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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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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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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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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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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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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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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실시간 칼럼 기사

  • 시인 최 선 박사의 행복 칼럼-3
      전체 인구 중에 노인의 비율이 7%가 넘을 때는 고령화 사회, 14%가 넘으면 고령 사회, 20% 이상 넘는다면 초고령 사회라고 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7년에 고령사회(14%)가 되었고, 2024년쯤 초고령 사회(20%)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렇게 급속한 사회적인 인구 변화 속에서 어르신들이 증가하고 있다.   국가에서는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로 노인주거복지시설, 노인의료복지시설, 노인여가복지시설, 재가노인복지시설, 노인보호전문기관, 노인일자리지원기관 등을 제공하고 있다. 복지시설들은 수도권과 지방 곳곳에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특히 재가노인지원서비스 중에서 사회안전망 구축사업에는 치매예방이라는 교육지원 사업이 들어 있다. 이처럼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치매노인으로 인한 가정의 어려움과 사회적 비용이 이슈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치매노인가족의 생활만족도를 분석하기 위하여 치매노인 가족의 부양부담대처방안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양가족의 생활만족도 제고를 위한 부양부담대처방안에 대한 영향 관계를 분석을 통해 치매노인 부양자의 적절한 대처 전략을 찾아 그 방안을 향상시켜한다. 본 칼럼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치매노인 부양가족의 생활만족도를 위한 실질적인 연구의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노인장기요양시설에 치매노인의 가족을 조사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하였던 연구 결과를 분석,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치매노인 부양자의 부양부담 중 시간 의존적 부담, 발달적 부담, 신체적 부담, 사회적 부담, 정서적 부담, 경제적 부담이 회귀계수만큼 영향을 미쳤다. 각종 맞춤형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도록 적극적인 여건 조성과 지원이 이루어져야 하며, 치매예방을 통해 치매노인 부양자를 위한 법적, 제도적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둘째, 치매노인 부양자의 부양부담대처방안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잘 해결하여 긍정적인 부양부담대처방안에 긍정적 측면을 갖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치매노인 부양자의 심리적 요인인 부양부담대처방안을 증진하기 위해서 집단상담 프로그램 제공과 개인상담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전략적인 도움과 적극적으로 활성화 되도록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치매노인 부양자의 부양부담 중 시간 의존적 부담과 치매노인 부양자의 생활만족도에 미치는 영향 관계에서 치매노인 부양자의 부양부담대처방안의 매개효과는 치매노인 부양자의 부양부담 중 시간 의존적 부담과 치매노인 부양자의 생활만족도의 관계에서 치매노인 부양자의 부양부담대처방안의 부분 매개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섯째, 치매노인 부양자의 부양부담 중 발달적 부담과 신체적 부담, 정서적 부담, 경제적 부담이 치매노인 부양자의 생활만족도의 관계에서 치매노인 부양자의 부양부담대처방안의 부분 매개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섯째, 치매노인 부양자의 생활만족도에 대한 발달적 부담, 시간 의존적 부담, 신체적 부담, 정서적 부담, 사회적 부담, 경제적 부담이 생활만족도에 미치는 총 효과는 부양부담대처방안을 매개변수로 하여 생활만족도에 미치는 직접 영향이 더 작게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초고령사회로 진입이 도래하기 전에 사회적인 중론을 모아야 할 것이다. 치매노인을 가족들이 돌보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는 치매노인을 위한 대처 방안들을 내 놓아야 할 것이며,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들에서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TF팀들이 선진국과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적절한 대응을 하여 치매노인 예방과 가족들을 위한 방안들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최 선 박사 smse21@hanmail.net 철학박사(Ph.D.) 신학박사(Th.D.)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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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5
