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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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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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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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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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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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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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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몽골에 주님의 계절이 오게 하자
      몽골 현지 목회자들의 순수함과 열정을 보며 과거 한국교회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은 오직 주님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며 복음을 전한다. 주님이름으로 대우 받고, 존경 받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이름으로 고난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하고 위축되지 않는다. 주님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몽골 현지에서 만난 한 목회자는 한국교회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너무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들을 하나님보다 높이고 있다며 이는 경계해야 할 일 임을 지적했다. 자신들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고 오직 주님영광을 위해 쓰임 받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주님이름을 내세워 출세하는 한국교회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현실을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 몽골에는 영적인 바람이 불고 있다. 그들은 헌신을 바탕으로 기도하며 바른 복음의 말씀으로 이 땅, 라마불교가 왕성한 곳에서 말씀으로 하나하나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선교지 몽골은 우리의 이웃이며 주님 지상명령의 터전이다.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지 20여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현재는 복음화 율이 2% 선이지만 그들은 2020년까지 10%의 복음화율을 위해 뛰고 있다. 목표설정이 다소 높은 감이 있으나 이것은 그들의 열정을 여실히 보여준 결과이다.   이제 이 자리에서 한국교회는 우리의 형제인 몽골선교에 함께 동참을 했으면 한다. 일각에서는 한국선교사들이 그곳, 몽골에서 아름다운 선교현장을 만들지 못한 이른바 실패작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선교현장의 상황을 바로 직시하지 못한 결과이며 조금 비판적으로 말하면 선교사로의 사명감의 결여이고, 누림에 길들여진 신앙생활을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고 선교현장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몽골선교에 동참할 적기이다. 모두 나서서 그곳에 주님의 계절이 오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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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11
  • 통합의 불씨를 다시 살리자
      2018년이 전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연합기관들의 통합을 위한 목소리도 연초와 달리 전혀 들려오지 않으면서, 각 기관별로 주도권문제로 인해 분쟁을 일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각자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상대측을 불법집단으로 몰아세우는 행태가 여전하고 송사로 인한 사업추진에도 애를 먹고 있다.   현재 한교총과 한기총, 한기연은 원론적으로 통합에 찬성하고 있으나 화해나 화합을 위한 어떤 움직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삼각구도속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질주만 거듭하고 있다. 각 기관에서 통합을 주도할 리더십이 상실되었고, 지난해부터 거듭 실패한 통합추진으로 인해 교회안과 밖에서 숱한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미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는 대표성을 상실하고 신뢰도마저 최악으로 추락하고 있는 상황에 마땅한 해법이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한기총과 한기연의 통합실패로 한국교회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어느쪽이 정통성을 지니고 있느냐로 싸우다 지쳐서 주저앉은 형국이다. 이러한 사태로 한국교회의 위상이 떨어지면서 동성애와 난민, 이슬람 등 대사회적 이슈에 기독교가 ‘패싱’되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타종교에 비해 지도력과 리더쉬이 상실됐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벌써 한해의 절반이 지났다. 이제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상황임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저력을 발휘하기 위한 힘과 지도력을 키워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적기이다. 기관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된다. 무엇을 주장해서도 안된다.   명예욕도 내려놓고 주도권도 내려놓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통곡의 회개와 자성이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하나님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만 생각하자. 원칙과 순리, 질서를 지키면 다시 통합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 하나님과 한국교회를 위한 통합의 역량을 다시 세우자. 화해와 화합의 깃발아래 한국교회가 모일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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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11
  • 대안없는 난민입국을 우려한다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이 지난달 25일 논란이 뜨거운 예멘 난민 신청자들에 대한 심사에 들어갔다. 예멘 난민 신청자 3명이 지난달 1일 제주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제주지방법원에 체류허가지역 제한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며, 제주도에서 대한민국 육지로 나가는 ‘출도’에 대한 제한도 심사 결과에 따라 결정될 예정이다.   제주도에 온 예멘난민은 5백여명에 달한다. 대부분 10대후반에서 20대 후반사이의 젊은 이슬람 신자들인 이들은 제주도에 들어온 후 줄곧 본토 이주를 요구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들의 이주에 대해 우려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 반대다.   이미 유럽은 2015년 8월 경부터 발생한 중동에서 유럽으로의 대규모 이슬람 난민이동을 받아들이면서 지금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했다. 특히 유럽으로 이동하는 난민들의 규모가 커지고 그에 따라 대규모 사망 사건사고가 2015년 8월부터 증가하여 현재는 영국이 EU를 탈퇴하고 독일도 반 이슬람정서가 극에 달하고 있다.   한국도 수년전 유럽이 겪었던 문제를 똑같이 접하면서 아무런 대책없이 이슬람 난민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무책임한 정책이라는 지적이다. 한명이 입국하면 가족들까지 불러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난민의 특성 상 이슬람 난민이 많아질 경우 국가에 따라선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정도의 숫자로 증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난민들 중 다수가 이름을 바꾸거나 관련 기관과의 연락을 끊고 사실상 불법체류자로 잠적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그 피해는 전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감당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한국교회는 무조건적인 온정주의를 촉구하며 기독교인들의 우려를 혐오로 몰고 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데 앞장서야 한다. 교회가 망설일수록 위험은 더욱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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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7
  • 퀴어 퍼레이드를 막은 것이 승리인가?
