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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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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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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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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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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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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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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한국교회, 말씀의 지배를 받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라는 직함 앞에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어휘가 수식어로서 그림자처럼 동반된다. 공적(公的) 명함에 사적(私的) 수식어가 추가되는 것은 파격적이며 통상적이지 않은 사례이다.   다윗 행정부가 전제되지 않은 솔로몬의 행정부의 출범과 위상은 무리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서 이스라엘을 명실상부한 국가로서의 면모를 정비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세속적 시각으로 자수성가한 대표적 인물이다.   다윗에 대한 설명과 해부는 ‘수식어’로는 부족하고 영문법의 ‘관계대명사’를 활용해야 될 정도로 분량이 많고 장르도 다양하다. 물론 다윗도 인간이라는 한계상황을 살아왔기 때문에 시행착오로 인한 과오·과실과 부족하고 결핍된 부분과 후미진 취약점을 지니고 살았다. 솔로몬은 부친인 다윗의 장점을 흡수하여 계승·발전시켰으며 부친의 단점과 취약점에 대해서 비판과 외면만 하는 옹졸한 자세와 태도를 견지한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을 ‘타산지석(他山之石)’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며 좀 더 완벽한 국가수반의 위상을 획득하기 위한 진지한 행보를 이어갔다.   타인의 훈계와 조언과 충고를 수용하는 행위는 자존심을 반환하는 용기가 없이는 불가하다. 인간의 정체성은 어리석고 우둔함에 그 자리를 두고 있다. 인생의 여정에서 소용돌이치는 강과 가파른 절벽에 직면하여 자포자기적 넋두리 속에서 절망과 비탄의 나락으로 추락할 때가 있다. 여호와는 현미경적 미시적 시각과 망원경적 거시적 시각을 조화시키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이다. 여호와의 신분은 ‘말씀하시는 분’이고 인간의 신분은 ‘듣는 자’ 이다. 따라서 여호와와 원탁(圓卓)에서 토론하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반납하고 청산하여 그분께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고 그분께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도화지에 펼쳐놓고 귀를 개방하는 현자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지 못함도 주님의 말씀에 소홀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지배함으로 연합과 일치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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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0
  • 한국교회, 지금의 광야를 피하지 말아야
      예수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즉위 15년에 공적 신분으로의 행보를 시작했다. 첫 행보는 스프링 캠프를 통해 수세(水洗)시의 영광이라는 온탕과 광야에서의 시련이라는 냉탕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고 몸소 실천했다. 세례요한 공동체는 유다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종교그룹이다.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위는 도래할 새 질서를 인정하고 대망한다는 비언어적 표현이다.   세례요한의 세례행위의 여파는 당시의 정치권과 종교 기득권층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으며 염려의 진원지였다. 예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겸허한 자세는 종교적 의례뿐 아니라 나중에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요한공동체와 예수공동체 간의 불협화음을 사전에 차단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의 결과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를 경쟁 관계에 있는 종교그룹의 수장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다른 보편적인 사람의 수세 시와는 달리 예수의 수세 시에는 하늘에서 예사롭지 않은 신비한 현상이 동반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신적 존재로 세상에 선포하며 공증하는 진지한 현상이다. 하나님은 공개된 장소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에 새로 즉위한 왕에게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라”하는 정형화된 표현을 통해서 정권의 정통성을 인준하는 사례를 연상하게 해준다. 그리고 하늘에서의 신비한 현상은 교의학의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제공해 주며, 천지가 소통한다는 뜻이다.   수세 후 예수는 혹독한 시련의 기간을 가진다. 그것은 광야 체험을 통해서 임박한 사역을 위한 담금질을 한다. 십자가상에서의 수난 만큼 광야에서의 시련은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추적해보면 광야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다. 내용성 있는 강인한 스프링 캠프를 경험한 자에게 고귀한 과제가 주어진다. 혹 우리가 지금 광야를 가고 있는가? 하나님께 도리어 감사를 드리자. 광야는 곧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지금의 광야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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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4
  • ‘사랑’과 ‘감사’전하는 절기를 기대한다
      11월 셋째주일은 교회력으로 추수감사절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날을 기념하며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일부교회들은 추수에 대한 본래 의미를 살리고자 추석 전후로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구원의 감격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해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은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을 지키는 절기로 이어지고 있다. 여러 대내외적 여건으로 인해 현재 대한민국은 경제적 한파로 인해 감사절의 따스함을 느끼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소외된 이웃들은 더욱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부유한 사람들도 지갑을 여는데 인색하게 된다. 교회들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지난해만큼 감사헌금이 쌓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감사절의 헌금은 그래서 더욱 가치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해 감사하며 우리주변의 이웃들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것이 감사절의 참된 의미에 부합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타 종교에 비해 우리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앞장서왔다. 그러나 일부 교회와 개인들의 일탈로 인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으며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고귀한 행동이 많이 위축됐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그래서 더욱 이웃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감사주일이 기독교 절기 중 하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과 함께하겠다는 정신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전하는 감사의 기쁨이 우리사회를 따뜻하게 적실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힘이 더욱 빛이 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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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1-14
