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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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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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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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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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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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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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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어버이 공경은 기독인의 근원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버이날은 1956년 5월 8일 어머니날에서 시작되어 1973년 어비이날로 변경하여 지정된 날이다. 이날에는 각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감사의 뜻을 정하는 날이다. 전국의 시·군·구에서는 효자·효부를 선발하여 상금 수여 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면서 이날을 전후하여 ‘경로주간’을 설정하고 어른 공경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우리 사회에서 효를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맞아 더욱 그렇다. 언론에서 수시로 접하는 불미스런 소식에는 자식이 부모를 핍박하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며,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끔직한 사건들은 이 시대가 사랑이 식어가는 때라는 표징이다.   이런 세상에서 기독인들이 먼저 사랑과 효를 실천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가운데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고”(딤후3:1-5).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요5:26).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에게 체현되고, 다시 보혜사 성령에 의하여 사람 가운데 실제화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은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기독인의 자존심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는 그것이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한 가족의 아버지는 생명의 전수자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된다. 내가 이 땅에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부모의 생명이 나에게 표현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듯이 사람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요, 기독인만 갖는 유일한 비밀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기독인은 물론 그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분명하게 가르치자. 더불어 부모에 대한 공경의 효를 실천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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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4
  • 공명하고 깨끗한 선거를 준비하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등 한국교회의 주요한 교단들이 노회와 연회를 진행하면서 부총회장, 감독 등에 출마한 후보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경선으로 후보가 확정될 가능성이 높아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된다.    걱정스러운 일은 고질적으로 내려오는 금권선거에 대한 우려이다. 벌써 어느 후보가 얼마를 썼는지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다. 사실상 선거전은 이미 물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결국 돈으로 표를 사려는 금권선거에 대한 악몽을 지울 수 없다.    금권선거는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가장 나쁜 관행이다. 몇 억을 써야 총회장에 당선되고, 감독에 당선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금권선거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내홍을 앓았고, 결국 지금처럼 여러 단체로 분열되고 말았다. 분열되기는 쉬어도 다시 하나로 합치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금권선거로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지난 10여년 간 몸살을 앓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소송이 잇달았고, 많은 사람들이 곤혹을 치렀다. 여기에 소송비용까지 합친다면 손실과 손해는 너무나도 막대하다.   총회장이나 감독에 출마한 인사들은 모두 교계에 이름이 잘 알려진 중견목회자이다. 당연히 이에 따른 높은 도덕성과 인격이 요구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자리는 그 사람의 인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돈을 주고 표를 사서 총회장이 된다한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총회장, 감독은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더 낮은 자세로 섬기고, 화합을 이끄는 자리가 돼야한다. 어느 전 감리교 감독은 감독은 행정의 수반이 아닌 영적 리더의 자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백번 옳은 말이다. 금권선거 없는 깨끗하고, 모범적인 선거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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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7
  • 차세대교육에 힘쓰자
    코로나 시대를 맞아 교회에서 젊은 세대가 떠나는 등 차세대 신앙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비대면 사회가 도래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곳이 교회이다. 성도들의 교제의 장이 제한을 받다 보니 자기 생활에 안주하게 된다. 여기에 디지털 사회의 편리함이 영혼의 나태함으로 나타난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편리한 스마트폰에 생활의 전부를 의존하는 ‘생각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모든 것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검색창을 통하여 필요한 정보를 찾아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 교회의 비대면 설교에 익숙하게 되고. 성경 읽기보다는 앱에 의지한다. 그 결과 개인주의적인 종교생활로 인하여 청소년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차세대교육은 매우 미흡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자녀들의 모임이기에 하나님의 시민이요 권속(엡2:20) 곧 가정이다. 가정의달 5월을 맞아 모든 교회나 가정에서 차세대 신앙교육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칭찬받은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계3:7-13)이다. 비록 수도 적고 힘이 약한 교회였으나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자 주님은 그 교회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셨다.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은 ‘형제사랑’이라는 뜻을 갖고 있듯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크게 부흥하여 세계적인 선교를 이루었던 18-19세기 교회를 예표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유대인 종교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민의식 때문에 완악했으며, 영혼에 무관심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자로서 모습을 오해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많이 유사하다. 코로나 시대 개인주의가 만연함으로써 유대인들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인(딤후3:5)되고 있다.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온전하여 선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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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7