      지난 23일 대구 동성로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와 맞불 성격의 가족사랑콘서트는 퀴어와 기독교인 사이의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었다. 서로 공연을 펼치고 피켓을 든 모습은 비슷했지만 그 내용은 동성애 반대와 프라이드로 극명히 달랐다.   이날 전쟁에서의 승리는 기독교인들이 가져갔다. 퀴어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퍼레이드가 시작되기 전부터 기독교인들은 길목을 틀어막고 통성기도를 하며 퍼레이드 차량을 몸으로 막아섰다. 한시간 넘는 대치 끝에 차량을 이용한 퍼레이드를 포기했고, 퀴어들은 흩어져서 자신들만의 행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외형적으로 이날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자들의 퍼레이드를 막아내는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우려되는 점은 이런 모습이 2014년 서울 신촌에서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기독교인들은 퀴어퍼레이드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길목을 막아섰고, 결과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승리로 보였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퀴어들은 이듬해 퀴어축제를 서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서울시청앞광장에서 열겠다고 예고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화들짝 놀란 교계에서 이를 막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었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퀴어운동은 기독교계의 반대운동으로 인해 더욱 확장됐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기독교인들이 동성애 확산을 우려하고 염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여러가지 의견이 공존하는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물리적 저항이 아닌, 설득을 통한 여론조성이다.   수년간 퀴어축제와 반대집회를 바라본 비기독교인들을 우리는 제대로 설득했는지 의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제발 동성애에서 벗어나 돌아오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사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비기독교인들의 비난이다. 동성애 반대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선 몸으로 동성애자들을 막아설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을 설득하여 우리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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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06-27
  • “평화의 역사·국가발전에 기여해야”
      사람은 서로서로 생각이 다르다.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과 처해 있는 현실 또한 각기 다르다. 생각이 모두 똑같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한 물건을 내놓고 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그것처럼 곤욕스러운 일이 없다. 이번 선거에서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들이 바로 그렇다. 후보들의 공약이 차이점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반드시 누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후보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6·13 지방선거의 17개 광역단체장과 12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당초 생각한 대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다. 정당별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 민주당은 14곳, 자유한국당 2곳, 무소속 1곳이 당선됐다. 재보선 12곳에서도 민주당이 11곳, 한국당은 1곳만 당선자를 배출해 보수진영은 결국 몰락하는 양상이 되었다. 이번 선거는 인물보다 정당을 보고 선택했다. 여당의 압승으로 문재인 정권의 국정운영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대로 야권은 메가톤급 후폭풍이 들이닥치고 있다.     또한 전국 시·도 교육감 선거에서도 진보 성향 후보들의 압승이다. 재선·3선의 경험까지 갖춘 진보교육감들이 현장에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다면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개혁도 한층 힘을 받을 전망이다. 6·13 당선자들에게 바란다.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평화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집중해 주길 바란다.    촛불탄핵에 이은 문 정권의 탄생 그리고 높은 지지도를 축하한다. 그러나 행여 지지도에 들떠 여론과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세를 과시한다면 우리의 앞날은 결코 밝을 수 없을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도 잘 마쳤다. 선거도 끝났다. 이제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종전선언을 위해 손을 모으자.
