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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8)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진 상태에 있는 것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되고, 우리 심령 성전을 잦나무와 같은 진리의 특성, 즉 첫째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말씀으로 완공해야 하는 것이다.   2:1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샤론' 은 엘리야가 이적을 베푼 갈멜산에서부터 욥바 사이에 있는 비옥한 평야이다. 이는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하는 애굽 땅과 달리 그곳은 하늘에서 비를 흡수하는 땅이다. 위에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받으며 오직 그것으로 만족하며 위에 계신 하나님만 앙망하는 땅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샤론의 평야같이 많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것을 가리켜 장미라고 하는 것이다. 재림하실 주님의 신부 신앙에 올려 세워진 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한량없이 많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로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부된 자는 "나는 사론의 장미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샤론의 장미다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올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한량없이 많은 것이다.   '골짜기'는 낮은 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백합화는 꽃 중에 향기가 가장 진동하는 백색의 꽃이다.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가장 낮고, 낮은 데서 향기를 최고로 발하는 신부의 신앙 모습을 가리킨다. 내가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지고 낮아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또 더욱더 낮아지게 되어져서 겸손과 온유가 충만하여 오직 신랑이 되는 주님만을 지극히 높이면 최고로 향기를 발하는 백합화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골짜기의 백합화이다. 최고로 주님을 높이고 높이되 자신들은 최고로 낮아지고 낮아진 것이 바로 풀무 불에 들어가는 데까지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이 자기 자신이 골짜기의 백합화가 되어지면 주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는 자로서 100% 순교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2:2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나의 사랑도 딸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딸들'은 1:5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은 예수 믿는 신자들을 지칭한다. 예수를 믿는 대다수의 교인 중에 신부 성도는 특별한 다른 무엇이 있다. 신부 성도는 주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자이다. 그래서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특별하다.’ 고 말하는 것이다.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는 바람이 불 때 가시나무가 백합화를 사방에서 찌르게 된다. 문맥상 ‘가시나무’ 와 ‘딸들’ 은 동격이므로 딸, 즉 육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신부 성도를 핍박하고 괴롭게 하여 가시나무처럼 찌르는 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백합화는 가시나무에 찔림을 당하는 신부 성도를 계시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인 백합화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서 주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마치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가 되는 것은 순교자의 명부에 녹명이 된 자를 가리킨다. 바람이 세차게 불수록 가시나무가 백합화를 찔러대는 것이 심하다. 장차 주 재림전에 있을 7년 환란에 들어가면 더욱더 찌르는 핍박이 심하게 된다. 그러면 백합화는 향기를 더욱 토해 내게 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육적인 요소가 있으면 가시나무와 같은 딸들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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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8
  • [향유옥합] 그 사랑 신비의 거룩
       성경은 최고의 사랑에 증거이다. 무엇이 사랑인지 지혜로 알게 하신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도덕과 윤리로 적용한다. 주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면 주를 헛되이 경배하게 함임을 성경은 경고한다. 이는 주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가르쳐 지키게 하여 죄사함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몫을 하게 하는 주의 제자화를 위함이다. 이를 위해 주님의 멍에를 메고 나와 배우라고 하셨다. 온유와 겸손한 자는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복음을 전하여 사랑의 실천을 하는 종으로 두 계명 지킴의 살리는 몫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거룩과 주의 제자화로 믿음과 성화임을 깨닫게 한다. 성령과 동행하여 구속 사역에 참예한다면 영적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의 나라 확장을 가져온다. 이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다. 롬8장5~8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증거 하셨다.    즉 거듭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의 사랑 적용은 도덕과 윤리로 육체를 중심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사랑의 뜻을 알 수 있으며 행할 수 있음을 발견케 한다. 곧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실천은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는 구속 사역의 몫이며 생명으로 살리는 사랑이다. 도덕과 윤리의 사랑을 한다면 거듭나게 하지 못하기에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심을 깨닫게 된다.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셨다. 로마서에는 많은 부분 이를 분별하도록 증거한다.    곧 성경 해석 적용은 육을 중심으로 한 도덕과 윤리가 아니다. 영혼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영생을 상고하는 목적이다. 