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0-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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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두리 소수자⑤] 유익한 고난
      인류 역사에 사람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천로역정>이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 존 번연이 12년 수감 생활 중에 감옥에서 쓴 책이다. 인류사에 최고의 음악이라고 꼽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야」도 헨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영감을 받아 쓰여 졌다. 그 위대한 54곡 전체를 26일 만에 작곡했으니, 하루에 2곡을 쓴 셈이다.   번연과 헨델은 자신들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들을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다. 특별히 헨델은 건강에도 큰 타격이 시작된 때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마비가 오면서,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여, 온수로 몇 시간씩 몸을 녹여야 했고, 오르간 앞에 앉아서 오랜 동안 손가락 재활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헨델은 그 고난의 시기 이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귀품있게 살았다. 공연 수익이 많았지만, 「메시아」를 통한 수익을 한 푼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시야 공연 수익금들을 모두 자선 단체와 병원에 기부했다고 한다. 어려운 중에도 작품을 쓸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대의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그런 헨델을 존경하며 높였다고 한다.   우리는 힘들 때마다, ‘문제를 넘으려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을 허락하셔서 그 때만 볼 수 있는 빛을 준비하신다. 뜻을 가지고 우리를 그런 형편에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려운 형편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해 보면 도움이 된다. 곤란할 때의 생각은 번민과 염려를 일으켜 마음을 더 복잡하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왜  그렇게 하시는 걸까? 나의 원하는 답만 찾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길,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질문을 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죄의 결과인가?’이다. 죄의 결과라면 회개하고, 고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된다. 세 번의 다른 시험을 통과하면, 세 개의 서로 다른 경험과 지혜가 쌓인다. 그러나 같은 시험을 세 번 겪으면, 같은 고생과 실수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탄이 확인하려고 하는 나의 ’순전함‘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욥 2:9). 거짓 증거로 억울한 입장인가? 반사적 반응과 구차한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며,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믿음을 잘 지켰다‘며 칭찬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에 참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선을 행했는데 고난을 받는다면, 악을 행하고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돌이키게 만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일까 살핀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사탄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방해하여 못되게 하려는 선한 일이 무엇인가?’ 해내야 한다. ‘나를 쳐서 교회와 가정에 주려는 피해가 무엇인가?’ 지켜야 한다. ‘잡아먹고 먹히는 영혼들이 누구인가?’ 구원과 경고를 선포해야 한다.   이 모든 사역들도 중요하지만, 고난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듬으신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믿음의 불순물이 걸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뜨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새롭게 다시 뵙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나는 가끔 말한다. “그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 때의 영성은 그립다.” 주님이 주신, 나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나를 사랑하사 가까이 부르시는 것이다. 아플수록, 외로울수록, 하나님만 더 분명히 바라는가? 좋은 때인 거, 맞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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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1
  • [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③-이건숙의
      화자 ‘나’는 그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심양을 거쳐 단동 시내를 경유해 압록강변의 신의주 근처에 당도한다. 그러나 신의주는 그 이상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고, 철조망 안은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학실이 아빠)에게 철조망 안으로 두 발을 들여 넣어 보라고 하였다. “여기가 바로 신의주입니다. 할아버지의 고향 땅입니다.…어서요. 여기가 바로 신의주 땅이라니까요.” 그 뒤의 상황 진전을 소설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노인의 팔을 강제로 잡아 끌어당겼다. 어서 철조망 밑으로 두 발을 넣으라고 재촉했다. 노란색이 살짝 도는 국방색 군복을 입고 붉은 테를 두른 군모를 쓴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총을 메고 다가왔다. 노인의 어디에 그런 날렵함이 숨어 있었을까. 잽싸게 양쪽 발을 철조망 밑으로 집어넣어 쿵쿵 디뎌 보고는 냅다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학실이 아빠, 도망가지 마세요. 괜찮아요. 북한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학실이 엄마 소식을 물어봐도 된다니까요. 나는 북한 경비병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고 노인이 던져버린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놀라 달아나는 할아버지 이상(以上)으로, 또 갑작스런 결과에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뒤쫓기 시작한 화자 ‘나’의 놀라움 이상으로, 우리 독자들도 함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굉장한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가 이 소설의 마지막 장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는 이 소설 초반에 이미 사실상의 복선이 깔림으로써 일종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의 서프라이즈 엔딩 효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비행기 안에서 할아버지가 아직도 못 미더워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꾸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대화의 장면에서 그 면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북한 땅을 밟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잡아가지 않을까. …자네 혹시 정보부에서 나온 정보원 아닌가?”   