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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사변, 상기, 기념할 건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잔혹하고 치열했던 전쟁은 6·25사변이다. 세계적으로 역사에 남을 『한국전쟁』 으로 기록되고 있다. 유엔(United Nation)의 16개국 우방들이 참전해 준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저 멀리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와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를 비롯한 필리핀까지 그야말로 우리의 우방 나라들이 참전하여 우리 이상으로 피를 흘리며 생명을 바쳐 싸워준 한국전쟁, 6·25사변이었다.   6·25사변이 있은지 금년은 71년째를 맞는다. 71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여러차례 정치적 소용돌이를 경험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화를 이루어냈으며 경제적으로도 시장경제의 안착으로 세계에 빛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71년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1인 독재 체재하에 경제는 더 어렵고 인권과 주민들의 고통은 날로 심해졌으며 3대 세습으로 더욱 고립화된 현실이다. 오직 핵무장을 통한 체제 유지를 고집하다 보니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한반도의 긴장은 남과 북만이 풀지 못하는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6·25사변(한국전쟁) 71주년을 맞으면서 그 당시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했던 세대는 6·25사변의 뼈아팠던 경험을 상기하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몸서리를 치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1950년 6월 25일, 그날은 주일(일요일) 새벽이었다. 자다가 홍두깨로 한 대 얻어맞는 격으로 우리는 불법남침을 받은 것이다. 전방은 쉽게 탱크에 짓밟혔으며 속수무책으로 서울도 빼앗기고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였고 피난을 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날들을 다시 생각하며 해마다 호국의 달 6월이 되면 특별히 6월 25일이 되면 6·25사변, 한국전쟁을 다시 상기(想起)하자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사변(事變)이란 “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없이 무력을 쓰는 일”이라고 하였고 상기(想起)란 “전에 있었던 일을 도로 생각해 냄”이라고 하였다. 6·25사변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 모든 국민들은 6·25사변을 상기해야지, 기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장 통합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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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6-20
  • 주님의 마지막 경고, 회개하라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심을 믿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분부하셨으나 대부분 불순종하고 롯의 사위들처럼 인류 종말의 도래를 농담으로 여기며 지나쳐 버린다. 하나님은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어도 통회자복을 하면 용서해 주시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끄는 성군이 되게 하셨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는 어린 십대에 방탕함과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한 어거스틴이 후에 성경을 읽고 심령에 찔림을 받아 통회자복을 함으로 용서를 받았으며 후에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성자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다윗이나 어거스틴이 죄를 짓고도 용서를 받은 후에 하나님이 특별한 인물로 쓰셨다고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고, 다만 죄를 회개치 않은 사람은 결국 거의가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죄를 짓고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약간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후회하는 정도에 그치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소수의 사람은 지은 죄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통회를 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같은 주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목전에 두고 각각 배신하는 죄를 지었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보면 1907년 1월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목사가 회개의 고백을 하자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교인들 각자가 자신들이 지은 추악한 죄를 토해내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회개와 부흥운동이 전개되었고 전국적으로 성령의 불이 번져 나가면서 한국이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회개하면 살고 회개가 없으면 죽는다. 회개하면 천국가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만들고 천국가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주님이 우리시대에 마지막 경고를 하셨는지도 모른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장 합동선목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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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7
  • 코로나 팬데믹 중 하나님의 은혜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실체가 된 지 벌써 한 해를 넘기고 있다. 여전히 그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있으며, 그 위세에 전 인류는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신 개발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변형 바이러스 형태의 팬데믹이 과연 온전히 다스려질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의 근본 원인은 기후변화에 있으며, 이 때문에 기후변화는 기후위기의 심각성 문제로 치닫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산업화가 추진된 이래, 전 세계가 경제발전과 함께 온통 자연을 이용한 생산 활동에 집중하였고, 이에 따른 과도한 에너지 사용은 마침내 지구 기온을 상승시켰으며, 그것이 오늘날 기후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중세기 유럽에서는 페스트 팬데믹 창궐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질병의 주된 원인은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오늘날 사람들의 인식도 대체로 천재(天災)로 인식하기보다, 인간 스스로 초래한 인재(人災)로 보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재를 뒷받침하는 이론은 자연과학자들에게서 이미 “인류세”(Anthropocene)란 개념을 통하여 합리화되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자연생태계를 파괴한 인간의 행위가 지구환경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 결과가 오늘의 기후위기와 팬데믹 위기초래의 원인이라는 해명이 더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유엔 산하에 설치된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과 ‘세계기후기구’(WMO)가 1988년 ‘기후변화에 관한 각 나라의 정부간 패널’(IPCC)이란 단체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기후변화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이래로 이 기구(IPCC)는 인간의 활동이 초래하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구체적인 통계로 제시하며,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을 수행해왔다.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이 시대를 향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심판의 경고요, 경종과 각성으로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염원한다. /총신대학교 전 총장·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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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5-28
