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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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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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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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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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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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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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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생명보호를 위해 함께 기도하자
    성산생명윤리연구소 등 기독교단체가 참여하는 ‘생명을 위한 40일간의 기도’가 시작됐다. 전 세계 64개국 900개 도시에서 10만명이 참여하는 이번 기도는 매유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 교회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1973년 여성의 합헌적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미국에서 낙태 문제는 문화전쟁이 벌어지는 대표적인 전투지가 되었다. 기독교적 가치 및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기독교 진영과 이를 적대시하는 또 다른 진영의 권리(동성결혼 합법화,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금지법 등)가 충돌하는 양상이다.   프로라이프는 낙태를 반대하는 진영의 슬로건으로서 개별적인 프로라이프 단체들은 저마다의 정체성과 고유의 활동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의 단체들은 궁극적으로 ‘생명권 보호’라는 기독교적 생명윤리를 지향한다. 프로라이프는 낙태 허용을 주장하는 ‘프로초이스’ 진영과 첨예한 대립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 대립은 단순히 개인의 의견 대립, 또는 시민단체 간의 대립을 넘어 ‘공화당 대 민주당’이라는 정당적 대립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많은 프로라이프는 단체들은 고유의 활동들을 통해 임신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여성들을 돕고 있는데, 이들의 활동은 위기임신센터 운영, 산전 무료 초음파검사 제공, 상담 서비스, 낙태 클리닉 앞에서의 시위, 낙태 반대 행진, 청소년 교육, 교회와 협력을 통한 생활 보조, 입양 연계 뿐 아니라 낙태 반대 입법을 위한 의정활동까지 스펙트럼이 광범위하다. 실제로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 덕분에 현재 미국에는 낙태 클리닉보다 임신 돌봄센터가 더 많아졌다.   성서는 태아 역시 존엄한 생명이라고 제시한다. 따라서 교회는 태아를 포함한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기도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산모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한다. 산모가 건강해야 태아도 건강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관심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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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5
  • 총회서 위임한 안건, 임원회 처리 주목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총회장=배광식목사)를 비롯한 통합측과 고신측, 백석측 등 장로교단 총회가 폐회했다. 이번 총회들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기 사회적거리두기 4단계로 말미암아 단 하루만에 회무를 처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부분 총회에서, 정해진 안건, 총회예산안 등을 통과한 후 총대들이 위임한 안건과 각종 분쟁 사건 등은 총회임원회에서 처리할 예정이다. 또한 회의록채택 등 잔무도 임원회에 위임하고 파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합측과 합동측의 경우, 과거 4박 5일간 처리하던 회무를 처리하다 보니까, 잔치 분위기에서 치러지던 총회 임원선거 수기 투표를 하지 않고, 전자투표로 실시했다. 그러나 지난달 13일 합동측 총회에서 실시된 임원선거 시간에 총회 현장을 벗어나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결국 총회에 출석한 총대수와 곧 이은 투표에 참여한 총대수가 다른 역사상 초유의 결과가 나와 일파만파 파장이 일고 있다. 서기는 재석수를 계수도 하지 않았고, 기표소 앞 선거인명부 설치 및 본인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이날 총회 출석 총대는 총 1,180명이었고, 3개 교회로 분산돼 전자투표방식으로 투표한 결과 총투표수가 1,436명으로 처음 출석총대수보다 256표 더 많았다. 이에 따라 18표차로 낙선한 목사 부총회장측이 이를 문제 삼아 재검표를 요구했지만 총회 임원회가 기각했다. 3년 전에도 제104회 총회에서선관위가 위탁한 전자투표업체 시스템 오류로 인해 임원선거와 재판국원·선거관리위원 투표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이제 9월 총회가 끝났다. 이후 총회 임원회가 위임받은 안건들을 처리해야 한다. 이 안건들은 교회성장과 부흥, 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차원에서 논의하고 공정하게 처리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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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5
  • 사립학교법 논란이 우려된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지난 8월 31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대한 논란과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예정된 수순이다. 핵심은 인사권 문제이다. 개정한 내용에 따르면 교원을 임용할 때 필기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이 시험을 시·도교육감에게 위탁하도록 한다 것이다. 사실상 정부가 인사권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2006년 사립학교법 문제를 두고 한국교회는 선교 이래 가장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는 학교 설립정신과는 무관한 인사가 학교 이사로 선임될 수 있도록 이사회를 개방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개정안대로라면 신학대학교 이사에도 타 종교인이 들어 올 수도 있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실제로 경기도 안양의 한 기독교대학에서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교육으로 기여한 부분은 일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혁혁하다. 