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정론

실시간뉴스
  • [정론] 다음세대와 먼저 연합하는 일에 힘써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있는 한국교회는 4·10 총선 이후에 정치나 경제 상황과는 별개로 다음 세대와의 연합 문제로 혼란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점차 세속적인 문제에 함몰되어서 예수께서 희생과 헌신으로 모범을 보이신 섬기는 모습을 저버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보다는 어두운 죄악과 짝하여 성경적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기 일쑤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국교회 구성원의 2/3가 이단에 노출된 충격적인 사실이다. 신천지, 구원파,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전능신교, 여호와증인 등 이단들의 공세가 잠잠할 만하면 고개를 들고 코로나 이후 폐쇄된 교회가 줄을 잇는 사이에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가 연합을 해야 하는데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뉜 상황에서 교회 연합의 상징인 부활절 예배까지 아직도 하나가 되어 드리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외부적인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교회 내적으로 세대 간의 연합을 저해하는 다양한 문제가 한국교회 안에 있다. 부모와 자녀가 주일마다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일이 한국교회가 연합을 모색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출발점이다. 문제는 교회에 가서 자녀와 부모가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드리는 대예배와 자녀가 참여하는 부서 예배가 서로 소통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한다. 이미 세례의 선결 조건인 학습 제도를 없애고 곧바로 세례를 베풀 뿐만 아니라, 유아 세례를 받은 미성년 교인도 성만찬에 다세대가 참여하는 예배를 시행하는 교단이 늘고 있는데, 여전히 주일 예배에서 성인과 다음 세대가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미 미국교회는 교회 안에서 세대 간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청교도 전통이 시작될 때부터 주일 예배를 전 세대가 드리고 있다.    한국교회 전체 구성원 비율에서 다음 세대가 3% 미만이고, 이미 어린이와 청소년이 사라진 교회도 태반이다. 교회가 억지로 집회 출석률을 높이려고 자녀 동반 프로그램과 특별 새벽기도회까지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 단위 참석을 독려하지만, 이미 노인들로 기울어진 운동장은 쓸쓸한 모습이다. 이 문제를 서서히 회복하려면 주일 예배에 자녀들과 부모가 함께 참여하다가 설교 전에 아이들을 강대상과 복도에 초청하여 자연스럽게 전 세대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대가 설 때 저학년 경우에 교육 부서로 이동하게 하는 일을 우선하여 시도하면 좋겠다.    한가지 실례로 예수말씀연구소에서 시행하는 예수학교가 다음 세대를 위한 현장 교육을 제안하면서 스토리텔링을 화두로 꺼냈다. 주입식이나 일방적 교사 주도의 교육이나 다음 세대가 성경 이야기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배제한 귀와 눈으로만 배우는 교육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입과 손발로 참여하면서 시연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방식이 창의성과 흥미를 유발하고 성경 속으로 몰입할 때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로 통합된다. 교사와 다음 세대가 함께 어우러진 교육은 한국교회가 초창기에 시작하면서 남녀와 세대를 구분한 전통적인 방식을 청산하고 진정한 연합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시작점이다.    스토리텔링은 비단 설교의 문제만은 아니다. 담임 목사가 스토리텔링을 한다면서 주일 설교에서 자기 이야기만 실감 나게 자랑삼아 늘어놓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설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이 중심이 되지 못하게 하는 신성 모독이다. 스토리텔링은 설교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로 충만한 설교이다. 세상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왜 교회로 가는가? 영혼을 살리려는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담임 목사가 설교 예화나 논지의 극적 요소와 심지어 개그와 유머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뒤적거린다면 삯꾼이요 거짓 목사이다.    4대 절기를 위한 교회 활동을 준비하면서 대외적인 홍보를 위해 전단을 만들 때 다음 세대를 위한 고민으로 더욱 진지하게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그럴 때 다음 세대 친화적인 교회로 기존의 노년층 성도들과 연합하는 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의 사랑을 회복하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를 집안의 가장으로 모실 때, 그 순간부터 한국교회는 달라질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 한국교회는 초저출산 문제를 극복하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 수백억 조의 정부예산을 투입하고도 저출산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국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얼른 돌아가는 일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을 따라서 예수의 사랑으로 교회를 회복하고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여야 결혼하고 출산하는 문화가 교회 안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 하나님께서 남녀가 이룬 가정을 축복하시고 창조의 섭리를 이어가시려는 계획이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한국교회가 다시 성경대로 회복하여야 한다. 돈을 주고 집을 지원하고 직장을 마련해 주어야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할 것이라는 정책은 이미 실패하였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예배당이 연예당이라고 불리며 쌍쌍 파티도 하며 즐거운 웃음이 꽃피던 시절을 회복하여 다시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한국개혁신학회 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4-04-09
  • [정론] 교회, 하수구가 되다
      민대홍 목사   ‘고난’을 주제로 한국 역사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한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서이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설명하며, 구약의 히브리 민족사와 우리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사사기 시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결국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고난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01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겪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당한 설움과 고통은 개인 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그 시대를 함께 산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다. 그 시기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을 위로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조선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하수구’로 보았다. 하수구가 있어야 일상의 삶이 청결해지듯, 우리가 강력하고 혼탁한 폭력을 받아내는 하수구가 됨으로서 이웃 민족들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조선)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서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가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에서.