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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 감사 또 감사
추수감사절기에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인자한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고,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감사와 우리가 갖고 있는 감사의 개념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얼마큼 받았으니 얼마를 감사한다는 계산이 우리의 감사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 때문에 라는 조건 있는 감사가 아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136:1) 이는 감사의 내용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창조주요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감사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과거에 입었던 은혜를 더듬어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후 이런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해보니 그 은혜를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어 그저 감사가 북받치는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구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감사했다. 불평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하는 것이 몸에 배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불평하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우리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와야 하겠다.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인도하여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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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 같이 실행되지 않은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변주(變奏)한다. 남녀간의 사랑, 즉 에로스적인 사랑을 통하여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창조위임명령을 실행한다. 부모는 본능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녀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은 심각한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친구간의 우정을 통하여 생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다윗과 요나단, 관중과 포숙, 오성과 한음의 우정이 회자되는 이유이다. 모든 사랑의 변주가 고귀하지만 사랑의 영원한 모델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요3:16). 이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3:16)고 사도요한은 강조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행동을 수반한다.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중심성(ego-centrism)’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예수님은 인간의 중심성을 잘 아셨기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말씀하셨다. 사랑의 실천은 중심을 나에서 주님으로, 나에서 이웃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쉬운일이겠는가. 우선권을 이웃에게 두기 전에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마련이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사랑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사랑보다 말이 앞서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신뢰도를 올리는 방법은 사랑의 실천 밖에 없다. 야고보 사도는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사랑은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이지만 사랑의 실천은 감정을 넘어 의지를 동반하는 언어이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최우선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동사다. 자기 중심성을 이웃중심으로 이동시키고 감정을 넘어 의지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크로스로드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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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고 한경직 목사님이 생전에 영락교회 목회사역에서 은퇴 후 남한산성에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을 때, 교계의 중진 목회자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병문안하였다. 이날 교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느 목사님이 “한목사님, 모처럼 이렇게 교계 중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한경직 목사님은 간곡한 어조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풋내기 목사들도 아니고 나름대로 한국교계를 이끌고 있는 유명한 중진 목사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한말은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경종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에게도 지배욕과 명예욕과 소유욕과 이성의 유혹이 항상 따라 다닌다. 목회자는 바울이 교훈함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지능과 학식과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어느 조사기관에 따르면 목사의 신뢰도가 신부, 스님, 교사 그 다음이라고 한다. 목회자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게 살기 위하여 날마다 자신을 죽이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서 나더러 주여 주여 라고 하거나,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마지막 심판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경고하셨다. 사도바울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세전에 택하셔서 이 시대를 위하여 사명자로 쓰시고자 세상에 보내셨다. 스위스의 위대한 사상가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며 하나님이 나를 이 목적에 쓰시겠다고 작정한 그 목적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명자는 오직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 따라 헌신하는 일 외에는 한눈을 팔지 말아야한다. 세상에 빛이요 본이 되어야 할 목회 사명자는 자신의 마음과 언행과 처신 그리고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자신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임과 하나님의 종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장합동선목총회측 총회장·목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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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 박사 어록] 고향사람들에게 받은 영향
