 사과나무는 아니다. 4절에 잔칫집으로 인도함 받는 신부에게의 사과는, 환란 시에 고문당해도 기쁨이 터지고 죽이는 사형장에서도 찬송이 넘쳐 늘 감사와 찬송이 터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이는 7년 환란 중에 순교 당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그분이 나로 기쁨과 찬송으로 영광 돌리며 순교케 해주시는도다.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나이다’ 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내가 예수님을 병이 날 정도로 사랑하면 좋은 것일까? 좋은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주님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요 15:12).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내 안에 있어서 그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절대로 병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주체가 내가 된다면, 그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상사병이 난다. 이렇게 병이 났을 때 신랑이 되시는 주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6~7절 말씀대로 해주신다.   2:6 그의 왼손이 내 머리 아래 있고 그의 오른손이 나를 껴안는 도다. 주님의 왼손을 베개 삼듯이 신부 성도 머리 아래 두고 주님의 오른손은 신부를 꼭 껴안는다. 주님이 신부의 몸 위에서 신부를 휘감듯 껴안아 주시므로 한 몸이 된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써 먼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출발해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신부 신앙 차까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신부는 주님 품 안에서 사랑과 은혜를 더욱 받음으로써 상사병도 낫고, 미숙했던 부분도 온전하게 익어진다.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열매 맺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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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3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 이영식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을 지낸 이영식원로목사(사진)는 교단 총무와 재단이사장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교단 총무를 맡은 당시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행사의 실무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목포기독교연합회회장 등을 통해 대외적인 활동에도 앞장섰었다.    이목사는 은퇴 이후에도 교단과 미션스쿨인 목포덕인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 성금을 기탁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목포시에서 저출산 극복을 위한 운동의 추진위원장 맡으면서 4월에 열릴 목회자세미나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최근 합동한신측은 은퇴 이후에도 교단에 성금을 기탁하는 등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 이목사에게 공로패도 수여했다.    이목사는 “지난 1일 교단에서 열린 제직세미나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은퇴한 이후에도 교단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높게 평가를 해준 것 같다. 교단의 많은 분이 귀한 일을 했다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했다”면서,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은퇴 이후에도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서 헌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목사는 모교인 목포덕인고등학교 목회자협의회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되면서 학교에 장학금도 기탁했다. 이목사가 성금을 기탁하는 곳은 교단내 목회자와 방송선교 등 다양하다. 이목사는 “하나님께서 물질을 보낼 곳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많은 분들의 지원으로 기탁할 재정도 채워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목사는 목포지역의 저출산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특히 4월에 저출산대책을 위해 목포지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도 준비 중이다. 이 집회에는 전남지역목회자들도 초대해서 진행할 예정이다. CBS 김진오사장과 아동돌봄으로 출산운동에 앞장선 당진동일교회 이수훈목사를 초청해 저출산에 대한 해법을 모색한다.    이목사는 “우리나라가 저출산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면서, “생명이 있어야 교회가 세워진다. 그래서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래서 이런 집회를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목포지역에 위치한 로고스교회에서 설교목사로 섬기고 있다.      은퇴 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목사는 “주님의 일이라면 충성되게 섬기고 싶다. 주님의 선한 일을 끝까지 하는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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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4-03-10
  • 류봉현작가의 「예수」
        류봉현작가의 「예수」는 단조로운 바탕에 가시 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 있게 표현되어 있다. 조금만 있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 많은 모든 인류의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할 일을 생각하고 계신 듯한 표정이다. 극히 단조로운 구도에 단조로운 색채는 독자들의 시선을 몰입하게 만든다.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 잘못된 판결을 내림으로 왕복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혔다. 벗기고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씌우고 침을 뱉는 등 희롱을 당할 때 예수님의 모습은 한결같이 맑고 깨끗하게만 느껴진다. 맞서서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은 독자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마태복음 27:28~31의 장면과 마가복음 15:16-20의 장면을 심도 있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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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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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레모스 영성6] 시험의 땅, 광야
    광야에서 예수에게 다가온 3번째 유혹은 이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 즉 권력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땅의 통치권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역할을 하려면 권력이 필요할 것이고 이것이 현재는 나에게 속해 있으니 내게 절을 하면 너에게 넘기겠다는 말이다. 왕국의 통치권은 왕에게 있고 공화국의 통치권이 국민에게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이 보낸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기름이 부어지고 보냄을 받은 권력 수임자가 바로 메시아이다. 따라서 메시아라는 개념에는 이미 정치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내가 당신에게 통치권을 넘겨주겠다. 여기에 따라오는 영광스러움도 알고 있을 것이다”라는 사탄의 말을 해석하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은 현재 사탄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고 이를 넘겨받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상 거짓이며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이를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고대의 정치체제를 예로 들자면, 사탄을 천자국의 황제로 삼고 그 밑에서 제후국이나 부마국의 왕 자격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를테면 로마 황제와 분봉왕 헤롯의 관계에 해당 될 것이다.   통치를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굴종과 타협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때때로 합리화 될 수 있다. 이는 오늘의 정치가들에게도 끊임없이 요구되는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6:13).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며 이렇게 마무리 한다. “나라(kingdom)와 권세(power)와 영광(glory)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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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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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3
