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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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인간은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지만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론자로 살 것이냐 아니면 무신론자로 살 것이냐 일 것이다. 이는 그의 삶의 질과 영혼의 구원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본주의인 헬레니즘과 신본주의인 헤브라이즘과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던 사람과 불신앙으로 살던 사람과의 차이점은 삶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접할 때마다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지난 냉전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간에는 우주 항공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우주선에 탑승했던 미⋅소 양국의 우주인에게 당국에서 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귀환한 후에 자진하여 신의 존재에 대하여 상반된 진술을 하였다. 즉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대기권 밖에 진입해서 우주여행을 하였던 소련의 가가린은 “여기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 어디를 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그로부터 몇 년 후 아폴로 11호를 타고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였던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은 여행 중에도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지구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했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진술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사상을 평소에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무수하지만 그 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제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해서 주님이 수난당하시기 직전까지 책망을 받던 그들이 예수의 부활과 성령체험을 하면서 불과 40여일 만에 성숙한 영성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하여 선교의 지평을 열어가는 인물로 쓰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존 뉴톤 같은 수많은 탕자를 만인의 숭앙을 받는 성자로 만들어 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 살면서 예배생활과 성경적인 삶과 기도 생활을 중히 여기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이미 천국에서 누릴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활신앙과 성령체험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뤄가기를 바란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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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4-08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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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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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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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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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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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이스라엘에서 배운 교훈
    ▲ 김연준박사  내가 주로 미국과의 민간 외교에 치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의 뜻은 변함이 없었다. 일본·프랑스·독일 등에서 음악 발표회를 한 것이나 각 나라 대학들과 자매 학교 관계를 맺은 것도 결국엔 단순한 예술 교류나 학문 교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1987년 4월에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대학과의 자매 결연을 맺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은 형식상으로는 텔아비브대학과 자매 결연을 맺는 일이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나를 초청하여 겸사겸사로 가게 되었다. 이스라엘에 도착하여 텔아비브대학으로 가기 전에 나는 먼저 라빈 총리를 만나 한 시간가량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무척 많은 것을 얻었다. 나는 이스라엘 총리가 들려 주는 그 나라의 특성에 대하여 경청하면서 우리나라의 실정을 견주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 많았는데, 특히 그 나라 국민의 애국심과 검소한 생활상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그냥 무심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평상시에 우리 국민들이 애국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더 파고든다면 교양과 교육에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라빈 총리의 말을 듣고 또 내가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 국민들에게는 그런 풍조가 거의 없다.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사는 부자 나라인데도 국민 전부가 너무도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학 교수가 25평 이상의 아파트를 가지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25평 이하의 집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나는 국민성이라는 것은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오랜 역사와 전통이 왜 필요한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민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근검 절약하는 정신이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꾸준한 국민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왔다. /본지 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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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4-03
  • 개혁은 빠를수록 좋다
    ▲ 이요셉목사   이 세상은 지금 삶의 자세나 윤리와 도덕은 물론 가장 중요한 가치기준까지도 근본적으로, 그것도 아주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변화가 의미나 목적, 방향도 없는 아주 무가치하고 무질서한 변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변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올바르게 믿음을 지키고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나서 성전을 깨끗케 하셨다.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저주를 받았고, 성전은 없어야 할 것이 있어서 저주를 받았다. 먼저 우리 한국교회는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다 일엽편주와 같은데, 이 세상은 바다와 같아서 예기치 못한 풍랑이 있고, 심한 안개로 시야를 가로막기도 하며, 해초에 걸리고 암초에 부딪치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당하여 실패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 인생이 순항하기 위해서는 배 안에 있는 나침반과 같이 끊임없이 자기위치의 자리로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개혁의 의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게서 이탈된 자신을 예수님에게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위치를 말한다. 또한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 터로 만든 것은 저들의 인간적인 편리주의와 영리주의 때문이었다. 신앙생활은 어떤 편리를 도모하고 이권을 추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중심이 되기 때문에 자신을 부패하게 하고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며 사회를 어둡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새롭게 거듭나도록 철저하게 개혁하자. 그래야 성도로서 자기 위치를 회복하고 교회 또한 하나님의 교회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이 개혁은 빠를수록 좋다. 뿐만 아니라 이 개혁은 생명이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회복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이번 사순절기간에 이러한 개혁의 역사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어가자. /(사)한국교회연합 초대대표회장, 선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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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6