오직 주를 믿고 좇아 성령으로 거듭나면, 사랑의 개념을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알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 살리는 진리를 가르쳐 주 안에 속하도록 지키게 할 것이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하신 확증이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계명을 실천한 사랑의 결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의 나라 확장을 이룬다. 사랑의 기준은 도덕과  윤리로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어 육체대로 판단 적용이아니다. 원죄를 입고 태어난 자들의 그릇된 선과 악에 대한 육의 기준이다. 복 음으로 사람 살리는 일의 시작이 되도록 주께서 본을 보이신대로 그 자취를 좇아야 한다.   주의 마음을 품은 자들의 사랑은 주의 영이 없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푼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그 행함으로 믿음이 온 전하게 되었느니라’ 하신 말씀에 입각한 사랑을 실천해 살리는 몫을 함이다. 곧 사랑은 주를 믿고 좇아 아버지의 뜻대로 사람을 살 리어 주의 제자화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신비의 거룩을 바로 알게 되는 지혜의 사랑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 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아멘/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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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7
  • 성서와 생활 [16] 그리스도인의 영성- 십자가의 영성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따르는 자들이어야한다. 이는 십자가의 은혜를 넘어 ‘은혜 위에 은혜’요1:16의 역사에 참여하기위함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다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사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함을 최종목적으로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 요3:36을 주시려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알게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영성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 생명수로 흘러 넘치는 생활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이 있는 분은 오직 예수 한 분 뿐이시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요5:12라고 하신 것이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믿어야한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상태로 만족할 것이 아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의 열매에 이르러야만 한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얼마나 애통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라고 하셨다.    주님이 받을 세례는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이셨다. ‘한 알의 밀알’요12:24 이 되어 죽으심을 통해 많은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주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분의 성령에 의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라고 하셨다. 주님의 살을 주심으로 우리로 주님의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51 이러한 진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어야 한다.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진리가운데로 나아가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참 생명되신 우리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셔야만 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훈련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사람이기보다 주님의 영을 의지하여 사는 진리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대전 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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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7
  • [에레모스 영성 4] 시험의 땅, 광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마태 4:3)    여러 날 먹지 못하여 주린 상태에 있는 예수에게 사탄은 말했다. 인간의 욕구 가운데 으뜸은 식욕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모습을 보면서 이를 실감한다. 먹어야 산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한다. 이런 굶주림으로 연명하는 이들을 제쳐놓고 왕 노릇으로서의 메시아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당신이 나라님이 되어서 우리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에게 향하는 당연한 요구이며 따라서 사탄은 민중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먹는 빵으로 사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인가? 내가 빵을 만들어 민중을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왔는가? 내가 백성들을 만족 시켜야 하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나? 그분은 때로 5병2어의 기적을 베풀며 수천 명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하였으나 배불리 먹고 난 사람들이 그런 기적 때문에 예수를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했다. 왜냐하면 빵 때문에 따르는 사람은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메시아적 공생애 기간은 빵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빵이 되는 길이었다. 그분의 가장 큰 관심은 육적 생명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참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명을 위한 영적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깨닫기를 원하였다. 그분 자신도 바로 ‘그 말씀’으로 사탄과의 대척점을 유지 할 수 있었으며 끝내 유대인의 왕을 넘어서는 온 인류의 왕, 왕 중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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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7) 우리집은 백향목과 잣나무다