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 신약시대 신앙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자유와 구원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은 이러한 예수가 하수구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사순절, 그 끝에 고난주간이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온당히 받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식민통치 시기.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종교마저 자유가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졌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법정에서의 사형판결, 예수는 뭇 백성들의 하수구가 되어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졌다. 예수의 제자들도, 제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바통은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짊어지는 하수구가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뼈를 꺾은 고난을 지낸 후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로교회 목사, 서로북스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4-03-08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실천
     20세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교단, 교파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도 있었다. 21세기 들어서 한국교회는 급격한 쇠퇴와 정체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어 왔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는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변화된 신학을 극복하고 개혁주의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회개용서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실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 하나님이시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다른 인격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바로 하나님을 닮는 일이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종교개혁교회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성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님으로써 루터파, 칼빈파, 츠빙글리파 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교회의 본질인 하나됨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찬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고 있던 개혁파 회중들이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루터파의 공재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받아들이는 개혁파 회중들에게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된다고 답변했다.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성찬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와 같이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성찬론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 교리의 경우 그러한 교리 차이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지는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오순절교회, 침례교 등은 비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을 수는 없다. 한 가정의 형제 자매가 서로 다르게 생겼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이 닮아 한 가족임을 알 수 있듯이, 형제 간의 미세한 차이가 가족됨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과 대립의 상태에 있다면 교회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분열과 대립의 이면에는 십자가와 희생 없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기 우상화가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십자가를 통해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부활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생명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겨울을 지나 새싹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연합과 일치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2024년 부활절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회복하고 전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백석대학교 부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4-03-05
  • [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나 ‘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꽝’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그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소)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꽝’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그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 오피니언
    • 정론
    2024-02-26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4-01-23

실시간 정론 기사

  • [정론]호국의 달에 생각하는 진정한 호국
    6월은 호국의 달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가기 위해 우리 모두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6월이 왜 호국의 달이 되었는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남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침략을 받았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남한을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해방전쟁이었지만 남한 입장에서 보면 겨레의 인권을 파괴한 무력 침공일 뿐이었다. 전쟁의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지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아도 전쟁 목적은 성취되지 않았다. 100보를 양보해서 해방전쟁(적화통일)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참담한 비극을 지불하고 이 나라가 통일된다 한들, 그 통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전쟁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은 그 결과가 너무나 참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 16개국 청년들이 이 땅에서 피 흘린 경험을 가진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해 증언해야 한다. 전쟁은 무익한 것이라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은 예방해야 한다고!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이 공산화가 되더라도 전쟁을 포기하라는 말이냐? 아니다. 한국은 전쟁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휼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역사가 그 진실을 증명하고 있다.    1950. 6. 25 – 6.25 발발 1953. 7. 27 – 휴전협정 1972. 7. 4 – 7.4 공동성명 1991. 12. 13 - 남북기본합의서 2000. 6. 15 – 6.15 선언 2007. 10. 4 – 10.4 남북정상선언 2028. 4. 27 – 판문점선언 2018. 9. 