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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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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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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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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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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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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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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자
      텔레비전에서 유명 철학자가 하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헬라 철학자들로부터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이야기하는데, 한마디로 인생은 철학에서 해답을 얻어야 된다는 것이다.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1시간 죽 들으면서 마음속에 ‘아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철학으로서는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가장 중요한 답은 성경에 있으며, 성경에서 인생의 근원을 배워야 한다.   신학생 시절에 박윤선, 박형용목사 같은 분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분들을 통해 설교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회를 발견했다. 성경에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라’ 말씀했다. 한국교회의 훌륭한 스승에게 목회와 신학을 배운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솔로몬은 전도서 9장 11절에서 성공은 인간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인간의 능력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세상에 능력이 있으면서도 실패하는 자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 없는 모든 수고는 헛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전도서 12장 1 3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말씀한다. 이 말씀이 전도서의 대미이다.   전도서는 결코 인생의 허무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말할 때 헛되지 않은 길, 허무하지 않은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이다.   허무를 극복하는 길은 허무하지 않은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거는 것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생명수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셔야 한다. 그러면 모든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처럼 우리의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모든 사람의 본분’에 집중한다면 한국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다. 한국교회가 최근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한 것은 어느 순간 성경이 말하는 이 본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한국교회는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나의 욕망과 죄를 벗어던지고 순순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어둠이 깊었을 때 새벽이 온다. 절망과 좌절이 클 때 위로와 소망도 큰 것이다.   한국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받은 희망과 소망을 다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  /한기총 증경대표회장·왕성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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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2-12
  • 새해 새로워지는 방법
      17세기 영국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운 존 드라이든은 책벌레였다.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내마저 그 책에 질투를 느낄 정도가 되어 어느날 이렇게 푸념했다. 책 신세가 차라리 부러워요. 나도 책이나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드라이든이 웃으면서 말했다. 책보다 달력이 나을것이요. 왜요? 그럼 매년 새로워질 테니까.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말이다. 그날이 그날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것은 물론 내일도 오늘같이 변함없는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드라이든의 이 말은 매일 새로워질 것을 권유하고 있다.   요즘 각 기업체에서는 시간 활용 보고서라는 것을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하루도 모자라 매시간 매분을 철저히 관리하라는 요구일 것이다. 변화의 속도가 그만큼 빨라졌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하루하루 변하지 않는 사람은 도태된다는 위협도 이 안에 들어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변화의 요구는 새로운 압력이다.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다.   40대 남성들의 돌연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변화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래된 결과이다. 드라이든의 말처럼 하루하루는 아닐지라도 매년 변화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자기관리는 지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올해는 담배를 끊고 술을 덜마시는 등의 자기관리 지침을 세워야 비로소 거기에 합당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노력을 기울여도 잘 실천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것들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기준을 세운 후에 말이다.   이 지침이라는 것을 말씀 안에서 찾다보면 그 어느 기준보다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 올해는 두도 두고 기억에 남은 선한일 10가지를 실천하자고 결심했다고 치자 선한 일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의문부터 풀어야 실천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기준들을 세상에서 찾다보면 혼란만 가중된다. 매일 매일 새롭게 되는 방법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금과옥조로 삼을 교훈들이 가득하다. 옳고 그른 것이 명확하게 제시돼 있다. 그 어떤 철학도 말씀을 능가할 수는 없다.    든 신학자들이나 학자들이 종국에는 신을 찾지 않던가. 새해 매일을 새롭게 살기 위해 하루 한 말씀씩만 묵상하자. 거기에 샘솟는 말씀의 은혜가 담겨있다. 삶의 활력이 담겨있다.    /예장(합동한신) 증경총회장·목포중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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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1-20
