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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안호선교사의 선교사를 위한 서평(1)
    김기현<글쓰는 그리스도인>(성서유니온선교회, 2009)     들어가기(서론) “그리스도인에게 작가(author)가 된다는 것은 창조주(Author)께서 행하신 일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이다. 그렇다면 모든 예수쟁이는 창조주께서 행하신 일을 글쓰기를 통해서 이어가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공동체다. 그것이 예수를 살아내는 방법이다. 교회는 예수를 살고 말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기록한다.”(책 뒤 표지)   더구나 신구약 성경은 대부분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삶의 현장에서 기록되었다. 신약성경 27권의 거의 절반은 모두 선교현장에서 쓴 서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사역하는 모든 선교사는 이미 글쓰기의 DNA를 갖고 사는 자들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선교보고, 선교서신을 쓰는 것도 너무 버거워서 할수만 있으면 글쓰기를 피할려고 온갖 핑개거리를 찾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이 책의 저자는 C.S. 루이스의 안목과 필립 얀시의 가슴을 지닌 기독교작가이다. 김기현 목사(부산 수정로침례교회)는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의 제자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침례교신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였다(Ph.D). <공격적 책읽기와 공감적 책읽기(SFC)>, <가룟 유다 딜레마(IVP)>, <예배, 인생최고의 가치(JOY)> 등의 저자이다. 이 책은 목차만 읽어도 이 책이 얼마나 매력적인 책인지 가늠할 수 있다. 2부 10장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제1부 왜 글을 쓰는가?  1장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자서전과 기도문. 2장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일기. 3장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서평. 4장 글쓰기는 관계를 소통한다: 편지. 5장 글쓰기는 세상을 변혁한다: 컬럼 제2부 어떻게 글을 쓰는가? 6장 독서: 읽고 또 읽으라. 7장 메모: 머리가 아니라 손을 믿으라. 8장 개요: 물 흐르듯이 구상하고 촘촘히 구성하라. 9장 문장: 그냥 당장 쓰라. 10장 퇴고: 사랑하니까   이제사 고백하건데 서평자(필자)는 10년전에 김기현 목사(저자)의 글쓰는 그리스도인을  읽은후에 서평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등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서평을 하고자한다.    왜 무엇을 쓰는가? 어떻게 쓸것인가? (저자의 프롤로그)   “유진 피터슨은 신자의 공동체를 “성경을 먹는 거룩한 공동체”라 지칭했다. 이 공동체의 독서법은 아예 성서를 통째로 집어 삼킨다. “단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먹으라”. 왜 그런가?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성서를 먹는다는 말은 성서를 암송하고, 그렇게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는 공동체를 창조하고, 성서를 먹는 공동체는 성서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실한 제자를  양육한다.” (p. 13, 필자 강조) --> '너는 받은 것을 먹으라'(겔3:1). 성경말씀은 먹어야 한다.   “성서와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서를 먹는 거룩한 교회와 제자되기 위함이라면, 글을 쓰고 책을 짓는 목적은 무엇인가? 왜 글으 쓰는가? 피터슨이 사도 요한으로 독서 방법과 목적을 알려주었듯이 나도 요한에게서 그리스도인의 글 쓰는 목적을 찾는다 ...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의 생명을 얻고 누리게 하는 것이듯, 무릇 그리스도인의 글쓰기도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증언하고 표현하며, 그 글을 읽는 이들도 생명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p. 14, 필자 강조)    “글은 결국 그 사람이다. 무릇 모든 책은 저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책과 글은 쓰는 이의 인격이요 얼굴이다. 과장하여 쓸 것도, 부끄럽다고 감출 것도 없다 ... 글쓰기는 내 속의 나, 이런 저런 가면 속에 감추어진 맨얼굴 그대로의 나를 찾는 도구다.” (p. 15, 필자 강조)   “왜, 무엇을 쓸 것인가? 이 말은 곧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글로 쓰면 된다. 사도요한은 우리더러 목격자라 했다. 내가 만난 하나님과 내가 겪었던 사건을 본 대로 진솔하게 진술하면 그만이다. 목격자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순교의 각오와 결단으로 증언하는 증인이다.” (p. 16, 필자 강조) --> 예수쟁이의 글쓰기도 순교의 각오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글쓰기는 어떻게 쓸것인가?    글쓰기 인생의 3가지 기쁨   “어떻게 쓸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그가 누구를 독자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작가는 책과 담 쌓고 사는 이들까지 책에 끌리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 영화나 책과 무관하던 아저씨와 아줌마들도 보고 읽을 때 그 영화는 대박이 되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나 역시 독자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p. 17, 필자 강조) -->  실제로 김기현 목사의 글쓰기는 다방면이다. 참 부럽다.   --> 선교현장의 선교사가 정기적으로 쓰는 선교서신과 선교보고의 대상은 파송/후원교회이다. 선교현장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과 경험하였던 선교현장의 사건을 진솔하게 기록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쉽게 쓰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쓰려고 애쓴다. 쉽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 쉽다는 것이 가볍다는 것도 아니고, 비논리와 동의어도 아니다. 쉬우면서도 얼마든지 논리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명령한다. “너는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 읽을 수 있게 하여라”(합2:2). 큼직하게 적으라는 말이다. 동시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쓰라는 의미도 내표한다. 논리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쓰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p. 19, 필자 강조) --> 사실상 글쓰기의 요체는 쉽게,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에 맞게 써야한다. 초보자는 이런 글쓰기의 기본을 공부해야 한다. 대개 목회자, 선교사들은 매주 설교문을 작성하면서도 이런 글쓰기의 기본을 무시하고 자기가 지금까지 해오던 습관을 따라서 너무 쉽게 쓰는 것 같다.   “안정효에 따르면, 글쓰기 인생에는 세 가지 기쁨이 있다. 그 첫째는 자유다. 정시 출근하는 직장인과 달리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많은 부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음, 정년퇴직이 없다. 상상력이 고갈되지 않는다면, 손가락을 움직일 힘만 있다면, '전직'(前職) 작가라는 소리 듣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언제가까지나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마지막이 존경이다. 단서는 있다. 존경받을 만한 작품을 남겨야 한다... 