  • [성경의 죽음 9] 심판의 죽음
      민수기 16장에는 고라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죽음을 소개한다. 레위의 후손인 고라는 모세와 아론이 너무 많은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반역을 한다. 모세는 정치권력을 아론은 종교권력을 독점하며 휘두른다는 이유에서이다. 반역의 주동자인 고라는 아론이 가진 대제사장직을 탐냈고,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르우벤 지파의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자신들이 장자 자파임을 내세워 모세의 정치적 권력을 탐냈다.   이들은 당을 짓고 이름 있는 지휘관 250명을 모아 일어나 모세에게 반역했다(민수기 16장 1절). 고라가 반역을 시도한 시기는 아마도 광야생활 말기쯤 되지 않나 싶다. 일부 세력들이 오랜 광야 생활에 지친 백성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늙은 지도자 모세를 몰아내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자 획책한 것이다.   고라는 레위인으로 모세와는 사촌간이 된다. 출애굽기에서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라고 했다(출애굽기 6장 16절). 고라는 이 중에서 고핫의 후손이었다(민수기 16장 1절). 한편 역대상 6장 6절에는 모세 역시 고핫의 후손으로 소개된다. 모세는 고핫의 아들 중 마므람의 아들이었고, 고라는 고핫의 둘째 아들 이스할의 아들이니 사촌인 셈이다. 레위 지파에 속한 무리들은 백성들에게 율례를 가르치며, 성막에서 봉사하는 자들이었다. 특히 고라는 백성들에게 신임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자 지파 출신이다. 그는 다단, 아비람, 온과 함께 당을 지어 모세에게 반기를 든다. 이유로는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라고 했다(민수기 16장 3절). 제사장직을 아론과 그의 집안에만 준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러면서 “회중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라고 지적했다.   뼈아픈 고라의 도전을 받은 모세는 우선 하나님 앞에서 엎드렸다(민수기 16장 4절). 그 후에 고라의 일당에게 말하기를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두라고 제안했다. 향로는 불을 옮기는 그릇으로 번제단의 불을 담아 성소 안의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는 도구이다. 이 일은 오직 구별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받은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사역이었다. 모세는 고라의 무리들이 제사장 직분을 탐내는 것을 알고 향로를 준비시켜 누가 하나님께서 진정 택하신 자인지 알아보자는 의도에서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결국 고라 일당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땅이 갈려져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들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민수기 16장 32절). 아울러 고라 일당에게 속아 제사장 직분을 탐내었던 250명도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분향하는 그들을 몽땅 태우셨다(민수기 16장 35절). 이들이 분향했던 놋 향로는 쳐서 제단을 싸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념물이 되게 하셨다(민수기 16장 40절).   고라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이 죽임을 당한 가운데 고라의 세 아들은 살아났다. 그들은 현명하게 아버지의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민수기 26장 11절). 이들의 후손들은 레위 지파에 속해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역을 감당하게 된다.   큰 아들 앗실의 후손은 성막문을 지키는 사역을 일을 한다(역대상 9장 19절). 어떤 후손은 성전에서 안식일마다 떡을 굽는 요리사가 되었다(역대상 9장 31~32절). 어떤 후손은 성전에서 찬송하는 자가 된다(역대상 6장 33절). 고라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여 영원한 죽음에 떨어졌지만,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고 헌신한 아들들은 후손 모두 잘 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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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목회자 칼럼] 거짓 바이러스와 정직 백신
      코로나19에 의해 우리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한국 기독교 역사 처음으로 교회 스스로 모이는 예배를 폐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도 드리고 있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도 변종 감기 바이러스 하나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 순간에 사회 전체가 감염 공포에 떨며 예배를 위한 모임조차 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나는 이번 사태를 우리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에 만연한 거짓과 위선의 바이러스를 정직의 백신으로 치료하여 다시 정한 마음과 성결함을 통해 정직의 영을 회복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한 경고라고 믿는다.     코로나19 자체도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거짓)이고 한국 사회에 이를 본격 퍼뜨리게 된 것도 거짓 사이비 종교를 통해서였다. 거짓은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악으로 미혹하기에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다. 