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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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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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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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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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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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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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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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박사 어록] 사랑의 철학을 지닌 교육자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참교육을 실천하는 교육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정치나 경제가 보여 주는 화려한 역할도 중요하겠지만, 먼 장래를 생각할 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역시 교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교육이 평생 계속되는 것이므로 다만 학교 교육만을 교육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실 지식 전달이나 품격 조성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학교에서 담당하는 것이고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맡기고 모든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정에서 경제력 획득에 성공하여 많은 부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자녀의 품성이 경솔하고 불성실하며 또는 패악 무도하게 된다면 조상이 일궈낸 부도 계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패가망신하기 쉬울 것이다. 이런 일은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경제 건설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국민의 품성이 저열하고 무뢰하다면 그 국가의 경제뿐 아니라 사회도 무질서와 무법이 난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여기서 교육자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국가의 품격을 조성하는 책임이 교육자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기계가 아니므로 다만 기계적인 과정으로서는 소기의 성과밖에 거둘 수가 없다. 피교육자도 인간인 만큼 교육자는 피교육자개개인에게 사랑으로 대하여 성심으로 그 피교육자의 인간됨에 보탬이 되기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심정, 즉 남이 나에게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맡겼으니 그를 나의 자녀와 같이 생각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심정부터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교육자로서의 가장 기본되는 자세라 할 것이다.    교육자는 설령 그가 어려운 여건에 처하여 다소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참고 견디어 꾸준히 신성한 교육적 사명을 다할 자세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평생을 시골의 벽지에서 꾸준히 교육에 종사하고 백발과 노구로 현직에서 물러나는 수많은 교직자의 모습을 볼 때, 그 앞에 머리를 수르려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의 장래가 교육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기억하고,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사랑으로 한 몸이 되어 교육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의 교육에 의해서 조성된 인격의 소유자만이 생을 통해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사랑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이룩해 놓은 근대화의 자산을 수호할 뿐만 아니라 더욱 꽃피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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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4-28
  • 기독교 복음과 사랑의 실천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에서 요약되어 있다. 또한 어떤 점에서 그 복음의 가르침은 예수의 산상설교에 압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우리가 예수님의 팔복의 가르침에 주목할 때,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구약 전체의 계명이 총괄됨을 본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단지 듣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 실천하고 준행하라고 하셨다.    먼저 그 사랑은 주 하나님을 마음과 영혼(생명)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하여 유혹을 받고 우상을 섬기며 사랑하는 데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를 때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계명이 완성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동시에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예수의 복음을 완성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두 가지 사랑의 균형과 통합을 어렵게 여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가지에 더 집중하면서 온전함과 균형을 잃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온전한 기독교 복음은 이 두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성취된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목적은 바로 그 완전한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고 그 형상대로 회복되지 않는 한, 참되고 온전한 기독교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산상수훈의 처음에 나오는 천국의 팔복을 보면, 먼저 가난하고 겸손하며, 온유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나아가서 화평하게 하며 의를 갈망하는 복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참 사랑을 실현하는 길을 보여준다. 산상설교의 전체를 묵상하며 읽어보면 이웃 사랑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오늘 우리 교회는 개혁되고 새롭게 되어야 한다. 그러한 개혁을 위해 무엇보다도 복음의 회복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신 어린 양 예수의 능력을 받아야만 거듭남과 성화의 증거가 이 땅에 돌아올 것이다. 이 역사적으로 크나큰 위기가 온 세상에 편만한 시대에, 한국교회는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일꾼들을 요청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열렬하고 순결한 사랑,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를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처럼 감당하라는 부르심이 있다.    사랑의 실천은 말과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참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만이 이웃을 위해 삶을 드리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지금 허상을 버리고 그 우상의 잔치에서 뛰쳐나와 참된 사랑의 고귀한 실천에 투신할 때이다. /감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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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4-24
