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설

실시간뉴스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바른 ‘교회상’을 정립해야 한다 - 희망의 새해를 맞아
    희망의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해도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정적인 상태에서 보냈다. 새해를 맞았지만 ‘코로나19’는 멈출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고 있다. ‘코로나19’와 함께 보낼 새해도 모든 분야가 밝지가 않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 되어야 한다. 목회사역부터 교육, 선교, 봉사 등 어느 한 부문도 소홀히 할수 없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를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매진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방역지침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지난 해처럼 ‘코로나19’의 온상인 듯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않된다. 방역의 모범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추락된 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 신뢰도를 회복하는 것은, 모범된 교회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코로나19’를 극복하면서 목회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지난 해는 교회마다 전체 교인들과 함께 공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작은 인원으로 예배와 교육, 선교와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역이 위축되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비대면 예배로 교인들의 신앙생활도 잘못 되어 가는 행태로 변질되기도 했었다.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새해에는 ‘코로나19’ 속에서의 교회성장과 부흥방안을 강구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중단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방역지침을 모범적으로 지키면서, 목회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신앙교육과 봉사활동도 계속 되어져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일은 교회의 사명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사랑의 실천’으로 교회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사랑의 실천’으로 요약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말보다 실천할 때만이 그 진가가 결과로 나타난다. ‘사랑의 실천’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생활화해야 할 명제이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한국교회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 절실한 시기를 맞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암울한 문제나, 어려움 속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는 것은, 오직 ‘사랑의 실천’으로 가능하다. 또한 ‘사랑의 실천’으로 교회가 성장되고 부흥될 수 있다. 닫혔던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과 ‘갱신’은 오늘의 시대적인 요구이다. 교회의 밖으로부터 교회를 걱정할 정도로 한국교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교권싸움과 성직자의 윤리적 문제, 그리고 재정적 문제로 인한 갖가지 잘못된 행태로 비난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실추된 신뢰도를 회복하려면, 뼈아픈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개신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개혁’이다. 개신교 자체가 중세의 타락상에서 벗어나, 개혁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곳곳에서 드러난 병리적인 현상은 사회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어 왔다. 그 결과는 전도의 문을 닫게 했고,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킨 원인으로 작용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개혁’과 ‘갱신’만이 정답이다. ‘개혁’과 ‘갱신’은 오늘의 시대적인 요구이다.   ◆연합과 일치로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분열의 역사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여러 교파로 나누어져 ‘선교의 힘’을 분산시켰다. 연합기관도 여러 개로 나누어져 한국교회를 대표할 만한 단체가 없다. 교회 밖을 향한 목소리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단체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시기이다. 그리스도의 자체인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행위이고, 교회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행위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운동으로 하나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분열해 왔던 잘못을 회개하고, 여러 가지 사업을 통해 연합하고, 일치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아 ‘빛’과 ‘소금’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29
  • 악한 ‘코로나19’역병을 이겨내자 - 2021년을 보내면서
    2021년은 다사다난을 떠나 교회가 멈춰서는 매우 악한 때이다. 특히 코로나 역병의 세계적인 만연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본다.    예수님이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주님의 재림하실 때와 세상 끝에 대한 징조를 여쭈었다. 예수님은 여러 말씀 중에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테러)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21:11)고 하셨다. 주님의 재림은 세상 끝이다. 그때가 되기 전 여러 징조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온역이다.    온역은 전염병이다. 역사상 의학이 최고로 발달한 우리 시대에 의학을 뛰어넘는 병균이 확산되고 있다. 새 약이나 치료법이 나오면 더 강한 변종이 나와서 완전히 정복했다고 생각했던 전염병이 되살아나고 있다. 기상이변으로 신종 질병이 속출하여 세계적으로 하루에 수만 명 이상이 숨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온역이 전 세계적인 코로나 역병이다.   최근의 우리나라 코로나 역병의 확산세는 가히 두려울 정도다. 신규 확진자는 연일 역대 최다 기록을 갈아 치우는 중이다. 7000명을 넘더니 이제는 8000명에 육박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만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위중증 환자의 증가 양상이다. 엊그제 900명에서 금세 1000명을 넘길 기세다. 