그리스도인 작가의 기쁨은 말과 글로 세상의 생명을 만들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데 있다” (p. 20, 필자 강조) --> 예수쟁이의 글쓰기는 따라서 구원의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작가(author)가 된다는 것은 창조주(Author)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창조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말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이 되시고, 기록된 언어와 그 집을 자기 존재로 삼으셨다. 그것이 성서이다. 하나님은 성서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말과 글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은 말과 글인 성서가 되셨고, 성서다. 하나님은 말이고, 글이다. 작가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한다. (pp. 20, 21, 필자 강조) --> 예수쟁이 작가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자이다. 얼마나 가슴뛰는 일인가?   “왜 글을 쓰는가? 아니 왜 글을 써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리 하고 계시니까. 그리하라 하시니까. 내 안에 주체하지 못할 생명과 기쁨이 있으니까. 그리고 글 쓰는 것이 내게 생명이고 기쁨이니까. 내 글을 읽는 소수의 독자들이 내가 누렸던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니까.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p. 21) --> 필자도 매주 1편의 서평을 쓰는 기쁨이 충만하다. 서평하는 책의 저자의 깊은 속 마음과 뜻을 알아차리며 대화하는 착각을 갖기도 한다. 잔잔한 기쁨이 넘친다. 매주 쓰는 내 서평을 꼼꼼히 읽는 상당수의 전세계의 선교현장의 선교사들도 내가 누렸던 그 무엇을 경험한다는 문자들이 큰 기쁨이다.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참 영성은 '영을 몸으로 살아 내는 것'   “영과 몸이 온전히 통합된 삶이 영성이다. 영성 깊은 삶은 육체를 부정하는 삶이 아니며, 육체를 탐닉하는 것도 아니다. 육체 없는 영혼의 신비를 추구하지도, 영혼 없는 육체의 방탕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혼과 몸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양자 없이는 누구도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영이 있는 몸, 몸이 있는 영이 참 인간이듯, 영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 다시 말해 영적인 것을 육체로 풀어내는 것이 참 영성이다.” (p. 25, 필자 강조)   “리처드 포스터는 우리 시대의 영적인 질병이 바로 피상성이라고 진단했다.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피상성은 “시끄러움과 조금함과 혼잡함을 통하여 크게 역사한다.” (p. 28, 필자 강조) --> 오늘날 개신교는 너무나 경박하다. 시끄러움/조급함/혼잡함! 이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대부분의 복음송 찬양들은 '입술의 열매'에만 머무는 것같다. 무엇보다도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깊이 없는 설교들이 난무한다. 깊은 영성에서 길어 올린 생명력 넘치는 신선한 설교가 그립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사셨고, 그것이 육화의 본질이듯, 영이 몸이 되어 사는 것이 영성의 본령이라면 글쓰기는 영성의 문자적 표현이요, 영성 훈련의 방편이 된다는 뜻이다. 글이 된 삶, 즉 내 삶이 글이 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자서전과 기도문이다. 무릇 모든 글쓰기가  나름 영성적 차원을 지니고 있지만 유독 자서전과 기도문은 영성의 요체가 된다.” (p. 29, 필자 강조). --> 삶이 곧 글이다. 글쓰기는 영성의 문자적 표현이라는 말에 100% 공감한다.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자의 설교와 기도는 기름부음이 넘칠 것이다. 주여! 안팍이 갖은 삶 살게하소서!     “글쓰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면 자기가 가장 잘 알거나, 관심이있거나, 배경 지식이 풍부한 분야에서 글쓰기를 훈련하는 것이 좋다. 자기 이야기만큼 편안하고 만만한 주제는 없다.” (p. 30, 필자 강조)   “그러므로, “전기는 최상의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최상의 신학이고, 기록하는 글쓰기는는 최상의 영성 훈련이 될 수 있다.” (p. 31) --> 그래서 필자는 전기, 자서전을 즐겨 읽는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변화를 발견하게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나누어 주게 된다. 기도문과 자서전 쓰기로 앝음에서 깊이로, 속도에서 느림으로, 조급함에서 인내로 성숙하는 영성에 다다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글쓰기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p. 38-39, 필자 강조)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영성)일기로 내면 정돈!    “사람은 생각한대로 행동하고, 행동하는 대로 생각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하여 사울을 닮지 않고, 하나님을 닮게 되었다. 묵상으로 내면을 채우고, 시를 써서 내면을 정화하였다. 그것이 사울과 비교되는 다윗의 승리의 원동력이다.” (p. 45, 필자 강조)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글쓰기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통로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성찰하는 도구이자 치유하는 수단이다. “단 한 문장이라도, 서툰 글솜씨로도, 아무렇게나 꺼적인 낙서로도 치유의 효과가 나타”난다. 글쓰기를 통해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면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온갖 상처들로 갈가리 찟겨진 내면과 마주치게 된다.” (p. 46, 필자 강조) --> 그래서, 영성일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최고의 수단이요 첩경이라고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는 계속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직한 글쓰기는 자기성찰의 도구로서 내면을 치유한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지긋지긋한 고통이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게하는 능력을 주었고, 역으로 글쓰기를 통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칼 융은 “환자들에게 그들이 겪은 경험들을 글로 쓰게 했다.” 우울증, 청소년기의 방황, 가족과 부부의 정신 치료 등에도 많은 효과가 있다. 이것을 루시쇼는 강력한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글이 나를 바꾼다.” (p. 48, 필자 강조)   “맥도날드가 일기를 쓰는 방법은 참고로 할 만하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지만 못 쓰는 경우는 개의치 않고 넘어간다. 일기 쓰기란 노동이기는  하지만 의무는 아니다. 약속이다. 그가 일기에 쓰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전날에 한 일들과 만나 사람들, 배운 것들, 느낀 감정들,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던 감명 등이다. (중략) 내가 기록하고 싶다고 느낄때에는 기도도 포함하고, 성경과 다른 영적인 책들을 읽다가 얻은 통찰, 내가 한 행동에 대한 걱정 등도 포함시킨다.” (p. 51, 필자 강조) --> 글쓰기는 작정하고 실제로 시간을 내서 쓰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2016년 L.A 세계선교대회 참석하면서 유기성 목사님의 영성일기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부터 크게 도전받아서 곧바로 일기쓰기를 시도하였으나 여러번 실패하였다.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한다'.    “신앙은 지성을 배제하기는커녕 지성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 그래서 스텐리 존스는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는 구절에서 길은 의지로, 진리는 지성, 생명은 감정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진, 선, 미이고, 윤리, 철학, 종교이다.