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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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다음세대와 먼저 연합하는 일에 힘써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있는 한국교회는 4·10 총선 이후에 정치나 경제 상황과는 별개로 다음 세대와의 연합 문제로 혼란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점차 세속적인 문제에 함몰되어서 예수께서 희생과 헌신으로 모범을 보이신 섬기는 모습을 저버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보다는 어두운 죄악과 짝하여 성경적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기 일쑤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국교회 구성원의 2/3가 이단에 노출된 충격적인 사실이다. 신천지, 구원파,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전능신교, 여호와증인 등 이단들의 공세가 잠잠할 만하면 고개를 들고 코로나 이후 폐쇄된 교회가 줄을 잇는 사이에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가 연합을 해야 하는데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뉜 상황에서 교회 연합의 상징인 부활절 예배까지 아직도 하나가 되어 드리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외부적인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교회 내적으로 세대 간의 연합을 저해하는 다양한 문제가 한국교회 안에 있다. 부모와 자녀가 주일마다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일이 한국교회가 연합을 모색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출발점이다. 문제는 교회에 가서 자녀와 부모가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드리는 대예배와 자녀가 참여하는 부서 예배가 서로 소통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한다. 이미 세례의 선결 조건인 학습 제도를 없애고 곧바로 세례를 베풀 뿐만 아니라, 유아 세례를 받은 미성년 교인도 성만찬에 다세대가 참여하는 예배를 시행하는 교단이 늘고 있는데, 여전히 주일 예배에서 성인과 다음 세대가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미 미국교회는 교회 안에서 세대 간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청교도 전통이 시작될 때부터 주일 예배를 전 세대가 드리고 있다.    한국교회 전체 구성원 비율에서 다음 세대가 3% 미만이고, 이미 어린이와 청소년이 사라진 교회도 태반이다. 교회가 억지로 집회 출석률을 높이려고 자녀 동반 프로그램과 특별 새벽기도회까지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 단위 참석을 독려하지만, 이미 노인들로 기울어진 운동장은 쓸쓸한 모습이다. 이 문제를 서서히 회복하려면 주일 예배에 자녀들과 부모가 함께 참여하다가 설교 전에 아이들을 강대상과 복도에 초청하여 자연스럽게 전 세대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대가 설 때 저학년 경우에 교육 부서로 이동하게 하는 일을 우선하여 시도하면 좋겠다.    한가지 실례로 예수말씀연구소에서 시행하는 예수학교가 다음 세대를 위한 현장 교육을 제안하면서 스토리텔링을 화두로 꺼냈다. 주입식이나 일방적 교사 주도의 교육이나 다음 세대가 성경 이야기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배제한 귀와 눈으로만 배우는 교육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입과 손발로 참여하면서 시연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방식이 창의성과 흥미를 유발하고 성경 속으로 몰입할 때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로 통합된다. 교사와 다음 세대가 함께 어우러진 교육은 한국교회가 초창기에 시작하면서 남녀와 세대를 구분한 전통적인 방식을 청산하고 진정한 연합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시작점이다.    스토리텔링은 비단 설교의 문제만은 아니다. 담임 목사가 스토리텔링을 한다면서 주일 설교에서 자기 이야기만 실감 나게 자랑삼아 늘어놓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설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이 중심이 되지 못하게 하는 신성 모독이다. 스토리텔링은 설교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로 충만한 설교이다. 세상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왜 교회로 가는가? 영혼을 살리려는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담임 목사가 설교 예화나 논지의 극적 요소와 심지어 개그와 유머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뒤적거린다면 삯꾼이요 거짓 목사이다.    4대 절기를 위한 교회 활동을 준비하면서 대외적인 홍보를 위해 전단을 만들 때 다음 세대를 위한 고민으로 더욱 진지하게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그럴 때 다음 세대 친화적인 교회로 기존의 노년층 성도들과 연합하는 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의 사랑을 회복하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를 집안의 가장으로 모실 때, 그 순간부터 한국교회는 달라질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 한국교회는 초저출산 문제를 극복하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 수백억 조의 정부예산을 투입하고도 저출산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국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얼른 돌아가는 일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을 따라서 예수의 사랑으로 교회를 회복하고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여야 결혼하고 출산하는 문화가 교회 안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 하나님께서 남녀가 이룬 가정을 축복하시고 창조의 섭리를 이어가시려는 계획이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한국교회가 다시 성경대로 회복하여야 한다. 돈을 주고 집을 지원하고 직장을 마련해 주어야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할 것이라는 정책은 이미 실패하였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예배당이 연예당이라고 불리며 쌍쌍 파티도 하며 즐거운 웃음이 꽃피던 시절을 회복하여 다시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한국개혁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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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4-09
  • [정론] 교회, 하수구가 되다