  • 분별하여 기도하기에 힘쓰자
      사이비와 이단의 영이 발악하는 때가 곧 짐승의 때이다. 택한 백성이라도 자기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발악한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 전신갑주를 취해야 하며,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여, 끝까지 견디는 욥과 같은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사이비와 이단의 영은 간교하고 간사하다. 모든 사람을 미혹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명예와 재산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미혹하여 무릎 꿇게 한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말씀에 접붙임 되어 그 나라와 그 의의 말씀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에 힘써야 한다.   사이비와 이단의 영의 특징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간교한 말쟁이라 그 말에 미혹되기 쉬우나, 감동과 감화도 없고 심장에 자극도 없다. 따라서 철두철미한 시인과 회개가 있을 수 없다. 참 진리는 생명이 있어 감동과 감화와 생명력이 약동하고 비진리는 육체의 쾌락으로 끝난다.   말에 미혹되어 미혹의 영에 이끌려가서 결국은 사망에 침몰된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명철이 필요한 세대이다. 참 진리는 빛이요, 비진리는 어둠이다. 빛은 생명이요, 어둠은 사망이다. 하나님 아는 지식과 예수님 아는 지식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이 지식이 없는 자에겐 생명이 없다.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이 합하여 하나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권능이 생긴다. 우리가 영을 다 믿지 않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잘 분별한다면, 이미 많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나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알고 그리스도의 영을 알아 시시초초 시인하고 회개하여 적그리스도의 영을 잘 분별해야 할 때이다. 이단의 영은 시인과 회개에 대하여 철두철미하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은 그들의 말을 좋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 아는 지식이 있는 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분간할 수 있다. /제일성민교회 목사·서산중앙병원 이사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4-14
  • 부활신앙과 회복의 비전
      시인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4월은 만물이 소생하고 꿈이 부풀어 오르는 계절임에 비해 실망과 좌절의 벽에 부딪혀 생을 포기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달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는 지금 전 세계인이 마치 전쟁이 발발한 것과도 같이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가장 잔인한 4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4월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소망이 넘치는 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부활의 달이다.   한때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유골이 발견되어 그 뼈가 인도의 한 거리에 진열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석가의 유골 앞에 가서 참배하려고 줄을 지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한 기독교 선교사가 그 광경을 보고 친구에게 말하기를 “만약에 예수의 뼈가 발견되었다면 기독교는 끝장났을 걸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독교는 예수의 빈 무덤과 그의 부활을 자랑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영웅들은 생전에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며 웅장한 묘를 만들어 놓고 죽은 자를 추모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면서도, 그는 지금도 살아서 부활의 영으로 인간에게 다가와 동행하며 역사의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다. 예수 부활 후에 선교적 사명과 영적권능을 부여받은 사도들과 교회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핵심복음을 전하며, 당시 어둡고 불행한 사회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했다. 복음을 듣고 죄인들이 어찌 할꼬! 가슴을 치며 죄를 회개했고,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자들을 치유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과 물질을 나누었다. 부활절을 맞아 잔인한 4월을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생명의 달로, 어둡고 우울한 세상을 밝고 활기찬 세상으로 회복시키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예장 합동선목측 전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4-09
  • 영적 건강지키며 생명나눔
      코로나19로 인해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움에 빠진 지도 수 주일이 지났다. 자고 일어나면 늘어나 있는 확진자의 수를 볼 때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어지러운 시국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제대로 된 일상생활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오늘의 이런 현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그 중심에는 신천지가 있다. 그들로 인해 무섭도록 빠르게 퍼져간 전염병을 바라볼 때 사이비 종교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멍들게 하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 맞물려 우리 사회에 그 민낯을 공개한 사이비 종교를 바라볼 때, 둘이 참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아 소리소문없이 사람의 몸을 잠식하는 바이러스처럼 사이비 종교도 우리가 생각지 못한 순간 사회 깊은 곳에 뿌리내려 많은 이들의 영을 잠식하고 있다. 많은 젊은이가, 한때는 열심히 교회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진실된 믿음마저 저버린 모습을 볼 때 선배 신앙인으로서 몹시 마음이 아프다. 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바이러스와도 같은 사이비 종교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건강관리의 실패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건강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영적 건강도 중요하다. 