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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장35부터 41절에서 주님이 바다를 건너서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한다. 주님이 이 말씀을 믿는 제자들로 바다를 건너가게 한다. 그들은 노를 저어서 주님을 배에 태운 채로 간다. 자기들이 어부 출신이니 자신만만하게 노를 젓고 바다를 자기들 힘으로 건너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전혀 아니다.   믿음은 주님이 바다를 건너가자는 말씀을 믿고 따랐을 때 주님이 제자들을 도구로 하여 주님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들이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수고한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생애는 멸망인 것이다. 이를 사무엘상하 6장 3절부터 7절에서 확실하게 계시해 주었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를 웃사와 아히오가 몰고 간다. 아히오는 한술 더 떠 하나님의 궤 앞에서 끌고 간다. 소들로 인해 하나님의 궤가 흔들리자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잡으며 돌본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사 웃사는 하나님의 궤 옆에서 즉사했다. 이와 똑같이 마가복음 4장 36절에 제자들이 주님을 위하여 애쓰며 잘 모셔간다. 이는 웃사 같이 멸망하는 길이요, 믿음이 전혀 없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큰 폭풍우와 파도가 일어나 배를 덮었다. 그들이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는 주님을 깨웠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 주님이 베개 베신 것은 누가 가져다드렸는가? 제자들이 마련하여 주님을 편안히 주무시도록 드린 것이다.    자기들의 힘으로 주를 위해 노를 저었는데 폭풍우와 파도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이렇게까지 주님을 돌봤는데 어찌 우리가 죽게 됐는데도 우리를 돌봐주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하고 있다. .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드려 되돌려 받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롬11:35). 주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주고 폭풍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나 무서워하고만 있는 제자들이다. 주님이 폭풍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후 “어찌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했다. 그들은 주님이 아닌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다.   그들은 행함으로 빠진 것이요. 전혀 믿음이 없음을 오늘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잘 살펴야 될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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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8-08
  • 믿음이 적은 자들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바다를 건너서 건너편으로 가자고 명령했다. 주님은 이를 반드시 실행한다(민23:19). 주님은 제자들의 목자요, 인도자가 된다. 그가 했던 말씀대로 제자들을 바다 건너 목적지에 반드시 당도하게 한다. 주님이 배를 타시기 전, 서기관이 주님의 큰 능력과 명성을 보고 나왔다. 주님은 세상에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며 그를 잘라 버렸다.    그러나 제자 중 하나는 내 아버지 장사를 치르고 뒤따르겠다고 청했다. 그러나 허락지 않고 즉시 주님을 따르라 했다. 산자냐. 죽은자냐. 산자는 주님을 따르라. 육신의 부모의 장사도 치를 것 없이 즉각 주를 따르라고 명령한다. 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이 배에 타시자 제자들이 그를 따르더라. 항해 중 바다에서 갑자기 큰 폭풍우와 파도가 일어나고 배까지 덮쳤다. 그때 주님은 주무시더라.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주님을 깨운다. 이같은 상황이 어찌된 일인가? 폭풍우와 파도의 한가운데 그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님이 제자들의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바람과 파도를 일으킨 것이 곧 실상이다(사49:7).   바람과 파도는 피조물로써 창조주이신 주님께 절대 순종할 뿐이다. 일어나는 것도 잠잠케 됨도 오직 조물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다. 제자들은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파도만 보고 두려워 하기만 한다. 오늘날 우리들도 깨달아야 될 것이다. 즉 일원론적 신앙관을 가지라는 것이다. 또한 주님이 주무시더라. 육신의 눈으로는 주무시지만 영으로 주님을 보면 시편 121편 3절에서 4절 말씀대로 주님은 제자들을 지키고 실족치 않게 하려고 일하심을 볼 수 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들을 지키시는 주님이다. 제자들이 ‘우리를 구해 주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라고 부르짖는다.    위경에서 구원받기를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죽을까 봐 두려워 떨며 기도하는 것이다. 왜냐? 믿음이 적어서 그렇다. 주님은 일어나 바다를 잠잠케 하신 후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했다. 주님께 기도했는데 왜 책망했을까? 이는 일원론적 신앙관에 의거 주님이 강을 건너게 하시는 역사를 보고 이를 감사하는 큰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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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8-01
  • 기독교와 샤머니즘, 그 대립과 갈등(5)-김동리 장편소설