      민대홍 목사   ‘고난’을 주제로 한국 역사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한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서이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설명하며, 구약의 히브리 민족사와 우리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사사기 시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결국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고난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01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겪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당한 설움과 고통은 개인 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그 시대를 함께 산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다. 그 시기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을 위로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조선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하수구’로 보았다. 하수구가 있어야 일상의 삶이 청결해지듯, 우리가 강력하고 혼탁한 폭력을 받아내는 하수구가 됨으로서 이웃 민족들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조선)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서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가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에서.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 신약시대 신앙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자유와 구원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은 이러한 예수가 하수구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사순절, 그 끝에 고난주간이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온당히 받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식민통치 시기.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종교마저 자유가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졌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법정에서의 사형판결, 예수는 뭇 백성들의 하수구가 되어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졌다. 예수의 제자들도, 제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바통은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짊어지는 하수구가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뼈를 꺾은 고난을 지낸 후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로교회 목사, 서로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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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8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실천
     20세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교단, 교파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도 있었다. 21세기 들어서 한국교회는 급격한 쇠퇴와 정체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어 왔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는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변화된 신학을 극복하고 개혁주의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회개용서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실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 하나님이시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다른 인격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바로 하나님을 닮는 일이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종교개혁교회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성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님으로써 루터파, 칼빈파, 츠빙글리파 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교회의 본질인 하나됨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찬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고 있던 개혁파 회중들이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루터파의 공재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받아들이는 개혁파 회중들에게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된다고 답변했다.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성찬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와 같이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성찬론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 교리의 경우 그러한 교리 차이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지는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오순절교회, 침례교 등은 비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을 수는 없다. 한 가정의 형제 자매가 서로 다르게 생겼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이 닮아 한 가족임을 알 수 있듯이, 형제 간의 미세한 차이가 가족됨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과 대립의 상태에 있다면 교회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분열과 대립의 이면에는 십자가와 희생 없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기 우상화가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십자가를 통해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부활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생명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겨울을 지나 새싹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연합과 일치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2024년 부활절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회복하고 전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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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5
  • [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나 ‘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꽝’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그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소)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꽝’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그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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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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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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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23