      부활체이신 주님과 우리가 함께 누워있는 침상이 푸르르다   주님이 신부 성도에게는 엔게디 포도원에 있는 캠퍼송이로다.   1:16 보라, 너는 어여쁘며 나의 사랑하는 자야, 참으로 사랑스러우니, 우리의 침상도 푸르도다.   ‘우리의 침상’이니 신랑 예수님과 신부 성도가 함께 사용하는 침상이다. 침상에 들기 전에 입맞춤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1:2). 또 목자를 찾아갔다. 또 집을 짓는 단계를 거친다. 침상이 푸르리니 생명이 자라남이다. 활기차게 약동한다. 계속하여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영적 의미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녹보석 같다(계 4:3)고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의 보좌임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영광을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입혀주실 것을 계시하신다. 장차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받을 때 받은 그대로가 아니라 항상 푸른 초목의 녹색과 같이 새롭게 된다. 즉 처음 받은 영광에서 기하급수적으로 계속 자라게 하신다. 재림하실 주님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 분은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임당했었다. 그 결과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다. 한없이 존귀하게 되시어 하늘보좌에 좌정하신다. 우리도 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는 자들이다. 장차 7년 환란날에 신앙 정절을 지킴으로 반드시 순교하게 되리라. 이 순교는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순교케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주 재림때 첫째부활의 영광(계 20:4~6)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부활체이신 영광의 주님과 우리가 함께 누워있는 침상이 푸르르다. 나도 부활체, 즉 첫째부활의 영광을 받은 자이다. 첫째부활의 영광이 성도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요, 복이다. 성도의 부활 순서가 고전 15장에 나온다. 주 재림때 부활하는 자들이 있다. 그 다음은 나중에 부활한다- 주님 재림때 순교자들이 먼저 첫째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온다. 신랑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 바울도 이것을 더 좋은 부활이라고 증거했다(히11:35). 그러므로 첫째 부활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는 우리의 침상이 푸르르다. 곧 녹보석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1:17 우리 집의 들보들은 백향목이요, 우리의 서까래들은 잣나무로다.    우리 집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성도가 함께 사는 집을 가리킨다. 복되고 환희가 넘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 자리에 나는 순교를 통하여 첫째 부활의 영광을 입은 신부가 된다. 또한 재림하시는 영광의 주님은 신랑이 되어 함께 사는 우리집이 되는 것이다. 백향목은 백색의 향나무 같아서 수명이 천년까지 산다. 우리집의 대들보가 백향목이라함은 우리집이 천년간 향을 발한다는 것이다. 이향이 무엇인가? 7년 환란 때 하나님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해 순교한 성도들의 찬양이다.     이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첫 번째 부활한 자들이다. 재림주님이 세운 왕국에서 천년동안 주님과 함께 백성들을 통치하며 감사찬송하는 것이 백향목의 향이다. 재림하신 주님과 첫째 부활한 신부 성도가 부활체로 함께 사는 기쁨과 행복의 날들이 우리집의 대들보라고 한다. 우리가 이를 미리 믿음의 실상으로 누려야 한다. 또한 우리의 서까래들은 잣나무라고 했다. 잣나무는 성전재료이다. 노아방주도 잣나무로 지었다. 잣나무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고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     또 물에 잘 썩지 않는다. 이것은 잣나무 같은 진리의 특성을 계시하는 것이다. 즉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것같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영광을 바라보며 생명 길로만 나아가는 진리이다. 또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는 것은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켜 순교할지언정 비진리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진리이다.    또한 물에 썩지 않는다는 것도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진리 특성을 가리킨다. 이 잣나무진리는 곧 첫째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의 심령성전을 잣나무의 특성과 같은 진리의 말씀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즉 첫째부활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 우리의 서까래가 되며 우리집 짓는 재료인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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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0
  • 성서와 생활 [15] 그리스도인의 영성예절의 영성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고전14:3 아니시다.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품위있고 질서있는 삶’고전14:40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 이 사랑의 생명은 고린도전서에 이름과 같이 선한 열매를 풍성히 나타내는 능력이다. 그 중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라는 말씀이 있다. 사랑은 예절을 알게 한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예절이 없다는 말이며 이것은 곧 혼란과 무질서를 의미한다. 사랑의 생명이 있는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예절을 잃지 않게 한다.    이러한 질서에는 말의 예절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부터 예의 있는 말을 배워야 한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의 예절을 통해 가정에 천국의 질서를 세워야한다. 부부의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부의 도리가 된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해야한다. 이러한 가정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예의 바른 가정이 되게한다.    행동과 태도와 의복에도 마땅한 예절이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의복을 가정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입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향한 예의이다. 특별히 문둥병에 걸린 옷과 같은 형태나 남녀 구분이 없는 옷을 피해야한다.신22:5 물건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에는 던지지 말아야한다. 쟁반에 받히거나 공손히 손으로 전달해야한다. 칼이나 가위 등은 위험한 부분을 돌려서 전달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특별히 가정 안에서 이러한 예의를 잘 행하여 평안한 가정을 세워야한다. 