우리의 인간 됨은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목적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삶의 목적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있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믿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믿음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와 겉모습만 그럴싸한 거짓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를 공격하는 바이러스를 이기기 위해 육체적 건강이 중요하듯 사이비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적 면역력을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 말씀 중심에 서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나의 삶을 돌아보며 철저하게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인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우리 교회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 달려왔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소외되고 상처받았던 이들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3-18
  • 영적 건강을 굳건히 지키며, 생명나눔 사역에 함께하자
      코로나19로 인해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움에 빠진 지도 수 주일이 지났다. 자고 일어나면 늘어나 있는 확진자의 수를 볼 때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어지러운 시국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제대로 된 일상생활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오늘의 이런 현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그 중심에는 신천지가 있다. 그들로 인해 무섭도록 빠르게 퍼져간 전염병을 바라볼 때 사이비 종교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멍들게 하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 맞물려 우리 사회에 그 민낯을 공개한 사이비 종교를 바라볼 때, 둘이 참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아 소리소문없이 사람의 몸을 잠식하는 바이러스처럼 사이비 종교도 우리가 생각지 못한 순간 사회 깊은 곳에 뿌리내려 많은 이들의 영을 잠식하고 있다. 많은 젊은이가, 한때는 열심히 교회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진실된 믿음마저 저버린 모습을 볼 때 선배 신앙인으로서 몹시 마음이 아프다. 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바이러스와도 같은 사이비 종교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건강관리의 실패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건강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영적 건강도 중요하다. 우리의 인간 됨은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목적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삶의 목적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있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믿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믿음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와 겉모습만 그럴싸한 거짓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를 공격하는 바이러스를 이기기 위해 육체적 건강이 중요하듯 사이비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적 면역력을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 말씀 중심에 서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나의 삶을 돌아보며 철저하게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인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우리 교회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 달려왔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 안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았던 이들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손 내밀며 말씀을 그저 아는 것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 기독교인 중 100만여 명에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통해 우리 사회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왔다.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한 방법으로 장기기증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먼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장기기증 희망 등록자가 58%에 육박하지만, 우리나라는 2.9%로 그 수치가 아주 미비하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장 8절)’라는 말씀을 행함으로 실천하며 생명도 아끼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날 나누겠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특별히 코로나19로 인해 큰 피해를 겪은 이들 중에는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도 많다고 한다. 면역력이 약한 환자들은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하고, 병원을 오가는 일처럼 중요한 일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하니 걱정이 앞선다. 이런 이들이 하루속히 건강을 되찾아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또한 예수님을 만나 영적으로도 건강해질 수 있도록 바이러스로 인해 몸과 마음이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 기독교인들이 더욱 힘을 합쳐 생명나눔에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3-11
  • 아픔을 딛고 함께 일어서자
      교회 교우들에게 유무선 통지를 보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감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하여 이번 주일부터 성찬식을 비롯한 일체의 예배를 중지하오니 교회에 오시지 마시고 온라인 예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가 성도들에게 교회에 오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 이 아이러니에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온 국민이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겪고 있다. 예배와 회의는 취소되고 따뜻한 악수도 사라졌다.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줄을 서고 사회적 거리나 판데믹이라는 생소한 단어도 등장했다. 마스크를 쓰고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혹시 확진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지하철에서 앉아가려면 기침을 크게 두 번만 하면 앉아 있는 사람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준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떠돈다. 왕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으면서 실상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정말 야속하고 밉다.     