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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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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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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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23
  • 성서와 생활[11] 그리스도인의 영성-기도의 영성
     교회는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로 이 땅 위에 세워진 주님의 새로운 몸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구원받은 지체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의 몸을 이루게 된다. 부름 받은 모든 지체들이 연합하여 서로 자라게 함으로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된다.골2:12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며 주님의 표현이기에 교회의 사명은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곧 교회는 주님이 계시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바로 온전히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일이 지속되게 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사역은 무엇일까? 죄사함의 구원선포와 치유의 역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과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교회 사역의 중심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를 세우는 일에도 밤새워 기도한 후에 12제자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눅6:12-13 수시로 사람들을 피해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기도를 하셨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시다.롬8:34 주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고 그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교회가 주님 사역의 연장선 위에 세워져 있다면 바로 기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곧 기도에 있다는 진리를 세우는 일이다, 부흥과 기사와 헌신과 선교보다 앞서야 하는 일은 기도하는 사역인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또한 기도가 계시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위해 계시를 드러내고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교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큰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작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성도가 기도하는 일은 교회를 위한 최고의 헌신이며 교회의 가장 높은 일임을 알고 실천하는 자는 뛰어난 영적인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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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 [정론] 하나 됨과 평화의 길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눅19:42)   한 때 교회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하나였다. 하지만 보편교회는 이미 해체되었고, 다양한 종교와 인종, 민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교회가 약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교회는 소수자들 모임이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12:32). 교회는 처음부터 적은 무리로 출발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적은 무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한마디로 교회가 힘이 빠지는 현상은 ‘정체성 회복의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하고(고후11:30),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이다(고후12:9).   그동안 교회는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가진 권력과 부를 통해 발생한 현상이었고, 가난한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여성과 이방인 등은 교회의 소외 계층으로서 말할 기회를 상실했다. 신약성서는 여성을 포함해 이방인도 기꺼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고, 만일 언어 문제로 소통이 어려울 때는 그들을 대표하는 집사를 임명해 그들이 소외되는 일을 방지했었다. 하지만 교회가 강해지면서 교회 안에는 장벽들이 출현했다.   교회는 약한 자들을 환대할 때 존재의 이유가 명징해진다. 교회는 이 땅에서 힘을 빼앗긴 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힘을 빼앗긴 자들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배척 당하는 자들이다(눅6:20-22). 이제 그들은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이 땅에서 자신의 처지에 있는 자, 또는 있었던 자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연대하기를 기뻐한다.   뉴비긴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기에 좋든 싫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회중은 하나님이 몸소 기꺼이 불러 그 아들과 교제하도록 모으신 사람들이다. 그 교인들은 그분이 직접 택하신 것이지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므로, 좋든 싫든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서로 격리된 모임이 아니라 함께 모이는 모임이며, 그것을 조성한 힘은 하나님의 사랑, 곧 사랑스럽지 않은 이까지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치시는 그 사랑이다”.   한국 교회가 이 땅에서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되기 위한 유일하고도 올바른 길은 이 땅에서 힘을 빼앗긴 자, “곧 사랑스럽지 않은 이”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는 길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품을 때 평화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평화를 만드는 일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동시에 이 일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받는 길이다(마5:9).   갑진년 새해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약한 자들을 위한 공동체성을 회복한다면 여전히 희망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은 교회의 사명이며 소명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마주할 수 있나?“ /성서대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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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18
  • [정론] 기독교 ‘사랑의 실천’