칠보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나의 예술적 감각을 촉발시켰다면, 명천 지방 사람들의 남달리 강인한 기질과 뜨거운 교육열도 나의 성격을 형성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방사람들은 무엇보다 남성적 기질이 다분한데, 특히 생활력과 투지와 자주력이 아주 강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삼강의 체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함북지방 사람들의 기질이 대체로 그렇지만 그 중에도 명천 사람들이 가장 끈질기고 억척스럽다고 하여 마치 그 표본처럼 불리었던 것이다. 이런 기질을 갖게 된 원인을 케자면 복잡하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지리적 환경과 그 조건이 이 지방 사람들에게 뜨거운 교육열과 강인한 기질을 갖게 했다고 본다. 말하자면 산간지방의 농도가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다는 얘기이다. 어쨋든 그런 명천 사람들의 투지와 자주 정신이 나의 기질에도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향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고향이 나에게 준 가장 준엄한 영향을 꼽는다면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라는 투철한 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나는 어릴 때 고향의 여러 친지와 선배들로부터 명천출신의 선인들이 벌인 눈부신 항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특히 명천군 아간면을 근거로 하여 전개되었던 끈질긴 항일민족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무척 감동시켰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아도 나아게는 어릴 때 이미 내가 걸아가야 할 인생 행로가 희미하게나마 비춰지고 있었던 듯하다. 이를테면 음악에 대한 흥미라던가.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인자하신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한 것이라든가. 그리고 여기에 명천의 아름다운 산천과 명천인의 투지 넘치는 기질 등에서 받은 영향들이 한데 어우려져 내가 걸어야 할 길에 빛과 소금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육영사업에 투신한 뒤에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내 뜻을 실현할 수 있었던 기초는 어린시절부터 그 윤곽이 잡혀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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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돌보신 예수
구약 오경에는 나그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유난히 많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창 22:21).”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 19:34).” “하나님은 · · ·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신 10:18).”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 19:10).” 왜 나그네를 꼭 집어 사랑하라고 했을까. 당시에 나그네가 많았고, 그들이 기왕의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사회경제적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겁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겁니다. 추수할 때 주울 것을 남겨놓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나그네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겁니다. 신약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한 여러 기적을 전합니다. 유난히 많은 기적이 마태복음 8장 등에 기록한 대로 병자를 낫게 한 기적입니다. 놀라운 신적 기적을 과시하고자 했을까. 그것, 아니라면 왜 고쳐주셨을까. 2천 년 전 위생 조건이 어떠했겠습니까. 아픈 식구가 없는 가정이 없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질병이 실존적 고통이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몸과 주변을 비교적 청결하게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바닥 사람들은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질병 같은 실존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이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을 질병에서 해방해 줍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기적(마 14:15~21등)도 전합니다. 역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왜 그런 기적을 행하셨을까. 당시 보통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쟁여놓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풍부한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세 끼를 때우나. 일용할 최소한의 양식조차 가지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실존적 문제는 배고픔이었습니다. 배고픔과 질병,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였습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는 그랬습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사랑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실존적 고통 중에 있는 이를 거기서 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친히 살아 보이신 사랑입니다. 너를 나와 같은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함께 함입니다. 배제, 차별, 분리를 용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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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의 열매
중학생인 마크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앞서가던 한 학생이 발을 헛딛어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책과 두 벌의 스웨터,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 작은 카세트 등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마크는 얼른 달려가서 그 학생이 물건을 줍는 걸 도와 주었습니다. 마침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학생의 짐을 나눠 들었습니다. 걸어가면서 그 학생의 이름이 빌이라는 것과 비디오게임, 야구와 역사과목을 좋아하며 다른 과목은 점수가 형편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져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 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둘은 학교에서 종종 만나며 점심삭사도 같이 하였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둔 날 빌이 마크의 교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 많은 물건들을 집으로 가지고 갔는지 아니? 그때 난 학교 사물함에서 내 물건들을 전부 꺼내오던 중이었어. 그리고 어머니가 복용하던 수면제를 모아놓았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 그걸 먹고 자살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너와 웃고 대화하는 사이 생각이 달라졌어”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마음, 마크가 그의 일상에 아주 평범하게 행한 행동 하나가 빌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변화의 세계로 인도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일이라는 시간안에서 다른사람과 의미 있거나 없거나 스치며 만나는 일상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소소한 생각들, 행동 하나 하나가 어떤 다른사람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어느 청년의 일기를 통해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뉴스거리가 되는 커다란 사건에는 사람들은 크게 반응 하지만 사소한 일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여운을 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소한 삶의 여운에서 우리들의 따뜻한 사회구성은 이어져 갑니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 잃어버리기 쉬운 사소한 시간들 속에서 따뜻한 미소와 관심이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키며 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편지 발행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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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 감사 또 감사