두 발로 북한의 신의주 땅을 밟아 보는 게 소원이었던 이 할아버지는, 그러나 실제로 그 땅을 밟는 순간 무엇인가 모를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팔순 노인이 달아난다고 해서 얼마나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심리적 공포감은 그를 한 발짝이라도 더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있다.   북한 경비병이 그를 잡으러 오는 것 같고, 혹시 이 동행 청년이 그(할아버지)로 하여금 북한 땅을 밟게 만든 다음 증거를 잡았다고 정보부로 연행할 것만 같기도 하고, 또 포로병 생활 때의 과거 악몽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그를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정이 아직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누구든 이 할아버지와 같은 불안한 기억 속에서 결코 헤어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이 노인의 고초를 통해, 우리가 어떤 국가적 환경(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해 준 이 작품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민족적 현실 문제에 그 메스를 들이대려고 한 기독교 현실주의(리얼리즘) 소설이라 하겠으며, 또한 통일 지향적 정신의 기독교 민족문학 작품으로 우리 기독교문학사에서 그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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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칼럼]그의 배는 상아같다
      아가 5장 14절부터 16절에서 신부 성도가 자랑하며 증거하는 신랑 예수님은 한미디로 가장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의 머리와 머리타래, 그의 눈, 그의 뺨을 자랑했다. 또 계속하여 그의 손은 녹보석 박힌 금고리 같다고 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손이 나 신부성도를 죄에서 영원 속죄구원 시켜주신 분이다.    그의 의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고 이끌어 주시어 하늘 영광 보좌 우편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또 그의 손은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와 일곱 영을 붙잡고 계신 손이시다. 즉 일곱 영을 부어 주시어 순교케 하시고 그 전에 환란 날 1260일 동안 재림하실 나의 신랑 예수 오심을 예언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금면류관 씌워 주시는 분이시다. 더욱이 그 영광을 하늘에서 계속 새롭게 더해주실 분이시다. 이는 그의 손이 녹보석 박힌 금고리 같다고 증거하는 바로 그것이다.   또 그의 배는 사파이어들을 입힌 빛나는 상아 같다고 하신다. 상아같이 썩지 않는 몸, 즉 부활체이신 신랑 예수님은 찬란한 영광을 입으신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또 그의 양 다리는 정금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고 그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수려하도다. 정금 받침대 위의 다리 같다함은 변함없으시고 신성,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존귀하신 주님이시다. 그의 발아래 모든 무릎이 꿇며 그의 원수들을 짓밟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주님 다리가 정금 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같다는 것이다. 그분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수려하도다. 주님의 외적 모습이 레바논 산 같이 듬직하고 엄위가 있으며 가장 고상하신 분이시다. 그의 내적 모습, 즉 나의 신랑 예수님의 내적 성품은 마치 백향목같이 수려하시니 오직 신(神) 만의 성품을 가지셨다. 즉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시고, 온유·겸손하시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1천 년간 아니 영원히 발하시는 분이시다.   또 그의 입은 지극히 달콤하니 참으로 그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도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영생의 말씀이니 이것이 달콤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신다. 그중에서도 첫째부활의 영광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주님의 입이 달콤하니 참으로 그 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나의 신랑이 되신 주님은 육적 신자들인 예루살렘 여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훌륭하시고 가장 뛰어나신 분으로서 나를 그분의 형상에 일치케 해주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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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1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종으로 수고하여 성화된 참 행복의 새 패러다임    성경은 모든 인류가 불순종한 아담의 후예들로 원죄를 갖고 태어난 죄인이며 영적 사망에 놓였음을 증거한다. 주께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죄인들을 사단에서 구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속사역의 십자가를 지셨다. 이를 갈라디아서 1장4~5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 밝히 증거한다. 죽으시고 부활을 나타내시어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구원자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신 이유와 목적이다. 새 언약이 도래된 그리스도의 출현,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오신 주를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이다. 이를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케 될 수 있는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고 하셨다. 이후 그리스도의 사신이 된 주의 제자들에게 화평케 하는 복음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구원의 도를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곧 주의 종들로 회복하실 새 언약이다.    곧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좁은 길로 들어오는 자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의 동행으로 구속이다. 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입게 하는 일에 참예임을 확증케 한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할 자들이 세상에 많기에 부르심의 목적을 담아 깨닫고 주의 자녀로 사는 전도의 몫을 찾아 행케 하심이다. 베드로전서 2장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주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임을 연계하여 깨닫고 주 안에 삶을 살게 하심이다.    그러기에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안에 다 들었느니라’ 하셨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라 하심이다. 영혼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한 종들로 몫을 배우고 행하게 하시어 기도와 말씀으로 선한 열매를 맺혀 가도록 이를 확증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한 주종의 관계를 갖고 부르심에 선한 뜻을 위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몫이다.