      기독교를 한 마디로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사랑의 종교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담겨 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시점에 ‘기독교가 사랑을 실천하는가?’ 그리고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은 ‘글로 쓰여진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쓰는 사랑’을 했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글로 쓰여진 사랑’과 ‘삶으로 쓰는 사랑’이다. 글로 쓰여진 사랑을 보여준 소설이 있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인 <올리버 트위스트>다. 이 소설은 디킨스가 1834년에 제정된 ‘신빈민 구제법’에 저항하기 위해 썼다. 영국의 ‘신빈민 구제법’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구빈원 같은 수용시설에 집어넣어서, 아주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잠잘 공간,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가혹한 일을 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법이다.   사랑을 삶으로 써야 하는 기독교는 약자를 함부로 대하였고, 더 혹독하게 다뤘다.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구빈원 위원들은 구빈원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잠자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강요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올리버다. 약자를 대표하는 그는 아침 6시부터 노동을 시작했다. 노동 강도에 비해 식사량은 턱 없었다. 아이들이 먹는 식사량은 세 숟가락의 수프뿐이다. 배가 고파 아이들이 얼마나 숟가락으로 긁어먹었는지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구빈원’이란 자유도 없고, 인간의 존엄성도 없었다.   삶으로 쓰여진 사랑이 있다. 미국 성공 신화로 유명한 팀 하스다. 회장은 하형록 회장으로, 사훈은 책 처럼 “우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We exist to help those in need)”는 잠언 31장 20절 말씀이다. 잠언 31장 20절은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다. 팀 하스는 하형록 회장의 잠언 31장 20절 말씀에 근거해 회사를 경영하자 미국 동부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100대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는 글로 쓰여진 헛된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쓰여진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한다. 김하중 대사는 <하나님의 대사:사랑의 중보자>에서 기독교인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따라 배울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삶으로 쓰여진 사랑으로 하는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두드러진 특징이어야 한다. 이 사랑의 실천, 인간의 힘으로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힘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기 위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된다.     기독교 영성가인 달라스 윌라드는 영성 훈련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영성 훈련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절제의 훈련이다. 다른 하나는 참여의 훈련이다. 사랑의 실천은 참여의 훈련에 속한다.   글로 쓰여진 사랑을 한 구빈위원들은 올리버가 배가 고파 구빈원 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주세요.” 결과는 참혹했다. 올리버는 국자로 맞기만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프를 조금만 더 달라’는 말 한 마디로 위원회가 회집되었다. 글로 쓰여 진 사랑의 어처구니없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2023년 말이 다가온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기독교는 삶으로 쓰여진 사랑을 했는가? 점검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우리는 많은 이웃이 나보다 힘들다면 삶으로 쓰여 진 사랑을 해야 한다. 기독교가 삶으로 쓰여 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가치 실현이다.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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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정론] 감사의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추수감사절이 있는 11월은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계절이다. 많은 계획과 소망을 품고 한 해를 시작했는데, 벌써 2023년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들 중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래서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 초에 걱정하고 염려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래서 고마울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고 바랐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잘 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보다 더 크게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감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온다. 감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감사는 우리에게 나쁜 일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그대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신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쁜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구할 때 그것을 주시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말씀을 믿는다. 감사는 응답의 확신을 품는 기도를 낳는다. 감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더 신뢰하며, 나 자신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감사의 사람은 모든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고 기도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만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의 기도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한 기도를 드릴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빌 4:7).   일반적 상식으로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리스도인은 감사하고 선한 응답을 확신하면서 기도한다.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화를 누린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이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할 때 얻을 수 있는 평강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 가운데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오직 하나님을 향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감사의 계절 11월에 세상을 향했던 우리의 시선을 거두어 모든 시선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향하는 시간을 누리길 소망한다. 후회와 아쉬움, 두려움을 멀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바란다. 개혁주의생명신학 기도성령운동을 실천하여 영적 생명을 회복하고, 가정과 교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우리의 기도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예배를 회복하고 경건을 회복하고 기도를 회복하고 성도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처럼 다시 감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상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계절이 되길 소망한다. /백석대 기획산학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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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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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8
