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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교회, 하수구가 되다
      민대홍 목사   ‘고난’을 주제로 한국 역사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한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서이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설명하며, 구약의 히브리 민족사와 우리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사사기 시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결국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고난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01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겪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당한 설움과 고통은 개인 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그 시대를 함께 산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다. 그 시기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을 위로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조선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하수구’로 보았다. 하수구가 있어야 일상의 삶이 청결해지듯, 우리가 강력하고 혼탁한 폭력을 받아내는 하수구가 됨으로서 이웃 민족들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조선)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서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가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에서.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 신약시대 신앙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자유와 구원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은 이러한 예수가 하수구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사순절, 그 끝에 고난주간이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온당히 받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식민통치 시기.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종교마저 자유가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졌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법정에서의 사형판결, 예수는 뭇 백성들의 하수구가 되어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졌다. 예수의 제자들도, 제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바통은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짊어지는 하수구가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뼈를 꺾은 고난을 지낸 후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로교회 목사, 서로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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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8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실천
     20세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교단, 교파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도 있었다. 21세기 들어서 한국교회는 급격한 쇠퇴와 정체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어 왔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는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변화된 신학을 극복하고 개혁주의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회개용서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실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 하나님이시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다른 인격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바로 하나님을 닮는 일이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종교개혁교회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성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님으로써 루터파, 칼빈파, 츠빙글리파 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교회의 본질인 하나됨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찬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고 있던 개혁파 회중들이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루터파의 공재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받아들이는 개혁파 회중들에게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된다고 답변했다.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성찬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와 같이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성찬론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 교리의 경우 그러한 교리 차이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지는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오순절교회, 침례교 등은 비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을 수는 없다. 한 가정의 형제 자매가 서로 다르게 생겼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이 닮아 한 가족임을 알 수 있듯이, 형제 간의 미세한 차이가 가족됨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과 대립의 상태에 있다면 교회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분열과 대립의 이면에는 십자가와 희생 없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기 우상화가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십자가를 통해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부활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생명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겨울을 지나 새싹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연합과 일치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2024년 부활절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회복하고 전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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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5
