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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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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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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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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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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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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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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하박국이 예언한 시기는 주전 600년경으로 포로 전 유다 왕 요시야가 죽는 때와 겹치는 시기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일으켰던 요시야 왕이 죽게 되자 유다는 점차 국가적인 혼란, 도덕적인 부패, 종교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시야 왕이 죽은 후 유다 백성들이 점점 악해져 가고 망국적인 행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의로운 사람이 핍박당하고 악인들이 득세하고, 잘못된 행동과 주장이 정의를 대신하는 사회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를 징벌하려 행동을 개시한다.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쓰시고자 세운 바벨론 왕국은 무력의 왕국이다. 군마와 무기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그들에게는 도덕이나 윤리가 없다. 오직 힘이 정의이다. 여기에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이미 3000년 동안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지만 힘이 약화되고 있다.   헬라는 도시국가를 형성하면서 이제 점점 인본주의 철학으로 무장하며 제국의 기운을 모아가고 있었다. 로마 역시 절치부심하며 나라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 이 강대한 제국들 가운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다. 이후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정복을 당한다.   유다를 중심으로 제국들이 힘을 겨루는 험난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도 유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다. 이것이 하박국의 눈에는 멸망으로 가는 자신들의 운명으로 보였다.   국가와 사회는 모두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간다. 우리시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 지혜롭다고 한다. 어떻게든 돈을 많이 모아야 성공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으면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유치한 행동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그래야 산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다시 부흥하는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익산 동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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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11-14
  • 함께 슬퍼하며 기도합시다
        이태원 압사사고로 귀한 생명을 잃어버린 일이 일어났다.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들이다. 상상할 수 없는 참상 앞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들 대부분이 10대, 20대의 우리 자녀들이라고 한다. 아침에 집에서 나갔다고 했는데 밤에 비보를 들은 가정들은 청천벼락을 맞은 것이다. 어떤 말로 위로하며 아픔을 대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함께 슬퍼할 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낸다.    대부분의 피해자인 그들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만남도 있고 위로도 필요하며 쉼과 놀이도 누려야 했기에 그 공간을 빌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곳이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공간이 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비극의 자리에 슬퍼할 뿐이다 . 슬픔과 애도의 자리에서 교회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생명을 주는 진리인데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느냐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이 사회를 건강한 문화로 이끌고 섬겼느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피해자인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꿈과 비전을 심어주어 다음세대를 주안에서 미래세대로 세웠느냐는 것이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붙잡아야 한다. 샬롬부흥의 직분자로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한다. 함께 슬퍼하며 기도하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린도후서 1:4~7)”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예장 합동측 총회장 · 주다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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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11-14
  • [사랑의실천] 꼭 필요한 인생을 살자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인생(人生)과 인간(人間)은 그 의미가 다르게 쓰인다. 인생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란 것이고, 인간이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란 말이다.   사람을 두고 쓰는 이 두 말은 사람에게 가장 값지고 엄숙한 말이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는 사람의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에는 저마다 목적이 있는 것이기에 엄숙하고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서로를 위해 사랑을 실천하면서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일생이라야 한다고,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요 수필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곤충에 비유하여 인간의 세 종류를 말하였다.   그는 첫째의 인간으로 거미처럼 인생을 사는 인간이 있다고 한다. 거미는 그늘진 곳에 거미줄을 쳐놓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생명이 걸리면 슬그머니 나와서 피를 빨아먹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을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그는 또 두 번째의 인간으로 개미형의 인생을 사는 사람을 지적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조직력도 강하지만 누구에게 유익을 주거나 헌신함 없이 오직 자기들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엔 공동체 정신없이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이웃에게 유익도 끼치지 않고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음을 꼬집었다.   