가장 친밀한 가족 간에 마땅한 예절이 실종되면 악한 본능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예절에는 음성의 예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말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음성에 미움과 사랑이 드러난다. 악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합당한 음성의 예절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말에는 부드러운 어조가 필요하다. 함부로 말하거나 거짓된 것을 말해서는 안된다. 거친 어조와 교만한 억양도 예의가 없다. 자신을 동정하는 억양이나 자신을 사랑하는 억양도 합당한 표현이 되기 어렵다. 자신의 희생을 나타내는 표현도 합당하지 않다. 오직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무례하지 않은 언어의 영성을 갖춘 예절을 필요로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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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0

실시간 칼럼 기사

  • 성서와 생활[6] 그리스도인의 영성 -온유의 영성
    온유의 영성 박 정 미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온유함을 소유한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만의 특유한 향기로 인해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온유하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옳지 않은 것이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 민12:3고 하신 이는 모세이다. 모세는 많은 연단을 통해 온유함을 배우게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예비하게 된 것이다.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시23:9 온유함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그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거친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화를 내지 않게 된다. 쉽게 화를 내고 싸우기를 잘하는 사람은 온유함이 결여 된 사람이다. 이러한 일은 가장 교양 없는 일이며 무례한 태도에 속한다. 성령의 역사가 부족한 상태로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온유한 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요 자기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게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11:29. 주님은 자신의 마음이 온유함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마음을 본받으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한 마음을 배우며 살아가도록 훈련하고 준비되어야 한다. 온유함이 없다는 것은 주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며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알고자 하는 자마다 온유함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온유한 자는 자기를 부인하여 자신의 개인적 권리를 포기할 줄 알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쉽게 바꾸며자신의 만족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화내는 일이 없게 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37:11 온유한 자에게는 축복이 따른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선행이 그의 행함을 나타내게 하신다.    온유한 사람에게서는 거친 면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온유한 사람은 무례하지 않으며 사랑에서 나온 친절한 마음과 태도를 취한다. 모든 사람을 애정과 친절로 대하셨던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은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있는 친밀함으로 안식을 주셨다. 온유한 주님의 마음처럼 친밀한 교제와 안식의 축복을 줄 수 있기를 배우자./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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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2-05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10회] 주 자취 좇는 그리스도 사신의 행복
    기쁘고 보람된 여정, 주의 말씀이 가는 길 빛과 등불 되어 의의 길을 가다 성경은 무엇을 하고 살아야 보람되고 기쁨이 충만한 행복의 여정이 될 수 있는지 이에 대한 답을 발견케 한다. 전도서 12장 8~13절은 “헛되고 ~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셨다.    또 요한복음 15장 11절은 충만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일의 비결을 말씀 하셨다. 이 일에 주께서 본을 보이신 이유와 부르심의 목적에 대해 베드로전서 2장 21절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셨다. 이 자취를 좇을 수 있도록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고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심이다. 부르심의 보람된 몫을 행할 때 행복하고 충만한 기쁨임을 알게 하신다.    곧 구속 사역에 참예하여 보람과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도록 화답을 원하신 이유이다. 그리할 때 주 안에 사는 비결을 찾아 새 생명의 가치를 알고 진리의 길을 좇게 되는 것이다. 찬송가 560장 「주의 발자취를 따름」은 이 일에 하나님으로 인한 행복의 증거들이다.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 맘에 맑은 하늘 열리고 밝은 빛이 비친다 ~ 어찌 행복한 일 아닌가 맘에 악한 생각 사라져 밝은 마음 싹튼다 ~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든든한 일 아닌가 맘에 두려움은 사라져 새로운 힘 솟는다” 등.. 보람과 행복의 확증이고 옳은 길이며 의의 길임을 연계하여 발견케 한다. 이전보다 주를 더욱 사랑하는 여정이고 보람된 행복임을 확증해 준다. 주의 말씀이 주를 목자 삼은 이들에게 가는 길에 빛이요 등불이 되는 복의 근원이다.    더불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몫을 할 수 있는 담대함의 비결이다. 세상 끝 날까지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확증이다.    영적 구속사의 참예에 몫을 하는 행함으로 보람임을 확증케 한다.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있기에 주의 마음을 품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사람의 본분을 하는 삶이다. 곧 영적 구속사에 몫을 하는 사람의 본분의 여정으로 확증해 준다. 주의 기업은 성령과 동행하는 지체들의 화답으로 흥왕 되어진다. 주를 목자 삼은 자들은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뛰어나 높은 곳을 다니는 전도자들로 복된 순례의 행복이다. (합 3장 15~17절 참조)   그러므로 주를 주인 삼은 자들은 행복의 새 패러다임을 갖게 된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존재의 목적을 갖고 본분을 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의 여정이다. 오직 주의 뜻대로 온 맘과 온 정성을 다 하여 주와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사신의 몫을 한다. 다시 말해서 주를 사랑함이 전도요, 주의 제자화이기에 진리를 좇는 자들로 주를 경외하여 살리는 일의 본분을 행케 하심이다. 복음으로 사람 살리는 일에 행복과 보람 그리고 기쁨을 갖고 사는 새 피조물들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빌립보서1장 27절~28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는 말씀이 이를 확증해 준다. 기뻐하며 보람된 사람의 본분으로 화답함이 의인의 여정에 보람된 행복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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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5