  • [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나 ‘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꽝’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그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소)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꽝’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그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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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6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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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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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23
  • 성서와 생활[11] 그리스도인의 영성-기도의 영성
     교회는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로 이 땅 위에 세워진 주님의 새로운 몸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구원받은 지체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의 몸을 이루게 된다. 부름 받은 모든 지체들이 연합하여 서로 자라게 함으로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된다.골2:12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며 주님의 표현이기에 교회의 사명은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곧 교회는 주님이 계시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바로 온전히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일이 지속되게 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사역은 무엇일까? 죄사함의 구원선포와 치유의 역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과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교회 사역의 중심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를 세우는 일에도 밤새워 기도한 후에 12제자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눅6:12-13 수시로 사람들을 피해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기도를 하셨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시다.롬8:34 주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고 그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교회가 주님 사역의 연장선 위에 세워져 있다면 바로 기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곧 기도에 있다는 진리를 세우는 일이다, 부흥과 기사와 헌신과 선교보다 앞서야 하는 일은 기도하는 사역인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또한 기도가 계시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위해 계시를 드러내고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교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큰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작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성도가 기도하는 일은 교회를 위한 최고의 헌신이며 교회의 가장 높은 일임을 알고 실천하는 자는 뛰어난 영적인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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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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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열려있고 또 미래가 있다. 감사하는 생활에는 고난의 복병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어떤 역경과 거짓도 감사하는 사람을 쓰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야 할 감사를 배우며 문제를 지나친다. 근심과 염려에 붙잡히지 않는다. 불안과 두려움 따위는 가벼운 두통쯤으로 여긴다.   이러한 삶의 주인은 바로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 어떻게 의롭게 된 자들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바로 감사하지 않을 때 죄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훨씬 빛을 얻을 것이며 더 많은 하늘의 기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영역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왜 믿는 자의 감사가 중요한가? 바로 감사의 영적인 일은 천국을 침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마다 감사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에 찌든 마음에는 감사가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귀신의 영이며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약3:15). 감사가 없는 마음은 오직 스올일 뿐이라고 했다(시6:5).    아무리 믿음이 크다고 해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일뿐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스올이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발현이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예배하는 행위는 가장 거룩하고 고상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감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향한 경배와 찬양과 헌신을 통한 시인이며 고백이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선포할 때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에 아벨은 참된 예배의 본을 보여주고 있다. 아벨은 실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다. 그는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을 감사로 예배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예배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감사하며 양을 잡아 피로 희생의 예배를 드림으로 주의 일을 시인한다.    살아 있는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이를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이 예배자의 한 사람인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함으로 예배의 속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살아 있는 자같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그의 믿음이 그를 증명하여 믿음으로 가인과 다름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예배에 하나님의 완전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찬양은 헛된 것이다.   완전한 감사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믿음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인은 현재를 감사했다. 자기의 농사지은 것으로 자기의 현실의 만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다. 거기에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연약함 때문에 감사의 행위에 희생이 따라오지 못하며 죽음을 이길 수 없다. 농사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드릴 감사를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인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미래가 없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아벨의 노선을 따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한다. 베드로 같은 고백과 시인이 있을 때 교회는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감사는 천국을 침노한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정론
