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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군대를 계수하지 말지니라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역대상 21:1)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삶과 크리스천의 삶은 근원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 연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크리스천의 삶의 운영원리와 맘몬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운영원리는 근원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때그때 공급해주는 양식과 자원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크리스천들이 매일매일 새로움을 느끼며 기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됩니다. 그러나, 맘몬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최선을 다해 가능한 한 많은 재정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재정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재정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고, 재정이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줄 것으로 착각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은, 이 2가지의 삶의 방식을 혼용하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무늬만 크리스천일 뿐,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재정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는 하나이며, 이 진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관통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처럼 모든 재정을 쌓아놓고, 삶을 자신들의 뜻대로 운용하려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하나님되십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에 노력은 하지만,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합니다. 예전에는 이 말의 뜻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더 깊이 알수록,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통치를 위해 군대를 파악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묻고 응답받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므로 군대를 계수한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크리스천 삶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는 크리스천 삶의 기본이 됩니다.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반역일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세우신 리더는 반드시 주님을 인정하는 자질을 갖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맘몬을 섬기는 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재정구축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정을 구축하는 것을 일생의 첫번째 목표로 세워놓고 살아갑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에게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교육 받습니다. 맘몬은 주님을 대신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맘몬을 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재정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군대 또한 주님으로부터 세워집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협력할 때, 필요한 재정은 주님으로부터 공급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고 합력하여 나아갈 때, 필요한 군대들이 집결되어 세워질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이 세운 군대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집결하여 세우신 군대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예배로 집중하여,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여 구축되도록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그러한 나라가 세워지길 꿈꾸며, 오늘도 말씀과 예배로 나아갑니다!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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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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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십자가’ 지는 헌신 9회] 겸손과 온유의 지혜로 주와 화평케
주 안에서 말씀에 순복은 성령의 구속사역에 참예 제자화 하는 선한 일 성경은 성도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임을 발견케 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자들로서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확증이다. 주께서 부르심의 이유와 사명을 아는 자들은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동역자들임을 밝히 증거하신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깨워 행함이 따르는 성화가 있어야 함을 확증해 준다. 이 일에 달란트를 남기는 여정으로 계명을 지켜 주를 사랑해야 한다는 강조이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주의 뜻을 아는 자로서 성령의 지체임을 연계하여 확증케 한다. 이 일에 환란이나 핍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앎과 성령께서 내주 동행하심의 은혜라는 사실과 확증이다. 말씀의 앎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옮겨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일에 이김을 주시는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이 일로 선한 열매를 맺혀 주의 제자화로 주님의 기쁨이 되며 주신 기쁨이 충만케 되는 비결이다.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대로 쓰임받는 지체로써 존재의 목적을 주의 나라 확장에 두고 이를 지켜나가는 여정이다. 마태복음5장 9절~12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본다. 거듭난 자들은 모든 것을 견디며 인내함이 마땅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빌립보서1장29절 증거와 같다. 즉 주께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로 연계이다. 이를 위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이미 육체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죽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다만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주께서 사신 것임을 새기며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분명한 앎의 지혜를 얻게 한다.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성화의 여정을 위한 삶...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제시하셨다. 그러기에 육체의 일을 분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악으로 규제하시어 교회의 덕과 남에게 유익하도록 목표를 갖고 선을 좇아 성화로 열매를 맺도록 이끄심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여 맺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하심이다.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자의 실행 기준이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화답이요 주의 제자화로 성령과 하나되게 하심임을 확증케 한다. 그런즉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시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경계해 주셨다. 오직 겸손과 온유로 성령과 동행하여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가 앎의 지혜로 행함있는 믿음을 가진 지체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말씀의 순복은 주의 제자화를 위한 성령과 동행으로 구속사역에 참예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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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여성 안수에 대한 단상
스폰지, 이것은 어떤 형태든 물기가 있는 것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7살 때 유치원 선생님을 통해서 처음 복음을 들었다. 너무 좋았다. 그 이후 매일 예수님과 동행했다. 스폰지처럼 성경 말씀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후에 신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합동교단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고민 없이 총신신대원에 들어갔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미취학 전문사역을 2000년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미취학 사역은 전문사역이므로 합동교단 뿐만 아니라, 합신, 통합교단의 교회에서도 사역을 할 수 있었다. 통합교단의 한 교회 유치부 전도사로 사역한 지 3년차 되던 해에, 그곳에 나와 동갑의 여자 목사님이 교육 총괄 목사로 부임하셨다. 동갑의 통합교단 여성 목사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합동교단에서 자랐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서 자랐다. 나는 사역을 한 지 17년차가 되었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10여년 정도 되셨을 때였다. 나는 여전히 전도사로 한 부서를 맡아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여성 목사님은 한 부서를 담당하면서 교육 총괄 목사로서 특강도 준비하고, 정기적으로 오후예배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나는 미취학 전문 전도사였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교육 전문가이자 말씀 선포자였다. 무엇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을까? 