아담을 유혹한 사탄의 간교한 거짓으로 인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거짓말에 대한 죽음의 형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반대로 정직한 사람은 기뻐하시고 후손까지 복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시편 112장 2절)   필자가 흥사단 투명본부 윤리연구센터장으로서 총괄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직지수 2019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성인 정직지수가 60.2로 청소년 정직지수 77.3보다 모든 영역에서 낮게 나타났다. 이는 청소년의 거울이라는 어른이 정직 윤리적인 측면에서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정직지수 응답자 중엔 기독교인도 다수 있고 2020년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10명 중 7명이 ‘목사와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런 응답의 이유는 ‘목사와 기독교인이 말 따로 행동을 따로 하고 정직하지 못하다’였다.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은 우리 사회에서 조차 정직과 윤리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짓과 위선이 팽배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경배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실까?   이제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은 회개와 함께 정직한 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정직이 회복되어야 한다.   정직은 하나님의 특성이고 인류 창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전도서 7장 29절)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의 거짓과 위선을 꾸짖으시며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란 말씀으로 거짓과 위선을 떠나 정직한 진리에 우리가 머물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교회와 기독교인이 정직할 때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시편112편 4절) 지금 정직함으로써 사회에서 당장은 손해를 감당해야 하고 때론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있는 방법이다.(시11장 7절) 이것은 또한 거짓 바이러스가 만연해 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정직이란 백신으로 치료하여 건강한 사회로 발전케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 경고 메시지를 깨달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은 회개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정직 회복 운동과 정직 실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할 때이다. /국제미래학회 회장·한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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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건강교실] 중년 이후의 어깨 통증
      최근 스포츠 및 레저 활동이 많아지면서 어깨 통증의 빈도는 더욱 증가 추세이다. 하지만, 많은 환자들이 단순히 오십견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에 치료가 지연되는 경우가 많아 치료가 어려워지기도 하고 후에 불편감이 남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회전근 개 질환과 오십견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회전근 개는 어깨를 감싸는 4가지 근육(극상건, 극하건, 견갑하건 및 소원형근)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회전근 개 파열은 팔을 들어 올릴 때 ‘견봉’이라는 뼈 부분에 회전근 개가 접촉하게 되는데, 이 현상을 충돌 증후군이라고 한다. 충돌 증후군은 30~40대에도 증상이 시작되기도 하는데, 충돌 증후군이 진행을 하면 단단한 조직인 견봉에 부드러운 힘줄인 회전근 개가 접촉을 하면서 견봉에는 뼈가 자라나거나 단단해 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부드러운 힘줄인 회전근 개에는 파열이 일어나게 된다.   테니스나 수영, 보디빌딩과 같이 어깨 관절을 이용한 운동에서 회전근 개 손상의 위험이 높다. 잘못된 자세로 운동을 하면 파열의 위험이 높아지므로 올바른 자세로 운동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또한 운동 전후에 스트레칭을 통해 회전근 개의 유연성을 높여 주면 파열이 예방된다. 직업적으로 팔을 올리고 일하는 경우에도 회전근 개 파열의 위험이 높다. 회전근 개가 파열되었을 때의 증상은 통증과 근력약화이며, 야간에도 통증이 발생하여 수면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파열은 오랜 시간(수년)에 걸쳐 커질 수 있다.   젊은 환자에서 충돌 증후군의 현상이 뚜렷한 경우에는 견봉의 뼈 일부를 절제하는 견봉성형술을 시행하고 파열된 힘줄을 봉합할 것을 권유한다. 고령의 환자에서 기능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면 통증을 완화시키기만 해도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때가 많아 이 때에는 보존적 치료가 권장된다. 오십견으로 간주하여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통증이 반복되거나 한 달 이상 지속되는 경우 어깨 전문의에게 진찰을 받아보는 것을 권유한다. 오십견은 관절의 운동 범위가 감소되는 질환이다. 어깨를 올리다 보면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반대측에 비해 범위가 감소한다. 이는 관절막에 염증이 발생하며 염증의 영향으로 시간이 경과되면서 관절막이 두꺼워지게 된다.   