19 – 평양공동선언   참으로 긴 세월 동안, 남과 북은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적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면서 달려왔다. 전쟁 이후 20여 년 동안 남한의 통일정책은 북진통일이었고 그러다가 1974년에 남북 최고 지도자들은 전혀 새로운 3대 통일정책에 합의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그 이후 남북 정상들의 통일 회담은 7·4 성명에서 합의한 3대 통일 원칙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었다. 7·4 공동성명은 남과 북 모두 자국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비판받아 왔다.   그렇다. 그게 일정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단으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흡수한다는 불멸의 통일 원칙이 자주적, 민족적 역량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이룬 것은 과소 평가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열어놓은 평화의 기초가 16년 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었다.   1990. 12월 남북 당국자들은 통일의 과정까지 대략적인 합의에 이르게 된다. 1단계– 교류협력, 2단계– 남북연합, 3단계- 남북의 평화통일! 이렇게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는 10년 후 드디어 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김대중/김정일)들이 만나 통일의 방식과 통일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하게 되었다.   6·15 공동선언 1항은 자주적 통일원칙을 확인하였고 통일 방안으로서 교류 협력, 남북 연합, 평화적 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구체화 시켰다. 남북대화의 역사에서 최초로 물꼬를 튼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이론적으로 거의 완전한 설계도를 완성하는 이는 노태우 대통령이었고,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제적 실천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남북이 상호 국가적 존엄을 인정하고 통일의 기운을 최고조로 이끈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6·25의 노래 가사를 기억하는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려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그렇다. 이것이 전쟁 이후 약 20년 동안 우리의 보편적 정서였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하였다. 1991년에는 남과 북이 서로 묵인하는 가운데 U.N에 동시 가입했고 1990년과 1992년에는 한국전쟁의 실제적 당사자였던 러시아, 중국과 공식적인 수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혈맹이었던 미국도 한국전쟁에서 적으로 만났던 중국과 일찍이 수교했다. 6·15 정신은 6·25 정신 쇠퇴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환경 변화와 대한민국의 엄청난 발전 속도에 알맞게 발전적 성숙을 이룬 것이다.   6·25를 잊지 말자는 호국이 여전히 북한에 대한 증오나 적대감으로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북한에 대한 이해와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상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평화의 기운을 진작시켜 가는 것이 진정한 호국이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이 땅에 전쟁이 발발하면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다. 힘이 없어서, 의미 있는 저항 한 번 못 하고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겪어야 했고 그 결과 참혹한 한국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 그때는 힘이 없어서였다고 변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이야 무슨 변명이 용납되겠는가!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협(가능성)은 핵을 보유한 북한에 있지 않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요, 세계가 인정한 선진국 대한민국이 전쟁 예방 노력을 다하지 못한 데 있었다는 준엄한 역사적 단죄를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을 달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 이 땅에 평화의 기운이 샘솟듯 솟아나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평화만이 살길이다.   평화의 사도인 한국교회여, 평화만이 진정한 호국의 길임을 잊지 말자.
    • 오피니언
    • 정론
    2023-06-20
  • [정론]일반은총에 덜 저항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내려주신다. 그런 은총을 신학자들은 '일반은총'이라고 불러 왔다.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구원하시는 은총인 특별은총에 비해서, 일반은총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미쳐지는 은총이다. 그렇기에 일반은총은 구원하지는 않지만 타락한 세상이 그래도 유지되며 존속해 갈 수 있도록 주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다. 햇빛과 비를 주시어 만물의 생장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이 세상에 지속하도록 하시는 은총을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일반은총의 손길이 없으면 이 세상은 그저 멸망하고 만다.  믿지 않는 분들은 이 세상이 은혜로 유지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고 그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일반은총에 저항한다. 그래서 일반은총을 우리들은 그에 대해서 사람들이 '저항하는 은총'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구원하는 은총인 특별은총이 저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인 것과 대조되는 일이다. 이 세상은 일반 은총에 항상 저항한다.     그러나 그 저항이 일정한 한도를 넘을 때, 한 사회가 유지되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우리는 노아홍수 때나 바벨탑 사건에서나 소돔과 고모라 등등 여러 곳에서 무수히 보아 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간접적 활동의 하나는 이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너무 저항하지는 않도록 기도하고, 이 세상이 상대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 갈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예를 들어서, 푸틴 같은 사람이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전쟁을 일으켜서 1년 이상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푸틴의 활동이 일반은총에 지나치게 저항하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면서 이 전쟁이 빨리 마쳐지도록 기도하고 이 전쟁의 종식을 위해 애써야 한다. 마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의 6.25전쟁에 대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했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 당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전쟁 초기에만 관심을 표현했지, 전쟁이 오래가자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사느라고 이 전쟁에 대해서 잘 의식하지 않고 사는 일이 많았다. 