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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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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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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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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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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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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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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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신학의 저변확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고스란히 신학대학의 위기로 전가되어 급기야 대부분의 신학대 정시 모집이 미달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신학대학에 지원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신학에 대한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에 대한 사회적 비호감도가 이렇게 높아진 상황에서 신학대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에 더해 저출산 문제는 신학대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와 신학대는 신학의 의미를 사회에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는 철학과 신학 등의 인문학적 가치가 멸시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고, 취직을 보장하지 못하는 학과는 인기 없이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신학은 그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예정된 결과다. 먼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이리도 천대하는 상황에서 비전공자가 신학을 존중할리는 만무하고, 이에 더해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들이 신학적 소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 그러한 목회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계가 신학의 의미를 퇴색시킬 것은 자명하다. 목회자들부터 신학생들에게 신학이 아닌 교회에서의 사역을 배울 것을 강조하는 것만 봐도 이러한 분위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이 그 실천적 의미를 부재하면서도 이공계의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신학은 그 실효성이 없음에도 인문학에서 근원적이고 중요한 학문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취직을 목적으로 수학과와 철학과에 진학하지 않듯이 목회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도 신학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있어야 한다. 신학은 교회에 실용되기 이전에 하나의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학문이다. 물론 추상적 학문의 의미를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토록 초월과 반세속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이 추상적 학문의 최고봉인 신학을 멸시하는 현실을 보면 참혹한 감정마저 든다. 한국교회는 신학의 의미를 알리는일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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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3-05
  • 저출산 대비를 위한 교계 대책 절실하다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는 아주 복합적인 요인을 갖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정부 정책의 미진한 부분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지나친 소득 격차와 지나친 경쟁, 지나친 집중에 있다. 결혼과 출산의 가장 큰 관건은 안정된 직장, 안정된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저출산 문제는 사회문화적인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 정책적인 출산 장려금, 양육비 지원과 같은 경제적 부담의 완화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별에 관계없이 출산, 육아,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제도적으로 확립하면서 사회적 인식 그리고 사회는 물론 기업 문화의 개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재계와 여성출산을 둘러싼 모든 사회 주체들이 자녀 양육 비용을 분담하는 ‘사회적 육아체계’의 구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본래 ‘출산’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위대한 창조의 축복이다. 창조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 생명의 기운을 공급하시어 존재하게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게, 땅을 정복하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복은 하나님의 절대명령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성취됨을 전제한다. 그 가운데 사람의 ‘출산’이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이 첫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는 자기중심의 문화를 만들어 감으로써 진정한 복을 잊어버렸다. 이른바 저출산이라는 산아제한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에 부응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경쟁보다 이웃의 아픔을 보듬는 문화를 창달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이웃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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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한 언론사의 비하발언에 유감을 표한다
    교계 유명 진보 언론사에서 지난 20일 '해로운 신앙'이란 제목으로 연재하는 첫 번째 기사의 제목을 "‘목사인가 무당인가’ 축복산기도원교회 김형숙 목사의 비상식적인 ‘축귀’ 사역"으로 뽑았다. 동 기사는 한 종교단체의 목사가 축귀 의식을 치룬 것을 무당에 비유하며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동 언론사가 기독교를 사칭한 종교단체의 사이비적 행태를 고발하는 것에는 동의하나 그러한 목사를 무당에 비유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해당 기자가 기독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하고 있기에 기독교의 문제를 고발하는 것에는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충분한 이해 없이 기독교의 퇴행적 행위들을 무당과 박수로 대변되는 한국 전통 토속신앙에 직접 대비해 비유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해당 언론사가 보수 교계 언론이 아니고 진보 언론을 자처하는 곳이라면 이러한 기사는 한국 진보 교계의 타종교에 대한 이해 수준을 암암리에 보여준다는 것에 더 큰 심각성이 있다.   한 명의 기자는 타종교를 기독교의 퇴행과 직접 비교하며 매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기사를 검토하는 데스크에서도 이 문제를 간과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더구나 현재 대한민국의 진보 교계는 토속종교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던 시기를 지나 우리 고유의 문화와 종교로써 소중한 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지 오래이기에 해당 언론사가 이러한 제목을 사용했다는 것에 당혹감을 금할 수 없다.   지금 박수·무당으로 대변되는 토속종교를 종교적으로 논의하고자 함이 아니다. 지금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보수 교계가 아닌 진보 교계가 토속신앙을 이렇게 매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보수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토속종교를 비판할 것이고, 또 그들의 자리에서는 그렇게 비판할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럼에도 진보 기독교인이라면 이리도 쉽게 타종교를 매도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퇴행은 기독교의 문제로만 비판하는 것이 옳은 처사였다. 해당 언론은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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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1-27
  • 목회자 재정 위기 극복 위한 방안 마련하자
