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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의 건강한 가정
      5월은 가정의 달이다. 1994년부터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해진 것은 그만큼 가정이 건강하게 지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그 좋은 계절 5월이 가정의 달로 지켜지면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은 점차로 해체의 수준을 밟아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의 사전적인 의미는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공동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2명 이상의 가족 구성원으로 가정이 형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현재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일인가구의 확대이다. 2021년 10월 행안부 조사에 따르면 주민등록상으로 일인가구가 40%가 넘었고 4인 가족은 20%이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두 명 이상이 함께 사는 가정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한국의 가정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가정을 지켜나가야할 가장 중요한 주체가 기독교인들이 되어야 하겠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물결을 따르기보다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성경이 기독교 가정에 대해서 가르치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면서 행복한 기독교 가정을 꿈꾸어야 하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지으셨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룩하게 하셨다. 이것은 결혼의 제도화를 말하지만, 동시에 가정의 설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셔서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신 목적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의 가정은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이 없이 가정이 온전하게 세워질 수 없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에 세우신 가정의 목적이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가정은 만드신 목적이 바로 가정이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예배하는 가정이 되는 것이다. 가정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셔서 가정에 필요한 복을 주실 것이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어울려 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향기를 나타내야 하겠다. 기독교 가정에서 부부는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여 황혼에 더욱 행복해지는 부부가 되어야 하겠다.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오늘날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서,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자녀를 하나님의 기업으로 알고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녀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고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부모와 자녀, 형제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세상에서는 점차 단독 가구가 많아지고 있지만, 기독교가정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지켜지고 구원의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 가득한 가정이 많아져야 하겠다./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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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5-19
  • 한국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목회자의 비리와 성적 타락, 신학 및 신앙의식의 부족, 선거부정과 지도력의 부재, 목회자 생활의 불안정과 양극화, 교회와 성직의 세습 등 많은 문제들이 표출되면서 한국 교회는 신뢰를 잃고 있다. 이는 신앙의 진정성을 상실하고 물신숭배 등 세상풍조를 따랐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사람의 기호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감리교회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 길을 모색하던 사람들이 정직한 감리회 지도력을 세우고자 2022년 감독회장 선거를 주목하여 동 선거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   첫 째,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성을 강화하여 진정한 기독교회를 세워야 한다. 영성훈련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예수의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민족을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둘 째, 웨슬리의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에 공감하며 진정한 감리교회를 세워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화로 세상을 거룩하게 지어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셋 째, 목회자의 생활 안정, 평신도 위상 정립, 제도를 개선 보완하여 합리적이고 정직한 감리교회를 지어가야 한다. 아울러 실력을 갖춰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넷 째, 기후위기로 비상사태를 맞고 있는 지구생태계 문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창조신앙을 배우고 환경선교에 동참하는 등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나서야 한다.   다섯 째, 감리교회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학연을 넘어 연대, 세대를 넘어 통합, 성별을 넘어 평등한 감리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일은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공적 교회이다.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다. 감리교회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나 개혁을 요구할 것이다. 지금 개혁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감리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이 다시 교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감리교회 지도력 부재 17년 동안 감리교도 35만 명이 감리교회를 떠났다. 깨끗한 이미지 갱신과 정직한 지도력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감리회 교인들의 이탈 현상은 급속도로 가속화될 것이다.   시급하게 위기를 돌파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제도개혁, 영성형성, 선교정책, 목회자 정책 등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책을 차분히 만들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지도력을 세우는 일과 맞물려 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감리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간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으로 인해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러할 때일수록 오히려 교회는 교회다움을 회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을 성찰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그간 코로나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이며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삶의 철학과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생각하고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감리회목회자모임새물결 전국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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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5-11