  • 한기총은 공개토론회를 열어야 한다
    2012년 한국기독교총연합과 당시 한국교회연합의 분열 이후 한기총은 ‘이단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다. 지금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를 재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지금의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지난 1월 30일 한기총의 전광훈회장과 한교연의 권태진회장은 회동을 갖고 올해 6월까지 통합하겠다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분열된 연합기관들이 서로 통합하겠다는 ‘합의서’는 그 동안 무수히 봐왔기에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컸지만 ‘그래도 이번에는’하는 기대를 가지고 양 기관의 행보를 지켜봤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한교연은 통합 불발의 이유에 대해 ‘변승우’라는 이름 석 자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한기총이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인사를 받아줬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단논란이 통합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한국교회의 다수가 이단으로 규정하는 문제에 대해 한기총이 ‘아무 문제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에 속하는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설득력이 필요하다. 그냥 ‘내가 보니까 이단이 아니다’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한기총은 ‘다수가 규정한 이단을 풀어주는 단체’라는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더욱 어렵게 된다. 한기총이 공개 토론회를 열기 바란다. 신학적으로 권위 있는 학자들과 함께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인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조사하고 토론해주기를 바란다. 어떤 면에서 이단성이 없는지를 한국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대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설득력과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정당성 없이는 어떤 통합이나 연합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한다.  한기총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맏형’이다. 당연히 한국교회 안에서 맏형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한기총이 공개토론의 자리로 속히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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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3-14
  • 이웃사랑 실천하는 ‘기독교’ 되자
    ▲ 이정익목사 우리는 몇 주전 3·1절 100주년의 역사를 보냈다. 100년 전 우리나라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였고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나라는 빼앗겼고 분명 우리는 내 땅에서 살았건만 주권을 다 빼앗긴 채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고 살았었다. 나라 없는 민족은 비참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초라하고 불행하다. 그럼에도 100년 전 우리 민족은 분연히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를 분명히 표현하였고 자주독립을 외쳤다. 그 용기 있는 자들의 뒤편에는 기독교의 후원이 있었다. 당시 기독교는 천도교나 불교에 비해 역사도 짧았고 교세도 소수였다. 그렇지만 한국 기독교는 작지만 강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한국교회의 교세를 보지 않고 응원하고 신뢰하였고 믿어 주었다. 그것은 당시 기독교가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모습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명성황후의 처참한 죽음으로 한국민족은 자존심이 상하였고 마음의 상처가 컸으며 그럼에도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한국교회는 용기 있게 나서서 성대하게 명성황후의 추모식을 거행하여 주었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 이후 민심이 흉흉할 때 정주지방을 중심으로 악질이 번져갔다. 길거리에 시체들이 나뒹굴었고 자식이 죽어도 전염될까봐 대문밖에 시체를 버리고 관에서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거리의 시체들을 수습하였다. 이 같은 기독교인들의 행동이 우리민족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었고 또한, 용기를 주는 모습들이었다. 그 결과 그 시대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앞장서서 이끌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저항운동에 적극 협력하여 동참하였던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좋은 환경과 풍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교회가 우리사회에 전하는 메시지는 그리 신선하지 못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본질에 아주 충실하였다. 그에 반해. 오늘날은 한국교회가 너무 커졌다. 그리고 힘이 막강하여졌다. 그런데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그리 많은 공감을 얻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가 본질에서 너무 멀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선배들의 신앙과 민족 사랑을 본받아 이웃 사랑실천에 매진할 때라고 생각된다.  /기성 증경총회장, 신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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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3-14
  • 내가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 김상복목사   돈이 있는 사람만이 남에게 돈을 줄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 평화도 있는 사람이 줄 수 있고, 사랑도 있는 사람이 줄 수 있다. 없는 사람이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어려서부터 사랑을 많이 경험하며 성장하는 아이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다르다. 그런 아이들은 흔히 웃기도 잘 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른들에게도 쉽게 접근한다. 그리고 사랑을 쉽게 표현한다. 사랑은 있어야 줄 수 있다. 없는 것을 어떻게 주나? 사랑은 줄수록 많아지고 준 것만이 남는 것이다. 사실상 준 것만이 영원히 나의 것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나? 물론 없다. 남편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는 틀림없이 행복에 굶주릴 가능성이 크다. 자기가 행복한 사람만이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자신의 행복은 대단히 중요하다.  또 이웃에게도 중요하다. 내게 없으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의 것을 뺏어 버리니까 남에게도 위험하다.