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실시간뉴스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목회자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어렵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무엇인가 어려움에 봉착한 느낌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기에 한국교회가 어렵다는 느낌이 작금의 시대에 퍼져있는가.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실천이다.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교회에 차고 넘쳐야만 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사랑 아니었던가. 자신을 내어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죽음을 당하신 예수그리스도는 사랑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교회가 언제나 기억하고 실천해야만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이다.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 역사를 통해서도 사랑의 한 예를 볼 수 있다. 바로 감리교인으로서 종교교회에 출석했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남궁 억선생과 같은 분들이 우리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사랑의 덕목을 잘 보여준다.   남선생은 자신의 온 삶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남선생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나라 사랑은 끝이 없었다. 그는 대한제국 조선 황조 말기의 교육자이자 계몽 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사회운동가, 시인, 저술가, 작사가, 작곡가, 언론인으로서 폭넓게 활동하면서도 늘 기독교인임을 잊지 않았다. 그의 삶은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것을 위해 헌신됐다.   그의 삶은 마치 이사야의 삶과 유사했다. 그의 신앙은 예언자의 그 강인함을 닮아 있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민족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특히 우리 한국교회의 젊은 목회자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고 있는 것인가.    남궁억선생의 나라를 사랑하는 큰 마음을 배우길 기도한다. 이사야의 예언자 정신을 회복하길 기도한다. 믿지 않아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길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목회자다운 마음가짐을 회복하길 기도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들 한국교회의 위기가 아닌 부흥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기감 서울연회 감독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0-23
  • 건전한 사회분위기를 만들자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 스스로와 이웃을 염려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이럴 때 개인의 삶도 더욱 보람차며 우리 사회는 개혁되고 발전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나라의 문제를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언제나 개인의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야망이 늘 충돌하는 사회는 결국 이익집단을 양산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나아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독단적 사고방식이 만연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를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겸허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덕목을 신장할 때 우리 사회에 정의와 사랑과 용서, 평등, 자유가 자라나게 될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에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고 그 분위기에 따라 좋고 그름을 분간하면서 국민의식이 생겨난다. 지도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이나 그 분위기에 따라 선악을 판단한다. 사회의 올바른 분위기는 사회의 지도자들이 본을 보일 때 실현 가능하다.    만일 우리나라에 본을 보이는 지도자가 없거나, 혹 있더라도 일반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바람직한 시대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창조적 가치들을 창출하는 리더의 모습을 본받고자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한결 좋아질 것이다.   정치인이나 사회적 지도자들이 자기들만 옳다고 이념적 갈등을 만들어 내서는 결코 안 된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꾼이 되려고 노력해야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서 멸사봉공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경륜과 실천을 통해서 이웃에게 참된 모습을 보일 때 진정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진정한 리더가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더 큰 인물이 필요한 때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를 인정하며 새로운 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엘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0-17
  • 이웃사랑의 정체성 확립하자
      한국사회는 현재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퍼지면서 절대적 기준이 붕괴하고 모든 가치가 상대적인 것으로 절하되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과 사람은 물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까지 허물어지고 있다. 이는 바벨탑을 쌓으며 자신의 일만 묵묵히 수행했던 이들과 비슷하게 보인다.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가치관이 팽배해지면서 기존의 절대가치가 모두 상대화되었고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쓰다 버리는 도구로 전락해버린지 오래이다. IMF 이후 이러한 경향을 매서울 정도로 가속화되어 황금만능주의 사회로 한국을 변질시켰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가.   한국교회 또한 방황과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이는 언론에서 조명되는 유명 목회자들의 언행만 봐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지 못한 모습에서 교회다운 교회가 실종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부 목회자들은 구원보다 교인을 늘리고 헌금을 걷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는 천민자본주의적 사고로 이어져 교회 크기를 키우는 데에 온 힘을 쏟는 것을 최고 가치로 여기게 된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핵심을 찌르는 논리에 기반하여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다. 인류사랑이라는 대원칙 아래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주님의 말씀을 보면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해답을 깨닫고 그분께서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자이심을 확인하게 된다.   급격한 가치변동의 시대 속에서 지금 자신의 정체성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버리고 간 제사장과 바리새인 같은 위선이 마음속에 있는지 피 흘리며 죽어가는 이웃을 구했던 사마리아인 같은 신앙이 있는지 돌이켜보자.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비우자.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참된 기준이다. 재산과 명예, 권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 된 가치를 저버리지 말고 목사답고 교인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이 사회의 등대가 되어 빛을 비추고 화평과 안식의 기수가 되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정체성을 마음에 확립할 수 있다. /나사렛 증경 감독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0-11