    2021-11-04
  • ‘자연치유’ 통해 사랑과 건강을 전합니다
      나는 1967년 꽃 피는 춘삼월 장손이신 1925년생 아버지와 1924년생 어머니의 늦둥이로 경기도 남양주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출생을 말하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치유 환경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장손 집안이었기에 전통의례와 생활풍습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누리며 성장했고, 또 농촌 생활 가운데 몸으로 배운 몸 공부가 풍부하였다. 24절기의 순환, 낮에 해와 밤하늘 별과 달과 은하수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살았고, 땅의 소중함,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가치를 남다르게 체감하면서 성장한 것이 자연치유의 큰 원동력이 됐다. 아마도 이 시절 경험한 것들이 장석종이 창안하여 펼치고 있는 “형상체질”과 “체질 푸드테라피” 그리고 “오감멀티테라피”의 시작이라 여긴다.   아버지하면 청년시절 만주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으셨다고 하신 말씀, 한국 전쟁 당시 염병이든 고모를 지게에 지고 피난 가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키우셨던 우리 집 소는 말을 가르켜서 부리는 소였는데 송아지가 나면 코뚜레를 뚫고 말을 가르켜서 일반 소보다 비싼 가격에 우시장에 내셨던 일들도 기억된다.   겨울에 썰매를 타려면 논에 물을 대어야하는데, 벼를 베고 벼 포기의 밑 부분이 높아서 높은 벼를 낮으로 자르시고 물을 대어 겨우내 썰매를 탓던것도 기억된다.   어머니는 고향이 전라도 나주셨고 그래서인지 음식 솜씨가 참 좋으셨다. 지금도 나에게 소울 푸드인 들기름에 달달볶는 머위나물과 소금간이 잘 밴 오곡 찹쌀밥은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사랑의 먹을거리라 여긴다. 장손 집 맏며느리셨기에 명절 때 가장 먼저 약주술을 담그고, 그 다음에 엿을 고시고, 두부 만드시고, 묵을 쑤시고, 그리고 소당질 하시는 것을 옆에서 다 거들어야 했던 나는 지금도 묵의 달인으로 내가 쑥 묵은 차지고, 다른 묵에 비해 맛이 참 좋다.   어머니는 속병이 있으셨다. 속병은 소화 안 되는 위장병인데 그 원인은 미역국이었다. 옆집에서 생일이라 미역국을 같이 먹자고 하여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드시고 급체를 한 이후부터 평생을 속병으로 고생을 하셨다.   자연치유를 공부하면서 그 원인을 정확히 찾았는데 첫째는 어머니 체질이 수형인으로 미역국이 잘 맞지 않은 것, 둘째는 심장이 약한 분이셨기에 심장으로 인한 심하통 증상을 위장 증상으로 여긴 것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고생하신 심하통을 통해 나는 자연치유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국내최초, 최고를 지향하는 자연치유 인재의 숲”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번 개강 때 자연치유의 정의를 “문제를 알고 그 문제가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나의 의지와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을 통해 회복되고 소생되는 것이 자연치유다”라고 설명하였다.   간략한 두 줄의 자연치유의 정의는 1987년 자연치유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자연치유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간증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헛수고 일 때가 참 많다, 또 훌륭한 자연치유사역자를 만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석하였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역시도 치유와 회복이 그리 크지 않다. 치유를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자연치유는 이뤄질 수 없다. 또 의지가 없는 자연치유는 사상누각이라 여긴다. 모든 것에 우선순위가 있듯이 병을 낳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자연치유력은 발휘가 된다. 예를 들어 아토피로 고생하는 사람이 그 원인이 음식에 있는데 나는 맛있는 것 마음껏 먹고 피부 가려움은 감내하겠다면 아토피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 의지가 참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연치유를 크게 자연적인 치유(Spontaneous Healing), 자연을 통한 치유(Natural Healing), 자연적인+자연을 이용한 치유(Naturopathy) 3가지로 구분했다. 자연적인 치유는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면 불균형들이 사라지면서 본래의 생명력이 활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제때 자고, 제때 먹고, 제때 배설되어야한다. 자연을 통한 치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치유하는 것으로 피부상처에 아로마 라벤더를 바르는 것, 구내염이 있을 때 프로폴리스를 바르는 것등등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이런 자연적인 그리고 자연을 이용한 치유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자연치유학이라고 본다.   장석종 박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오감을 통해 수용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오감멀티테라피”를 주장한다. 그래서 출간한 책 제목도 장석종 박사의 오감멀티테라피가 있다. 눈코귀입촉 오감을 활용, 눈과 관련된 칼라테라피, 눈의 홍채를 이용한 홍채영양학 코와 관련한 아로마테라피. 귀를 이용한 귀분석상담학, 사운드테라피, 입을 이용한 푸드테라피, 촉감을 이용한 경락치유학, 근신경치유학, 그리고 영성과 감정과 관련한 감정치유 배치 플라워에센스, 에너지테라피등을 정립하여 치유에 접목하고 있으며, 이 철학이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커리큘럼에 담겨져 자연치유학 석사, 박사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장석종 박사는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 학회장이기도 하다. 자연치유 관련 논문을 투고하였지만 심사가 불가하다고 반려되는 경험을 하고는 자연치유학 이론 정립과 대중화를 위한 학회가 필요하고 여겨,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를 설립하여 자연치유 논문 발표와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매년 11월에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귀분석상담사 자격증, 홍채영양학 자격증을 등록하고 자격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민간자격을 학회에서 운영하므로 보다 전문가들이 교육하고, 또 교육생들은 전문화 교육을 통해 전문가로 거듭나는 과정이라 여긴다. 또 학회에서는 자연치유 도구와 교육 교재 발행에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로 기존의 이혈(이침)을 업그레이드 하여 포스에너지볼을 개발하였다. 회원들에게 우수한 제품을 비용적 부담을 줄여 공급하고 있으며, 귀(EAR)용, 바디(BODY)용, 그리고 선교사용을 개발 완료하여 상표등록을 마쳤고 현재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교육교재로 귀건강분석상담학 기본과정 교재를 출간하였고 홍채영양학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서울장신대 자연치유선교대학원장·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0-19