그 여파로 의료 대응 여력은 한계치에 다다랐고, 이제는 코로나와 무관한 일반 환자의 진료 차질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정부는 위드 코로나 출발 45일 만에, 문재인 대통령의 “후퇴는 없다”는 발언(11,29일) 이후 16일 만에 ‘위드 코로나 포기’ 선언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3:1). 코로나 역병도 극복할 수 있는 기한이 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할 것이 없나니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10:13).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완벽하게 해 주신 것을 받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받아 드릴 수 있도록 가장 쉽게 마련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내 것으로 믿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와 공로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 종류의 적과 싸워야 한다. 첫째는 믿음을 갖었다고 해도 우리 안에 죄의 기질이 남아 있다. 둘째는 죄 많은 세상이 나를 유혹하고 있다. 셋째는 내 신앙생활을 망치고 시험하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마음을 전쟁터로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우리 속에 있는 죄의 기질은 세상의 유혹을 따라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거듭난 사람의 마음속에 벌어지는 이 갈등은 정상적인 반응이기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승리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우리 안의 싸움은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려는 목적만 갖고 계신 것이 아니다. 영원한 영광도 함께 주시려고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코로나 역병으로 위축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도”(고전1:18)에서 떠나지 않은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2021년은 코로나 온역으로 성도의 진정한 교제까지 방해받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아직 땅을 밟고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주님이 오시는 그날, 우리 몸까지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맞이하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산 소망’ 가운데 있다.    따라서 어떤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위치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위치를 갖는 것이다(요15:3). 이것이 2022년 새해를 맞이하는 기도이기를 소망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26
  • 코로나 방역에 더욱 힘쓰자
    또 다시 교회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해 지역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인천의 한 교회에서는 코로나 19 신종 변이 ‘오미크론’으로 인해서 다수의 확진자가 나왔고 결국 교회는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제천의 한 교회에서도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당국에 따르면 이 교회는 예배 후에 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방역준칙 상 식사는 금지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초적인 지침을 무시하고 옛 습관대로 행동한 것이다.   성경은 “썩어져가는 옛 습관을 버리라”고 말씀한다. 지금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다.    무심코 모여서 같이 밥 먹고 돌아다니는 것은 다시 코로나를 창궐하게 하는 옛 습관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철저한 방역 가운데서 예배와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물론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방역수칙을 잘 준수하며 예배와 일상의 회복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문재인대통령은 다수의 한국교회가 코로나 방역에 최선을 다해준 것에 감사를 표한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교회는 방역의 모범이 돼야 한다.   무엇보다 강력한 주의가 절실하다. 백신 접종자에 한에 당국은 예배 참여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예배 회복을 위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가 종식된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매주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의 특성상 자체적인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식사 금지 같은 기초적 방역은 생활화가 돼고 습관이 돼야 한다.   한국교회가 코로나 집단감염의 온상이라는 인상을 다시는 줘서 안 된다. 이제는 방역의 모범이라는 인식을 사회에 심어놔야 한다. 더욱 강력한 자체 방역으로 코로나 확산 방지에 교회가 앞장 서자. 
    • 오피니언
    • 사설
    2021-12-17
  •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성탄절이 되자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다. 또 교회를 넘어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축복하는 세계의 명절이기도 하다. 성탄절은 무엇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기념하고 그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절기이다.    아기 예수의 오심과 탄생은 그 자체로 복된 소식 즉 복음으로 기독교의 본질이자 출발점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 시작부터 성탄절을 최고의 명절로 여기고 함께 축하했다. 이렇게 성탄절에는 오랜 교회의 역사가 녹아들어져 있다.    성탄의 중요한 의미는 ‘평화’이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수평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평화가 성탄의 메시지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탄이 주는 평화의 메시지를 올바로 전해야 한다. 산타할아버지와 선물 등 상업화된 성탄이 아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가 먼저 평화의 일을 해야 한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더 거대해지기 위해 다투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으로 낮아지고, 섬기는 평화의 모습을 한국교회는 회복해야 한다.    또한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대로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며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거대한 예배당 건물과 화려한 외관이 성탄의 바른 의미는 아닐 것이다.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로 전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가운데 있다. 물론 교회 역시 어렵다. 그럼에도 이번 성탄절에는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찾아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성탄절이 되자. 
