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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교회, 하수구가 되다
      민대홍 목사   ‘고난’을 주제로 한국 역사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한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서이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설명하며, 구약의 히브리 민족사와 우리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사사기 시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결국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고난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01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겪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당한 설움과 고통은 개인 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그 시대를 함께 산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다. 그 시기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을 위로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조선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하수구’로 보았다. 하수구가 있어야 일상의 삶이 청결해지듯, 우리가 강력하고 혼탁한 폭력을 받아내는 하수구가 됨으로서 이웃 민족들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조선)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서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가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에서.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 신약시대 신앙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자유와 구원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은 이러한 예수가 하수구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사순절, 그 끝에 고난주간이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온당히 받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식민통치 시기.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종교마저 자유가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졌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법정에서의 사형판결, 예수는 뭇 백성들의 하수구가 되어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졌다. 예수의 제자들도, 제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바통은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짊어지는 하수구가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뼈를 꺾은 고난을 지낸 후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로교회 목사, 서로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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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8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실천
     20세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교단, 교파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도 있었다. 21세기 들어서 한국교회는 급격한 쇠퇴와 정체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어 왔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는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변화된 신학을 극복하고 개혁주의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회개용서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실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 하나님이시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다른 인격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바로 하나님을 닮는 일이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종교개혁교회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성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님으로써 루터파, 칼빈파, 츠빙글리파 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교회의 본질인 하나됨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찬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고 있던 개혁파 회중들이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루터파의 공재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받아들이는 개혁파 회중들에게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된다고 답변했다.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성찬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와 같이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성찬론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 교리의 경우 그러한 교리 차이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지는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오순절교회, 침례교 등은 비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을 수는 없다. 한 가정의 형제 자매가 서로 다르게 생겼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이 닮아 한 가족임을 알 수 있듯이, 형제 간의 미세한 차이가 가족됨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과 대립의 상태에 있다면 교회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분열과 대립의 이면에는 십자가와 희생 없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기 우상화가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십자가를 통해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부활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생명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겨울을 지나 새싹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연합과 일치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2024년 부활절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회복하고 전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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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5
  • [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나 ‘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꽝’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그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소)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꽝’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그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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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6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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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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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23
  • 성서와 생활[11] 그리스도인의 영성-기도의 영성
     교회는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로 이 땅 위에 세워진 주님의 새로운 몸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구원받은 지체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의 몸을 이루게 된다. 부름 받은 모든 지체들이 연합하여 서로 자라게 함으로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된다.골2:12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며 주님의 표현이기에 교회의 사명은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곧 교회는 주님이 계시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바로 온전히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일이 지속되게 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사역은 무엇일까? 죄사함의 구원선포와 치유의 역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과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교회 사역의 중심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를 세우는 일에도 밤새워 기도한 후에 12제자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눅6:12-13 수시로 사람들을 피해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기도를 하셨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시다.롬8:34 주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고 그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교회가 주님 사역의 연장선 위에 세워져 있다면 바로 기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곧 기도에 있다는 진리를 세우는 일이다, 부흥과 기사와 헌신과 선교보다 앞서야 하는 일은 기도하는 사역인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또한 기도가 계시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위해 계시를 드러내고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교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큰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작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성도가 기도하는 일은 교회를 위한 최고의 헌신이며 교회의 가장 높은 일임을 알고 실천하는 자는 뛰어난 영적인 자녀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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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사다난한 한해를 보내며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공동화(空同化) 현상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또다시 계절은 바뀌어 눈발이 흩날리는 나목(裸木)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눈이 내린다는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는 시그널이기도 합니다. 코로나가 온통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역사를 움직이려는 군불은 계속 지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듯 어떤 다크호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지, 아니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엄청난 사건 사고들이 터져 역사의 판도를 바꿀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예장 한신측 부총회장·예향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6