    • 오피니언
    • 사설
    2018-06-20
  • 경제위기,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청년 실업률이 사상 최고다. 통계청의 고용동향에 따르면 5월 취업자 수는 2818만4000명으로 전년 동기대비 7만2000명 증가하는데 그쳤으며 이는 2010년 1월 이후 8년 4개월 만에 최저치다. 실업자 112만명에 달한다. 외국인들이 매일 5천억원씩 주식을 매도하여 주가도 폭락중이다. 환율도 위기다. 1000원대를 유지하던 원달러 환율이 몇일만에 1100원대를 돌파하여 상승중이다.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더 올리면서 이미 역전된 한미 금리차이는 더욱 벌어지게 됐다. 달러가 국외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경제가 위기다. 심각한 상태다. 선거가 끝난 뒤 각종 암울한 경제지표가 발표되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북미회담에서 트럼프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 발언과 한미연합훈련 중단도 한반도의 지적학적 리스크를 증가시켜 수출로 먹고사는 이 나라에 타격이 되고 있다.   국가가 어려우면 국민이 어렵고 교회도 어렵다. 경제위기로 무너지는 가정은 교회의 붕괴로 이어진다. 저출산으로 인해 교회에 다음세대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적 문제에 교회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위기를 깨닫고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대비해야 한다.   미국의 금리를 인상하면 필연적으로 우리나라도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과같이 외화가 유출된다. 정부는 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다.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외화가 부족해지면 곧 외환위기이기 때문이다. 수 년동안 전 세계적으로 지속된 저금리 기조가 변화하고 있다. 더 이상 빚을 내서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무리한 대출로 유지하고 있는 부동산은 유지하기 힘들어지는 시대가 온다.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 모두 빚을 줄이고 다가올 경제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교회대출은 고정금리로 바꾸고 부채는 미리미리 상환하는 등 7년의 흉년을 대비한 요셉처럼 미리 준비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06-20
  • ‘창조질서’ 파괴하는 ‘인권’은 없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에 많은 여성들이 모였다. 이들은 남성이 피해자인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몰래카메라)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가 편파적이라고 성토하면서 대다수의 몰카 범죄가 피해자인 여성의 인권을 위협하고 억압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이 남성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하여 유포한 악질적 사건임이 분명함에도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관용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거리에 나와 가해자인 여성이 마치 피해자인양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여성인권이 억압받던 시대에 인권향상을 위해 시작됐던 페미니즘은 이제 여성우월주의로 변질되어 남성을 적으로 인식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들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비난하고, 심지어 자신이 낳은 아들까지도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저주하고 비난하고 있다.   인권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올해도 서울 시청에서 개최예정인 퀴어축제도 성소수자 인권보호란 명분으로 에이즈 확산과 성병감염 등 추악한 진실을 숨긴채 사회적 약자로 위장하여 우리사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으로 몰아넣고 있다.   비위생적인 성교로 인해 감염의 위험성이 급증하고 이로 인한 에이즈환자 치료비로 한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지출됨에도 이를 인권이란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이 파괴되면 우리사회의 근간이 흔들림에도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답습하듯 성적 문란함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인권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평등 등의 기본적 권리’란 뜻이다. 여성우월주의와 동성애는 본질적인 인권회복이 목표가 아니다. 이들의 목표는 전통적 가정의 해체이며,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섭리를 파괴하는 것이 인권일리 없다. 한국교회도 이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06-12
  • 6.25의 처절함, 깊은 교훈으로 삼아야
      처절한 죽음을 그대로 보여준 피(血)의 역사가 흐르는 강이 있다. 금강산에서 발원해 휴전선을 넘고 강원도 양구. 화천 평화의 댐과 한국 전쟁 때 국군이 중공군을 대파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던 인공호수인 파로호를 거쳐 경기도 남양주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북한강이 바로 피의 역사가 흐르는 강이다. 그중에서도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인 화천의 북한강은 아군과 적군의 피가 폭포수처럼 흐르던 강이었다.   지난 6월 6일은 호국 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현충일이지만 아쉽게도 이날이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호국 영령들을 기억하는 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현충일의 의미가 우리 가슴에서 지워지고 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이 잠든 현충원에는 가 보았는가?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는 지도자와 백성들이 있어야 한다. 6.25 전쟁은 안으로는 민족분단을 더욱 고착시키고, 밖으로는 동. 서양 진영 냉전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은 결국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원인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에, 분단국가의 어느 한 쪽 세력이 주도해 한반도 지역 전체를 무력으로 통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왜 우리는 한국 전쟁이 일어 난지 반세기가 흘러갔는데도 6.25 전쟁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가. 그것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비극적인 아픔과 상처를 남겼기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역사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이어 북미정상회담도 이뤄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민족이다.   북한의 만행은 용서하되 그 상처는 잊지 말아야 한다. 6월 한 달 만이라도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나라를 지키다 세상을 떠난 선조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돕는 우리가 되자.
