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7-06(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실시간뉴스

실시간 사랑의 실천 기사

  • 코로나19 이후를 묻는다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예배의 정상화를 묻곤 한다. 회복 여부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른 느낌이 들어 조심스럽다. 물론 모든 교회는 빠르면 부활주일부터 시작해 일제히 예배시간을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려 복귀하였다.물론 예배형식은 여전히 팬데믹 시절의 방식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방역당국은 5월부터 예배인원을 제한하지 않으며, 음식도 허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코로나19 상황변화에 따라 뉴노멀을 적용하는 것은 때 이른 듯하다. 예를 들어 아직 애찬을 나누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데, 지극히 조심스런 까닭은 안전에 대한 신중함이 아니었다. 지난 2년 이상 긴 휴지기가 교회의 주방봉사자들을 음식준비에 소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사실 누구나 코로나 탓으로 돌리지만, 교회 안팎에서 자발적 봉사는 점점 쉽지 않은 일이다. 감염병 상황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일찌감치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은 교회가 부인하고 싶은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실토하게 했을 뿐이다. 대형교회든 중소교회든 상가교회든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임기응변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돌아보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 종교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참으로 무기력하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당국의 일방적 통제에 순종 또는 미세하게 반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특히 재난 중에도 기존 예배형식에 집착했던 일부 교회의 행태는 사회적 비난을 불러왔다. 이 역시 초조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교회는 ‘위드 코로나’를 말하지만, 방역당국은 ‘단계적 일상회복’을 주장한다. 이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한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이후를 맞아 어떤 ‘뉴 노멀’을 만들어 갈 것인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다.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버릴 것과 지킬 것을 분별하여 변화와 개혁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7-04
  • 6.25 한국전쟁의 현대적 의미
      6월은 보훈의 달이며 특별히 6.25 한국전쟁을 상기하는 달이다. 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남침하여 3년 1개월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큰 전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 6.25전쟁은 인구 대이동이었다. 북한 사람이 1.4 후퇴 때 남으로 피난 오고 서울 사람이 시골로 이동했다. 서울의 영락교회는 피난민이 세운 교회이다. 남한에서는 전쟁을 피하여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난하고 보니 가족과 씨족사회의 붕괴로 청년들과 부녀자들이 자유롭게 교회 출석하게 되어 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한국전쟁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라 했다. 한국은 값없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이때 38선 이북은 김일성이 공산 독재로 다스리고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로 입국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북한은 일제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김일성 삼부자의 세습 독재로 일제시대보다 더 낙후된 국가로 전락했고 남한은 1953년 전쟁 후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현재 국민소득 3만불이 넘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것은 말세 하나님이 한국을 쓰시기 위해 위기 때마다 기회를 주신 것이다.   셋째, 한국은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나라로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초림(初臨)의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에 탄생하시어 인류구원을 이루셨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눅13:34-35). 재림(再臨)의 예수는 열매 맺는 나라를 선택한다 했는데(마21:43) 한국은 짧은 기간에 한국 인구의 사분지 일인 일천만 명을 신자화 했고 순교의 피를 흘린 나라이기에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자격이 있는 나라로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음을 믿는다.       결론적으로 코로나19와 오미크론 펜데믹으로 교회가 위축되어 있으나 사명이 있기에 불원 간에 한국의 헌법으로 남북통일도 있을 것이며 교회는 큰 부흥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재림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해야 할 섭리가 있음을 알고 성령충만으로 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6-14
  • 인생의 보배
        세상의 보석들에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빛이 있다. 영롱하고 찬란한 그 빛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소유한다고 해서 배가 부른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보석들을 긁어 모으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보석의 아름다운 광채는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흐려놓기도 한다. 본래 아름다움에는 독이 있는 법이고 그 독은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탐스러운 꽃을 보면 꺽어서 내 방에 놓아두고 싶어지고, 기름진 음식을 보면 내 배 안에 채우고 싶어지고 또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진다.   이렇듯 모든 욕망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눈에서 시작된 욕망은 순식간에 마음으로 전달되고 마음은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탐욕으로 채워진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망은 보여지는 이 보석으로만 치닫고 혹여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보석을 숨기느라 여념이 없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려던 첫 마음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보석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내 정신과 육신을 포박하는 이런 보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석이 있다. 그것은 썩지도 누가 훔쳐가지도 않으며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천만금을 준대도 팔수 없는 그런 보석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보석이 돈이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외면하며, 눈에 보이는 보석들만을 쫒으며 자신의 지위와 명예, 권위를 위해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이는 바로 세상의 가치관만을 추구하는 인생들을 뜻한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이 숱한 보석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천년만년 살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진시황제도,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호걸들도 하늘이 부르면 자신의 수명을 단 하루도 거스르지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함에 초조해 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들을 말끔히 씻어줄 보석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주님은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시며 영원한 보물을 얻고 싶으면 주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자. 그리하면 이 세상 모든 불안과 초조, 공포에서 해방되고 영원히 썩지 않는 내 영혼의 가장 귀한 보석을 우리 모두 소유하게 될 것이다./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6-06
  • 은혜로운 동행