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행복하면 행복한 나를 주위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을 느낀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행복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 줄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만나면 그 불행한 사람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행복이 먼저다. 기운이 있어야 남의 물건을 들어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어떻게 내가 행복하게 될 수 있나? 행복해질 수 있는 행복의 십계명을 소개한다.  첫째, 걱정을 하지 말라 둘째, 검소하게 살라 셋째, 기대치를 낮추라 넷째, 나누어 주며 살라 다섯째, 노래를 자주 하라 여섯째, 놀이를 즐기라 일곱째, 자신을 잊어버리라 여덟째,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해주라 아홉째, 가슴에 사랑을 가득 채우라 마지막으로 밝은 햇빛을 널리 나눠주라.  어쨌든 우선 내게 행복이 있어야 한다. 내가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웃에게 행복과 사랑을 전해줄 수 있다. 나 자신을 먼저 잘 돌보라.   /횃불트리니티신대원 명예총장,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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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3-10
  • 허심 탄회하게 통일문제 다루자
    ▲ 김연준박사  세계사의 큰 흐름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극복하고 지역적 분쟁과 단절을 극복해내고 있다. 모처럼의 기회를 헛되어 흘려 버려서는 안 된다. 역사 앞에, 민족사 앞에 부끄러운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아 의식을 떨쳐 버리고 통일의 길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남과 북의 당국자들은 이제 허심 탄회한 통일 일념으로 바로 서길 바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통일은 지상 명제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당위적 과제이다. 통일 논의에 어떤 선전, 선동을 위한 술책이나 교언, 영색이 개재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는 명분만 내세우면서 통일을 지연시키려는 반통일적 작태에 불과하다. 이제 대화의 당사자들은 민족사 앞에 정대해야 한다. 둘째, 부수적인 문제들을 내세워 통일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주지하는 대로 남과 북에는 숱한 이질적 요소가 산적해 있다. 국토 분단 이후 상반되는 체제를 오랫 동안 지내 오면서 정치는 물론 각 분야에 있어 너무나 많은 편차가 상존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점들을 빌미삼아 상대 쪽에 요구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는 대화에 임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반통일적 태도이다. 양쪽에 존재하는 이질적 요소와 가치를 인정하고 통일의 길로 나서야만 한다.  셋째, 이제 모든 사회 제도나 문화도 통일 지향적인 데로 바뀌어야 한다. 아는 바와 같이 남과 북은 전쟁 상대자로 3년에 걸친 참담한 체험을 한 사이이다. 이 전쟁으로 수백만이 죽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다치고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상대방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 적개심은 교육·홍보를 통해 증폭돼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적개심을 그대로 남겨 둔 채 통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할 수 없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상대방을 공존, 공영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통일에 대비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남과 북은 모두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도록 교육과 홍보에 나서야 한다. /본지 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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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3-04
  •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관
    ▲ 김국경목사 며칠 전에 지인이 찾아와서 30대 중반인 자신의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축하해 달라고 하면서 청첩장을 건네주고 갔다. 청첩장 뒷면에는 ‘저희 두 사람은 행복한 꽃길만 걷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뜻으로 풀이 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인에 의하면 결혼할 당사자들은 명문대를 나와서 일찍이 대기업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결혼 후 두 사람의 연봉을 합치면 행복한 꽃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꽃가마를 타고 밀월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좋은 환경에서 특수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여건에 놓여있다고 할지라도 ‘행복한 꽃길만 걷겠다’는 표현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자만일 뿐 아니라 실업자나 가난해서 결혼을 미루는 청년들에게는 큰 충격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청년들이 취업을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영업을 하다가 빚만 지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생존경쟁이 치열한 오늘날에는 재벌과 능력자인 부모를 잘 만나야 좋은 대학도 가고 출세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龍)난다는 말을 자주 들을 정도로 가난한집 자녀들의 성공사례가 다반사였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에 다니던 교회에,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이면서 주일이면 교회를 성실하게 섬기는 장로님이 있었다. 그분의 간증에 의하면 당시 그의 가정이 비교적 부요했으나 부친이 아들 삼형제에게 일단 고등학교만 졸업시키고 대학은 너희들이 돈을 벌어가며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약간의 생활비를 주어서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그들 형제는 부친의 권고대로 객지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어 공부를 했고 삼형제가 모두 성공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들을 과잉보호 하면서 유약하게 기르기 때문에 그들이 고난을 당하면 도전 의식 없이 두려워하고 역경을 만나면 쉽게 넘어진다. 독일 속담에 쓴맛을 모르는 자는 단맛도 모른다고 했다. 자신을 위해 꽃길만 걸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보람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성경과 우리의 길 되신 예수님에게서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엠마오영성부흥협의회 대표, 목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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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2-24
  • 3·1절 100주년을 맞으며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나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날이다.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했을 때 온 국민이 스스로 일어나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민족적인 거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가슴을 써늘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3·1절 만세 사건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불타올랐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활화산처럼 일어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더하여 가서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고, 목숨을 잃게 되었으나 창검의 힘으로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열망을 막을 수가 없었다. 3·1절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전국에 산재한 교회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독립운동의 중심에 한국교회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수많은 교인이 투옥되어 형언키 어려운 고초를 당했고, 순교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교인의 수에 있어서나, 교회가 가진 힘은 지극히 연약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당시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력은 너무나도 컸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애국지사와 선각자들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사실은 당시 한국교회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되었던가를 깨달을 수 있다. 