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한 거듭나게 하심과 부르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뜻은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 주의 자녀로 회복하는 거룩한 일로써 착한 일이며 선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온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며 이 일에 참여가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도록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임을 확증케 한다. 이를 위해 거듭나게 하심이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심이라고 함이다. 곧 거듭나게 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쓰시기 위함임을 연계해 준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도록 하시는 주의 기쁘신 뜻에 순복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로서 주의 마음을 알고 주와 한영을 이룬 주의 백성들이 주를 닮아가는 여정임을 새긴다. 종들이 이를 알고 실현하여 주의 나라가 확장되고 주의 백성들이 많아지도록 서로 사랑을 하며 부르신 목적대로 충성이다. 주와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기에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한 일에 행복함을 갖고 복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선한 일꾼들로 견인하신다. 구속사역에 참예함으로 성화된 새 패러다임의 행복이며 은혜의 여정에 말씀에 순복하케 하신 주 시링임을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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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2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이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가치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 중 보화임을 마태복음 13장 44절은 증거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하신 비유이다. 보화로 발견과 그 소유하는 비유를 통해 천국의 소중성에 대한 새 가치관을 찾도록 교훈한다. 성경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살 수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영생을 주시는 유일신이신 주님과의 만남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발견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열심하는 천국백성으로 선을 이루어 가도록 교훈한다. 그러기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기록목적을 깨닫게 하심이다. 나그네의 여정에 기쁨과 감사로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는 새 가치관의 선함을 얻는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를 아는 자로서의 자존감의 상승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새 생명을 얻게하여 여호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이김으로 영원성이다. 곧 유다서 1장 1절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주의 종들의 정체성이다. 이들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임을 확증케 한다. 요한계시록 14장 3~5절 “이 사람들은 ~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는 증거와 같은 착함이다. 곧 새 가치관을 가진 거룩한 자들로 주의 나라 확장을 실현하는 일에 충성케 한다. 그리하여 주께서 기록하신 말씀 안에 거하게 된 자들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는 지식이 앎이 되어 승리하는 성화이다. 이는 골로새서 2장 3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는 확증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1장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하심과 같은 가치관의 형성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하는 자로써 주를 사랑한 자임을 확증케 한다. 주로 인한 고난은 마땅히 받아야 할 나그네 여정임을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앎의 참예로 충성과 섬김에 대한 연계이다. 주의 종으로서 몫을 하기위한 일꾼의 지혜이다. 곧 주께서 본을 보이심과 같이 사람 살리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의 목적을 알고 행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도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이전보다 더 주를 사랑하는 실천임을 확증케 한다. 누구든지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임을 함께 확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복으로 인하여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케 되어 살아도 주의 것으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도록 주를 사랑하는 자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믿음의 성화이다. 주는 하나님이 되시고 종들은 주의 백성이 됨이기에 주종의 관계를 성립한 일꾼들의 존재목적과 정체성의 연계이다. 곧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성령의 내주로 말씀 안에 거하여 평안에 평안을 덧입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충성과 이김의 영원성의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말씀을 상고하는 목적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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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칼럼 14]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생태적 삶의 실천
    국민일보 김재중 부국장  성경이나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왔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는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동물을 위해 방주를 설계했다.  하나님은 노아의 희생으로 만든 방주를 이용해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고 이 땅을 새롭게 하셨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노아와 같이 녹색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생태학적 창조론과 통전적 생명선교론을 회복하고 목회적으로는 녹색교회, 생명목회, 생태 영성 훈련, 생태 환경교육 등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태적 영성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서 생태적 관점과 태도를 배워 삶으로 실천하도록 이끄는 신앙적 힘이다. 즉,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의 생명 그물망 안에 연결된 존재이며 이 그물망 안에서 각각의 존재는 상호 연계되어 서로를 살린다는 믿음이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일상에서 생태적 삶을 실천할 때 지구의 창조적 질서를 보전할 수 있다.    생태적 삶의 실천은 거창한 게 아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레이스벨은 올해 100% 생분해성 수지 원료로 만든 달걀 포장지를 사용하는 ‘부활절 그린 캠페인’을 펼쳤다. 일반 비닐 포장지는 분해되는 데 100년 이상 걸리지만, 생분해 비닐봉지는 180일이면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건강한 자연환경을 만들기 위한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다. 