실시간 정론 기사

  •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는 삶
    ▲ 황수원목사  미국의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적인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후 그 부대를 방문한 선배 장군으로부터 책망 받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어느 날 부대를 방문한 장군은 카터에게 “자네는 사관학교를 몇 등으로 졸업했나?”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때 카터는 “800명 가운데서 59등을 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큰 칭찬을 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부동자세로 꽂꽂이 서 있었으나 그 장군의 대답은 의외였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면서 책망을 받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카터는 그때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함에 대해서 크게 후회하면서 그 때부터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선을 다한다’는 그의 수칙은 훗날 주지사로 진출 하게 하였고 거기서도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으로서 미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카터는 대통령직을 다한 후에도 전 세계를 순방하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인 ‘해비타트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열심히 일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로마서 12장 11절~13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게을러서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다소 과격한 듯한 말씀을 던지면서 부지런히 일할 것을 요청하였다.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루손섬의 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이지 않고 열심히 일함으로 필리핀 민족의 불행과 슬픔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운전수 노릇하면서도 그 부지런함이 인정되어 버스회사의 지배인이 되었고 세계 2차 대전 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국방장관이 되었고 마침내 그는 겨우 46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당시 만연하고 있던 부정부패를 막고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공직자 재산등록을 실시하여 공무원들로 하여금 부정축재를 못하게 막았으며 백성들로부터는 인정받는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비행기 사고로 조난을 당했을 때 필리핀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슬퍼할 정도로 위인의 삶을 살았다. 이광웅시인은 〈목숨을 걸고〉라는 시에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하라.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라. 무엇이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하라”고 외쳤다. 사랑의 우리 하나님께서도 창조하신 우리 사람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라고 명령하셨다.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대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2-13
  • 형제 사랑으로 명절을 보내자
     사람들은 신정이나 구정이 되면 단순히 새 달력을 사용하는 시기라는 의미 이상의 느낌을 가진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시점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서 다른 무엇이 있을까? 또는 특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지내는 것이 좋을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거의 대부분 12월 31일 늦은 밤에 모여 새해 0시를 예배를 드리면서 보내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거나 1월 1일 오전에 모여 ‘신정예배’를 드린다. 성경에도 없고 서양교회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교회의 새로운 문화로 정착해가는 것 같다. 어떤 교회들은 신년을 맞아 한 주간 또는 몇 주간 ‘새해맞이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기도 한다. 역사와 시간의 주인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새해를 맞아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와 헌신과 신앙고백을 드리는 기회를 가지는 일은 성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의미가 있는 교회문화라고 보겠다. 한편 성경의 교훈에 따르면, 세상에서 말하는 ‘새해/신년’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본래 성도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My times are in your hands,” NIV). 또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전도서 1:9). 그러므로 설날이 되었다 해서 영적으로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칫 세속적인 세계관을 따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데살로니가전서 5:16, 18) 자세를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고린도후서 4:16) 삶과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종말론적인 삶(베드로후서 3:8~14)을 살아가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세상풍조는 변하고 국내와 국제의 정세도 늘 변화하지만 우리의 주 예수께서는 만유와 만민의 주님이 되시므로(고린도전서 3:21~22)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민족과 세계복음화라는 지상목표를 추구하는 데(마태복음 6:33; 28:18~20)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설 연휴 기간에 그리스도인들도 마음이 들뜨거나 풀어져서 TV 앞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기 쉽다. 신앙서적들을 읽거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기회로 삼는 이들은 영성형성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CCC나 기독실업인회 같은 단체에서는 ‘원단금식기도회’를 가진다. 어떤 작은 교회는 해마다 설 연휴 때 교인의 절반 정도가 네팔에 단기선교여행을 다녀온다.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사랑으로 섬기는 기독청년들의 활동도 있다. 설에 할 수 있는 참 아름답고 선한 일들이다. 