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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여, 젊은이들 빼앗긴 죄악을 참회하고 통회하라
      이태원 사고는 그것을 당한 분들의 부모와 가족과 친지와 우리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과 놀람과 고통을 준 불행한 사건이다. 왜 이런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우리 모두의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한 정부 차원의 철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고를 성경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분석하고 여기에 담긴 영적 차원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진단하며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할로윈 데이'라는 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발전해온 축제를 맞이하여 엄청나게 많은 젊은이들이 좁은 도로에 한꺼번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압사를 일으킬만한 정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왜 그곳에 가게 되었는가? 아마 사고를 당한 분들에게도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들리는 말에는, 많은 젊은들이 호기심으로 그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특히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주일학교 현실에서 초등부와 중고등부는 물론 대학청년부에 이르기까지 출석하는 인원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주일학교 자체가 없어진 교회들이 대단히 많다고 듣고 있다. 기독교적 정신과 가치와 이념을 따라 세워진 대학들에서조차 기독교인 대학생들의 숫자가 전체 학생의 5% 이하이며 그래서 오늘날 대학생들을 가리켜 '미전도 종족'이라고 말하는 어느 대학교 교수의 말을 들은 것이 최근이다. 자라나는 세대가 이렇게 점점 더 교회를 떠나가고 있는 반면, 교회와 상관없는 모임과 나아가 교회를 거부하고 반대하며 배척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일어난 젊은이들의 ‘탈-교회’ 현상이다. 한국의 손흥민 선수가 뛰는 축구 경기 중계 화면을 보면, 그렇게 큰 축구 경기장에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러한 모습은 연로하신 소수의 신자들이 크고 웅장한 영국 교회의 예배당에 모여 쓸쓸하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왜 젊은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오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과 상관없는 것에 정신이 팔리도록 만들어 왔는가? 우리는 왜 젊은이들의 영혼을 그들의 주인이 되신 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인가? 이태원 사고를 놓고 우리는 외면만 화려하고 풍성하게 보이지, 영적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무능하고, 무력하며, 무책임한 한국교회의 영적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각성해야 한다.  나를 비롯해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은 주 하나님 앞에서 젊은이들의 영혼을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 빼앗긴 우리의영적인 무능력과, 무책임과, 무관심을 애통하며 통곡하며 회개해야 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버리고 떠나가고 있는 상황을 방치하고 내버려 둔 죄악을 참회하고 통회하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호 6:1).   젊은이들의 영혼을 복음으로 붙잡기 위해 지금 눈물로 기도하며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도 유럽과 북미 교회들의 전철을 따라갈 것이다. 사탄의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세속의 물결과 죄악의 물결과 사탄의 물결(계 12:15)에 우리도 다 휩쓸리고 마귀의 밥이 되어 배교의 벼랑 끝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마겟돈으로 부르는 영적인 최후 전쟁(계 16:16)을 앞두고 있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종말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벼랑 끝에 서있는 절박하고 위급한 마음으로 독수리의 두 날개를 보내주시도록(계 12:14) 절박하게 급박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금 심각한 영적 위기의 때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대행·대전 늘사랑교회 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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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11-21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하박국이 예언한 시기는 주전 600년경으로 포로 전 유다 왕 요시야가 죽는 때와 겹치는 시기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일으켰던 요시야 왕이 죽게 되자 유다는 점차 국가적인 혼란, 도덕적인 부패, 종교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시야 왕이 죽은 후 유다 백성들이 점점 악해져 가고 망국적인 행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의로운 사람이 핍박당하고 악인들이 득세하고, 잘못된 행동과 주장이 정의를 대신하는 사회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를 징벌하려 행동을 개시한다.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쓰시고자 세운 바벨론 왕국은 무력의 왕국이다. 군마와 무기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그들에게는 도덕이나 윤리가 없다. 오직 힘이 정의이다. 여기에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이미 3000년 동안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지만 힘이 약화되고 있다.   헬라는 도시국가를 형성하면서 이제 점점 인본주의 철학으로 무장하며 제국의 기운을 모아가고 있었다. 로마 역시 절치부심하며 나라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 이 강대한 제국들 가운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다. 이후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정복을 당한다.   유다를 중심으로 제국들이 힘을 겨루는 험난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도 유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다. 이것이 하박국의 눈에는 멸망으로 가는 자신들의 운명으로 보였다.   국가와 사회는 모두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간다. 우리시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 지혜롭다고 한다. 어떻게든 돈을 많이 모아야 성공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으면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유치한 행동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그래야 산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다시 부흥하는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익산 동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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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11-14
  • 함께 슬퍼하며 기도합시다