오십견은 통증기, 동결기, 해동기로 나눌 수 있으며, 처음 통증은 시간이 경과되면서 감소하면서 굳어지게 되고 동결기가 넘어가면 범위도 증가하고 통증도 완화되는 해동기로 진행하게 된다. 오십견은 자연경과로 호전되는 방향으로 가지만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통증으로 1~2년으로 시간이 길고, 해동기가 지나더라도 관절 범위가 감소된 상태로 남게 되는 경우가 있어 적극적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 오십견의 원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당뇨, 갑상선 질환, 결핵 등과 같은 질환이 있을 경우 발생의 위험이 더 높다. 관절막의 염증을 감소시키는 약물과 주사치료를 시행하고 스트레칭 운동을 한다면 대개 자연히 호전된다. /한양대병원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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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8
  • [금주의 말씀] 참된 예배 - 한계엽목사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한국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길게 지속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묻게 된다. 교회 문이 닫혀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일들은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공산당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에도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으나, 그때에 믿음의 선진들은 그 모든 상황들과 탄압을 잘 이겨냄으로서 믿음의 유산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   오늘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사태는 종교 탄압도 아니고, 바이러스의 더 큰 확산을 막기 위한 모임 방지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 성도들은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가 행해야 할 바를 찾는 데에 혼란스러울 수 있다. 믿음의 선진들이 여러 가지 정황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이겨냈듯이 우리들도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예배드리러 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책망하는 말씀이 이사야 1장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닐까? 스스로 돌아보면서 이 시기를 극복하기 원한다.   (이사야 1장 1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장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으로 마음 없이 제물을 가지고 성전을 출입했다. 이에 하나님은 “너희가 보이러 오는 예배”는 “마당만 밟고 가는 헛된 예배”라며 책망을 하셨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드려야만 한다.   (이사야 1장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장 14절)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려지는 많은 예배가 무거운 짐이 되어 하나님이 지기에 곤비하였다”고 하신다. 우리 스스로의 예배를 점검해보자. 이런 예배와 제물은 주님이 받으시지 않고 기도의 응답도 없다고 하신다.   (이사야 1장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1장 16절)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성경은 불신자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우리의 믿음의 모습들을 뒤돌아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자.   (이사야 1장 18절)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우리의 어떤 잘못이라도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모아 먼저 우리의 손을 씻는 회개의 기도를 함으로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길이 유일한 해결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를 올바로 회복시킬 때 하나님의 손 아래서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사야 1장 19절)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우리의 예배가 회복될 때 누리는 평안함이다.   이런 은혜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우리 모두 기도하자. /베들레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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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8
  •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2