흔히 고통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는 희생양을 찾는다. 그리고 그를 집중적으로 비난하고 원망함으로써 답답한 마음에 위로를 얻으려 한다. 그 비난과 원망의 대상은 대통령이나 정부 당국일 수도 있고 정치인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정책이 되기도 한다. 나중에는 바이러스 확진자에게까지 비난과 원망의 화살은 쏟아진다.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 감염되었는가? 고의로 바이러스를 확산시켰는가? 자신도 모르게 감염되고 자신도 모르게 전파된 것이 아닌가? 감염자는 단순한 피해자일 뿐인데 어느새 죄인 아닌 죄인이 질시를 받는다.   하지만 비난이나 원망, 희생양 찾기로는 이 사태를 끝낼 수 없다. 설사 사태의 책임자를 찾아 감옥에 보낸다 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 같은 코로나19 사태를 종식할 수 없다. 오히려 서로의 가슴속에 깊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모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첫째는 반드시 이겨내리라는 각오와 다짐이다.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 두려움과 원망의 마음으로는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이겨내고 극복해 내겠다는 의지를 앞세울 때 다양한 방법론들을 찾아낼 수 있다. 둘째는 합심이다. 서로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는 사이에도 바이러스는 쉬지 않고 활동한다. 비난의 대상을 찾거나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정부와 국민이 함께 힘을 모으는 일이다. 힘을 모아도 힘든 바이러스와의 싸움인데 분노와 비난만으로는 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다. 셋째는 위로와 격려이다. 지금 코로나19 때문에 전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다. 정책당국, 감염환자, 의사, 간호사, 방역당국, 나아가서 자영업자, 항공회사, 여행업계 등등 사실 고통받지 않는 국민이 없다. 이럴 때 비록 빈말일지라도 필요한 것이 위로와 격려이다. ‘이겨냅시다. 물리칠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잘 버텨주셔서 고맙습니다. 응원할게요’ 이런 말들이 온 나라에 파도치게 해야 한다. 목숨 걸고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에게 마음속 큰 박수를 보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이번 코로나 사태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대도 헤쳐나왔다. 더 어려운 역사의 고통도 자랑스럽고 슬기롭게 싸워 이긴 민족이다. 코로나19도 반드시 이길 수 있음을 믿는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양에서 불뱀에 물려 큰 고통을 당한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단다. 뱀에게 물린 이들이 놋뱀을 쳐다봄으로 모두 살게 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사태는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놋뱀을 바라보아야 한다. 온 국민의 하나 된 마음과 이길 수 있다는 의지가 모일 때 코로나19는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루터회 전 총회장·새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3-05
  • 관념적 애국보다 실천적 애국을
      사람은 저만을 위해 살 수도 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 수도 있다. 나라와 민족이 안중에 없노라고 억지 쓸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대다수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노라고 자처한다.   평상시에 별로 개의하지 않다가도 유사시를 당하거나 외로운 환경에 처하면 누구나 나라와 민족을 그리워한다. 사랑을 부인하는 자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잃는 경우도 있다. 얻음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다가 잃게 될 경우, 그 손실은 더욱 아프고 중대할 수도 있다. 사랑이 관념에 그칠 때에 도리어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고, 한낱 감상에 그침으로써 소득이 없을 수도 있다. 비분강개와 호언장담이 애국의 실증이라고 오인하면 허무한 메아리만 거둘 것이요, 나아가서 광포와 망동이 뒤따르면 그 해독은 사랑 없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파시즘이나 미디어의 일면에는 그러한 점이 있다. 그러한 경우를 위하여 사랑은 실천적이어야 하고, 실천은 이성적이라야 한다.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여 남의 자식을 미워한다면 이는 비이성적인 사랑이라 할 것이요, 극진히 사랑한다고 해서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맹목적이요, 비과학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가 정치를 바로잡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 할 경우, 만일 독선을 강요하는 일이 있다면 관념적이요, 비이성적인 예라 하겠고, 투자 효과를 무시하고 재원을 낭비한다면 역시 그러하다.   가난한 살림살이를 하는 주부가 빚을 걸머지면서 백만장자의 생활양식을 흉내내는 것을 잘 사는 것인 줄로 오인한다면 이는 스스로 속는 것이니, 나라의 살림살이도 같은 예가 많다. 경제 개발을 연구하는 학자나 실무자들이 시정의 투자 효과를 논하고 투자 순위를 야무지게 따지는 데 반하여, 항간에 비경제적인 투자 행위가 없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슨 까닭에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무원칙적인 자원 분배를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절대 비애국적인 행위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애국심이 관념적이어서 무엇이든지 큰 사업이나 큰 시설을 일으키면 큰 개발이 될 줄로 안다거나, 외국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을 능사로 안다거나, 타인에게 과시하고 국민에게 과시하는 것이 국위를 높이고 정부의 권위를 세우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투자 효과의 과학적인 분석의 내용이 결여되어 한정된 자원을 절도 있게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을 비과학적인 애국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위정자는 물론이요, 국민 전체가 크게 각성해서 관념적이 아닌 실천적인 애국심을, 독단적이 아닌 과학적인 애국심을 구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실천적인 사랑은 숭고한 정열을 욕할 뿐 아니라 심원한 이성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본지 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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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2-26
  • 교회의 사회적 책임