  • 믿음으로 사는 인생
    기독교교육의 대명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던 달라스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질문했다. “교수님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가장 중요하게 일러주신 제일의 교훈이 무엇인가요?” 교수는 한 주간이 지나 수업시간에 “지난 1주일 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신 것은 ‘어떻게 하면 믿음으로 살 것인가?’라네”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삶은 몇 미터 되지 않은 수족관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시사철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살아간다. 많은 외부 영향력이 있음에도 흔들림 없는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은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기적과 비유, 많은 말씀과 행동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뒤섞여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히브리서는 믿음의 장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주님은 우리가 떡으로, 옷으로, 재물로, 얻은 명성으로, 자기 의로, 자기 성취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인생 되도록 만들려고 오셨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 결과는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믿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가 생각지도 못하고 가보지 못한 길로 부르셨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생각, 아버지 데라가 가르쳐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설명할 길이 없는 영적 경험이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한 순종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가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광야를 건너게 하셨다. 모세는 그 당시 낙타와 함께 광야를 건너던 대상들처럼 광야를 한 번도 건너 못 적이 없지만, 오히려 그 부족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가게 만든 것임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경험이 필요하고 또 그 경험이 소중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때로는 인간적인 조건을 한 걸음으로 능가하시고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길을 막히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는다.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스 목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선교대회 주강사로 초청받은 이후, 세계적으로 활동했다. 그 가정에 첫 아이 데이비스가 태어났다.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자 아기의 밤낮이 바뀌었다.    부부가 일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생활 리듬이 깨져서 신경도 많이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오르티스 목사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밤 녀석을 좀 때려줘야겠어. 그래야 녀석이 밤에는 자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야” 밤에 아빠는 울고 있는 아기 침대로 갔다. 그러나 아기가 아빠를 보자 옹알이를 하면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를 불렀다. “여보 이 녀석을 봐요. 이렇게 예쁘게 웃고 있는 녀석을 내가 어떻게 때릴 수 있겠어” 그때 오르티스 목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된 우리의 관계를 다시 깨달았다. 아기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아기의 삶과 생명은 단 하나, 부모에게 붙어 있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이다.   믿음은 무슨 큰 업적을 세워서 받는 표창장이 아니고, 열심히 어디 다녀서 얻은 자격증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신뢰를 보내며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주님에게 붙어 있어 주님 방식 따르는 것이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걷는 길이 기울어진 듯이 어렵지 아니한가?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사랑으로 긍휼로 대해주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숨을 쉬며 살 수 있다. /고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0-05
  •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
     종교는 공동체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문화라는 그릇을 통해 드러내며, 복음의 씨는 문화라는 토양을 전제로 성장한다. 그러기에 선교에서 문화를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한국 전통문화 속을 지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 안에서 성장일로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므로 대부분 기독교 교단들은 <대한예수교>나 <한국기독교>로 지칭하면서 ‘기독교’ 앞에 ‘대한’이나 ‘한국’을 넣었다. 이제 기독교는 한민족의 얼과 삶의 자리로 신앙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명절은 조상들의 얼을 신나는 멋으로 그리고 살맛 나는 삶을 찾기 위해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한국교회는 토착화했으면 한다. 그러한 축제 문화에서 소외되어 겉도는 것은 결코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에서도 민속명절을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잘 지켜왔다.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아이들은 꼬까옷을 입고, 어른들은 한복차림에 선물을 마련해서 서로 나누었고, 아침에는 온 가족이 모여 하느님과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차례(추도예배)를 지내고 성묘를 하였다. 한가위 추석에는 새로 수확한 햅쌀과 햇곡식들로 밥을 지을 뿐만 아니라, 쌀가루로 빚어 송편을 만들어 먹었다. 가족을 비롯해 여러 구성원들이 모여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 놀이가 있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토착화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레위기 23:5-14에 무교절 또는 유월절은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때이다. 성경주석가에 의하면 무교절은 본래 가나안의 절기로 보리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기쁨을 축하하는 축제였다. 추수한 처음 이삭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던 의식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이 명절을 받아들여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보리 추수감사제사를 드렸다. 단순히 추수감사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출애굽 사건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 절기를 받아들였다. 땅의 소산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보리의 열매로 누룩을 넣지 않고 떡을 빚어 출애굽 사건을 상기케 하였다. 