설날에 남녀노소가 설빔을 하고 부모 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드리는 오랜 전통이 있었으나,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설 명절 문화는 많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미리 성묘도 하고 고향에 다녀온 후 설 연휴 기간에 가족이 함께 놀이동산에 가거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설 기간에나 그 이전에나 고향의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문안인사 드리며 용돈을 드리는 일은 꼭 지켜나가야 할 미풍양속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예절을 등한히 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며 전도 길을 막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특히 사이비이단 교주들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는데, 경계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할 행동이 필요가 있다(고린도전서 9:19~23). 믿지 않는 부모 형제가 설 명절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경우, 믿음을 핑계로 찾아가지 않는 예가 있는데 본이 되지 않는다. 돌아가신 조상에게 절하는 행위는 해선 안 되겠으나, 음식 준비하는데 비용도 부담하고 돕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평소에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공경해드려야 할 것이며, 어려운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때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전 칼빈대 신대원장, 현 영목신학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1-31
  •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승리하자
     2019년 새해 1월에 들어섰다. 많은 교회들이 송구영신예배 시에 ‘신년 말씀 카드’를 기도로 하나씩 뽑아서, 그 말씀을 하나님이 새해에 주신 말씀으로 받고 믿으며 기뻐한다. 어떤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에 덜 흡족하면 다시 줄을 서서 뽑기도 한다. 필자도 새해 여러 교회를 말씀 사역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가는 교회마다 이 말씀 카드를 뽑았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계속 받게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이사야 41:9)”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고 말씀으로 격려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많은 고난과 방랑의 역사 속에서 터득한 교훈으로 일찍부터 어린 자녀들에게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교육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 갈 수 없는 환경이 또다시 올 수 있음을 예견하여 가정 학교(Family School)를 열고 부모가 선생님이 되어 말씀을 통해 험한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말씀 중심의 삶 교육인 ‘쉐마(말씀을 들으라) 교육’으로 알고 있다. 쉐마교육은 유대인들의 교육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현재까지 자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며, 지금까지 굳건하게 그들만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제국들이 결국 다 무너졌지만, 이스라엘의 유대 문화만큼은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이야기했다. 간추린다면 첫 번째는 야훼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로 무장한 유대 민족의 독특한 정체성, 두 번째는 유대 지도자들(특히 성경 교사들이었던 랍비)의 모범적인 리더십을 들 수 있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곁에 두어, 말씀에 기반한 삶을 살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자유케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구름 기둥으로 고단한 광야 생활을 인도하셨던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2019년 새해도 동일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길 원하시며, 말씀으로 새롭게 되길 원하신다. 말씀으로 새 일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살아있는 말씀이 여러분 말씀 카드를 넘어서 매일의 삶을 다스리심을 믿고 앞을 향해 나아가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홍해를 갈라서 육지를 만들어 바다 가운데로 길을 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 한민족의 통일문제도 준비하신 길이 있다. 우리 교회들의 기도 제목들 하나하나에도 준비하신 길이 있다. 사면초가 진퇴유곡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준비하시며 행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따라가자. 기적의 하나님,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계획을 믿으며 나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어려움은 축복으로 바뀔 것이다. 그분의 살아있고 활력 있는 말씀만 의지하며 따라가는 복된 한 해가 되길 축복한다. 그분은 말씀으로 길을 인도하시는 야훼 하나님이시다. /묵동성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1-24
  • 한국교회, 먼저 ‘죄책고백’으로 시작하자
      한국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복음전파는 처음부터 죄책고백과 함께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일은 1903년 원산에서 하디선교사가 동료선교사들을 감동케 한 회개의 기도에서, 1907년 평양장대현교회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장로가 회중을 감동케 한 죄고백의 기도에서 각자가 죄를 고백하는 회개운동으로 발전하여 한국교회 초기부흥의 불씨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체로 개인의 사적인 죄는 공중 앞에서 고백하도록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행한 고해성사의 문제성 때문이며, 사적인 죄를 공중 앞에 고백하면, 이해관계에 따라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여 죄용서의 은혜를 입도록 하고 있다(요 20:23, 시 23:5, 단 9:5, 요한1서 1:9), 그러나 인간의 죄는 언제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지만, 역시 이웃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것은 행위자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따라, 그의 행위가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성경에서 다윗은 왕의 신분과 지위에 있었기에 그가 행한 죄가 미치는 영향과 책임은 막중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의 다윗을 향한 죄책의 지적은 죄를 회개하여 다시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다(시 51).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도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교회와 모든 기독인의 죄책을 매 주일공예배의 하나님과 회중 앞에 일깨우고, 목회자가 죄책고백을 행하도록 권하였다(기독교강요, 3권 1~5장). 