  • 안보 무임승차가 ‘양심’인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모씨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9대4로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가 병역거부 사유로 내세운 신념이 ‘양심적’이라며 병역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결하면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군복무를 하며 헌신했던 일반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14년만에 나온 이번 판결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문의도 온라인상에서 급증하고 있다. 현재 법원에서 심리중인 병역거부자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다. 대체복무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면서 여호와의 증인 교인증은 사실상 병역 면탈의 ‘허가증’이 됐다.   여호와의 증인 한국지부는 논평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한다며 대한민국 인권 의식의 성숙함을 보여준 역사적인 판결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자평하는 등 나라를 위한 헌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국가안보의 혜택을 그대로 누리겠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소위 양심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소명자료를 제시하면 검사는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진정한 양심의 부(不)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검사가 양심을 판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 신자가 아니라도 신념을 근거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어떻게 진정성을 가릴 것인가에 대한 대안도 마땅치 않다. 온라인에서는 이들에게 휴전선 일대의 지뢰제거 임무에 투입하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진짜 평화를 위해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평화주의자라면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지뢰제거나 위험임무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온라인상의 주장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국방과 관련된 분야에서의 복무는 전면 거부하고 있다. 순수 민간단체에서만 ‘봉사’하고 싶다는 것이다. 자칭 ‘양심적’이라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국가안보에 무임승차 하는 모습이 어디가 ‘양심적’인지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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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1-06
  • 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 ‘통탄’
      국권이 침탈되어 왕조가 와해된 유다사회에서 민족을 견인하는 것은 성전과 율법체계였다. 대제사장이 국가원수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하고 침통한 시대였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성전 체계의 탈선과 율법에 있어서 법 제정 당시의 법 정신이 실종되어 왜곡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민중의 죄를 먹고 사는 자들이다. 제사물의 등급과 양은 죄의 심각성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민중이 범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제사장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구조였다. 율법은 울타리 율법의 추가로 분량이 비대해지고 방대해졌다. 율법준수 만이 구원의 혜택을 받는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은 무식한 민초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사항이었다. 율법을 준수하려면 알아야 지키는데 무식하면 못 지키게 된다. 따라서 유다사회는 “무식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등식의 명제가 보편화 된 사회였다. 이러한 절망감이 일상이 된 민초들에게 상식을 전복시키는 예수는 희망이 된 동시에 보수 세력에게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헤롯당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손을 잡았다. 그들은 앙숙이었으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재야인사 제거라는 공통분모가 생겼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대형 소요 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분봉왕의 경질·교체를 단행했다.   따라서 헤롯 정권은 촌 동네 출신의 예수를 요주의 인물로 규정하고 요원들을 보내 계속 추적해 왔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성전과 율법체계를 기반으로 먹고 사는 자들 이다. 자기들의 가면을 벗기고 종교적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갈릴리 청년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헤롯당과 바리새파의 결탁으로 예수 제거 음모는 시작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예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부활했다. 예수 당시의 유다 사회는 불의가 정의의 주인된 사회였다. 완전한 세상은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작금의 대형교회들을 보면 유다 사회와 다를 바 없는 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제발 바로 서는 한국 교회가 되자. 
    • 오피니언
    • 사설
    2018-11-06
  • 기독교인은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의 ‘아우라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로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아우라(Aura)’라는 용어는 독일의 문학비평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예술이론에서 유래됐다.     ‘아우라’라는 용어를 ‘구별’이라는 기독교적 정서를 담은 용어로 호환(互換)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아우라가 있기를 요청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과 구별된 자이기 때문이다. 구별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나 거기에는 선행적으로 전제되고 감수해야 될 조건이 발생하며, 불편함과 분골쇄신(粉骨碎身)이 동반된다. 즉 그것은 인간이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왜곡된 과거의 습관과 결별하는 데는 인격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과도기의 예언자 세례요한은 임박한 현실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회개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당시에 얼마나 구원에 대한 열망이 보편화됐는지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왔다는 사실로 이를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은 기성정치·종교권에 독설을 양산하는 재야종교지도자였으며, 그들은 유대사회 민중들의 의식을 재편하고 관리하는 기득권이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긍심 하나로 외세 지배의 수치스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사상’을 부정한다. 인간은 선천적 회개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인박히고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것을 청산해야 되는 절실한 불편함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주님 안에서의 ‘아우라(Aura)’는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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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0-30
  •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동참하자
      지난달 28일 한국교회일천만기도대성회가 마무리되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회개와 회복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제시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이제야 제시한 것은 어쩌면 늦었다고도 할 수 있다. 분열된 한국교회와 비판받는 기독교 등 사회적 환경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시기에 이러한 한국교회가 하나되는 장을 마련했다는 것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여 문화·교육·사회 등 대한민국을 근대화시키고 한국사회 전반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해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이 분열과 이단논쟁, 교권싸움 등으로 분열되면서 매일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 속에서 한국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도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이번 성회를 통해 더욱 하나되는 일에 힘쓰고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주님의 명령이자 시대적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사명을 등한시한다면 더 이상의 희망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나라와 민족을 부강하게 만들었던 기독교의 현재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추락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모두 함께 앞장서고 밀어주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와 기독교단체, 연합기관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교회와 사회가 함께 발전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합 기관이 하나로 합쳐지기 어려우면 연합기관 전체 대표를 돌아가면서 기관이 맡고 대 사회적 목소리에 대표성을 인정하여 창구로 삼으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한 목소리로 의논하여 통로가 하나로 정리되면 대 사회적 위상도 찾게 될 것이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의지가 문제다.   앞으로 각 교단과 연합기관이 연합하여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국교회만의 과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깨닫고 동참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30
  • 성도들을 그만 실망시키세요!