  • 하늘나라 모국어
      어느 해 어머님께서 엘랑꾸르 우리 집에 오셨다.  아침을 들고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쇼핑백 안에 살구를 한가득 담아 들고 오셨다. 우리 동네 제일 앞에 있는 집을 지나가는데 어머님 연세와 비슷한 한 아주머니께서 마당의 잔디를 깎고 계셨다고 한다.  “마당의 꽃들이 아주 예뻐요” “날이 좋아서 정원을 손질하고 있어요” “내 아들은 화가인데 저기 옆집에 살아요” “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들어오셔요. 이건 살구인데 드셔보셔요. 아주 맛이 있어요” “맛이 참 좋습니다” 한국에서 온 어머님과 프랑스 아주머니, 두 분은 화창한 여름날 각자의 모국어로 거리낌 없이 오순도순 말씀을 나누시고 그 댁 정원에 열린 살구도 선물로 받아 오셨다.  그리고 오후 내내 살구쨈을 여러 병 만드셨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만드신 살구쨈을 들고 그 댁에 다시 가셔서 차도 함께 드시며 한나절 오랫동안 정담을 나누시고 오셨다. 각자의 모국어로 정담을 나누신다.  하나님은 말보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만드셨다.  눈을 마주하고 앉으면 바벨의 슬픈 이야기는 사라지고  한마음 미소만으로 언어의 장벽을 넘는다.  마음과 눈은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어 주고,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게 해주는 신비한 언어이다.  아담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다. 바벨을 쌓기 전까지 세상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 존재했다. 하늘에 가면 하늘 언어로 마음을 나눌 것이다. 하나의 사랑 모국어로.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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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5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9회] 여호와를 목자 삼은 행복한 여정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어 영적 풍성함 주신 고귀한 사랑  주를 섬기는 자 곧 주 기도를 바로 알고 행하는 자의 행복과 사랑에 대해 시편 23편은 잘 나타내 준다. 주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며 좇는 주 경외함의 믿음과 행함의 화답이다. 반드시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고 목자 되신 주의 말씀에 순복해야 함을 연계 확증케 한다. 곧 자신의 육체는 이미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죽었노라는 자세를 확립케 한다.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자신을 살리신 그 목자를 위한 거룩한 일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 알고 그 뜻을 좇을 수 있는 사랑에 참 행복의 발견이다.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이에 대한 간구와 행함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에 전도로 성령과 동행이다. 주님이 목자가 된 지체들에게 주의 경륜은 마귀를 진멸하기 위한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임을 알게 하셨기에 이에 화답함이다.    더불어 전능자의 지체들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수 있음이다. 지혜로 발견케 하신 영적인 일에 풍성한 생명과 이끄신 사랑의 확증이다. 지혜로 얻은 말씀의 앎은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심의 실증이다. 주의 말씀을 분별하여 좇으며 만족이 무엇인지 지혜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말씀은 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어 말씀이 산성이 되고 방패가 되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가는 길을 환히 비춰주신다. 날마다 일용할 영의 양식으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성령과 동행, 구속사에 기쁜 참예이다.    여호와를 경외하여 사람을 살리게 하는 이웃 사랑의 결과를 주의 제자화로 존재의 몫을 나타낸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신 말씀과 연계하여 이를 위한 주의 기업으로 확장이다. 주께서 본을 보이신 그 자취를 좇아 승전고를 울림이 행복이며 감사로 충만한 기쁨임을 확증케 한다. 이 일은 계명을 지켜 주를 사랑하는 자의 화답과 응답으로 충만한 기쁨되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임을 확증해 준다.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으로 오직 주만이 삶의 전부이며 최고의 행복과 사랑임을 확증케 한다. 복음의 화답은 나그네 여정 사람의 본분을 할 수 있도록 주신 지혜와 지식과 명철에 의한 믿음의 행함이다.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믿음으로 행케 하신 주님에 의한 사랑이다. 가장 값진 행복, 은혜 위에 은혜이다.    그러므로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여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게 하신 지혜로 살리는 일에 성화의 풍성함을 발견케 한다. 아고보서 1장 22절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하심의 이유와 반증이다. 말씀에 순복한 자만이 행복할 수 있는 초장과 쉴만한 물가 그리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따르는 여정임을 발견할 수 있음이다. ‘너희가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거니와’라는 말씀에 순복한 최고의 기쁨과 선이다.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여 주를 좇는 자만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행복임을 찾음이다. 전도로 주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 거하여 지키는 즐거움을 가장 큰 감사와 기쁨으로 주 안에 참 행복임을 밝힌다. 주를 사랑함이 내주하신 성령과 동행으로 새로운 참 행복임을 알고 누리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성령께 화답하는 사랑의 사명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주를 경외함이 사랑 실천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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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5
