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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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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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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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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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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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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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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한 해를 은혜 가운데 마무리하자
    인간에게 가장 쉬운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새 또 한 해가 간다. 모든 사람들이 다사다망 했다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엡 2:15) 이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서야 한다. 무엇보다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한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이다(요 1:12).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미련한 자들이 되고 있다(고전 1:18).  둘째, 우리는 새 사람으로서 새 사람답게 마무리를 잘하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아니라 이 땅위에는 십자가의 ‘피 흘림’에 의한 거듭난(요 3:3) 새 사람들의 평화이기 때문에 주님의 탄생은 역사 속에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주님의 탄생은 진행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새 사람은 자기를 철저하게 관리해 나가야 한다. 셋째, 위에 있는 권세는 물론 국가안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감사를 해야 한다.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물론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건과 단정함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은혜로 재무장하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다. 우리에게는 교회생활에서 일소되어야 할 ‘누룩’(마 16:6)이 많이 있다. 누룩은 우리의 대적인 사탄의 최대무기이다. 우리는 근신하여 깨어 있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고 재무장하여 이들과 싸워야 한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곧 하늘의 시민(엡 2:19)으로서 어떻게 그 의무를 다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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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2-27
  • ‘목회자 기본급’제도 준비해야
    한해가 바뀔 때마다 미자립교회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다. 미자립교회는 말 그대로 아직 스스로 서지 못한 교회를 말한다. 미자립교회의 대부분은 개척교회와 농어촌교회이다. 미자립교회는 자립이 되지 않다보니 목회자에게 충분한 사례비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어쩔 수없이 ‘목사의 이중직 금지’에도 불구하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미자립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단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경우 ‘교회자립개발원’이라는 총회기구를 뒀고, 기독교침례회는 총회장이 직접 나서서 미자립교회 지원에 대한 대책을 발표했다. 이렇게 지교회나 개인 차원이 아닌 교단이나 총회 차원에서 미자립교회에 대해 지원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임기응변적인 대책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대안과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몇몇 대형교회에서 미자립교회 지원을 위해 몇 억을 쾌척했다는 뉴스는 반갑고 좋은 것이다. 또 이러한 운동은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확고하고 장기적이며 안정적인 대책수립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면에서 교단이나 총회가 소속 목회자에게 일정액의 ‘기본급’을 주는 ‘목회자 기본급’제도를 마련해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제도는 미자립교회 목회자의 문제, 한국교회 양극화의 문제 등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신학’의 문제이다. 모든 목사가 부름 받은 동역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는 의식과 의지가 있다면 시행할 수 있는 제도이다.  새해에는 각 교단별 실정에 맞게 ‘목회자 기본급’ 제도를 도입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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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2-27
  • 한 해를 은혜 가운데 마무리하자
    인간에게 가장 쉬운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새 또 한 해가 간다. 모든 사람들이 다사다망 했다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엡 2:15) 이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서야 한다. 무엇보다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한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이다(요 1:12).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미련한 자들이 되고 있다(고전 1:18).  둘째, 우리는 새 사람으로서 새 사람답게 마무리를 잘하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아니라 이 땅위에는 십자가의 ‘피 흘림’에 의한 거듭난(요 3:3) 새 사람들의 평화이기 때문에 주님의 탄생은 역사 속에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주님의 탄생은 진행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새 사람은 자기를 철저하게 관리해 나가야 한다. 셋째, 위에 있는 권세는 물론 국가안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감사를 해야 한다.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물론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건과 단정함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은혜로 재무장하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다. 우리에게는 교회생활에서 일소되어야 할 ‘누룩’(마 16:6)이 많이 있다. 누룩은 우리의 대적인 사탄의 최대무기이다. 우리는 근신하여 깨어 있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고 재무장하여 이들과 싸워야 한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곧 하늘의 시민(엡 2:19)으로서 어떻게 그 의무를 다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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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7