          일제 강점기 시대에 유관순 열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주신 스승님이 계셨다. 독립운동가이자 이화여고 교사였던 김란사 선생님이다. 그분의 순국 백주년 기념식이 지난해 이화여고 이화 박물관에서 있었다. 무너진 대한조국에 다시 독립의 등불을 켜고자 했던 김란사 선생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꺼진 등에 불을 켜라." 는 핵심주제로 기념전시회가 열렸다.   위와 같은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소망을찾는이’ 선교회 김용삼 대표의 소중한 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 선교회 소속인 단꿈협동조합은 소외계층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추고자하는 비전과 꿈이 100년의 시차를 넘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김란사 선생님의 꿈과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이 되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소망을 찾는 이’ 선교회에서는 어느 선교단체의 특별한 지원으로 담요 나눔 행사를 했다. 이불이 없거나 얇은 이불로 견디는 어려운 이웃 분들에게 신청을 받아 호랑이 담요를 나누었다.     20년 동안 택시운전을 하다 거리로 내몰린 분에게 담요를 나누며 상담을 했다. 작년에는 희망을 잃고 큰 방황을 하였지만 지금은 자활을 통해 쪽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선교회에서는 노숙인 및 쪽방촌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과 옷을 나누는 ‘희망의 등 홀리몹’을 했었는데 그때 희망의 등을 받았다고 한다. 희망의 등에 쓰인 문구가 자신의 마음에 소망의 빛을 비췄다고 한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며 소중한 일로 부름 받았습니다.”라는 문구였다.     그가 이사를 하면서 등은 잃어버렸지만 위 문구는 지금도 기억하고 계시다고 한다. ‘소망을 찾는 이’ 선교회 소속인 단꿈 한지공방(단꿈협동조합)은 경제적으로 무너진 사람들을 세워주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행전안전부 선정 마을기업이 되었고, 조금씩 수익구조가 세워져 가면서 지금은 조합원 몇 분들에게 소액이지만 생활비가 지급되고 있다.   ‘소망을찾는이’ 선교회에서는 숙식이 가능한 공동체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노숙인, 쪽방촌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한지공예 체험을 통하여 조합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조합원들을 세워 교육을 하고 있다.     현재 쪽방촌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분이 있다. 양 다리가 모두 의족이고 폐암 4기이다. 심방을 통하여 그림도구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합에서 미술도구 및 화선지 등을 구입해 드렸다. 그분은 아직도 투병중이지만 몸이 좀 나아지면 단꿈협동조합 조합원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앞으로 한지공예에 그림이 더해지면 공예품의 가치는 더 커질 것이다. 선교회는 2011년부터 서울역 노숙인분들에게 옷을 나누는 홀리몹(플래쉬 몹) 행사를 해왔다. 노숙인분에게 입을 만하지만, 잘 입지 않는 겨울잠바 등을 플래쉬 몹 형태로 나누는 뜻깊은 행사이다.     2017년부터는 옷뿐 아니라 그분들에게는 희망의 빛을 비춰준다는 소중한 뜻을 담고 조합원분들에게는 절망을 딛고 일어설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희망의 등 홀리몹’을 시작했다. 홀리몹(플래쉬 몹) 행사의 목적은 사회에서 소외된 노숙인 및 쪽방촌 사람들, 독거노인 분들에게 옷과 희망의 등을 나누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우리나라는 지구촌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잘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 중에는 아직도 안식처가 없이 노숙을 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소중한 이웃들도 많이 있다. 희망의 등 홀리몹 행사에서는 찬양과 공연 후에 노숙인 및 쪽방촌을 직접 찾아 옷과 희망의 등을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     세계로부천교회에서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노숙인, 쪽방촌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전해 달라고 성탄절 기념으로 쌀 40포대를 ‘소망을 찾는 이 선교회’에 기증하였다. 기독교신문을 구독하시는 독자들도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전합시다. 고통과 가난을 끊고 함께 살아가는 꿈을 실현하여 소외된 이웃의 꺼진 등에 소망의 불을 켜는 자리에 기도와 섬김, 격려, 나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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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6
  • 넉넉한 시민의식을 기대한다
      지금처럼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사회가 흉흉할 때면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이들은 더욱 소외되기 쉽다. 일례로 지금처럼 마스크 가격이 폭등하니 가뜩이나 구하기 어려운 마스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에겐 없어서 못 살 뿐만 아니라 비싸서 구입할 수 없는 품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마스크가 없으면 공공장소에 갈 수도 없다. 착용하기 싫어서 안 쓰는 것도 아닌데 마스크가 없기에 이들에 대한 소외가 가중되고 있다.   복지사로서 이러한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평시에는 참 매너 있던 사람들도 다급한 상황에서는 이기적으로 바뀐다는 말을 듣곤 한다. 전쟁을 겪어보진 못했지만 지금과 같은 혼란을 겪어보니 그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점잖던 우리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극도로 이기적이고, 원초적인 사람들로 바뀌어 버린 것이 아닐까.   주위를 둘러볼 여유는 없어지고, 내 몸과 내 가족 지키기에만 급급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급급해져 버린 우리 사회를 언론과 정치인들, 그리고 일부 목사들이 더욱 부추겨 불안심리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냥꾼이 토끼를 몰 듯 시민사회를 불안과 공포를 수단삼아 몰아넣고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탐하기에 급급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공포를 조장하는 선동세력이 아닌 조금은 이성을 차리고 지금을 돌볼 수 있게 도와주는 매체가 필요하다.   