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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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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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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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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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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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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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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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그리스도인의 표지
    인간은 포유류에 속하는 고등동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피조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개개인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육체도 중요시하지만 질그릇 같은 육체보다는 정신과 영원한 생명이 담긴 속사람을 더 중하게 여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뿌리와 구심점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가야 한다. 신앙의 구심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중심이라야 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야하는 성경 중심이며, 신앙공동체에서 예배와 선교와 교육과 섬김과 나눔이 지속적으로 이뤄져가는 교회중심이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 생애에 나타난 표지는 믿음의 사람으로, 이삭은 희생의 사람으로, 야곱은 통치의 사람, 그리고 요셉은 꿈과 성결의 사람으로 살았다. 우리자신의 그리스도인이 된 표지는 무엇인가? 유대에 주샤라는 랍비가 노년에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나에게 왜 모세처럼 살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다만 너는 왜 주샤처럼 살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지구상에 70억의 인구가 살아도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도 각각 다르다. 우리는 내가 받은 은사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신앙이란 집에는 다섯 개의 불기둥이 세상을 밝히고 있다. 창조신앙, 고난(십자가)신앙, 부활신앙, 임마누엘 신앙, 재림신앙이다. 이 기둥으로 지어진 집에 들어가 기도하면 성령임재의 불과 구름으로 가득 채워지고, 그곳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면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 영광중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표지의 공통분모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임을 감사하며 삶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밝게 드러내자.  /예장 합동선목총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10
  • 기독교와 사랑
      기독교에는 심오한 신학적 깊이가 있어 세계적인 석학이라도 감히 자긍하지 못할 지식의 심연이 만고의 비밀을 품은 채, 지심까지 잇닿은 호수처럼 고여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신학에 조예를 갖지 못한 평신도로서는 신학보다도 생활에서 이해되는 사랑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요한은 말했으며,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제일이란 것을 노래했다.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통달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내가 내 소유를 다 털어 희사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 이제 우리 평신도의 입장에서 요청하고 싶은 것은 부디 그리스도의 본 모습인 사랑의 생활로 돌아가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끼리, 교인끼리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 당시에 교회에 충실한 신자였다고 볼 수 있는 바리새인들보다도 죄인들이라 할 수 있는 창기, 거지, 문둥병자 등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음식을 같이하며 친구가 되며, 그들에게 그의 숭고한 사랑을 나눴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교회 밖에 있는 ‘어린양’들에게 더 많이 쏠려야 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생활 강령이라면 그것은 무척 간단한 종교라 하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뜻을 따라 우리도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계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이웃이 누군가’라고 제자가 반문했을 때, 예수는 ‘원수라도 네가 그를 사랑하면 그가 네 이웃이 될 거다’라고 대답했다. 사랑만 한다면 이웃은 얼마든지 만들어진다는 얘기이다. 내 이웃이 누군가하고 망설일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야 하겠다고 용감하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사랑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넓이는 그야말로 내 인격의 넓이여서 아무것으로도 박탈할 수 없는 내 영광이 된다.  /본지 전 발행인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05
  • 코비드19 시대의 좋은 설교자
    코비드19가 세상을 바꾸었다. 마스크로 상징되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접촉불가의 세계의 횡포는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전염병에 대한 백신이 개발되어 엔데믹 자체가 사라지기를,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이 대면예배로의 회귀를 염원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팬데믹 상황 하에서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설교를 경험했고 나름대로 그런 방식의 효용성을 인식했다. 이런 사회변화를 간과하고 전통적인 방법에 안주할 경우 설교는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전통 예배는 휘청거리는 대신 설교 중심성은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개인주의와 아파트 문화 등으로 인해 직접 전도나 심방의 기회가 줄어들면서 설교는 전도의 기능까지 수행해야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처럼 변화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설교자 자신의 경쟁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필자가 코비드 19시대와 관련해 목사와 전도사 120명에게 ‘코비드 시대에 설교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은 결과 1위가 철저한 영성(66%), 2위가 말씀묵상(23%)으로 타났는데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설교의 내용 역시 변화된 세계에 걸맞게 바꿔야 한다. 