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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인간은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지만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론자로 살 것이냐 아니면 무신론자로 살 것이냐 일 것이다. 이는 그의 삶의 질과 영혼의 구원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본주의인 헬레니즘과 신본주의인 헤브라이즘과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던 사람과 불신앙으로 살던 사람과의 차이점은 삶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접할 때마다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지난 냉전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간에는 우주 항공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우주선에 탑승했던 미⋅소 양국의 우주인에게 당국에서 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귀환한 후에 자진하여 신의 존재에 대하여 상반된 진술을 하였다. 즉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대기권 밖에 진입해서 우주여행을 하였던 소련의 가가린은 “여기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 어디를 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그로부터 몇 년 후 아폴로 11호를 타고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였던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은 여행 중에도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지구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했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진술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사상을 평소에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무수하지만 그 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제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해서 주님이 수난당하시기 직전까지 책망을 받던 그들이 예수의 부활과 성령체험을 하면서 불과 40여일 만에 성숙한 영성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하여 선교의 지평을 열어가는 인물로 쓰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존 뉴톤 같은 수많은 탕자를 만인의 숭앙을 받는 성자로 만들어 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 살면서 예배생활과 성경적인 삶과 기도 생활을 중히 여기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이미 천국에서 누릴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활신앙과 성령체험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뤄가기를 바란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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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4-08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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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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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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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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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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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코로나 팬데믹 중 하나님의 은혜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실체가 된 지 벌써 한 해를 넘기고 있다. 여전히 그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있으며, 그 위세에 전 인류는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신 개발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변형 바이러스 형태의 팬데믹이 과연 온전히 다스려질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의 근본 원인은 기후변화에 있으며, 이 때문에 기후변화는 기후위기의 심각성 문제로 치닫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산업화가 추진된 이래, 전 세계가 경제발전과 함께 온통 자연을 이용한 생산 활동에 집중하였고, 이에 따른 과도한 에너지 사용은 마침내 지구 기온을 상승시켰으며, 그것이 오늘날 기후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중세기 유럽에서는 페스트 팬데믹 창궐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질병의 주된 원인은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오늘날 사람들의 인식도 대체로 천재(天災)로 인식하기보다, 인간 스스로 초래한 인재(人災)로 보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재를 뒷받침하는 이론은 자연과학자들에게서 이미 “인류세”(Anthropocene)란 개념을 통하여 합리화되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자연생태계를 파괴한 인간의 행위가 지구환경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 결과가 오늘의 기후위기와 팬데믹 위기초래의 원인이라는 해명이 더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유엔 산하에 설치된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과 ‘세계기후기구’(WMO)가 1988년 ‘기후변화에 관한 각 나라의 정부간 패널’(IPCC)이란 단체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기후변화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이래로 이 기구(IPCC)는 인간의 활동이 초래하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구체적인 통계로 제시하며,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을 수행해왔다.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이 시대를 향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심판의 경고요, 경종과 각성으로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염원한다. /총신대학교 전 총장·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5-28
  • 성공한 가정의 원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가정이라는 것이 잠언의 관점이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어도 가정생활에 실패하면 다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성공적인 가정을 위해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려면 가장에게 적절한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보다도 일을 해서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잠 24:27).    둘째,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려면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지식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3~4) 가족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위치에 맞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서로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정의 덕목은 화목입니다. ‘가화만사성.’ 성경적인 문구입니다. 물질적인 부요보다도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9). 늘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고, 불친절하고, 감사치 않는 사람은 가정의 화목을 깨고 배우자로 하여금 방황하게 합니다.    네 번째로 가정이 성공적인 가정이 되려면 의로운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버리느니라”(잠 21:20).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의인의 건강이나 재정이나 혹은 자녀들에게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사는 가정은 위기가 여섯 번 와도 능히 다 이겨내고 일어날 수 있지만 악인의 가정은 한 번의 위기에서도 넘어지고 맙니다. 의로움은 가장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이 늘 말씀을 읽고 말씀에 바로 서서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 가족은 그대로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한국기독교화해중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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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5-17
  • 안에서 깨어난 생명