마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반은총 가운데서 이 전쟁이 빨리 끝나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상대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힘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온 세상에서 동성애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우리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잘못된 문화의 움직임 같은 것이 일반은총에 너무 지나치게 저항하여 가는 것임을 깊이 의식하면서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너무 지나치게 저항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그런 잘못된 문화적 분위기가 일반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물론 그렇게 온 세상에서 전쟁이 그쳐서 상대적 평화가 오고, 동성애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세상은 마땅히 있어야 할 세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우리들은 사람들이 특별은총과 접촉하여 진정한 사람의 길로, 진정한 사회로, 진정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천국복음 운동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님의 구속사역에 의해서 수립하신 그 하나님 나라에로 중생하여 들어 올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직접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러나 이런 천국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이끌어 들이는 천국복음운동을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덜 저항하여 가도록 하는 일도 힘써야 한다. 이런 일반은총 영역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우리의 본래적 사역인 천국복음운동의 산물이요 열매이다. 그리하면 간접적으로 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힘쓰는 일이 직접적으로는 천국 복음운동이고, 간접적으로는 일반은총에 조금 덜 저항하게 하는 일이다./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3-06-13
  • [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06-07
  • 나라사랑과 교회의 역할
      해마다 6월이 오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생각한다. 이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보다, 배워서 '생각하는' 세대가 더 많아졌고, '생각하지 않는' 세대도 적지 않다는 뉴스를 접하며 염려하게 된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로 멈춘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무너지고 찢긴 강산을 회복하고 재건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재건의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은 개인의 소소한 소망에 앞서는 최우선적 가치가 되었고, 국가경제라는 명분으로 특정 기업에 막대한 지원과 이윤을 몰아주었다. 2023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 군사력 세계 6위의 순위는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준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행사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드라마와 노래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동한다.   지난 70년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사에 기록될만한 성장과 부흥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이 땅에서의 축복을 선포하며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성장의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해를 조정하고 인도하는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다양한 이해에 편승하여 신앙과 신학의 차이를 내세우며 분열과 반목의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지 염려된다. 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예배드리는 이들을 향한 시선이 고울 수 없다. 삼일절 기념주일과 광복절 기념주일 예배를 드리며 강단에 세워진 태극기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을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뭉클해졌던 마음과는 사뭇 다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고백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육신의 골육과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통하여 민족교회와 국가교회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교회 앞에 국가 명을 붙여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일본교회와 독일교회 등의 명칭이 그렇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게 된다. 일제하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무장독립운동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기도하고 목숨을 걸고 제국주의에 맞섰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분들의 믿음과 나라사랑이 오늘의 자유로운 민주국가의 초석이 되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된다.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70년을 맞으며 안타까운 이유이다. 본래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이다. 여기에 '거룩하고 사도적인' 본질을 추가하여 교회의 표지, 즉 증거라고 부른다.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의 근거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고백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보편적인 교회보다 앞서는 가치로 주장할 수 없다. 로마서에서 민족교회의 근거를 제시한 바울은 작은 로마서라 불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완결된 가르침을 선언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장 28절).   대한민국의 오늘은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이 평화롭게 해결되기를 기도한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인류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것이 성숙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책임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무릎을 꿇는다/동인교회 목사·WCC 중앙위원  
    • 오피니언
    • 정론
    2023-05-31
  • [정론] 위기가정을 품는 그리스도인들
      ‘가정’의 의미는 단순히 혈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친구, 직장동료, 이웃, 그리고 지역사회를 포함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 이웃의 애환에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국가, 지역사회와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위기가정, 취약가정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다면, 뉴스에서 가끔 접하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을 마주하는 일이 지금보다 줄어들지 않을까?   선진국에서는 위기가정을 지원하는 통합적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국가가 주거정책, 교육정책, 돌봄정책을 통해서 아동의 양육을 책임진다고 한다. 그러기에 아동이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시민이라고 말한다.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 또한 국가와 마을공동체가 위기가정과 소외된 가정을 함께 책임지고 힘쓰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지역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교회와 성당, 복지센터들부터 세심한 관심으로 이웃들을 살펴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나 부속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유교문화와 가부장제가 남아있는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도 자녀 살해 후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고, 종속된 관계 속에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최근 인천에서 남편이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에는 완도에서 극단적 사건도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고립을 대처하기 위한 해결책을 논의하지 못했다. 