    코로나 온역의 장기화는 교회에 가장 큰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의 신앙생활의 핵심인 교인 간의 교제가 어렵게 됨으로써 복음전도에 큰 장애를 받고 있다. 더욱이 농어촌이나 미자립교회들에서는 고통이 극심한 상태이다. 경제성을 잃어버린 농업환경, 열악한 교육환경, 각종 문화로부터 소외된 현장, 그 결과 젊은이들이 떠난 현장이 오늘의 모습이다. 이에 따른 목회자의 경제적 어려움까지 가중되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 온역으로 인하여 농어촌 교회나 미자립교회에 대한 관심도 점점 더 약해져 가고 있는 현실에서 재정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어려운 교회를 지원하는 ‘교인 섬기는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교인들과 유대인 교인들 사이의 ‘사랑의 교통’에 주력했다. 사랑 안에서의 교통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과 또 이방인들은 교인의 교통을 위한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에 갔던 것이다. 특히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과 극한 가난 속에서 힘이 지나도록 풍성한 연보를 통하여 교인 섬기는 일에 기쁘게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주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여전히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다. 복음을 함께 전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이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행18:3)이였다. 바울이 교회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듯이 젊은 목회자들도 자신의 생계를 위해 여전히 일해야 하며 자신뿐 아니라 동역자들의 생계를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함께 나누었다.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하여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되고, 재물을 나눔으로써 사랑이 충만하게 된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교단과 연합단체가 동의할 수 없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를 지원하는 사역은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갖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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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1-27
  • 한국교회는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2021년 신축년을 맞아 전면적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는 대부분 동의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핵심문제는 한국교회는 코로나 펜데믹 사태를 분기점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의 여부가 되겠다. 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모여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다 보면, 더욱 의미있는 방안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한국교회가 그동안 다양한 의견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화하지 못해왔던 것에 있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관을 공유한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이후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고민하되, 기독교 보편적 가치관인 사랑의 정신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사랑은 복잡하지 않다. 사랑은 말이 아니다. 사랑은 다투지 않는다. 사랑은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다. 코로나 이전이나 이후나 문제는 한국교회에 사랑이 있는지의 여부이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실상은 제 자신만을 사랑하며 타자에 대해서는 독기 가득한 저주의 언사를 서슴치 않는다면 기독교는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든지 간에 코로나 이후 급격한 쇠퇴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작금의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구현할 때, 우리는 입 아프게 우리의 정당성을 해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사회는 이미 사랑을 실천하는 한국교회를 존경하며 따르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욕망을 이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시대 근본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문제는 단순하다. 한국교회가 기독교 사랑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한국교회를 향한 사회의 외면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1-26
  • 코로나 방역에 적극 동참하자
    코로나 온역이 전국적으로 재확산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최근 몇몇 교회와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지역사회 감염이 이어지고 있다는데 우려의 목소리도 커가고 있다. 일부에서 기독교 자체를 기피하거나 혐오하는 현상이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에 정부가 ‘감염병예방법’을 개정하면서 편파적으로 방역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며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이 있다.   현재로서는 코로나 온역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아파하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죽어간다. 다른 무엇보다 이웃의 고통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온역 때문에 아파하는 이웃들, 경제적 불황으로 고통받는 이웃들, 방역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과 의사, 간호사들, 코로나로 힘겨워하는 이웃들과 함께 울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돕는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시대를 ‘때가 악하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는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에베소서 5장 15~17절)고 말한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기회를 붙잡고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따라서 코로나 온역은 큰 재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재난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믿고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이 시대를 돌아보고 자신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가야 한다. 모든 재난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자 경고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그의 선한 뜻을 이루는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교회가 정부나 사회로부터 오해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정부의 코로나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고난과 함께하는 교회’가 될 때 이 땅에 복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이뤄질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1-26
  • 교인들의 코로나 검사 독려해야 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진정의 국면을 맞고 있다. 수많은 국민들과 자영자들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부의 방역조치에 협조한 결과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2천 명이 넘는 무증상 감염자를 찾아낸 공격적인 선별적 사전 검사 조치가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데 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선별적 조치가 없었더라면 이들 2천여 명은 사전에 조치할 수 없었던 만큼 선별적 사전 검사는 우리 사회에 큰 이익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현재 교회시설을 통한 감염 확산이 지속하고 있는 만큼 교회들은 교인들의 사전 검사를 독려해야 한다. 특히 목회자들은 문제가 되고 있는 단체 시설에 방문했던 이들에게는 반드시 사전 검사를 받을 것을 독려하고, 이에 더해 전 교인인 사전 검사에 응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교인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며 우리 사회에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길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선별적 사전 검사는 무료로 진행되고 있기에 아무런 경제적 부담도 없는 만큼 교회는 코로나19와 관련된 그동안의 오명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교회가 나서서 교인들의 사전 검사를 독려한다면 교회는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일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입으로만 복음 전파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기독교 복음의 힘을 사회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교회가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정부의 방역조치에 불만만 토로할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책임 있는 자세로 교회의 역할을 다해줄 것을 기대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코로나19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교회가 이번 기회에 교인들을 사전 검사의 장으로 인도해 사회적 본을 보여주길 기도한다. 이러한 일을 통해 교회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길 기도한다. 사회 내 교회를 향한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일에 교회가 최선을 다해 주길 당부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1-14