지금 한국교회는 실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모습이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 모두의 허물과 실수(죄)가 한국사회에서 너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으로는 지나친 개교회주의와 개교파주의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이 흔들리며, 외적으로는 교회의 공공성이 엄청난 사회적인 불신에 휩싸인 모습이다. 그래서 이전과 같은 교회성장도, 복음전도도 모두 한계에 직면한 모습이다. 더욱이 교회 내적인 문제를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도 상실한 채(교회법과 정치가 있음에도), 일반법정의 판단에 내맡겨진 교회의 문제들은 심지어 TV에 그대로 노출되어 한국교회와 목사의 권위추락 또한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이러한 위기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한국교회는 다윗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모든 문제(대형교회의 목회세습, 목회자의 비윤리성 등)는 해당 교회와 그 지도자의 문제이지만,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 모두의 문제가 분명하다. 그야말로 한국교회는 “내 탓이오”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죄책고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마 18:15~20). 그것들이 남의 일, 타 교단, 타 교회, 타 목사의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개신교회 우리 모두의 실수(죄)임을 시인하고, 우리 하나님께 엎드려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죄책고백운동”이 새해에 시작되었으면 한다. 이러한 죄책 고백은 곳곳에 모이는 신년하례 예배와 매 주일 지역교회 예배에서, 장로님의 기도와 목회자의 기도 가운데서, 한국교회 전체가 년 중 한 주간(새해 첫 주간)을 기도주간으로 정하든지, 또는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교단별 목사장로기도회에서, 통회하며 자복하는 죄책고백의 기도가 실천되었으면 한다(느 9:1~3, 삼상 7:3~12). 그것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며, 한국교회의 본질(거룩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며, 지금 한국사회에 평화 시대가 도래한 것 같으나, 여전히 국가의 위기를 느끼게 되는 상황에서 그 모든 불안을 극복하고, 참 평화를 발견하는 길임을 기억하자! 우리 주님은 “회개하여 처음 행위(사랑)를 가지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고 경고한다. 아마도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소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이 침묵을 깨고, 이러한 죄책고백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선다면, 이 신년 새해에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크게 쓰임 받는 기관들이 되리라 기대한다.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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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1-22
  • 다음 세대를 위한 본질교육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자살률보다 3배나 높다. 그리고 자살이 10년째 청소년 사망원인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개선될 기미조차 없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8 청소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9~24세)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었다. 평상시 스트레스를 느낀 중·고등학생은 지난해 37.2%나 됐다. 게다가 ‘최근 12개월 동안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중·고등학생도 25.1%였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외국과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면 부모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가출한 청소년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 보았더니 가출 이유에 대해 73%가 부모 때문에 가출하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결국 부모와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와 믿음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잘 교육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시대마다 특별한 방법을 찾았지만, 그 방법은 유행처럼 끝나버린 경우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요즘 왜 많은 목회자들이 쉐마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마다 청소년들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각 교단마다 총회뿐 아니라, 노회 그리고 교회에서 다음 세대의 중요성을 알고 이제라도 가르쳐 보려고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자녀교육방법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들에게 “네 자녀, 네가 가르쳐라!”고 말씀하고 있다.(신 6;4~9) 즉 부모가 직접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통해 신앙을 자녀에게 전수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육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쉐마교육의 핵심은 질문과 토론에 있다. 질문과 토론으로 뇌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질문을 많이 하면 할수록 대답하기 위해서 뇌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특별히 부모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쉐마교육은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회에 데려다주는 것은 잘했지만, 부모가 직접 자녀들을 가르치진 않았다. 물론 가정예배도 시도해 보고 몇 가지 자녀를 가르치는 방법도 동원해 보았지만, 그때뿐이고 지속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방법이 중요하다. 이미 예수님은 질문과 토론으로 성경에 310회 정도를 말씀하고 있다(눅 2:46-47). 덧붙여 말하면 질문과 토론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면 얼마 큰 유익이 있는가는 이미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외국에서 많이 실시하고 있는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인성교육과 부모와 소통을 위하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부모와 함께하는 금토캠프, 부모와 함께 드리는 주일예배, 인성 교육을 위한 암송, 부모와 함께는 역사탐방’ 등이 있다.  2010년부터 시작한 쉐마 사역이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본질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해갈수록 많은 기관과 매스컴에서 관심을 갖고 초청을 한 이유도 성경적 방법으로 다음세대를 세워보자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퍼진다면 한국교회와 다음 세대는 분명히 회복될 것이고, 한국교회 부흥의 불길도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 /쉐마학당연구원 원장·과천약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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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2-31