  •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서주일은 성경연구와 보급을 위해 매년 12월 둘째 주일에 지키는 절기이다. 1804년 영국에서 성서공회가 처음으로 조직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서주일 예배를 드린 것은 1899년이었다. 그 해 5월 성령강림주일에 ‘성서공회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성서주일을 지켰다.   당시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 총무인 켄뮤어가 처음으로 성서주일을 주창하여, 모금을 통해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웃에게 성서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1900년 「신약젼셔」가 발간되면서 ‘성서공회주일’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고, 1954년부터는 세계 교회와 함께 ‘성서주일’이라는 명칭으로 지켜오고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즉 ‘성경의 종교’이다.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전승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기록하게 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지켜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성경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 중의 으뜸이다. 특히 한국의 성서공회는 지금도 꾸준하게 세계 곳곳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던 나라에서 이제 성경을 세계에 보급하는 자랑스러운 국가가 된 것이다.    성경보급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19세기 말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한글성경은 복음전파와 부흥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남녀노소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기록에 보면 선교사들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무엇보다 종이인쇄출판의 쇠퇴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스마트기기를 통해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는 막을 수 없는 대세인가?   편리함 때문에 예배 시간에 화면을 사용한다. 찬송과 성경이 화면으로 나오다보니 이제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도 성경과 찬송을 보지 않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경은 점점 손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이제 이런 편리함에 익숙해져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는 이 말씀 위에 서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 역시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성서주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절기인 대강절 기간에 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반포되어 읽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쇠퇴기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사실이 그럴 수도 있다. 한국교회에 쇠퇴기가 온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신앙의 편의주의가 쇠락을 앞당긴 것이 아닌가?   대강절과 성서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성경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목회자부터 먼저 회개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성경 사랑의 길로 다시 나가자. /전 총신대총장. 코메니우스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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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12-08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쉴즈 간호선교사만 우리나라에 와서 자신의 재능과 사랑을 바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변함없이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우리는 당시 의복과 음식을 주고 몇 개월치의 방세를 줌으로써 그들을 도와야 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회갑연에서 받은 선물을 세브란스 병원 안에 물을 마실 수 있는 분수식 급수대 3개를 설치하는데 사용할 정도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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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8
  • 위기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이슬람과 공산주의와 이단과 동성애는 지구촌 교회를 일시에 허무는 2백 마리의 여우와 같이 하나님의 포도원 담장을 허무는 사탄의 세력이다. 이미 이들의 공격으로 무너진 서구교회는 재건이 불가능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자취를 감춘 교회가 많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마지막 그루터기가 되어서 성경적인 개혁신학을 신속하게 회복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인 일부 목사는 세상과 타협을 하기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장로들이 깨어서 목숨을 걸고서 교회를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굳게 지켜야 한다.   신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치는 교수가 이슬람 대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슬람화되면 교회는 더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터키에 있는 소아시아 7대 교회는 다 무너지고 주저앉고 돌무더기만 가득하다. 이것이 이슬람의 실체이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자와 목회자 가운데 원어를 들먹거리면서 이슬람을 샬롬이나 살렘과 같은 평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랍어 동사 아슬라마("복종시키다")의 동명사인 이슬람은 "복종하기"란 사전적 의미를 보면,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아랍어 사전)이고, "알라와 그가 준 율법에 복종하는 것"(꾸란어휘사전)이고, "평화와 복종과 순종, 알라가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알라의 가르침과 인도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한국이슬람교중앙회)이다. 곧 이슬람은 무함마드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종교이므로. 평화란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복종을 강요하는 이슬람은 무자비한 복종을 모토로 지하드(성전 聖戰)를 자행하는 폭탄테러의 주범이다.   기독교보다 600년 후에 나타난 이슬람은 신구약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처음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한 이슬람은 호전적인 종교이다. 