또한 그들 조상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고난의 떡을 먹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키는 문화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왔다.    이와 같이 그 땅의 추수감사제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을 지어서 민족사적 의미를 가지고 유월절로 지키며 그들과 함께 보리 추수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로 만들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그 나라를 건국하게 된 민족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마침내 자기네 종교와 문화가 융합되어진 것이다. 자기네 축제 문화에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도 민속 축제에 신앙고백을 담을 수 있을 만한 교인 수를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도 우리 민족과 고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축제가 한국교회의 명절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숙은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문화 속에 기독교 선교가 파고 들어가는 ‘문화 선교’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민속명절은 농경사회에서 일어난 문화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변화하지 못해 위기를 맞이했다. 그저 이름뿐이지 개인주의 성향으로 바뀌어 요식행위로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는 사라지고 있다. 한 조상으로 살아온 민족의 혼과 얼을 엮을 수 있는 문화가 거의 쇠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과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축제는 열린 마당이다. 이러한 축제에 담기는 의미와 놀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명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누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선도해가는 사회적 책임의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면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강남대 명예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9-13
  • 선교사 언더우드의 정신을 본받아
      선교사 언더우드가 입국했던 1885년 당시, 문명한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조선은 개화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어렵고도 힘든 신문 발행을 결심한다.   언더우드는 신문이 조선의 인민을 개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즉 기독교인들이 이 신문을 열독하여 각지역의 의견선도자가 됨으로써 신문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주위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함께 전달하게 되면 조선의 인민과 사회가 개화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가 시작한 〈그리스도신문〉의 창간호 사설은 “누가 와서 우리에게 묻기를 조선이 이 때를 당하여 그중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우리들이 첫째로 말할 것은 지식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식이라」는 창간호 사설의 제목에서 그 정도로 그는 조선의 개화를 강하게 열망하였다.   그래서 신문 발행을 위해 관련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의 평민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언문(諺文, 한글)과 양반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모두 배웠고, 또 그들의 일상 언어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신문에 적용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의 전파뿐 아니라 무지몽매한 인민을 깨우는 수고를 하였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신문 발행뿐이 아니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지방에까지 여러 주간 여러 달을 고생하는 전도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경 번역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수고를 집중하였으며, 조선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애국 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노력 역시 수도 없이 시도하였다.   그런 와중에 풍토병이 들었다. 〈그리스도신문〉 1897.8.6.일자에서 “월전부터 원목사께서 열병이 들어 만만 위중한 상태였다 (중략) 목사의 아들 한경이도 병이 들었다. 더욱 황황(遑遑)한 것은 조선 사람도 열병을 두려워하는 병인데, 외국 사람은 수토(水土)가 다른 고로 열병이 들면 나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걸렸다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풍토병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다시 일어나게 된다.   또 같은 기사에서 “원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을 불쌍히 여기사 구주의 도를 펴라 하시는 명령을 받들고 (중략) 한 때도 한가한 틈이 없이 몸이 매우 곤할지라도 자기 몸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항상 열심을 내어 주를 위하는 일만 하였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주의 일을 한 언더우드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역자들의 믿음과 기도와 수고를 기반으로 한국교회는 시작되었고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신자의 수가 많지 않은 미미한 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회를 선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신은 무뎌졌고, 오늘날 교회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개독교’로 목사는 ‘먹사’로 교회는 ‘사업장’으로 불리고 있다. 복음과 믿음보다는 돈과 권력과 시스템을 우선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거 과정에 돈이 ‘억’ 소리 나게 뿌려지고 있다고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며 믿음을 강조하고 교회 갱신을 부르짖는 목사는 오히려 홀대를 당할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숨을 담보로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정신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도 내던진 순교자들의 자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복음과 예수를 따르자는 정신을 기반으로 교회가 갱신되며 다시금 사회를 선도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언론학박사, 전 김포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9-1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총회 기대