- 추수감사절기에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인자한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고,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감사와 우리가 갖고 있는 감사의 개념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얼마큼 받았으니 얼마를 감사한다는 계산이 우리의 감사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 때문에 라는 조건 있는 감사가 아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136:1) 이는 감사의 내용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창조주요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감사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과거에 입었던 은혜를 더듬어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후 이런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해보니 그 은혜를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어 그저 감사가 북받치는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구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감사했다. 불평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하는 것이 몸에 배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불평하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우리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와야 하겠다.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인도하여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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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 감사 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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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 같이 실행되지 않은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변주(變奏)한다. 남녀간의 사랑, 즉 에로스적인 사랑을 통하여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창조위임명령을 실행한다. 부모는 본능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녀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은 심각한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친구간의 우정을 통하여 생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다윗과 요나단, 관중과 포숙, 오성과 한음의 우정이 회자되는 이유이다. 모든 사랑의 변주가 고귀하지만 사랑의 영원한 모델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요3:16). 이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3:16)고 사도요한은 강조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행동을 수반한다.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중심성(ego-centrism)’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예수님은 인간의 중심성을 잘 아셨기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말씀하셨다. 사랑의 실천은 중심을 나에서 주님으로, 나에서 이웃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쉬운일이겠는가. 우선권을 이웃에게 두기 전에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마련이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사랑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사랑보다 말이 앞서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신뢰도를 올리는 방법은 사랑의 실천 밖에 없다. 야고보 사도는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사랑은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이지만 사랑의 실천은 감정을 넘어 의지를 동반하는 언어이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최우선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동사다. 자기 중심성을 이웃중심으로 이동시키고 감정을 넘어 의지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크로스로드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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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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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 고 한경직 목사님이 생전에 영락교회 목회사역에서 은퇴 후 남한산성에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을 때, 교계의 중진 목회자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병문안하였다. 이날 교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느 목사님이 “한목사님, 모처럼 이렇게 교계 중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한경직 목사님은 간곡한 어조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풋내기 목사들도 아니고 나름대로 한국교계를 이끌고 있는 유명한 중진 목사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한말은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경종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에게도 지배욕과 명예욕과 소유욕과 이성의 유혹이 항상 따라 다닌다. 목회자는 바울이 교훈함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지능과 학식과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어느 조사기관에 따르면 목사의 신뢰도가 신부, 스님, 교사 그 다음이라고 한다. 목회자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게 살기 위하여 날마다 자신을 죽이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서 나더러 주여 주여 라고 하거나,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마지막 심판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경고하셨다. 사도바울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세전에 택하셔서 이 시대를 위하여 사명자로 쓰시고자 세상에 보내셨다. 스위스의 위대한 사상가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며 하나님이 나를 이 목적에 쓰시겠다고 작정한 그 목적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명자는 오직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 따라 헌신하는 일 외에는 한눈을 팔지 말아야한다. 세상에 빛이요 본이 되어야 할 목회 사명자는 자신의 마음과 언행과 처신 그리고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자신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임과 하나님의 종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장합동선목총회측 총회장·목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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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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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 박사 어록] 고향사람들에게 받은 영향