  • ‘성직자’로서 목사의 자격은 교회가 정한다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2018년 12월 5일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서울고등법원이 사랑의교회 오정현목사에 대해 ‘위임목사 자격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대법원의 파기환송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판결을 선고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격이 없으므로 오정현목사에 대한 동서울노회의 ‘위임결의’은 무효라며 ‘목사직무정지’라는 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과정’과 ‘본질’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다른 교단에서 이미 안수를 받은 목사가 합동교단의 목사로 인정받는 편입 ‘과정’에 대해서는 사법부가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규칙을 정하는 ‘기술적인’ 문제이기에 규칙이 잘 지켜졌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의 자격이 무엇인지 또 목사로서의 자격을 정지시킬 것인지 말지는 ‘본질’의 문제로서 법원의 사법적 판단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법원은 ‘판례’로서 이러한 원칙을 지켜왔다. 오목사의 편목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사과하고, 다시 과정을 밟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월권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정통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집단의 병역거부행위에 대해 법원이 ‘양심’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저들이 종교와 양심의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했으므로 이는 헌법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 고귀한 가치와 원칙이 왜 사랑의교회 사건에 적용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종교와 양심’이라는 근본적인 신념에 의해 구성된 교회는 내적으로 자체의 법과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 민주주의 국가는 헌법을 통해 종교의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다. 이제라도 오정현목사에 대한 직무정지 명령은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목사의 자격은 교회가 정할 문제이다. 사랑의교회 또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이번 판결로 한국교회와 성도님들께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된 점에 대하여는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는 사과와 회개가 진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18
  • 그리스도의 탄생의 참 의미를 새기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이 다가왔다. 한국교회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은 12월 25일을 기념하지만 정교회권 국가들 중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조지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와 같이 기존 율리우스력을 고수하는 국가들은 1월 7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기념일은 달라도 성탄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부활절과 더불어 기독교 최대 축제의 날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한국교회도 교우 및 이웃들과 성탄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축복하는 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한다. 대중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X-mas란 말도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ΧΡΙΣΤΟΣ(크리스토스 또는 흐리스토스)의 첫 문자 Χ(키 또는 히)를 따 줄인 말이다.  미국에서도 수년전 오바마정부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일환으로 ‘크리스마스’라는 명칭을 반대하며, 연말 연초의 휴일들을 공식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부르는 것을 대신 홀리데이 시즌(Holiday Season)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들어서 이제는 미국 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풍습에 반감을 가지고 보이콧하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되며 기독교 고유의 명절조차 위협받는 시기에 한국교회는 점차 연말 공휴일로 전락하고 있는 성탄절의 의미를 다시 살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그들을 섬길 때, 점차 세속화되어 정체성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 성탄의 참된 정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18
  • 12월, 회개하는 삶을 실천하자
    세례자 요한은 천국 도래의 임박성을 직시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그의 의상과 식생활은 예사롭지 않았다. 낙타털을 소재로 한 의복에 가죽을 소재로 한 허리띠를 착용했으며, 주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그는 인구밀도가 희박한 광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인간 삶의 한복판으로 침투했다. 정보파악력이 뛰어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임박한 진노에 대비해 생명보험을 계약하는 의미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청구한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자격은 유전적·선천적 소재의 우열이 관건이 아님을 밝힌다. 이에 대해 독점적·배타적 선민사상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그것을 부적처럼 간직한 바리새인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종교적·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다. 최후통첩으로 세례자 요한은 영적 구제불능 차원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도끼와 타작마당 내러티브를 설파함을 통해, 그들을 순기능적 의도로 자극하며 촉구한다. 지금 우리는 ‘과도한 자기 변호가 난무하고 참된 회개가 실종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천연기념물 목록에 ‘회개’라는 것도 하나 추가해서 등재해야 될 실정이다. 회개란 ‘원래 있어야만 하는, 당위성 있는 자리로 돌아가는 인격적 결단·실천’이다. 인간은 인 박인 습관과 관성의 법칙 앞에 무력해지기 때문에 본연의 자리로 회귀하는 것은 그리 녹녹치 않다. 복음서에서 회개의 표본적 인물로 삭개오가 있다. 그는 참된 회개의 교과서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율법적 테두리에 저촉되지 않는 최소한의 규정에 연연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통 큰 회개를 했다. 회개는 ‘입을 통한 단어의 나열로 하는 감성적 차원의 죄의 고백’이 아니라, ‘두 손과 두 발, 두 무릎으로 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의 시작’이다. 이러한 차원의 회개를 실천하는 12월을 보내자.
    • 오피니언
    • 사설
    2018-12-05
  • 본지 53년, 한국교회 정론위해 앞장서겠다
    본지는 1965년 창간되어 53년동안 정론직필과 문서선교의 사명을 위해 달려왔다. 이후 많은 교단들이 자체 신문을 발행하여 교단지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사랑의 실천’정신과 양질의 기사를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났음에도 침체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를 위해 본지는 다시금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 확장과 부흥을 위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문서 선교사로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양적 부흥을 위해 질적인 면을 간과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러한 부족한 부분에 대한 반성을 통해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기독교로 거듭나는 일에 먼저 나서겠다. 현재 온라인에 3천여 곳의 언론사들이 활동하고 있으나 신문은 꼭 필요하다. 단순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전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기독교신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신문은 언론사이기 이전에 한국교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지다. 기자가 아니라 문서 선교사라는 정신이 있었기에 53년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비판보다는 한국교회가 더욱 잘될 수 있는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분열보다 화합하고 하나될 수 있는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이 한국교회에 구현될 수 있도록 본지는 계속 문서선교 사역의 최선봉에 설 것이다.  개교회 목회자들이 기독교신문을 교인들과 지인들에게 자랑스럽게 전할 수 있도록 알고 싶은 것을 알려주고 누구라도 보고싶은 신문이 되도록, 특히 바르고 정확한 정보를 전하는 신문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언론매체의 사명을 다하도록 한국교회와 독자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53년의 역사동안 기독교신문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정신을 회복하고 사랑의 실천이 이 나라에 가득하도록 함께 해준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05