코란이 성경을 들먹거리고 다수 성경인물을 묘사하지만 면밀히 검토하면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이다. 이슬람이 성경을 들먹거리는 이유는 기독교인에게 포교하려고 의도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는 이단이다. 이단은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집요하게 정통교회를 뒤흔들고 나온 사이비 집단이다. 이단은 처음에는 정통교회의 전통에 편승하다가 점차 본색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정통교회와 같은 것 같다가 마지막에 다른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한국교회는 절반 이상이 이단이다. 유라시아와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과 쿠바에 종교의 자유가 없지만, 이미 많은 이단이 활동하면서 공산당에 신물을 느낀 주민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전도도 금지되어 교회가 허물어지고 신앙의 대를 잇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에 편향된 영혼이 죽어가고 기독교문화마저 녹슬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생들이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 신학생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자기들이 사역하고자 하는 교회의 장로이다. 이 점에서 장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며 교회의 전통을 지키려는 분이므로, 인사문제를 목회자에게만 일임하지 말고, 인선 위원회에 들어가서 신학후보생들을 검증할 수 있어야한다. 평생 동안 한 교회에서만 섬긴 장로의 영적 지도력은 현대 목회에서 아주 필요한 부분이다. 과거 장신대에 수도 없는 데모가 있을 때마다 장로들이 ‘저런 문제아를 교회에서 청빙하면 안 된다’라는 목소리를 높일 때, 신학생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중하던 일이 있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한국교회 정론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2
  • 감사와 기적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1-24
  • 감사와 기적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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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선언한 후 18개월이 지났다. 참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가듯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두 번째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는 반복되는 비대면 예배와 참석 인원 제한에 부딪혀, 모여서 예배하던 당연한 것들이 오히려 지탄거리가 되는 가슴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위드코로나’가 선포되어 일상으로의 회복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교회마다 터널 속에 갇혀 그냥 주저앉아버린 성도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우리답게 일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일부의 성도들에게 예배의 회복만은 더딘 것 같다.    반면, 빠른 일상으로의 회복에 발맞추어 ‘어떻게 하면 한 번 더 예배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기도할까?’, 하는 마음으로 늘 성전을 사모했던 성도들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소망의 빛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왔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 속 두 번째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과연 18개월 동안 그 긴 터널 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지내왔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좌절하고 낙심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였는가, 아니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이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걸음을 걸어온 성도였는가 말이다.    1620년,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이미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중 51명이 목숨을 잃었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해서는 원주민들의 공격과 맹수의 위협, 각종 질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남은 자의 절반이 죽어 49명만 남은 상황이었다.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땅을 일구어 작물을 심고 산으로 나가 짐승들을 사냥하며 물고기를 잡아 양식으로 삼으면서 처절한 생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첫 번째 맞이하는 늦은 가을, 수확한 작물을 들고 하나님께 드린 감사예배는 그들이 길 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와 죽음을 뛰어넘은 생존의 희망의 빛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예배였다. 단순히 추수만을 위한 감사가 아니라 먹을 양식을 지속적으로 수확함으로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였다. 추수는 한 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그들은 앞으로도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지켜 주실 것에 대한 예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의 공포 속에 좌절한 사람은 왜 없었겠는가.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 낫겠다며 원망, 불평했던 것처럼 그들은 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길고 긴 터널을 뚫고 한발 한발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감사는 이런 것이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전진하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감사이다. 날마다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자와 며칠을 굶주림에 시달린 자에게 주는 따뜻한 밥 한 끼의 감사는 그 차원이 다르듯이, 고난과 어두움, 시련, 고통을 뚫고 나왔을 때의 진짜 감사를 느끼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생존의 위협이 아니라,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생명 그 자체를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추수감사절이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 내고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제 빛이 되어 이 땅을 밝히고 있다.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더욱 감사한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축원한다.  /서산 이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1-15