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성서 신학적으로 타당한가는 차치하더라도 분명 그리스도의 진리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점은 확실하다.” (p. 57, 필자 강조)    “다른 어떤 신앙과 견주어도 기독교는 통전적이다. 동양적 명상은 생각을 비우라 하지만, 성서적 묵상은 바른 생각으로 채우라 한다. 지성을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지성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그러므로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잘 계발되지 않는 한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바로 내적으로는 헌신하는 삶, 외적으로는 섬기는 삶, 지적으로는 합리적인 삶이다.” (pp. 57-58) --> 저자, 김기현의 목사의 통찰에 전적으로 아멘한다.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헌신하며 섬기는 삶과 더불어서 합리적인 삶과의 균형이 필요하다. 합리적인 삶은 지성을 요구하기 때문일께다.     “그러면 왜 이다지도 신앙생활에서 지성이 중요한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하기 때문이다. 인간 지성의 전당에는 주인이 있다. 그곳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지 못하면 누군가가, 무엇인가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법을 훈련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생각에 물들게 된다. 세상 풍조에 흡수되고 세상 가치를 좇아 살게 된다.” (p. 59, 필자 강조)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곧 가난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 큰 죄다.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난이라고 했다. 가난 중에도 제일 위험한 가난이 생각의 가난이라 했다. 스캇 펙은 더 강력한 단어를 사용한다. 바로 원죄다. 스캇 펙은 인간의 원죄를 '게으름'으로 규정한다.” (p. 61, 필자 강조)  -->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무슨 죄인가?' 필자도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이즘은 생각없이 사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듯하다. 삶의 분명한 목적이 없기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유튜브나 인터넷상에서 재미있는 것을 찾으며 소일하는 자들은 사실상 가장 위험한 인생이다. 이런 자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다. 선교현장이다. 생각하지 않은 것이 제일 위험한 가난이요 원죄 그 자체임을 명심하여야 할것이다.    “좋은 예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의 최종 기획자였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 참관했던 한나 아렌트는 그의 범죄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그것을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은 나치가 선전했던 문구나 표현 외에는 다른 식으로 말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p. 61, 필자 강조)  --> 정말 생각지 않고 시세에 떠밀려 살게되면 오늘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유튜부에서 좌/우 편향된 정치이야기를 듣고 '생각없이' 얼마나 주위에 많은가?    글쓰기는 생각하기다: 지성 계발, 논리적 사고형성(論理的 思考形成)을 돕는다.   “논리적인 글쓰기는 지성 계발과 글쓰기가 만나는 접점이다. 미국의 이공계 대학인 MIT는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무척 강조하고, 구내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글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왜 글쓰기를 중시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이 놀랍다. 그런 걸 질문하는 것이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은 사회의 리더가 될 사람이고, 그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글을 쓰는 것이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p. 62, 필자 강조)    “글쓰기가 중요한 까닭은 단연 사고 형성에 있다. 정희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나는 그것이 글쓰기가 지난 뛰어난 사고 형성 기능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글쓰기는 단순히 생각이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희려 글쓰기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지식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중략) 우리는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든다. 글쓰기가 논리적 사고, 창조적 사고를 키운다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pp. 62-63, 필자 강조)   서평을 쓰라. 서평쓰기의 유익: 서평쓰기의 실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글쓰기는 단연 서평이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독서가 생각의 내용을 채운다면, 서평은 그것을 체계화하고, 정리한다. 지성계발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것인데, 생각이란 것이 그저 지금부터 '생각하기 시작!' 이라고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야 한다. 진공상태에서 생각할 수 없다.” (p. 64, 필자 강조)  --> 필자는 2-3년전 전부터 서평을 본격적으로 쓰기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공부하였던 지식이 체계화되고 정리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있는 것같다. 때 늦은 깨달음이지만, 이제라도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된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할렐루야!    “글을 쓸 때는 항상 뇌를 풀가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고력이  향상된다.” 그렇지만 요즘 휴대전화 문자나 개인 홈피의 대략산만한 글을 쓰는 것은 그리 큰 도움이 못된다. 주제를 제시하거나 자유로운 글이라도 써보면 간단치 않다. 논리와 내용, 문장을 갖춘 글을 쓰면서 치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력을 키우면 독서 능력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생각하는 힘'도 기를 수 있다는 점이다.” (p. 63, 필자 강조)  --> 제대로 된 선교서신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어느 정도의 내용과 문장을 갖춘 글을 기대한다. 필자는 이제부터 논리와 내용 그리고 문장을 제대로 갖춘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싶다.   “무릇 모든 학문의 기초는 책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책 한 권 바로 읽지 못하는데 다섯 수레를 읽은들 무슨 소용 있을까. 오독과 왜곡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곁에 두고 아끼며 읽고, 몇 번이고 겹쳐 읽으면서 우리 정신은 자라게 된다.” (pp. 65-66, 필자 강조)    “그럼 왜 서평이 지성 계발을 원할히 하는데 유용한가? 서평을 쓰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책을 대충 읽어서는 단언컨대 쓸 수 없다. 공격적으로 읽지 않으면 책을 잘 읽을 수 없을뿐더러 막상 서평을 쓸라치면 앞이 캄캄해진다.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밀하게 읽고, 거저 맞장구치면서  읽지 않고 대화하면서도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자연히 지성이 활발해지게 된다.” (p. 66, 필자 강조)  --> 필자는 매주 1편의 서평을 쓰고 있다. 솔직히 서평 1개를 쓰기위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한다. 먼저, 책을 촘촘히 읽는다. 