        이태원 압사사고로 귀한 생명을 잃어버린 일이 일어났다.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들이다. 상상할 수 없는 참상 앞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들 대부분이 10대, 20대의 우리 자녀들이라고 한다. 아침에 집에서 나갔다고 했는데 밤에 비보를 들은 가정들은 청천벼락을 맞은 것이다. 어떤 말로 위로하며 아픔을 대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함께 슬퍼할 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낸다.    대부분의 피해자인 그들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만남도 있고 위로도 필요하며 쉼과 놀이도 누려야 했기에 그 공간을 빌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곳이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공간이 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비극의 자리에 슬퍼할 뿐이다 . 슬픔과 애도의 자리에서 교회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생명을 주는 진리인데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느냐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이 사회를 건강한 문화로 이끌고 섬겼느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피해자인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꿈과 비전을 심어주어 다음세대를 주안에서 미래세대로 세웠느냐는 것이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붙잡아야 한다. 샬롬부흥의 직분자로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한다. 함께 슬퍼하며 기도하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린도후서 1:4~7)”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예장 합동측 총회장 · 주다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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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11-14
  • 꼭 필요한 인생을 살자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인생(人生)과 인간(人間)은 그 의미가 다르게 쓰인다. 인생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란 것이고, 인간이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란 말이다.   사람을 두고 쓰는 이 두 말은 사람에게 가장 값지고 엄숙한 말이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는 사람의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에는 저마다 목적이 있는 것이기에 엄숙하고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서로를 위해 사랑을 실천하면서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일생이라야 한다고,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요 수필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곤충에 비유하여 인간의 세 종류를 말하였다.   그는 첫째의 인간으로 거미처럼 인생을 사는 인간이 있다고 한다. 거미는 그늘진 곳에 거미줄을 쳐놓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생명이 걸리면 슬그머니 나와서 피를 빨아먹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을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그는 또 두 번째의 인간으로 개미형의 인생을 사는 사람을 지적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조직력도 강하지만 누구에게 유익을 주거나 헌신함 없이 오직 자기들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엔 공동체 정신없이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이웃에게 유익도 끼치지 않고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음을 꼬집었다.   베이컨은 세 번째로 꿀벌형의 인생을 사는,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꿀벌은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조직력이 매우 강하다. 그런데 꿀벌은 질서있게 활동하여 많은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상당한 꿀을 생산해주는 이타주의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타입의 인생을 사는 인간들을 곤충에 비유한 프란시스 베이컨은 거미형의 인간은 이 세상에 있어선 아니 될 사람이라 했고, 개미형의 인간을 가리키면서 그런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되는, 즉 있으나 마나한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세상, 사회 곳곳에 꼭 필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꿀벌과 같은 인간이라고 칭찬했다. 없어선 아니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인생철학이 뚜렷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인간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철학자 룻소가 말했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 살 수 없다. 구경꾼처럼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하여 귀한 생명의 존엄을 꼭 인식하고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는 멋진 인간이 돼야 한다. /경천교회 원로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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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09-30
  • 약자와의 동행
      요즘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얼마나 좋은 말이면 정치인들이 너나없이 애용하는 구호가 될 정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말도 결국은 약자와의 동행으로 귀결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이라는 행위도 마지막에는 약자와의 동행에 이르게 된다. 약자와의 동행은 동물에게는 없는 우리 인간만이 가진 고귀한 가치이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덕목이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도 약자에게 기울일 때 귀한 것이 된다. 약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강자를 사랑하면 아부가 된다.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애정어린 관심이 되지만 강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자기 욕심의 성취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고귀하고 가치있는 약자와의 동행이라고 해도 그것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나 구호에 머물거나 유명인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한낱 화려하고 현란한 언어의 유희에 그칠 뿐이다. 행동화, 실천화가 안되면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바로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이다.   목사님들이 설교예화로 즐겨 사용하는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눈덮인 산고갯길을 친구와 함께 넘다가 추위에 얼어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친구는 어차피 살기 어려우니 그냥 지나쳐가자고 했고 썬 다싱은 그래도 같이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다. 의견이 맞지 않아 친구는 홀로 먼저 떠났고 썬다 싱은 그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고갯길을 넘는다. 땀과 열기가 등에 업힌 사람에게 전해져 마침내 살아나게 된다. 함께 눈보라 산길을 넘던 두 사람은 추위에 이미 얼어 죽은 또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앞서 먼저 떠났던 그 친구였다. 약자와의 동행은 약자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내가 사는 길이다. 아니 모두 함께 사는 길이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쉬운 말로 하면 이 땅의 약자와 동행하기기 위해서 오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종교적 약자, 경제적 약자, 육체적 약자,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약자를 위해 오셨고 그들을 위해 살다가 그 약자들에게 생명까지 주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곧 약자와의 동행을 의미하며 그 약자를 위한 사랑이 행동화한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행동으로 표출되는 약자와의 동행이 단순히 사회복지라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넘쳐나기를 소망해본다./기독교한국루터회 전임총회장·베델성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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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09-15