- 칠보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나의 예술적 감각을 촉발시켰다면, 명천 지방 사람들의 남달리 강인한 기질과 뜨거운 교육열도 나의 성격을 형성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방사람들은 무엇보다 남성적 기질이 다분한데, 특히 생활력과 투지와 자주력이 아주 강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삼강의 체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함북지방 사람들의 기질이 대체로 그렇지만 그 중에도 명천 사람들이 가장 끈질기고 억척스럽다고 하여 마치 그 표본처럼 불리었던 것이다. 이런 기질을 갖게 된 원인을 케자면 복잡하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지리적 환경과 그 조건이 이 지방 사람들에게 뜨거운 교육열과 강인한 기질을 갖게 했다고 본다. 말하자면 산간지방의 농도가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다는 얘기이다. 어쨋든 그런 명천 사람들의 투지와 자주 정신이 나의 기질에도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향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고향이 나에게 준 가장 준엄한 영향을 꼽는다면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라는 투철한 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나는 어릴 때 고향의 여러 친지와 선배들로부터 명천출신의 선인들이 벌인 눈부신 항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특히 명천군 아간면을 근거로 하여 전개되었던 끈질긴 항일민족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무척 감동시켰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아도 나아게는 어릴 때 이미 내가 걸아가야 할 인생 행로가 희미하게나마 비춰지고 있었던 듯하다. 이를테면 음악에 대한 흥미라던가.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인자하신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한 것이라든가. 그리고 여기에 명천의 아름다운 산천과 명천인의 투지 넘치는 기질 등에서 받은 영향들이 한데 어우려져 내가 걸어야 할 길에 빛과 소금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육영사업에 투신한 뒤에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내 뜻을 실현할 수 있었던 기초는 어린시절부터 그 윤곽이 잡혀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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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 박사 어록] 고향사람들에게 받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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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돌보신 예수
- 구약 오경에는 나그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유난히 많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창 22:21).”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 19:34).” “하나님은 · · ·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신 10:18).”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 19:10).” 왜 나그네를 꼭 집어 사랑하라고 했을까. 당시에 나그네가 많았고, 그들이 기왕의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사회경제적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겁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겁니다. 추수할 때 주울 것을 남겨놓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나그네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겁니다. 신약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한 여러 기적을 전합니다. 유난히 많은 기적이 마태복음 8장 등에 기록한 대로 병자를 낫게 한 기적입니다. 놀라운 신적 기적을 과시하고자 했을까. 그것, 아니라면 왜 고쳐주셨을까. 2천 년 전 위생 조건이 어떠했겠습니까. 아픈 식구가 없는 가정이 없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질병이 실존적 고통이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몸과 주변을 비교적 청결하게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바닥 사람들은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질병 같은 실존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이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을 질병에서 해방해 줍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기적(마 14:15~21등)도 전합니다. 역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왜 그런 기적을 행하셨을까. 당시 보통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쟁여놓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풍부한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세 끼를 때우나. 일용할 최소한의 양식조차 가지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실존적 문제는 배고픔이었습니다. 배고픔과 질병,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였습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는 그랬습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사랑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실존적 고통 중에 있는 이를 거기서 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친히 살아 보이신 사랑입니다. 너를 나와 같은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함께 함입니다. 배제, 차별, 분리를 용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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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돌보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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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의 열매
- 중학생인 마크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앞서가던 한 학생이 발을 헛딛어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책과 두 벌의 스웨터,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 작은 카세트 등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마크는 얼른 달려가서 그 학생이 물건을 줍는 걸 도와 주었습니다. 마침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학생의 짐을 나눠 들었습니다. 걸어가면서 그 학생의 이름이 빌이라는 것과 비디오게임, 야구와 역사과목을 좋아하며 다른 과목은 점수가 형편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져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 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둘은 학교에서 종종 만나며 점심삭사도 같이 하였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둔 날 빌이 마크의 교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 많은 물건들을 집으로 가지고 갔는지 아니? 그때 난 학교 사물함에서 내 물건들을 전부 꺼내오던 중이었어. 