    한국교회가 어느덧 총회의 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언컨텍트 상황에서 맞는 두 번째 총회이다. 삶의 모든 것에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준 코로나19 상황에서 각 교단의 총회는 개최 여부를 놓고 고심하며 분주했던 지난해와는 다른 총회가 준비될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집단이든지 총회는 그 집단의 수준과 역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리이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형제들끼리 동일한 신앙을 확인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교제하는 기회가 되는 자리가 총회이다. 정체성을 위협하는 도전들에 대한 공동 대처의 장이 되는 것도 총회이다. 그러므로 총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전국적 총회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임이 될 능력과 자격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지 자문하며 전국의 모든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며 이제는 ‘위드 코로나(with-corona)’라는 말이 들려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드 코로나’라는 포스트 코비드(Post-Covid,코로나19 이후)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목회적 과제를 주는 상황인지 목회적 환경의 변화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대면예배가 전면 허용이 되어도 온라인예배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라는 공간과 주일이라는 시간은 가정과 일상으로 대체되고 있다. 주일예배가 가지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응집력이 사라져가고 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올해 장로교 총회는 무엇보다 교회 회복을 위한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예배’ 중심의 공동체보다 ‘신앙’ 중심의 공동체가 중요해지고 있다. 온라인예배는 예배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고 있다. 전통적인 ‘예배’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일상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선교 회복을 위한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선교의 길이 막혔다. 선교 회복이 절실하다. 다음 세대 회복도 절실한 과제이다. 25년 안에 ‘종교에 대한 경외심 증발’이 미래세대의 특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인터넷의 발달과 휴대전화를 통한 정보의 확산은 종교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과 편견을 갖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회복, 선교 회복, 다음세대 회복이 절실한 상황에서 열리는 이번 총회가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고, 복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총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경험되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기독교인을 시대와 동떨어진 채 살아가며 상대방의 입장은 헤아리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해대는 매우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믿음과 삶이 연결되지 않아서 생긴 오해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은 삶 속에서의 ‘행함’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행함’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는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에서 진정한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루터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장로교회는 개혁의 전통에 서 있다. 언제나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장로교회를 경험하고 확인하고 선포하는 이번 총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9-05
  • 장로교 총회들에 바란다
      한국 교계에서 장로교의 비중은 아주 크다. 지역으로는 몰라도 나라의 단위로 본다면 전 세계에서 장로교가 이렇게 주도적인 경우가 드물다. 구한말 선교 상황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헌신하며 애썼고 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고 본다.    2021년은 특별한 해다. 어느 해든지 그럴 것이지만 코로나19를 두 해째 겪으면서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이 지금의 시간을 유별나게 만들었다. 현재의 우리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땅의 기독교에 관한 진단과 처방과 결단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텐데, 위기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것을 넘어설 방법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에서 가장 비중이 큰 장로교 교단들이 가진 책무는 무엇인가? 시각과 가치관에 따라서 같은 상황 속에서 같은 주제를 놓고도 해석과 판단이 영 딴판일 수 있다.    2020년 1월에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 현장 교회를 포함한 한국 기독교 전체에서 교회 갱신이 주요 관심사였다. 교단과 교계 단체들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한국 교회의 병과 타락을 진단하면서 나름대로 논의하며 변화의 행동도 시도했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갱신에 관한 주제는 옆으로 밀렸고 코로나19 감염 및 방역에 관련한 상황이 교계의 중심 주제가 됐다.    코로나 초기의 신천지 관련 사태와 기독교 극우 집단의 행동이 이 주제를 교계와 사회의 중심에 놓은 주요 원인이었다. 이른바 ‘대면예배와 비대면예배’에 관한 논의와 논쟁에서 정부의 방역 조치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일부 교회의 행동도 교계와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차별 금지에 관한 법안과 평등에 관한 법안에 관한 주제도 현재 한국 교계의 중심 사안이다.    여기에 건강가정기본법안도 흐름으로 보아 한 묶음이다. 위 법안들의 내용 자체에 입법의 상식에 벗어나는 과잉입법의 논란도 있지만 교회로서는 성경에서 죄로 규정하는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면 안 된다는 것이 이 법안들을 반대하는 절박한 이유다. 최근 교계 단체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코로나 방역과 동성애 관련 법안들에 관한 논란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교회는 그 본질상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며 세상을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 현상에 관한 교회의 대응적 행동은 기독교 윤리에서 참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동이 교회의 자기 성찰과 갱신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 관한 분석과 판단, 입장 표명과 행동은 그 집단이 가진 가치관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가치관은 유일하고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인 66권 성경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 성서의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개혁하는 존재다.   코로나를 20개월이나 겪고 있는 지금 한국 교회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교세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단들이 교단 총회를 앞두고 있다. 장로교단들이 지금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장로교회를 신학 전통을 따라 말할 때 ‘개혁교회’라는 표현을 쓴다. 이런 정신에서 저 유명한 말이 나왔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바로 지금 교회가 약해지고 병들고 타락하는 것을 돌이키는 개혁이 시급하다. 지금 장로교단들이 그 멋진 별명, 그 이름값을 할 때다.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8-26