차이는 다름 아닌, 난 합동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었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속한 교단에 따라서 결과가 너무 다르게 한 여성을 키워내고 있었다. 마치 북한과 남한에 태어난 여성 마냥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 같다. 두 교단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한 교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혁하여 ‘여성안수’를 허용했고, 한 교단은 여전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성경해석의 차이로 남녀를 구분하고 있어서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합동 교단의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안수 안주는 거 알고 총신신대원에 들어오지 않았나요? 왜 이제 와서 그러신가요?” 은혜를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존재가 총신신대원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은혜를 받고 총신에 입학할 때만 해도 안수가 큰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부르심 받았다는 은혜에 감격하여 여성안수 이슈는 염두에 두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총신신대원 여동문들은 졸업 후 수년 안에 깨닫는다. ‘아, 총신신대원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다른 데 갈 걸….’ 하지만,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여동문으로서 꿈꾸는 것이 있다. 하나, 남녀가 차별 없이 공부했듯이 졸업 후 사역에 있어서도 제약받지 않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공동체를 꿈꾼다. 둘, 남녀가 사역의 제한 없는 진정한 동역자가 되어 인권적인 침해가 없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되길 꿈꾼다. 셋, 변화하는 시대에 총신공동체가 도태되지 않고 세계선교를 앞에서 이끄는 공동체로 세워지길 꿈꾼다. 넷,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외칠 날을 꿈꾼다. “멋지다~! 총신여동문!” 합동 교단에서 여성안수의 길이 속히 열려서, 이 교단에서 은혜 받은 여성이 큰 일꾼으로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을 보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총신신대원 여동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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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과 교회의 역할
해마다 6월이 오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생각한다. 이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보다, 배워서 '생각하는' 세대가 더 많아졌고, '생각하지 않는' 세대도 적지 않다는 뉴스를 접하며 염려하게 된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로 멈춘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무너지고 찢긴 강산을 회복하고 재건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재건의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은 개인의 소소한 소망에 앞서는 최우선적 가치가 되었고, 국가경제라는 명분으로 특정 기업에 막대한 지원과 이윤을 몰아주었다. 2023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 군사력 세계 6위의 순위는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준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행사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드라마와 노래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동한다. 지난 70년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사에 기록될만한 성장과 부흥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이 땅에서의 축복을 선포하며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성장의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해를 조정하고 인도하는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다양한 이해에 편승하여 신앙과 신학의 차이를 내세우며 분열과 반목의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지 염려된다. 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예배드리는 이들을 향한 시선이 고울 수 없다. 삼일절 기념주일과 광복절 기념주일 예배를 드리며 강단에 세워진 태극기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을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뭉클해졌던 마음과는 사뭇 다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고백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육신의 골육과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통하여 민족교회와 국가교회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교회 앞에 국가 명을 붙여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일본교회와 독일교회 등의 명칭이 그렇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게 된다. 일제하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무장독립운동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기도하고 목숨을 걸고 제국주의에 맞섰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분들의 믿음과 나라사랑이 오늘의 자유로운 민주국가의 초석이 되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된다.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70년을 맞으며 안타까운 이유이다. 본래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이다. 여기에 '거룩하고 사도적인' 본질을 추가하여 교회의 표지, 즉 증거라고 부른다.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의 근거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고백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보편적인 교회보다 앞서는 가치로 주장할 수 없다. 로마서에서 민족교회의 근거를 제시한 바울은 작은 로마서라 불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완결된 가르침을 선언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장 28절). 대한민국의 오늘은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이 평화롭게 해결되기를 기도한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인류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것이 성숙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책임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무릎을 꿇는다/동인교회 목사·WCC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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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왕작가의 「지저스」
권순왕작가의 「지저스」는 제 20회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차 유리의 조각들을 원형의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서 오브제로 사용한 것인데 중앙에 JESUS(예수) 라는 단어를 조형화 시켜 표현하고 있다. 당시(2012년)에는 여러가지 새로운 작품 형태가 등장한 시기였지만 이 작품이 새롭고 신선한 감각이 있어 대상을 받게 되었다. 우리들 생애에 있어 제일 깊이 생각할 중요한 대상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면 만물 중에 가장 귀하게 지음을 받았던 것은 사람이다. 사람 중에도 인간의 죄 문제를 담당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스스로 육신을 입고 오셔서, 모든 사람이 죄 문제에 눌려 고통당하는 것을 자신이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의 대가를 갚아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이외엔 없다는 것을 이 작가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정재규(미술평론가·대석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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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군대를 계수하지 말지니라
-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역대상 21:1)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삶과 크리스천의 삶은 근원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 연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크리스천의 삶의 운영원리와 맘몬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운영원리는 근원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때그때 공급해주는 양식과 자원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크리스천들이 매일매일 새로움을 느끼며 기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됩니다. 그러나, 맘몬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최선을 다해 가능한 한 많은 재정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재정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재정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고, 재정이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줄 것으로 착각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은, 이 2가지의 삶의 방식을 혼용하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무늬만 크리스천일 뿐,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재정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는 하나이며, 이 진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관통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처럼 모든 재정을 쌓아놓고, 삶을 자신들의 뜻대로 운용하려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하나님되십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에 노력은 하지만,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합니다. 