  • [향유옥합] 호랑나비 애벌레를 보며
      작년에 막내가 곤충을 좋아한다는 걸 들으시고 집 근처에 사시는 권사님께서 4마리의 호랑나비 애벌레를 가져다 주셨다. 베란다에 놔둔 레몬나무에 호랑나비가 알을 낳고 갔다고 했다. 처음 호랑나비 애벌레가 우리 집에 오고나서, 아무 생각없이 ‘애벌레는 당연히 배추잎을 먹고 살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양배추잎을 넣어두었다. 그런데 다음날 양배추잎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검색해보니, 호랑나비애벌레가 먹는 잎이 정해져있다는 걸 알았다. 호랑나비애벌레는 귤나무나 레몬나무, 산초나무, 운향과 나뭇잎을 먹이식물로 삼는다는 것이다. 다행히 집 근처 야채가게 할아버지집에는 귤나무가 있었다. 야채를 사러갈 때마다 몇 번 귤나무 잎을 얻어왔다. 감사하게 애벌레들은 잘 먹고, 잘 자랐다. 3마리가 나비가 되었고, 아이는 좋은 짝을 만나라면서 기분 좋게 날려주었다. 한 마리가 남았는데, 귤나무 잎을 매번 얻으러 가는 것도 죄송스러운 마음에, 이 애벌레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어 주자라는 생각이 들어 귤나무를 하나 사주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역에서 집에 오는 길에 역 근처 꽃 집에 들렀다. 자그마한 귤나무를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귤나무는 없고, 레몬나무가 있었다. 레몬을 4개나 달고 서 있는 그 나무에는 4,500엔이라는 가격이 붙어있었다. 나는 비싼 가격에 멈칫했다. 하지만, 이미 날이 저물어, 고민할 여유가 없었고, 덜컥 내 손에는 레몬 나무가 들려있었다. 애벌레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무럭무럭 자라주었고, 나무의 가운데, 볕이 잘 드는 곳에 멋지게 번데기 자리를 잡았다. 어찌나 번데기 모양이 우아하고 아름다운지 볼 때마다 감탄하며, 나비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 날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있었는데, 막내가 먼저 발견했다. 조금씩 날개가 제 모습을 갖추어갔다. 나무를 베란다로 옮겨두었다. 오후가 되면 날아가겠지 싶었는데, 캄캄한 밤이 되었는데도 나비는 그 자리에 있었다. 다음 날 보니 나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어있는 것 같았다. 날개가 펼쳐지지 않고, 무언가 날개 사이에 끈적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한 생명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며, 열심히 키웠는데, 하루도 살지 못하고 죽은 나비를 보면서, 슬프기보다는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애벌레의 입장에서보면,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불편한 상황이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훌륭하게 번데기로 자라고, 또 그 껍질을 뚫고, 우화해 냈다. 그 과정이 위대하지 않는가. 애벌레가 된 나비를 돌아보며 일본선교에 대한 마음을 품고, 가족과 함께 발을 떼던 순간이 떠올랐다. 긴박한 코로나의 시작점에서 모든 것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멈추어지면서, 그어지던 펜이 멈추며 잉크자국만 짙어지는 것 같았다. 결국엔 종이만 낭비하는 헛된 자국을 남기는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힘차게 날갯짓을 해 날아올라야 한다고 스스로를 밀어올렸지만, 모든 것은 멈춤과 같았다. 그 긴 기다림이 실패같기도 하고, 절망의 터널같기도 했다. 아직까지 그 시간들의 상채기가 남아있긴 하지만, 돌아보면, 가족끼리 단단해지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게 하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던지고 건너온 선교의 삶이 하루만 살다간 나비처럼 보였지만, 선교를 위한 첫 발은 의미없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유 하늘/ 일본선교사·동경지구촌교회 교육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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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5
  • 우리나라 금수강산
      우리나라 금수강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이 확연히 구분되어 아름답다. 봄은 검은 땅에서 젖은 나뭇잎 밀어 올리며 파란 연둣빛 새싹들이 돋아나고, 개나리 진달래는 일단 꽃부터 먼저 피워내고, 여름이면 초록빛 세상, 가을이면 산마다 오색 단풍 가득 차고, 겨울이면 흰 눈이 펑펑 내린다. 서른 번의 가을을 회색빛 안개에 젖은 파리에서 가을인지 봄인지 그날이 그날 같은 곳에서 지내면서 이웃 사는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우리나라는 봄은 진짜 봄이고, 여름은 엄청 더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가을은 파란 하늘이 높고 청명, 겨울은 매서운 추위가 코끝을 날리지만, 햇빛이 쨍하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내게 일곱 살 손자가 말한다. “할머니 다 좋은 거 아니에요, 봄엔 황사가 있고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추워요 ”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가을이고 우리나라 가을은 세계 최고야, 하늘이 높고 맑고....” “그런데 가을에도 나쁜 게 있어요 너무 좋은데 너무 짧아요 ” 손자는 이번 가을을 일곱 번째 맞을 터인데 우리나라 가을이 좋은 것을 알고 있구나. 서울의 가을이 짧은 것 같아도, 가을 벌판은 풍성하다. 여름내 만발한 배롱나무꽃들이 시들어 한 잎, 두 잎 떨어질 때쯤이면 들판의 벼들은 황금빛으로 노랗게 여물어지고,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한 농부는 배롱꽃 지는 것을 보며 구수한 햅쌀밥 냄새를 맡는다. 추곡기가 바쁘게 오가며 벼들은 베어지고 추수가 시작된다. 논고랑 틈에 끼어 양분을 나누어 먹던 가라지는 알곡과 구별되고 알곡만 곳간에 들어간다.   우리나라 금수강산 가을이 어느덧 지나가고 있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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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성서와 생활[5] 그리스도인의 영성 -기억의 영성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레26:42.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을 기억하는 자들에게 약속을 성취하신다.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찬양해야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기백성과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26:45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 민15:39 해야한다.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심,시111:5은 하나님이 그 자녀와 언약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셔서 그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시111:4.