  • 효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역사의 연구>라는 명저를 저술한 세계적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6.25전쟁 직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3대가 어우러져 사는 한국의 효(孝)사상과 가족제도를 관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비록 한국이 지금은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이 나라는 머지않아 선진국가로 도약할 것이다. 효행이라는 아름다운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장차 한국이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가족제도와 효사상일 것이다. 만약 지구가 멸망하고 인류가 새로운 별로 이주해야 한다면 지구에서 꼭 가지고 가야할 제일의 문화는 한국의 효문화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반세기 이상이 흘렀다.  2019년 현재의 상황을 살펴볼 때, 우리 사회에 과연 효행(孝行)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가진 5천년 역사의 찬란한 정신 유산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 사상에 기초한 효사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가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찍힐 수밖에 없다.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에는 생활고와 가족부양의 부담 때문에 존속살인까지 벌어지는 데에야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 우리 사회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각박해진 인심과 메마른 인성으로 인해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끼고 국회에서는 지난 2014년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교육부가 인성교육종합계획을 5년마다 짜야하고, 교육청이 매년 인성교육시행계획을 추진해야 하며, 일선 교사들은 매년 4시간 이상의 인성교육 연수를 받을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인성을 함양하려는 취지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해결 방향은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뿌리의식을 되살리는 데 있다고 본다.  부족하지만 나는 1995년부터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외쳐왔다. 이 같은 나의 열정은 ‘효’는 성경에 있는 것이고(딤전5:4)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자로 길러내는 ‘효경’이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효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는 일부 여성과 젊은이들이 ‘효’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과 오해를 갖고 있는 부분이었다.  과거 왕조 시대에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효를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군주제의 효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며 가족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할 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의 권익이 철저히 소외되고 박탈되었었다.  이처럼 ‘효’라는 단어가 상당수 사람들의 의식 속에 부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 효문화를 중흥시키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경을 다시 읽었고 시편 133편에서 ‘하모니’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개역한글에는 ‘연합’으로 번역되었지만 NLT 영어성경에는 시편 133편에 ‘harmony’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모니’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모니해야 하는 데 그 출발은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하모니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효를 영어로 ‘Harmony of Young and Old’의 줄임말인 ‘HYO’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HYO의 효는 과거의 효와 달리 자유로운 개인, 민주적 절차, 쌍방적, 관계적이며 평등한 인간관계, 이타주의와 애경(愛敬)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적 효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사상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을 구현하는 현대적 효이다. 그러므로 ‘효(孝)’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설립자·총장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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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5-04
  • 진정한 변화위한 비전이 필요한 세상
      어려운 시기일수록 꿈과 비전을 품은 지도자가 그리운 세상이다. 비전을 품은 지도자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비전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다음세대가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창조된 우리가 모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가를 알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장점은 더욱 계발하고 단점은 극복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질이나 MBTI, 에니어그램과 같은 다양한 검사들을 통해서 자신을 깊이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뚜렷한 목표나 방향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뒤 더 이상 이대로 안 된다는 반성과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데, 이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꿈과 비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셋째 비전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비전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삶과 사역에 사용되는 비전의 개념과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단계이다   넷째 자신이 품은 비전을 발전시키는 단계이다. 적지 않는 사람들이 꿈이나 비전을 품기는 하지만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한순간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을 본다. 또한 비전이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키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꿈과 비전도 점차 성장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발전시킨 비전을 세상에 전달하는 단계이다. 좋은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비전을 품고 따를 수 있도록 영감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퇴임 후에 아름다운 삶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조차도 재임 중에 자신의 비전을 백악관을 넘어 전달하는 데 실패해 재선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비전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여섯 번째 비전을 성취하는 단계이다. 비전을 가진 리더들은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리더십 팀을 세우고 비전을 발전시키고 전달해 가는 데 있어서, 어렵고 힘든 것들을 인내하면서 신중히 초점을 맞추어 나가고 비전을 성취해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취한 비전을 보존하는 단계이다. 비전을 성취하는 것보다 그 비전을 보존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말이 있다. 커다란 비전일수록 그 비전을 무력화시키고 열기를 꺼뜨리는 장애물들이 많은데 이것을 비전 킬러나 비전 뱀파이어라고 부른다. 이처럼 비전을 성취한 다음에 그것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고 보존해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러한 것들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은 그것을 품은 사람보다 더욱 오래간다. 그만큼 한 민족이나 사회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서 비전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비전이 없는 백성들은 아무렇게나 살아가므로 결국은 망하고 만다는 성경의 교훈을 미래의 지도자가 될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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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4-19
  • 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란 단어는 사네이이다.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뜻 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 /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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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30
  • 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를 ‘미워하고’ 자녀를 ‘미워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네이곧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도 그 가족들로부터 미움받지 않았던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미움은 덜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식은 증거이다. 가족들이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은 증거이다. 형제들이 미워하는 것은 덜 사랑하는 증거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면서 십자가형을 공공연하게 시행해왔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부모와 자녀를 덜 사랑하고 예수를 더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이기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생결단을 내리고 따라야 하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죽음을 불사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십자가에 못이 발목에 박힌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께서는 가정에서 먼저 자녀가 부모를 미워하고, 또 부모는 자녀를 미워하고 예수를 따라나서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굉장한 도전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가정사를 정리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는 가정의 일로 십자가를 지는데 어떤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의 제자들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이제 이 길을 당신도 걸어가려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부모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녀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세상을 미워할 준비가 되었는가? 