      들꽃 사진을 찍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요즘 피는 꽃 중에 옥녀꽃대와 홀아비 꽃대가 있단다. 둘이 이름 그대로 암꽃과 수꽃이다. 안타깝게도 두 남녀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남쪽 땅에 피는 옥녀와 달리 홀아비는 북쪽지역에 분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생대가 점점 근접하여 두 꽃 모두 충청도에서 발견되지만, 옥녀는 안면도등 해안지역에 살고 홀아비는 충북 괴산 같은 산골에 산다고 한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니 서로 모양은 달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암수한몸 꼴들도 많은데 암꽃과 수꽃 혹은 암그루와 수그루로 나뉘어 있으며 어느 천 년에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안타깝다. 물론 가까이 살면 나비가 꽃들에게 희망을 주겠지만, 해안과 산악으로 멀리 떨어져 사는 옥녀와 홀아비에게는 그런 중신아비도 아직 없는 셈이다. 장년을 맞는 후배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자녀 결혼문제로 걱정을 한다. 베이비붐 세대인 그들은 젊은 시절의 자신들과 비교해 자녀들의 혼인관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자녀 세대인 에코세대는 부모의 기대처럼 소리가 되돌 아 오는 메아리(에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기존 통과의례의 하나인 결혼 따위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젠더이슈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이다. 예전에 쉬쉬하던 일이 우리 사회의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부모 입장에서는 행여 결혼에 소극적인 자녀에게 남모를 사연이 있을까 싶어 염려가 크다. 세상이 너무 달라졌다. 우리 세대는 동성동본 혼인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이젠 양성평등의 단계를 넘어, 다양한 젠더의 존재로 확장하고 있다. 수용성이 빠른 에코세대의 존재는 베이비붐 세대의 불안감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논의 수준은 찬반의 절대성만 있을 뿐 약간의 혜안도 찾지 못한다. 어떤 모양이든 관용과 차별사이에서 불화와 대결의 경계선을 넘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인 무시와 정죄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특히 교회가 성을 쌓고 심판하고 남에게 원치 않는 차별의 이름을 더하기 시작하면 조직교회가 갖는 마성과 조직우상이 주님을 대신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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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5-12
  • 가족에서 시작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한양대학교의 교훈은 ‘사랑의 실천’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독교 신자이니까 기독교의 사랑과 연결지어 성경에서 그 말을 가져 온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종교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성장기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는데, 굳이 근원을 따지자면 철학적인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에 나의 인생 철학을 보태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양대학에서 기술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몇 해 전에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학교의 졸업생을 만났을 때 그들이 자식을 키워 보니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겠다고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실천’을 가문의 철학으로 여기고 자식들에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 아들과 남의 아들이 싸우면 이유를 막론하고 내 아들은 잘못했다고 나무라고 남의 아들은 위로했습니다. 그게 현명한 아버지의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그때 학창 시절에 듣고 배운 ‘사랑의 실천’이 상기되면서 내가 남의 아들을 사랑하면 남들도 또 내 아들을 사랑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학생들에게 늘 강조해 온 것도 사랑이란 먼저 주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당시에는 어려서 그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회에 나가서 현실에 부딪혀 보니까 저절로 터득되었다는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60대에 이른 사람들이 학교의 교훈이자 나의 철학인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하여 자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 속으로 참으로 흐뭇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열심히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수확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교직원들 가운데에도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정한 분들이 많다고 한다. 그것도 결국 나의 철학에 감화를 받은 결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가정과 가족 구성원으로까지 넓고 깊게 확산되어 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5-07
  • 코로나 19와 가정예배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선물중의 하나가 가족결속력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족 결속력은 가정예배를 통한 동반상승이다. 잃어버린 대화를 회복하고 가족 구성원간의 상호 이해를 힘있게 도모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정예배를 통하여 삶의 질을 어떤 원리로 강화할 수 있을까? 신명기 6:4-9절을 보자.   첫째, 가정예배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님사랑의 표현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명령하였다. 가정예배는 가족구성원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실천적 사랑이다.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가 가는 곳마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둘째 가정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영적훈련이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의 변화는 내면의 가치의 변화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내면의 가치의 변화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확신에 기초한다. 가정예배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모든 가족 구성원이 마음에 새기는 거룩한 시간이다.   셋째, 가정예배는 믿음의 세대계승의 현장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믿음의 세대계승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영적인 각성이며 훈련이다. 가정예배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세대를 초월하여 하나 되는 현장이다.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와 손자 손녀들 세대가 어우러져 하나님께 경배하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시간이다. 가정예배는 은총의 보고이다. 가정예배의 보존과 발전은 믿음의 세대계승과 직결된다.   넷째, 가정예배는 신앙의 생활화를 촉발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만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으로 반드시 연결된다. 가정예배야말로 주일 그리스도인을 일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분주하다는 핑계로 인해 잃어버린 가정예배를 재발견하여 지금도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발견되기를 소원한다.  /목사·새로남교회 담임· 미래목회포럼 대표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22
  • 기독인과 나라 디자인
      기독인들은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국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종교개혁운동으로 거슬러 가는 것 같다. 이 민주주의는 그리스에 출발점을 둔다는 일반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것 같다. 이런 점을 지적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통찰력은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 맨 끝부분에 국가론을 언급한 이후 모든 개혁교회 신앙고백서 끝부분에는 국가관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교회 성도들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나라를 디자인했다는 말이다. 이들은 단순히 교회가 국가 정치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까 하는 것을 고민했다는 말이다. 칼빈은 귀족정치를 선호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대의정치 제도를 만들게 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인간의 삶을 풍성케 하며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을 얻게 하는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며 살 수 있는 나라를 추구하면서 이런 정치제도를 얻게 된 것이다. 유럽의 입헌군주제도나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막연하게 동성애를 반대할 것이 아니라 이런 제도가 허락되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교회는 좋은 나라 영육 간에 아울러 참으로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좋은 정치가들을 길러야 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기타 모든 삶의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인재들을 양성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의 주역인 교회의 담임목사는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제 모든 기독인들은 정말로 좋은 나라를 디자인하는 마음으로 나랏일을 걱정하였으면 한다. /목사. 콜부루게신학 연구소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22
  • 창의적인 사회를 만들자