      오늘날 한국교회는 역사상 가장 큰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휘몰아치는 세속화와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수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고, 예배는 심각한 수준으로 축소되어버렸습니다. 교회마다 부모의 신앙을 이어갈 다음 세대들이 없어서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전도의 문도 닫히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참담하고,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은 교회에 있음을 믿습니다. 교회만이 이 시대의 해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회복됨으로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움츠리고 있던 신앙적 활동이 모두 정상화되고, 기도의 자리를 통해 이 땅의 모든 성도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오르기를 기대합니다.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2년 1개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직 기도만이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것은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는 일이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이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8개 지역과 163개 노회에서 90% 이상의 적극적인 참여로 ‘은혜로운동행기도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기도운동을 통하여 주의 종들의 식었던 가슴이 다시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은혜로운동행기도회’는 대장정의 막을 내렸지만, 오늘 우리는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우리 총회의 아름다운 전통인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통해 이제는 전국 노회 산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로 기도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신앙의 활동이 멈춰버리는 일을 그저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사명의 날이 더 날카롭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얼어붙었던 우리의 심령이 복음의 열정으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는 은혜로운 동행이 시작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제59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 기도의 불길을 재점화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애써주신 총회 임원들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5-19
  • 풍요로움이 진정한 축복일까?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한 것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은 직후 즉,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입성한지 불과 30년만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축복의 땅에 입성하여 행복과 감사와 기쁨이 넘쳐야 할 바로 그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후에 38년의 광야의 생활을 통해 불순종의 세대는 전부 죽고, 오로지 새로운 순종의 세대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눈으로 보고 느끼며 경험한 세대, 즉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던 시대로부터 불과 30년 만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했다’고 말하고 있는 사사기 2장 10절은 사사기에 여러 번 반복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실로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민족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어 경제적으로 부흥해집니다. 그런데 그 경제적 풍요와 안정이 오히려 축복이 아니라 패망으로 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것들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한국의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도 감사할 것들이 많은 시대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세상을 더욱더 사랑하고 섬기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영적으로는 사사기와 같이 더욱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사기로 우리를 인도하는 두 가지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태복음 6장24절에서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하십니다.    둘째 거짓말은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험의 신앙을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을 때 우리의 자녀들 즉 다음세대는 너무도 쉽게 너무도 많은 풍요로움을 거저 받아서 가나안 땅에 입성했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백성들이 될 수 있습니다.  /호주기독교대학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5-11
  •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은혜
      인간이 예수 부활의 진리를 부정한다고 해도 진리가 거짓으로 바뀌지 않는다. 굴을 파서 만든 예수의 무덤 앞에 큰 돌로 가로막고, 로마 군인들이 주야로 철통같이 지키며, 지혜나 온갖 술수를 써서 부활을 부정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려도 예수는 부활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지난 4월 17일 부활절 아침에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K집사가 목양실에 찾아와서 요즈음 왼쪽 발에 통증이 와서 어찌나 아팠던지 오늘 교회에 못나오는 줄로 알았는데 아픔을 참고 억지로 나왔다면서 자신의 고충을 호소했다. 그는 온종일 서서 일을 해야만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몹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내가 잘 아는 발 교정사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 서로 상담을 하도록 연결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한 후 K집사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예배실로 올라갔다. 순간 성령님이 나에게 책망을 하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목사냐? 내가 너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었거늘 어찌 내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기도를 해주지 않느냐?” 나는 즉시 K집사를 불러서 안수 기도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령님을 소멸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통회하면서 환자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 다음 주일에 K집사가 담임목사에게 기도를 받고 통증이 치유되었다는 소문이 교회 내에 순식간에 퍼지면서, 2부 예배를 드린 후에 다수의 성도들이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해서 별도로 3부 안수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기도는 인간이 하지만 예수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권능을 베푸셔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치유사역을 해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교회가 세속화 되고, 코로나로 인해 대면을 꺼려하고, 성도들이 기도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수기도를 중단한 상태였다.   초대교회처럼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힘써 일하면 지금도 많은 일을 하도록 도와주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믿음과 사역의 가치를 이뤄나가도록 역사하신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다시 사셨음을 체험하고 만방에 전하자.  /예장합동선목총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5-04
  • ‘사랑의 실천’의 전파자
    내가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기독교를 보는 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예배당에 나간다는 것과 나가지 않는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는 똑같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입으로만 사랑, 사랑이라고 말할 뿐 실천하는 게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참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의 실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의 실천’을 만들게 된 발상의 근원에는 어느 정도 기독교적인 것이 깔려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에 대한 비판적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의 교훈으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성경에서 얻어온 것만은 아니다. 성경에는 ‘실천’이라는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할 때에는 교회나 사회에서도 거론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반세기 전에 나는 이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의 실천 정신임을 간파하고 줄기차게 그것을 외쳐 왔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은 내가 처음으로 만들고 또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데 앞장 서 온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더러 이와 유사한 말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사랑으로 사는 운동’이라거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등에서 그 유사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요즘엔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사랑의 실천’에 대해 내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사는 운동’ 본부에서 한경직목사가 김병래장로를 대동하고 나를 찾아와서 주제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노래를 작곡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면 나를 떠올릴 정도로 나는 일생 동안 그것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4-27