  • ‘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무례한 기독교〉는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이다. 2018년 한해를 보내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무례한 크리스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하면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덕망을 갖춘 매력적인 신사숙녀로 생각나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보내면서 또다시 ‘무례한 기독교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름만 대면 외국인도 다 아는 손으로 꼽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그토록 시끄럽게 또는 부끄럽게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여서 부른다. 그냥 ‘안티’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며 그렇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과연 꼭 그들이 맹목적으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나쁜 기사의 장본인들이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아주 당혹스럽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흐뭇한 기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면 얼마나 바람직하며 기쁜 일이겠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이 나쁜 뉴스가 등장하면 나에겐 조바심 병이 도진다. 혹시나 교회 이름이 뒤따라 나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다. 결국 상당수의 기존 교인들이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이 돼가고 있다.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너무 좋은데,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 너무나 큰 이질적 모습의 예배당, 상식이 떨어지는 목사의 언행과 설교, 가난한 자와 약자를 꺼려하는 교회, 거기다 교인들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교회를 모욕하는 안티는 사실은 교회 밖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다. 결국 인터넷 등 언론매체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는 ‘혼신족’까지 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칫하다보면 ‘가나안’족들을 대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요청이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만 교회 타락의 이유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한국교회의 일원이며, 스스로 회개하며 거듭나야 할 죄인이다. 이러한 지적이 ‘유체이탈화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핑계 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자신이어야 한다.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는 ‘진리는 시민교양과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겉껍질만으로 제시되는 예의, 곧 위선은 피해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우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먼저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앙 내지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앙인들이 더욱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예의와 공공성을 갖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큰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백석대 부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8-12-30
  • ‘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 주도흥목사  〈무례한 기독교〉는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이다. 2018년 한해를 보내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무례한 크리스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하면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덕망을 갖춘 매력적인 신사숙녀로 생각나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보내면서 또다시 ‘무례한 기독교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름만 대면 외국인도 다 아는 손으로 꼽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그토록 시끄럽게 또는 부끄럽게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여서 부른다. 그냥 ‘안티’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며 그렇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과연 꼭 그들이 맹목적으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나쁜 기사의 장본인들이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아주 당혹스럽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흐뭇한 기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면 얼마나 바람직하며 기쁜 일이겠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이 나쁜 뉴스가 등장하면 나에겐 조바심 병이 도진다. 혹시나 교회 이름이 뒤따라 나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다. 결국 상당수의 기존 교인들이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이 돼가고 있다.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너무 좋은데,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 너무나 큰 이질적 모습의 예배당, 상식이 떨어지는 목사의 언행과 설교, 가난한 자와 약자를 꺼려하는 교회, 거기다 교인들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교회를 모욕하는 안티는 사실은 교회 밖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다. 결국 인터넷 등 언론매체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는 ‘혼신족’까지 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칫하다보면 ‘가나안’족들을 대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요청이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만 교회 타락의 이유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한국교회의 일원이며, 스스로 회개하며 거듭나야 할 죄인이다. 