봉건적 조선에 기독교는 근대적 교육의 정신과 시설을 심었다. 그리고 이 뿌리에서 자주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끝내 해방과 독립을 쟁취했다. 한국전쟁이라는 비극과 어려움 속에 대한민국이 지금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교육의 힘이었다.         정부는 한국교회가 이룬 이러한 교육적 성과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결정했으니 너희는 따르라’는 식의 강압적인 자세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기독교계가 어떤 이유에서 반발하는지 열린 마음으로 경청해야 한다. 더욱이 현 정부는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진지한 대화와 협상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왜 정부가 사립학교법을 개정하려는지 그 원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 기도교계통의 사립학교에서 교원임용을 두고 소위 ‘사학비리’가 횡횡하고, 그래서 결국 당사자들이 감옥에 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이렇게 정부의 진지한 소통과 교계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서로 함께 할 때 이번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과 논란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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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3
  • 추석과 추수감사절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이다. 해마다 음력 8월 15일에 지키고 있으며, 중추절 또는 한가위라고도 한다. 신라시대에는 가배라고 하였다. 그 말이 변하여 ‘가위’가 되었다. 추석이라는 말은 『예기』에 「춘조월 추석월」이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추석에는 햅쌀과 술과 떡을 빚고, 갖가지 음식과 오색과일을 갖추어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다. 또한 산소에 찾아가 성묘를 하고 효의 사상도 나타냈다.     이 추석을 맞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가 해마다 늘고 있다. 한국교회가 11월 셋째주일에 지켜왔던 추수감사절은 추수가 지난 후에 지켜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정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우리의 실정에 맞는 시기는 추석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전했다. 미국에 이민을 왔던 청교도들이 거친 땅을 개간하여 감자와 밀, 옥수수를 심고 수확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후에 미국 국회에서는 11월 제4목요일을 감사절로 정하고, 전 국민이 이날을 추수감사절로 지켰다. 미국에서는 이 추수감사절과 12월의 크리스마스, 봄의 부활절과 함께 국민의 3대 축제로 지켜 내려오고 있다.     한국교회는 미국의 선교사가 전한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 주일로 지켜 왔지만, 일부 교회들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해 왔었다. 이에 따라 추석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교회가 늘고 있지만, 교회에 따라 9월이나 10월의 주일을 선택해 지키는 교회도 늘고 있다. 11월 셋째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이 깨진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 시기를 연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교회의 실정에 따라 지키는 것보다, 어느 주일을 정해 지키는 것도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선교 이전의 전통문화를 배격하지 않고, 수용하여 접목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이단시 말고,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기독교문화로 창조하여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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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3
  • 농어촌교회에 대한 상생정책이 시급하다
    농어촌교회가 생존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급격한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새신자보다 천국에 가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농어촌교회 목회자는 ‘장의사’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농어촌교회는 한국교회의 모판이자 어머니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농어촌교회에서 자란 교인들이 산업화 속에서 대거 도시로 이주하면서 대형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농어촌교회는 한국교회의 젖줄이자 어머니였다. 농어촌교회가 없었으면 지금 한국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농어촌교회를 지원하고 도우려는 한국교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래목회포럼은 수년 동안 명절에 고향방문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명절에는 고향 교회 가서 예배하고 헌금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모범이 되는 일이다.   각 교단별로 농어촌선교를 강화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상비부 가운데 그냥 형식적으로 농어촌부가 있어서는 안 된다. 실제적으로 농어촌교회와 목회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 상생의 신학이 필요하고 절실하다. 농어촌교회를 단지 시혜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동반자로 바로보고 나가야 한다. 이러한 신학적 대전환이 없다면 모든 대책이라는 것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농어촌교회를 돕는 것은 공동체성과 개교회주의를 극복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받았으니 돌려주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농어촌이 붕괴되고 그 교회들이 문을 닫는다면 결국 그 부정적 효과는 도시에 있는 교회들에게 밀어닥칠 것이 분명하다. 위기가 닥쳤으니 나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공동체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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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9-13
  • 교단총회 임원 입후보자 자정 기대