내가 마스크를 해서 나의 건강을 보호하는 것만큼이나 타인이 마스크를 해서 나의 건강이 보호된다. 그런데 나만 타인들은 마스크를 하지 못하고 나만 마스크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스크는 다같이 나눠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함께 사용하고, 모두가 함께 조심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작은 돌아봄만으로도 우리는 마스크를 사재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모두가 적은 수량의 마스크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처음에 말한 어려운 계층의 이웃들은 지금과 같은 형국에서는 마스크를 구할 수도, 구입할 수도 없다. 그들이 마스크를 하지 못한다면 그 리스크는 그들만이 안게 되는 것인가, 그들이 활동하는 모든 곳에서 리스크를 함께 떠맡게 되는 것인가. 내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나만 그 위험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이웃들도 함께 나눠가질 수밖에 없다.    바이러스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누구나 감염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다. 어려운 계층의 이웃을 연민에 의하여, 혹은 보편적 인간애에 의하여, 혹은 시민의식에 의하여 돕고 있는 많은 손길이 있다. 다만 이번 전염병 사태에서는 취약계층을 돕기 위해 이러한 고결한 정신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기심과 적정 수준의 이성만 있음 이들을 도울 수 있다. 이들에게 공평하게 마스크가 돌아가야만 나도 안전해 질 수 있다는 계산. 그 능력만 필요하다.   마스크 사재기 현상을 보고 있자면 참 교만한 생각이 든다. 저들이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저들이 왜 그토록 마스크를 사재기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내 이웃이 마스크를 착용 못하면 그 위험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듯 행동하는 이들을 보면 정말 의아하다. 더구나 그들이 기독교인일 때면 그들이 평소에 그토록 목놓아 부르는 예수에 대한 신앙심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궁금하다. 아니,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음 좋겠다. 조금은 여유를 갖고 마스크를 하지 못하는 이웃들도 바라보았음 좋겠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마스크를 후원할 수는 없어도 정부나 지자체를 중심으로 그들에게 특히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시민사회가 다같이 응원해주기를 바란다. 끊임없는 마스크 사재기 열풍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노원 나눔의집 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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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3
  • [윤종성의 쉽게 배우는 한의학 10] 건선에 대한 윤피청 치료법
      아토피 피부염과 마찬가지로 인체내부의 면역체계 이상으로 생기는 질환인 건선은 경희신창한의원에서 개발한 윤피청(潤皮淸, 한약)으로 치료가 시작되면 초기에 커다란 각질들이 많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이는 호전반응으로 기존의 각질 발생과는 다르며, 벗겨진 자리가 붉어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붉은 것이 사라져 가게 되고 정상 피부색을 띠게 되면서 호전되어 간다. 건선은 아토피보다 호전 속도가 느린 경우가 많으므로 서로간에 신뢰와 인내심이 필요하다. 한약 윤피청은 동의보감 같은 의서에는 기록이 없는 경희신창한의원에서 개발한 피부질환 치료약으로 특허를 2개 보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한의원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건선은 아래의 순서대로 치료되어 간다. ① 건선 환부가 자리 잡은 부위가 넓어지고 정상 피부에서 잠복해 있던 건선이 솟아오른다. ② 환부가 커지면서 이웃하고 있는 건선이 서로 합쳐져서 건선반을 형성한다. ③ 환부에 각질이 생기고 피부층이 얇아지며, 정상 피부와 건선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④ 커다란 건선반은 환부의 중앙 부위부터 새살이 돋아나고, 피부층이 더욱 얇아져서 약간 붉은 연분홍색을 띠다가 점차 정상 피부색으로 회복한다. 반면에 크기가 작은 건선은 바깥 부분부터 점차 얇아지면서 정상화되어 간다. ⑤ 전반적으로 환부가 옅어지면서 건선환부에 땀이 나기 시작하며, 점차 자신의 정상 피부색으로 회복한다.   일반적으로 가벼운 경증 건선은 중증처럼 치료 초기에 환부가 더 넓게 커지지 않고, 단계적으로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중증은 보다 복잡하게 치료가 진행되며, 아주 극심한 경우는 완치된 듯이 보이다가도 다시금 자잘한 건선이 한동안 들락거리다가 사라지는데 그것들마저 없어져야 치료가 종료된다. 건선을 앓은 병력이 오래되었거나 건선반이 두꺼운 경우는 그만큼 환부가 깊으므로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일반적으로 건선의 식이요법은 아토피피부염처럼 심하게 관리하지는 않는다. 아토피는 음식에 대한 반응이 민감하여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으면 곧바로 가려움이 발생하기 때문에 식이요법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선은 아토피 만큼 가렵지는 않기 때문에 음식관리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가려움증은 심하지 않더라도 건선의 증상은 서서히 악화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음식관리는 필요하다. 건선에는 특히 술이 아주 나빠서 호전되다가도 과음 한 번에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건선 환자의 빠른 치료를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먼저 감기를 예방하고 조심해야 한다. 