          오히려 을화 편에서 섣불리 상대(영술과 기독교)를 쓰러뜨리기 위해 극단적 반응을 일으킨 것이 결국은 함께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을 뿐이란 말이다. 때문에, 월희가 방돌네 집으로 가게 된 일 자체는, 위험으로부터의 피신이란 의미에서는 구원(화해와 융합)의 길이 될는지 모르지만, 만일 그것이 ‘영술 식’의 길과는 다른 방향의 길이기 때문에 구원의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시켜 해석한 것이라면 옳은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단, 만의 일이라도 그 길이 ‘을화의 길’과는 다른 길이어서 구원의 길이 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이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주인공들은 물론이지만, 부주인공이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경우에서도 위와 같은 면은 똑같이 간취되는 편이다. 영술이의 측근으로 등장하는 박장로와, 또 을화의 세계에 가까운 태주할미의 경우에서 그것은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박장로는 원래 양반 가문의 후예로서 유교에 밝은 사람이었는데, 태주할미의 무서운 범죄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미신타파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이었다.   그런 박 장로가 영술의 정신적 아버지라면, 태주할미는 을화의 부정적인 짝에 해당할 인물이다. 영술이가 곁길로 나가려고 할 때 그를 바로잡아 주고 정도를 걷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가 박장로이다. 영술이는 박장로의 도움으로 자신의 결핍을 기워가며 살아간다. 반면 을화의 부정적인 짝이랄 수 있는 태주할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무죄한 어린애를 죽여 가면서까지 그 뜻을 실현코자 애쓰는 비정한 여인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을화의 잔혹한 면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로 인하여 을화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빡지무당의 빛깔마저 크게 퇴색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을화>에서는 평론가 천이두의 지적처럼 “한국인의 고유한 신앙적 근거가 되어온 샤머니즘과 서구에서 들어온 예수교 사이의 갈등 관계가 작품의 핵심적 주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갈등의 종교사회학’이 이 작품 안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태동 평론가의 표현처럼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적인 민간신앙과의 갈등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하겠는데, 결국은 이 양자(기독교와 샤머니즘) 중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 우리의 관심의 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작가 자신이 주장하듯 샤머니즘의 승리를 암시한 작품이 바로 이 <을화>라고 힘주어 말한다고 해도 그런 주장이 우리에게 시원스레 와 닿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작가 자신이 <을화>를 통해 샤머니즘 세계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리려고 시도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도리어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린 셈이 돼버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흔히 시(詩)를 논의할 때 하는 말처럼, 작품은 생산자(시인/작가)의 것이로되 일단 산출된 작품은 사회의 공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은 어떤 의도로 썼지만, 그 나타난 결과는 의도와는 달리 읽힐 수도 있는 법이다. 그것은 시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이 <을화>를 통해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을화>가 기독교의 승리를 그린 작품이라곤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똑같이, 이 작품이 샤머니즘의 승리, 곧 그것의 구원의 긍정 가치를 그려준 작품이라고 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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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8-01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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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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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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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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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대법원의 군대 동성애 무죄 판결을 우려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최근 군 형법상 추행혐의로 기소된 중위 A씨와 상사 B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와 B씨는 영외에 있는 독신자 숙소에서 성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번 판결은 남성 군인 간의 성행위를 유죄로 판단했던 기존 판례를 깼을 뿐 아니라 군대 내 동성애 합법화로 확대 해석 될 수도 있는 사건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군사법원 1·2심은 이 두 사람을 각각 유죄로 선고했다.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군형법 92조 6항을 위반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이를 완전히 뒤집었다. 대법관 13명 가운데 8명이 성행위가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합의에 의해 이뤄진 점을 들어 무죄 의견을 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우려스런 점은 군내 내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한 군 형법에 ‘자기결정권’이라는 엉뚱한 잣대를 꺼낸 데 있다. 