  • 사랑의 시대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딛는 이들을 위해 무엇보다도 한양의 건학 정신인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에는 사랑의 실천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의 모든 곳은 사랑을 실천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바야흐로 사랑의 시대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거의 도외시되었던 말이다. 수천 년 전부터 수많은 성현들이 사랑과 자비를 가르쳤으나 인류는 이 가르침을 외면해 온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가르침에 역행이라도 하려는 듯이 약육강식의 처절한 역사를 빚어내고야 말았다. 더구나 인류는 사랑의 실천을 부정하는 공산주의까지 만들어냈다. 이 공산주의야말로 바로 약육강식의 역사가 빚어낸 부산물이다. 스스로가 빚어낸 이 공산주의 때문에 오늘날 인류가 도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인류가 생존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는 바로 공산주의를 극복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진실로 살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처방이 필요하다. 그러한 처방은 사랑의 실천 이외에는 하등의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사랑의 실천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될 사랑 부재의 시대인 것이다.   사랑의 시대는 약육강식의 유물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인류가 이러한 유물을 간직하는 한 우리는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이제 새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이 트이기 위해서는 약육강식으로 점철되어 온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새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이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이 시대에 부과된 절대의 소명이라 할 것이다. 사랑의 시대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파괴가 아니라 창조를, 분열이 아니라 화합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이 바로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진 곳이며, 그 정신을 구현하는 행동이 이 시대처럼 절실히 요구되는 때도 일찍이 없었다. 이를 위하여 우리 모두는 과거를 청산하고 반성 참회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로운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인간은 누구이겠는가? 바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이 시대는 지금 이러한 새로운 인간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증오하는 사람, 시기하는 사람, 속이 좁은 사람, 부정적인 사람을 거부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이러한 못난 사람을 선동하여 사랑의 새 길을 한사코 방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방해를 극복하고 사랑의 길을 이 땅에 넓히는 일만이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이 땅을 보존하고 사는 길이며, 나아가 자유와 행복과 번영을 이룩하는 길일 것이다.  /본지 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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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1-14
  • [신년 메시지]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자 - 새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무대의 장막이 열리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을 한 몸에 받는 새해가 밝은 태양과 함께 떠올랐다. 새해가 되면 모든 사람이 지나간 것을 뒤로 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새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불신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자년 쥐띠의 해이기 때문일까? 불신자는 운세를 보며 그 해에 일어날 행복과 불행을 가늠한다. 그로 인해 불안에 떨기도 하고 평안을 찾기도 한다. 그러한 자세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새해를 의미 있게 맞이 해야 한다. 그렇다면 새해에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숙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새해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첫째는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가도록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다. 일 년을 하나의 단위로 끊어서 연 수를 헤아리도록 새해를 만드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시간은 인간의 힘으로 멈추거나 변경할 수 없다. 고무줄처럼 속도를 늦추거나 날아가는 비행기처럼 빠르게 할 수도 없다. 영원이란 영역에 머물고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만이 그것을 멈추거나 영원한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며 시간의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새로운 일 년을 허락하였을까? 한 해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시간의 주인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새해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지극히 작은 나를 통해 더욱 진행되기를 소망하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의 마땅한 자세이다.   둘째는 새해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천국 곳간에 수많은 보화를 보관하고 창고의 문을 열어 방출하는 집주인과 같다.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화를 얻는 비결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의 보화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하였다(마태복음 19장 21절). 내게 맡겨준 재물을 나누어 주는 구제보다 더 좋은 비결이 없다. 새해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이 경제적으로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불이 되면 하늘의 보화를 얻을 수 있다.   그 기회를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하셨다.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이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을 만나 동행하는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이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새해에 진정한 보화 되신 하나님을 만나 부요한 그리스도인이 넘쳐나기를 기대한다.   /서울한영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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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2-31