  • [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박사 어록] 위대한 문화건설을 위한 제언
      종종 우리는 우리나라가 문화의 나라요, 우리 국민이 문화 민족이라는 것을 자부하고 있다. 찬란한 과거의 유물과 유적들은 이것을 증명해주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 진위를 따져 보면  그 범위가 동아시아에 국한되었고 그 시대가 중세적인 데 머물고 말았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    해방이 되면서 우리에게는 커다란 변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지금 돌이켜볼 때 우리는 그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무엇보다도 세계 수준의 문화에 도달할 뿐 아니라 그것을 추월할 것을 목표로 매진해야 한다.   우선 문화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적·경제적 조건이 맞아야 하고 지리적으로 너무 춥거나 덥다는 악조건이 없어야 하며 전승이 바로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외부 조건에 너무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가장 주체적인 인간 문제가 망각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문화의 운명은 인간의 사람됨에 달려 있다. 결국 문화란 인간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품격은 나라를 만드는 인간의 품격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문화 건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문화를 건설하려면 먼저 인간들의 비전이 크고 그 생각의 규모가 커야 한다. 종래의 우리의 문화 현태는 그 스케일이 크지 못했다. 정치에서도 소국으로 자처하여 명맥을 유지했으니 큼직한 기백을 기약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국민에게는 위대하고 숭고한 비전에 불타는 일이 매우 적다. 근시안적으로 눈앞의 작은 이익에만 급급하여 천박한 잔재주를 부리기 일쑤인데 이것도 또한 소국민적인 소치에서 기인하단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남을 위해 주는 사랑의 마음이 생활에서 발현되지 않는 한 큰 인간은 기대할 수 없다. 사람의 인격이란 남을 위해 주는 것만큼 그 영역이 커지게 마련이다. 내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면 벌써 그 남이라는 사람이 남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남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내 인격은 이미 거기에 퍼진 것이다. /본지 전 발행인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10-02
  • 한국교단이 하나 되려면
      바벨론 포로 시절에 시작된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네 개의 종파로 발전하였다. 대사제와 장로와 같은 귀족으로 이루어진 사두개파와 서기관과 율법학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바리새파,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 생각하고 사막으로 나아가 분리된 삶을 살며 율법 연구에 몰두했던 에세네파, 그리고 폭력을 통해서라도 이방인을 몰아내고 유대 땅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열성당파가 있었다. 네 종파는 서로 자신들만이 의로운 공동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각 종파는 예수님의 심판과 책망을 피할 수 없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많은 교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교단은 다양한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과 다툼으로 분리되었다. 분리의 원인은 신학적 성향과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다양하지만 결국 자기주장으로 인해 화목하지 못한데 있다. 낮아짐을 통해 섬김의 도를 실현해야할 지도자들이 서로 높아지려는 명예욕도 분리의 원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결국 목회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세운 교회의 하나 됨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각 교단이 서로 독특한 신학과 사상을 주장하며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공동체라고 주장하지만 그 모든 주장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운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분열의 역사와 그것을 지켜보며 인내하던 주님께서 심판하는 역사는 반복된다.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종파주의 역사는 그 성격에서 한국교회와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분열의 형식은 교단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네 종파로 이루어진 유대교가 주님의 심판의 받은 것처럼 각 교단으로 분열된 한국교회도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다. 이를 면하기 위해서는 각 교단의 지도자들이 자기주장과 자기 명예를 내려놓고 용서와 화목의 정신을 발휘하여야 한다. 그 어떤 이유도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합리화할 수 없다. 오늘도 주님은 피 값으로 세운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는 자를 찾고 계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한영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9-25
  • 그리스도의 사랑 나눔사역을 추진 - 모리아교회의 윤요셉목사
    ▲추석을 맞이하여 모리아교회는 쪽방촌을 찾아가 생필품을 나누고 음식을 대접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역에 매진했다.   생필품 전달·음식나눔 등 쪽방촌 독거노인 사역을 전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모리아교회의 윤요셉목사(사진)는 지난 11일 사랑의 선물 나눔행사를 열고,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사랑으로 보듬는 사역을 진행했다.   이번 나눔행사는 추석 연휴를 맞아 쪽방에서 홀로 사는 500여명의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식자재를 비롯한 생필품을 전달하며 교회가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웃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   윤목사는 “민족의 명절인 추석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사랑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미처 관심을 주지 못하고 있는 쪽방촌 독거노인들에게 추석은 고독한 시간의 연장일 뿐이다”며, “쪽방촌은 거주하는 이들은 재개발이 되지 않고 노후 된 건물이 밀집된 좁은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사는 이들 대다수는 가족 없이 홀로 사는 70세 이상 노인이 많고 이외에도 가족 간의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연으로 인해 사회 최하계층으로 떨어진 이들도 많다”고 전했다. 