  • 성서와 생활 [18] 그리스도인의 영성- 십자가 죽음의 영성
       사순절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 된다. 묵상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 파이퍼는 <성경읽기>란 책에서 한 신학자의 의견을 제시한다.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스스로 신이 되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 이상의 체험적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십자가를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가 온전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를 우러러 봄으로 죄에 대하여 자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옛사람’이 죽은 것이며(롬6:6), ‘죄의 몸’이 죽은 것이다. 육신의 ‘정욕과 탐심’(갈5:24)이 못 박혔기 때문에 자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갈6:14)라고 말한바 세상에 대하여도 죽은 것이다. 이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건짐받아 세상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는 상태를 체험하게 하신다.    ‘죄에게 종노릇 하지’(롬6:6)않는 삶을 살기 위해 죄에 대하여 알아야한다. 여기서의 의미는 주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벗어난 그 이상을 의미한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피해야 할 죄를 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힌 역사를 믿어야만 한다. 아담에게서 나온 죄의 성향을 십자가로 이겨야 한다. 이러한 죄의 터전이 자신의 선한 의지대도 살려는 자아를 또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라는 바울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고전2:2) 우리가 더 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지금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매우 안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보기만 한다면, 알기만 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위험에 놓여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한다. 보혈의 공로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보신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죄와 무관한 안전함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체험하는 길이 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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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3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0) 건포도 되게 하시는 주님
      환란과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만드시는 분 내게 첫째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영광이 내게 영생이 되도록 책임져 주시는 사과나무 같은 주님이시다.    2:5 건포도 과자로 나에게 힘을 돋우고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낫나이다.    포도송이를 며칠 동안 상온에 두면 썩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물 포도를 햇볕에 바싹 말리면 건포도가 된다. 건포도는 썩지 않는다.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은 물기 있는 포도와 같다. 물기가 있으니 풍성하다. 그러나 그것은 물기 있는 포도와 같이 금방 썩고 마는 것이다. 주님은 내게 있는 세상적인 좋은 것들을 바싹 말려서 건포도 같은 과자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이것을 통해 오히려 환란과 어려움 중에서도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만드시는 분이다.     마치 욥에게 갑절의 복과 영생의 참된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욥을 바싹 말려 주신다. 이는 욥을 건포도 되게 하신 역사이다. 즉 광야에서 큰바람이 불어 욥 집의 네 모퉁이를 치니 무너졌다. 욥의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죽게 하셨다. 부인도 욥을 떠났다. 더욱이 욥 자신의 몸에는 악창이 나고 피부암으로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욥의 친구들과 종까지도 그를 떠났다.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서 오히려 욥을 계속 찌르는 도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욥을 건포도 되게 하신 것이다. 건포도 되어진 욥은 그것으로 멸망했나? 아니다. 결국 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다. 하늘의 영광을 모두 받아 누리는 자가 되었다. 주님이 우리를 건포도 되게 하시려고 바싹 말리는 역사를 할 때 원성이 나오고 불평이 나온다면? 이는 아직 건포도가 안 된 것이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부는 반드시 주님께서 그를 욥과 같이 건포도 되게 하신다. 어떤 환란과 고난이 와도 오히려 찬송하는 자로 만드신다. 그다음은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 하게 된다. 여기서 사과는 3절과 같은 사과나무는 아니다. 4절에 잔칫집으로 인도함 받는 신부에게의 사과는, 환란 시에 고문당해도 기쁨이 터지고 죽이는 사형장에서도 찬송이 넘쳐 늘 감사와 찬송이 터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이는 7년 환란 중에 순교 당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그분이 나로 기쁨과 찬송으로 영광 돌리며 순교케 해주시는도다.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나이다’ 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내가 예수님을 병이 날 정도로 사랑하면 좋은 것일까? 좋은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주님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요 15:12).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내 안에 있어서 그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절대로 병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주체가 내가 된다면, 그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상사병이 난다. 이렇게 병이 났을 때 신랑이 되시는 주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6~7절 말씀대로 해주신다.   2:6 그의 왼손이 내 머리 아래 있고 그의 오른손이 나를 껴안는 도다. 주님의 왼손을 베개 삼듯이 신부 성도 머리 아래 두고 주님의 오른손은 신부를 꼭 껴안는다. 주님이 신부의 몸 위에서 신부를 휘감듯 껴안아 주시므로 한 몸이 된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써 먼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출발해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신부 신앙 차까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신부는 주님 품 안에서 사랑과 은혜를 더욱 받음으로써 상사병도 낫고, 미숙했던 부분도 온전하게 익어진다.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열매 맺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 할렐루야!