이러한 지적이 ‘유체이탈화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핑계 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자신이어야 한다.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는 ‘진리는 시민교양과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겉껍질만으로 제시되는 예의, 곧 위선은 피해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우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먼저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앙 내지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앙인들이 더욱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예의와 공공성을 갖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큰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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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2-27
  • 크리스마스 - 예수가 우리를 찾아 나선 첫 날
    ▲ 정인교목사  “어머니 난 지금… 참호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몹시 추운 날씨지만 참호속은 지푸라기가 넉넉해 꽤 아늑해요. 오늘은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본적없는 기적같은 광경을 보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페이스북에서 ‘1914년 기적의 크리스마스’라는 영상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한 영상이었지만 보는 내내 가슴을 잔잔히 적셔왔다. 앨프레드 두건 차트 소위의 편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의 이프로 지역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온종일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리고 깊은 밤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멀리서 간간히 포성이 들리는 사이로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노래 소리가 들여왔다. 스틸레 나흐트 하일리게 나흐트… 독일군 참호에서 ‘고요한밤 거룩한 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러자 영국군이 그 찬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서로를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같은 찬송을 부르다니….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았다. 영국군 병사 하나가 비무장인 채로 참호에서 나왔다. 그것을 보고 양국 병사들이 하나둘씩 참호에서 나온다. 주님이 오신 성탄절 아침 그들은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눈다. 어제 부른 찬송 이야기를 하며 함께 사진을 찍는다. 양 팀으로 나눠 축구경기를 하고 서로 상대편의 머리를 깎아 준다. 다시금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고 이들은 서로 별일 없이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자신들이 소중히 아끼는 것을 상대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이다. 성탄의 기적은 그렇게 전쟁터에 찾아왔다. 가슴이 먹먹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 나선 첫날인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로 기적 아닌가? 피해자인 하나님이 먼저 가해자인 인간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신 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에게 생명의 손을 내미신 날…. 서로를 겨누던 총부리를 내려놓는 기적은 어쩌면 당연한 거 아닌가? 영상을 보니 영국군은 메리, 즐거운 크리스마스로 인사하고 독일군은 ‘프로헤 바이나흐텐’ 즉 경건한 성탄으로 인사한다.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전장의 병사들이 호응한 감동의 날은 당연히 즐거운 날면서 경건한 날이다. 그런데 아기 예수가 누우실 구유는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 백화점 세일과 만원이 된 모텔, 일년 대목 보는 술집이 들어서고 술집 매상이 들어서서 즐겁다고 한다. 성탄이라는 명칭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 자리에 Season’s Greeting을 새겨 넣은 채 말이다. 이렇게라도 즐거워야 할 만큼 우리 인생사가 각박하다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저녁에 귀가하는데 아파트 입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통장님, 너무 수고 많으세요. 올해 제가 처음 본 성탄 트리네요” 모든 아파트 통장 중에서 역사상 가장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통장님이 방긋 웃으셨다. “다들 예전 같지 않아요.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런지 얼궁에 웃음도 사라지고 성탄절이 코앞인데도 아무 생각들이 없는 것 같아요. 제발 성탄절만이라도 서로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어요” 나는 안다. 우리 통장님이 예수 믿는 권사님이라는 사실을…. 성탄트리를 장식하면서 권사님의 기도가 내 기도와 같았으면 좋겠다. ‘주님 이 땅에 평화를 주세요.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살게 해 주세요.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예수 믿어 행복하게 해 주세요!’ 1914년의 기적이 올해 다시 이 땅에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울신대 설교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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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8
  • 변질에서 희망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서라
    ▲ 황인찬목사 언제부턴가 한국의 기독신자로서 자부심을 잃었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정통 교회와 이단을 일반 사회가 구분하지 못하므로 이단 사이비들의 준동과 비윤리와 반사회적인 작태가 오롯이 교회의 몫이 될 때 아픔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단과 사이비들의 행태여서 우리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아니 더 치를 떨며 비판하고, 암 덩어리 같이 나쁜 놈들이라고 거품을 물며 그들의 해악을 말하고, 우리 교회가 진정 그렇지 않음에 자위를 했다. 하지만 정통교회와 그 목사들의 일탈과 비윤리, 비도덕의 현장이 고발될 때면, 그것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듯 한, 때로는 자랑스러워하던 인사나 교회의 것이라면 그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 된다. 너무나도 만연한 목사들의 잘못과 부정부패, 역사의식이 실종된 망언 등을 접할 때 한국교회에 정말 희망이 있는가를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처럼 심해에 좌초된 것 같은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여기의 성은 환란으로 멸망에 이른 오늘의 한국교회다. 열국의 부러움을 사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열방의 수치와 모욕거리가 되었다. 선지자는 ‘슬프다’는 말로 그의 심정을 토로한다. 위로 받고자 해도 위로 자가 사라져 위로 받을 수가 없다. 