  • 러시아군의 양민학살과 범죄를 규탄한다
    전 세계인들이 우려하던 일을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도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에 침공한 러시아군의 민간인에 대한 만행에 세계는 경악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철수하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도시 부차에서 다수의 민간인을 집단학살했다. 거리에 뒹구는 민간인의 시신은 전쟁의 광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를 명백한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충격에 휩싸인 국제사회는 러시아에 대한 제제에 돌입했다. 과거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집단적으로 학살했던 인종말살의 전과가 있는 독일은 러시아 대사관 직원을 추방했다. 미국은 푸틴을 민간인학살 혐의로 국제재판소에 기소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21세기의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야만적이고 끔찍한 만행이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는 충격과 함께 깊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계 2차 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악마적 망상이 다시 배회하고 있다. 히틀러의 악령이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닌가라는 끔찍한 상상에 빠지고 있다.   성경적으로 보자면 세상에는 여전히 사탄의 권세가 활동 중이다. 이 어둠의 권세는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마비시키고 대신 광기와 증오로 가득차게 만든다. 그래서 집단학살, 강간, 파괴를 일삼게 만든다. 이 악마성이 다시 우크라이나에서 나타나고 있다.   집단학살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강력히 이를 규탄한다. 한국교회는 러시아군의 악마적 광기를 막을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함께 기도하고, 성명을 발표하고, 모든 사람의 양심에 호소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   부활절을 맞아 우크라이나에서 사망과 어둠의 광기가 사라지고 다시 희망과 소망의 생명이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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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3
  • 예수의 ‘부활’, 믿음의 일상이어야 한다
    매년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부활이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오셨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사7:14), 베들레헴 탄생(미 5:2), 희생적 죽음(사53:5), 못 박히심(시22:14-18) 등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실의(失意)에 빠져 자기의 예전 일터로 돌아갔다. 그러던 그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게 되고,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의 모습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날마다 믿음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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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4-13
  • 코로나 방역에 방심은 금물이다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하면서 일일 확진자가 연일 수십만 명대를 기록하고 있다. 다행히 증상은 델타변이보다 그다지 심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보니 대유행이 ‘정점’에 도달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일각에선 대유행 정점 기간이 더욱 길어질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기존 오미크론 변이에 비해 전파력이 더욱 강력하다고 알려진 ‘스텔스 오미크론’이 복병으로 등장해 모두가 긴장하고 있다.   방역당국에 따르면 국내에서 스텔스 오미크론 점유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기존 PCR 체계에서 전문가용 신속항원검사로 확진을 인정하게 되면서 대유행 정점의 기간이 지연되고 규모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스텔스 오미크론이 새로운 우세종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대유행 기간이 길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정부의 거리두기 조정에 따라 교회는 70%의 인원이 대면예배를 드릴 수 있다. 이전에 10%에 비하면 현격히 달라진 것으로 거의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추세도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더욱이 새로운 변종이 계속 나타나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철저한 방역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루 확진자가 60만명을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증상을 숨기는 사람까지 친다면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결코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교회는 집단감염에 취약한 구조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고, 함께 기도하며, 찬양을 부른다. 이것은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아주 쉬운 구조일 수밖에 없다. 자칫 방심하면 교회는 또 다시 집단감염의 진원지라는 오해와 비난을 받게 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코로나와의 전쟁에 최선을 다했다. 철저한 마스크 쓰기, 온라인예배, 주기적인 방역 등 그야말로 눈물겨운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록 승리의 고지가 저 멀리 보이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초심으로 돌아가 철저한 방역으로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22-03-30
  • 산불피해지역을 연합해서 돕자
    이번 3월 초에 울진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은 지역주민에게 큰 고통을 남겼다. 아직도 많은 이재민들이 큰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는 연합해서 산불피해지역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총연합은 산불피해지역에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해서 좋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왜 연합기관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교파와 교단의 구별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할 때 연합과 일치는 더욱 공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개인별로 혹은 개 교회별로 혹은 개별 교단총회 별로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도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보다는 열, 열보다는 백, 백보다는 천이 모여 한번에 도움을 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이 일에 한국교회는 하나가 돼야 하고 연합해야 한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연합기관을 중심으로 하나가 돼 산불피해지역에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면 한국교회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사회적 공신력을 회복하고 다시 한 번 부흥의 전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백마디 말보다는 한번의 따뜻한 사랑의 실천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예수는 이웃이 누구냐는 율법사의 질문에 선한 사마리이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도 이같이 행하라”고 말씀했다. 이 명령은 지금의 한국교회에도 유효하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산불지역에 도움을 주는 일에 한국교회는 하나가 돼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3-30