    • 오피니언
    • 칼럼
    2024-03-13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 이영식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을 지낸 이영식원로목사(사진)는 교단 총무와 재단이사장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교단 총무를 맡은 당시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행사의 실무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목포기독교연합회회장 등을 통해 대외적인 활동에도 앞장섰었다.    이목사는 은퇴 이후에도 교단과 미션스쿨인 목포덕인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 성금을 기탁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목포시에서 저출산 극복을 위한 운동의 추진위원장 맡으면서 4월에 열릴 목회자세미나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최근 합동한신측은 은퇴 이후에도 교단에 성금을 기탁하는 등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 이목사에게 공로패도 수여했다.    이목사는 “지난 1일 교단에서 열린 제직세미나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은퇴한 이후에도 교단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높게 평가를 해준 것 같다. 교단의 많은 분이 귀한 일을 했다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했다”면서,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은퇴 이후에도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서 헌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목사는 모교인 목포덕인고등학교 목회자협의회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되면서 학교에 장학금도 기탁했다. 이목사가 성금을 기탁하는 곳은 교단내 목회자와 방송선교 등 다양하다. 이목사는 “하나님께서 물질을 보낼 곳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많은 분들의 지원으로 기탁할 재정도 채워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목사는 목포지역의 저출산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특히 4월에 저출산대책을 위해 목포지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도 준비 중이다. 이 집회에는 전남지역목회자들도 초대해서 진행할 예정이다. CBS 김진오사장과 아동돌봄으로 출산운동에 앞장선 당진동일교회 이수훈목사를 초청해 저출산에 대한 해법을 모색한다.    이목사는 “우리나라가 저출산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면서, “생명이 있어야 교회가 세워진다. 그래서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래서 이런 집회를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목포지역에 위치한 로고스교회에서 설교목사로 섬기고 있다.      은퇴 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목사는 “주님의 일이라면 충성되게 섬기고 싶다. 주님의 선한 일을 끝까지 하는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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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4-03-10
  • 류봉현작가의 「예수」
        류봉현작가의 「예수」는 단조로운 바탕에 가시 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 있게 표현되어 있다. 조금만 있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 많은 모든 인류의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할 일을 생각하고 계신 듯한 표정이다. 극히 단조로운 구도에 단조로운 색채는 독자들의 시선을 몰입하게 만든다.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 잘못된 판결을 내림으로 왕복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혔다. 벗기고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씌우고 침을 뱉는 등 희롱을 당할 때 예수님의 모습은 한결같이 맑고 깨끗하게만 느껴진다. 맞서서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은 독자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마태복음 27:28~31의 장면과 마가복음 15:16-20의 장면을 심도 있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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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10
  • 장춘옥성도의 「하나님의 기쁨」 화제
    ◇장춘옥작가가 최근 출간한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의 의미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제시     새맘출판사 대표이자 작가인 장춘옥성도(사진)가 최근 7번째 저서 <하나님의 기쁨>을 출간했다. 이 책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사상에 대한 책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기쁨에 이르는 길을 다루고 있다. 장작가의 신앙에는 조부 장익용장로와 계약신학대학원장으로 있었던 이영훈목사의 영향이 있었다. 장작가는 “할아버지는 아현교회 등 다양한 교회를 섬기신 장익용장로였다. 특히 할아버지는 부산 제3영도교회와 청량리 동도교회 초대장로님이셨다. 할아버지는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사명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할아버지의 신앙이 나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면서, “창광교회에서 청년부활동을 할 때 이영훈목사의 지도를 받았다. 그분은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언약사상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작가는 이번에 출간한 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과 원래 의도하신 내용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한 사람 아브라함이 어떠한 인물인지 다루고 있다”면서, “그와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의 의미를 알게 됨므로 인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에 감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성경구절이 눈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졌는데 그 믿음이 무엇일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일까 묵상하게 됐다”면서, “그렇게 묵상을 하면서 나오게 된 책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책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이라는 언약을 주신다. 