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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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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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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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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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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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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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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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복음이 전해진 이후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큰 부흥을 이루었다.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의료, 교육, 복지 등 사회 전반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중병에 걸린 것처럼 신음하고 있다. 하나의 교회로 시작한 장로교단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300개가 넘는 현실이고, 성경의 진리와 권위를 부정하는 세속의 공격에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분오열되는 상황이다. 강단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선포가 사라지고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만 넘쳐나고 있다.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는 성도의 지식을 채워주고 마음에 평안을 줄 수는 있지만 영혼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쇠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신학의 사변화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서구 기독교의 몰락과 맥을 같이 한다. 서구교회와 한국교회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는 신학이 지나치게 사변화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학이 성경에서 떠난 것, 마지막으로 신학이 지적인 학문의 틀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철학의 한 분야로 발달한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 경험으로 하나님을 연구하고자 했다.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시며 영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지식의 틀에 가두고자 한 것이다. 철학의 방법론으로 하나님을 연구하다보니 성경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쪼개고 나누어 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신학이 발달하고 신학자들이 많아질수록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교회 역시 1980년 MDiv. 정규학위 과정이 처음 시작되면서 서구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대거 유입됐고, 서구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이식했다. 신학자 자신이 배운 학문적인 성과만 주입하는 교육에 급급했다. 그 결과, 신학은 사변화되고 성경의 권위는 무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영이신 하나님을 학문의 틀에 가둘 수 없다. 성경 66권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학의 목적과 방법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데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로만 들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심령으로, 온 마음과 인격을 다해서 들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신학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 참된 신학을 통하여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려내야 한다. 결과적으로 신학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으로서의 신학을 회복해야 한다.    / 예장 백석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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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9
  • 현대 추수감사절 열매
      추수감사절이다. 지난 11월 11일에 CBS 생명돌봄 국민운동 캠프 출범식이 있었다. CBS 김학중 이사장이 인사를 했고, 이영훈 목사가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인사말을 했다.    그 내용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인구 열매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인구절벽이라는 대재앙을 어떻게 물리치고 집집마다, 동네마다 아이들이 울고 웃는 소리가 가득한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이 일에 CBS가 패스파인더가 되어 주고 출산 운동을 위한 허들링의 역할을 해 줘 감사하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정부에서 한국교회에 몇 조만 지원해 주었더라면 0.84라는 재앙은 면했을 것이라고 본다. 목회하면서 아이들을 한 명 더 낳으면 유모차를 사준다고 해도 유모차를 받으려고 애를 낳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4명을 낳으면 성지순례를 보내준다고 했더니 3명 난 사람이 성지순례 가서 애 하나 베어오겠다고 해서 보내준 적도 있다. 교회는 이렇게 즉각 효과를 보는 곳이다. 또, CBS에 몇 조만 지원해 줬다면, 지금 시골이건 도시건 애들 우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가득하고 전혀 새로운 베이비부머 시대를 열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제라도 CBS가 팔을 걷어붙이고 한국교회와 함께 생명돌봄 국민운동을 하게 되어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구재앙이라는 광야에 서 있을지라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선도적 길을 손을 잡고 함께 간다면 생명 경시와 죽음의 진혼곡, 레퀴엠을 물리칠 수 있. 생명의 탄생이라는 아리아와 생명의 녹색 심포니가 조국 땅에 가득가득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조국 땅에 생육과 번성의 푸른 젖줄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푸르고 푸른 길, 아름다운 생명의 꽃길을 CBS가 앞장서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드린다. 한국교회도 더 출산운동에 앞장서겠다.   정말 우리나라는 인구절벽으로 큰 재앙을 맞고 있다. 이럴 때 우리 젊은 친구들이 동성애 보다 이성애의 축복을 알고 다 결혼해서 출산운동에 앞장서기 바란다.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 새에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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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1-24
  • [추수감사절 메시지] 현대 추수감사절 열매