교회들이 주보나 전도지를 만들 때 재생 종이를 사용하는 것도 생태적 삶의 실천이다.     서울의 한 교회는 1층 주차장에 전기자동차 급속 충전기를 설치하고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였다. 인근에 전기차를 위한 급속 충전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충전시설을 지역에 제공함으로써 탄소중립에 동참하고 있다.     최근 기독기업 이엔포스가 교회의 전기요금을 평균 10% 절감할 수 있는 절전 장비를 개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엔포스의 절전 장비 ‘포스’는 교회의 분전함에 설치해 사용하는 것으로, 설치비 없이 렌탈 방식이어서 초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렌탈비는 줄어든 전기료의 50%를 가져가기 때문에 교회의 부담은 없다. 한국교회의 에너지를 절감해 미자립교회와 선교지를 돕고, 저탄소 녹색 성장을 실천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탄소포인트제(에코마일리지)에 가입하는 것이 친환경 실천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가정에서 에너지 사용량(전기·수도·도시가스) 절감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 실적에 따라 탄소포인트를 산정하고 환경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전 국민 온실가스 감축 실천 프로그램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건물 에너지효율 개선 사업은 교회가 주목할 만하다. 교회가 적극 협력하면 시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민·관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 중심적인 역할을 앞장서 실천할 때 창조 생태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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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두리 소수자⑤] 유익한 고난
      인류 역사에 사람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천로역정>이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 존 번연이 12년 수감 생활 중에 감옥에서 쓴 책이다. 인류사에 최고의 음악이라고 꼽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야」도 헨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영감을 받아 쓰여 졌다. 그 위대한 54곡 전체를 26일 만에 작곡했으니, 하루에 2곡을 쓴 셈이다.   번연과 헨델은 자신들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들을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다. 특별히 헨델은 건강에도 큰 타격이 시작된 때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마비가 오면서,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여, 온수로 몇 시간씩 몸을 녹여야 했고, 오르간 앞에 앉아서 오랜 동안 손가락 재활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헨델은 그 고난의 시기 이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귀품있게 살았다. 공연 수익이 많았지만, 「메시아」를 통한 수익을 한 푼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시야 공연 수익금들을 모두 자선 단체와 병원에 기부했다고 한다. 어려운 중에도 작품을 쓸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대의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그런 헨델을 존경하며 높였다고 한다.   우리는 힘들 때마다, ‘문제를 넘으려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을 허락하셔서 그 때만 볼 수 있는 빛을 준비하신다. 뜻을 가지고 우리를 그런 형편에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려운 형편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해 보면 도움이 된다. 곤란할 때의 생각은 번민과 염려를 일으켜 마음을 더 복잡하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왜  그렇게 하시는 걸까? 나의 원하는 답만 찾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길,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질문을 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죄의 결과인가?’이다. 죄의 결과라면 회개하고, 고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된다. 세 번의 다른 시험을 통과하면, 세 개의 서로 다른 경험과 지혜가 쌓인다. 그러나 같은 시험을 세 번 겪으면, 같은 고생과 실수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탄이 확인하려고 하는 나의 ’순전함‘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욥 2:9). 거짓 증거로 억울한 입장인가? 반사적 반응과 구차한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며,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믿음을 잘 지켰다‘며 칭찬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에 참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선을 행했는데 고난을 받는다면, 악을 행하고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돌이키게 만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일까 살핀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사탄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방해하여 못되게 하려는 선한 일이 무엇인가?’ 해내야 한다. ‘나를 쳐서 교회와 가정에 주려는 피해가 무엇인가?’ 지켜야 한다. ‘잡아먹고 먹히는 영혼들이 누구인가?’ 구원과 경고를 선포해야 한다.   이 모든 사역들도 중요하지만, 고난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듬으신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믿음의 불순물이 걸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뜨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새롭게 다시 뵙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나는 가끔 말한다. “그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 때의 영성은 그립다.” 주님이 주신, 나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나를 사랑하사 가까이 부르시는 것이다. 아플수록, 외로울수록, 하나님만 더 분명히 바라는가? 좋은 때인 거, 맞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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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1
  • [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③-이건숙의