  • 행복의 조건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 자체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의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가 깨지면 행복은 없다. 우리가 폭력을 증오하고 전쟁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도 평화가 해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인간이 추구해 온 낙원 그것은 바로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끊임없이 수양하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다. 옳지 않은 길을 갈 때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평화라는 낙원을 만들기는 쉽지 않고 인간 사회 속에서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는 잠잠하고자 하나 바람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다.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해하며 원치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상황에 갈등하고, 피를 나눈 가족간에도 서로간의 상처로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혼자 산다면 이런 갈등들과 만나지 않을 테지만 인간인 이상 혼자 살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숱한 선택과 갈등의 상황들을 해쳐나가 마음의 참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을 보면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는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게 부모의 마음을 찌른다”란 구절이 나온다. 감사가 없이는 모든 것이 해가 된다는 말이다.   행복의 기본은 감사이다.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감사하는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커다란 문제일지라도 그것의 비중은 아주 작아지고 만다. 예를 들어보면 한밤중에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가 나에게 칼을 들이대며 위협해 지갑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하자.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강도에게 지갑만 뺏기고 목숨이 온전한 것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저렇게 다 잘 사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힘든 상황과 억울한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습관처럼 가지려고 노력해 보자.  /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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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08-23
  •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수해지역은 일년내 복구하고 다음해 또 물난리를 만난다. 수재민돕기 성금보다, 수해대비 성금을 잊어버리고 당한다. 참으로 인간은 어리석은가. 그런데 긴 장마철인데 뜨겁게 태양 마저 내려 쪼이는 날이다. 올 여름 무더위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으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인데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나는 좀 짜증스럽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철면피라니 인면수심(人面獸心)이나 하는 말을 하게 된다.   맹자는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는 척도로써 사람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진 마음 곧 ‘인(仁)’이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창피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의로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랑하는 마음과 남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예가 있기 때문이다. 또 시비(是非)를 가릴 줄 아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까닭이라 했다. 이러한 희미를 가진 인의예지의 인생을 최대로 실현하는 것을 맹자는 ‘군자도’라고 했다.   이 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직이란 대인관계에 있어서 솔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기에 대해서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요, 남의 눈과 남의 마음을 속이려면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을 속일 수 없다. 무엇을 하든 자신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8절에는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한다. 사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남이 숨겨진 내 마음을 모르니, 속일 수도 있지만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기상대의 일기예보가 오보인가 아니면 하늘이 사람을 속이는가. 이 시대 사람들처럼 비가 오락가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직한 사회 같은데 어찌 보면 전부가 다 거짓말이고 속이는 세상이 되었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사람이 악한 꾀를 부리면 더 악해지고 솔직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도태된다. 정직한 사랑을 가진 자 만이 승리할 수 있다./엘림교회 목사·예장 개혁 혁신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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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08-08
  • 코로나19 이후를 묻는다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예배의 정상화를 묻곤 한다. 회복 여부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른 느낌이 들어 조심스럽다. 물론 모든 교회는 빠르면 부활주일부터 시작해 일제히 예배시간을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려 복귀하였다.물론 예배형식은 여전히 팬데믹 시절의 방식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방역당국은 5월부터 예배인원을 제한하지 않으며, 음식도 허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코로나19 상황변화에 따라 뉴노멀을 적용하는 것은 때 이른 듯하다. 예를 들어 아직 애찬을 나누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데, 지극히 조심스런 까닭은 안전에 대한 신중함이 아니었다. 지난 2년 이상 긴 휴지기가 교회의 주방봉사자들을 음식준비에 소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사실 누구나 코로나 탓으로 돌리지만, 교회 안팎에서 자발적 봉사는 점점 쉽지 않은 일이다. 