이어 “반 평짜리 작은 쪽방에 있는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가족을 대신할 이웃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다”며, “위태로운 환경 속에서 밥 한 끼 먹기 힘든 삶을 사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보듬고자 15년째 매년 명절(설, 추석)과 때마다 사랑의 선물 나눔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랑의 선물 나눔행사를 통해 쪽방촌 독거노인의 삶에 그리스도의 희망을 심어주는 데에 주력했다고 밝힌 윤목사는 “이번 행사를 통해 용산구 동자동에 있는 쪽방촌 가정마다 생닭과 생만두, 과일, 쌀, 라면 등을 제공하고 교회에 함께 모여 친교를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됐다”며, “이 외에도 매달 생일을 맞아하는 어른들을 함께 모아 합동으로 이들을 축하하고 생일선물 전달해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뇌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본질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영혼구원에 목표로 쪽방촌 돌봄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고 강조한 윤목사는 “복음과 복지 사각지대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계시는 70세 이상 쪽방촌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육적으로는 의식주를 제공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며, “매해 성탄절과 신년, 부활, 추수감사절 등 교회절기와 더불어 설날과 추석 등 명절을 맞이하면 독거노인을 비롯한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직접 찾아가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쪽방촌에서 홀로 사는 이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권면하면서 주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만큼 반드시 되돌려 주는 신앙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나아가고 있다”며,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오직 천국의 소망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소외계층인 이웃을 돌보고 인도하면서 이들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마지막 그날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아의 방주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국 각지에 쪽방촌이 650여 곳이 있다고 말한 윤목사는 “전국에서 쪽방촌 사역에 함께하는 단체와 조사한 결과 쪽방촌에 있는 독거노인만 65만 명이 집계됐다”며, “반 평 남짓한 공간에서 두 발을 모두 뻗지 못한 채 새우잠을 자는 이들이 많으며 많은 나이와 비위생적인 환경, 고르지 못한 식생활로 인해 병에 걸린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어 “위험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국교회가 이 사회가 하지 못하는 사랑 나눔사역에 힘을 모아 실천하기를 희망한다”며,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부여잡고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함께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셨던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됨으로서 이 사회가 복음으로 변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9-24
  •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다는 신념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이 생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동물의 차원이고 인격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은 인간의 차원이다.    철학에서는 타 동물에 비교해서 인간을 다섯 가지로 정의를 했는데 그중에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즉 생각하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에는 성경과 성령이 지배하며 상상할 수 없는 창의력과 영력이 문명과 역사를 이끌어 간다. 다음 인간을 호모 네간스 즉 무력과 권력, 재력과 패륜성의 유혹 앞에서 ‘아니오’ 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호모 네간스이다. 다음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 즉 희망하는 존재라고 했다. 사람은 꿈이 있어야 산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거듭나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라고 했다(베드로후서 1장 4절).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를 가르쳐 주는 일’이라 했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아동문학가이자 교육가, 철학자인 루소는 그의 저서 〈에밀〉에서 ‘양심은 영혼의 소리이고 탐욕은 육신의 소리’라고 했다. 다윗은 목동이었으나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을 따랐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세상 방법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무릇 자기 자신의 재능과 경험, 지식으로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타인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값없는 은총 그리고 누구보다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의 삶을 우리 모두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예장 합동선목총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9-09
  • 가족모임 기도가 필요하다
      내가 짐작하기에 주님기도 봉송한 분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을 맞아 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 의미에서 작은 경험이나마 나누어서 서로 덕이 되게 하며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더 바랄것이 무엇이랴란 의미에서 이글을 쓰는 것이다.   먼저 처음에 만 번 주님의 기도를 봉송한다고 할 때에 막연하였다. 어떻게 어느 세월에 만 번을 봉송한단 말인가? 그러나 해보니까 벌써 열 번을 넘고 백 번을 바라본다. 그렇구나 별것도 아닌 것을 하고 계속해서 봉송을 한다. 한 500번하였을 때 마음속에 확신이 왔다. 한가지 기도만 계속하다 보면 습관이 되어서 내용은 생각지 않고 말만 외어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님기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입으로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감사했다 시원찮게 한 기도도 다 받으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기도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주님의 마음을 느껴야 했다. 첫째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본체와 함께 가지셨던 그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들이 하나님 안에 있었다. 그래서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의 첫마디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그것뿐이었다. 이것을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실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   다음은 ‘나라이 임하옵시며’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빨리 속히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능력으로 귀신의 세계가 박살 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귀신들의 유혹 때문에 시험에 드는가? 시험이란 귀신의 유혹으로 우리가 끌려들어가서 잘못된 길로 행한다는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주장되고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담아 놓기 위함이다. 주기도는 예수님을 여러분과 내 마음에 품고 인격화하는 매일의 작업이다.    /기독교학술원 명예이사장·반도중앙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9-05