  • 목회자, 이삭에게서 배우자
      현존(現存) 이 시대의 사회와 기독교 공동체 내부는 ‘어깃장·으름장 카리스마’가 지배적으로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삶의 정황’은 ‘조용한 카리스마’를 요구하고 있다.   구약 히브리의 족장 중 하나인 이삭은 아브라함·야곱·요셉에 비해 능동적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측면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의 조연의 삶은 출생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출생은 아브라함·사라 부부의 믿음 고양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 역할을 했다. 유목민의 삶을 살아간 이삭은 우물 굴착과 관련된 애절한 사연을 안고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수자원 확보는 인간 생존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된다.   세계 4대 문명인 황하문명·인더스문명·메소포타미아문명·나일문명은 수자원 확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의 원활한 생존에는 수자원이 필수불가결하다. 구약 시대 팔레스틴은 지중해성 기후로 인한 소위 ‘물 부족국가’로서 유목민인 히브리들은 강우에 의한 물 확보보다는 지하수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했다. 이렇듯 수자원 확보 여부는 유목민인 이삭에게 있어서 절박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삭은 자기가 굴착한 우물에 대한 권리 주장에 대해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아브라함 생존 시 그의 종들이 굴착한 우물을 블레셋인들이 매몰 처분한 후, 이삭은 목축을 위해 수자원 확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랄 평원에서 아브라함 때 굴착 후 매몰된 우물 재 굴착 포함 네 개의 우물을 팠으나 두 개는 그랄 지방 목자들의 자기네 수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에 의해 탈취 당했다. 브엘세바로 와서 또 두 개의 우물을 팠는데 그것은 이삭 집안의 혜택으로 돌아갔다. 이삭에게 약점은 노안이 심각해지기 전에 장자권 세습에 대한 확실한 의지를 다지지 못한 점이다. 이삭은 타인의 우물을 불법적으로 탈취하기위해 으름장 어깃장 카리스마로 일관하는 자들에게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그들을 흡수하고 마침내 승자가 됐다.    우리는 목회자들에게서 물질에 연연해하는 모습을 본다. 마음이 아프다. 믿음의 선친에게서 배우자.  또한 이슈에 저돌적인 교회의 모습을 본다. 이삭에게서 배워야 한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1-27
  • 교단통합의 모범사례로 자리잡길
      현재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인식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고질적인 분열로 인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대명제가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성경을 부인하고 복음을 왜곡시키는 각종 이단과 사이비단체, 이슬람과 전능신교 등의 발흥이 교회를 무너뜨리고 십자가 복음을 침몰시키고 있다. 심지어 동성애 등 세상의 성적 타락이 교회까지 들어와 영혼의 자유를 잠식하고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기하성 여의도와 서대문측의 통합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은 한국교회에 더없이 기쁜 일이다. 1953년 설립된 기하성총회는 신학적 및 정치적 이유로 여러 총회로 분열되었으나 뿌리는 미국에서 1914년에 설립된 오순절교회 계통의 기독교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로부터 시작됐다. 이번 통합을 통해 기하성총회가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예수의 속죄와 삼위일체, 예수의 부활을 믿으며 중생, 성령 충만, 신유, 재림 등  교단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임시총회를 통해 통합을 결의한 양측 지도자들과 회원 목회자들에게 거는 교계의 기대가 크다. 이번 총회는 10년만에 하나로 뭉친 목회자들이 여러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새로운 전기를 위해 대범한 결정을 한 의지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앞으로 한국교회 연합사업과 교단운영에 있어 내실있는 교단으로 바로서겠다고 하니 귀추가 주목된다.     모처럼 교계에서 모범적인 통합을 추진한 중진지도자들에게 기대를 하면서 다른 교단들과 다르게 완전한 통합을 위해 매진해주길 당부한다. 교단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확실히 지켜내는 활동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세속화가 더 이상 심화되지 않도록 막아야 하며 교단목회자들의 도덕성 회복을 선도하고 개혁에 앞장섬으로써 한국교회가 사회의 공신력을 얻는데 기여하길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1-27
  • ‘사랑의 실천’ 위해 연합하자
      연말연시에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후원과 봉사에 동참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매서운 겨울을 나기 힘든 이웃들이 절실히 필요한 김장과 쌀, 연탄 등 필수품들을 후원하고자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기업과 정부 등 모두가 함께 하는 ‘사랑의 실천’ 활동이었다.   특별히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와 헌신은 기독교계가 주도하여 타 종교에 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초기 한국교회도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워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으며 교인들도 사랑을 전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사회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는 행위가 복음전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사회에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절대적 빈곤은 상당부분 해소된 상태다. 과거에는 과거 선교사들처럼 절대적 빈곤에 시달린던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경제적 도움이 기독교에 대한 신뢰와 복음전파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절대적 빈곤이 아닌 상대적 빈곤문제가 더욱 커졌다.   이미 불교와 천주교 등 다른 종교들은 이웃들을 위한 봉사와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철저하게 자신들의 모습은 감추며 활동하고 있다. 재정규모나 종파 내부의 문제가 있어도 외부에는 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통해 거룩한 성직자의 이미지로 봉사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교회는 현재 분열로 인해 개교회 차원의 사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선도했던 한국교회가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는 연합적 차원의 봉사와 후원사역을 요구하고 있다. 인프라확보와 복지규모를 키우려면 단일화된 연합기구 중심의 사역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합의가 시급하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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