      자유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자유가 충만한 사회일수록 창의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말해서 절대적인 자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어디를 가든 주어져 있지 않다.   헌법 조항에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든가,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라든가, 또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규정해 놓았지만 한 개인이나 사회로 볼 때, 어떤 유형·무형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고 또 심리적으로도 자유가 행사되지 않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인간의 자유는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보통 말하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라든가 신앙의 자유, 또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는 궁극적인 자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척도로 재어지는 자유일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이런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무슨 주의든 간에, 그 주의가 비록 자유주의라 할지라도 극단적으로 강화·시행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비관용적인 것, 비타협적인 것, 심하면 잔인성과 포악성까지도 드러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정치 체제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국민은 크나큰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조금만 거슬리는 소리를 해도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작가나 예술가가 소리 없이 소멸되고 만다.   이에 비해 자유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발표되는 학술논문이나 문학작품이나 영화, 예술작품들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가를 상상해 본다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큰 것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가장 강한 밑천이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어떤 위치에 있든지 먼저 자기 자신부터 똑똑히 바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15
  • 교회의 부활
      오늘날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는 바이러스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세계 경제뿐 아니라 한국 교회도 큰 타격을 입혔다.   함께 모여 즐겁게 드리는 예배는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낌 속에 진행되고 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 운영은 바이러스가 확산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에 대부분 중단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서로 사랑의 교제를 위해 만나던 일도 마음에 불편한 일이 되었다. 중소교회는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함께 운영해야 하는 것은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와 예배의 정의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정해진 장소에 모이는 곳에서 잠시 흩어지거나 적게 모여야 하는 곳이 되었다. 왜 이렇게 교회가 살얼음판을 조심스레 걸어야 하는가? 국가에서 제정한 방역 규정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효율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다. 교회가 모든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주범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언론의 공격을 받고 불신자에게 덕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결국에는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교회는 어느 때보다 조용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 조용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시기를 넘어 도약으로 나아가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부활이다. 코로나로 인한 위기에 직면하여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의 새로운 동력은 예배와 프로그램 운영의 디지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서로 교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은 온라인을 활용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온라인 교회의 확장이 요구된다. 더 이상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이라야 한다는 장소적인 문제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교회 예배와 프로그램 운영의 디지털화 및 온라인화를 통해 한국교회가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는 제2의 탄생을 하였으면 한다. /한영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02
  • “선한 사마리아인의 실천을”
    기독교신문이 본 난을 통해 사랑의 실천 캠페인을 벌이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이고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제일 큰 교훈인 첫째 계명은 사랑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고 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실천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이 세상 역사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따르는 것이고, 그 규범은 바로 첫째 계명인 사랑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고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이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첫째 되는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둘째는 이웃된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혹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그 대상으로 가르쳐주셨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그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셨다. 강도를 만나 강탈당한 처절한 형편에 처한 사람과 같은 우리 주변의 어려운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 대상이다. 세계화된 오늘날 지구촌에서 현재 먹지 못하고 굶주려 기아선상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멀리 아프리카로부터 북한에 이르는 모든 이가 우리가 보살펴야 할 사랑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가까이는 국내 우리 주변에 있는 타국에서 온 소외된 자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면 끝으로 어떻게 도울 것인가이다. 이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한국교회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먼저 가져야 하겠다. 다음으로는 이에 대한 긴급한 구호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울신대 전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30
  • 그리스도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생명나눔
    하루 7.5명, 장기이식만을 기다리다 목숨을 잃는 환자의 수이다. 1년이면 2,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기기증이다.   1991년, 한양대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전 수술실 근처에도 갈 일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던 내게는 무척이나 떨리는 경험이었다. 당시 수술실에서 두 개의 신장 중 하나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떼어낸 신장 하나는 오랜 기간 투병을 하던 신장병 환자의 몸속에 이식되었다. 국내에서는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 타인 간 순수 신장기증의 순간이었다. 당시 앞뒤 가리지 않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환자에게 신장 하나를 기증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누가복음의 말씀이 큰 영향을 끼쳤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위로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셨던 그 분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질문이 오늘날 저를 장기기증 운동으로 이끌었다.   신장기증 이후, 국내에서는 본격적인 장기기증 운동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970여 명의 사람들이 생존 시 신장기증을 실천하며 병으로 신음하는 이웃에게 사랑을 전했다. 이뿐 아니라 세상을 떠나며 뇌사 장기기증을 실천하신 분도 6천여 명이 넘는다. 그러나 여전히 장기이식 대기자와 비교해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장기이식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 생명을 나누는 일은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4월 4일 부활절을 기다리며, 경건하고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의 사랑을 기리는 지금 이때에 우리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장기기증은 몇몇 뜻있는 사람만이 실천하는 아름다운 선행이 아니라 건강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사회적 의무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아름다운 사명이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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