작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정독, 재독한다. 완성된 서평을 선교사의 단톡방에 올릴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올린다. 이 책의 저자가 내 서평을 읽고 빙그레 미소를 지을정도의 서평을 쓰는 것이 필자의 1차 목표이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쓴 서평중에서 저자들로 부터 저자 자신도 내 서평을 읽고 더 감동을 받았다는 칭찬을 3-4번 들었다.    “서평을 많이 읽으라. 이는 로이드 존스도 말한 바 있다. 조금 짧은 신문의 서평이나 좀 더 긴 잡지의 서평을 읽으면서 독서 지존들과 서평고수들이 어떻게 쓰는지 관찰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책의 여백이나 본문 사이에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인상과 단상을 놓치지 말고 책에다 메모하라. 그것이 짧든 길든 개의치 말고 적어두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서평이 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단평이다. 책 뒤표지에 추천하는 짧은 글 말이다. 어찌되었건 그것이 휼륭한 서평 쓰기의 시작으로 최상이다. (pp. 66-67, 필자 강조, 필자는 김목사의 이 충고를 아멘하며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나가는 말(결론)   우리는 날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예수쟁이는 예수학교(Jesus College)의 학생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각각 인생의 한 모퉁이에서 '다 내게 오라'(Come to Me)고 우리를 부르셨고, 아울러서 “내게 배우라'(Learn from Me)고 하셨다. 이 땅의 모든 주님의 제자들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의 영역에도 새로워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골3:10)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평생학습자로 끊임없이 배우는 제자이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우리가 매일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말씀으로 기도할때 성령께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던'(히3:7, 15)이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알아 들을  수있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날마다 순종함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럴때 지식과 사고 능력이 새로워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든 선교현장의 선교사들은 이미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고 있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요, 목회자요, 신학자이기 전에 선교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그의 제자들과 책을 남겼다. 곧 '그 책의 사람들'을 남겼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글쓰기를 이제 시작하기를 원하는 목사, 선교사들에 이 책은 최고의 안성맞춤의 책임이 분명하다. 이 책은 한, 두번 읽을 책이 아니다. 강추하고 싶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가 쓴 서평을 1-2개정도를 모델로 제시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50:4) 아멘 아멘. 할렐루야!/GMS 배안호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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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05-19
  • 행복신앙세미나(3)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bog.or.kr)  3. 행복이 형성되는 곳, 마음   미 일리노이대 심리학 교수인 에드 디너(Ed Diener)는 행복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행복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대학생 시절인 1965년부터 행복을 연구하고 싶은 갈망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는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상식을 따라 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상하게 부자도 불행해할 때가 많고 농장의 가난한 일꾼일지라도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행복은 무엇인가?’란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수십 년간 행복을 연구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달리 “행복은 삶에 대한 마음의 태도이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즉, 행복은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나 믿음처럼 행복은 육체가 아닌, 마음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고급 주택에 살아도 불행할 수 있고, 그 반대의 형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메달리스트의 행복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금메달을 딴 선수가 가장 행복하고 그 다음은 은메달리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메달리스트 순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메달을 딴 선수들의 행복도를 조사했는데 은메달리스트보다 동메달리스트가 더 행복했던 것입니다.   은메달을 딴 선수는 행복도가 10점 만점에 4.8점이었고, 동메달을 딴 선수는 7.1점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은메달을 딴 선수는 “아이고, 내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 라면서 금메달을 못 딴 것에 마음을 두었고, 동메달을 딴 선수는 “휴, 잘못했으면 메달 하나도 따지 못했을 뻔했네...” 라면서 동메달을 딴 것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지어냈는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빌라에 살며 살림만 하던 한 부인이 어느 날 오랜만에 동창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꼭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부인은 남편에게 우리도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날마다 졸랐답니다.   아내의 성화에 못이긴 남편이 우여곡절 끝에 겨우 아파트를 장만해주자 부인은 행복해하며 아파트로 이사를 간 후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가구들이 눈에 자꾸 거슬렸습니다. 전에 살던 빌라에서는 괜찮았는데 새 아파트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만을 가진 부인은 남편에게 가구를 새것으로 바꾸자고 또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남편이 어렵게 돈을 구하여 가구를 모두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구가 바뀌니 이제는 오래된 가전제품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전히 불만에 사로잡힌 부인은 다시 남편을 졸라 가전제품들까지 싹 바꾸었습니다.   아파트로 이사하고 가구와 가전제품도 모두 아파트에 어울리는 신제품으로 바꾼 부인은 ‘아, 이제 정말 행복하게 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흡족한 마음으로 새로 구입한 푹신한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신 모델인 멋진 TV를 시청하고 있는데, 저녁에 되어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남편이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남편까지 바꾸려다(?)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이런 우화도 있습니다. 