설교가 온라인을 타면서 공간의 한계를 넘을 뿐 아니라 홀로의 섬에 갇힌 사람들의 외로운 영혼이 방문하는 기회를 맞고 있다. 만일 설교가 교회를 넘어 세상을 향한다면 그 설교는 기존의 신앙이라는 전제와 신앙안의 이야기라는 울타리를 넘어가야 한다.    나아가 변화된 상황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설교의 형식과 전달에도 변화를 기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설교인 연역적 대지설교는 종교적 심성이 예민해지는 새벽예배나 장례예배시의 설교에 강점을 가진다. 하지만 자의식이 강하고 개인에 대한 존엄성과 권리의식이 강한 현대인의 특징을 고려하면, 시대의 흐름에 상응하는 설교의 혁신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한 원 포인트 설교, 귀납적 설교, 이야기식 설교 그리고 다양한 장르와 설교를 결합한 특수설교 등 설교전달의 지평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서울신대 설교대학원 원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1-27
  • “한국교회 영성회복 위해 기도한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측 전 총회장 최낙중 목사
      “은퇴한 이후에 더 바쁘게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 은퇴를 영어로 ‘리타이어’라고 하는데, 타이어를 바꾸고 더 많이 달리고 있는 셈이다”고 최낙중목사는 말했다.   최목사는 “나는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 ‘용림’이라는 마을의 불신가정에서 태어났다. 술중독자인 아버지는 자살을 하려고 기찻길에 들어가 대낮에 기차를 세울 정도로 우리 가정 사정은 강 건너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였지만, 친척들이 모두 모인 제삿날 하나님의 역사로 우상을 버리고 아버지는 예수를 영접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며, “정화수를 떠 놓고 삼신님께 빌고 무당을 불러 굿하고 점보기를 즐기며 우상을 숭배하던 어머니는 나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한 후에는 제일먼저 교회에 나가 새벽종을 치며 부족한 중에도 정성을 다해 목사님을 섬기는 권사님이 되셨다”고 말했다.   또 “군에 입대해 갑자기 찾아온 결핵,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불면증 등의 합병증 병마로 믿음을 잃고 절망 속에 빠지고 자살을 결심하지만, 군목 목사님께서 설교를 통해 “자살하면 지옥 간다.”라는 말씀을 듣고 자살은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의사의 수술을 앞두고 전 날 밤 졸도해 다음 날 의식이 돌아왔으나 결국 수술도 포기한 그의 목숨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보혈의 거룩한 피로 깨끗케 하셨고 새롭게 얻은 새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이어 “1972년 관악구 봉천동 버려진 천막교회에서 시작해 화재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도로 나갔다. 임시기도처로 시작된 해오름교회는 오늘에 이르러 4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매주 목요일마다 마커스 찬양집회를 통해 전국에서 찾아온 청소년, 젊은이들과 청장년들의 영혼구원과 미래를 위한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며, “사단법인 한국청소년바로세우기운동협회와 한기총 청소년지도자대학을 설립하여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청년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는데 헌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목사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언제나 행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순간마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삶의 현장이 전개된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자”며,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것만 추구하지 말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아무리 큰 고난이 도래한다 하여도 주님께서는 큰 은혜로 변화 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나가자”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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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1-26
  • 코로나 시대 이웃 돌봄위해 머리를 맞대자
      필자는 6.25 전쟁이 끝난 그 이듬해에 태어났다. 그래서 6.25 전쟁의 비극을 직접 체험으로는 모른다. 단지 전해 들은 이야기, 그리고 전해오는 끔찍한 사진들을 통해서 알 뿐이다. 6.25 전쟁 말고 내가 경험한 가장 큰 공포와 아픔은 코로나 19일 것이다. 코로나19로 악투를 버린 2020년 그리고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2021년은 내 생애에 가장 아프고 힘든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코로나19 시대가 아닌 코로나 이후 시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특별히 이 코로나19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비대면 문화로의 전환을 강제하고 있다.   이 비대면 문화는 교육의 대변혁을 일으켰다. 이전 교육은 오프라인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온라인 교육을 강제하였다.  이 비대면 문화를 교회도 비껴갈 수 없었다. 신학적 논쟁은 가까운 미래에 정리해야 할 것이고, 비대면 예배, 온라인 예배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즉 물리적인 공간 속에서 만남과 따뜻한 속마음의 접촉이 어렵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 한 자락이 울림으로 가슴에 남는다.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참 제자임을 알리라” 예수님의 사랑 실천 명령은 문화의 변천사와는 상관없이 초문화적 진리였고 진리이고 진리일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지혜 속에서 이웃 돌봄의 실천적 지혜를 배우겠다면, two by two 정신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둘씩 둘씩, 때로는 two by two가 입에 붙는다. 예수님께선 제자를 파송할 때 둘씩 둘씩 묶어서 보내셨다. 코로나 19가 극성인 가운데,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순간에 5인 이상은 모이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둘씩 둘씩 만나면 되겠네. 다른 말로 일대일로 돌보자.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단짝 돌봄을 만드는 일이 두려운 위협 속에서 교회가 돌봄을, 그리고 사랑 실천을 지속할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돌봄을 위해 단짝 돌봄으로 머리를 맞대어 보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생명을 더하실 것이다.  /루터회 전 총회장, 작은예수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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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1-26
  • “사랑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사명”