그리고 어머니가 복용하던 수면제를 모아놓았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 그걸 먹고 자살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너와 웃고 대화하는 사이 생각이 달라졌어”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마음, 마크가 그의 일상에 아주 평범하게 행한 행동 하나가 빌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변화의 세계로 인도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일이라는 시간안에서 다른사람과 의미 있거나 없거나 스치며 만나는 일상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소소한 생각들, 행동 하나 하나가 어떤 다른사람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어느 청년의 일기를 통해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뉴스거리가 되는 커다란 사건에는 사람들은 크게 반응 하지만 사소한 일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여운을 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소한 삶의 여운에서 우리들의 따뜻한 사회구성은 이어져 갑니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 잃어버리기 쉬운 사소한 시간들 속에서 따뜻한 미소와 관심이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키며 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편지 발행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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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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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 하박국이 예언한 시기는 주전 600년경으로 포로 전 유다 왕 요시야가 죽는 때와 겹치는 시기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일으켰던 요시야 왕이 죽게 되자 유다는 점차 국가적인 혼란, 도덕적인 부패, 종교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시야 왕이 죽은 후 유다 백성들이 점점 악해져 가고 망국적인 행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의로운 사람이 핍박당하고 악인들이 득세하고, 잘못된 행동과 주장이 정의를 대신하는 사회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를 징벌하려 행동을 개시한다.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쓰시고자 세운 바벨론 왕국은 무력의 왕국이다. 군마와 무기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그들에게는 도덕이나 윤리가 없다. 오직 힘이 정의이다. 여기에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이미 3000년 동안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지만 힘이 약화되고 있다. 헬라는 도시국가를 형성하면서 이제 점점 인본주의 철학으로 무장하며 제국의 기운을 모아가고 있었다. 로마 역시 절치부심하며 나라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 이 강대한 제국들 가운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다. 이후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정복을 당한다. 유다를 중심으로 제국들이 힘을 겨루는 험난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도 유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다. 이것이 하박국의 눈에는 멸망으로 가는 자신들의 운명으로 보였다. 국가와 사회는 모두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간다. 우리시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 지혜롭다고 한다. 어떻게든 돈을 많이 모아야 성공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으면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유치한 행동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그래야 산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다시 부흥하는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익산 동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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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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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슬퍼하며 기도합시다
- 이태원 압사사고로 귀한 생명을 잃어버린 일이 일어났다.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들이다. 상상할 수 없는 참상 앞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들 대부분이 10대, 20대의 우리 자녀들이라고 한다. 아침에 집에서 나갔다고 했는데 밤에 비보를 들은 가정들은 청천벼락을 맞은 것이다. 어떤 말로 위로하며 아픔을 대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함께 슬퍼할 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낸다. 대부분의 피해자인 그들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만남도 있고 위로도 필요하며 쉼과 놀이도 누려야 했기에 그 공간을 빌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곳이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공간이 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비극의 자리에 슬퍼할 뿐이다 . 슬픔과 애도의 자리에서 교회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생명을 주는 진리인데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느냐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이 사회를 건강한 문화로 이끌고 섬겼느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피해자인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꿈과 비전을 심어주어 다음세대를 주안에서 미래세대로 세웠느냐는 것이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붙잡아야 한다. 샬롬부흥의 직분자로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한다. 함께 슬퍼하며 기도하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린도후서 1:4~7)”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예장 합동측 총회장 · 주다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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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슬퍼하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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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꼭 필요한 인생을 살자
-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인생(人生)과 인간(人間)은 그 의미가 다르게 쓰인다. 인생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란 것이고, 인간이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란 말이다. 사람을 두고 쓰는 이 두 말은 사람에게 가장 값지고 엄숙한 말이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는 사람의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에는 저마다 목적이 있는 것이기에 엄숙하고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서로를 위해 사랑을 실천하면서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일생이라야 한다고,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요 수필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곤충에 비유하여 인간의 세 종류를 말하였다. 그는 첫째의 인간으로 거미처럼 인생을 사는 인간이 있다고 한다. 거미는 그늘진 곳에 거미줄을 쳐놓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생명이 걸리면 슬그머니 나와서 피를 빨아먹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을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그는 또 두 번째의 인간으로 개미형의 인생을 사는 사람을 지적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조직력도 강하지만 누구에게 유익을 주거나 헌신함 없이 오직 자기들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엔 공동체 정신없이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이웃에게 유익도 끼치지 않고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음을 꼬집었다. 베이컨은 세 번째로 꿀벌형의 인생을 사는,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꿀벌은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조직력이 매우 강하다. 