  • 한국교회 연합기관 통합이 절실하다
    한국교회 연합기관의 통합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대표기관인 한기총과 교회협이 교회의 문제를 대변해왔다. 그러나 한기총 내 갈등이 극심해지면서 대표기관으로서의 위상이 상실되고, 대안적 연합기관이 여럿 설립되면서 교계를 대표하는 연합단체의 대표성이 문제라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한국교회의 지나친 세속화에서 비롯되고 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첫째 교회의 진정한 의미에 충실하자. 사도 바울은 온갖 문제의 온상인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한 몸의 관계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임을 천명한다. 이는 교회가 태생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분열은 용납될 수 없는 ‘일체성’이라고 밝힌다.    둘째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믿음은 성령의 전적인 사역이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선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결국 기독교의 모습은 이타주의의 전형이며, 이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진정한 의미에 충실하면서 세속적인 명예욕보다는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분명하게 깨달을 때에 연합기관의 통합은 가능해질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분열을 차단하기 위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장 3절)고 간절히 바라고 있다. ‘평안의 매는 줄’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결과이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 머물 때,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 화평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올해에는 연합단체의 통합을 이루도록 각 교단과 단체는 물론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1-14
  • 추락된 ‘교회 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새해를 맞아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지금까지 추락된 신뢰도를 회복할 수 없다. 추락된 신뢰도가 지난 한 해동안 ‘코로나19’의 사태 속에서 또다시 추락되어 왔다. 타종교에 비해 ‘코로나19’확산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사회가 교회를 걱정할 정도로 추락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19’로 각 분야에서 위기를 겪고 있지만, 대부분 개척교회나 미자립교회는 문을 닫았다. 일부 중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대면 예배가 잦아짐에 따라 주일예배를 외면하는 교인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은 70년대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누렸던 물량주의에 편승한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는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일어 설수가 없다.   ◆‘코로나19’이후의 교회진로를 모색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사태로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르지 않은 일부 교회의 잘못된 신앙행태가 한국교회 전체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추락된 신뢰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된 것이다. 사회가 신뢰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교회 스스로 전도의 문을 닫아 버리는 상황이다. 이제는 ‘코로나19’이후의 한국교회 모습을 생각해야 할 시기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다시 일어 설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바른 길과 해답을 찾아야 한다. 복음이 해답이고 기도가 해답이다. 성경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랑의 실천’으로 ‘교회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회로 부터 실추된 ‘한국교회 모습’을 ‘사랑의 실천’으로 회복해야 한다. 신뢰도가 추락된 것은 한국교회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바른 모습이란 사랑의 모습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댓가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에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은 가장 큰 계명이다. 한국교회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에수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본지는 56년전 창간당시부터 지금까지 ‘사랑의 실천’을 외쳐 왔다. 사랑의 실천으로 실추된 신뢰도를 회복하고, 전도와 선교의 문을 활짝 열수 있다.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한국교회가 신뢰도를 회복하려면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개신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개혁’이다. 개신교 자체가 중세의 타락상에서 벗어나 개혁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곳곳에서 드러난 병리적인 현상은 사회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어 왔고,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킨 원인이다. 무엇보다도 깨끗해야 할 교회가 물량주의에 편승하고, 일부 성직자들의 윤리적인 타락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법정에서의 싸움 등은 세속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태가 계속되어 왔다. 그래서 개혁은 시대적 요구이다. 개혁은 잘못된 행태를 바로 잡아주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 이 사회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연합과 일치로 사회를 선도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계속된 분열로 신뢰도를 추락시켜 왔다. 교인들 간의 싸움으로 교회가 분열하고, 교회간의 싸움으로 노회(지방회)와 교단이 분열되고 있다. 그 분열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교회법보다는 사회법에 의존하는 것이 신뢰도 추락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일반 언론매체는 어떤 사건보다 교회문제를 대서특필해 왔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사회로부터 교회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행위이고, 교회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분열해 왔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되는 한국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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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2-31
  • 이웃 사랑을 멈추지 말자
    코로나 장기화로 우리의 모든 생활이 변하고 있다. 특히 정신장애인과 신체장애인, 치매 환자, 취약가정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경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의 제도적, 실질적 지원이 먼저이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삶을 위험에서 막고 치료할 사회의 전방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교회에서도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한 시기이다.   주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가의 말씀(마태복음 22장 37~40절)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답할 수 있는 길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며, 이웃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그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교회의 위선이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신랄하게 책망을 했다.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 또는 어떤 격식을 위해서 마지못해 사랑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외 이웃의 아픔과 영혼을 함께 사랑하자. 연말연시가 되면 소외된 이웃들은 더욱 소외감을 갖는다. 이들에게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대면 접촉보다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만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 자체가 더욱 약화되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손길이 더욱 필요하다. 모든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는데 구체적이며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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