예전에는 이 말의 뜻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더 깊이 알수록,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통치를 위해 군대를 파악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묻고 응답받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므로 군대를 계수한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크리스천 삶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는 크리스천 삶의 기본이 됩니다.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반역일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세우신 리더는 반드시 주님을 인정하는 자질을 갖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맘몬을 섬기는 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재정구축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정을 구축하는 것을 일생의 첫번째 목표로 세워놓고 살아갑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에게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교육 받습니다. 맘몬은 주님을 대신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맘몬을 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재정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군대 또한 주님으로부터 세워집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협력할 때, 필요한 재정은 주님으로부터 공급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고 합력하여 나아갈 때, 필요한 군대들이 집결되어 세워질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이 세운 군대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집결하여 세우신 군대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예배로 집중하여,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여 구축되도록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그러한 나라가 세워지길 꿈꾸며, 오늘도 말씀과 예배로 나아갑니다!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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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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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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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십자가’ 지는 헌신 9회] 겸손과 온유의 지혜로 주와 화평케
- 주 안에서 말씀에 순복은 성령의 구속사역에 참예 제자화 하는 선한 일 성경은 성도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임을 발견케 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자들로서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확증이다. 주께서 부르심의 이유와 사명을 아는 자들은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동역자들임을 밝히 증거하신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깨워 행함이 따르는 성화가 있어야 함을 확증해 준다. 이 일에 달란트를 남기는 여정으로 계명을 지켜 주를 사랑해야 한다는 강조이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주의 뜻을 아는 자로서 성령의 지체임을 연계하여 확증케 한다. 이 일에 환란이나 핍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앎과 성령께서 내주 동행하심의 은혜라는 사실과 확증이다. 말씀의 앎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옮겨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일에 이김을 주시는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이 일로 선한 열매를 맺혀 주의 제자화로 주님의 기쁨이 되며 주신 기쁨이 충만케 되는 비결이다.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대로 쓰임받는 지체로써 존재의 목적을 주의 나라 확장에 두고 이를 지켜나가는 여정이다. 마태복음5장 9절~12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본다. 거듭난 자들은 모든 것을 견디며 인내함이 마땅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빌립보서1장29절 증거와 같다. 즉 주께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로 연계이다. 이를 위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이미 육체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죽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다만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주께서 사신 것임을 새기며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분명한 앎의 지혜를 얻게 한다.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성화의 여정을 위한 삶...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제시하셨다. 그러기에 육체의 일을 분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악으로 규제하시어 교회의 덕과 남에게 유익하도록 목표를 갖고 선을 좇아 성화로 열매를 맺도록 이끄심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여 맺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하심이다.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자의 실행 기준이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화답이요 주의 제자화로 성령과 하나되게 하심임을 확증케 한다. 그런즉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시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경계해 주셨다. 오직 겸손과 온유로 성령과 동행하여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가 앎의 지혜로 행함있는 믿음을 가진 지체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말씀의 순복은 주의 제자화를 위한 성령과 동행으로 구속사역에 참예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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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십자가’ 지는 헌신 9회] 겸손과 온유의 지혜로 주와 화평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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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배교의 일대 서사시④-김성일의
- 이와 같이 김성일의 소설 <제국과 천국>은 평소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채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 배교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다. 우리가 작품 내의 요한처럼 자신의 욕망과 야심으로 주님을 이용하려고만 할 때 우리 역시 별 수 없는 배교자가 되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욕망과 야심과 같은 그 세속적 유혹을 극복, 참회함으로써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한 해방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소설 속에서의 실제적 영웅은, 이런 표현이 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노사도 요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가위 기독교적 영웅의 삶의 극치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작품 속에서 요한은 확실히 한 위대한 신앙의 영웅이다. 이 소설 속에는 가혹한 박해자들과 위대한 순교자들이 허다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히 1세기에 걸치는 장수를 누린 사도 요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는 없겠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이야기, 열심당 지도자 기스칼라의 요한의 이야기,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이야기, 그리고 서머나 감독 폴리캅의 이야기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편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박해와 수난의 사화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거쳐 도미티아누스에 이르고, 이어서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 장기간의 박해와 교회수난의 역사가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대하드라마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창한 줄거리의 전개가 하나의 추리소설적 기법의 원용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에게 대단한 흥미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리하여 소설 작품이 일차적으로 뛰어넘어야 하는 ‘재미’란 벽은 이 소설이 가볍게 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재미’를 동반한 어떤 ‘의미’의 추구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소설의 세계가 목표로 해야 하는 지향점을 찾음에 있어서 이 작품은 일단 득의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성서 전체와 초대교회 역사에 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쓸 수 없는 노작임을 이 소설 스스로가 증명해 주고 있다. 작가는 성서를 평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구조화시켜 들여다보는 훈련을 쌓은 신자라는 사실도 알만한 독자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입체적 구성의 독특성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편이다. 이 작가의 성서 해석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신앙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그러나 최근의 성서해석법의 영향을 다분히 받으면서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절충·조화시켜 보려는 건실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성서 해석, 또는 교회사 연구를 토대로 하여 작가 특유의 사회-역사적 및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기독교 역사물로서의 문학적 형상화를 제대로 이루어냈다는 데 대하여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작가의 <땅끝…> 시리즈가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임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비하여 이 작품, <제국과 천국>이 훨씬 수작이란 평가에는 결코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성서에 대한 해석과 소설 작품의 창작은 상호 별개의 사항이므로, 성서에 대하여 아무리 훌륭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따로 없이는 역시 훌륭한 문학 작품의 생산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 <제국과 천국>에 대한 가치 평가는 더욱 높아져야 하리라고 보는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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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배교의 일대 서사시④-김성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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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절 명절