감기가 들면 발열 증상으로 인하여 피부가 건조해지고 가려움증이 생기면서 긁어서 건선 피부를 더욱 두껍게 만든다. 여성은 생리 시작 1주일 전부터 특별한 이유 없이 건선 피부가 악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호르몬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생리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호전되니 마음을 편안히 갖고 휴식을 취한다. 스트레스는 건선의 호전과 악화에 밀접히 관계되므로 명상이나 요가처럼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여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좋다. 건선은 증상이 외부로 드러나기 때문에 사생활에 제약을 받게 된다. 취미나 여가생활, 운동이 끝나면 함께 씻어야 하는 경우에 자신의 건선 피부를 타인에게 보여 주기 싫은 마음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여간 심각하지 않다. 하지만 건선은 타인에게 전염되거나 옮겨지는 질환이 아니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의기소침하지 말고 자신 있게 행동하는 것이 도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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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3
  • -코로나19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메시지- "거짓 바이러스 정직 백신으로 치료해야"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인 코로나19에 의해 우리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한국 기독교 역사 처음으로 교회 스스로 모이는 예배를 폐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도 드리고 있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도 변종 감기 바이러스 하나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 순간에 사회 전체가 감염 공포에 떨며 예배를 위한 모임조차 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과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겠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이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나는 이번 사태를 우리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에 만연한 거짓과 위선의 바이러스를 정직의 백신으로 치료하여 다시 정한 마음과 성결함을 통해 정직의 영을 회복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한 경고라고 믿는다.    코로나19 자체도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거짓)이고 한국 사회에 이를 본격 퍼뜨리게 된 것도 거짓 사이비 종교를 통해서였다. 거짓은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악으로 미혹하기에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다. 아담을 유혹한 사탄의 간교한 거짓으로 인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거짓말에 대한 죽음의 형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반대로 정직한 사람은 기뻐하시고 후손까지 복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시편 112장 2절)    필자가 흥사단 투명본부 윤리연구센터장으로서 총괄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직지수 2019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성인 정직지수가 60.2로 청소년 정직지수 77.3보다 모든 영역에서 낮게 나타났다. 이는 청소년의 거울이라는 어른이 정직 윤리적인 측면에서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결과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항목에 청소년의 50% 정도가 그렇다고 응답하고 있다.    정직지수 응답자 중엔 기독교인도 다수 있고 2020년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10명 중 7명이 ‘목사와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런 응답의 이유는 ‘목사와 기독교인이 말 따로 행동을 따로 하고 정직하지 못하다’였다.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은 우리 사회에서 조차 정직과 윤리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짓과 위선이 팽배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경배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실까? ‘악을 행하면서 성회를 여는 것을 참을 수 없다’(이사야 1장 13절)    이제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은 회개와 함께 정직한 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정직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 중 하나님이 유일하게 두 번이나 칭찬한 욥의 사람 됨됨이는 ‘순전하고 정직하다’였다. 이를 통해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다.(욥기 1장 8절)    정직은 하나님의 특성이고 인류 창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전도서 7장 29절)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의 거짓과 위선을 꾸짖으시며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란 말씀으로 거짓과 위선을 떠나 정직한 진리에 우리가 머물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교회와 기독교인이 정직할 때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시편112편 4절) 지금 정직함으로써 사회에서 당장은 손해를 감당해야 하고 때론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있는 방법이다.