  • 한 해를 보내며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예향교회 담임목사•예장 합동한신 부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1
  • 성탄의 현대적 의미
      성탄절이 다가오면 이런 의문을 갖는 분들이 계신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12월 25일에 태어나셨을까?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하늘의 별이 인도했고, 동방박사가 경배하러 온 이야기 등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바울이 활동했던 당시에도,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도, 초대 교회에서도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성경에서 다른 절기는 정확히 날짜를 알려주는 반면 성탄절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시에 수많은 저작을 남긴 이레니우스와 오리겐도 성탄절의 날짜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의 사역, 수난,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2세기 후반이 되면서 성탄절의 날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다. 성탄절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당시에 성탄절로 언급된 날짜들 8월 28일, 5월 20일, 4월 20일, 21일을 말하고 있지만, 모두 12월 25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양을 치던 목동들이 예수께 경배하러 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양을 치는 시기는 보통 3~9월이라 12월과는 거리가 멀다. 성탄절이 현재의 12월 25일로 굳어진 데에는 여러 학설이 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축제일이 12월 25일로 성탄절과 일치한다. 그래서 일부 이단에서는 성탄절을 지키는 기성 교회를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단이라고 말하며, 자신들만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이해는 유대인들의 문화를 잘 몰라서 나온 주장이다.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사고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 즉 잉태된 날과 십자가에 죽으신 날짜가 서로 같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 보좌에서 세상에 오신 날과 같은 날에 다시 하늘 보좌로 올라가셨다는 믿음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니산월 14일이 태양력으로 계산하면 3월 25일이다. 즉 하늘의 천사로부터 예수의 수태의 사실을 3월 25일에 알게 되었는데, 이날을 기준으로 해산날을 계산해보면 12월 25일이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동방교회에서는 성탄절을 1월 6일에 지키는 지도 설명이 가능하다. 히브리달력 니산월 14일을 그리스달력을 따라서 계산하면, 그 날짜가 3월 25일이 아닌 4월 6일이 된다. 4월 6일을 기준으로 해산날을 계산하면, 1월 6일이 된다.   즉, 성탄절의 날짜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이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 정한 날짜의 기준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과 같은 날로 정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려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에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기록하면서 유대인 중심의 마태 공동체는 예수를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출생하신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모세와 같이 위대한 분으로 구약에서 예언한 예언의 성취로 묘사했다.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기에 천체의 별의 움직임을 기록했고,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공동체가 경험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 늘 병자, 약자, 과부, 어린이와 함께하신 분이다. 이들이 고백하는 예수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평화를 선포하신 분이다. 마구간에서 나시고, 밤늦도록 퇴근하지 못한 목동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고백에 있다. 마태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답게 유대인 중의 유대인, 왕 중의 왕으로 예수를 고백했고, 누가 공동체는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낮고 천하게 오신 분으로 고백했다. 요한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초월적인 분으로 묘사했고, 바울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춘 분으로 묘사했다. 초대교회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을 세상에 잉태되신 날로 여기며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면 어떻게 고백하시겠는가? 이 대답은 스스로 해야 한다. 성탄절이 12월 25일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태복음의 기록이 사실인지, 누가복음의 기록이 사실인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논쟁에 빠지면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놓칠뿐더러, 훨씬 더 중요한 것 성탄절이 여러분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놓치게 된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성탄절이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감리교신학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12-17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8
  •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서주일은 성경연구와 보급을 위해 매년 12월 둘째 주일에 지키는 절기이다. 1804년 영국에서 성서공회가 처음으로 조직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서주일 예배를 드린 것은 1899년이었다. 그 해 5월 성령강림주일에 ‘성서공회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성서주일을 지켰다.   당시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 총무인 켄뮤어가 처음으로 성서주일을 주창하여, 모금을 통해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웃에게 성서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1900년 「신약젼셔」가 발간되면서 ‘성서공회주일’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고, 1954년부터는 세계 교회와 함께 ‘성서주일’이라는 명칭으로 지켜오고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즉 ‘성경의 종교’이다.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전승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기록하게 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지켜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성경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 중의 으뜸이다. 특히 한국의 성서공회는 지금도 꾸준하게 세계 곳곳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던 나라에서 이제 성경을 세계에 보급하는 자랑스러운 국가가 된 것이다.    성경보급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19세기 말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한글성경은 복음전파와 부흥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남녀노소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기록에 보면 선교사들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무엇보다 종이인쇄출판의 쇠퇴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스마트기기를 통해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는 막을 수 없는 대세인가?   편리함 때문에 예배 시간에 화면을 사용한다. 찬송과 성경이 화면으로 나오다보니 이제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도 성경과 찬송을 보지 않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경은 점점 손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이제 이런 편리함에 익숙해져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는 이 말씀 위에 서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 역시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성서주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절기인 대강절 기간에 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반포되어 읽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쇠퇴기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사실이 그럴 수도 있다. 한국교회에 쇠퇴기가 온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신앙의 편의주의가 쇠락을 앞당긴 것이 아닌가?   대강절과 성서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성경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목회자부터 먼저 회개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성경 사랑의 길로 다시 나가자. /전 총신대총장. 코메니우스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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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12-08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쉴즈 간호선교사만 우리나라에 와서 자신의 재능과 사랑을 바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변함없이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우리는 당시 의복과 음식을 주고 몇 개월치의 방세를 줌으로써 그들을 도와야 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회갑연에서 받은 선물을 세브란스 병원 안에 물을 마실 수 있는 분수식 급수대 3개를 설치하는데 사용할 정도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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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12-08