      복음이 한국에 처음으로 전해진 지 1세기가 되기까지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이끌었지만,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못하며 오히려 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부분 개인의 영역이나 믿음의 공동체 울타리 안에서 행해지는 종교 의식이나 활동에 국한되고 만다. 사회는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고 사회문제에 대해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임 있는 참여를 하지 않는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실현이다. 이 신앙의 명제를 한국교회는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은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과 아울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개인의 영역에 그치거나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영역까지 확대된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고백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은 창조질서와 분리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구원은 오로지 유아독존만 남는 불교식 수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구원은 그것을 구속하는 것 곧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분야가 자기희생의 사랑이 실천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회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되는 방향, 곧 끊임없이 새롭게 되고 소통하고 연합하며 평화와 정의, 자기희생의 사랑이 실천하고 구성원이 서로 섬기는 개방의 공동체가 되게 변혁시켜가야 한다. 이렇게 진정한 영성은 개인을 넘어 사회로 확대돼야 한다.   예컨대 피어선이 케직사경회에서 강조한 영성은 거룩함과 봉사에 맞춰졌다. 이러한 영성은 알려진 모든 죄를 즉각적이고도 최종적으로 버리는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는 모든 복을 즉시에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한껏 누리는 것이다. 또한 영성은 성령의 인도 아래 참된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영성은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참된 영성은 개인의 회개에서 시작해 사회적 실천으로 나가이웃을 섬기고 사회와 세상을 봉사하는 것이다.   더불어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시급하고 절실한 사회 문제는 부의 양극화, 공동체 정신의 함양, 사람의 기본권이 확립된 사회 제도 마련, 나눔과 섬김의 일상화, 소통과 통합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차원에서 성실하게 감당함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전 평택대 부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2-19
  • 샘터마을요양원 정숙자원장
      뇌졸중으로 쓰러진 모친 간호가 알려져 간호요청 쇄도 믿지 않는 자녀들도 요양원통해 자연스럽게 교회 출석     샘터마을요양원의 정숙자원장(사진)은 1995년부터 동 요양원을 통해 치매노인을 돌보며 섬기고 있다. 정원장은 “12살 때 권사님들 따라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며, “그러던 어느날 기도를 하는데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위해 내 몸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줄 것인지를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어린 나이에도 주님을 위해서 이 몸을 바치겠다고 서언했다”고 고백했다.   어린시절 가난과 투병생활로 인해 고통받던 정원장은 자주 환상을 보았다. 정원장은 “환상 중에 누군가 나에게 작은 마을에 성경책을 전해주라고 말했고, 내가 엉겅퀴가 가득한 산을 넘고 강을 헤엄쳐 건너가 작은 마을에서 성경을 전해주는 모습을 보았다”며, “그 마을의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할머니들이었고, 할머니들은 병마로 고통 받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하시는 할머니들께 성경과 함께 죽을 끓여서 드리니까 할머니들께서 너 때문에 내가 살았다고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계시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 건강이 너무도 안 좋은 상태였기에 정원장은 선뜻 노인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픈 와중에도 신학을 공부하고 선호재목사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정원장은 걷기에도 힘에 부칠정도로 건강과 영양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러던 중 정원장의 모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고, 온전히 누군가의 간호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정원장은 “당시 나는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 그래서 남편이 4년간 우리 어머니 간호를 했다. 매일같이 목욕을 시키고 음식을 먹이고 정성껏 간호를 하니 동네에 효자라 소문이 났고, 각종 언론에서도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며, “그러면서 전국 각지에서 자신도 선목사의 간호를 받고 싶다며 연락이 왔다. 우리 부부는 도저히 다른 사람을 돌볼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내가 평생을 주님께서 주셨던 노인사역에 관한 환상을 외면했기에 하나님께서 어머님을 치셨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렇게 정원장 부부는 한 폐암말기 환자를 집에 들였고, 그에게 당시 고3이었던 외아들의 방을 내어주고 간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 환자의 상태가 호전됐고, 또 다시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더 많은 사람들이 간호를 요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집이 비좁아 많은 이들을 돌볼 수 없었기에 정원장은 대출을 받아 더 큰 집을 월세로 구했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995년 정원장은 정식으로 샘터마을요양원을 설립했고, 요양원에서 돌봄을 받던 대부분의 노인들이 치매환자였기에 동 요양원은 치매전문 요양원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정원장은 월세집을 개조하여 지붕을 유리로 만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이 욕창에 걸리는 것을 예방했고, 이러한 치매환자 돌봄에 관해 미국의 치매전문의가 배워가기도 했다. 또한 매끼 소갈비가 끊이지 않게 하고, 최고로 좋은 옷을 환자들에게 입혔으며 환자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항시 적정온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요양소 곳곳에 꽃을 심어 환자들이 직접 물을 주게 하며 환자들의 정서적 안정을 도왔다.   정원장은 “주위의 오해도 많이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치매환자들에게 너무 과하게 대접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했다”며,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살아가고 있는 치매환자들이 사람답게 살면 왜 안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따듯한 곳에서 꽃과 함께 살 수 있게 돕는 일이 얼마나 보람찬 일인지 그들도 이해했음 좋겠다. 하나님께서도 분명 치매환자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에 같이 기뻐하실 것이라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정원장은 이렇게 치매환자를 무상으로 돌보면 그 가족이 구원된다고 설명했다. 그 자녀들은 부모를 돌보는 일에서 자유로워져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 있고, 또 부모를 돌보는 일로 불화를 겪었던 자녀들도 우애를 되찾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치매환자의 회복을 위해 전념하고 있는 동 요양원은 더욱 많은 환자를 돌보기 위한 건축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600평 부지를 확보한 상태이며 최소 300평 이상의 실버타운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교계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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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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