(시11장 7절) 이것은 또한 거짓 바이러스가 만연해 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정직이란 백신으로 치료하여 건강한 사회로 발전케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 경고 메시지를 깨달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은 회개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정직 회복 운동과 정직 실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할 때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편 10절)/국제미래학회 회장·한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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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2
  •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예배란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중단됐다. 교회의 건물을 성전으로 알고 있던 많은 교인들이 인터넷예배를 드리며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작게는 수억, 많게는 수천 억의 헌금으로 성전건축을 해야 한다고 하더니 집에서 각자 예배를 드려도 된다니. 예배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오늘도 살아계셔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생, 사, 화, 복을 주관하신다는 그 하나님을 믿으며 바이러스 전염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신앙을 세상은 어떻게 볼까?    바이러스 전염 예방 차원이 아닌, 바이러스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휩싸였다면 과연 누가 우리를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적 하나님을 지식으로 믿는 것이다.    또한 바이러스 앞에서 두려워하는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실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이 시대에서 찾고자하는 예배가 어떤 특정한 장소나 건물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종교로 변하여 교인들의 피 땀 흘러 드린 헌금으로 이방신들의 신전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건축했고, 교인 숫자에 치중하여 많은 군중들을 동원하기위해 세상의 갖은 수단, 방법들을 다 동원하고 있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서 예배드린다고 받으시는 예배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어떤 장소나 화려한 건물에서 많은 군중들이 종교적인 자기 감성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적은(모이는 숫자에 관계없이)무리라도 특정한 장소나 건물의 구애 받지 않고, 각자 살고 있는 가정(재정이 없어도 가정에 있는 교회를 세울 수 있다)을 장소로, 영 안에서 진리(레위기 모든 제물의 상징이신 예수)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다.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인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공급 해주어야 할 교회가 생명이 아닌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지식을 가르치므로 생명이 없는 인격을 지향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예수님은 군중의 집회보다는 적은 무리라고 하셨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작은 양들을 목양하라, 내 작은 양들을 먹이라” 스스로 제물이 되신,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이는 것이 예배이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고 나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무엇이 두렵고 떨리겠는가? 오늘 우리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살아계신 생명이 아닌 철학,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 등의 가르친 결과를 보라.   대부분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닌 지식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나약하고 부끄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닌가? 이번 사건에도 두려워서 떨고 있는 양들을 보라. 우리는 우리들에게 양들을 맡기신 하나님께 두렵고 떨리지 않는가?    지식나무를 먹어서 회칠한 무덤이 된 교회여 “내가 너를 권하노니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보아라” 너는 곤고한 자요, 가련한 자요,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자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와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 종교로부터 돌이켜 참된 생명이신 예수님께 돌아가자. 죄된 길에서 돌이켜 신앙의 원형(본질)을 회복하자./성경원형회복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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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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