  • 위기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이슬람과 공산주의와 이단과 동성애는 지구촌 교회를 일시에 허무는 2백 마리의 여우와 같이 하나님의 포도원 담장을 허무는 사탄의 세력이다. 이미 이들의 공격으로 무너진 서구교회는 재건이 불가능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자취를 감춘 교회가 많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마지막 그루터기가 되어서 성경적인 개혁신학을 신속하게 회복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인 일부 목사는 세상과 타협을 하기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장로들이 깨어서 목숨을 걸고서 교회를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굳게 지켜야 한다.   신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치는 교수가 이슬람 대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슬람화되면 교회는 더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터키에 있는 소아시아 7대 교회는 다 무너지고 주저앉고 돌무더기만 가득하다. 이것이 이슬람의 실체이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자와 목회자 가운데 원어를 들먹거리면서 이슬람을 샬롬이나 살렘과 같은 평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랍어 동사 아슬라마("복종시키다")의 동명사인 이슬람은 "복종하기"란 사전적 의미를 보면,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아랍어 사전)이고, "알라와 그가 준 율법에 복종하는 것"(꾸란어휘사전)이고, "평화와 복종과 순종, 알라가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알라의 가르침과 인도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한국이슬람교중앙회)이다. 곧 이슬람은 무함마드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종교이므로. 평화란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복종을 강요하는 이슬람은 무자비한 복종을 모토로 지하드(성전 聖戰)를 자행하는 폭탄테러의 주범이다.   기독교보다 600년 후에 나타난 이슬람은 신구약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처음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한 이슬람은 호전적인 종교이다. 코란이 성경을 들먹거리고 다수 성경인물을 묘사하지만 면밀히 검토하면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이다. 이슬람이 성경을 들먹거리는 이유는 기독교인에게 포교하려고 의도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는 이단이다. 이단은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집요하게 정통교회를 뒤흔들고 나온 사이비 집단이다. 이단은 처음에는 정통교회의 전통에 편승하다가 점차 본색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정통교회와 같은 것 같다가 마지막에 다른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한국교회는 절반 이상이 이단이다. 유라시아와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과 쿠바에 종교의 자유가 없지만, 이미 많은 이단이 활동하면서 공산당에 신물을 느낀 주민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전도도 금지되어 교회가 허물어지고 신앙의 대를 잇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에 편향된 영혼이 죽어가고 기독교문화마저 녹슬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생들이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 신학생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자기들이 사역하고자 하는 교회의 장로이다. 이 점에서 장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며 교회의 전통을 지키려는 분이므로, 인사문제를 목회자에게만 일임하지 말고, 인선 위원회에 들어가서 신학후보생들을 검증할 수 있어야한다. 평생 동안 한 교회에서만 섬긴 장로의 영적 지도력은 현대 목회에서 아주 필요한 부분이다. 과거 장신대에 수도 없는 데모가 있을 때마다 장로들이 ‘저런 문제아를 교회에서 청빙하면 안 된다’라는 목소리를 높일 때, 신학생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중하던 일이 있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한국교회 정론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2
  • 감사와 기적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1-24
  • 감사와 기적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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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11-19
  •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선언한 후 18개월이 지났다. 참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가듯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두 번째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는 반복되는 비대면 예배와 참석 인원 제한에 부딪혀, 모여서 예배하던 당연한 것들이 오히려 지탄거리가 되는 가슴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위드코로나’가 선포되어 일상으로의 회복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교회마다 터널 속에 갇혀 그냥 주저앉아버린 성도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우리답게 일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일부의 성도들에게 예배의 회복만은 더딘 것 같다.    반면, 빠른 일상으로의 회복에 발맞추어 ‘어떻게 하면 한 번 더 예배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기도할까?’, 하는 마음으로 늘 성전을 사모했던 성도들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소망의 빛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왔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 속 두 번째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과연 18개월 동안 그 긴 터널 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지내왔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좌절하고 낙심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였는가, 아니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이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걸음을 걸어온 성도였는가 말이다.    1620년,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이미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중 51명이 목숨을 잃었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해서는 원주민들의 공격과 맹수의 위협, 각종 질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남은 자의 절반이 죽어 49명만 남은 상황이었다.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땅을 일구어 작물을 심고 산으로 나가 짐승들을 사냥하며 물고기를 잡아 양식으로 삼으면서 처절한 생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첫 번째 맞이하는 늦은 가을, 수확한 작물을 들고 하나님께 드린 감사예배는 그들이 길 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와 죽음을 뛰어넘은 생존의 희망의 빛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예배였다. 단순히 추수만을 위한 감사가 아니라 먹을 양식을 지속적으로 수확함으로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였다. 추수는 한 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그들은 앞으로도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지켜 주실 것에 대한 예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의 공포 속에 좌절한 사람은 왜 없었겠는가.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 낫겠다며 원망, 불평했던 것처럼 그들은 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길고 긴 터널을 뚫고 한발 한발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감사는 이런 것이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전진하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감사이다. 날마다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자와 며칠을 굶주림에 시달린 자에게 주는 따뜻한 밥 한 끼의 감사는 그 차원이 다르듯이, 고난과 어두움, 시련, 고통을 뚫고 나왔을 때의 진짜 감사를 느끼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생존의 위협이 아니라,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생명 그 자체를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추수감사절이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 내고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제 빛이 되어 이 땅을 밝히고 있다.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더욱 감사한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축원한다.  /서산 이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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