    추수감사절이다. 지난 11월 11일에 CBS 생명돌봄 국민운동 캠프 출범식이 있었다. CBS 김학중 이사장이 인사를 했고, 이영훈 목사가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인사말을 했다.    그 내용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인구 열매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인구절벽이라는 대재앙을 어떻게 물리치고 집집마다, 동네마다 아이들이 울고 웃는 소리가 가득한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이 일에 CBS가 패스파인더가 되어 주고 출산 운동을 위한 허들링의 역할을 해 줘 감사하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정부에서 한국교회에 몇 조만 지원해 주었더라면 0.84라는 재앙은 면했을 것이라고 본다. 목회하면서 아이들을 한 명 더 낳으면 유모차를 사준다고 해도 유모차를 받으려고 애를 낳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4명을 낳으면 성지순례를 보내준다고 했더니 3명 난 사람이 성지순례 가서 애 하나 베어오겠다고 해서 보내준 적도 있다. 교회는 이렇게 즉각 효과를 보는 곳이다. 또, CBS에 몇 조만 지원해 줬다면, 지금 시골이건 도시건 애들 우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가득하고 전혀 새로운 베이비부머 시대를 열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제라도 CBS가 팔을 걷어붙이고 한국교회와 함께 생명돌봄 국민운동을 하게 되어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구재앙이라는 광야에 서 있을지라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선도적 길을 손을 잡고 함께 간다면 생명 경시와 죽음의 진혼곡, 레퀴엠을 물리칠 수 있. 생명의 탄생이라는 아리아와 생명의 녹색 심포니가 조국 땅에 가득가득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조국 땅에 생육과 번성의 푸른 젖줄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푸르고 푸른 길, 아름다운 생명의 꽃길을 CBS가 앞장서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드린다. 한국교회도 더 출산운동에 앞장서겠다.   정말 우리나라는 인구절벽으로 큰 재앙을 맞고 있다. 이럴 때 우리 젊은 친구들이 동성애 보다 이성애의 축복을 알고 다 결혼해서 출산운동에 앞장서기 바란다.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 새에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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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1-19
  • 힘을 기르자
    지금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중국이 밀리는 듯하다.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중국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도 허황한 꿈이 되어 중국 자체가 분해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자고 우리 정부는 중국에 바짝 붙어 무슨 이득을 보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으름장에 싸드도 포기하고, 중국제 태양광을 온천지에 깔았다.    이 세상의 모든 분야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코로나19의 예방도 결국 병균을 막아내는 면역력을 키우기 위함이 아니던가? 힘이 있으면 이기고 힘이 없으면 죽는다. 예컨대 「체력(體力)이 국력(國力)이다」라는 말이 있다. 허약한 육체의 힘을 갖고 있으면, 국가의 힘도 없다는 것인데, 아마도 국가 체육을 권장하는 말인듯하다. 하기야 올림픽 금메달 개수가 국력이 되는 것도 맞는 말이다.   또한 「경제력이 국력이다」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개인도, 회사도, 국가도 경제가 든든하게 힘을 바쳐 주어야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고, 국제적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 지구상에 가장 못사는 가난뱅이 나라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민주주의를 토양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를 일으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어 세계가 한국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역시 경제적 힘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정치력이 국력」이기도 하다. 최근에 돌아가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잘 나가고 있는 반면에, 정치는 가장 후진적이고,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상식이란다.   내년 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에서는 후보 경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후보 경쟁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진실하게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탈락 되었다. 그런데 그중에는 사기꾼, 부동산 투기꾼, 도적 사람, 불법을 자행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은 표를 많이 받고 있으니... 정말 이 나라가 어째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유권자라는 사람들도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다. 나라를 위해서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일할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권에만 개입하고, 세 치 혓바닥으로 이리저리 둘러대고, 감언이설로 여론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표를 주고 있다. /전 총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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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1-15
  • ‘사랑의 실천’의 참뜻
    단순히 생각하면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만물과 인간이 신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고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그런 관계 설정 속에서 흔히 얘기하듯 구원사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가령,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즉 육신이 죽으면 신의 은총에 따라서 생애를 산 사람은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신의 은총 속에서 신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사랑을 베푸는 일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에는 어떻게 생각하면 다분히 편협함을 면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배타적인 면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선량하고 착하게 살더라도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편협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모 신학 대학의 교수 한 분이 반드시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더라도 그 삶이 기독교적인 것이라면, 그러니까 평생 사랑을 실천하면서 세상을 선량하게 살았다고 한다면 그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발언을 해서 파문을 일으킨 예도 있는데 이것 역시 결국 기독교인들의 사랑에 대한 편협한 해석에 근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사랑의 실천’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범인류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사랑과는 차이가 있다. 