  • 성공한 가정의 원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가정이라는 것이 잠언의 관점이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어도 가정생활에 실패하면 다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성공적인 가정을 위해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려면 가장에게 적절한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보다도 일을 해서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잠 24:27).    둘째,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려면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지식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3~4) 가족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위치에 맞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서로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정의 덕목은 화목입니다. ‘가화만사성.’ 성경적인 문구입니다. 물질적인 부요보다도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9). 늘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고, 불친절하고, 감사치 않는 사람은 가정의 화목을 깨고 배우자로 하여금 방황하게 합니다.    네 번째로 가정이 성공적인 가정이 되려면 의로운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버리느니라”(잠 21:20).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의인의 건강이나 재정이나 혹은 자녀들에게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사는 가정은 위기가 여섯 번 와도 능히 다 이겨내고 일어날 수 있지만 악인의 가정은 한 번의 위기에서도 넘어지고 맙니다. 의로움은 가장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이 늘 말씀을 읽고 말씀에 바로 서서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 가족은 그대로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한국기독교화해중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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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5-17
  • 안에서 깨어난 생명
      들꽃 사진을 찍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요즘 피는 꽃 중에 옥녀꽃대와 홀아비 꽃대가 있단다. 둘이 이름 그대로 암꽃과 수꽃이다. 안타깝게도 두 남녀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남쪽 땅에 피는 옥녀와 달리 홀아비는 북쪽지역에 분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생대가 점점 근접하여 두 꽃 모두 충청도에서 발견되지만, 옥녀는 안면도등 해안지역에 살고 홀아비는 충북 괴산 같은 산골에 산다고 한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니 서로 모양은 달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암수한몸 꼴들도 많은데 암꽃과 수꽃 혹은 암그루와 수그루로 나뉘어 있으며 어느 천 년에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안타깝다. 물론 가까이 살면 나비가 꽃들에게 희망을 주겠지만, 해안과 산악으로 멀리 떨어져 사는 옥녀와 홀아비에게는 그런 중신아비도 아직 없는 셈이다. 장년을 맞는 후배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자녀 결혼문제로 걱정을 한다. 베이비붐 세대인 그들은 젊은 시절의 자신들과 비교해 자녀들의 혼인관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자녀 세대인 에코세대는 부모의 기대처럼 소리가 되돌 아 오는 메아리(에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기존 통과의례의 하나인 결혼 따위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젠더이슈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이다. 예전에 쉬쉬하던 일이 우리 사회의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부모 입장에서는 행여 결혼에 소극적인 자녀에게 남모를 사연이 있을까 싶어 염려가 크다. 세상이 너무 달라졌다. 우리 세대는 동성동본 혼인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이젠 양성평등의 단계를 넘어, 다양한 젠더의 존재로 확장하고 있다. 수용성이 빠른 에코세대의 존재는 베이비붐 세대의 불안감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논의 수준은 찬반의 절대성만 있을 뿐 약간의 혜안도 찾지 못한다. 어떤 모양이든 관용과 차별사이에서 불화와 대결의 경계선을 넘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인 무시와 정죄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특히 교회가 성을 쌓고 심판하고 남에게 원치 않는 차별의 이름을 더하기 시작하면 조직교회가 갖는 마성과 조직우상이 주님을 대신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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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5-12
  • 가족에서 시작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한양대학교의 교훈은 ‘사랑의 실천’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독교 신자이니까 기독교의 사랑과 연결지어 성경에서 그 말을 가져 온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종교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성장기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는데, 굳이 근원을 따지자면 철학적인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에 나의 인생 철학을 보태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양대학에서 기술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몇 해 전에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학교의 졸업생을 만났을 때 그들이 자식을 키워 보니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겠다고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실천’을 가문의 철학으로 여기고 자식들에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 아들과 남의 아들이 싸우면 이유를 막론하고 내 아들은 잘못했다고 나무라고 남의 아들은 위로했습니다. 그게 현명한 아버지의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그때 학창 시절에 듣고 배운 ‘사랑의 실천’이 상기되면서 내가 남의 아들을 사랑하면 남들도 또 내 아들을 사랑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학생들에게 늘 강조해 온 것도 사랑이란 먼저 주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당시에는 어려서 그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회에 나가서 현실에 부딪혀 보니까 저절로 터득되었다는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60대에 이른 사람들이 학교의 교훈이자 나의 철학인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하여 자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 속으로 참으로 흐뭇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열심히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수확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교직원들 가운데에도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정한 분들이 많다고 한다. 그것도 결국 나의 철학에 감화를 받은 결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가정과 가족 구성원으로까지 넓고 깊게 확산되어 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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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5-07
  • 코로나 19와 가정예배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선물중의 하나가 가족결속력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족 결속력은 가정예배를 통한 동반상승이다. 잃어버린 대화를 회복하고 가족 구성원간의 상호 이해를 힘있게 도모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정예배를 통하여 삶의 질을 어떤 원리로 강화할 수 있을까? 신명기 6:4-9절을 보자.   첫째, 가정예배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님사랑의 표현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명령하였다. 가정예배는 가족구성원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실천적 사랑이다.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가 가는 곳마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둘째 가정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영적훈련이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의 변화는 내면의 가치의 변화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내면의 가치의 변화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확신에 기초한다. 가정예배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모든 가족 구성원이 마음에 새기는 거룩한 시간이다.   셋째, 가정예배는 믿음의 세대계승의 현장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믿음의 세대계승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영적인 각성이며 훈련이다. 가정예배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세대를 초월하여 하나 되는 현장이다.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와 손자 손녀들 세대가 어우러져 하나님께 경배하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시간이다. 가정예배는 은총의 보고이다. 가정예배의 보존과 발전은 믿음의 세대계승과 직결된다.   넷째, 가정예배는 신앙의 생활화를 촉발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만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으로 반드시 연결된다. 가정예배야말로 주일 그리스도인을 일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분주하다는 핑계로 인해 잃어버린 가정예배를 재발견하여 지금도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발견되기를 소원한다.  /목사·새로남교회 담임· 미래목회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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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4-22