  • [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박사 어록]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내려온 종교가 기독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탕자와 같이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 몰두하며 살았지만 그런 인간을 참되게 하기 위해 세상에 와서 진력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그리스도만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찾아온 도의 화신이라고 요한은 증언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인간 중에서도 버림받고 소외된 인간들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가 환자·병자·빈자·창기·죄인·세금원 등 세간의 혐오와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을 때, 그 당시의 종교인들은 그가 종교 교사로서의 체면 유지도 못 한다고 비판했었다. 그때 그는 ‘성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으나 병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죄인을 부르려고 세상에 왔노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었지만, 자칭 ‘의인’이라고 자만하는 사람들만은 구태여 찾아다닐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기원 313년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 교회 국가가 권력 구조의 주요한 부분이 되면서부터 이 방향은 흐려지고 스스로 귀족화하는 경향이 늘어 갔다. 그러나 바라건대 기독교회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방향을 되찾아 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은 얼마나 답답하고 어려우며 또 얼마나 소외되고 위축되어 있는가. 살아야 하고 살고 싶어 발버둥치면서도 스스로 죽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고통이 극에 이른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그들을 한번 찾아 주지도 못하고 위로하지도 못하고 그 고통의 얼마라도 분담하겠다는 마음도 없이 교회당 안에서 스스로 거룩하고 고고한 체하며 방관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광명을, 눌린 자에게 해방을!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나는 왔노라’고 그리스도 자신이 나사렛 회에서 첫 증언을 외쳤던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면 기독교 무용론이 나올 까닭이 있을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종교에 무관심할 인사도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기독교가 진실로 세상을 구한다는 근본적인 뜻을 갖고 있다면, 구세주의 길을 역행하는 어리석음을 떠나 바른 방향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세간의 의혹과 방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요, 우리 기독교인이 걸어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본지 전 발행인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8-27
  • 사랑만이 인공지능을 이긴다
    ▲ 김철환목사   교회에는 두 기능이 있다. 제사장의 기능과 예언자의 기능이다. 제사장의 기능은 예배와 백성 돌봄이다. 그리고 예언자의 기능은 공의이다. 미래를 미리 보면서, 바르고 행복한 길로 이끌어 가는 기능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공부해야 한다. 미래를 공부해야 한다.  지금 교회는 겉으로는 말하지 못해도, 속으로 불안해 하는 것이 있다. 4차 산업혁명 속에서, 과연 교회는 미래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 용기를 내어 A.I. 즉 인공지능이 이끌어가는 가까운 미래에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몇 해 전 바둑에서 알파고가 인간 최고의 바둑기사를 이겼다. 그리고 빠르게 프로 기사는 인공지능에게 바둑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과연 교회와 우리 인간은 4차 산업 속에서 설 공간은 있는가?  이 짧은 지면에 교회와 인공지능의 관계를 다 말할 수는 없다. 교회가 더 성장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4차 산업 속에서 교회는 더 필요해질 것이다. 인공지능이 채우지 못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첫째가 창의성이며 둘째는 감정의 공유이다. 감정의 공유란 사랑의 함께 나눔의 공간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진정한 사랑에 목마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는 필요할 것이고, 다시금 부흥의 선물도 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교회가 물어야 하는 심각하고도 진지한 질문이 있다. 지금 교회는 ‘사랑이 넘쳐나는 사랑 공동체인가’라는 질문을 혹독하게 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본질인 사랑의 회복 없이는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 가짜 사랑 아닌 진정한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자신이 죽고 남을 살리는 사랑, 철저하게 타자를 위해 존재하겠다는 결단적 사랑이 필요하다. 또다시 말해서 교회는 이 사랑 본질을 찾고 실천하는 노력을 늦지 않게 지금 해야 한다.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 좋다. 섬김 공동체로서의 교회, 좋다. 선교 공동체로서의 교회, 좋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시대 4차 산업을 이기는 비밀은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인 교회는 분명 4차 산업도 이길 수 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드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장 34~35절)  이 말씀이 2,0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도 흔들림 없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요, 4차 산업 속에서도 진리이다.  본 필자는 시골에서 이 사랑의 운동을 펼치고 있다. 바로 스데반돌봄사역이다. 주제는 「우돌하치」이다. ‘우리가 돌보면 하나님께서 치유하신다’ 나 죽어 너 살리는 사랑의 돌봄만이 오는 교회의 희망이기에 외치고 있다. 또 이렇게 외친다. “예수님을 만나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를 돌본다” 사랑을 회복하여 4차 산업이 오히려 교회의 성장기회로 삼자. 사랑만이 인공지능, 4차 산업을 이긴다.  /작은예수들교회 목사·루터교 증경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8-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