  • 성탄과 가치발견
      매년 성탄절은 새해를 눈앞에 둔 연말에 맞이하기 때문에 성경의 거울을 자신의 심령에 비추어보면서 지난 한 해의 그릇된 삶을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새해를 바라보는 시점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 나은 믿음 안에서 참신하고 성실하게 살겠다는 결단을 하게 된다. 또한 성탄절은 추운 겨울철에 맞이하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병들고 소외된 이웃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절감하게 된다.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적어도 다음 몇 가지 가치를 발견해야만 한다.    첫째로 성탄은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한다.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인간 한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시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는데 까지 희생을 치르신 십자가의 사건이다.    둘째로 성탄은 변화됨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한다. 죄를 짓고도 죄인인줄 모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세리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에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부했고, 자신이 의인인줄로만 여겼던 바울도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다. 어거스틴은 19세부터 28세까지 9년간 세상 유혹을 받기도 하고, 타인을 유혹하며 속임을 당하고 남을 속이는 등 여러 가지 정욕과 범죄에 빠져 있다가 로마서 13:11-14절 말씀을 읽고 변화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셋째로 성탄은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한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이 선포된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고, 인권을 존중히 여기게 되며, 교회공동체에서는 섬기고 나누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슈바이처 박사, 테레사 여사, 앙리뒤낭, 장기려 박사, 쉰들러 등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세상 부귀영화를 배설물처럼 버리고 작은 예수로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성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러 오신 날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면 어느 누구도 존재할 수가 없다.    넷째로 성탄은 사명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한다. 우리는 바른 신앙, 바른 생활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할 선교적 사명자로 부름 받은 존재들이다. 성탄절을 맞아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참 가치를 발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을 살자. 인류가 평화와 자유와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성탄이 되기를 바란다.      /예장 합동선목 전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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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2-18
  • 교회연합에 더 힘쓰자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된 한국교회는 교파를 뛰어넘어 한데 뭉쳐 서로 연합한 힘으로 한국교회의 입장을 한목소리로 대변하는 역할을 감당해야한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복음전파방법과 관련된 교회의 나라사랑에 관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은 하나로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은 지금 돌아가고 있는 한국정치의 현안들을 직시하면서, 우리의 이웃과 나라를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책임을 짊어지고 연합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되돌아보면 그동안 한국교회는 여러 교파들로 분열하였으며, 지나치게 개교회적으로 교회성장에 우리(교회)끼리 경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던가? 거기서 우리 모두 개교회주의, 또는 개교파주의적인 사고에 익숙해져,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이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이웃과 사회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잊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몸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간 사회적인 책임을 망각한 채 행동하여, 오늘날 한국사회로부터 많은 불신을 받으며, 사회적인 공신력을 상실하는 문제를 극복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그간 지나친 개인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사고에 물들어 한국교회의 빈익빈과 부익부를 초래한 문제를 반성하며, 한국의 전체 교회중 약 80%에 해당한다는 미자립교회들을 도우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한다. 그래서 교파를 초월하여 동역자의식을 일깨우며,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들에도 한목소리로 대변하는 역할을 반드시 해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성경이 개인의 자유와 개교회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지만, 동시에 그 자유가 남용되는 문제를 지적하며, 내 이웃의 자유를 함께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지 말고, 양보하여 상대의 것을 보장해 주는 이웃사랑의 책임도 중요함을 교훈하고 있기 때문이다(십계명). 그것이 이웃사랑이며, 하나님 나라의 모습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신학적인 통찰을 외면했던 실수를 뉘우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당면한 대한민국의 이념대립적인 정치위기를 직시하면서, 하나님과 우리국민 앞에 진심으로 죄책고백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연합정신을 드러내며, 나라사랑의 의지를 함께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귀중한 책임이며 한국교회가 하나로 연합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금 대립되는 정치이념이 신속히 극복되어 참으로 안정되며, 평화로운 통일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도록 충심으로 마음을 합쳐 부르짖자.   /전 총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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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2-12
