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1(토)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설

실시간뉴스

실시간 사설 기사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1
  • 대법원의 군대 동성애 무죄 판결을 우려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최근 군 형법상 추행혐의로 기소된 중위 A씨와 상사 B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와 B씨는 영외에 있는 독신자 숙소에서 성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번 판결은 남성 군인 간의 성행위를 유죄로 판단했던 기존 판례를 깼을 뿐 아니라 군대 내 동성애 합법화로 확대 해석 될 수도 있는 사건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군사법원 1·2심은 이 두 사람을 각각 유죄로 선고했다.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군형법 92조 6항을 위반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이를 완전히 뒤집었다. 대법관 13명 가운데 8명이 성행위가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합의에 의해 이뤄진 점을 들어 무죄 의견을 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우려스런 점은 군내 내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한 군 형법에 ‘자기결정권’이라는 엉뚱한 잣대를 꺼낸 데 있다. 군대에서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려면 현재 병역법은 원하는 사람만 군대에 가는 것으로 싹 다 뜯어 고쳐야 한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군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번 판결이 그동안의 판례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대법원은 이와 유사한 사건에 대해 2008년, 2012년에 같은 법률 조항을 인정해 처벌해 왔고 헌법재판소도 2002년, 2011년, 2016년 세 차례나 합헌임을 밝혀왔다.   이런 현실에서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분명 국민 눈높이와 동 떨어져 있다. 군내 내 왜곡된 성 문제에 경종을 울려야 할 대법원이 도리어 질서와 규율을 허무는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서 판결 자체를 신뢰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경적 관점에서의 바른 기독교윤리가 절실하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5-04
  • 어버이 공경은 기독인의 근원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버이날은 1956년 5월 8일 어머니날에서 시작되어 1973년 어비이날로 변경하여 지정된 날이다. 이날에는 각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감사의 뜻을 정하는 날이다. 전국의 시·군·구에서는 효자·효부를 선발하여 상금 수여 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면서 이날을 전후하여 ‘경로주간’을 설정하고 어른 공경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우리 사회에서 효를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맞아 더욱 그렇다. 언론에서 수시로 접하는 불미스런 소식에는 자식이 부모를 핍박하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며,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끔직한 사건들은 이 시대가 사랑이 식어가는 때라는 표징이다.   이런 세상에서 기독인들이 먼저 사랑과 효를 실천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가운데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고”(딤후3:1-5).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요5:26).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에게 체현되고, 다시 보혜사 성령에 의하여 사람 가운데 실제화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은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기독인의 자존심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는 그것이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한 가족의 아버지는 생명의 전수자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된다. 내가 이 땅에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부모의 생명이 나에게 표현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듯이 사람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요, 기독인만 갖는 유일한 비밀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기독인은 물론 그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분명하게 가르치자. 더불어 부모에 대한 공경의 효를 실천하게 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5-04
  • 공명하고 깨끗한 선거를 준비하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등 한국교회의 주요한 교단들이 노회와 연회를 진행하면서 부총회장, 감독 등에 출마한 후보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경선으로 후보가 확정될 가능성이 높아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된다.    걱정스러운 일은 고질적으로 내려오는 금권선거에 대한 우려이다. 벌써 어느 후보가 얼마를 썼는지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다. 사실상 선거전은 이미 물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결국 돈으로 표를 사려는 금권선거에 대한 악몽을 지울 수 없다.    금권선거는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가장 나쁜 관행이다. 몇 억을 써야 총회장에 당선되고, 감독에 당선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금권선거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내홍을 앓았고, 결국 지금처럼 여러 단체로 분열되고 말았다. 분열되기는 쉬어도 다시 하나로 합치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금권선거로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지난 10여년 간 몸살을 앓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소송이 잇달았고, 많은 사람들이 곤혹을 치렀다. 여기에 소송비용까지 합친다면 손실과 손해는 너무나도 막대하다.   총회장이나 감독에 출마한 인사들은 모두 교계에 이름이 잘 알려진 중견목회자이다. 당연히 이에 따른 높은 도덕성과 인격이 요구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자리는 그 사람의 인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돈을 주고 표를 사서 총회장이 된다한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총회장, 감독은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더 낮은 자세로 섬기고, 화합을 이끄는 자리가 돼야한다. 어느 전 감리교 감독은 감독은 행정의 수반이 아닌 영적 리더의 자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백번 옳은 말이다. 금권선거 없는 깨끗하고, 모범적인 선거를 준비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22-04-27