베이컨은 세 번째로 꿀벌형의 인생을 사는,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꿀벌은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조직력이 매우 강하다. 그런데 꿀벌은 질서있게 활동하여 많은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상당한 꿀을 생산해주는 이타주의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타입의 인생을 사는 인간들을 곤충에 비유한 프란시스 베이컨은 거미형의 인간은 이 세상에 있어선 아니 될 사람이라 했고, 개미형의 인간을 가리키면서 그런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되는, 즉 있으나 마나한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세상, 사회 곳곳에 꼭 필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꿀벌과 같은 인간이라고 칭찬했다. 없어선 아니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인생철학이 뚜렷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인간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철학자 룻소가 말했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 살 수 없다. 구경꾼처럼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하여 귀한 생명의 존엄을 꼭 인식하고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는 멋진 인간이 돼야 한다. /경천교회 원로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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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9-30
  • 약자와의 동행
      요즘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얼마나 좋은 말이면 정치인들이 너나없이 애용하는 구호가 될 정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말도 결국은 약자와의 동행으로 귀결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이라는 행위도 마지막에는 약자와의 동행에 이르게 된다. 약자와의 동행은 동물에게는 없는 우리 인간만이 가진 고귀한 가치이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덕목이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도 약자에게 기울일 때 귀한 것이 된다. 약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강자를 사랑하면 아부가 된다.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애정어린 관심이 되지만 강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자기 욕심의 성취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고귀하고 가치있는 약자와의 동행이라고 해도 그것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나 구호에 머물거나 유명인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한낱 화려하고 현란한 언어의 유희에 그칠 뿐이다. 행동화, 실천화가 안되면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바로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이다.   목사님들이 설교예화로 즐겨 사용하는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눈덮인 산고갯길을 친구와 함께 넘다가 추위에 얼어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친구는 어차피 살기 어려우니 그냥 지나쳐가자고 했고 썬 다싱은 그래도 같이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다. 의견이 맞지 않아 친구는 홀로 먼저 떠났고 썬다 싱은 그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고갯길을 넘는다. 땀과 열기가 등에 업힌 사람에게 전해져 마침내 살아나게 된다. 함께 눈보라 산길을 넘던 두 사람은 추위에 이미 얼어 죽은 또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앞서 먼저 떠났던 그 친구였다. 약자와의 동행은 약자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내가 사는 길이다. 아니 모두 함께 사는 길이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쉬운 말로 하면 이 땅의 약자와 동행하기기 위해서 오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종교적 약자, 경제적 약자, 육체적 약자,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약자를 위해 오셨고 그들을 위해 살다가 그 약자들에게 생명까지 주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곧 약자와의 동행을 의미하며 그 약자를 위한 사랑이 행동화한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행동으로 표출되는 약자와의 동행이 단순히 사회복지라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넘쳐나기를 소망해본다./기독교한국루터회 전임총회장·베델성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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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9-15
  • 행복의 조건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 자체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의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가 깨지면 행복은 없다. 우리가 폭력을 증오하고 전쟁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도 평화가 해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인간이 추구해 온 낙원 그것은 바로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끊임없이 수양하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다. 옳지 않은 길을 갈 때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평화라는 낙원을 만들기는 쉽지 않고 인간 사회 속에서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는 잠잠하고자 하나 바람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다.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해하며 원치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상황에 갈등하고, 피를 나눈 가족간에도 서로간의 상처로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혼자 산다면 이런 갈등들과 만나지 않을 테지만 인간인 이상 혼자 살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숱한 선택과 갈등의 상황들을 해쳐나가 마음의 참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을 보면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는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게 부모의 마음을 찌른다”란 구절이 나온다. 감사가 없이는 모든 것이 해가 된다는 말이다.   행복의 기본은 감사이다.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감사하는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커다란 문제일지라도 그것의 비중은 아주 작아지고 만다. 예를 들어보면 한밤중에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가 나에게 칼을 들이대며 위협해 지갑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하자.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강도에게 지갑만 뺏기고 목숨이 온전한 것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저렇게 다 잘 사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힘든 상황과 억울한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습관처럼 가지려고 노력해 보자.  /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8-23