  • 세상을 향한 복음의 사명
      기독교신문 창간 54주년을 축하한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한결같이 한국 기독언론의 중심을 지킬 뿐 아니라 교계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앞으로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지면을 통한 한국 선교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지난 추석을 앞둔 9월 초에 중형급 태풍 링링이 한반도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해마다 추석 한주 전에 지역주민을 위한 이웃사랑나눔바자회를 개최해 왔는데 금 번 바자회는 태풍 때문에 실내에서 실시했다. 밤새 태풍으로 인한 강한 바람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교회 앞 공원 나무들이 여기 저기 쓰러진 것을 보았다. 쓰러진 나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무들은 자기가 심겨진 곳에서 살다가 생을 다하는구나’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소개한 지혜시편이다. 복 있는 사람은 후반부에 소개되는 의인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의인’으로 봐도 된다. 이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라고 한다. 나무의 특성은 자기가 심겨진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강풍에 뿌리가 뽑혀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나무이다.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의미의 ‘아멘’이 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일 것이다. 혹 설교를 듣다가 성도가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은 ‘제가 주신 말씀을 가지고 험난한 세상에서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기독언론의 문서선교 사명은 나무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명은 세상언론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사건들을 수집하고 전달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말씀을 통해 사건들을 해석하고 그 해석된 메시지를 교회와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적인 사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세상 시대사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치 않는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나무와 같이 묵묵히 자리매김하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언론의 사명은 세상언론보다 결코 쉽지 않다. 시대를 주도하는 언론이 제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써 교계의 부패를 방지하고 성도들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또 복음의 문서선교 사역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두 배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가치가 있는 일이다. 소중한 일이다. 지금 당장 열매를 얻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다음 반세기도 묵묵히 자리매김하는 기독교신문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사렛 감독·상암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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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2-04
  • 거룩한 삶이 함께하는 감사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추수감사절은 ‘기독교 신자들이 한 해에 한 번씩 가을 곡식을 거둔 뒤에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올리는 날, 1620년에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다음 해 가을에 처음으로 거둔 수확으로 감사제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고 정의된다. 한 해 동안 거둔 수확물을 통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감사하는 시간인 추수감사절은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자비를 뒤돌아보며 타락한 인간에게 주시는 값진 은혜에 감격을 표하는 시간이다.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무고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감사를 표해야 할 사건이다. 2천 년 전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 가장 비참한 죽음을 겪은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의 삶에 가치가 부여됐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께 받은 은혜에 감사를 표하며 이웃에게 나누는 중요한 의무를 진다. 이 의무를 성공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뤄나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표해야 할 감사는 무엇인가. 마르틴 루터는 감사를 근본적인 기독교인의 태도라고 정의했다. 루터가 이야기하는 감사의 개념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감사를 전하는 행동 저변에는 이 세상 속에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무런 사심 없이 베푸시는 분이라는 개념이 깔려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관용 안에서 삶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외적으로 표현해 값진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며 사는 실천을 보이게 된다.   감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잊어선 안 될 점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날 주님께서 실재적으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현재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 향유할 수 있도록 베푸시는 자비로 가득 찬 은총이다. 다만 우리가 감사로 표현하는 이 은총은 그리스도인만을 대상으로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가 함께 공유해야 하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재림이 완전히 도래하기 전까지 모든 사람이 주님의 자비를 알고 깨달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파하는 실천을 보이게 된다. 이를 통해 나누는 주님의 사랑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와 온 우주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활동에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추수를 통해 상기할 수 있는 주님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섬기며 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감사로 표현하는 날이 되길 희망한다. /서울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1-14