    오는 1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백석·대신측 교단 정기총회를 필두로 전국교단이 총회를 개회한다.   이번 총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 이유는 코로나19 팬데믹기를 기점으로 세상 전체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시점에 교단 갱신을 바라는 총대들의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역사가 바뀌어도 양지를 찾아 오랜 세월 기득권을 누리며 정착한 이들과 혁신을 부르짖는 세력이 한국기독교 내에서 물밑 접전을 벌이고 있다.   마치 고대철학에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논쟁이 벌어진 것과 같다. 성경에서는 밀레도라고 기록된 밀레토스학파 이후 운동성과 존재에 대한 논쟁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존재와 생성’에 관한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생성 혹은 운동을 강조하는 흐름 쪽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처음 주장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을 싫어해서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온갖 식물을 먹으며 살았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보다는 조용하게 사색하며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출세한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피타고라스 등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먼저 만물유전설(萬物流轉說)을 주장했다고 플라톤은 분석했다. “판타 레이(panta rhei, 만물은 흐른다)”라는 설을 폈다.   이에 대한 예화로 강물을 들었는데,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갔다가 다시 담근다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왜냐하면 상류에서 흘러온 강물은 발을 적시고 계속 하류를 향해 하염없는 흘러가기 때문이다.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은 계속 하류로 흘러내려 간다. 이제 한국교회가 역사 물줄기 따라서 바뀌어야 한다. 과거 총회 임원 선거를 치르면서 돈 살포 의혹으로 논란을 빚었던 인물이 또 돈 살포 금권선거, 저서 표절 시비, 교회 부흥 방법의 이단성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이 정도라면, 세상 국회의원도 사퇴카드를 내밀어야 한다.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이번 총회가 자정되고, 갱신되는 총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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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3
  •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통합에 임하라
    그 동안 정상적인 업무를 보고 있지 못하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새롭게 임원진을 구성하고 한국교회총연합과 한국교회연합에 조건 없는 통합을 제안했다. 이에 화답하듯 한교총 소강석대표회장은 연합기관의 통합을 강조하고 나섰다. 사분오열된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요 축복된 일이다. 분열보다는 통합, 갈등보다는 화합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기독교의 근본진리이다. 연합기관의 통합은 분열과 갈등의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보여주기 식 통합, 사익을 위한 통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만일 이런 마음으로 통합을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분열, 또 다른 갈등으로 가고 말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통합이 아닌 진정한 통합을 이루려면 가장 먼저 사익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한기총이 사분오열된 근본원인이 어디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대표회장 하기 위해 금권선거를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해묵은 이단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하나였던 단체는 쪼개져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주도권, 자리, 돈에 대한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진정한 통합에 임해야 한다.   기관의 통합을 위해서는 많은 난제들이 있다. 직원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조직은 어떻게 할 것인지 또 다른 교단에서 이단성 문제를 제기하는 단체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은 모든 기득권과 욕심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백지상태에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통합이 또 다른 치명적 분열을 야기해서는 결단코 안 된다. 애써 통합해놓고 다시 분열돼는 악순환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형 교단 중심의 통합이 아닌 중소형 교단도 함께 지도부를 구성할 수 있는 배려하는 통합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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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9-05
  • 금권선거를 퇴출하자
    9월에 전국 교단 정기총회가 잇달아 개회된다. 한국교회 교계와 교단의 선거 체계가 마치 세상권력 집단의 선거와 비슷하다는 일각의 지적이 일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기독교에 선거라는 것이 왜 생겼을까? 에른스트 트뢸취가 좬기독교사회윤리좭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줬다.   에른스트 트뢸취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핍박을 당해 순교자가 속출해 숨어 다녔기에 소공동체를 이뤘고, 외형적 종교 형식이나 법보다는 성례전적 본질에 충실했다. 교회의 대표가 되면 순교를 당할 위기에 처하기에 좋아할 리가 없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당하기 전에 번민했고, 주기철 목사가 부인이 면회 오기 전에 타협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교회대표를 뽑았고, 뽑힌 사람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두려움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4세기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한 이후 중세시대로 접어 들면서 기독교 대표가 돈과 권력을 쥐고 있던 황제 주위에 다가가게 됐다.    그래서 얻어지는 이득이 많아져 대형화되기 시작했고,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종파끼리 경쟁하기 시작했다.  