  •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수해지역은 일년내 복구하고 다음해 또 물난리를 만난다. 수재민돕기 성금보다, 수해대비 성금을 잊어버리고 당한다. 참으로 인간은 어리석은가. 그런데 긴 장마철인데 뜨겁게 태양 마저 내려 쪼이는 날이다. 올 여름 무더위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으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인데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나는 좀 짜증스럽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철면피라니 인면수심(人面獸心)이나 하는 말을 하게 된다.   맹자는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는 척도로써 사람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진 마음 곧 ‘인(仁)’이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창피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의로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랑하는 마음과 남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예가 있기 때문이다. 또 시비(是非)를 가릴 줄 아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까닭이라 했다. 이러한 희미를 가진 인의예지의 인생을 최대로 실현하는 것을 맹자는 ‘군자도’라고 했다.   이 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직이란 대인관계에 있어서 솔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기에 대해서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요, 남의 눈과 남의 마음을 속이려면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을 속일 수 없다. 무엇을 하든 자신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8절에는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한다. 사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남이 숨겨진 내 마음을 모르니, 속일 수도 있지만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기상대의 일기예보가 오보인가 아니면 하늘이 사람을 속이는가. 이 시대 사람들처럼 비가 오락가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직한 사회 같은데 어찌 보면 전부가 다 거짓말이고 속이는 세상이 되었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사람이 악한 꾀를 부리면 더 악해지고 솔직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도태된다. 정직한 사랑을 가진 자 만이 승리할 수 있다./엘림교회 목사·예장 개혁 혁신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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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8-08
  • 코로나19 이후를 묻는다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예배의 정상화를 묻곤 한다. 회복 여부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른 느낌이 들어 조심스럽다. 물론 모든 교회는 빠르면 부활주일부터 시작해 일제히 예배시간을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려 복귀하였다.물론 예배형식은 여전히 팬데믹 시절의 방식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방역당국은 5월부터 예배인원을 제한하지 않으며, 음식도 허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코로나19 상황변화에 따라 뉴노멀을 적용하는 것은 때 이른 듯하다. 예를 들어 아직 애찬을 나누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데, 지극히 조심스런 까닭은 안전에 대한 신중함이 아니었다. 지난 2년 이상 긴 휴지기가 교회의 주방봉사자들을 음식준비에 소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사실 누구나 코로나 탓으로 돌리지만, 교회 안팎에서 자발적 봉사는 점점 쉽지 않은 일이다. 감염병 상황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일찌감치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은 교회가 부인하고 싶은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실토하게 했을 뿐이다. 대형교회든 중소교회든 상가교회든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임기응변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돌아보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 종교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참으로 무기력하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당국의 일방적 통제에 순종 또는 미세하게 반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특히 재난 중에도 기존 예배형식에 집착했던 일부 교회의 행태는 사회적 비난을 불러왔다. 이 역시 초조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교회는 ‘위드 코로나’를 말하지만, 방역당국은 ‘단계적 일상회복’을 주장한다. 이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한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이후를 맞아 어떤 ‘뉴 노멀’을 만들어 갈 것인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다.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버릴 것과 지킬 것을 분별하여 변화와 개혁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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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7-04
  • 6.25 한국전쟁의 현대적 의미
      6월은 보훈의 달이며 특별히 6.25 한국전쟁을 상기하는 달이다. 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남침하여 3년 1개월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큰 전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 6.25전쟁은 인구 대이동이었다. 북한 사람이 1.4 후퇴 때 남으로 피난 오고 서울 사람이 시골로 이동했다. 서울의 영락교회는 피난민이 세운 교회이다. 남한에서는 전쟁을 피하여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난하고 보니 가족과 씨족사회의 붕괴로 청년들과 부녀자들이 자유롭게 교회 출석하게 되어 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한국전쟁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라 했다. 한국은 값없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이때 38선 이북은 김일성이 공산 독재로 다스리고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로 입국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북한은 일제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김일성 삼부자의 세습 독재로 일제시대보다 더 낙후된 국가로 전락했고 남한은 1953년 전쟁 후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현재 국민소득 3만불이 넘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것은 말세 하나님이 한국을 쓰시기 위해 위기 때마다 기회를 주신 것이다.   