한 생쥐가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고민하다가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마술사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마술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생쥐를 불쌍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로 바꾸어 주었는데, 고양이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가 이제는 개가 무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술사는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개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가 이제는 사자가 무섭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마술사는 개가 된 생쥐를 사자로 바꾸어 주며 ‘이제 동물의 왕인 사자가 되었으니 더 이상은 무서워하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찾아와 “이제는 사냥꾼이 너무나 무섭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덩치 큰 사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는 생쥐를 어이 없이 쳐다보던 마술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몸은 사자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생쥐의 마음이구나. 그러니 다시 생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결국, 생쥐는 원래의 모습으로 바뀌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위치나 조건이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높은 위치, 더 좋은 조건 등 외부 형편의 변화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소개한 예수님은 먼저 “회개하라.”(마 3:2)고 하시며, 행복의 터닝 포인트는 회개 곧 마음의 교체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행복은 마음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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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 일곱영 충만
      사도행전 7장 55절에 스테판이 일곱번째로 성령 충만했다. 이것이 곧 일곱 영을 받은 스테판임을 계시한다. 오늘날 은혜시대에는 믿음으로 충만, 또 두 번째 성령 충만인 하늘 소망으로 충만 하면 아무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순교하는 스테판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은혜로 충만, 권능으로 충만 했고(행6;8), 또 계속 지혜의 영으로 충만, 대언의 영으로 충만했다.(행6;10), 그리고 일곱 번째 성령 충만하니 하나님의 영광의 영으로 충만하게 됐다.   이는 그의 심령에 일곱 등불이 환히 켜진 것과 같다.(계4:5)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대환란 날에 순교할 자는 어떻게 해야될까? 바로 스테판같이 일곱 영으로 충만해야 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어서 스테판이 하늘을 주시하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도 가장 최고의 영광인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는 스테판이다. 무엇으로 말인가? 일곱 영 충만함으로 인하여, 또 자기 자신이 순교하는 직전에 있으므로 자기에게 해당되는 그 순교의 영광을 친히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영광을 직접 자기에게 입혀 주실 것임을 확인하며 기뻐했다. 또 그가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영의 눈으로 보았다.   오늘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부활 승천하신 후 좌정해 계신다. 그런데 스테판이 일곱 영이 충만하여 보니 예수님이 그 자리에게 벌떡 일어서시었다. 왜 그런가? 이는 순교하는 스테판을 미리 순교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 장엄하게 순교하는 그를 환영하여 맞아 드리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예수님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모든 영들과 또 천군 천사들로 일제히 스테판의 순교의 엄숙한 순간을 주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순교로써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가장 드라마틱한 최고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예수를 스테판이 증거했다.   이를 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은 그 예수님을 죄수로 여겨 십자가에 처형했던 자들이다. 그런데 너희가 처형한 그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다고 증거했다. 그러자 그들이 분이 가득하여 돌로 스테판을 쳐 죽였다. 그 돌 맞는 고통도 크지만 이보다 스테판에게 보여 주신 하늘 영광과 예수님이 서시어 반기시는 그 기쁨이 더욱 승하므로 기쁘게 순교했다.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며 위하여 축복하며 자니라. (더 자세한 것은 유투브 ‘주사랑교회cll’로)/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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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 신발에 따른 문제점과 치료예방법(2)
      두 번째로 통굽 구두는 하이힐에 비하여 앞부리가 넓고, 체중이 앞쪽으로 쏠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신발 전체가 높기 때문에 우리 몸의 무게중심은 땅에서부터 멀어져 위로 올라가게 된다.   즉 우리 몸은 불안정해지고 넘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기위해서 온몸의 근육들을 긴장시키게 된다. 물론 하이힐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근육들이 많이 긴장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목뒤도 아프게 되며, 근육을 긴장시키느라고 힘을 다써버리기 때문에 쉽게 피곤하게 된다.   발은 최소 26개의 뼈로 구성되는데, 이들 뼈와 뼈사이는 관절을 이루고 있다. 관절이 있는 부위는 조금씩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러나 통굽구두는 구두바닥이 한통으로 되어 움직이기 때문에 발의 관절의 움직임이 감소하게 된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걸을 때에는 발뒤꿈치-발바닥-엄지발가락 뿌리부-엄지발가락 순으로 닿으면서 걷게 되는데, 통굽구두를 신게 되면 엄지발가락 뿌리관절의 움직임이 감소하게 되어 발뒤꿈치-발바닥-엄지발가락 순으로 닿게 되면서 걸을 때마다 엄지발가락이 힘을 주어야 한다.   따라서 엄지발가락 중간에 발바닥쪽으로 굳은살이 생기게 되고, 엄지발가락 뿌리관절은 발등쪽으로 솟아오르면서 위로 젖혀지지 않는 엄지발가락 강직증이 생길수 있다. 우리 몸의 관절은 사용하지 않으면 굳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엄지발가락 뿌리관절도 굳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엄지발가락 중간에 있는 관절은 너무 위로 젖혀져서 발톱도 45도 상방 또는 하늘을 쳐다보는 형태로 변형된다.   발의 건강을 위하여 통굽구두를 신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어쩔 수 없이 신는 경우라면 자주 벗어서 발을 쉬게 하고 발가락 벌리기 운동과 발목운동, 엄지발가락 위로 젖히기, 장단지 스트레칭운동, 다리 주무르기들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세 번째로 여름철 슬리퍼나 샌들의 특징은 발뒤꿈치를 잡아주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슬리퍼나 샌들을 질질 끌고 다녀야 한다. 구두 뒷축을 접어서 신는 사람도 있다. 이런 식으로 구두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발목 앞쪽이나 발등 쪽이 아프다.   구두가 벗겨지지 않게 하려면 항상 발목을 위로 젖히려고 힘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발목을 위로 젖히는 근육들이 구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쉽게 피로해져서 그런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발목을 주무르고, 발등에 파스를 붙여서는 증상이 없어지질 않는다.   무릎 바로 아래 앞쪽으로 손바닥을 대고 발목을 위로 젖히면, 근육들이 불룩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근육들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려보면 심한 통증과 함께 발목쪽으로 찌릿찌릿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 근육에 알이 배겨서 발등이 아파지게 된 것이다. 이때의 치료는 그 근육을 30초 동안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려주면 된다. /한양대류마티스병원 관절재활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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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 유태민족의 아버지 유다