  • 백신접종과 교회 방역매뉴얼 문제점
      섬기는 성안교회에서 지난 주일까지 전체 교역자와 성도 70%가 백신 접종 완료 되었다.    젊은 교역자 중에는 백신 접종 후 잠시 통증의 시간을 지나기도 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교역자들이 백신을 맞은 이유는 단순하다. 예배의 온전한 회복과 당당한 예배 인도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주의 종의 되는 이유는 예수만 보이기 때문이다. 주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에는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고 위험 군이다. 실제 어느 교인은 “목사님 제 옆에 오지 마세요.” 라고 농담도 한다. 성안교회의 백신 접종률은 경기도 지역 백신 접종율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1차 접종만 해도 다양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교회만 해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워지며, 교회 여러 활동도 편해진다.   백신 접종자들끼리 만나는 모든 소그룹 모임도 정상화 될 듯하다. 외적으로는 확진자와 접촉 하더라도 자가 격리가 면제되며, 해외여행 후 격리도 면제가 된다. 식당을 이용할 때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우며, 외부 활동 시 마스크를 벗을 수도 있다. 이전에 비하면 완전 해방되는 느낌일 것이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 위험한 것을 왜 맞아요? 그런 분들은 반대의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위험한 코로나19는 왜 안 무서워할까요?   지난 시간,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 두려움에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했고, 사람과의 만남에 긴장을 했으며 정부에서 발표하는 거리 두기 단계의 공포심을 체감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주변은 초토화가 되고 마녀 사냥을 당하였다.   사람은 3개월 이상 자유를 잃어버리면 프레임에 걸리고 감각도 마비가 되어 길들여진 짐승처럼 순응을 한다는 통계를 보았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지 모른다. 이제는 자유를 찾을 때이고 그 기회가 백신이라면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몸이 약하니 백신을 맞으면 안돼요!”라는 말과 “몸이 약하니 코로나19 위험이 크므로 꼭 백신을 맞아야 해요!” 어느 것이 맞을까? 이처럼 성안교회는 방역당국 준칙 잘 따르고, 백신 접종도 앞장서서하고 있으므로 할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4단계서 19명으로 제한한다는 교회 방역 매뉴얼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첫째, 교회는 유급 직원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직장이다. 모든 직장은 열려 있고 출근을 막지 못한다. 모든 종업원은 인원 계수가 안 된다. 유급 직원과 관계없는 인원 적용은 노동법에 저촉된다. 그들이 직장을 잃는다면 책임을 질것인가?   둘째, 모든 기관은 기본적으로 열려 있다. 단 두 군데, 술집과 교회만 타킷 방역을 하고 있다. 이것은 평등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셋째, 예배는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시청하는 것이 아닌 드림공동체다. 그래서 모든 예배 요소가 살아 있어야 한다. 예배의 매뉴얼을 국가가 정하는 것은 종교자유를 심각하게 무너뜨린 것이 된다.   넷째, 백신 인센티브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70%면 국가적인 집단 면역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교인 중 백신 접종 완료자로만 예배를 드리게 한다면 집단 면역의 테스트가 되기도 하며 모든 경제도 살아난다.   다섯째, 이제 교회들은 예배 사수와 교회 존폐의 문제의 막다른 길에 있다. 곧 생존을 위한 거룩한 반격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폭풍 전야가 지금의 시간이다.   다행히도 방역당국에서 지난 7월 30일에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서 일반교인도 참석할 수 있는 대면 예배로 전환하고, 동일 시설 내 종교활동 공간이 여러 개일 경우, 동시간대에 공간별 수용인원의 10% 범위 내로 모일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방안이다.단, 방역수칙 위반 시설은 제외키로 했기에 교회들이 솔선수범해서 방역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조금 더 힘을 내자 /성안교회 목사, SAMTV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1-08-08
  • 성인된 자녀와 함께 살기
      아는 분이 그런 말을 했다.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데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속에서 불화통이 터진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성인이 된 자녀를 집에 둔 부모들은 위의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원하는 직업과 부모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등이다. 그러다 보니 성인 자녀가 부모의 기준에 맞추어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할 때 부모들은 자녀들의 모습을 답답해하며 그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과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데 부모님의 따가운 시선과 불편한 잔소리는 성인 자녀로 하여금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여전히 자신을 어린아이로 여기며 통제하려 고 하는 부모님의 의도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기보다는 간섭과 부정적 편견이라고 여기며 부모님에게 원망을 돌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 일부 자녀들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기 보다는 가정에서 부모님이 제공하는 많은 물질적인 제공은 잘 받으면서 부모님의 간섭이나 통제는 전혀 받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도 보인다. 때로는 강한 부모님 밑에서 함께 살면서 무기력한 모습마저 보이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렇듯 성인이 된 자녀와 부모가 함께 살아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생활비가 많이 들고 집값이 많이 오른 현재를 살아가는 자녀들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부모님과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인의 자녀들과 부모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이것이 정답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각 가정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그동안의 가정의 고유한 역사와 현재의 발생하는 이야기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설명함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이 된 아이들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계선(Boundaries)을 잘 설정하는 것이다. 