    • 오피니언
    • 사설
    2018-06-12
  • 예루살렘, ‘중립 지대’로 남겨둬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할 것”이라고 밝히고, 텔아비브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유혈충돌이 벌어졌고, 여전히 그 재발 가능성이 계속 고조되고 있다.   UN은 지난 1947년에 ‘결의 제181호’를 발효하면서 “예루살렘의 특수성을 고려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제 특별 관리지역’으로 설정한다”는 선언을 했다. 즉 여러 민족의 공존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지난 1947년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강제 분할하면서도 예루살렘만은 국제법에 따라 ‘중립 지대’로 남겨둔 것이다.   그런데 이 국제법을 무시한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 이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들을 더 괴롭히고 있어서 오늘 이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무 잘못 없이 무고하게 죽어 가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면서 2천 년 전, 식민지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 제국주의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 유대인들의 잔혹한 모습이 떠오른다.   유대인 자기들만 선민이고, 구약시대 가나안땅을 되찾겠다고 하는데, 구약에서 자기들만 선민이라고 한 적이 없다. 성경 곡해다. 출애굽 당시 “중다한 잡족”이 나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선민의식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택정하심은 특혜가 아니라 특권이다.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 섬기고, 봉사하며,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의무 말이다.   그런데 큰 문제는 구약과 연속성을 견지하면서 비연속성을 선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인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들이 공공연히 이스라엘을 두둔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들 유대인들과 달리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되찾아야 한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기독교의 유대교적 극우성을 보게 돼 실망하면 한국교회에 미래는 없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06-07
  • 실리를 취하는 기독교가 되자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종교별로 자신들의 종교적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있다. 기독교는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가 앞장서서 각 정당에 제기하는 등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실질적 로비를 통해 실리를 취하는 타종교에 비해 실질적 이득은 미비한 상황이다.    그 동안 불교와 천주교에 비해 기독교는 고질적인 분열의 핸디캡으로 인해 정치적 이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불교의 경우 정부의 종교문화재 지원금을 비롯해 다양한 정부지원을 통해 실리를 취하고 있고, 천주교도 시민단체 조직을 통한 정치권 로비와 단일화된 움직임을 통해 20대 국회의원 4명중 1명이 천주교 신자로 확인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것과는 대조된다. 정치권이 기독교에 비해 타종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러한 문제점을 일부나마 해소하고자 역할을 맡았던 기독교단체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각 정당은 립서비스 수준의 대응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의 경우 개교회주의 와 분열로 실질적 도움이 되는 정책을 관철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국책사업 지원을 통해 교세를 늘리는 불교와 시민단체 등을 통해 정치권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천주교에 비해 기독교는 항상 손가락만 빨고 있다.    이번에 각 정당에 제기된 8가지 질문은 저출산문제와 근대문화 특별위 구성, 반사회적 사이비 집단의 문제, 자살예방 및 낙태반대, 중독예방과 치료, 사랑이 넘치는 청정시군 만들기, 맑고 깨끗한 환경을 위해, 동성애 보호조장 인권조례 등이라고 한다. 이조차도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질문들이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실질적 지원과는 거리가 있다.    기독교가 정부로부터 물질적 정치적 지원을 받고, 나아가 사회적 인식의 변화까지 이끌어내기 위한 큰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 종교의 경우 상대종교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공격하는 연구원도 존재하는 반면 기독교는 이에 대한 대응과 인식자체가 전무하다. 내부의 분열로 인해 외부공격에 면역력을 잃은 기독교의 변화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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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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