      야곱은 12 아들을 낳았고,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이루었다.  첫아들 루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범한 죄로 장자권을 잃고,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그들의 누이 디나를 이방 남자 세겜에게 시집 보낼수 없다 하여 할례를 행하게 하고 하몰 가족을 몰살한다. 넷째 유다는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가서 가나안 아내를 맞아 세 아들을 낳는다. 첫아들이 후사 없이 죽고 작은아들이 유전에 의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므로 여호와의 눈에 악하여 둘째도 죽는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막내 아들이 어리니 장성할 때 까지 친정에 가 있으라고 보냈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 부르지 않았다. 당시 풍습은 혼인한 여자가 잉태하지 못하여 대를 잇지 못하면 지옥 제일 밑바닥으로 간다고 믿었다.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 아가를 낳아야 했다. 다말이 지혜를 내었다. 시아버지 유다가 잔치 집에 다녀온다는 소문을 듣고 화려한 옷을 입고 길거리 여인인 것처럼 하여 동침을 하고 댓가로 그의 지팡이를 요구했다. 석달쯤 후 다말이 임신을 하였다는 소문을 듣자 유다는 당장 불에 태워 죽여라 명령하였다. 여인이 끌려 나오면서 이 물건의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유다가 지팡이를 알아보고 그 즉시 이르되  “그 여인이 옳고 내가 잘못했다.” 인정하고 다말을 살려주었다. 다말은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를 낳고 다윗 왕가를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후손으로 오셨다. 아담은 에덴에서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브라함, 이삭은 목숨을 부지하려 아내를 누이라 속이며, 잘못은 자기가 하고 여자에게 핑계 대는 공통된 DNA 선수들이었는데 유다는 핑계 대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유다는 요셉의 생명을 형제들의 손에서 구했고, 곡식을 얻으러 애급에 가서 베냐민 대신 담보가 되어 베냐민을 살렸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어다. 왕권의 지팡이가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평강의 구주가 오시기까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8~10)  유다는 장자권을 계승받고 유태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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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 구원자의 섭리에 계시된 핵심 증거
      새 생명으로 거듭남과 위에 것에 목적을 둔 믿음 실현 새 가치관의 감격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에 관한 말씀이다. 계명을 지켜 주로 말미암아 주의 백성이 되고 성령의 내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은혜의 역사에 동참케 하시는 주의 뜻을 찾는다.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언대로 죄인들이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섭리를 좇아 새 생명 받길 원하신다. 믿음의 결국 영혼구원을 받는 새 생명으로 거듭남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인지 위에 것에 목적을 둔 새 가치관의 감격은 받은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의 힘과 기쁨임을 깨닫는다. 또 거듭난 지체들이 주와 동행함으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믿음과 행함의 일치되는 선함에 견인하심을 발견한다. 이에 범사에 감사이며 이를 위한 기도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주의 나라가 흥왕되도록 나타내 보이신 많은 표적은 예수를 영혼구원자로 믿을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로써 수단이다. 창조주만이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 하나님이심을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심을 나타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는 전능자로 확증시켜 주셨다. 또한 승천하신 후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오시어 살리는 구속사역을 하시는 구원자 주님이심을 밝히 증거 하셨다.   주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 하시어 주를 좇아 새 생명을 얻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 영혼구원 주되심을 증거하셨다. 곧 구약의 예언대로 이루어 가시는 구원자의 섭리에 연계된 계시의 핵심이다. 모든 인류가 돌이켜 주의 백성이 되도록 주께서 십자가 사역을 이루셨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속의 섭리를 예언대로 성령과 제자들을 통하여 이뤄 가심을 찾는다.    예수께서 나타내신 표적을 통해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한 표적은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게 하시는 영혼구원자로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되심의 확증이다. 또 바다를 잔잔케 하시어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도록 하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어 영생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주셨다. 더 많은 표적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신 구원자되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심이다.    이와같이 표적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신 메시야이신 영혼구원자 하나님되심을 믿도록 하여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도록 나타내 오직 창조주만이 영생을 주시는 절대자임을 확증케 한다. 또한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그로라” 말씀하셨을 때 그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우리가 기다리던 그가 오셨으니 와보라고 외쳤다. 곧 주를 만난 자는 더 많은 이들이 주를 좇아 주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주를 전하는 일임을 찾는다.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이와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도록 하는 이웃 사랑의 실현임을 확증케 한다. 그리고 새 생명주시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이 날마다 부흥 발전하도록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임을 새긴다. 더불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심과 같이 제자들이 서로 사랑으로 선을 이루어 복음이 전파 되어져 감을 확증케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를 전하며 이웃 사랑하는 감격의 날들로 견인은 주의 제자화로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심임을 성경을 통해 확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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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 [향유옥합] 평화 떡볶이