      내가 섬기고 있는 도봉교회의 모토는 좥누리는 복, 나누는 기쁨좦이다. 교회의 정신을 기억하며 교인들과 이웃을 섬기는 나눔 사역을 통해 깨달은 것이 “축복이란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요셉의 신앙, 나눔의 열매를 누구나 따먹는 것, 그것이 도봉교회의 정신이자 교회가 추구하는 선교의 방향성이다.   도봉교회는 가을에 바자회를 열어 지역의 이웃들에게 생필품을 전달하고, 성탄절에는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어려운 이웃들을 초청해 함께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초청예배를 통해 이웃들이 영육간 위로와 은혜를 받길 마음으로 목회자와 교인들이 온 정성을 다해 예배에 참석한 이웃들을 섬긴다.    이밖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웃들을 섬기다 보니 주변에서 어렵게 목회를 하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그래서 11년 전부터 도봉교회는 ‘어깨동무 부흥성회’를 시작했고, 무엇보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동료 목회자 가정을 섬기기 시작했다. 부흥회에 초청된 강사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말씀을 전했고, 마음이 동한 교인들은 진심으로 헌물을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전액은 작은 교회를 위해 사용됐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40~50대 목회자 부부는 대부분 심신이 지쳐있다. 자신의 인생을 걸어 헌신했지만 여전히 목회환경이 녹록치만은 않다. 이분들을 대상으로 ‘목회자 부부 세미나’를 열어 섬기다 보니 어느새 감신대 79학번 동기회도 나눔사역에 동참하고 나섰다.   도봉교회를 통해 이웃을 섬기던 이 작은 종을 이제는 감리교 연회의 감독으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와 책임을 느낀다. 늘 감독으로서 지역의 이웃과 어려운 환경의 목회자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이웃에 전해야만 한다. 받은 자로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나누는 기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하다. 모쪼록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이 비할 바 없는 나눔의 기쁨을 누리는 2021년이 되시길 기도한다.  /기감 서울연회 감독·도봉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1-14
  • ‘사랑의 사회’를 만들자
    희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기독교신문>을 아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의 가정과 한국교회, 이 사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희망의 은혜가 가득 하시길 기원합니다. 특히 ‘코로나19’사태가 빨리 종식되어 선교활동에도 지장이 없도록 기원합니다.저희 신문은 지난 56년간 ‘사랑의 실천’을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 곳곳에 전하기 위해 문서선교의 사명을 감당해 왔습니다.지난 해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도 모이는 공동체가 함께하지 못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이에따라 경제불황으로 고통을 겪는 이웃들이 늘고 있습니다. 〈기독교신문〉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왔습니다.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한국교회가 우리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암울한 문제나 교회의 어려움속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것은, 오직 ‘사랑의 실천’으로만 가능합니다.지난 56년간 외쳐 왔던 이 정신은 <기독교신문> 창간 당시부터 이어온 창립자 고 김연준선생님의 신념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가 계층과 세대간, 지역 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곁을 지나고 있는 어려움들은 극복될 것이고, 세계평화와 교회의 일치, 나눔과 섬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걸음은 더욱 가속화할 것입니다. 〈기독교신문〉은 앞으로도 우리 시대를 선도하고 ‘사랑의 시대’를 여는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실천하는 이 사랑이 사회와 인류를 위한 등불의 역할을 감당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신축년 새해에 힘차게 전진하고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본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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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12-29
  • 성탄절메세지
    민찬기목사 /예수인교회 담임·교회갱신협의회 공동대표·전 기독신문 이사장   세속적 문화 혹은 종교적 습관의 영향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의 본질'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입으로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지만, 정작 '메리 크리스마스'의 의미조차 모른 채, 그저 세속적 문화와 분위기에 휩싸이는 형국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성탄의 본질’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가장 집중적인 보도는 마태복음 12장 그리고 누가복음 1-2장에서 발견된다. 마태는 왜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기록했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마태를 비롯한 제자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애도할지언정,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며, 복음을 전하고, 기록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마태를 비롯한 제자들이 그의 탄생에 대해 연급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한 제자들은 그 분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에 대해 묵상하게 됐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가르침, 성령님의 인도하심,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의 구약성경 해석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자신들의 죄, 이스라엘의 죄, 그리고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임을 확신케 되었다. 또한 주님이 가르치고, 행하신 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를 지신 대속자이시며,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자이시고, 제자들과 교회에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신케 되었다. 마태가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해 서두에 기록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는 왜 예수님 이야기를 ‘족보 이야기’로 시작하는가? 