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신7:19 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언약 곧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돌보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로 그의 심판아래 두셨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20:8는 명령은 순종의 여부를 알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으로 만족한 안식을 통해 육신의 일을 쉬고 성령안에서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인자하심(사랑)을 찬미하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알게하신다.   오늘날 주의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영원한 사랑을 기억하며 찬미 드리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멘 예배자를 찾으신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함이 우리의 삶이며 예배이다. 우리가 사망에서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 딤후2:8하는 일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23:42라는 강도의 고백 속에 주의 나라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약속한 나라를 구할 때 그 나라를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구제를 기억해 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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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8
  • [변두리 소수자⑨] 동행 속도
      외국에서 서울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역동성이다. 그 느낌이 상쾌하다. 내 걸음도 빨라지고, 마음도 활발해 진다. 나보다 늦게 걷는 이들이 있으면, 추월도 한다.   아내와 함께 걸으면, 거의 매번 듣는 말이 ‘천천히 걸으라’는 것이다. 따라 걷기가 힘들단다. 그래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힘들다’고 말하면 속도를 조금 줄이게 된다.   2022년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국민생활체육조사’ 결과는 한국인의 보행 속도를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완보, 산보, 속보, 급보, 강보, 그리고, 경보이다. 이들 중에 급보부터 올림픽 종목에도 들어 있던 경보 수준까지의 세 단계는 일상적 보행 속도는 아니다.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시간당 4.8km 라고 한다. 노인의 평균 보행속도는 1분에 64m 로, 시속 3.8km 였다. 완보와 산보 사이에서 완보에 가까운 속도이다. 속보에 근접한 젊은이들의 속도에 비하면, 시간당 1km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호주, 나이지리아, 탄자니아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노인 6,472명을 비교한 결과, 가장 빠른 속도였다(The Journals of Gerontology, 2023.04.08, 분당서울대병원).   한국 국민 모두가 빠르게 걷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현상과도 비슷하다. 이전 세대에서 빠르게 달려 왔던 노년층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 세대와의 조화에 신경이 쓰이고 눈치도 보이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지금의 노인들이 젊은 시절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 만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낙심한다. 청년들과 노년들이 열심과 성취에 대해 비교 할 때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의 생물학 교수 카라 월 셰플러는 걷는 속도로 대인관계에 대한 문화적 영향을 실험했다. 시애틀과 우간다 중부의 무코노(Mukono)라는 타운의 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1,700명이상의 사람들이 걷는 시간을 재고, 분석하여, 2018년 9월 호 <PeerJ-Life and Environment>에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혼자 걸을 때의 속도는 우간다의 사람들이 시애틀 사람들의 걷는 속도보다 평균 11%가 빨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는 그 속도가 느려졌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동반했을 때의 속도는 혼자일 때보다 약 16%가 더 느렸다고 한다. (2018.10.02. 뉴욕타임스 특약-한국일보 기사 참조)   환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시애틀은 여유로운 도시였다. 나도 대학 시절을 보내고,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든 곳이다. 그런데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앞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시애틀의 주민들이 걷는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오히려 빨랐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와 걸을 때 빨랐고, 다른 남성보다 앞에 서면, 그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남녀 모두 아이들과 함께일 때도 속도가 빨랐다. 자녀를 안고 동행할 때의 보행 속도가 혼자 걸을 때보다 20% 빨랐다는 부분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셰플러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의 사정까지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사회의 대인 관계 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는 자료이다.   걷다가, 가끔 연상되는 말이 있다. ‘혼자 가려면 빨리 가고, 함께 가려면 천천히 가라.’ 빠른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인도의 격언이다. 우리 사회는 늘 앞에 가는 사람, 위에 있는 사람, 일등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 사는 사회는 뒤쳐진 이들을 기다려 줄 수 없고, 후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남들을 제치며 치열하게 얻어낸 내 승리의 보상을 가족 외의 남들에게 ‘준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불렸던 썬다 싱이 30살 때, 티베트의 눈 산을 넘게 되었다.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와 높이 쌓인 눈길을 걷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가파른 비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를 구조하여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동행하던 동료는 나도 힘들다며, 먼저 가 버렸다. 썬다 싱은 그 부상한 사람을 등에 업고 아주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어렵게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걷는 중에, 얼어 죽어서 쓰러져 있는, 앞서 먼저 떠났던 친구를 보게 되었다. 