세상을 덜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갈 준비가 되었는가?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나자라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 찾는다는 말씀이기에 예수의 제자는 이 땅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걸어가는 길이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우뢰의 아들’(히브리어로 베네이 레고쉬)이란 별명을 얻은 그들의 아비는 세베대 곧 히브리어로 자브다이로 요한은 예수의 제자 중에 최연소이고, 그의 형 야고보는 예수에게 회장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 곧 조선 시대로 말하자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곧 정3품 이상의 당상관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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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29
  •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역대 대통령의 직무수행평가를 조사한 통계 수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집권초기 지지율은 매우 높지만 집권 마지막 분기에는 최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단순한 정치 영역의 지도자를 넘어선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줄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 배경을 따져 보자. 우선 권력 집중적 대통령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단순한 행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정당의 지도자로서 입법에도 영향을 미치며,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추천을 통하여 사법부 영역에도 간섭한다. 대통령은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코로나19 시대 교회 문을 닫고 열게 하고, 탈모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북한 핵을 억제하고, 미·중 갈등에서 균형을 잡으며, 기후변화 대책을 세우기도 한다.   우리 국민들의 국가중심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열강의 침략, 일제강점기,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애국심이 국민의 심성에 내재되었다.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국민적 자부심(이른 바 ‘국뽕’)은 하늘을 찌른다. 더욱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국가는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임이 확인되었고, 동시에 국가가 국민 개인을 통제할 정당성까지 확보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의당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정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라는 인간 삶의 한 영역의 지도자일 뿐이다. 메시아는 고사하고 그 역시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대통령은 정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법에 복종하며 세금을 바치는 것이 크리스천의 마땅한 도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 감이 누구인지 깊이 숙고하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자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영역주권론은 성경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으로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 주권자는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세상을 다스릴 때 세상을 여러 영역들로 나누어 다스리신다. 국가, 교회, 가족, 학교, 기업, 학문, 예술 등이 그 영역들로서, 하나님은 그 영역들에 각기 다른 임무와 법과 통치자를 주셨다. 각각의 영역들은 내적 성격과 자체의 법체계에 따라서 그 권위를 행사하고,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진다. 통치자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은 가정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교사들은 학교에서, 고유 영역에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영역에 기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현하는 길이다.   어느 한 영역에 절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그 사회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정치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 인간사의 유일한 조직처럼 행사해서도 안 되고, 기업가 정신이 온 사회를 지배하여도 안 되며, 교회가 정치적 과제와 국가의 영광을 취하여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부패하였기에 한 사람, 한 영역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는 진보/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되는 정치의 하부기관이 아니라, 정치가와 권력자, 그리고 국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기관이다. 우리의 교제는 분열과 차별과 혐오의 세상을 십자가 안에서 끌어안아 통합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교제다. 신앙인은 하나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안목으로 그 이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백석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2-03-17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공격했다. 전세계는 이를 러시아의 약소국 침공으로 보면서 규탄하고 있으며, 전쟁 중단과 평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세를 현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 현실, 즉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현실에서 본질문제를 따지는 것은 한가한 노릇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본질적으로 파악해야 이 상황을 올바로 볼 수 있고, 이후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감성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지나간다면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차세계대전의 잘못된 해결이 2차 세계대전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듯이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 이후 반러시아 정책을 계속 추구하는 나토와 미국의 동진정책과 러시아의 국가적 안전 확보라는 이해관계가 부딪혀 나온 전쟁이다. 즉 제국과 대국의 이해관계 대립이 전쟁의 원인이다. 나토와 미국, 그리고 당시 소련은 독일의 통일을 허용하면서 독일 넘어서 동유럽으로 나토를 확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도 문서로 약속됐지만 법적 조약은 맺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나토와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란드, 발트3국, 발칸국가 등 동유럽 거의 모든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국가가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넓은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의 발길이 국경선까지 다가온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대해서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게는 나토 가입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는 중간지대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Demilitalization)를 목표로 하고, 친서방 극우 정권을 통제하기 위해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세부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벌이는 휴전 협상의 본질이 이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지 않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크라이나 정권이 거부하면 전체를 점령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오만한 제국의 쇠퇴이다. 제국의 오만과 쇠퇴, 그것이 이번 전쟁의 본질이다. 미국은 소련 해체 이후 세계의 유일 패권국이 되었다. 유일 제국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고,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쫓아내고, 리비아 가다피를 제거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으로 미국의 부자는 이제 슈퍼리치가 됐다. 미국이 중심에 유럽-일본 부자는 주변에 섰다. 빈익빈 부익부는 극단적 수준이 됐고 그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경험하고 있다. 유일 패권국 - 제국화된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만든 세상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달러의 지위가 흔들린다. 헬리콥터 머니로 전세계에 풀린 달러는 세계 인플레-대공황을 예고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시리아에서 실패했고, 아프카니스탄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하며, 이라크에서는 매일 미군 그린존에 민병대의 로켓이 날아가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핵무기를 완성한 북과 힘겨운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사이 성장한 중국과 천연가스를 유럽에 공급하며 경제를 회복하고 현대화한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가 미국과 대결하고 있다. 그 대결의 반영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나토의 동진을 저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제국의 오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오만이 무너지고 진정한 평화의 체계가 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시2:1-3). 한국교회는 표면에 나오는 뉴스에 좌우되지 말고 현상을 넘어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공포를 넘어서 그들의 오만 보며,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데서 다가오는 것이다./ 평화의 교회 목사·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3-10