앞으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희생자’를 위해, 그들의 고립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끔찍한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까지 국가는 무엇을 했을까.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했을까?   몇 년 사이 일어난 가슴 아픈 사건들을 보며 이제는 좀더 안전한 제도가 확충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형식적인 ‘사회안전망 구축’, ‘복지 사각지대 제로’ 등의 선언적인 단어들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외침들이다. 우리 사회가 방치했던 그들의 고립을 뉘우치며 함께 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분배의 불평등이 더욱 공고해지며, 이로 인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야말로 ‘마을공동체’ 개념이 간절히 요구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이는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종속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생명 가운데 하나이며, 독립된 존재이다. 지구별을 떠나 하늘 어딘가에서 별이 된 우리의 아이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목사, 가정협·새가정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3-05-09
  • [정론] 다음세대 위기와 극복 방향
      한국교회는 지금 ‘다음세대 사역이 위기이다’,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원인으로는 인구감소, 다음세대를 만날 수 있는 접점의 부재, 다음세대 전문사역자의 부재, 교회학교 예산삭감 등을 든다.   하지만, 진짜 다음세대 사역의 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주로 교회 ‘안’에서만 선포된다는 점이다. 교회 ‘밖’에 600만명의 다음세대가 있는데 교회들이 교회 밖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희귀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저절로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신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교회학교 생태계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대안으로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모델’을 제안한다.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운동은 지역교회와 함께 지역학교에 예배를 개척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운동이다.    현재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은 매주 2,500여명의 청소년들과 예배하고 있으며, 구성원 90%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학생이다. 다함께 찬양을 부르며, 간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경험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없어서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있는 이 상황에 교회 안에서만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장 많이 있는 학교를 직접 찾아가 예수를 믿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를 교회에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첫째, 학원복음화 비전과 전략을 교회 공동체에 공유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둘째, 학교에서 근무하는 기독 교사들을 발굴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소통과 협력을 통해 학원복음화 사역을 이어간다. 셋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중심으로 각 학교별 학부모기도회를 조직해 학교와 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민원 넣지 않기’ 운동을 펼쳐간다. 넷째, 교회 공동체에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후 교회학교에 학원복음화 비전과 전략을 공유하여 학교마다 예배를 개척한다.   과거 교회 안에 다음세대가 많았을 때는 관리 및 목양에 집중하면 됐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교회에 없기 때문에 전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안타깝지만 타 종교와 이단들이 목숨을 걸고 포교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이를 통해 교회들이 도전받고, 과거 믿음의 선배들처럼 열심을 다해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구령의 열정을 다시 찾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만이 다음세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교회들이 교회 밖에 복음을 접해 본 적 없는 청소년들에게 좀더 관심을 갖고 시간을 투자하면 교회학교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28:19).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목사·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3-04-28
  • [정론] 교회사명 과제인 디아코니아의 이해
      디아코니아라는 용어는 신구약 성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핵심적인 계명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즉 기독교사회봉사라는 단어로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아직 생소하고 개념과 의미가 정확히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못하는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책임이기도 한 디아코니아가 복음주의 내지 보수적 복음주의(근본주의)중심의 한국교회의 신학정체성에 의하여 신학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였고,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과정에서 소외되어 왔기 때문이다.   디아코니아는 기독교와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이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제는 예배(leiturgia), 친교(koinonia), 봉사(diakonia)였다. 그 후 교육(didache)과 선교(missio)가 분리 추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의 공통적인 모든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제는 둘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경건: pietas)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caritas)로 나뉠 수 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균형이 있는 두 개의 날개, 두 개의 바퀴, 두 개의 기둥과도 비유될 수 있다. 다분히 한국교회에는 복음주의적 요소가 우선적이고 강하게 강조되다보니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경건적 요소에 매진해 온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이웃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해석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인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첫째로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질문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그 율법학자의 입을 통하여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으로 답한 것을 맞다고 인정해주셨다. 즉 하나님 사랑과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웃사랑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이웃사랑의 행위로만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이웃사랑도 균형있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둘째로 디아코니아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최후의 심판의 유일한 기준은 바로 디아코니아적 삶을 살았는가 아닌가였다. 