- 장막절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최장·최대·최종의 종결 축제일이다(레23:33-44). 일주일간을 189마리의 제물을 드리며, 땅의 열매를 거둔 후에 지키는 명절이다. 일반적으로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도 이와 유사한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절은 그 실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육적인 농사 거둔후는 그림자요, 영적 그리스도 안에서의 농사가 실상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농부시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는 붙은 가지와 같고 한 몸 이룬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열매 맺는 농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장막절 되기 전에 한 톨이라도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되겠다는 신앙 의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장막절은 7일간 초막을 지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추억한다(41-43절). 역시 이 초막 생활도 그림자요, 그 실상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때이다. 이때 과거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던 때를 추억하며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회상, 감격하며 기뻐하는 것이 그 실상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던 때를 회상하는 것과 같다. 과거 육적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 40년의 삶을 인도 섭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그림자이다. 이와 같이 장막절 전까지 우리는 말씀과 성령으로서 마치 불 기둥·구름 기둥같이 인도받았음을 추억한다. 또한 최종적인 7년 대환란의 날도 겪었다. 그 때 바로 주님이 감추인 만나 등을 주시며 이기게 하셨다. 또 적그리스도를 철장 권세로 멋지게 싸워 증거케 했던 일들을 하늘에서 회상했을 때 이는 오직 주님의 절대적 은혜 역사요, 인도하심으로 된 일이었음을 감격하며 더욱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영원히 돌리게 된다. 이것이 초막의 실상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3절부터 7절에서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시리라. 그때 이기는 자들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다. 그러면 장막절이 내게 이뤄짐이 무엇인가?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했고 속죄일에 부활했고, 장막절에 주님과 함께 거하며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아 영광 입은 자가 된 것이 장막절이 내게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장막절 명절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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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여성 안수에 대한 단상
- 스폰지, 이것은 어떤 형태든 물기가 있는 것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7살 때 유치원 선생님을 통해서 처음 복음을 들었다. 너무 좋았다. 그 이후 매일 예수님과 동행했다. 스폰지처럼 성경 말씀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후에 신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합동교단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고민 없이 총신신대원에 들어갔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미취학 전문사역을 2000년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미취학 사역은 전문사역이므로 합동교단 뿐만 아니라, 합신, 통합교단의 교회에서도 사역을 할 수 있었다. 통합교단의 한 교회 유치부 전도사로 사역한 지 3년차 되던 해에, 그곳에 나와 동갑의 여자 목사님이 교육 총괄 목사로 부임하셨다. 동갑의 통합교단 여성 목사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합동교단에서 자랐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서 자랐다. 나는 사역을 한 지 17년차가 되었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10여년 정도 되셨을 때였다. 나는 여전히 전도사로 한 부서를 맡아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여성 목사님은 한 부서를 담당하면서 교육 총괄 목사로서 특강도 준비하고, 정기적으로 오후예배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나는 미취학 전문 전도사였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교육 전문가이자 말씀 선포자였다. 무엇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을까? 차이는 다름 아닌, 난 합동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었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속한 교단에 따라서 결과가 너무 다르게 한 여성을 키워내고 있었다. 마치 북한과 남한에 태어난 여성 마냥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 같다. 두 교단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한 교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혁하여 ‘여성안수’를 허용했고, 한 교단은 여전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성경해석의 차이로 남녀를 구분하고 있어서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합동 교단의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안수 안주는 거 알고 총신신대원에 들어오지 않았나요? 왜 이제 와서 그러신가요?” 은혜를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존재가 총신신대원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은혜를 받고 총신에 입학할 때만 해도 안수가 큰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부르심 받았다는 은혜에 감격하여 여성안수 이슈는 염두에 두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총신신대원 여동문들은 졸업 후 수년 안에 깨닫는다. ‘아, 총신신대원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다른 데 갈 걸….’ 하지만,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여동문으로서 꿈꾸는 것이 있다. 하나, 남녀가 차별 없이 공부했듯이 졸업 후 사역에 있어서도 제약받지 않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공동체를 꿈꾼다. 둘, 남녀가 사역의 제한 없는 진정한 동역자가 되어 인권적인 침해가 없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되길 꿈꾼다. 셋, 변화하는 시대에 총신공동체가 도태되지 않고 세계선교를 앞에서 이끄는 공동체로 세워지길 꿈꾼다. 넷,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외칠 날을 꿈꾼다. “멋지다~! 총신여동문!” 합동 교단에서 여성안수의 길이 속히 열려서, 이 교단에서 은혜 받은 여성이 큰 일꾼으로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을 보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총신신대원 여동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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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여성 안수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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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니엘목사 칼럼