  •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일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숙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에 와서 연합의 논의가 활발한 것 같지만, 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한국교회의 노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한국교회의 연합체는 1924년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가 유일했다, 그러다가 1989년 교회협의 활동과 지향에 이견을 가진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라는 지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1년 한기총의 이단 해제 문제와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주요교단들이 한기총을 탈퇴하고 한국교회연합(한교연, CCIK)을 설립했다. 이후 2017년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UCCK))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내홍을 겪으며 대부분의 교단들이 한교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한교총은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이 참여한 최대 교회연합기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작년부터 한교총·한기총·한교연의 기구 통합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최근 한교총과 한기총이 통합을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통합 논의는 앞서 기술한 교회연합의 역사에서 보듯이 보수교계의 통합이란 한계를 가진다. 실제 1990년대 말부터 제한적이지만 당시 교회협과 한기총에 소속된 교단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한 시대적인 요청도 있어서 교회협과 한기총은 ‘연합과 일치’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일치위원회(위원장:최성규 목사)를, 교회협은 교회연합운동추진특별위원회(위원장:전병금 목사)을 구성하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일기구 탄생을 위해 깊숙한 논의를 진행했다. 물론 이 논의가 구체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이 논의의 중심에는 교회협과 한기총이라는 기구 외에 故 옥한흠목사가 초대대표회장이었던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한목협)의 역할이 있었다. 실제 한목협은 2012년 한국교회 986명의 목회자가 연서명하여 ‘연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열망은 진지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 연합의 논의는 한교총 중심의 보수 교계의 연합 논의라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 연합기구인 교회협을 배제한 연합 논의여서 제한적인 데다. 특별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연합기구는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금의 통합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 한교총이 공동대표회장 체제에서 1인 대표회장 체재로 전환한 것도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연합과 일치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집단지성이 작동하고, 시스템이 작용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엡 4:5-6)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지혜이다. 연합과 일치를 꿈꾸는 한국교회는 우선 현존하는 연합기구들이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더 넓은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야 한다. /성북교회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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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28
  • ‘코로나 시대’와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
      현금 한국 사회의 변화는 교회가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급격하다. 어쩌면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가 변해온 과정보다도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학교육의 현장도 다르지 않다. 선교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 피 선교 국가에서 선교 국가로 성장하여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교회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한국교회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소리들이 조금씩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전해진 바와 같이 각 신학대학원의 금년도 신입생 지원현황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위기감은 더 하다. 1970~80년대에 우수죽순처럼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1990년대에는 정원 확대는 물론 신학교들이 종합대학교로 개편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입학정원을 줄이거나 타 학과로 정원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현실은 정원 미달 정도가 아니라 학사운영이 어려운 정도로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걱정해야 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학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먼저 한국교회는 국민적인 신뢰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교육과 함께 전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전도는 물론 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신학교육은 더 이상 신학교만의 역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교단은 전체 교회가 신학교육을 위해서 뜻을 모아야 한다. 단지 신학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차원이 아닌, 목회자나 선교사 등 교회의 사역자로서 미래를 꿈꾸게 해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 그러한 꿈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후보생 부족사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셋째, 조금 획기적인 제안일 수 있지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으로서 6~7년의 수업연한의 단일한 제도로 교회 지도자를 양육하는 프로그램으로 개편하고, 그에 따른 비용은 전부 교단이 감당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 기간 동안 후보생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목회자, 선교사, 혹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여 준비된 사역자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 그 과정에서 후보생으로서 결격사유가 보인다면, 확실하게 걸러내야 한다. 더 이상 신학교육을 제도와 형식에 적당히 맞추는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수업연한 내내 교수와 후보생들이 수도원적인 환경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과 신앙을 전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양성하도록 개편해야 할 것이다. 단지 재능 있는 사람,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로서 신실하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자신의 섬김의 삶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신학교육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먼저 자신의 삶을 찾고, 그것을 나누면서 이루어 가는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신총회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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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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