경계선을 설정할 때는 물론, 아이들과 함께 회의를 해서 서로가 합의를 하면서 어느 정도 현실 가능하고 동의한 것을 중심으로 규칙을 세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규칙을 세워 놓으면 함께 의논할 때는 ‘예스’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음에 정한 규칙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지켜지지 않았을 때마다 모니터링을 하고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또한 지켜지지 않을 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키기로 한 규칙이 느슨해질 때는 다시 가족회의를 통해서 지켜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왜 그것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두 번째로 성인 아이들과 잘 살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아직 독립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나의 통제에 들어있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그들이 성인으로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자녀에 대해서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비폭력 대화’의 형태로 존중하는 의사소통 방식으로 상대를 공감으로 이해하고 나의 감정과 생각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서로를 편안하게 만든다. 비폭력 대화는 마음에 갈등이 생겼을 때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듯이 표현하면서 나의 감정과 필요를 상대방에게 알게 하여 부탁으로 끝맺음을 하는 대화법이다. 성인이 된 자녀와의 관계에서 이런 대화법들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훨씬 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호주기독교대학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8-06
  • 포스트팬데믹 처치의 전략 및 실례
      지난 1년 4개월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예술,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종교계도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기독교 예배에 직격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의료목회상담’이다. ‘의료’란 육신적·과학적·이성적 실체가 있는 대상이며, 이를 주관하는 ‘육신적 원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목회’는 영적·신학적·신앙적 실체가 있는 대상이며, 이를 주관하는 ‘영적 원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상담’은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와 이것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목회상담’이란 이 세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의료’ 또는 ‘의학’이라고 하는 일반은총의 부분과, ‘목회’ 또는 ‘목양’이라고 하는 실천신학적인 부분, ‘상담’ 또는 ‘은혜’를 뜻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부분이 그것이다.   ‘메디컬처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목회의 본질 중 하나인 ‘의료목회상담’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시적인 사역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메디컬처치의 개념은 소강석 목사님의 아이디어에서 첫출발을 했다.   전염병과 교회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이어져 왔다. 교회가 이 전염병, 즉 팬데믹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교회의 명암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곤 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메디컬처치의 정신은 이미 우리 신앙의 선배들과 교회에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시대를 보자. 로마제국 시대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피하거나 숨지 않고 이웃 곁에 있음으로써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이때 그들을 보면서 생겨난 단어가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ανοι)인데, 이는 ‘함께 옆에 있는 자’, ‘곁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만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의 위급한 상황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죽은 시신들을 수습하는 등 자기희생적 사랑을 주님의 이름으로 실천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사랑 때문에 기독교가 로마 전역에 확산되었고 마침내 기독교 공인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중세 시대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한 큰 재앙, 즉 중세교회의 과오, 유대인 학살 등이 있었다.   특별히 중세교회의 일부 사제들은 전염병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 막아보자고 하면서 무조건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이자 심판이라는 확고한 종교적 신념이 팽배하였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미신적 종교 행위와 치료법들이 난무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현명한 판단을 하였다.   칼빈은 병든 자들을 전문적으로 돌보기 위한 의료 서비스 제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네바 시에서 의사들의 급료를 담당하게 하고, 교회와 국가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가만이 아닌 교회도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성 바깥쪽에 구빈원을 따로 운영하여 치료하기도 했다. 특별히 제네바에서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못지않게 목사의 환자 심방을 의무화하였다.   구한말 한국 초대교회 당시, 1895년에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 언더우드 등 서울의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새문안 교인들, 제중원의 에비슨 원장 등이 서울 근교의 큰 막사를 콜레라 병원으로 정하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때 정부는 사대문에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 하는가?’라는 벽보를 붙였다고 한다. 이로써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었고, 후원금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19세기 한국 초대교회는 전염병에 맞서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이는 2-3세기 로마 시대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파라볼라노이’라고 불리며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로서 로마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단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여 관리해야 한다. 이는 많은 노력과 동참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현 상황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메디컬처치는 각 교단마다 교리적 차이를 뛰어넘는 객관적 사실(과학적·의학적 팩트)에 기초하기에 한국교회가 연합하기에 수월하다. 한국교회가 하나의 리더십, 하나의 메시지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 중의 하나이다. 이를 통하여 대 사회적·대 정부적·대 언론적 대응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한국교회의 하나 됨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자 교회의 거룩성을 드러내는 사역이다. / 다건연세내과 대표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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