세월이 흘러 3·1절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70~80년대를 거쳐 오면서 놀랍게 성장하여 전 세계 교회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교회 수에 있어서나 교인 수에 있어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힘을 잃은 삼손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3·1절 100주년을 맞이했다고 하여 교단마다 기독교 연합단체마다 이러저러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왠지 마음속에 기쁨이 없고, 기대감이 없는 것은 왜일까? 또 행사를 위한 행사나 하고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3·1절 100주년도 이런 모습으로 끝나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크다. 행사를 위한 행사로 끝나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크다. 제발 보여주기식 행사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 날 행사에 누가 설교할 것인지, 누가 중요한 순서를 맡을 것인지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 땅에 복음을 허락하신 하나님 앞과 이 땅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린 순교자들 앞에서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스스로 성찰하고 가슴을 치는 회개를 했으면 좋겠다. 교단마다 교회마다 이런 회개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으면 좋겠다. 3·1절 100주년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과 민족 앞에서 교회다운 모습을 회복하고,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증경총회장, 염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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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2-13
  • 미풍 양속의 전승에 힘쓰자
      문화 생활에 있어서 전승된 유산은 후손의 유익한 재산이다. 풍속이나 관습 같은 것도 수천 년 이래 민족의 생활 속에서 전승된 유산이어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문화재이다. 각종 종교에는 전승에 있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권위로 임하며 또한 민족은 그들 자체의 전승된 유산과 관습이 있어서 하나의 불문율처럼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유구한 과거를 통하여 내려온 선조들이 물려준 미풍 양속이 있다. 그런 것을 함부로 폐기할 수는 없다. 가령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흩어져 살던 자녀들이 고향과 옛집을 찾아 가족이 다 함께 모이는 관습이라든지, 그런 명절에 생존한 집안 어른들을 뵐 뿐 아니라 돌아가신 선조를 추모하고 묘소를 찾아 벌초를 하거나 제사를 드리는 것들은 우리의 인정어린 미풍이 아닐 수 없다. 부모의 자애와 자식의 효도, 형제간의 우애, 부부의 일체애 등은 동양 전통의 가족애적인 윤리이다. 근래 서양에서 서구 문명과 함께 범람한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온 세계에 퍼져 드디어는 동양의 인륜마저 홍수처럼 휩쓸어 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자식된 사람이 자기 부모를 구타하고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를 죽이는 등등의 끔직한 사건까지 보도되는 것은 결국 악덕 개인주의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부부간의 윤리에 있어서도 과도한 부권 제도는 시정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부부간에 위치를 강조하여 생활권을 달리하고 남편에게 급료를 청구하는 등의 처사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이것은 동양의 미덕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륜 중에서도 현세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군신 유의’와 ‘부부 유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신 유의’는 ‘군신’을 ‘관민’으로 하고 관민 간의 ‘의’와 사회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재해석하면 될 것이요, ‘부부 유별’은 부부 불평등이나 남녀 교제 금단을 의미함이 아니라 각기 천부의 소임을 달리함으로써 전체로서의 가정과 사회에 바른 공헌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재천명하면 오늘날에도 부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다듬고 전승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적 유산을 더욱 풍부히 함과 동시에 동양과 나아가서 세계 문화에 새로운 공헌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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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1-30
  • 사랑하게 하소서
    이 세상에 사랑처럼 귀하고 값진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 때문에 웃고 울고, 사랑 때문에 기뻐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사랑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 사랑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사랑 때문에 교차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하다가 큰 화를 당하거나 불행을 자초하기도 한다. 돈이나 물질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죽하면 성경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했겠는가? 돈은 유용하게 잘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사랑의 대상은 절대로 아니다. 몸에 해로운 기호식품을 사랑하다가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미련하기가 짝이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무엇일까?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자연과 세상을 주셨고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을 주신 분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만드시고 섭리하고 우리에게 잘 사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첫째 되는 사랑의 원리이다. 둘째는 이웃사랑이다. 이웃은 남남이 아니다. 우리의 동족이고 더 진하게 말한다면 우리의 가족으로 형제요 자매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웃은 우리의 지체(肢體)라고 말이다. 그런데 다른 것을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해치고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진다고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셋째는 자연사랑이다. 자연사랑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온갖 혜택을 받고 살다가 자연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지난날 사람들은 무차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했다. 그 결과 무서운 재앙이 엄습하고 있다. 넷째가 나라사랑이다. 나라와 조국을 사랑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국립 현충원을 가 보자.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가?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자손들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애국자가 되고 시대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기감 남부연회 전 감독, 하늘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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