  • 무엇을 감사할까?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구약 적 유래를 찾으려면 어쩌면 초막절로부터 찾을 수 있다. 초막절 또는 수장절로 불리어지는 이 절기는 레위기 23장 34~4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이스라엘 자손대대로 알게 하실 목적으로 초막절을 제정하여 지킬 것을 소개하고 있다.   백성들은 첫째 날과 마지막 날에 휴식을 취하며 일주간을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며 초막에서 지내며 음식으로 제사를 드린다. 히브리어로 숙콧이라고 불리는 초막절은 유대인들이 초막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40년 광야 여정 속에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섭리를 기억하고 상기한다.   광야의 고달픔과 지루한 행로 가운데 목마름을 적셔 주었던 하나님의 생수의 은혜, 불기둥으로 갈 길을 밝혀 주셨던 은혜, 구름기둥으로 광야의 뜨거운 열기로부터 지켜주셨던 은혜를 생각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정착하게 되자 오곡백과가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스스로 광야의 초막에서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영국 헨리 8세와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 이어진 국교도 들에 의한 종교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청교도들은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으로 이주했다. 그 중에서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 대륙을 찾은 102명의 청교도들은 영국 남해안 플리머스 항구에서 1620년 8월 5일(지금 달력으로 8월 15일) 스피드웰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 대륙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지만 배가 고장 나 귀환하고 다시 1620년 9월 6일 메이플라워호만 25명의 선원과 102명의 청교도들이 승선하여 그해 11월 11일 버지니아 대신 미국 동북부 메사추세츠 케이퍼 카드해안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5일간 주위를 답사 후 11월 16일 현재의 플리머스에 정착했다. 11월 중순 도착한 그들은 강풍과 혹독한 추위, 질병과 식량 부족, 원주민들의 공격, 야생맹수들의 위험, 주거할 집의 부재 등 최악의 상황에서 버텨야 했다. 결국 그해 겨울을 지나면서 52명이 동사 또는 병사를 하고 생존자는 50명뿐이었고 남은 자들은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6)”는 말씀을 의지하며 1661년 가을 추수한 첫 곡식들과 채소들 중 최고 우량품들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근대적 추수감사절의 배경에는 화해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있다. 올해의 감사절에는 이웃 또는 누군가와 평화롭고 친밀하게 지내고 있음에 감사드려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감사절을 기하여 어색하고 불편하게 지냈던 이웃이 있다면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를 갖게되는 감사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글로벌선진학교이사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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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1-07
  • 종교인은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 - 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박사 어록
      종교는 인간 역사에 있어서 지극히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성의 ‘아비스’라고 할 수 있는 죄악성을 파헤치며 동시에 인간성의 면류관인 영원한 생명을 약속한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 기술화의 시대여서 종교는 과거의 유물로밖에 남지 않는다고 속단하는 사람이 많다. 거기에는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사장되어 과거의 골동품으로 자처하는 경우에는 그런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은 다원종교사회이기 때문에 서구와는 다른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 대한 종교의 사명은 서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종교는 다원 사회의 분산된 분야들을 하나의 중심에 통합하며 화해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종교는 각인각색의 윤리적 혼란이나 도덕의 부패, 타락에서 인간의 도덕성을 앙양시키고 인간을 죄악성에서 구출하는 구실을 담당한다. 종교는 자아중심, 현세주의, 이득 본위 등의 평면적인 생활에 신에 대한 책임, 영원,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 등 수직적인 관계를 갖게 하여 인간을 실존적인 불안과 절망에서 구출한다. 그러한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 역사에서 스스로를 유리시켜 타계적인 신비 경험에 몰입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무대로 신의 사랑을 가르치고 살고 지키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우리 한국에는 역사적인 종교로서 불교·유교·기독교 등이 있으며 각기 수백만 명의 신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의 역사에 남긴 실적을 살펴볼 때 그 본연의 의미를 유감 없이 수행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우선 통합과 화해를 그 중심 메시지로 삼는 종교가 배타 또는 타분야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자체 내에 분열과 분쟁과 상호 배격을 일삼는 일이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둘째로는 옛날에는 파계라는 것이 지대한 관심사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의 종교에서는 그 개인 윤리 면이 해이됐을 뿐 아니라 가장 고조되어야 할 사회·윤리 면에서 냉담 무관하기 그지없다.    한국종교는 같은 신도끼리만 유대를 가지며 안으로 오그라드는 경향을 증대시키고 있다. 종교가 자기 발전을 기대하려면 언제나 밖으로 마음과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예수도 ‘가서 모든 민족에게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최후의 분부를 남겼다.    종교인들은 이제부터라도 문을 열고 선교와 온갖 사회봉사와 사회사업을 해야 할 것이며 아직도 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한 접촉 등을 종교인의 본직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모름지기 마음과 문을 열고 선교와 지역 사회에의 봉사에 열중해야 할 것이다. 안으로 오그라드는 종교는 자멸할 뿐이다.   /본지 전 발행인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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