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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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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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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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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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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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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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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창조질서 보전위해 교회가 나서자
      최근 심해지는 황사와 미세먼지 등 대기오염문제가 국가적 재난으로 인식되는 등 환경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1972년 유엔은 ‘인간환경선언’을 발표하면서 6월 5일을 ‘세계 환경의 날’로 정했다. 한국교회는 1984년부터 6월 첫째 주를 환경주일로 정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보전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92년부터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회원 교단 전체가 환경주일을 함께 지키며, 공동 예배순서와 공동 설교문, 환경현안 해설자료 등의 내용을 담은 환경주일 예배자료집을 전국 교회에 배포하고, 연합예배와 기념행사를 갖고 있는 등 교회차원의 환경교육에 대한 중요성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특히 교회와 일부 환경단체들이 시행중인 어린이 및 청소년 환경동아리는 미래세대의 환경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기독교 환경단체가 촉구하고 있는 녹색교회는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교회 녹화, 초록 가게, 지구온난화 억제를 위한 실천, 생명밥상 빈 그릇 실천, 햇빛발전소 설치, 친환경 조명 십자가 등 교회의 녹색실천에 앞장서는 구체적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또 교회의 예배, 교육, 봉사, 운영 등 교회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에서 창조질서 보전을 실천하는 교회로 변화할 것을 촉구한다.    오늘날 대기오염을 비롯한 환경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인간이 파괴하며 일어난 재난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무분별하게 남용하는 일을 멈추고 절제와 지혜로운 활용을 통해 삶에서 주님의 질서를 보존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교회와 사회에서 적극 실천하는 캠페인도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러한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다시금 되새기며 생명을 다시 살리는 목회를 추구하는 모습이 선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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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30
  • 화해와 상생, 평화는 시대적 요청
      평화를 갈망했던 이 땅에 그 어느 때 보다 평화와 통일로 가는 문이 가까워 보이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5월 26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또다시 만나 2시간가량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 의지를 재확인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역사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갔던 것처럼, 또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뉜 것처럼 현재 우리도 분단 체제의 포로로 잡혀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회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도 끊임없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다. 지금의 남북한 관계에서도 ‘진정한 회개’라는 의미를 역사를 통해 엿 볼 수 있다. 70년 이상 통일의 문을 걸어 잠근 상태에서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한국교회가 짊어져야 할 의무이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영역에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대북관의 차이로 인한 남남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세속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북한을 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개인 혹은 단체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범 교단적으로 일관성 있는 북한선교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해야 한다.   통일이 멀리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통일 이전에 준비해야 될 것이 있다. 바로 통일을 대비한 ‘올바른 조직과 선교사’이다. 통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범 교단적 명령체계를 만들고 거기서 올바른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력자인 선교사가 그 대안이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복음적 평화통일만이 답이라는 기준이 분명히 있어야 하며, 또한 극심한 좌우의 대립 속에 복음적 평화통일을 향한 방향성만이 견고한 이념의 진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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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30
  • 다가올 호국의 달, 감사의 마음 가져야
      다가올 6월은 호국의 달,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달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충일과 호국의 달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이 땅을 지키고 수호한 조상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충원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 순국선열, 순직 군인, 공무원, 경찰관 등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때때로 이곳의 묘비는 떠나간 이들에게 한(恨)이 맺힌 마음을 전하는 게시판이 되기도 한다.   가장을 잃은 아내와 자녀, 아들을 잃은 노부모가 먼저 간 혈육을 그리워하며 갖가지 사연이 담긴 편지나 쪽지를 남기기도 한다. 좌우로 질서정연하게 정렬되어 있는 묘역을 지나다보면 수많은 묘비 사이에 홀로 자식의 묘비 앞에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현충원에 가면 무명용사의 탑을 볼 수 있다. 그 무명용사의 탑이야말로 가히 현충원의 백미(白眉)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새벽녘 잠깐 풀잎에 내려앉았다가 해 뜰 무렵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아침이슬 같은 용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지만 아직도 북녘 땅 어딘가에 묻혀 조국의 가족을 그리워 할 순국선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현충탑에 위패로만 있는 전사자만도 4만여 위에 달한다. 우리 산 자들이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만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조국을 위해 피 끓는 청춘을 조국에 바쳤던 순국선열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대한민국 어느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아들, 딸들이 이 거룩한 땅을 지키기 위해 초개같은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 이제 2018년 호국의 달을 앞두고 우리 모두가 “나라가 비록 평온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명언을 가슴 속 깊이, 새기야 한다. 힘이 있어야 평화도 지킬 수 있다. 튼튼한 안보의식과 보훈정신으로 온 국민이 똘똘 뭉쳐 하나가 될 때 더 이상 희생과 아픔이 없는 자유롭고 영광된 자유 민주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을 목숨으로 지킨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마음으로 모두가 국가안위를 먼저 생각하며 후손들에게 선열들의 피로 이루어놓은 자유와 민주의 나라를 물려주어야 한다. 자유 대한민국이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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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05-23
  • 병역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한 입영거부자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엇갈리고 있다. 최근 부산지법 서부지원이 병역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A씨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것에 반해 수원지법은 마찬가지로 종교를 이유로 입영을 거부한 B씨 등 4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남부지법의 판결이후 83~86번째 무죄판결로 알려진 이번 판결로 인해 병역에 대한 국민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특정 종교를 이유로 병역을 면탈하려는 시도가 만연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한 가운데, 그동안 자칭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일관되게 유죄로 판단하고 있는 대법원의 결정이 사회적 분위기가 변함에 따라 바뀔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병무청에 따르면 매년 5백여명 내외의 입영거부자들이 여호와의 증인 신도라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입영과 집총거부를 주장하고 있으며 교리에 따라 이를 신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군대는 싸우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가는 곳이다. 무죄판결에 대해 종교적 특혜란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이러한 판결이 계속 나올 경우 국민들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되면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20대 청년들은 병역면제를 위해 여호와의 증인에 가입하려고 줄을 설 것이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 의무가 특정종교의 확산을 도와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비판적임에도 불구하고 병역의무에 대한 예외를 허용될 경우 사회적으로 의무이행의 형평성 문제가 야기될 수밖에 없다. 특정 종교가 병역 면탈의 도구로 이용될 경우 사회 통합이 저해 될 것이고 국가 전체의 역량에 심각한 손상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개병 제도에 바탕을 둔 병역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기독교가 적극 대응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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