    • 오피니언
    • 사설
    2021-12-17
  • 한교총 총회의 파행을 우려한다
    지난 2일 열린 한국교회총연합 총회가 파행으로 끝났다. 다음 회의의 일정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한국교회을 대표한다는 한교총의 총회가 파행으로 끝난 근본 이유는 현 공동대표 체제를 여러명 대표 체제로 바꾸려는 정관개정 시도했었다. 공동대표를 1인 대표로 바꾸려는 이유는 정부와의 협상에서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밝혔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교총의 존재 이유가 정부와의 협상에 있는가? 국무총리나 정당대표의 방문을 받기 위해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려는가? 물론 정부와의 협상도 한국교회 연합기관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한교총은 스스로 그 정관에서 밝히듯이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있다. 그래서 여러 교단이 가입해서 적지 않은 회비를 내는 것이다.   한교총은 한기총의 대안으로 시작됐다. 한교총은 한기총과 달리 공동대표회장 체제를 채택했다. 왜 그런가? 한기총이 1인 대표회장을 뽑기 위해 금권선거로 타락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한교총이 다시 한기총이 걸었던 그 타락과 불통 과정을 걸으려고 한다.   이번 한교총 총회의 파행은 한국교회에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이번 파행이 책임은 지금 한교총을 이끌고 있는 지도부에게 있다. 지도부는 이번 파행의 원인을 잘 살피고, 이를 매듭지어야 한다. 결자해지해야 하다.   한교총의 대표회장은 섬기고 봉사하는 자리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권력과 탐욕의 자리가 아니다. 선거 때가 되면 찾아오는 고위 공무원이나 정당대표와 만나 환담하면서 무엇을 말해야하는지 숙고해야 한다. 높은 정치인들을 만난다고 해서 스스로 권력의 맛에 취하면 안 된다. 낮아지고, 섬기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한교총의 이번 파행은 현 지도부에게 책임이 있다. 권력과 정치가 아닌 섬김과 겸손의 모습이 한교총에 있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08
  • ‘사랑의 실천’·‘교회의 연합운동’ 추구 - 본지 창간 56주년에
    기독교신문이 창간 56주년을 맞았다. 1965년 12월 12일 「사랑의 실천」을 사시로 한국교회와 국가발전, 그리고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에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와 민족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였다. 제1차의 농업혁명과 제2차의 산업혁명을 지나 제3차의 중공업혁명의 단계에 이르는 시기였다. 특히 남북한의 군사대치 상황은 불안을 고조시키는 시기였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교인이 2백만명, 교회는 6천개 정도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교회도 급성장의 시기였다.   본지는 이러한 시기에 창간되었다. 교회가 사랑의 실천으로 성장시키고, 국가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창간정신을 추구해 왔다. 또한 「사랑의 실천」과 함께 「교회연합과 일치」도 추구해 왔다. 사랑의 실천으로 한국교회를 위한 연합운동과 일치운동도 전개해 왔다.   이러한 본지는 사랑의 실천에 대한 기사를 발굴하고 기획하여 신학적으로 선교적으로 주장해 왔다. 사랑은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윤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의 성육으로서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사랑은 기독교 안에서의 윤리라는 한계를 넘어서 우리의 사회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운동이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보도해 왔다. 「사랑의 실천」은 기독교의 윤리 안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회와 국가에도 널리 퍼지도록 노력한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운동, 그리고 교회개혁에도 앞장 섰었다. 기독교는 고대로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교회로 발전하여 확장하였다. 제11세기에는 희랍의 정교회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하였다. 제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교가 로마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을 하여 민족중심의 교회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분열을 거듭해 왔다. 이 분열된 교회를 일치시키고 연합할 수 있도록 갱신과 개혁운동도 함께 전개해 왔다. 교회는 일치와 연합운동으로 하나가 돼야 하고, 갱신과 개혁으로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08
  • ‘평등법’ 제정 추진에 우려를 표한다
    평등법(차별금지법) 제정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법의 취지는 모두에게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구현을 내세우지만, 결과적으로는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대다수 한국교회는 이 법의 제정을 반대하고 있다.    차별금지 조항에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이를 반대하는 다수의 표현·양심·종교·학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이것은 역차별을 낳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동성혼을 장려해 가정을 무너뜨리고, 전통적인 윤리와 사회를 해체하게 하므로 즉각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기독교 선교 및 목사 설교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사회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족구조를 해체하게 될 악법”이라며 “성소수자의 진정한 행복 추구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아니라 저들이 탈동성애하도록 도와 진정한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국내 최대 개신교 연합기구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도 22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연 기도회에서 “국민 대다수가 동조하지 않는 동성애와 양성애를 포함한 ‘성적지향’과 자유로운 성별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성별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규정함으로써 도덕적·종교적·의학적·과학적 평가와 비판을 차별행위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차별금지법을 제정해달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에는 10만명 넘게 서명해 법안이 소관 상임위인 법사위에 회부됐다. 이런 가운데 동성애동성혼반대국민연합 측이 올린 평등법 반대 국회 국민청원 역시 나흘 만에 10만명을 넘어서면서 팽팽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08