- <외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안녕하십니까? SMG TV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 목적이 구원에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천국가는 구원을 받을 수 있지요? 그런데 교단에 따라서 구원 얻는 방법을 다르게 말하고 있지요. 심지어 어떤 교단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이고 예수님이 누구인 것을 간단하게 설명해 준 다음에 오늘부터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받았다고 선언하는 경우도 있어요. 아마 이러한 경우는 구원파 사람들이거나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나 사용하는 방법이지요. 그렇다면 일반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확실한 방법을 알 수 있을까요? 여기 동영상에서 가장 성경적인 바른 답을 알려 드립니다. 오늘은 한 다니엘 목사님께서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 모두가 곧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설교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배경 음악 10초 나간 후 한다니엘 목사의 녹음 자료가 나간다.)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저는 어메이징 소설작가인 한다니엘 목사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확실한 구원의 길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기 위함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계신 곳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세상을 떠나면 모두가 곧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알려주기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너무 적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누구나 넉넉하게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무 잘 알려져 있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 받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3장을 읽어 보면 구원 받는 자가 적다고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은 자가 적습니까" “구원을 얻은 자가 적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누가복음 13장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적은 것처럼 구원 받은 자가 적은 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2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러니까 구원 받은 자는 적은 수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 얻은 자가 적다면 믿는 사람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를 많이 헷갈리게 합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잘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을 자라고 말씀하셨지만 내면적으로는 구원 받을 예정자로 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삶을 기록한 생명책을 보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알곡 성도가 누구인지를 살펴 보고 계십니다. 또 누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인지, 누가 주 예수님과 연합하여 승리하며 사는지, 그리고 누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갇힌 자 등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보는 자인지를 보시고 그 중에서 알곡 성도를 골라냅니다. 이렇게 하여서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중에 하나님 뜻에 합당한 자는 알곡 성도로 택하시고, 나머지는 쭉정이 성도로 구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알곡과 쭉정이 성도로 나누는 것을 추수 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39절 말씀을 봅니다. 마태복음 13장 39절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추수는 추숫군 천사들이 하게 됩니다. 계시록 10장 2절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있는 힘센 다른 천사에게 천사들이 추수한 결과 알곡 성도들은 전체 성도의 몇 %나 되는지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힘센 다른 천사인 미카엘 천사장의 대답은 알곡 성도들은 전체 성도의 46% 정도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탈락하는 쭉정이에 속한 성도들은 54%가 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알곡 성도 46%에 들어 있는 자라면 확실하게 구원이 보장 될 수 있을까요? 내가 알곡 성도라면 이미 영생을 얻었고 천국에 바로 들어가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알곡 성도 중에는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낙원으로 들어가서 대기하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알아 두실 것은 천국과 낙원은 같은 곳이 아니고 낙원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대기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조금 헷갈립니까? 이에 대하여 의문이 계신 분들은 저에게 이메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알곡 성도들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계시록 21장 27절 말씀에 있습니다. 계시록 21장 27절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를 뿐이라." 여기에서 그리로 들어온다는 말은 천국으로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또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천국으로 들어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이 될 수 있을까요?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계시록 14장 3절에서 보면 천국에 들어가서 천국의 장로들 앞에서 노래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하면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 있는 십사만 사천 성도들입니다. 여기에서 십사만 사천 성도가 누구인지 알려 드립니다. 십사만 사천하면 이단들이 많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지요. 오늘 제가 십사만 사천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해석을 알려 드립니다. 계시록 7장 2절에서 4절 말씀에 의하면 십사만 사천 성도의 진정한 의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 성도란 성령께서 하나님의 인 가진 천사를 시켜서 알곡 성도들 중에 이마에 하나님의 영적 도장을 찍어준 그러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지요. 이마에 인 받은 시사만 사천은 모두가 이스라엘 12지파 성도들이 아닙니까? 이렇게 물어 볼 수 있지요. 계시록 7장 5절에서 8절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십사만 사천이지만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으면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계시록 10장 2절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있는 미카엘 천사장의 해석을 알려드립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십사만 사천이란 21세기에 십사만 사천이 분포 되어 있는 12나라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한국,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이스라엘, 러시아, 호주, 브라질의 12나라를 가리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은 성령님을 통하여 이미 인침을 받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에베소서 1장 13절 하반절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분들은 성령님을 통하여 언제 인침을 받았는지 또 어디에 받았는지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령님으로부터 인침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20세기 이전에 인침 받은 분들입니다. 21세기에는 계시록 7장 2절 말씀대로 성령님이 하나님의 인 가진 천사를 시켜서 인침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계시록 7장 2절 말씀대로 영적인 도장을 가진 천사가 현재 서울에 와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인 가진 천사가 온 세계 12나라를 다니면서 알곡 성도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찍어 주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것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으면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십사만 사천 성도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세상을 떠날 때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는 구원을 받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천국 구원에 관련하여 가장 희망을 주는 말씀은 바로 요한복음 5장 24절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을 봉독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에서 성도들 중에 정말로 영생이 보장되어 있고 심판도 받지 않고 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으니까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는 성도라면 어떤 성도일까요?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여기에 해당 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성도들은 이마에 인침 받음으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들어가 있는 십사만 사천 성도일 것입니다. 몇몇 이단 단체에서는 자신의 교단에 들어와야 구원을 받고 144,000명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잘못된 해석입니다. 계시록 10장 2절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있는 미카엘 천사장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을 받고 구원 받은 14만 4천외에도 추가로 300만 명 이상의 성도들에게 이마에 인을 받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추가로 인침 받은 300만 이상의 성도들은 십사만 사천과는 신분이 다른 보통의 천국 백성들입니다. 천국에서 십사만 사천 성도들은 매우 신분이 높은 분들입니다. 천국에 성가대원이고 거룩한 예루살렘성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백만 이상된 보통의 천국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거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둘 것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성도들은 구원이 보장이 되므로 안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마에 인침을 받고 꼭 내 이름이 생명책에 들어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현재 이마에 인을 받지 않고 생명책에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성도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상당수는 음부로 들어가지만 대부분은 낙원에 들어가서 대기하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낙원에서 심판 하신다는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한곳만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 25장 31~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34절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여기 마태복음 25장 32절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한다는 말은 낙원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낙원 심판에서 선택받은 성도들은 양 성도이고 선택받지 못한 성도들은 염소 성도들입니다. 