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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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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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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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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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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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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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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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올해는 참 어수선하기도 하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다. 아직도 그 시간들이 계속되고 있고, 언제 끝날지 몰라 불안하기만 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교회를 비롯하여 삶 전체가 위기인 상황에서 맞이하는 2020년 추수감사절.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1. ‘감사’는 기적을 만든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았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알 것이다. 성경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있는데, ‘빈들’, ‘날이 저물어’, ‘부족함’ 등이다. 열악한 상황, 희망이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후반부에는 ‘나눔’, ‘배부름’, ‘먹고 남은’,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라는 표현들이 나온다. 열악하고 희망이 없는 상황이 풍성하고 모든 것이 넘치는 자리가 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이 사건의 중심에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라는 기록이 있다. ‘축사’(유카리스테오)는 감사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감사를 돌린 후에 ‘부족’이 ‘풍요’로, ‘빈들’이 ‘가득함’으로 변하였다. 감사는 기적을 만든다.   2.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추수감사절은 1620년 11월 9일, 메이플라워호를 탄 101명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 신대륙 미국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그들이 경험한 것은 질병과 추위로 인한 죽음이었다. 그 다음 해에 옥수수와 보리, 밀을 심기 시작해 추수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이 때가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고,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날마다 두어 명이 죽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들이었다. 추수감사절은 모든 것이 풍성한 외적인 요인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험한 세상을 살았지만 믿음으로 살았던 이들로 인해 추수감사절은 시작되었다. 올해는 특별히 더 어려운 시기에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능하게 하시고 견디게 하시고 감사하는 삶을 누리는 계절이 되시길 기도드린다. /기감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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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11-12
  • 상식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자
      현실을 떠나서는 아무도 살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현실을 바로 파악하면서 살려고 하지만 한계를 느끼기 마련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현실이 부단히 그 변수를 지니고 변화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정치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랫동안 정치는 국민 위에 군림했다. 정치인들의 무한한 권력을 약화하고 국민의 의사를 강화해 정치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작심이 성취된다면 우리 사회는 전진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아무도 독재를 못 한다.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가 사회를 휘두르고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권력의 횡포는 과거의 유물로 치부해야 한다. 힘이 아니라 국민에 의한 정치가 성숙해야 할 것이며, 소수의 견해가 존중되는 정치가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의 민주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에서 특혜는 소멸해야 한다. 소득의 공정한 분배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야 하지 인위적으로 조정한다면 부작용을 야기할 것이다.   언제나 전환기의 문턱은 모두에게 불확실성에서 야기되는 불안을 심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점일수록 냉철한 판단을 요구된다. 우리는 불안을 극소화하려는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사회가 어수선하기가 이를 데 없다. 무수한 공약들이 쏟아지고 선거의 오열로 들끓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결정권을 똑똑하게 행사한다면 정치는 국민을 무서워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대두될 것이다. 이에 맞추어 경제는 자연스럽게 올바른 자본주의 질서를 확립하고 건전한 정치를 의식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민주화를 지향하는 길목에서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의 폭넓은 요구를 묵살한다면 반대 여파 역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전환기일수록 눈과 귀를 열고 민주화의 길로 줄달음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전환기는 우리가 현명하게 현실을 안정의 길로 유도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것이 민주화의 정착을 보장하는 방책이기도 하다. 민주화란 국민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므로 민주화의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확고히 해야 한다./본지 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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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10-27
  • 가정의 소중함을 간직하자
      우리들의 가정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단순한 갈등이나 긴장이 아니라 파괴의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할 부부는 서로를 미워하고, 미움의 도가 지나쳐 서로의 삶 자체를 파괴하는 행동까지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부모들은 자녀들에 의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치부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현실 앞에 행복’ 이란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의 상황이다. 심지어 부모들이 자녀에 의해서 살해되고 있다.   그러나 위기의 가정은 치유되어야 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사명이라 할 것이다. 가정 회복, 그것은 부부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 부부야말로 가정의 첫 시작이며, 이들 관계가 회복될 때 가정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두 쌍 중에 한 쌍이 이혼한다는 통계는 부부 관계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으로 오늘 현대가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들어 법원은 이혼하는 부부에게 한 달 정도의 심사숙고할 기간을 부여하고 그 기간 동안 부부간의 관계성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면한다고 한다. 