      화자 ‘나’는 그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심양을 거쳐 단동 시내를 경유해 압록강변의 신의주 근처에 당도한다. 그러나 신의주는 그 이상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고, 철조망 안은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학실이 아빠)에게 철조망 안으로 두 발을 들여 넣어 보라고 하였다. “여기가 바로 신의주입니다. 할아버지의 고향 땅입니다.…어서요. 여기가 바로 신의주 땅이라니까요.” 그 뒤의 상황 진전을 소설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노인의 팔을 강제로 잡아 끌어당겼다. 어서 철조망 밑으로 두 발을 넣으라고 재촉했다. 노란색이 살짝 도는 국방색 군복을 입고 붉은 테를 두른 군모를 쓴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총을 메고 다가왔다. 노인의 어디에 그런 날렵함이 숨어 있었을까. 잽싸게 양쪽 발을 철조망 밑으로 집어넣어 쿵쿵 디뎌 보고는 냅다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학실이 아빠, 도망가지 마세요. 괜찮아요. 북한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학실이 엄마 소식을 물어봐도 된다니까요. 나는 북한 경비병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고 노인이 던져버린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놀라 달아나는 할아버지 이상(以上)으로, 또 갑작스런 결과에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뒤쫓기 시작한 화자 ‘나’의 놀라움 이상으로, 우리 독자들도 함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굉장한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가 이 소설의 마지막 장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는 이 소설 초반에 이미 사실상의 복선이 깔림으로써 일종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의 서프라이즈 엔딩 효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비행기 안에서 할아버지가 아직도 못 미더워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꾸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대화의 장면에서 그 면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북한 땅을 밟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잡아가지 않을까. …자네 혹시 정보부에서 나온 정보원 아닌가?”   두 발로 북한의 신의주 땅을 밟아 보는 게 소원이었던 이 할아버지는, 그러나 실제로 그 땅을 밟는 순간 무엇인가 모를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팔순 노인이 달아난다고 해서 얼마나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심리적 공포감은 그를 한 발짝이라도 더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있다.   북한 경비병이 그를 잡으러 오는 것 같고, 혹시 이 동행 청년이 그(할아버지)로 하여금 북한 땅을 밟게 만든 다음 증거를 잡았다고 정보부로 연행할 것만 같기도 하고, 또 포로병 생활 때의 과거 악몽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그를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정이 아직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누구든 이 할아버지와 같은 불안한 기억 속에서 결코 헤어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이 노인의 고초를 통해, 우리가 어떤 국가적 환경(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해 준 이 작품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민족적 현실 문제에 그 메스를 들이대려고 한 기독교 현실주의(리얼리즘) 소설이라 하겠으며, 또한 통일 지향적 정신의 기독교 민족문학 작품으로 우리 기독교문학사에서 그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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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칼럼]그의 배는 상아같다
      아가 5장 14절부터 16절에서 신부 성도가 자랑하며 증거하는 신랑 예수님은 한미디로 가장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의 머리와 머리타래, 그의 눈, 그의 뺨을 자랑했다. 또 계속하여 그의 손은 녹보석 박힌 금고리 같다고 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손이 나 신부성도를 죄에서 영원 속죄구원 시켜주신 분이다.    그의 의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고 이끌어 주시어 하늘 영광 보좌 우편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또 그의 손은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와 일곱 영을 붙잡고 계신 손이시다. 즉 일곱 영을 부어 주시어 순교케 하시고 그 전에 환란 날 1260일 동안 재림하실 나의 신랑 예수 오심을 예언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금면류관 씌워 주시는 분이시다. 더욱이 그 영광을 하늘에서 계속 새롭게 더해주실 분이시다. 이는 그의 손이 녹보석 박힌 금고리 같다고 증거하는 바로 그것이다.   또 그의 배는 사파이어들을 입힌 빛나는 상아 같다고 하신다. 상아같이 썩지 않는 몸, 즉 부활체이신 신랑 예수님은 찬란한 영광을 입으신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또 그의 양 다리는 정금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고 그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수려하도다. 정금 받침대 위의 다리 같다함은 변함없으시고 신성,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존귀하신 주님이시다. 그의 발아래 모든 무릎이 꿇며 그의 원수들을 짓밟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주님 다리가 정금 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같다는 것이다. 그분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수려하도다. 주님의 외적 모습이 레바논 산 같이 듬직하고 엄위가 있으며 가장 고상하신 분이시다. 그의 내적 모습, 즉 나의 신랑 예수님의 내적 성품은 마치 백향목같이 수려하시니 오직 신(神) 만의 성품을 가지셨다. 즉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시고, 온유·겸손하시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1천 년간 아니 영원히 발하시는 분이시다.   또 그의 입은 지극히 달콤하니 참으로 그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도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영생의 말씀이니 이것이 달콤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신다. 그중에서도 첫째부활의 영광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주님의 입이 달콤하니 참으로 그 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나의 신랑이 되신 주님은 육적 신자들인 예루살렘 여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훌륭하시고 가장 뛰어나신 분으로서 나를 그분의 형상에 일치케 해주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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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1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종으로 수고하여 성화된 참 행복의 새 패러다임    성경은 모든 인류가 불순종한 아담의 후예들로 원죄를 갖고 태어난 죄인이며 영적 사망에 놓였음을 증거한다. 주께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죄인들을 사단에서 구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속사역의 십자가를 지셨다. 이를 갈라디아서 1장4~5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 밝히 증거한다. 죽으시고 부활을 나타내시어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구원자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신 이유와 목적이다. 새 언약이 도래된 그리스도의 출현,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오신 주를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이다. 이를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케 될 수 있는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고 하셨다. 이후 그리스도의 사신이 된 주의 제자들에게 화평케 하는 복음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구원의 도를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곧 주의 종들로 회복하실 새 언약이다.    