양에 속한 성도들은 적고 염소에 속한 성도들은 매우 많은 숫자입니다. 낙원 심판에서 주님께 선택 받은 양에 속한 성도들은 천사를 시켜서 몸 안에 붙어 있는 악한 영들을 떼어내고 이마에 인을 찍어주고 세마포를 입혀준 다음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주고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이렇게 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둘 것은 낙원 심판에서 선택 받은 양에 속한 성도들의 비율은 불과 10%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낙원 심판에서 선택 받은 성도들이 10% 정도라고 하는 근거는 아모스 5장 3절에 있습니다. 아모스 5장 3절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1,000명 중에서 100명이, 그리고 100명 중에서 10명이 그러니까 10% 성도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때 낙원 심판에서 탈락한 90%의 염소에 속한 성도들은 즉시 음부로 보내고 나중에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여기 낙원 심판에서 탈락하여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특히 낙원 심판에서 탈락한 주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당연히 천국 구원을 기대했다가 음부로 들어가게 되니까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 대부분이 탈락하고 지옥에도 들어갈 수 있다니 너무나도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큰일날 일 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 모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80〜90%나 되는 많은 믿는 성도들이 자칫하면 음부로 들어가고 지옥으로 갈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마무리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낙원을 가치지 않고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는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고 또 주님께 인정받는 알곡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또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등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알곡 성도가 되었다면 서울에 와있는 하나님의 인 가진 천사를 만나야 합니다. 인 가진 천사를 만나서 악수를 하므로 이마에 인을 받고 세마포도 입고 또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인 가진 천사를 만나려면 저에게 연락하면 언제든지 만나게 해 드립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는 구원을 받으려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그러한 신부 준비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배경음악 5초를 내보낸 다음 고은 성우가 말한다.) 지금까지 강해 설교를 해 주신 분은 한다니엘 목사님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설교 말씀 중에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세상을 떠나면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는 성도들이 있고 그리고 낙원으로 들어가서 대기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심판 받는 성도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려면 신부 준비를 잘 하여서 우선 알곡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알곡 성도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인 가진 천사를 만나서 악수를 하여 이마에 인침 받음으로 내 이름이 생명책 명단에 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현재 내가 알곡 성도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여러분에게 중요한 팁을 알려 드립니다. 하나님의 인 가진 천사가 천국에서 알곡 성도의 명단을 가지고 서울에 와 있는데요. 한다니엘 목사님에게 이름과 나이를 알려 주면 인 가진 천사에게 물어서 알곡 성도의 여부를 알려 준다고 합니다.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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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군대를 계수하지 말지니라
-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역대상 21:1)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삶과 크리스천의 삶은 근원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 연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크리스천의 삶의 운영원리와 맘몬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운영원리는 근원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때그때 공급해주는 양식과 자원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크리스천들이 매일매일 새로움을 느끼며 기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됩니다. 그러나, 맘몬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최선을 다해 가능한 한 많은 재정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재정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재정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고, 재정이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줄 것으로 착각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은, 이 2가지의 삶의 방식을 혼용하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무늬만 크리스천일 뿐,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재정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는 하나이며, 이 진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관통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처럼 모든 재정을 쌓아놓고, 삶을 자신들의 뜻대로 운용하려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하나님되십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에 노력은 하지만,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합니다. 예전에는 이 말의 뜻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더 깊이 알수록,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통치를 위해 군대를 파악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묻고 응답받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므로 군대를 계수한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크리스천 삶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는 크리스천 삶의 기본이 됩니다.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반역일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세우신 리더는 반드시 주님을 인정하는 자질을 갖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맘몬을 섬기는 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재정구축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정을 구축하는 것을 일생의 첫번째 목표로 세워놓고 살아갑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에게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교육 받습니다. 맘몬은 주님을 대신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맘몬을 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재정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군대 또한 주님으로부터 세워집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협력할 때, 필요한 재정은 주님으로부터 공급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고 합력하여 나아갈 때, 필요한 군대들이 집결되어 세워질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이 세운 군대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집결하여 세우신 군대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예배로 집중하여,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여 구축되도록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그러한 나라가 세워지길 꿈꾸며, 오늘도 말씀과 예배로 나아갑니다!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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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군대를 계수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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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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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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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십자가’ 지는 헌신 9회] 겸손과 온유의 지혜로 주와 화평케