  •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열려있고 또 미래가 있다. 감사하는 생활에는 고난의 복병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어떤 역경과 거짓도 감사하는 사람을 쓰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야 할 감사를 배우며 문제를 지나친다. 근심과 염려에 붙잡히지 않는다. 불안과 두려움 따위는 가벼운 두통쯤으로 여긴다.   이러한 삶의 주인은 바로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 어떻게 의롭게 된 자들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바로 감사하지 않을 때 죄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훨씬 빛을 얻을 것이며 더 많은 하늘의 기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영역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왜 믿는 자의 감사가 중요한가? 바로 감사의 영적인 일은 천국을 침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마다 감사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에 찌든 마음에는 감사가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귀신의 영이며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약3:15). 감사가 없는 마음은 오직 스올일 뿐이라고 했다(시6:5).    아무리 믿음이 크다고 해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일뿐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스올이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발현이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예배하는 행위는 가장 거룩하고 고상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감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향한 경배와 찬양과 헌신을 통한 시인이며 고백이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선포할 때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에 아벨은 참된 예배의 본을 보여주고 있다. 아벨은 실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다. 그는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을 감사로 예배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예배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감사하며 양을 잡아 피로 희생의 예배를 드림으로 주의 일을 시인한다.    살아 있는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이를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이 예배자의 한 사람인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함으로 예배의 속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살아 있는 자같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그의 믿음이 그를 증명하여 믿음으로 가인과 다름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예배에 하나님의 완전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찬양은 헛된 것이다.   완전한 감사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믿음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인은 현재를 감사했다. 자기의 농사지은 것으로 자기의 현실의 만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다. 거기에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연약함 때문에 감사의 행위에 희생이 따라오지 못하며 죽음을 이길 수 없다. 농사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드릴 감사를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인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미래가 없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아벨의 노선을 따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한다. 베드로 같은 고백과 시인이 있을 때 교회는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감사는 천국을 침노한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정론
    2021-11-04
  • ‘자연치유’ 통해 사랑과 건강을 전합니다
      나는 1967년 꽃 피는 춘삼월 장손이신 1925년생 아버지와 1924년생 어머니의 늦둥이로 경기도 남양주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출생을 말하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치유 환경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장손 집안이었기에 전통의례와 생활풍습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누리며 성장했고, 또 농촌 생활 가운데 몸으로 배운 몸 공부가 풍부하였다. 24절기의 순환, 낮에 해와 밤하늘 별과 달과 은하수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살았고, 땅의 소중함,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가치를 남다르게 체감하면서 성장한 것이 자연치유의 큰 원동력이 됐다. 아마도 이 시절 경험한 것들이 장석종이 창안하여 펼치고 있는 “형상체질”과 “체질 푸드테라피” 그리고 “오감멀티테라피”의 시작이라 여긴다.   아버지하면 청년시절 만주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으셨다고 하신 말씀, 한국 전쟁 당시 염병이든 고모를 지게에 지고 피난 가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키우셨던 우리 집 소는 말을 가르켜서 부리는 소였는데 송아지가 나면 코뚜레를 뚫고 말을 가르켜서 일반 소보다 비싼 가격에 우시장에 내셨던 일들도 기억된다.   겨울에 썰매를 타려면 논에 물을 대어야하는데, 벼를 베고 벼 포기의 밑 부분이 높아서 높은 벼를 낮으로 자르시고 물을 대어 겨우내 썰매를 탓던것도 기억된다.   어머니는 고향이 전라도 나주셨고 그래서인지 음식 솜씨가 참 좋으셨다. 지금도 나에게 소울 푸드인 들기름에 달달볶는 머위나물과 소금간이 잘 밴 오곡 찹쌀밥은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사랑의 먹을거리라 여긴다. 장손 집 맏며느리셨기에 명절 때 가장 먼저 약주술을 담그고, 그 다음에 엿을 고시고, 두부 만드시고, 묵을 쑤시고, 그리고 소당질 하시는 것을 옆에서 다 거들어야 했던 나는 지금도 묵의 달인으로 내가 쑥 묵은 차지고, 다른 묵에 비해 맛이 참 좋다.   어머니는 속병이 있으셨다. 속병은 소화 안 되는 위장병인데 그 원인은 미역국이었다. 옆집에서 생일이라 미역국을 같이 먹자고 하여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드시고 급체를 한 이후부터 평생을 속병으로 고생을 하셨다.   자연치유를 공부하면서 그 원인을 정확히 찾았는데 첫째는 어머니 체질이 수형인으로 미역국이 잘 맞지 않은 것, 둘째는 심장이 약한 분이셨기에 심장으로 인한 심하통 증상을 위장 증상으로 여긴 것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고생하신 심하통을 통해 나는 자연치유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국내최초, 최고를 지향하는 자연치유 인재의 숲”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번 개강 때 자연치유의 정의를 “문제를 알고 그 문제가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나의 의지와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을 통해 회복되고 소생되는 것이 자연치유다”라고 설명하였다.   간략한 두 줄의 자연치유의 정의는 1987년 자연치유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자연치유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간증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헛수고 일 때가 참 많다, 또 훌륭한 자연치유사역자를 만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석하였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역시도 치유와 회복이 그리 크지 않다. 치유를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자연치유는 이뤄질 수 없다. 또 의지가 없는 자연치유는 사상누각이라 여긴다. 모든 것에 우선순위가 있듯이 병을 낳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자연치유력은 발휘가 된다. 예를 들어 아토피로 고생하는 사람이 그 원인이 음식에 있는데 나는 맛있는 것 마음껏 먹고 피부 가려움은 감내하겠다면 아토피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 의지가 참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연치유를 크게 자연적인 치유(Spontaneous Healing), 자연을 통한 치유(Natural Healing), 자연적인+자연을 이용한 치유(Naturopathy) 3가지로 구분했다. 