  • 한국교회가 ‘성서주일’을 지키자
    한국교회는 해마다 12월 둘째 주일을 성서주일로 지키고 있다. 성서주일은 본래 성서의 의미와 성서의 보급을 위해 제정한 주일이다. 성서는 오늘날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성서가 만인에게 읽을 수 있도록 널리 보급된 것은, 언어의 발달과 인쇄의 혁신으로 비롯되었다. 이러한 것은 성서공회의 설립에 의한 것이다. 기독교가 선교된 나라에는 거의가 성서공회가 설립되어 성서의 번역과 보급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성서공회는 각 나라 성서공회의 사업을 도와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말부터 스코틀랜드 영국성서공회가 중국에서, 그리고 미국성서공회가 일본에서 우리말의 성서를 번역해 출판하여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반포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895년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지부를 설치한 이후 일제 강점기의 성서사업을 주관했다. 미국성서공회도 1908년 서울에 정식으로 지부를 설치했다가 1919년 철수하였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는 한국지부를 설치하지 않았으나, 영국성서공회를 적극 지원하였다. 결국 영국성서공회(대영성서공회)만 남아 성서사업을 추진하다가 1938년 일제의 압력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제한받게 되면서 조선성서공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것이 해방 후 오늘의 대한성서공회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성서공회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가톨릭과 함께 한글성서 공동 번역이다. 성서를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공동번역은 세계에서 몇 나라가 되지 않는다. 현재 한글성서 공동번역은 각 교단에서 강단 공용으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학생들과 한글세대의 젊은 이들에게는 널리 애독되고 있다. 또한 80년대 중반이후 각 나라 언어로 성서를 출판해 수출하고 있는 것은, 대한성서공회의 저력이다.   이러한 성서공회의 성서보급을 위해 전국교회와 단체들은 성서주일을 지켜야 한다. 해마다 성서주일을 지키는 교회와 단체가 줄고 있지만, 성서보급의 활성화를 위해 지켜져야 한다. 성서의 보급은 선교의 확장이며,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한 기본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08
  • 방역수칙 준수로 ‘예배회복’에 나서자
    이른바 ‘위드 코로나’ 시대에 돌입했다. 말 그대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확진자보다는 중증환자와 사망자의 숫자가 중요해진다. 정부는 이들을 관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교회총연합이 ‘일상예배 회복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한국교회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동 연합은 회원교단에 보낸 공문에서 “예수님과 함께 코로나를 이깁시다”는 구호를 제시하고, “우리는 2년여의 고통의 시간을 뒤로하고 단계적 일상 회복으로 가는 길목에 섰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배를 회복하는 데 마음을 모으고, 확산 방지를 통해 예배를 지키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동 연합이 제시한 8개 항의 자율방역 지침을 한국교회는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예배당에 머무르는 시간 최소화, 교회시설 내에서 KF94 마스크 착용 생활화, 예배당 내 식사 금지 및 소모임 자제 등은 ‘위드 코로나 시대’에 몸에 밴 습관처럼 돼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와의 사투에서 한국교회는 여러 면에서 큰 피해를 당했다. 몇몇 교회에서 발생한 집단감염으로 마치 한국교회 전체가 코로나 감염의 발원지인 것처럼 매도를 당해야 했다. 여기에 헌금감소 등으로 미자립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회복과 갱신의 길로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뉴 노멀 시대에 하나의 모범이 돼야 한다. 외부에서 강제하는 방역이 아니라 스스로 자율적인 방역을 생활화해야 한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집에 머물며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뉴 노멀’의 신앙생활 모습을 확고히 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부흥과 생신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02
  • 한국교회 공교회성 회복 시급
    12월 2일 한국교회총연합 정기총회를 앞두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과의 통합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하나돼야 한다는 여론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학교 총장)는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공동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라며, “목회자들이 동역자 의식 없이 서로 각개전투하는 목회를 하고 있어 서로 경쟁자로만 생각하고 있어서 한국교회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데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앞서 전남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소장=송오식교수)는 지난 12일,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종교영역에서 공공성>이라는 주제로 ‘2021 하반기 학술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날 장헌일박사(한국공공정책개발연구원장)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와 공공성」이라는 발제를 했다. 장박사는 지난 10년간 합계출산율 0.84명으로 세계 최하위 인구절벽 상황에서 저출생 고령사회 극복을 위해 시급히 한국교회가 공공성을 회복해 아동 돌봄문제 해결하는 참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반면에 한국교회는 개교회주의, 성장지향주의, 번영신학에 의한 기복주의 신앙 등에 물든 건강치 못한 교회론으로 공공성을 상실하고 있다. 말씀과 삶의 일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불균형 강단과 개교회 중심의 교회 사역으로 국가와 지역사회 그리고 사회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여러 갈등과 부작용, 특히 코로나19펜데믹 대처 상황에서 교회의 신뢰도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따라 신앙의 개인주의화 즉 신앙의 사사화로 교회가 공공성에 입각한 공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이 축소되고 교회의 공공성과 공교회성을 상실한 각 성도의 삶 역시 개인적 관심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0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