       언제나 그랬지만 요즘 들어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불거진 혐오와 차별의 문제, 계층 갈등. 권력과 재산의 불균형으로 인한 분노와 좌절의 소리를 들을수록 평화로운 세상을 소망하게 된다. 이 세상의 평화를 어떻게 이루어갈까? 몇 해전 내 딸이 중학생이었을 때 평화로 가는 길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딸이 떡볶이를 만들어 내게 한 접시 갖다주며 말했다.   “평화 떡볶이입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의아했는데 떡볶이를 살펴보니 웃음이 나왔다. 떡과 함께 세모꼴과 네모꼴 어묵이 들어있었다. 이렇게 두 가지 모양의 어묵을 썬 딸의 의도가 있었다. 내막은 이렇다. 예전에 가족 여행 중 떡볶이를 해 먹은 적이 있었다. 내가 만드는데 동생에게 어묵을 세모로 썰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큼직하게 썬 세모꼴이 먹음직스러워 늘 그렇게 자르곤 했다. 그런데 썰어준 어묵 모양은 네모가 아닌가! 순간 나는 격노했다. ‘분명 세모꼴이라 말했는데..’ 동생은 맞섰다. ‘난 네모꼴이 좋은데..’ 우리 자매는 불꽃 튀기는 말다툼을 하며 토라져 버렸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는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말도 안 되는 사사로운 문제로 감정대립이 되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우리 주위에 허다하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두세살 아기였던 딸은 후일 엄마와 이모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를 듣고 세모와 네모로 자른 어묵을 섞어 넣어 떡볶이를 만들고 “평화 떡볶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딸의 유쾌한 센스와 재치에 미소 지으며 나는 십대 딸에게서 평화의 한 수를 배웠다. 일치와 하나됨을 말할 때, 다양성 속의 일치, ‘unity in diversity’ 혹은 중국어로 ‘구동존이(求同存異)’를 말한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일치는 획일이며 전체주의다. 모든 면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 선진국이 된 것에 비하면 한국 사회는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용납이 뒤떨어진 느낌이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살고 개인주의적인 미국에 비해 한국은 한국인이 인구의 압도적 주류를 이루고 있고 군집적 문화가 한몫 하는 듯 싶다. 그러나 한국이 여기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학교, 교회, 직장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성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믿는다. 나와 다른. 혹은 주류의 삶과 다른 삶의 방식을 정죄하고 차별하기보다는 들어주고 이해해 주어야 한다. 힘을 가진 자의 지시에 따른 결정과 행동에 비해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양한 생각이 나이, 성별, 직위에 상관없이 의사 결정 과정에 자유롭게 반영되고 고려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흔히 많이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박하기 위한 듣기(listen to respond)’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듣기(listen to understand)’가 되어야 한다. 논쟁을 위한 듣기와 이해를 위한 듣기는 듣는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나와 다른 다양한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려면,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경청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인터넷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지만, 알고리즘으로 듣고 싶은 정보만 듣게 되어 양극화 현상이 더 심화되는 것을 본다. 논쟁을 위한 듣기가 아닌 이해를 위한 듣기가 절실히 요구되는 세상이다.    사전이 정의하는 평화(平和, peace)는 좁은 의미로는 '전쟁을 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현대 평화학에서는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한다. 인류가 목표로 하는 가장 완전한 상태이다. 말과 구호 속에서 넘쳐나는 평화보다는 삶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는 살아있는 평화를 이루어가면 좋겠다.   “평화 떡볶이입니다!”   세모꼴 어묵과 네모꼴 어묵이 한데 어우러진 맛있는 평화 떡볶이가 먹고 싶다./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책임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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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향유옥합] 검은 호랑이의 해에 생각하는 지구복원
      올해는 ‘검은 호랑이’의 해인 임인년(壬寅年)이다. 사람들은 포효하는 호랑이의 기운이라도 받아 코로나 등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로의 안녕을 기원한다. 하지만 정작 기운을 받으려 해도 지구상에는 호랑이가 드물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10만 마리나 되었던 야생 호랑이가 이제는 4천 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영국의 비영리단체 ‘트래픽’은 지난 20년간 2300마리가 불법으로 포획되어 살해되었는데, 호랑이의 뼈와 가죽을 노린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멸종 위기의 호랑이를 보전하고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인도는 국립호랑이보호국을 만들어 개체수를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서식지 보존이 만만치가 않다. 우리나라 역시 서식지 보전이 큰 숙제다. 만약 지금처럼 계속 생태계를 파괴한다면 야생생물이 살아갈 서식지 보존은커녕 생물다양성의 급격한 감소가 야생동물의 죽음을 불러와 종의 멸종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은 지금의 멸종위기가 500만 년 전의 다섯 번째 대멸종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생태계 복원을 희망한다면, 언젠가 우리 땅에서도야생에 사는 호랑이를 보고 싶다면 호랑이 한 마리 한 마리가 아니라 그 서식지 보전이 시급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돌이켜 삶의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이 먼저다. 마음을 바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창조주 하나님과 그가 행하실 일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면 불가능한 곳도 아니다. 창조의 부르심을 기억하며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믿음으로 지구 생태계 복원의 의미를 살려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자. 가까운 이들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보되, 하루 한 번 이상 하늘의 새를 올려다보는 일로 시작해보자. 날아가는 새들처럼, 파란 하늘에 기대어 가볍게 살기 위한 걸음을 내딛어보자. 그러면 무엇이든지 줄이고 재사용하고 재활용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능한 대로 쓰레기를 줄이려고 포장이 최소화된 것을 사고, 일회용품은 자제하고 재활용제품을 사게 될 것이다. 