셋째, 한국은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나라로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초림(初臨)의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에 탄생하시어 인류구원을 이루셨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눅13:34-35). 재림(再臨)의 예수는 열매 맺는 나라를 선택한다 했는데(마21:43) 한국은 짧은 기간에 한국 인구의 사분지 일인 일천만 명을 신자화 했고 순교의 피를 흘린 나라이기에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자격이 있는 나라로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음을 믿는다.       결론적으로 코로나19와 오미크론 펜데믹으로 교회가 위축되어 있으나 사명이 있기에 불원 간에 한국의 헌법으로 남북통일도 있을 것이며 교회는 큰 부흥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재림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해야 할 섭리가 있음을 알고 성령충만으로 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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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6-14
  • 인생의 보배
        세상의 보석들에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빛이 있다. 영롱하고 찬란한 그 빛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소유한다고 해서 배가 부른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보석들을 긁어 모으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보석의 아름다운 광채는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흐려놓기도 한다. 본래 아름다움에는 독이 있는 법이고 그 독은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탐스러운 꽃을 보면 꺽어서 내 방에 놓아두고 싶어지고, 기름진 음식을 보면 내 배 안에 채우고 싶어지고 또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진다.   이렇듯 모든 욕망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눈에서 시작된 욕망은 순식간에 마음으로 전달되고 마음은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탐욕으로 채워진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망은 보여지는 이 보석으로만 치닫고 혹여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보석을 숨기느라 여념이 없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려던 첫 마음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보석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내 정신과 육신을 포박하는 이런 보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석이 있다. 그것은 썩지도 누가 훔쳐가지도 않으며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천만금을 준대도 팔수 없는 그런 보석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보석이 돈이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외면하며, 눈에 보이는 보석들만을 쫒으며 자신의 지위와 명예, 권위를 위해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이는 바로 세상의 가치관만을 추구하는 인생들을 뜻한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이 숱한 보석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천년만년 살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진시황제도,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호걸들도 하늘이 부르면 자신의 수명을 단 하루도 거스르지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함에 초조해 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들을 말끔히 씻어줄 보석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주님은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시며 영원한 보물을 얻고 싶으면 주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자. 그리하면 이 세상 모든 불안과 초조, 공포에서 해방되고 영원히 썩지 않는 내 영혼의 가장 귀한 보석을 우리 모두 소유하게 될 것이다./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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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6-06
  • 은혜로운 동행
      오늘날 한국교회는 역사상 가장 큰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휘몰아치는 세속화와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수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고, 예배는 심각한 수준으로 축소되어버렸습니다. 교회마다 부모의 신앙을 이어갈 다음 세대들이 없어서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전도의 문도 닫히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참담하고,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은 교회에 있음을 믿습니다. 교회만이 이 시대의 해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회복됨으로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움츠리고 있던 신앙적 활동이 모두 정상화되고, 기도의 자리를 통해 이 땅의 모든 성도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오르기를 기대합니다.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2년 1개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직 기도만이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것은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는 일이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이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8개 지역과 163개 노회에서 90% 이상의 적극적인 참여로 ‘은혜로운동행기도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기도운동을 통하여 주의 종들의 식었던 가슴이 다시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은혜로운동행기도회’는 대장정의 막을 내렸지만, 오늘 우리는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우리 총회의 아름다운 전통인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통해 이제는 전국 노회 산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로 기도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신앙의 활동이 멈춰버리는 일을 그저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사명의 날이 더 날카롭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얼어붙었던 우리의 심령이 복음의 열정으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는 은혜로운 동행이 시작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제59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 기도의 불길을 재점화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애써주신 총회 임원들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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