곧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좁은 길로 들어오는 자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의 동행으로 구속이다. 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입게 하는 일에 참예임을 확증케 한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할 자들이 세상에 많기에 부르심의 목적을 담아 깨닫고 주의 자녀로 사는 전도의 몫을 찾아 행케 하심이다. 베드로전서 2장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주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임을 연계하여 깨닫고 주 안에 삶을 살게 하심이다.    그러기에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안에 다 들었느니라’ 하셨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라 하심이다. 영혼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한 종들로 몫을 배우고 행하게 하시어 기도와 말씀으로 선한 열매를 맺혀 가도록 이를 확증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한 주종의 관계를 갖고 부르심에 선한 뜻을 위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몫이다.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한 거듭나게 하심과 부르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뜻은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 주의 자녀로 회복하는 거룩한 일로써 착한 일이며 선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온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며 이 일에 참여가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도록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임을 확증케 한다. 이를 위해 거듭나게 하심이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심이라고 함이다. 곧 거듭나게 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쓰시기 위함임을 연계해 준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도록 하시는 주의 기쁘신 뜻에 순복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로서 주의 마음을 알고 주와 한영을 이룬 주의 백성들이 주를 닮아가는 여정임을 새긴다. 종들이 이를 알고 실현하여 주의 나라가 확장되고 주의 백성들이 많아지도록 서로 사랑을 하며 부르신 목적대로 충성이다. 주와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기에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한 일에 행복함을 갖고 복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선한 일꾼들로 견인하신다. 구속사역에 참예함으로 성화된 새 패러다임의 행복이며 은혜의 여정에 말씀에 순복하케 하신 주 시링임을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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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2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이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가치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 중 보화임을 마태복음 13장 44절은 증거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하신 비유이다. 보화로 발견과 그 소유하는 비유를 통해 천국의 소중성에 대한 새 가치관을 찾도록 교훈한다. 성경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살 수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영생을 주시는 유일신이신 주님과의 만남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발견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열심하는 천국백성으로 선을 이루어 가도록 교훈한다. 그러기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기록목적을 깨닫게 하심이다. 나그네의 여정에 기쁨과 감사로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는 새 가치관의 선함을 얻는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를 아는 자로서의 자존감의 상승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새 생명을 얻게하여 여호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이김으로 영원성이다. 곧 유다서 1장 1절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주의 종들의 정체성이다. 이들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임을 확증케 한다. 요한계시록 14장 3~5절 “이 사람들은 ~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는 증거와 같은 착함이다. 곧 새 가치관을 가진 거룩한 자들로 주의 나라 확장을 실현하는 일에 충성케 한다. 그리하여 주께서 기록하신 말씀 안에 거하게 된 자들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는 지식이 앎이 되어 승리하는 성화이다. 이는 골로새서 2장 3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는 확증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1장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하심과 같은 가치관의 형성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하는 자로써 주를 사랑한 자임을 확증케 한다. 주로 인한 고난은 마땅히 받아야 할 나그네 여정임을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앎의 참예로 충성과 섬김에 대한 연계이다. 주의 종으로서 몫을 하기위한 일꾼의 지혜이다. 곧 주께서 본을 보이심과 같이 사람 살리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의 목적을 알고 행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도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이전보다 더 주를 사랑하는 실천임을 확증케 한다. 누구든지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임을 함께 확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복으로 인하여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케 되어 살아도 주의 것으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도록 주를 사랑하는 자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믿음의 성화이다. 주는 하나님이 되시고 종들은 주의 백성이 됨이기에 주종의 관계를 성립한 일꾼들의 존재목적과 정체성의 연계이다. 곧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성령의 내주로 말씀 안에 거하여 평안에 평안을 덧입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충성과 이김의 영원성의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말씀을 상고하는 목적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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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칼럼 14]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생태적 삶의 실천