군대에서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려면 현재 병역법은 원하는 사람만 군대에 가는 것으로 싹 다 뜯어 고쳐야 한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군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번 판결이 그동안의 판례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대법원은 이와 유사한 사건에 대해 2008년, 2012년에 같은 법률 조항을 인정해 처벌해 왔고 헌법재판소도 2002년, 2011년, 2016년 세 차례나 합헌임을 밝혀왔다.   이런 현실에서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분명 국민 눈높이와 동 떨어져 있다. 군내 내 왜곡된 성 문제에 경종을 울려야 할 대법원이 도리어 질서와 규율을 허무는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서 판결 자체를 신뢰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경적 관점에서의 바른 기독교윤리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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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4
  • 어버이 공경은 기독인의 근원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버이날은 1956년 5월 8일 어머니날에서 시작되어 1973년 어비이날로 변경하여 지정된 날이다. 이날에는 각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감사의 뜻을 정하는 날이다. 전국의 시·군·구에서는 효자·효부를 선발하여 상금 수여 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면서 이날을 전후하여 ‘경로주간’을 설정하고 어른 공경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우리 사회에서 효를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맞아 더욱 그렇다. 언론에서 수시로 접하는 불미스런 소식에는 자식이 부모를 핍박하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며,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끔직한 사건들은 이 시대가 사랑이 식어가는 때라는 표징이다.   이런 세상에서 기독인들이 먼저 사랑과 효를 실천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가운데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고”(딤후3:1-5).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요5:26).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에게 체현되고, 다시 보혜사 성령에 의하여 사람 가운데 실제화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은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기독인의 자존심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는 그것이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한 가족의 아버지는 생명의 전수자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된다. 내가 이 땅에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부모의 생명이 나에게 표현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듯이 사람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요, 기독인만 갖는 유일한 비밀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기독인은 물론 그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분명하게 가르치자. 더불어 부모에 대한 공경의 효를 실천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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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4
  • 공명하고 깨끗한 선거를 준비하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등 한국교회의 주요한 교단들이 노회와 연회를 진행하면서 부총회장, 감독 등에 출마한 후보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경선으로 후보가 확정될 가능성이 높아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된다.    걱정스러운 일은 고질적으로 내려오는 금권선거에 대한 우려이다. 벌써 어느 후보가 얼마를 썼는지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다. 사실상 선거전은 이미 물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결국 돈으로 표를 사려는 금권선거에 대한 악몽을 지울 수 없다.    금권선거는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가장 나쁜 관행이다. 몇 억을 써야 총회장에 당선되고, 감독에 당선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금권선거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내홍을 앓았고, 결국 지금처럼 여러 단체로 분열되고 말았다. 분열되기는 쉬어도 다시 하나로 합치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금권선거로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지난 10여년 간 몸살을 앓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소송이 잇달았고, 많은 사람들이 곤혹을 치렀다. 여기에 소송비용까지 합친다면 손실과 손해는 너무나도 막대하다.   총회장이나 감독에 출마한 인사들은 모두 교계에 이름이 잘 알려진 중견목회자이다. 당연히 이에 따른 높은 도덕성과 인격이 요구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자리는 그 사람의 인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돈을 주고 표를 사서 총회장이 된다한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총회장, 감독은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더 낮은 자세로 섬기고, 화합을 이끄는 자리가 돼야한다. 어느 전 감리교 감독은 감독은 행정의 수반이 아닌 영적 리더의 자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백번 옳은 말이다. 금권선거 없는 깨끗하고, 모범적인 선거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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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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