경쟁이 너무 심해져 공정하게 중앙 진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거제도가 생겼다. 그리고 중앙에 진출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교회법을 강화했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는 확연히 달랐다. 중세교회는 지나친 권력으로 성경의 권위 위에 군림했다. 그래서 르네상스와 함께 종교적 본질로 돌아가려는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중세로마교회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추후 한국교회는 중세로마가톨릭교회의 수직적 상향식 선거제도에서 탈피해 초대교회 유형인 수평적 순환식 선출제도로 변화돼야 한다. 이제 전국교단 선거제도도 초대교회 회복운동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금권선거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돈으로 표를 사려는 매표행위로 비난을 받아왔다. 이제는 교단을 바르게 이끌고 갈수있는 정책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른 교회상과 교단상을 정립해 갈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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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9-05
  •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수복, 교계 비상
    지난 15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반군이 수도 카불을 장악했다. 이곳은 과거 샘물교회 성도들이 살해됐던 곳이다. 이슬람국가들은 오랜 세월, 유대교인과 전쟁하면서 애꿎게 유대교인과 연결된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정권을 빼앗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정부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수복했다는 점이다. 이슬람교 원리주의에 젖어 있던 탈레반 반군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권을 전복시킨 미국을 돕기 위해 파병을 한 한국을 적대국이자 점령국으로 간주했다. 탈레반의 눈으로 볼 때는 자신들을 침략한 나라의 국교인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단체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했다. 이들은 이슬람과 다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타적 태도를 가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이 배척받고 있는 이유는 탈레반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불안한 아프간 현지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춰왔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나치에 의해 심하게 학대당하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출코자 수단을 강구했다. 이때부터 시오니즘은 더욱 격화됐고, 미국과의 연대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아랍권과는 마치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처럼 형성되어 갔다. 1970~80년대의 레바논·시리아 등 중동전을 비롯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대부분의 중동지역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탈레반 정권의 잔혹한 인권 유린에 대한 저항 세력과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지하자원 매장 이권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텔라반의 장악으로 인권 유린과 기독교 탄압등이 자행되고 있다. 평화가 도래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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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미래세대’ 세우는 ‘장로교총회’ 기대한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각 장로교단들이 9월이면 총회를 시작한다. 이번 총회는 무엇보다 코로나 방역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대형교단은 천명이 넘는 총대들이 모인다. 확진자가 매일 2천명이 나오는 상황 가운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 곳에 모인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각 교단별로 코로나 방역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제는 만에 하나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한다 해도 확진자가 단 1명이라도 나온다면 이는 장로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비난과 비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분산개회, 온라인 총회 등 새로운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거의 예외 없이 해마다 반복되는 장로교회 총회의 현실은 임원선거를 위해서 모인 듯 한 분위기다. 선거가 끝나면 현안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총대들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다. 전국에서 모인 총대들은 단지 ‘들러리’와 ‘거수기’가 된 셈이다.    물론 임원을 선출하는 것도 당연히 총회의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인 것은 분명하만 총회를 위한 총회장인가, 아니면 총회장을 위한 총회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단은 이제 외부의 요구와 요청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여성과 청년에게 총대권을 더 많이 부여하라는 요구, 과감한 개혁에 나서라는 요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펴라는 요구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여전히 이러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관습과 타성에만 젖어 있다면 교회의 위기는 더욱 가중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또 미래세대를 위한 실제적인 방향과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미래세대가 없는 교회, 미래세대가 없는 교단은 암울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다. 선거에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확고한 대책과 정책을 준비하는 총회의 모습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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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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