      대형교회들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기여한 바도 크지만 일부 대형교회들은 교회의 역기능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도는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즘 명성교회 교인들이 하남시 성안교회로 많이 이동한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광성교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은혜스럽다며 명성교회로 이동한 교인들도 있다. 광성교회에서 명성교회로 그리고 다시 성안교회로 이동한 교인들도 있다는 말이다.    이들 교인들에게 목회자는 상처를 주는 존재(?)다. 주님의 양을 잘 인도해야 할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교인들을 이동하게 만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일부 교인들은 신앙생활에 매력을 잃고 아직 출석은 하고 있으나 역동성을 상실한 교인들도 있다.    어느 교회는 목회 대물림으로, 어느 교회는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갈등으로 등등 이유도 다양하다.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회개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일반인의 사는 방식이 전혀 다를 바가 없어서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우리는 목회자의 자격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적으로도 실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는 더욱 그런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 교회가 문제 집단으로 인식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광교회는 이명증서 없는 타 교인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교회의 사명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서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지 타 교인이 이동해 부흥하는 곳이 참다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도들을 그만 실망시켜야 한다. 목회자들이 각성하고 회개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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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0-23
  • 개혁을 빙자한 자해는 멈춰야 한다
      종교개혁기념일은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를 공포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고 교황의 권위보다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여 종교 개혁을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다.   종교개혁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운동의 결과가 기독교(개신교)의 시작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상은 어떠한가? 지난 18일 문재인대통령은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황을 면담하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어느 종교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대한민국의 재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기독교가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가톨릭 교황의 권위에 기대어 우리민족의 통일 염원을 부탁하고 있는 실정이다. 501년 전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며 교황보다 성경을 강조하며 개혁정신으로 탄생했던 기독교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동포의 자유와 신앙을 위해 헌신했던 기독교의 역할은 사라지고 한국교회는 세속화와 부패의 이미지로 덧칠되어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러한 기독교의 영향력 상실과 사회적 이슈화의 배경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리잡고 있다. 교계 지도자들이 일반 언론을 통해 교회의 문제를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교회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교회의 갱신을 요구하기보다 기독교의 치부를 드러내며 비판하기만에 열중하는 언론과 여론의 뭇매에 한국교회를 고스란히 내어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에서 해결하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비판할수록 타 종교는 반사이익을 얻고 기독교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불신만 초래하고 영향력을 실추시키는 개혁을 빙자한 자해는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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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0-23
  • 비판을 위한 연대는 독이다
      한국교회가 반 기독교세력의 무차별적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일명 ‘가짜뉴스’로 촉발된 기독교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은 사실 여부를 떠나 기독교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오늘날 난무하는 ‘가짜뉴스’란 프레임으로 기독교 전체를 부도덕한 단체로 몰아가려는 시도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 이념과 반대되는 세력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소수의 위치에 놓여 있거나 역량이 낮을 때 여론을 이용하여 세력을 모으고 기독교를 고립시키는데 앞장서 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는 두 집단은 이슬람과 동성애 세력이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미지 조작에 열을 올린다.   실제로 자신들이 저지르는 부도덕성과 범죄성을 숨기고 선한 이미지를 부각시켜 국민적 동정론을 일으킨다. 현재 한국사회는 누구나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유토피아적 사상이 정의로 인식되고 있어 이를 반대하는 집단이나 세력은 적폐로 규정되어 사회적 탄압에 직면해야 한다.    문제는 기독교를 공격할 때 목표를 고립시키기 위해 이해관계가 같은 세력과 정치적인 연대를 하는데 상대편이 대결과 분열로 자멸할 때까지 지속적인 공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들 뿐 아니라 타 종교들도 반 기독교세력들을 규합하여 고도화된 언어 선동으로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있다. 분열되어 싸우는 한쪽 편을 들면서 대외적으로는 기독교의 정상화를 위한 연대임을 외치지만 이들은 기독교 정상화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분열과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키고 의도적으로 기독교와 상반되게 자신들의 이미지를 선하게 포장한다.   이처럼 반 기독교세력의 전략·전술은 지능적이다. 일반 국민들은 일부 기독교 단체, 혹은 목사 개인의 향한 비난을 기독교 전체로 확대시키는 선동에 상당수가 넘어가 부화뇌동하고 있다. 진정 한국교회를 위한 길이 어디인지 방향타를 잃은 배처럼 표류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더 이상 외부세력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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