    국민일보 김재중 부국장  성경이나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왔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는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동물을 위해 방주를 설계했다.  하나님은 노아의 희생으로 만든 방주를 이용해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고 이 땅을 새롭게 하셨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노아와 같이 녹색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생태학적 창조론과 통전적 생명선교론을 회복하고 목회적으로는 녹색교회, 생명목회, 생태 영성 훈련, 생태 환경교육 등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태적 영성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서 생태적 관점과 태도를 배워 삶으로 실천하도록 이끄는 신앙적 힘이다. 즉,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의 생명 그물망 안에 연결된 존재이며 이 그물망 안에서 각각의 존재는 상호 연계되어 서로를 살린다는 믿음이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일상에서 생태적 삶을 실천할 때 지구의 창조적 질서를 보전할 수 있다.    생태적 삶의 실천은 거창한 게 아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레이스벨은 올해 100% 생분해성 수지 원료로 만든 달걀 포장지를 사용하는 ‘부활절 그린 캠페인’을 펼쳤다. 일반 비닐 포장지는 분해되는 데 100년 이상 걸리지만, 생분해 비닐봉지는 180일이면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건강한 자연환경을 만들기 위한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다. 교회들이 주보나 전도지를 만들 때 재생 종이를 사용하는 것도 생태적 삶의 실천이다.     서울의 한 교회는 1층 주차장에 전기자동차 급속 충전기를 설치하고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였다. 인근에 전기차를 위한 급속 충전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충전시설을 지역에 제공함으로써 탄소중립에 동참하고 있다.     최근 기독기업 이엔포스가 교회의 전기요금을 평균 10% 절감할 수 있는 절전 장비를 개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엔포스의 절전 장비 ‘포스’는 교회의 분전함에 설치해 사용하는 것으로, 설치비 없이 렌탈 방식이어서 초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렌탈비는 줄어든 전기료의 50%를 가져가기 때문에 교회의 부담은 없다. 한국교회의 에너지를 절감해 미자립교회와 선교지를 돕고, 저탄소 녹색 성장을 실천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탄소포인트제(에코마일리지)에 가입하는 것이 친환경 실천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가정에서 에너지 사용량(전기·수도·도시가스) 절감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 실적에 따라 탄소포인트를 산정하고 환경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전 국민 온실가스 감축 실천 프로그램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건물 에너지효율 개선 사업은 교회가 주목할 만하다. 교회가 적극 협력하면 시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민·관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 중심적인 역할을 앞장서 실천할 때 창조 생태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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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22
  • 기적은 오늘도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그 손에서 쇠사슬이 벗어지더라.(행12:5~7) 바울과 실라를 깊은 옥중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매인 것이 다 벗겨졌다.(행16:24~26) 1952년 6월 25일 전쟁중에 군목으로 군 복무 중이시던 아버지는 빨치산 포로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한 사람씩 포승줄로 손목을 묶인 채 산속으로 이동하였는데, 그날 총살당할 것을 예감하며 찬양을 불렀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바로 그때 그 마을의 표지판을 보았다. 신 광 ( 神 光 ). 하나님의 빛.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하나님의 빛이 비치었고 마음이 뜨거워지며 힘차게 찬양을 하였다. 잠시 후 “모두 그 자리에 서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이라고 직감했다. 바로 그 순간, 또 하나의 음성이 들렸다. “ 운 !  상 !  아 ! 뛰어라 ~ !!!” 누군가가 앞으로 내달릴 수 있게 오른쪽 등을 힘있게 쳐 주었다. 당시 포로가 십여 명이 넘었고, 양 손목은 두꺼운 줄로 묶였으며 앞뒤로 줄줄이 엮여 한 줄로 끌려가고 있었는데, 어떻게 포승줄이 풀렸는지, 등 뒤에서 수없이 발사되는 총소리를 들으며 무조건 산속으로 뛰었다. 머나먼 길을 헤치고 한밤중에 해골이 다되어 돌아오셨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바울의 기적은 1952년 그 가을에도 그리고 오늘도 계속된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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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22
  • [칼럼 13] 기후 위기와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삶의 변화
    장신대학교 신현태 교수  기후 위기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극단적인 기후 현상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보다 빈번히 발생하는 폭염과 폭우, 극심한 가뭄, 강해진 태풍과 홍수 등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자연재해와 인명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제 기후 위기는 모든 창조물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긴박한 문제이며 인류가 해결해야 할 숙제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기후 위기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며 성경에서는 어떠한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 특히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사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정체성과 사회 속에서의 역할을 구성해 왔다. 현재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성경적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개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의 영역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토대를 설립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장 15절~20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또는 모든 “피조물”을 화해시키는 유일하신 그리스도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회복과 화해가 시작되는 사건이며 이러한 화해의 완성은 미래적이며, 비밀 안에 감추어져 있다(20절).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모든 피조물의 해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인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로마서 8장 18절~25절에서는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운명공동체임을 알릴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선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자녀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분명히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14절에서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고 있다.     