자연적인 치유는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면 불균형들이 사라지면서 본래의 생명력이 활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제때 자고, 제때 먹고, 제때 배설되어야한다. 자연을 통한 치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치유하는 것으로 피부상처에 아로마 라벤더를 바르는 것, 구내염이 있을 때 프로폴리스를 바르는 것등등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이런 자연적인 그리고 자연을 이용한 치유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자연치유학이라고 본다.   장석종 박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오감을 통해 수용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오감멀티테라피”를 주장한다. 그래서 출간한 책 제목도 장석종 박사의 오감멀티테라피가 있다. 눈코귀입촉 오감을 활용, 눈과 관련된 칼라테라피, 눈의 홍채를 이용한 홍채영양학 코와 관련한 아로마테라피. 귀를 이용한 귀분석상담학, 사운드테라피, 입을 이용한 푸드테라피, 촉감을 이용한 경락치유학, 근신경치유학, 그리고 영성과 감정과 관련한 감정치유 배치 플라워에센스, 에너지테라피등을 정립하여 치유에 접목하고 있으며, 이 철학이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커리큘럼에 담겨져 자연치유학 석사, 박사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장석종 박사는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 학회장이기도 하다. 자연치유 관련 논문을 투고하였지만 심사가 불가하다고 반려되는 경험을 하고는 자연치유학 이론 정립과 대중화를 위한 학회가 필요하고 여겨,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를 설립하여 자연치유 논문 발표와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매년 11월에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귀분석상담사 자격증, 홍채영양학 자격증을 등록하고 자격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민간자격을 학회에서 운영하므로 보다 전문가들이 교육하고, 또 교육생들은 전문화 교육을 통해 전문가로 거듭나는 과정이라 여긴다. 또 학회에서는 자연치유 도구와 교육 교재 발행에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로 기존의 이혈(이침)을 업그레이드 하여 포스에너지볼을 개발하였다. 회원들에게 우수한 제품을 비용적 부담을 줄여 공급하고 있으며, 귀(EAR)용, 바디(BODY)용, 그리고 선교사용을 개발 완료하여 상표등록을 마쳤고 현재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교육교재로 귀건강분석상담학 기본과정 교재를 출간하였고 홍채영양학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서울장신대 자연치유선교대학원장·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0-19
  • 믿음으로 사는 인생
    기독교교육의 대명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던 달라스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질문했다. “교수님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가장 중요하게 일러주신 제일의 교훈이 무엇인가요?” 교수는 한 주간이 지나 수업시간에 “지난 1주일 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신 것은 ‘어떻게 하면 믿음으로 살 것인가?’라네”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삶은 몇 미터 되지 않은 수족관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시사철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살아간다. 많은 외부 영향력이 있음에도 흔들림 없는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은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기적과 비유, 많은 말씀과 행동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뒤섞여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히브리서는 믿음의 장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주님은 우리가 떡으로, 옷으로, 재물로, 얻은 명성으로, 자기 의로, 자기 성취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인생 되도록 만들려고 오셨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 결과는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믿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가 생각지도 못하고 가보지 못한 길로 부르셨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생각, 아버지 데라가 가르쳐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설명할 길이 없는 영적 경험이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한 순종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가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광야를 건너게 하셨다. 모세는 그 당시 낙타와 함께 광야를 건너던 대상들처럼 광야를 한 번도 건너 못 적이 없지만, 오히려 그 부족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가게 만든 것임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경험이 필요하고 또 그 경험이 소중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때로는 인간적인 조건을 한 걸음으로 능가하시고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길을 막히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는다.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스 목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선교대회 주강사로 초청받은 이후, 세계적으로 활동했다. 그 가정에 첫 아이 데이비스가 태어났다.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자 아기의 밤낮이 바뀌었다.    부부가 일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생활 리듬이 깨져서 신경도 많이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오르티스 목사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밤 녀석을 좀 때려줘야겠어. 그래야 녀석이 밤에는 자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야” 밤에 아빠는 울고 있는 아기 침대로 갔다. 그러나 아기가 아빠를 보자 옹알이를 하면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를 불렀다. “여보 이 녀석을 봐요. 이렇게 예쁘게 웃고 있는 녀석을 내가 어떻게 때릴 수 있겠어” 그때 오르티스 목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된 우리의 관계를 다시 깨달았다. 아기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아기의 삶과 생명은 단 하나, 부모에게 붙어 있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이다.   믿음은 무슨 큰 업적을 세워서 받는 표창장이 아니고, 열심히 어디 다녀서 얻은 자격증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신뢰를 보내며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주님에게 붙어 있어 주님 방식 따르는 것이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걷는 길이 기울어진 듯이 어렵지 아니한가?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사랑으로 긍휼로 대해주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숨을 쉬며 살 수 있다. /고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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