그런데 꿀벌은 질서있게 활동하여 많은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상당한 꿀을 생산해주는 이타주의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타입의 인생을 사는 인간들을 곤충에 비유한 프란시스 베이컨은 거미형의 인간은 이 세상에 있어선 아니 될 사람이라 했고, 개미형의 인간을 가리키면서 그런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되는, 즉 있으나 마나한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세상, 사회 곳곳에 꼭 필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꿀벌과 같은 인간이라고 칭찬했다. 없어선 아니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인생철학이 뚜렷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인간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철학자 룻소가 말했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 살 수 없다. 구경꾼처럼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하여 귀한 생명의 존엄을 꼭 인식하고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는 멋진 인간이 돼야 한다. /경천교회 원로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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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꼭 필요한 인생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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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와의 동행
- 요즘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얼마나 좋은 말이면 정치인들이 너나없이 애용하는 구호가 될 정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말도 결국은 약자와의 동행으로 귀결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이라는 행위도 마지막에는 약자와의 동행에 이르게 된다. 약자와의 동행은 동물에게는 없는 우리 인간만이 가진 고귀한 가치이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덕목이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도 약자에게 기울일 때 귀한 것이 된다. 약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강자를 사랑하면 아부가 된다.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애정어린 관심이 되지만 강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자기 욕심의 성취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고귀하고 가치있는 약자와의 동행이라고 해도 그것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나 구호에 머물거나 유명인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한낱 화려하고 현란한 언어의 유희에 그칠 뿐이다. 행동화, 실천화가 안되면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바로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이다. 목사님들이 설교예화로 즐겨 사용하는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눈덮인 산고갯길을 친구와 함께 넘다가 추위에 얼어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친구는 어차피 살기 어려우니 그냥 지나쳐가자고 했고 썬 다싱은 그래도 같이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다. 의견이 맞지 않아 친구는 홀로 먼저 떠났고 썬다 싱은 그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고갯길을 넘는다. 땀과 열기가 등에 업힌 사람에게 전해져 마침내 살아나게 된다. 함께 눈보라 산길을 넘던 두 사람은 추위에 이미 얼어 죽은 또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앞서 먼저 떠났던 그 친구였다. 약자와의 동행은 약자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내가 사는 길이다. 아니 모두 함께 사는 길이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쉬운 말로 하면 이 땅의 약자와 동행하기기 위해서 오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종교적 약자, 경제적 약자, 육체적 약자,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약자를 위해 오셨고 그들을 위해 살다가 그 약자들에게 생명까지 주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곧 약자와의 동행을 의미하며 그 약자를 위한 사랑이 행동화한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행동으로 표출되는 약자와의 동행이 단순히 사회복지라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넘쳐나기를 소망해본다./기독교한국루터회 전임총회장·베델성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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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와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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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 자체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의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가 깨지면 행복은 없다. 우리가 폭력을 증오하고 전쟁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도 평화가 해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인간이 추구해 온 낙원 그것은 바로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끊임없이 수양하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다. 옳지 않은 길을 갈 때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평화라는 낙원을 만들기는 쉽지 않고 인간 사회 속에서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는 잠잠하고자 하나 바람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다.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해하며 원치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상황에 갈등하고, 피를 나눈 가족간에도 서로간의 상처로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혼자 산다면 이런 갈등들과 만나지 않을 테지만 인간인 이상 혼자 살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숱한 선택과 갈등의 상황들을 해쳐나가 마음의 참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을 보면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는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게 부모의 마음을 찌른다”란 구절이 나온다. 감사가 없이는 모든 것이 해가 된다는 말이다. 행복의 기본은 감사이다.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감사하는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커다란 문제일지라도 그것의 비중은 아주 작아지고 만다. 예를 들어보면 한밤중에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가 나에게 칼을 들이대며 위협해 지갑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하자.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강도에게 지갑만 뺏기고 목숨이 온전한 것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저렇게 다 잘 사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힘든 상황과 억울한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습관처럼 가지려고 노력해 보자. /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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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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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속일 수 없다.