  • 기독인과 나라 디자인
      기독인들은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국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종교개혁운동으로 거슬러 가는 것 같다. 이 민주주의는 그리스에 출발점을 둔다는 일반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것 같다. 이런 점을 지적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통찰력은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 맨 끝부분에 국가론을 언급한 이후 모든 개혁교회 신앙고백서 끝부분에는 국가관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교회 성도들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나라를 디자인했다는 말이다. 이들은 단순히 교회가 국가 정치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까 하는 것을 고민했다는 말이다. 칼빈은 귀족정치를 선호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대의정치 제도를 만들게 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인간의 삶을 풍성케 하며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을 얻게 하는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며 살 수 있는 나라를 추구하면서 이런 정치제도를 얻게 된 것이다. 유럽의 입헌군주제도나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막연하게 동성애를 반대할 것이 아니라 이런 제도가 허락되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교회는 좋은 나라 영육 간에 아울러 참으로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좋은 정치가들을 길러야 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기타 모든 삶의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인재들을 양성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의 주역인 교회의 담임목사는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제 모든 기독인들은 정말로 좋은 나라를 디자인하는 마음으로 나랏일을 걱정하였으면 한다. /목사. 콜부루게신학 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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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4-22
  • 창의적인 사회를 만들자
      자유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자유가 충만한 사회일수록 창의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말해서 절대적인 자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어디를 가든 주어져 있지 않다.   헌법 조항에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든가,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라든가, 또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규정해 놓았지만 한 개인이나 사회로 볼 때, 어떤 유형·무형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고 또 심리적으로도 자유가 행사되지 않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인간의 자유는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보통 말하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라든가 신앙의 자유, 또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는 궁극적인 자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척도로 재어지는 자유일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이런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무슨 주의든 간에, 그 주의가 비록 자유주의라 할지라도 극단적으로 강화·시행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비관용적인 것, 비타협적인 것, 심하면 잔인성과 포악성까지도 드러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정치 체제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국민은 크나큰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조금만 거슬리는 소리를 해도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작가나 예술가가 소리 없이 소멸되고 만다.   이에 비해 자유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발표되는 학술논문이나 문학작품이나 영화, 예술작품들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가를 상상해 본다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큰 것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가장 강한 밑천이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어떤 위치에 있든지 먼저 자기 자신부터 똑똑히 바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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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4-15
  • 교회의 부활
      오늘날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는 바이러스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세계 경제뿐 아니라 한국 교회도 큰 타격을 입혔다.   함께 모여 즐겁게 드리는 예배는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낌 속에 진행되고 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 운영은 바이러스가 확산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에 대부분 중단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서로 사랑의 교제를 위해 만나던 일도 마음에 불편한 일이 되었다. 중소교회는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함께 운영해야 하는 것은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와 예배의 정의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정해진 장소에 모이는 곳에서 잠시 흩어지거나 적게 모여야 하는 곳이 되었다. 왜 이렇게 교회가 살얼음판을 조심스레 걸어야 하는가? 국가에서 제정한 방역 규정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효율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다. 교회가 모든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주범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언론의 공격을 받고 불신자에게 덕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결국에는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교회는 어느 때보다 조용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 조용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시기를 넘어 도약으로 나아가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부활이다. 코로나로 인한 위기에 직면하여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의 새로운 동력은 예배와 프로그램 운영의 디지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서로 교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은 온라인을 활용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온라인 교회의 확장이 요구된다. 더 이상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이라야 한다는 장소적인 문제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교회 예배와 프로그램 운영의 디지털화 및 온라인화를 통해 한국교회가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는 제2의 탄생을 하였으면 한다. /한영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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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1-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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