- 주 안에서 말씀에 순복은 성령의 구속사역에 참예 제자화 하는 선한 일 성경은 성도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임을 발견케 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자들로서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확증이다. 주께서 부르심의 이유와 사명을 아는 자들은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동역자들임을 밝히 증거하신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깨워 행함이 따르는 성화가 있어야 함을 확증해 준다. 이 일에 달란트를 남기는 여정으로 계명을 지켜 주를 사랑해야 한다는 강조이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주의 뜻을 아는 자로서 성령의 지체임을 연계하여 확증케 한다. 이 일에 환란이나 핍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앎과 성령께서 내주 동행하심의 은혜라는 사실과 확증이다. 말씀의 앎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옮겨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일에 이김을 주시는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이 일로 선한 열매를 맺혀 주의 제자화로 주님의 기쁨이 되며 주신 기쁨이 충만케 되는 비결이다.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대로 쓰임받는 지체로써 존재의 목적을 주의 나라 확장에 두고 이를 지켜나가는 여정이다. 마태복음5장 9절~12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본다. 거듭난 자들은 모든 것을 견디며 인내함이 마땅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빌립보서1장29절 증거와 같다. 즉 주께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로 연계이다. 이를 위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이미 육체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죽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다만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주께서 사신 것임을 새기며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분명한 앎의 지혜를 얻게 한다.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성화의 여정을 위한 삶...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제시하셨다. 그러기에 육체의 일을 분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악으로 규제하시어 교회의 덕과 남에게 유익하도록 목표를 갖고 선을 좇아 성화로 열매를 맺도록 이끄심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여 맺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하심이다.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자의 실행 기준이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화답이요 주의 제자화로 성령과 하나되게 하심임을 확증케 한다. 그런즉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시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경계해 주셨다. 오직 겸손과 온유로 성령과 동행하여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가 앎의 지혜로 행함있는 믿음을 가진 지체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말씀의 순복은 주의 제자화를 위한 성령과 동행으로 구속사역에 참예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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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십자가’ 지는 헌신 9회] 겸손과 온유의 지혜로 주와 화평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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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배교의 일대 서사시④-김성일의
- 이와 같이 김성일의 소설 <제국과 천국>은 평소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채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 배교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다. 우리가 작품 내의 요한처럼 자신의 욕망과 야심으로 주님을 이용하려고만 할 때 우리 역시 별 수 없는 배교자가 되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욕망과 야심과 같은 그 세속적 유혹을 극복, 참회함으로써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한 해방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소설 속에서의 실제적 영웅은, 이런 표현이 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노사도 요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가위 기독교적 영웅의 삶의 극치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작품 속에서 요한은 확실히 한 위대한 신앙의 영웅이다. 이 소설 속에는 가혹한 박해자들과 위대한 순교자들이 허다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히 1세기에 걸치는 장수를 누린 사도 요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는 없겠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이야기, 열심당 지도자 기스칼라의 요한의 이야기,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이야기, 그리고 서머나 감독 폴리캅의 이야기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편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박해와 수난의 사화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거쳐 도미티아누스에 이르고, 이어서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 장기간의 박해와 교회수난의 역사가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대하드라마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창한 줄거리의 전개가 하나의 추리소설적 기법의 원용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에게 대단한 흥미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리하여 소설 작품이 일차적으로 뛰어넘어야 하는 ‘재미’란 벽은 이 소설이 가볍게 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재미’를 동반한 어떤 ‘의미’의 추구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소설의 세계가 목표로 해야 하는 지향점을 찾음에 있어서 이 작품은 일단 득의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성서 전체와 초대교회 역사에 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쓸 수 없는 노작임을 이 소설 스스로가 증명해 주고 있다. 작가는 성서를 평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구조화시켜 들여다보는 훈련을 쌓은 신자라는 사실도 알만한 독자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입체적 구성의 독특성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편이다. 이 작가의 성서 해석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신앙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그러나 최근의 성서해석법의 영향을 다분히 받으면서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절충·조화시켜 보려는 건실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성서 해석, 또는 교회사 연구를 토대로 하여 작가 특유의 사회-역사적 및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기독교 역사물로서의 문학적 형상화를 제대로 이루어냈다는 데 대하여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작가의 <땅끝…> 시리즈가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임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비하여 이 작품, <제국과 천국>이 훨씬 수작이란 평가에는 결코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성서에 대한 해석과 소설 작품의 창작은 상호 별개의 사항이므로, 성서에 대하여 아무리 훌륭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따로 없이는 역시 훌륭한 문학 작품의 생산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 <제국과 천국>에 대한 가치 평가는 더욱 높아져야 하리라고 보는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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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배교의 일대 서사시④-김성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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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절 명절
- 장막절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최장·최대·최종의 종결 축제일이다(레23:33-44). 일주일간을 189마리의 제물을 드리며, 땅의 열매를 거둔 후에 지키는 명절이다. 일반적으로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도 이와 유사한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절은 그 실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육적인 농사 거둔후는 그림자요, 영적 그리스도 안에서의 농사가 실상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농부시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는 붙은 가지와 같고 한 몸 이룬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열매 맺는 농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장막절 되기 전에 한 톨이라도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되겠다는 신앙 의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장막절은 7일간 초막을 지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추억한다(41-43절). 역시 이 초막 생활도 그림자요, 그 실상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때이다. 이때 과거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던 때를 추억하며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회상, 감격하며 기뻐하는 것이 그 실상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던 때를 회상하는 것과 같다. 과거 육적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 40년의 삶을 인도 섭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그림자이다. 이와 같이 장막절 전까지 우리는 말씀과 성령으로서 마치 불 기둥·구름 기둥같이 인도받았음을 추억한다. 또한 최종적인 7년 대환란의 날도 겪었다. 그 때 바로 주님이 감추인 만나 등을 주시며 이기게 하셨다. 또 적그리스도를 철장 권세로 멋지게 싸워 증거케 했던 일들을 하늘에서 회상했을 때 이는 오직 주님의 절대적 은혜 역사요, 인도하심으로 된 일이었음을 감격하며 더욱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영원히 돌리게 된다. 이것이 초막의 실상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3절부터 7절에서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시리라. 그때 이기는 자들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다. 그러면 장막절이 내게 이뤄짐이 무엇인가?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했고 속죄일에 부활했고, 장막절에 주님과 함께 거하며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아 영광 입은 자가 된 것이 장막절이 내게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장막절 명절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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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절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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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여성 안수에 대한 단상