감염병 상황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일찌감치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은 교회가 부인하고 싶은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실토하게 했을 뿐이다. 대형교회든 중소교회든 상가교회든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임기응변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돌아보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 종교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참으로 무기력하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당국의 일방적 통제에 순종 또는 미세하게 반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특히 재난 중에도 기존 예배형식에 집착했던 일부 교회의 행태는 사회적 비난을 불러왔다. 이 역시 초조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교회는 ‘위드 코로나’를 말하지만, 방역당국은 ‘단계적 일상회복’을 주장한다. 이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한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이후를 맞아 어떤 ‘뉴 노멀’을 만들어 갈 것인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다.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버릴 것과 지킬 것을 분별하여 변화와 개혁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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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07-04
  • 6.25 한국전쟁의 현대적 의미
      6월은 보훈의 달이며 특별히 6.25 한국전쟁을 상기하는 달이다. 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남침하여 3년 1개월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큰 전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 6.25전쟁은 인구 대이동이었다. 북한 사람이 1.4 후퇴 때 남으로 피난 오고 서울 사람이 시골로 이동했다. 서울의 영락교회는 피난민이 세운 교회이다. 남한에서는 전쟁을 피하여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난하고 보니 가족과 씨족사회의 붕괴로 청년들과 부녀자들이 자유롭게 교회 출석하게 되어 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한국전쟁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라 했다. 한국은 값없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이때 38선 이북은 김일성이 공산 독재로 다스리고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로 입국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북한은 일제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김일성 삼부자의 세습 독재로 일제시대보다 더 낙후된 국가로 전락했고 남한은 1953년 전쟁 후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현재 국민소득 3만불이 넘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것은 말세 하나님이 한국을 쓰시기 위해 위기 때마다 기회를 주신 것이다.   셋째, 한국은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나라로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초림(初臨)의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에 탄생하시어 인류구원을 이루셨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눅13:34-35). 재림(再臨)의 예수는 열매 맺는 나라를 선택한다 했는데(마21:43) 한국은 짧은 기간에 한국 인구의 사분지 일인 일천만 명을 신자화 했고 순교의 피를 흘린 나라이기에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자격이 있는 나라로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음을 믿는다.       결론적으로 코로나19와 오미크론 펜데믹으로 교회가 위축되어 있으나 사명이 있기에 불원 간에 한국의 헌법으로 남북통일도 있을 것이며 교회는 큰 부흥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재림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해야 할 섭리가 있음을 알고 성령충만으로 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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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06-14
  • 인생의 보배
        세상의 보석들에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빛이 있다. 영롱하고 찬란한 그 빛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소유한다고 해서 배가 부른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보석들을 긁어 모으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보석의 아름다운 광채는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흐려놓기도 한다. 본래 아름다움에는 독이 있는 법이고 그 독은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탐스러운 꽃을 보면 꺽어서 내 방에 놓아두고 싶어지고, 기름진 음식을 보면 내 배 안에 채우고 싶어지고 또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진다.   이렇듯 모든 욕망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눈에서 시작된 욕망은 순식간에 마음으로 전달되고 마음은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탐욕으로 채워진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망은 보여지는 이 보석으로만 치닫고 혹여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보석을 숨기느라 여념이 없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려던 첫 마음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보석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내 정신과 육신을 포박하는 이런 보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석이 있다. 그것은 썩지도 누가 훔쳐가지도 않으며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천만금을 준대도 팔수 없는 그런 보석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보석이 돈이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외면하며, 눈에 보이는 보석들만을 쫒으며 자신의 지위와 명예, 권위를 위해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이는 바로 세상의 가치관만을 추구하는 인생들을 뜻한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이 숱한 보석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천년만년 살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진시황제도,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호걸들도 하늘이 부르면 자신의 수명을 단 하루도 거스르지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함에 초조해 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들을 말끔히 씻어줄 보석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주님은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시며 영원한 보물을 얻고 싶으면 주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자. 그리하면 이 세상 모든 불안과 초조, 공포에서 해방되고 영원히 썩지 않는 내 영혼의 가장 귀한 보석을 우리 모두 소유하게 될 것이다./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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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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