신학자들이 지적하듯, 이 족보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왕적인 메시아의 계보’임은 틀림없지만, 그 가운데에는 밝히고 싶지 않은 역사 역시 포함되어 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로부터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언급(마1:3)과 ‘다윗왕이 우리야의 아내로부터 솔로몬을 낳았다’는 언급(마1:6)과 ‘바벨론 포로생활’에 대한 언급(마1:11.12.17)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가문의 치명적 과거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굴곡지고, 상처 많고, 죄악된 역사의 한복판으로 성육신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계보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든 약속과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더불어 그의 백성들의 부족함, 연약함. 치명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신실히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보여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실존 한 가운데로 들어오셨다. 그렇기 때문에 굴곡지고, 상처 많고, 죄악된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아뢸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전 존재를 가감 없이 받아주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생명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세속적 문화 혹은 종교적 습관의 영향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성탄의 본질’은,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기 위하여 나셨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연약하고 부족한인간의 실존 한 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속주 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종국 평강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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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5
  • 사랑과 평화 연주하는 성탄절 준비하자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19의 전염으로 불안하여 성탄절을 맞는 우리의 자세 역시 기쁘기보다 어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지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한 게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베들레헴 말 구유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도 차분하게 성탄절을 준비하고 맞이함이 꼭 필요할 것 같다.   우리 주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뜻있게 맞이하려면 소외받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섬김이다. 특히 금년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경제가 크게 위축되어 있고 사람들도 움츠려 있다. 이런 때일수록 음지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우리 주변의 이웃을 찾아보고 돌보는 섬김이 성탄의 뜻 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교회들도 역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집회도 마음대로 갖지 못하고 헌금이 원활하게 들어오지 못함으로 매우 힘들 때이지만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의 정신을 본받아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어느 해보다 금년의 섬김이 더 보람된 일이라 생각된다.   성탄절은 어둠의 음지에 갇혀있는 곳을 빛으로 비추이는 나눔의 섬김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천사들의 찬양처럼 “지극히 높은 곳에선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한 말씀이다. 성탄은 모든 이에게 평화의 소식이 되도록 해야 한다. 평화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만든다. 마더 테레사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그의 섬김 사역이 온 세상에 소개되었다. 그는 평화를 실천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98년 장례식 후 인도 콜카타는 많이 변해졌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세계의 수십명의 정상들이 다녀갔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랑의 한 사람이 준 영향은 대단하였다.   성탄의 큰 의미는 사랑으로 이땅에 오시는 우리 주님의 섬김으로 그의 십자가 희생이 우리를 어둠의 죄악에서 밝은 빛의 세상으로 해방시켜주신 구원의 날이 곧 성탄절인 것이다.  /예장 통합측 전 총회장, 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12-09
  •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자
      올해는 종교개혁 기념 503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종교개혁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루터는 처음부터 교회의 제도를 개혁하고 교리를 개혁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신앙의 고민에서 출발했다.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 이 고민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각에선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시대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새로운 기준이나 표준이 생겼다는 뜻이다. 인류는 이 변화에 대한 대응책을 찾고 있다. 교회도 이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과 혼란을 겪고 있다. 오랫동안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비대면 예배를 드렸다.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가 무엇인가? 예배가 무엇인가? 신앙이 무엇인가?”   루터교에서는 교회를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찬이 바르게 집행되는 교인들의 회중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루터교 예배는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두 기둥으로 이루어진다. 코로나로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고 성례전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배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근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배의 근본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1~2절).   종교개혁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 각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특별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공동체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을 때 탐욕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종교개혁이 아닐까?  /루터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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