- 수해지역은 일년내 복구하고 다음해 또 물난리를 만난다. 수재민돕기 성금보다, 수해대비 성금을 잊어버리고 당한다. 참으로 인간은 어리석은가. 그런데 긴 장마철인데 뜨겁게 태양 마저 내려 쪼이는 날이다. 올 여름 무더위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으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인데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나는 좀 짜증스럽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철면피라니 인면수심(人面獸心)이나 하는 말을 하게 된다. 맹자는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는 척도로써 사람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진 마음 곧 ‘인(仁)’이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창피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의로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랑하는 마음과 남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예가 있기 때문이다. 또 시비(是非)를 가릴 줄 아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까닭이라 했다. 이러한 희미를 가진 인의예지의 인생을 최대로 실현하는 것을 맹자는 ‘군자도’라고 했다. 이 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직이란 대인관계에 있어서 솔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기에 대해서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요, 남의 눈과 남의 마음을 속이려면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을 속일 수 없다. 무엇을 하든 자신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8절에는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한다. 사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남이 숨겨진 내 마음을 모르니, 속일 수도 있지만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기상대의 일기예보가 오보인가 아니면 하늘이 사람을 속이는가. 이 시대 사람들처럼 비가 오락가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직한 사회 같은데 어찌 보면 전부가 다 거짓말이고 속이는 세상이 되었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사람이 악한 꾀를 부리면 더 악해지고 솔직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도태된다. 정직한 사랑을 가진 자 만이 승리할 수 있다./엘림교회 목사·예장 개혁 혁신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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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속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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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를 묻는다
-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예배의 정상화를 묻곤 한다. 회복 여부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른 느낌이 들어 조심스럽다. 물론 모든 교회는 빠르면 부활주일부터 시작해 일제히 예배시간을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려 복귀하였다.물론 예배형식은 여전히 팬데믹 시절의 방식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방역당국은 5월부터 예배인원을 제한하지 않으며, 음식도 허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코로나19 상황변화에 따라 뉴노멀을 적용하는 것은 때 이른 듯하다. 예를 들어 아직 애찬을 나누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데, 지극히 조심스런 까닭은 안전에 대한 신중함이 아니었다. 지난 2년 이상 긴 휴지기가 교회의 주방봉사자들을 음식준비에 소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사실 누구나 코로나 탓으로 돌리지만, 교회 안팎에서 자발적 봉사는 점점 쉽지 않은 일이다. 감염병 상황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일찌감치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은 교회가 부인하고 싶은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실토하게 했을 뿐이다. 대형교회든 중소교회든 상가교회든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임기응변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돌아보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 종교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참으로 무기력하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당국의 일방적 통제에 순종 또는 미세하게 반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특히 재난 중에도 기존 예배형식에 집착했던 일부 교회의 행태는 사회적 비난을 불러왔다. 이 역시 초조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교회는 ‘위드 코로나’를 말하지만, 방역당국은 ‘단계적 일상회복’을 주장한다. 이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한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이후를 맞아 어떤 ‘뉴 노멀’을 만들어 갈 것인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다.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버릴 것과 지킬 것을 분별하여 변화와 개혁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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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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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의 현대적 의미
- 6월은 보훈의 달이며 특별히 6.25 한국전쟁을 상기하는 달이다. 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남침하여 3년 1개월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큰 전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 6.25전쟁은 인구 대이동이었다. 북한 사람이 1.4 후퇴 때 남으로 피난 오고 서울 사람이 시골로 이동했다. 서울의 영락교회는 피난민이 세운 교회이다. 남한에서는 전쟁을 피하여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난하고 보니 가족과 씨족사회의 붕괴로 청년들과 부녀자들이 자유롭게 교회 출석하게 되어 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한국전쟁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라 했다. 한국은 값없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이때 38선 이북은 김일성이 공산 독재로 다스리고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로 입국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북한은 일제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김일성 삼부자의 세습 독재로 일제시대보다 더 낙후된 국가로 전락했고 남한은 1953년 전쟁 후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현재 국민소득 3만불이 넘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것은 말세 하나님이 한국을 쓰시기 위해 위기 때마다 기회를 주신 것이다. 셋째, 한국은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나라로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초림(初臨)의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에 탄생하시어 인류구원을 이루셨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눅13:34-35). 