  • 연합기관 통합을 위해 기득권을 버리라
    한기총 임원회에서 한교총과 합의했던 통합 합의서 채택이 끝내 통과돼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써 통합은 시작부터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말만 무성하고 또 무산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한기총, 한교총, 한교연 등 이름도 비슷한 세 기관은 본래 하나였다. 한 단체로 20여 년을 이어오다 극심한 갈등과 대립 속에서 지금처럼 세 기관으로 분열됐다. 갈라지는 것은 쉬워도 다시 합치는 것은 어렵다. 중요한 것은 왜 갈라졌냐는 것이다.   한기총측은 한교총 안에 WCC가입 교단이 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한교총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기독교대한감리회는 NCC가입교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를 근거로 통합을 반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처음 한기총을 주도한 사람은 예장통합측 한경직목사였다.   연합기관이 신학을 토론하는 것이 주임무는 아니다. 물론 신학적 노선도 중요하지만, 연합기관은 말 그대로 연합을 위한 기관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고 통합에 반대하는 것은 사실상 통합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가 갖고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먼저 한교총은 패권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규모와 재정 면에서 압도적 위를 갖고 있는 대형교단을 거느린 한교총은 이러한 규모를 기득권으로 행사해서는 안 된다. 한기총은 WCC 같은 문제에 너무 집착하지 말기를 바란다. 한기총은 본래 하나였고, WCC가입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연합이라는 가치 가운데 서로를 인정하면서 하나의 연합기관을 유지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3.1절연합예배나 부활절연합예배에서 WCC가입여부는 그렇게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이단이 아닌 이상 한국교회는 교파와 교단에 상관없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했다. 이러한 통합의 정신이 연합기관의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진정한 기초이다.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내 것을 먼저 내려놓지 않고 상대에게 내려 놓기만을 요구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요 적반하장이다. 뼈를 까는 각오로 나의 기득권부터 포기하는 모습을 연합기관은 먼저 서로에게 보여줘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3-17
  • 윤석열대통령 당선인에게 바란다
    무엇보다 윤당선인은 국민통합의 길로 나서야 한다. 이는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다. 윤대통령당선인은 불과 20여만표의 차이로 당선됐다. 단 0.8%의 차이로 승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통합의 길로 나서야 한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갈등요소들이 폭발했다.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 이념 갈등이 동시에 압축적으로 표출됐다. 그래서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는 말이 회자됐다. 이러한 갈등을 치유하는 길은 통합 외에는 없다.   윤당선인 유세과정에서 ‘정치보복’을 운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물론 법과 원칙에 따라 불법에는 정당한 수사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복이 국정의 우선과제일 수는 없다. 통합의 길로 나서야 한다.   다음으로 약자와 소외된 자를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 기독교는 사랑의 실천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그래서 약한 자, 소외된 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정의이다.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윤당선인의 공약 가운데 사회복지에 대한 광범위한 약속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냥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정책으로 구현되기를 기대한다.   혐오와 대결에서 대화와 포용의 정치로 나가기를 또한 기대한다. 혐오와 대결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차별금지법에서부터 남북문제에 이르기까지 혐오와 대결이 아닌 대화와 포용으로 나가는 정치를 우리는 기대한다. 또 다시 한반도에 전쟁과 대결의 재앙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평화는 그 어떤 것보다 큰 방향이자 가치이다.   우리는 윤당선인이 우리의 이러한 시대에 귀를 기울이고 국민대통합과 평화의 큰 길로 나서기를 촉구하며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3-17
  •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돌보자
    사순절이 지난 2일 시작돼, 오는 4월 14일 끝난다. 15일 성금요일이 지나고 17일 부활절을 맞게 된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기억하고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가 있다.   일부 교단에서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사순절을 지키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다. 성경해석의 차이로 사순절을 지켜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불필요한 논쟁은 자제해야할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다 아무 유익이 없는 갈등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며, 십자가는 곧 고난과 낮아짐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십자가는 미려한 것으로 보인다.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고, 양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참으로 끔찍한 고통이 십자가이다. 미련하게 보인다. 조용히 참선을 하고,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슬기롭게 보인다.   흔히 세계 4대 성인을 말한다.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 공자이다. 석가와 공자는 십자가 같은 끔찍한 형벌을 당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고난을 받고 죽었다. 그것은 고난 없이 진정한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사와 감격을 경험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곧 내가 받을 고난이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순절 기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 오미크론의 대유행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우리의 이웃을 돌봐야 한다. 이러한 일은 개인 혼자서는 하기가 힘들다. 교회 공동체가 나서서 저소득층, 독거노인, 소상공인 등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    이렇게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는 것이 사순절에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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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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