아브라함은 이 언약을 계속 붙들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 “그냥 말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옛사람으로는 마음으로 믿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면서, “새 언약은 돌에다 주는 것이 아닌 마음에다 주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 몸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다”고 말했다. 장작가는 “지금까지 7권의 책을 썼다. 이 책들은 내 힘으로 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할 수 있었다. 쓰고 보니 깊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면서, “앞으로의 소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알리는 것이다. 특히 목사님들이 이 사실을 더 깊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책을 무료로 기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성도들에게도 교회 가는 것인 신앙생활에 전부가 아님을 알리고 싶다. 종교행위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이 중요함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장작가는 “<하나님의 기쁨>을 읽고 자신이 보기에 그냥 읽고 넘길 내용이 아니라고 여기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면서, “그분들과 책을 함께 나누는 만남을 통해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모시고 가는 귀한 문서사역을 감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장작가는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약 9년간 초등교사로 재직하다 현재는 퇴직해 새맘출판사를 세우고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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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0
  • [변두리 소수자 14] 소탐대실
      징기스칸이 멀고 넓은 아시아 대륙과 유럽까지 정복할 수 있었던 비법은 육포로 개발된 식량, 그리고, 서양의 말과 다르게 훈련된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잘 달리기만 하는 높은 말 위에 앉은 유럽의 기사들은 앞뒤 좌우로 움직이는 말을 타고 싸우는 몽골인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산들을 경계하고 살았던 유럽인들과 달리, 넓은 평야와 하늘 사이에 살던 몽골인들의 시력도 달랐다. 먼 거리에서 사물과 자연을 먼저 식별하는 안목이 있었다.   유럽 대륙과 아일랜드를, 나중에는 북미까지 진출했던 바이킹 족에게도 그들만의 비법이 있었다고 한다. 유럽 대륙을 벗어나 북미까지 항해를 할 수 있는 그들만의 항해술과 염장 기술, 즉 소금에 절인 대구를 식량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 비법으로 콜롬버스보다 500년이나 먼저 북미대륙에 도착했다. 그들의 앞선 항해술은 유럽의 이웃 나라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나중에 유럽이 해상을 장악하는 힘이 되었다.   콜롬버스가 도착하기 전의 북미 연안은 당시에 유럽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대구의 황금 어장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먼저 와 있던 바이킹 족은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그들 끼리만 상권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자기들끼리만의 유익을 지켜 내려고 힘을 쓰는 동안, 원주민들과 늘어나는 유럽인들을 당해 낼 수 없게 된다. 그 후, 영국은 북미 대륙을 영국령으로 선포하고, 먼저 왔던 바이킹 족의 노르웨이 대신 영국 국기를 꽂게 된다.   만일 바이킹 족이 그 당시에, 남들이 모르는 비밀과 엄청난 수입으로 국가를 이루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들보다 앞서 가졌던 항해술과 염장술, 그리고, 그들만의 전투력으로 먼저 대륙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유럽 대륙과 아일랜드, 미 대륙까지…. 그러나 당시의 엄청난 수입원인 대구 어장만 지키다가, 미 대륙 전체를 놓쳤다. 몇 세기 동안, 무적의 투사들로 이름을 날리던 그들은, 야만족과 약탈자, 해적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오랜 역사 속에, 우리나라도 외세로부터 시달릴 때 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힘을 보이기도 했다. 위기 때마다 나타난 위대한 지도자들도 있었고, 순진하게 살아왔던 국민들이 용감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끼리 싸우다가,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다. ‘소탐대실 (小貪大失)’이다.   지금처럼 70여년의 긴 세월 동안, 대한민국, 한반도에 전쟁이 없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첨단의 인프라가 구축이 되고,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고, 인기 있는 나라가 된 것 같다.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의 정치인들은 국정에 헌신하기보다 정쟁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다.국민들은 너무 힘들게 살아 내고 있으면서 정치인들의 이념 전쟁을 걱정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이 이렇게 오래 놔 두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보호하사, 1,000 여 번 이상의 외침에도 지켜졌었다. 한국은 국민끼리 하나되면 세계를 이끌 영적 문화국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동물들에게도 귀한 교훈을 얻는다. 나는 언젠가 동남 아시아에서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을 듣고웃다가 심각해 졌다. 그 방법은 이러다. 입목이 좁은 항아리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곡식을 넣고, 원숭이가 다니는 길목에 놓는다. 원숭이는 항아리에 가까이 와서 그 안에 손을 넣고, 곡식을 움켜진다. 이를 보며 기다렸던 사람은 그 항아리만 들고 오면 된다. 원숭이가 움켜진 주먹을 펴지 않기 때문이다. 멀리서 사자가 전력 질주하며 달려오고 있는데, 두 마리의 사슴이 싸우다가 먹히는 장면도 기억난다.   ‘우리끼리’의 대립 때문에, 큰 일을 당하는 소탐대실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나의 좁은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 이루시려는 뜻이 제한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의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하늘의 뜻을 펼치고자 하신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구하려 하다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막히면 안 되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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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8