  • [부활절 메시지] 다시 일어서는 계절
    부활의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부활의 계절이 생명이 약동하는 봄인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다시 산다’는 진리와 희망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때 직접 부활을 의미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에게이로ἐγείρω’, 즉 일어나신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마28:6~7) 이는 부활은 절대로 없다는 의미나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 혹은 전설 속에서 부활을 이야기하는 경우와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황당한 거짓말이거나 허탄한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도 오해할 수 없도록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활이란 결코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개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매순간 인식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를 위한 희망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고 다시 일어서는 희망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무너진 곳들과 삶의 자리를 잃고 흩어진 수많은 난민들이 평화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기금모금에 참여하며 생명의 능력과 따뜻한 사랑으로 부활의 삶이 경험되는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산불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동해, 삼척, 울진지방의 이재민을 위한 ‘한국교회 사랑의 집짓기 모금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새롭게 선출된 대통령이 취임준비를 하며 나라가 새로운 출발을 하는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올해 부활절은 회복을 위한 기회이자, 도전(Challenge)과 변화(Change)를 위한 위임의 기회(Chance)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일어서는 복을 함께 누리길 원합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4-13
  • 욕심에서 내려오라
    마음속에 항상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묻고 있던 삭개오에게 예수는 하나의 탐구대상이었다. 도대체 그가 누군데 그 많은 사람이 그의 무릎 아래 발을 꿇는 것일까? 나는 그다지 나쁜 일을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데 그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이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그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보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은 그 군중들 속에서 자신에게 향해있는 한 염원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 숨어 있는 그를 불렀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나무에서 내려와라” 여기에서 나무라 함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의미한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견고한 자의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 인간의 곤고한 마음을 보았고 그것을 측은히 여겨 그에게 새 삶의 길을 제시했다. 아무도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때 예수만은 그의 마음에 들끓고 있는 갈등에 주목했다. 갈등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과오투성인 인간이었다. 백성들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임의로 털어내기도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탐심에 젖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또 다른 삶에 대한 갈구가 있었다. 그 갈구가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게 했고 애써 올라간 나무에서 또 내려보게 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생을 바로 잡을 기회가 있다.   내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때 이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단하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기회란 없다. 우리는 나의 모든 운명의 변화가 예수를 만나기 위한 일련의 절차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오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수고로움이 죽어도 싫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 고집 때문이다. 이 일을 버리면 당장 밥을 굶주림 같은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을 빛의 자녀가 아닌 어둠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간다.   잠시의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자신의 과거를 모두 부인하고 “내려오라”는 말씀에 순종해 평생 예수의 사람으로 산 삭개오의 정신을 아무리 음미해도 부족하기만 한 교훈을 담고 있다.  /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4-10
  • 욕심에서 내려오라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고 사는 세리장이었다.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욕을 많이 먹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의 서민들에게 세금을 걷으러 다니는 일이 그의 직업이다보니 삭개오 또한 백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렵기까지 했을터였다. 그러던 차에 여리고로 가는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마음속에 항상 “ 이렇게 살아야 될 것인가”묻고있던 그에게 예수는 하나의 탐구대상이었다. 도대체 그가 누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릎아래 발을 꿇는 것일까? 나는 그다지 나쁜 일을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데 그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이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그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보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워낙 키가 작아서이기도 했지만 예수에 대한 탐구심이 그만큼 깊었음을 엿볼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그 군중들 속에서 자신에게 향해있는 한 염원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 숨어 있는 그를 불렀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나무에서 내려와라” 여기에서 나무라함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의미한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견고한 자의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 인간의 곤고한 마음을 보았고 그것을 측은히 여겨 그에게 새 삶의 길을 제시했다. 아무도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때 예수만은 그의 마음에 들끓고 있는 갈등에 주목했다. 갈등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과오투성인 인간이었다. 백성들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임의로 털어내기도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탐심에 젖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또 다른 삶에 대한 갈구가 있었다. 그 갈구가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게 했고 애써 올라간 나무에서 또 내려보게 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생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내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때 이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단하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기회란 없다. 우리는 나의 모든 운명의 변화가 예수를 만나기 위한 일련의 절차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오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 수고로움이 죽어도 싫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 고집 때문이다. 이 일을 버리면 당장 밥을 굶주림 같은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을 빛의 자녀가 아닌 어둠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간다. 잠시의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자신의 과거를 모두 부인하고 “내려오라”는 말씀에 순종해 평생 예수의 사람으로 산 삭개오의 정신을 아무리 음미해도 부족하기만 한 교훈을 담고 있다./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2-04-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