그야말로 인류의 모두를 감싸 안는, 그리고 인류 모두가 반목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고 빼앗는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를 종식시킬 수 있는 범세계적이고 범인류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주장하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에서 그 사랑이란 내세의 구원사적인 전제가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신의 뜻에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베풀고 사랑의 뜻을 가지고 산 사람은 죽은 뒤에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의 실천’은 내세가 전제된 사랑이 아니라 현존하는 인류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반목과 갈등과 약육강식의 냉엄한 질서라든가 이런 것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 척도로서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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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1-04
  • 진리를 버린 인간들
    금년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지 504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혁은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무용지물처럼 버림받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상실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할 때, 그 종국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명백히 교시하고 있다. 진리를 버리면 자아가 자신의 주인이 되고 누구에게도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는 무신론자가 된다. 무신론은 심판자가 없다는 것이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형벌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나 신의 심판이 두렵지 않다. 종교개혁이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버리고 세속화된 삶에서 이를 청산하고 본질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해야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답게 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많은 소유를 가지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낙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느냐를 삶의 목표로 삼고 있지만, 참된 인간의 삶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다가 죽느냐는 것을 성경에서 배우고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경 내용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고전과 문학 작품들이 수없이 줄을 이어 출간되었다. 그중에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어거스틴의 『참회록』, 존 번연의 『천로역정』, 존 밀톤의 『실락원』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죄와 벌』등이다. 이 작품의 공통점은 죄악 속에 사는 인간의 현주소와 죄를 범한 인간이 받는 각종 고난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사후에 받을 심판으로 인한 불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인간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려면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복귀해야만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개혁의 기치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구약의 예언자 하박국에 의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자(합2:4), 사도 바울이 계시를 받아서 우리를 일깨워 준 주옥같은 말씀이다. /예장합동선목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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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0-19
  • ‘사랑의 실천’의 기적
      나는 일찍이 한양대학에서 기술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학생들은 잘 이해를 못했으나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모두 이해를 한다고 하였다.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학교의 졸업생을 만났을 때 그들이 자식을 키워 보니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겠다고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실천’을 가문의 철학으로 여기고 자식들에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나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내 아들과 남의 아들이 싸우면 이유를 막론하고 내 아들은 잘못했다고 나무라고 남의 아들은 위로했습니다. 그게 현명한 아버지의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그때 학창 시절에 듣고 배운 ‘사랑의 실천’이 상기되면서 내가 남의 아들을 사랑하면 남들도 또 내 아들을 사랑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라고 전한 적이 있다.   내가 학생들에게 늘 강조해 온 것도 사랑이란 먼저 주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당시에는 어려서 그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회에 나가서 현실에 부딪혀 보니까 저절로 터득되었다는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60대에 이른 사람들이 학교의 교훈이자 나의 철학인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하여 자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속으로 참으로 흐뭇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열심히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수확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교직원들 가운데도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정한 분들이 많다고 한다. 그것도 결국 나의 철학에 감화를 받은 결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가정과 가족 구성원으로까지 넓고 깊게 확산되어 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우리 사회의 개개인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의 인류 모두가 ‘사랑의 실천’에 앞장서는 때가 오면 그야말로 인류의 역사는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말을 생각하고 또 교훈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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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9-30
  • 그리스도인과 추석