  • [정론] 교회, 하수구가 되다
      민대홍 목사   ‘고난’을 주제로 한국 역사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한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서이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설명하며, 구약의 히브리 민족사와 우리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사사기 시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결국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고난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01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겪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당한 설움과 고통은 개인 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그 시대를 함께 산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다. 그 시기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을 위로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조선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하수구’로 보았다. 하수구가 있어야 일상의 삶이 청결해지듯, 우리가 강력하고 혼탁한 폭력을 받아내는 하수구가 됨으로서 이웃 민족들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조선)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서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가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에서.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 신약시대 신앙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자유와 구원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은 이러한 예수가 하수구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사순절, 그 끝에 고난주간이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온당히 받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식민통치 시기.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종교마저 자유가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졌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법정에서의 사형판결, 예수는 뭇 백성들의 하수구가 되어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졌다. 예수의 제자들도, 제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바통은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짊어지는 하수구가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뼈를 꺾은 고난을 지낸 후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로교회 목사, 서로북스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4-03-08
  • [에레모스 영성 5] 시험의 땅, 광야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난 뒤 곧 바로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태 3:17)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예수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구별된 의식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메시아 자의식이 재확인이 되는 일은 광야에서이다. 이 과정에서 사탄은 이렇게 시험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당신을 다치지 않도록 할 것 아니냐. 이것보다 더 좋은 메시아에 대한 증명 방법이 어디 있겠느냐는 그럴듯한 속삼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메시아의 사적 단계에서 다음 공적 단계로 객관화되는 아주 좋은 계기일터이니까.   그러나 예수는 즉시 이것이 영적 유혹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짓은 하늘 아버지를 인간의 얄팍한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눈에 그럴듯한 형상으로 보여져야 하는 분이 아니고 그럴듯한 소리로 들려져야 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게 보여지고 들려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우상이다. 그래서 우상은 우리 인간의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보여지고 그때마다 들려진다. 우상 숭배는 그 옛날 이집트 땅이나 가나안 땅이나 로마 땅이나 페르시아 땅에 거대한 신상으로만 세워져 있지 않는다. 우리 마음 한 가운데에도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참 신은 우리 눈에 아니 보이고 우리 눈에 아니 들려도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시다.   수많은 대중들 보이는 그 한가운데 뛰어내리면서 메시아의 존재를 확인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이냐. 이 양자택일의 요구는 예수에게도 쉽게 풀 수 없는 유혹이고 시험이었다. 뛰어내려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중명해 보라는 은근한 귀뜀은 예수님 공생애 3년의 기간 뿐 아니라 끝내 십자가에 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예수는 그 요구를 거절하시고 못 박혀 죽음으로 맡겨진 메시아로서의 본분을 다 할 수 있었기에 대속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라는 파라독스를 통하여 비로소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었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 오피니언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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