관계성 회복 프로그램은 기독교 단체에서 대부분 진행하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처음 사랑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사람이 만나 가장 행복했던 때, 그때를 회복한다면 모든 갈등과 상처는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슴 속에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 그 때만큼 순수하고 정열적이며 모든 것을 포용하던 시절이 없을 것이다. 그 시절이 회복된다면 우리의 가정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서 첫 사랑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품었던 그 사랑, 그때를 기억한다면 우리 신앙은 더 순수해지게 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첫 사랑을 회복하자고 외치는 것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딤전 5:8)”라고 말한다. 을 맞아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게 가꿀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가정을 회복하는 사명을 감당하기에 최선을 다하자. /성남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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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10-21
  • 예배를 갈망하는 성도의 눈물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진 된지 수개월 만에 전 세계를 점령군처럼 지배를 했고, 계속해서 바이러스 확산세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면서 선진국이나 후진국들이 모두 무차별 공략을 당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방역당국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 규제조치를 선포함에 따라, 교회역시 대형교회나 소형교회가 대부분 문을 닫고 온라인 예배로 대치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한편 교회 출석예배를 갈망하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심히 갈급한 상태여서 성전예배의 길이 열리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우리교회는 대면예배를 못 드릴 경우에는 온라인 예배를 하지 않고 주보와 설교문 등 예배자료를 각 가정에 우편으로 발송을 해서 각자가 주일과 주중에 대면예배를 드리도록 조치하고 있다.   지난주일 교회 중직자 몇 사람만이 교회에 모여서 오전예배를 드린 후, 오후에 성도들의 가정에 전화로 심방을 했다. 그중에 92세 된 권사님이 전화를 받더니 ‘목사님,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6.25전란 때를 제외하고는 주일 예배를 교회에서 한 번도 못 드린 적이 없었는데 이게 웬 일이지요’라고 하면서 통곡을 하는데 나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최근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수많은 교인들이 물질문명과 세상쾌락에 유혹을 받고 마치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교회를 떠나고 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귀한 믿음을 마귀에게 송두리 채 도난당하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교회들은 영적싸움도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도 이런 질병이 사라지지 않고 팬데믹(pandemic)시대가 지속된다면 교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믿는 자의 수난기인 우리 시대의 특징은 가치관의 혼돈이다. 믿음의 가치를 상실한 이때에 교회는 신앙의 절대적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한다. 예배 없는 성도의 삶은 죽은 신앙이며 예배를 통해서만 신앙을 유지 또는 성숙시킬 수 있고 피조물인 인간이 예배를 통해서만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성이 회복될 수 있다. /예장 합동선목 전 총회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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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9-25
  •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란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경에서 처음 예배드린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번제(제물)로 드림으로 시작됐다. 이러한 예배는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서 명 설교나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닌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현대 종교인들의 예배는 신전에 가서 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들의 모임이 곧 성전이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모인 숫자에 관계없이 드리는 예배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온라인 예배는 어떨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을 살리는 영으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해서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는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가셔서 말씀 하셨다. 생명의 말씀 선포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가 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온라인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났을까? 온라인에 사람의 영이 존재할까? 온라인으로 하나님의 영이 흘러나올 수도 없고, 학문과 종교, 철학 등으로 혼에 감동이 있더라도 그것은 영 안으로 들어 올 수 없고, 영의 생명없는 고자사역이다. 말씀은 거듭난 영을 통해 상대방 영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기존 종교적 설교는 특정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다 제사장으로 그들 스스로가 매일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통해 은혜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나눈다. 그리스도로 인한  승리한 삶을 간증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말씀선포였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거듭난 생명을 영이 없는 기계를 통해 말씀하실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기계로서 영에 생명을 줄 수 없고 영을 분배할 수 없는 사탄의 사악한 발상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대로 드리려야만 하고, 사람이 만든 도구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면 죽는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다 그 불로 죽었음을 기억하자. 온라인 예배는 사람들의 편리함과 이익을 위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사)성경원형회복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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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9-16