셋째로 디아코니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제자도를 나타내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여주시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행함으로 우리들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됨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요 향기로서 살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경건적 요소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디아코니아의 삶을 균형 있게 이루어 가야 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위기의 상황에 처해있다고 진단되고 있다. 교회성장이 멈추고 감소현상이 심각하다. 저출산 고령사회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음세대의 문제가 심각하다. 일반사회의 불신자들에게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게 나오고 있는 통계는 분명하다. 세상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 교회가 희망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본질적 사명과 책임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목사·한국기독교사회봉사연구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4-17
  • [정론] 잃어버린 3년에서 부흥하는 30년으로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가 2022까지 3년이라는 시간동안 전 세계적으로 지속될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도 코로나 팬데믹을 피할 수 없었고 고스란히 겪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교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코로나를 겪은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3년의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먼저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첫째, 교회 성도들을 잃었다. 대면예배가 제한되면서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예배생활이 전반적으로 약화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예배의 경건성이 약화되었다. 현장에서 받은 성령의 감동이 약화되면서 성도들의 믿음이 약화된 것이다. 둘째, 신앙의 열정을 잃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예배를 드리다 보니 찬양의 소리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기도의 소리가 잦아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찬양의 소리, 기도의 소리가 약해지면서 예배의 열정이 약해졌다. 셋째, 전도와 선교를 잃었다. 코로나로 인해 반기독교적인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교회의 전도와 선교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전 세계적으로 출입국이 제한되고 선교활동이 제한되므로 코로나 3년은 전도와 선교의 정체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교회에 남겨 놓으신 것들이 있다는 것에 다시 소망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나? 첫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공동체이다. 두려워하는 세상을 향해서 교회는 외쳐야 한다. “여기 불변하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고 세상을 향해서 외쳐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다. 둘째, 세상에 남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성령은 지금도 교회와 함께 하면 교회를 인도하고 계시고 일하고 계신 줄 믿는다. 코로나를 겪은 교회가 지금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하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아갈 때에 전도와 선교의 새로운 부흥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아직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 놓으셨다. 모압땅에서 다 잃어버리고 남은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셨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은 그 남아 있는 진실한 성도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는 줄 믿는다.   코로나로 3년동안 교회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들을 붙들고 불평하고 좌절해서는 안 될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남겨두신 것들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울산 명성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3-03-21
  • 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 사랑이란 대개 예배 다음에 추가적으로 실천하게 되는 선한 행동으로 인식된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 이웃 사랑이든지 아니면 선교나 전도를 하기 위해 사전 작업으로 실천하는 행동이 이웃 사랑인 경우도 있다. 이 말은 이웃 사랑이 고유한 자기영역을 확보하기보다 언제나 구원이나 전도와 관련해서 부수적으로 등장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이웃 사랑이 구원과 관련되어 등장할 때는 이웃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되면 안된다는 이신칭의론의 교리 하에서 제한되어 등장하고, 전도와 관련될 때는 전도의 도구로 스스로 이웃 사랑을 제한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런 제한들이 어쩌면 개신교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조건을 달거나 스스로 제한시키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경의 많은 본문들 가운데 특별히 막12:28-34절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고려할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는 소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주제이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은 첫째를 하나님 사랑으로 말씀하시고 답변을 끊지 않으시면서 이어서 둘째는 이웃 사랑으로 답변하셨다.    서기관이 질문한 것은 첫째인데 예수님의 답변은 둘째까지  다시 말하면 두 개의 계명으로 답변하셨다. 성도님들 가운데 이 본문을 읽으시면서 혹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덤으로 주어지는 사은품 정도로 폄하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나님 사랑에 온갖 정성을 다하다 보니 이웃 사랑은 조금 쉬어도 되거나 포기해도 무방한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이는 질문에 답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첫째와 둘째로 답변하신 것이지 예수님의 의도는 첫째에 해당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동시에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마치 조직신학 기독론에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시다는 답변과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참 하나님이 51%이고 참 사람이 49%가 아니라 참 하나님이 100% 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 또한 100% 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기독론 이해인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로 동시에 각각 100%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똑같이 소중한 계명임을 밝혀 주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른 점도 있다. 