옷이나 물건은 새 제품을 사기 전에 있는 것을 최대한 사용하거나 중고매장에서 구매하거나 필요치 않은 물건은 기증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조명은 끄고, 전기를 쓰지 않을 때는 플러그를 뽑을 것이고, 옷은 자연 건조하고, 효율이 높은 가전제품을 사용할 것이다. 일은 우선순위를 정하여 자원과 시간,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음식은 지역에서 제철에 난 것을, 채식 위주로 최소 포장에 덜 가공된 것으로 먹을 것이다. 머무는 공간에는 크고 작은 숲과 밭을 만들어 수확물을 나눌 뿐만 아니라 화학제품을 멀리하고, 자신의 몸과 자연에 해가 덜 되는 제품을 사용할 것이다. 여행을 계획할 때는 꼭 필요한지 묻고, 필요하더라도 차는 집에 두고 여럿이 함께 타고 가거나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이다. 출장이라도 비행기 대신 화상이나 영상통화 방식을 더 고민하게 될 수 있다.   지금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아직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을 보게 된다.   부끄러워 숨을까 하다가도 임인년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 여전히 지키고 돌보는 일을 맡기겠노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무릎을 꿇는다.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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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2
  •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이가 나타나서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하였다.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을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고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다. (창32:24~30) 히브리어로 <이스라> 는 동사인데 주도하다, 지배하다, 다스린다는 뜻이고 <엘> 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어일까? 목적어일까? 한글 성경은 하나님을 목적어에 두고 해석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안심하고 겨뤄서 이긴 승리자인 것처럼, 좋은 직장 보내주고, 좋은 집 주고, 이것도 주고, 저것도 달라고 내 마음대로 조른다.  브니엘, 브니는 얼굴이고 엘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의 얼굴이다. 벧엘, 하나님의 집, 엘 벧엘,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실 것을 선포하심이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이시다.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불 가운데로 지날 때 타지 아니할 것이니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43:1~5)  하나님께서 나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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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2
  • 주의 뜻대로 순복하여 얻는 거듭남
    무형의 교회가 주께 하듯 복음에 순종하여 확장케 하는 주의 나라 섭리   주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 삼고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셨다. 또 가르침에 절대 순복이어야 함을 성경은 증거 한다. 에베소서 5장 24~33절은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하시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온전한 순복의 지혜를 찾게 하신다. 곧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는 말씀에 참된 의도함이 지혜로 구속의 섭리에 순복임을 확증케 한다. 남편이란 가르치는 자와 복음 전하는 자를 일컬으며 아내란 가르침을 받는 자와 복음을 듣는 자를 가리킨다. 이들의 관계에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주 영접함의 지혜를 발견케 하셨다.    로마서 13장 1~7절은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 하시며 이 권세는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고 하셨다. 위에 있는 권세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의 사자들이 전하는 복음이다. 그러기에 이 권세에 굴복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하리라 하시어 복음에 순복의 이유를 밝혀주셨다. 심판의 기준이 복음에 불순종임을 두 본문과 연계하여 지혜로 밝히 확증케 한다.    주의 지체가 된 자는 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도록 사랑의 의무가 있다. 연합되는 자는 주와 한 몸을 이루는 구속의 은혜를 입는다. 이를 위해 “남편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다. 곧 주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며 십자가 사역을 이루심과 같이 가르치는 자들은 주께서 본을 보이신대로 그 자취를 좇는 사랑의 관계로 적용해야함을 확증케 한다. 그 결과 영혼구원임을 알게 하신다. 곧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에 적용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시어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는 구속을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증거 하심이다. 결국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하시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으로 복음에 순종해야 함을 연계하여 지혜로 깨닫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남편과 아내를 들어서 복음의 본질을 담은 영이요 생명의 말씀이다. 가르치는 자는 주의 영이 있는 자이며 주의 마음을 품고 지키도록 복음을 가진 자로서 복음의 권세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을 확증해 준다. 더불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려면 복음에 순복하여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는 거듭남이기에 이를 위한 지혜이다.   또 복음을 권세로, 복음 전하는 자를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시어 듣는 자들이 복음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영생에 이르도록 생명의 말씀으로 적용하는 사랑의 지혜에 확증이다.   복음에 순복한 결과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룰 수 있는 구속의 섭리이며 거듭남을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기에 또한 거듭나게 하신 목적대로 이를 지키게 하심임을 확증케 한다.   더불어 이들의 사랑의 관계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시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다. 곧 이웃 사랑을 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임을 연계하여 확증케 한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는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어 주의 몸을 이룬 자로서 주의 뜻대로 주의 지체의 몫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순복이다. 또 무형의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주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연계된 섭리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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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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