- 스폰지, 이것은 어떤 형태든 물기가 있는 것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7살 때 유치원 선생님을 통해서 처음 복음을 들었다. 너무 좋았다. 그 이후 매일 예수님과 동행했다. 스폰지처럼 성경 말씀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후에 신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합동교단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고민 없이 총신신대원에 들어갔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미취학 전문사역을 2000년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미취학 사역은 전문사역이므로 합동교단 뿐만 아니라, 합신, 통합교단의 교회에서도 사역을 할 수 있었다. 통합교단의 한 교회 유치부 전도사로 사역한 지 3년차 되던 해에, 그곳에 나와 동갑의 여자 목사님이 교육 총괄 목사로 부임하셨다. 동갑의 통합교단 여성 목사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합동교단에서 자랐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서 자랐다. 나는 사역을 한 지 17년차가 되었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10여년 정도 되셨을 때였다. 나는 여전히 전도사로 한 부서를 맡아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여성 목사님은 한 부서를 담당하면서 교육 총괄 목사로서 특강도 준비하고, 정기적으로 오후예배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나는 미취학 전문 전도사였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교육 전문가이자 말씀 선포자였다. 무엇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을까? 차이는 다름 아닌, 난 합동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었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속한 교단에 따라서 결과가 너무 다르게 한 여성을 키워내고 있었다. 마치 북한과 남한에 태어난 여성 마냥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 같다. 두 교단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한 교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혁하여 ‘여성안수’를 허용했고, 한 교단은 여전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성경해석의 차이로 남녀를 구분하고 있어서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합동 교단의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안수 안주는 거 알고 총신신대원에 들어오지 않았나요? 왜 이제 와서 그러신가요?” 은혜를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존재가 총신신대원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은혜를 받고 총신에 입학할 때만 해도 안수가 큰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부르심 받았다는 은혜에 감격하여 여성안수 이슈는 염두에 두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총신신대원 여동문들은 졸업 후 수년 안에 깨닫는다. ‘아, 총신신대원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다른 데 갈 걸….’ 하지만,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여동문으로서 꿈꾸는 것이 있다. 하나, 남녀가 차별 없이 공부했듯이 졸업 후 사역에 있어서도 제약받지 않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공동체를 꿈꾼다. 둘, 남녀가 사역의 제한 없는 진정한 동역자가 되어 인권적인 침해가 없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되길 꿈꾼다. 셋, 변화하는 시대에 총신공동체가 도태되지 않고 세계선교를 앞에서 이끄는 공동체로 세워지길 꿈꾼다. 넷,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외칠 날을 꿈꾼다. “멋지다~! 총신여동문!” 합동 교단에서 여성안수의 길이 속히 열려서, 이 교단에서 은혜 받은 여성이 큰 일꾼으로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을 보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총신신대원 여동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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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여성 안수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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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알면 가정이 보인다(13)
- 상담 등을 통해 회복된 자녀는 가정에서 편안한 소통을 하게 되고, 자존감 회복, 학업과 진로, 친구관계에서 스트레스 관리능력이 향상된다. 또,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열린 사고를 하게 된다. 요즈음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는 어린아이들의 또래 학교폭력 소식을 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낀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부모의 양육이 자녀에게 미치는 신경생물학적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린 시절의 모성적 관심과 모성박탈이 사회적 뇌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모성박탈(Maternal Deprivation)은 아동학대나 분리, 무관심이나 방임 및 거부, 그리고 외상이나 스트레스 또는 사랑의 상실, 우울증 등으로 일어난다. 모성박탈은 뇌의 신경회로를 약화시키고 뇌의 신경가소성을 억제하며 BDNF(뇌유래 신경영양인자)를 감소시킨다. 우울증이나 어린 시절의 모성분리를 경험한 사람은 뇌 기능이 감소되고 고도의 불안증세를 보인다. 그리고 이후 성인에 이르러서도 애착에 어려움을 보인다. 어릴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면 부신에서 코르티솔을 분비케 하여 많은 정서적, 정신적 문제를 야기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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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알면 가정이 보인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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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알면 가정이 보인다(12)
- ‘내 아이는 왜 이럴까? 내가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도대체 이해가 안 돼’하면서 자신을 탓할 수도 있다. 결국 부모도 자녀도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대화가 안 되는 가정, 갈등만 쌓이는 가정, 자녀의 소질이나 자질이 뭔지 모르고 막연히 추측하는 부모, 부모의 말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녀, 이 모두가 상담하고 치유해야 할 대상이다. 치유되지 않으면, 부모는 계속 자녀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자녀는 자기 방어의 차원에서 저항이나 보복을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자녀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적성, 그리고 진로 등의 차원에서 상담이 필요하며 부모님은 부모의 미해결된 마음을 치유하는 상담이 필요하다. 자녀만 상담 받는 것은 100% 효과적이지 않다. 부모의 양육태도는 자녀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녀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차원에서 부모님이 오셔서 함께 검사와 상담을 받아야 한다. 부모는 자신의 미해결 문제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상담의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의 정신건강과 자녀의 정신건강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어서 동시에 상담의 시간을 가진다면 승승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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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알면 가정이 보인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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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영원 전에 내게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신 아버지 당신 닮은 영을 주시고 그로 인해 소망을 갖게 하신 아버지 내게 빛을 주시고 더러움에 찌든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셔서 죄에 대해 분노하게 하시는 아버지 처음 나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나를 지으시고 아름답다고 기뻐하신 아버지 욕심과 교만과 불순종에 얽혀 어둠 속을 헤메일 때 당신의 가슴은 또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때로는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곤두박질치며 내닫기도 하고 때로는 당신의 침묵 앞에 무너져 내리기도 하지만 어느 날 새벽 찬 이슬 속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면 저린 가슴에 두 손 얹고 고개만 끄덕이며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언젠가 그 어느 날, 당신 앞에 서는 날 기쁨의 찬양 부를 때 목이 터져 가슴이 터져 온전하신 당신의 사랑 안에 영원히 거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 참 마음으로 영의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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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