  • 예배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예배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만남이다. 그 만남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신앙고백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받고, 기도로 우리의 연약을 아뢰고, 주의 종의 복음적 말씀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생명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하고, 각자의 일터에서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몇 가지 말해보자. 첫째,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 더불어(With God’의 예배여야 한다. 즉,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응답하기도 한다. 둘째,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으로 부터(of God)’의 예배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지 않으셨다면,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인간 자신의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셋째,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Unto God)’이다. 오늘 많은 한국교회 예배들이 매우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수행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헌금을 많이 나오도록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예배하고 있다면 잘못된 예배인 것이다. 예배의 목적이 자신의 위안과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화려한 쑈나 재미있는 개그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 청중을 울고, 웃기는 일에 만족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온라인 예배는 처음부터 예배가 아니었고, 그냥 예배장면을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예배는 보는 것도 아니요, 구경하는 것도 아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온전한 헌신으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당국에서 ‘비대면 예배’를 강요했을 때, 아무 말도 못하고, 고운 새색시처럼 순종만 하고 있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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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9-11
  • 수해민 아픔 보듬는 교회 되자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또 온 나라에 폭우와 홍수의 아픔이 찾아왔다. 이제는 사라진 단어인 줄 알았던 홍수피해, 수재민, 하천범람, 침수, 제방 붕괴라는 단어를 또다시 접하게 되었다. 바다로 변한 도시, 떠내려가는 자동차, 지붕 위에 올라가 어찌할 줄 모르는 소들,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길 등등. 바라보는 마음이 애절하다 못해 아리다. 침수 후 찾아온 폭염 속에서 무너진 집과 사라진 농경지를 바라보며 절망밖에 남은 것이 없다며 눈물 흘리는 수재민들, 무너진 벽과 쓰러진 종탑을 어루만지며 한숨 짓는 피해 교회의 목사님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먼저 홍수 피해를 입고 망연자실하실 전국의 수재민과 교회에게 삼가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마저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드리고 싶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해야할 일이 있다. 자연은 우리를 아프게 했지만 그 아픔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 치유해야 하는 일이 오늘 우리 믿음의 성도들과 교회들의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한 두가지 있다. 첫째는 이번 홍수피해로 인해 아픔을 당한 모든 수재민들과 한국교계 나아가서 우리 한국사회가 이 재난을 이겨내리라는 의지를 가지는 일이다. 희망을 가지는 일이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홍수 속에도 하나님은 한가지 희망을 남겨놓으셨다. 바로 무지개이다.   무지개는 희망이다. 무지개는 회복이다. 무지개는 홍수피해를 이겨내리라는 의지와 약속의 징표이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이 회복과 치유의 무지개를 품어야 한다. 이번 홍수피해도 극복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자. 나아가서 피해를 입고 한숨짓는 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자연재해가 터질 때 마다 우리 사회가 잘하는 것이 있다. 그 피해가 천재냐 인재냐를 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인재라면 그것이 누구 책임이냐를 추궁하는 것이다. 그런 것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다. 평소에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를 게을리하여 피해를 증폭시키고 국민에게 더 큰 아픔을 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시점에서는 망우보뢰이다. 물론 소를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지금은 외양간을 고치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그것은 소를 찾는 일이며 소를 잃은 사람의 아픔을 보듬고 온 교회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이다.   그런가하면 우리 교인들과 교계가 해야 할 일은 수해 재난민과 교회 지원을 위해 힘을 모으는 일이다. 관심을 모으는 일이다. 이런 대형 재난이 생길 때마다 여러교회에서 현장으로 달려가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정말로 감사하고 격려할 일이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이고 뭉쳐 이번 물 재난을 당한 분들이나 교회에게 큰 힘이 되어주기를 소망해 본다. 몸으로 물질로 돕는 것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관심과 배려이다.   물론 모든 수해 피해를 우리 교인이나 교계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큰 것은 나라나 지방자치 단체가 하더라도 작은 것은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다.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다. 수재민 돕기 의연금 모금은 물로 능력과 관심을 가진 교회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 수재민, 혹은 교회들과 일대일로 결연을 맺고 그들이 다시 건강하게 삶의 터전위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안은 찾아보는 것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번 홍수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우리 교계가 따뜻한 사랑의 관심과 배려를 보냈으면 한다.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낸 우리 민족이다. 관심과 배려로 수재민이나 큰 피해를 입은 교회의 눈물을 닦아주자. 그리고 아무리 큰 홍수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무지개가 떠 오름을 잊지 말자. /새길교회 목사, 루터회 전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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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8-21
  • 민족의 통일과 사명
      기독교는 해방의 종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애굽의 4백 년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고, 이후 유다 왕 여호야김 11년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으나 70년 만에 고레스에 의해 2차로 해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과 블레셋, 앗수르, 바사, 헬라, 로마 등 강대국의 압제하에서 고통받을 때마다 특별한 섭리로 해방을 시켜주셨다.   우리는 북에는 이스라엘, 남에는 유다로 갈라진 나라를 남쪽 유다를 통하여 북쪽 이스라엘을 흡수 통일시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남북통일도 대한민국을 통해 북한을 해방시키고 통일시키실 것을 먼저 믿어야 한다.    일제강점 시절 우리 국민은 해방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와 무수한 폭격, 두 번의 핵 투하로 인해 패망을 맞이한 일본이 미국을 필두로 하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에 서명하면서 그들의 모진 매질을 맞고 숱한 착취에 시달리며 처절하게 억압받고 있던 우리가 민족의 해방을 맞이하게 된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는가.   한반도의 통일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시기에 갑자기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통일을 함께 기도하며 준비할 때 그날이 속히 올 줄로 믿는다. 그러나 통일은 평화의 통일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력으로 남북 간 소중한 생명이 사라지는 비극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이는 비단 동족 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비극을 막는 것일 뿐만 아니라 평화를 희구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인류애를 나누는 공동체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사밧 왕은 나라가 전쟁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무력으로라도 통일을 얻고자 하는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지 않도록 여호사밧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   남북 간 평화의 순풍이 멈추고 있는 지금 동·서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교회끼리 자매결연을 통해 서로의 교회가 교우의 집을 왕래하면서부터 자유를 맛보고 통일의 길을 열었던 독일을 본받아야 한다. 서독의 교회는 정치성을 배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으로 오늘의 통일 독일을 이루는데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남북의 교회가 교류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통일의 길을 여는 데 앞장서야 한다. 독일의 통일처럼 피 흘림 없는 통일을 한국교회가 열어나갈 때 통일의 날은 속히 다가올 것이다. /예장(합동한신) 전 총회장·목포중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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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8-12