우선 사랑의 대상이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사람 사랑이 곧 우상숭배로 변질될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우리가 예배라고 말한다면 이웃 사랑은 사랑의 실천, 곧 선행으로 말한다. 예배와 사랑의 실천은 분명히 구분되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구분은 하지만 동시에 함께 강조하는 경우를 보여 준다. 마치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로 중요한 계명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담아서 소개해 주듯이, 우리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들도 마치 주님께 하듯 하라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골3,23)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힘쓰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말씀한다(히13,15-16절).    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인용해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는 선행과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행위를 찬송의 제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제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별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될 일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드렸다고 해서 이웃 사랑을 외면해도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자위할 수 없다. 반대로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까지도 다 드렸다고 합리화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은 분명 다른 것이고 구별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도 없고 흡수할 수도 없다. 구별은 되어야 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되고 심지어 차별화되어서 그 둘 중 하나를 우선시하고 다른 하나를 뒤로 미루는 일은 막12,28-34절은 물론이고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왜곡하는 잘못된 행동인 것이다.    성도가 천국가는 날까지 쉬지 않고 실천해야 할 일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마치 우리의 호흡이 이어지는 동안 음식도 섭취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같은 무게로 성도가 이어나가야 할 예배하는 삶의 두 가지 상호보완적 모습인 것이다.    사랑의 실천은 예배와 같은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예배드리는 삶의 온전한 모습이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단지 훌륭한 도덕이나 윤리일 뿐이지 예배는 아닌 것처럼,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참된 예배가 아니라 거짓으로 위장된 예배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상보적 관계 속에 있다. 끝으로 칼 바르트의 탁월한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기도와 실천을 하나로 엮어내는 멋진 표현이다. “기도는 두 손을 모아 일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은 두 손을 펴서 기도하는 것이다!”/아신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3-05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
      각자 자기 의미가 있고 주장이 있는 개체가 모여 이룬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같은 정치적 비전으로 모인 정당도 그 안에서 의견이 분분하며, 같은 교육적 목적을 가진 학교도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교육관이 달라 서로 갈등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주님으로 모시는 공동체이지만, 그 구성원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신앙고백하고 같은 방식으로 선교적 비전을 나누는 일은 드물다. 더구나 오늘 한국교회가 특정 주제나 사안에 관하여 양분돼 거의 반대 방향으로 걷는듯한 국면에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우리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과제이다.   하지만 우선 뜻부터 톺아보자. 보통 ‘연합’이나 ‘일치’라는 단어의 뜻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복수의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상황을 전제하는 이 단어가 마치 하나의 의견, 하나의 정책, 하나의 선택을 따라 모두 ‘단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만약 구성원 중 반은 동으로 가자 하고, 다른 반은 서로 가자고 하면 그것은 연합과 일치에 실패한 것일까?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향한 복음 사역에 집중하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회심에 집중했던 것은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에 위배되는 것일까? 연합이나 일치는 반드시 모두 같은 의견을 가지고 물리적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뜻’의 같음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뜻을 품어야 하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으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셨듯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의 뜻은 언제나 ‘이웃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다만 누구를 살리는 일에 집중할까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상이나 방법을 달리하는 것은 결코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를 헤치는 행동이 아니다. 영혼을 살리는 복음 전도에 매진할까, 구조적인 악과 싸우며 비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신할까, 이것이야말로 부름받은 소명과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의 다양성 안에서 신자의 자유, 개교회의 선택이 작동하는 부분이다.   행여 교회 안에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한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하나의 대상, 하나의 상황만을 우선시하며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일대 사업임을 천명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헤치는 것이 아닐지 조심해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서 신앙 양심과 신학적 깊이를 가지고 예언자적 삶을 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도들이란 언제나 예수 안에서의 사귐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지, 그 사귐 안에서 자기만의 비전과 꿈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다른 구성원들의 의미를 말살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교적 사귐 자체보다, 그리스도교적 사귐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교적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됩니다.” 일치는 생각의 같음, 행동의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직의 견고함, 활동의 효율성과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근본적인 방향성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살리는 방향’ 말이다. 우리와는 다른 대상을 향해 움직인다 해도 성도 개인이나 개교회가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는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롬 8:28)이고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는 것’(엡2:22)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3-03-0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