      그리스도인에게 추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추석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추석은 설, 단오, 정월대보름과 함께 4대 명절 중 하나로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이다. 그날은 8월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의미에서 한가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음력 8월 15일에 지내는 추석날이 다가오면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그 의미가 두 가지 측면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들뜬 마음으로 일 년 동안 기른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이다. 조상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은덕을 기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석의 기원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달에 대한 신앙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어두움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때에 8월 보름달은 어두움을 밝히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밝은 달 아래 축제를 하며 큰 명절로 지키었다.    우리 조상들은 추석이 되면 반달 모양의 송편을 빚었다. 송편에 소를 놓고 접기 전에는 보름달 모양이지만 소를 넣고 접으면 반달 모양이 된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송편에도 반달 모양의 달이 보름달로 자라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로 인해 추석은 아쉽게도 그 유리를 살펴보면 일종의 우상숭배와 연관이 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에게 추석은 의미 없는 명절일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에게 추석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의 소산을 열매로 거두는 축복의 명절이 될 수 있다. 한 해의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절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고 있다. 추수 감사 주일의 유래는 영국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1621년 가을 매사추세츠의 플리머드에서 3일 동안 행한 축제에 있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에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위해 소득의 일부를 남겨 두는 것은 어떨까? 가난한 자와 병든 이들을 위해 배려하는 추석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한영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9-14
  • 예수 그리스도만 빛내는 총회 되길
      9월 전국 교단 정기총회를 앞두고, 최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탈환한 것을 보면서 20여년 전 기억이 아스라이 되살아났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극단 이슬람 테러집단 알 카에다가 미국 아메리칸 항공 소속 여객기를 납치하여 세계의 심장 뉴욕에 위치한 제1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조금 후 또 다른 쌍둥이 빌딩 무역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을 공격하였다. 이 사건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테러 사건으로 기록된 9.11테러다.   미국 본토가 적에게 공격당한 것은 1913년 이후 88년 만이었다. 9.11테러는 2,977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2만 5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사망자 가운데는 소방관, 경찰관이 412명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이 테러 현장을 떠나 안전지대로 달려갔다. 그런데 소방관과 경찰관은 시민들과는 정반대로 달려 역주행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역주행을 했는가? 왜 무너져 내린 비참한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는가? 무엇이 그들을 험지로 뛰어들도록 몰아갔는가? 그 이유는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릴 적부터 목회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 바로 신학대학으로 진학해 목회자가 된 이들과 같다. 이들은 인생전체를 바쳐 헌신한 사명자들이다.   9월 전국 교단 총회에 참석키 위해 전국 각지에서 달려오는 장로들과 목사들,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전 세계 복음 사역의 최전선에서 뛰는 선교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적 존재임을 확신했다. 바울을 사도로 택정하시고, 부르시고, 파송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다.    바울의 삶에서 예수님을 제거하면 그의 삶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1563년 독일 개혁교회에서 출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제1문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이 삶의 유일한 위로라고 선언한다. 제발 예수 그리스도만 빛나는 정기총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사)미래목회포럼 대표·새로남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9-13
  • ‘사랑의 실천’의 전파자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한양대학교의 교훈은 ‘사랑의 실천’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독교 신자이니까 기독교의 사랑과 연결지어 성경(聖經)에서 그 말을 가져 온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종교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성장기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는데, 굳이 근원을 따지자면 철학적인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資産)에 나의 인생 철학을 보태서 만든 것이다.  내가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기독교를 보는 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예배당에 나간다는 것과 나가지 않는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는 똑같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입으로만 사랑, 사랑이라고 말할 뿐 실천하는 게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참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의 실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의 실천’을 만들게 된 발상(發想)의 근원에는 어느 정도 기독교적인 것이 깔려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에 대한 비판적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의 교훈으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성경에서 얻어온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더러 이와 유사한 말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사랑으로 사는 운동’이라거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등에서 그 유사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요즘엔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사랑의 실천’에 대해 내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몇 해 전에 ‘사랑으로 사는 운동’ 본부에서 나를 찾아와서 주제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노래를 작곡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면 나를 떠올릴 정도로 나는 일생 동안 그것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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