재림(再臨)의 예수는 열매 맺는 나라를 선택한다 했는데(마21:43) 한국은 짧은 기간에 한국 인구의 사분지 일인 일천만 명을 신자화 했고 순교의 피를 흘린 나라이기에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자격이 있는 나라로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음을 믿는다. 결론적으로 코로나19와 오미크론 펜데믹으로 교회가 위축되어 있으나 사명이 있기에 불원 간에 한국의 헌법으로 남북통일도 있을 것이며 교회는 큰 부흥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재림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해야 할 섭리가 있음을 알고 성령충만으로 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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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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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의 현대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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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보배
- 세상의 보석들에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빛이 있다. 영롱하고 찬란한 그 빛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소유한다고 해서 배가 부른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보석들을 긁어 모으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보석의 아름다운 광채는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흐려놓기도 한다. 본래 아름다움에는 독이 있는 법이고 그 독은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탐스러운 꽃을 보면 꺽어서 내 방에 놓아두고 싶어지고, 기름진 음식을 보면 내 배 안에 채우고 싶어지고 또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진다. 이렇듯 모든 욕망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눈에서 시작된 욕망은 순식간에 마음으로 전달되고 마음은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탐욕으로 채워진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망은 보여지는 이 보석으로만 치닫고 혹여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보석을 숨기느라 여념이 없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려던 첫 마음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보석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내 정신과 육신을 포박하는 이런 보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석이 있다. 그것은 썩지도 누가 훔쳐가지도 않으며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천만금을 준대도 팔수 없는 그런 보석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보석이 돈이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외면하며, 눈에 보이는 보석들만을 쫒으며 자신의 지위와 명예, 권위를 위해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이는 바로 세상의 가치관만을 추구하는 인생들을 뜻한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이 숱한 보석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천년만년 살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진시황제도,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호걸들도 하늘이 부르면 자신의 수명을 단 하루도 거스르지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함에 초조해 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들을 말끔히 씻어줄 보석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주님은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시며 영원한 보물을 얻고 싶으면 주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자. 그리하면 이 세상 모든 불안과 초조, 공포에서 해방되고 영원히 썩지 않는 내 영혼의 가장 귀한 보석을 우리 모두 소유하게 될 것이다./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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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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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동행
- 오늘날 한국교회는 역사상 가장 큰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휘몰아치는 세속화와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수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고, 예배는 심각한 수준으로 축소되어버렸습니다. 교회마다 부모의 신앙을 이어갈 다음 세대들이 없어서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전도의 문도 닫히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참담하고,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은 교회에 있음을 믿습니다. 교회만이 이 시대의 해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회복됨으로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움츠리고 있던 신앙적 활동이 모두 정상화되고, 기도의 자리를 통해 이 땅의 모든 성도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오르기를 기대합니다.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2년 1개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직 기도만이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것은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는 일이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이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8개 지역과 163개 노회에서 90% 이상의 적극적인 참여로 ‘은혜로운동행기도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기도운동을 통하여 주의 종들의 식었던 가슴이 다시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은혜로운동행기도회’는 대장정의 막을 내렸지만, 오늘 우리는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우리 총회의 아름다운 전통인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통해 이제는 전국 노회 산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로 기도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신앙의 활동이 멈춰버리는 일을 그저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사명의 날이 더 날카롭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얼어붙었던 우리의 심령이 복음의 열정으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는 은혜로운 동행이 시작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제59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 기도의 불길을 재점화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애써주신 총회 임원들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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