  • 차세대교육에 힘쓰자
    코로나 시대를 맞아 교회에서 젊은 세대가 떠나는 등 차세대 신앙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비대면 사회가 도래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곳이 교회이다. 성도들의 교제의 장이 제한을 받다 보니 자기 생활에 안주하게 된다. 여기에 디지털 사회의 편리함이 영혼의 나태함으로 나타난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편리한 스마트폰에 생활의 전부를 의존하는 ‘생각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모든 것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검색창을 통하여 필요한 정보를 찾아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 교회의 비대면 설교에 익숙하게 되고. 성경 읽기보다는 앱에 의지한다. 그 결과 개인주의적인 종교생활로 인하여 청소년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차세대교육은 매우 미흡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자녀들의 모임이기에 하나님의 시민이요 권속(엡2:20) 곧 가정이다. 가정의달 5월을 맞아 모든 교회나 가정에서 차세대 신앙교육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칭찬받은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계3:7-13)이다. 비록 수도 적고 힘이 약한 교회였으나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자 주님은 그 교회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셨다.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은 ‘형제사랑’이라는 뜻을 갖고 있듯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크게 부흥하여 세계적인 선교를 이루었던 18-19세기 교회를 예표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유대인 종교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민의식 때문에 완악했으며, 영혼에 무관심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자로서 모습을 오해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많이 유사하다. 코로나 시대 개인주의가 만연함으로써 유대인들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인(딤후3:5)되고 있다.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온전하여 선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4-27
  • 러시아군의 양민학살과 범죄를 규탄한다
    전 세계인들이 우려하던 일을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도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에 침공한 러시아군의 민간인에 대한 만행에 세계는 경악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철수하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도시 부차에서 다수의 민간인을 집단학살했다. 거리에 뒹구는 민간인의 시신은 전쟁의 광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를 명백한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충격에 휩싸인 국제사회는 러시아에 대한 제제에 돌입했다. 과거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집단적으로 학살했던 인종말살의 전과가 있는 독일은 러시아 대사관 직원을 추방했다. 미국은 푸틴을 민간인학살 혐의로 국제재판소에 기소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21세기의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야만적이고 끔찍한 만행이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는 충격과 함께 깊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계 2차 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악마적 망상이 다시 배회하고 있다. 히틀러의 악령이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닌가라는 끔찍한 상상에 빠지고 있다.   성경적으로 보자면 세상에는 여전히 사탄의 권세가 활동 중이다. 이 어둠의 권세는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마비시키고 대신 광기와 증오로 가득차게 만든다. 그래서 집단학살, 강간, 파괴를 일삼게 만든다. 이 악마성이 다시 우크라이나에서 나타나고 있다.   집단학살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강력히 이를 규탄한다. 한국교회는 러시아군의 악마적 광기를 막을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함께 기도하고, 성명을 발표하고, 모든 사람의 양심에 호소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   부활절을 맞아 우크라이나에서 사망과 어둠의 광기가 사라지고 다시 희망과 소망의 생명이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4-13
  • 예수의 ‘부활’, 믿음의 일상이어야 한다
    매년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부활이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오셨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사7:14), 베들레헴 탄생(미 5:2), 희생적 죽음(사53:5), 못 박히심(시22:14-18) 등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실의(失意)에 빠져 자기의 예전 일터로 돌아갔다. 그러던 그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게 되고,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의 모습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날마다 믿음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4-1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