신약학자 로버트 제웨트(Robert Jewett)는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생활 습관(생태친화적인 삶의 방식)과 개정된 윤리(타자 중심적인 삶의 윤리)는 생태 체계를 회복하기 시작하고 잘못된 불균형과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기에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을 고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비록 창조세계의 궁극적인 해방과 구원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겠지만 사도바울은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창조세계를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구원의 드라마에서 단순한 엑스트라가 아닌 인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이 구원의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공동주연이다. 창조세계의 회복과 화해에 대한 강조를 통해 지나치게 인류를 향해 기울였던 무게추를 옮겨, 이제는 우주적 구원을 고려한 기후 위기 대응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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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사랑의 확증 (롬5:7)
    우리의 영은 하나님이 주셨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친구라 불러주시며, 하나님이 우리 속에 살게 하신 성령이 질투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보셨는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여,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할아버지 뒷모습을 똑 닮았어.” 걸어가는 아들을 보며 권사님들이 말씀하신다. 등이 두텁고 약간 앞으로 굽히며 걷는 모습이 똑같다.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 찡그리는 눈짓, 말할 때 손 모양, 언뜻 본 옆 모습이 닮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온 땅을 다스리게 하자. 피조물 중에서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격적 관계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것을 주는 주체의 모습을 닮아간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자녀가 부모를 닮아 그 모습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하며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행복하다. 하나님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뻐하셨으면 좋겠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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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0
  • [향유옥합] 스토리의 미학
       미학을 연구하다 보면 그 방대한 예술의 스펙트럼과 내용에 갈피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바나나를 테이프로 미술과 전시벽에 붙여 놓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되고, 2억이라는 고가에 팔리는 일들을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러나 고민하고 공부하고 경험을 쌓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세계’를 이해하는 순간이 오는데, 이 과정 또한 미학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내용’을 알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개개인에게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터무니없고 어처구니가 없어보이는 예술 작품이 인정받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작품에 심겨진 ‘내용’ 또는 ‘개념,’ 즉, ‘스토리’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은 ‘개념’ 예술의 시대이며, ‘스토리’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중세 시대 시의 미학을 정립했던 빈사우프의 고드프리(Godfrey)는 일찍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시라는 예술에 대해 “마음, 귀, 그리고 관습에 의해서 판단되게 하라”고 말했다. 시의 미학은 운율로 귀를 즐겁게 하고, 상징적 ‘내용’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 ‘내용’은 아름다운 스토리여야만 하며, 이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된다는 것이 당시 시학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시뿐 아니라 보이는 예술의 가시적(可視的)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非可視的) 아름다움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보이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지속되기 힘든 성질이 있으며 그 깊이에 한계가 있지만, 그 안에 스토리가 있는 작품의 아름다움은 그 유기적 관계로 인해 더 깊고 밝게 빛나는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면은 아름답지 않고 더럽게 내버려둔 채 겉만 치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마 23:27). “먼저 안을 깨끗이” 하면 “겉도 깨끗”해지는 것이 예수가 가르쳐주신 ‘아름다움의 순서’인 것이다(마 23:26).     성경은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자 축복임을 말하고 있다(빌 1:23). 죄로 타락한 인간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중심을 바꾸게 되는 계기, 그 엄청난 사건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요 3:3).     그리고 그 거듭남의 사건 후에도 우리는 ‘순례의 길’을 가며 끊임없이 연습하고 단련해야 하는데, 그 중요한 훈련은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스토리를 보는 훈련’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고난들 속에 새겨지는 ‘그의 스토리(His Story)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바로, 그 삶 속에 ‘진정성 있는 내용’을 지니는 것이다.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의 주권자가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여 죄인을 구하시고, 그 하찮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소통해 나가는 ‘그의 스토리’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언어와 행동과 매일의 삶의 흔적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상실의 연속이며, 때로는 탄식 가득한 눈물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생명을 구하는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일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려퍼질 것이다.    아직 아름답지 않은 자, 겉만 아름다운 자, 아름답고 싶은 자, 먼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들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총신대 객원교수,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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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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