상황의 악화로 그 비참함이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형편이 되었다. 선지자는 고백한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소망이 끊어진 것을 절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절망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강제로 옷 벗김을 당한 사람처럼 참담한 모습으로 손가락질 받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을 마땅히 의지하고 경외해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맘몬을 믿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로 이렇게 되었다. 지도자들의 안중에 하나님 없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여전히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선지자는 이 처절한 형편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피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절망에 찢긴 나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포기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는 한 희망은 있다. 우리 교회가 오물을 뒤집어쓰고,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깨어지고, 망한 자처럼 되었어도, 심판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기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주님의 위로가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베어도 그루터기는 남겨두신다. 그 남겨진 그루터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신다. 한국교회 심장의 박동을 멎게 하지 않으시고, 의의 사람 10사람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찾으시고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게 하신다. 시편의 기자는 말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희망, 나의 소망은 주님께만 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회개의 무릎으로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변질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서 희망이 되자.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하지만 고난이 인생의 큰 유익이 된다. /예장 개혁 증경총회장 의왕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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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2-04
  • 중심과 변혁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 선수의 한국 여자탁구가 여자단체전에서 세계를 제패했다. 8전 8승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다. 일제 강점기에 손기정 선수 이후에 한국의 어떤 스포츠가 세계를 제패한 일이 처음이었다.   이 열기로 탁구장이 많이 생겼다. 내가 중학교 때 탁구를 배운 것이 이런 흐름에서였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탁구를 가르친 코치는 늘 자신이 이에리사 선수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처음에 기본 동작을 배웠다. 붉은 벽돌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탁구장에서 동네 뒷산까지 뛰어 올라가는 일이 훈련의 시작이었다. 뒷산에서 벽돌을 들고 기본 서식을 연습했다. 한 달 동안은 탁구채를 잡지도 못하게 했다. 벽돌을 탁구채 삼아 포핸드와 백핸드 동작을 팔이 아파서 할 수 없을 때까지 반복했다.   탁구장에 돌아와서도 탁구채는 잡지 못했다. 선수급 되는 사람들이 치는 것을 관찰하게 했다. 그들의 동작을 보면서 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한 달 정도 후에 처음으로 탁구채를 잡았는데, 신기하게 탁구가 되었다.   모든 운동에는 기본기가 있다. 그 운동에서 얼마만큼 발전하느냐는 기본기가 얼마나 잘 잡혀있느냐에 달려있다. 이것이 중심이다. 중심이 확고하면 경기를 할 때 벌어지는 다양한 변화의 상황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중심이 깊고 확실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삶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신앙의 중심이 든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의 중핵은 성자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계시를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로 나누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특별계시를 가장 실제적으로 말하면 66권 성경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여기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이 기독교의 근간을 이룬다.   중심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중심에서 밖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 또는 변혁의 탄력성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너무도 뚜렷한 현상이 변화다. 기술의 발전과 변화의 속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다. 변화의 흐름에서 밀려나면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변화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이 걸린 필수 항목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기대어 오늘날의 인간 생존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나는 변화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일하고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이와 연관된 굳건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요 뿌리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자칫 잘못하면 교조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해명 없이 기존의 생각을 무조건 고수하는 고정관념 말이다. 성서에 대한 깊은 믿음이 교조주의의 곁길로 빠지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변화의 탄력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변화의 흐름에 문을 걸어 잠그면 교조주의로 빠진 것이다. 성경의 진리를 근간으로 시대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변혁의 역동성이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해야 한다. 성경은 원래 그런 책이다.   남북, 북미 관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큰 틀이 변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고 있다. 한국교회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중심이 분명한가, 그리고 변화의 탄력성이 충분한가?  /성락성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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