  • 예배 회복에 힘써야 한다
      코로나 사태이후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하나같이 우려하는 외침이 예배회복이라는 구호이다. 코로나가 단기간에 끝났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장기화되면서 많은 피해와 부작용과 우려를 낳게 되었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오래갈지도 모르는게 현실이다. 이러는 사이 한국교회의 예배가 무너진게 사실이다.     회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금의 수준과 과정이 정상수준이 아니라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니까 기준에 못 미친다든지 정상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예배학적으로 여러 가지 이론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예배는 회집예배를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 반하여 회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예배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배는 단순히 찬양 몇 곡 부르고 설교를 들었다고 예배의 기능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회중예배를 구약 성경에서는 물론이고 신약교회의 태동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적 교회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초대교회는 일단 모이는 교회였음은 분명하다. 물론 장소의 개념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 예배의 모임도 있었지만 이런 소그룹들이 다 함께 모이는 대 그룹의 예배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배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종합예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예배가 무너진 이유가 무엇일까? 코로나로 인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이미 한국교회 예배는 서서히 무너져 왔다고 본다. 미디어의 발달로 교회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원하는 영적 기호에 따라 접할 수 있는 설교의 홍수시대가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내 몰았다고 본다. 가뜩이나 이런 추세로 기울어지던 판에 코로나 사태로 회집이 제약을 받게 되고 교회마다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면서 회집예배는 멀어지고 개별예배가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이제는 온라인 예배가 더 자유스럽고 편리하다는 편의주의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시간이 장기화되면서 이제는 개별예배의 익숙함에 빠져버렸다. 물론 미디어 시대에 무조건 미디어를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디어 예배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성도들이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 교인들과 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편임을 강조하여 성도들이 대면예배의 정당성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어차피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 될거라고 본다면 철저한 예방수칙과 함께 대면예배 그러니까 교회에 회집하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교인들의 생각의 전환이 없이는 예배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다. 회중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회중예배가 훨씬 은혜롭다는 사실도 확인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온라인 예배와 차별화된 분위기 조성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면 강력한 기도운동을 통해 성도들의 심령을 채우고 새롭게 하는 일 등. 어느 목사님은 온라인 중계를 모두 중단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태가 많이 안정이 되었음에도 교회 출석을 외면하는 교인들 때문이란다. 그런데 그것 마저 끊으면 다른 교회 채널로 옮겨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전체가 온라인 중계를 끊지 않는 한. 예배회복 이는 한국교회 전체에게 던져진 숙제이다.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이 숙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하루 속히 예배가 회복되어 모든 교회가 정상화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뿐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대신측 총회장·수원명성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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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7-14
  • 나눔으로 행복 창조를
      세상은 불공평한 사회로 보인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있고 병든 자와 건강한 자가 있다. 많이 먹어 병든 자가 있고 먹지 못해 병든 자도 있다. 세상은 언뜻 보면 이렇게 불공평하게 보인다. 그래서 생각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냐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세상을 운영하시는 섭리일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자와 병든 자와 가난한 자와 우는 자들을 통해서 세상의 양심을 깨우치려 하신다. 즉 그 돌봄의 대상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양심이 마비되지 않고 깨우치고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TV 화면을 통해 보면서 안타까워 눈물짓고 그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그렇다면 그 사실만 해도 잠자고 있던 세상의 양심들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 세상은 그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통해서 건강성을 회복하고 도와주려는 애타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약자를 돕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은 행복을 창조한다. 동물은 번식기가 끝나면 동시에 생명도 끝난다. 그런데 사람은 번식기가 끝나도 훨씬 더 오래 산다. 그것은 낳아놓은 자손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유독 나누고 베풀고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 감사와 삶의 맛이 나누고 베풀고 사랑할 때 주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평안한 삶과 안정된 삶과 쌓아놓은 삶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가 나눔이다. 섬김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이웃이 있고 나눌 대상이 있고 사랑해야 하는 영혼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돌봄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모두 위축되어 있다. 모두 위기감에 싸여 있다. 지금이 우리 주변을 살피고 섬길 기회이다. 함께 나누고 섬기면 이 위기가 기회가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모두 너 때문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모두 함께 더불어 격려하며 나누며 살아갈 때이다./기성 전 총회장·신촌교회 원로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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