자신만의 체온으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 싱은 부상자를 업고 힘들게 걷는 동안, 더워진 체온 때문에 부상자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회도 잘 사는 자들의 힘과 젊은이들의 희망이 손을 맞잡아야 따뜻해 수 있다. 먼저 살면서 쌓은 것들을 나누는 자들과 뒤에서 뛰는 자들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회가 어두워진다. 지치도록 달려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청년들에게 그 연령대를 살면서 많은 것을 갖게 된 어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녀에게만 돈을 주면 자기들끼리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 사회에 빵을 나누면, 좋은 나라에서 그 후손들도 함께 잘 살게 된다. 먼저 얻은 부가 사회의 공존 자원으로 흘러야 한다. 그 격차가 줄어야, 서로의 손이 닿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진한 속도가 시속 2~3마일(4~4.8km) 정도였다고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는 답답한 속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대열에서 어떻게 남는 시간을 썼을까? 그들은 가끔 뒤돌아 보며, 뒤에 오는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부축하거나, 업기도 하고, 마차에 앉히느라 그 속도가 느려졌을 것이다. 노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청년들을 잠잠히 축복했을 것이다.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시지만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서, 그들과 함께 가시던 하나님도 그런 그들을 보시며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하여, 그 마음에 흐르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한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 한국이 함께 잘 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1:31, 29:5).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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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4
  • [한국기독교소설산책] 세례의 은총의 기적, 그 영원한 각인 ② - 정광숙의
      ‘여성동아’지의 장편소설 현상 공모의 당선작이기도 한 정광숙(1945- )의 가톨릭소설 <순교자의 피>(1992)는 순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주인공 지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일종의 가족사소설 형식을 빌려 탄탄하게 전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지은은 순교자 집안에 밀어닥친 몽유병의 간헐적 발작과 정신분열 증세 및 근친상간 행위 등의 음산한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다.   이 소설의 이런 분위기 역시 도스토옙스키적인 면을 상기시키는 비극적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문학 작품 가운데서 비극적 원죄소설의 성격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순교자의 피>가 아닐까 한다. 특히 서구의 비극적 원죄소설들이 가톨릭적 배경 하에서 써진 것이 대부분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 점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그것들과 상당한 친근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4명의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6명이 처형된 후 당시의 법대로 시체는 만3일간 방치해 두기로 돼 있었다.” 이 서술은 1866년에 일어난 이른바 병인교난과 관련되어 있다.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조선인들 중의 하나인 이기호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의 내용인 것이다.   얼른 위 인용문의 첫머리만 보아서는 무슨 천주교 수난사화를 전개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내용을 기록한 무슨 역사소설 형식의 순교사화는 아니다. 순교자를 조상으로 두고 있는 어느 천주교 집안의 후대의 이야기를 가족사소설 형식을 빌려 기록한 가톨릭소설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체로 전개되기 때문에 독자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주 간결한 문체로 웅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끌어 가기 때문에 독자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 하는 강한 호기심에 지속적으로 사로잡혀, 숨죽여 가며 다음 장면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것은 그러나, 맑고 밝은 내용의 이야기만은 결코 아니다. 아니 상당히 어두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면 이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이 몽유병과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병적 환경이기 때문이다.   진(세례명 빌립보)이란 친척과 지은 사이에 벌어진 근친상간 행위, 곧 진이 미성년 학생 지은에게 가한 성폭력 행위와, 지은 자신이 미국 땅에 이주한 뒤 특수한 상황 하에서 벌인 매춘 행위, 또 진이 지은에게 죄를 덮어씌운 채 자살하는 일, 그리고 배경적 역할을 하는 친인척들의 이(李) 정권 하에서의 친독재 부역행위, 또 그런 이들의 권력 붕괴 및 그들에게 가해지는 테러 행위, 지은의 남편(승선)의 자기 아내에 대한 정신적 학대, 승선 자신의 신경쇠약과 불면증세, 그의 다발적 여성 편력과 대학생 제자 폭행 사건, 그리고 그의 아들 준호의 경기(驚氣) 발작 증세… 등 음울하고 비극적인 작품의 분위기 위에 여러 죄악의 세계가 덧씌워져 있는 실상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이런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예기치 않게 살인 혐의마저 입고 10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주인공 지은에게 의외로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준 것은 이 작품 속의 ‘믿음의 조상’ 격 인물인, 이미 고인이 된 이장현 할아버지의 꿈속에서의 출현이었다.   호호프에 의하면, 이 세계가 비록 죄악으로 타락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신의 은총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런 그 세계는 거룩한 곳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써 이 세계의 죄악과 은총의 변증법적 대립의 상을 그리는 작품이 곧 원죄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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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4
  • 성서와 생활[4]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4)-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크나큰 복음에 대한 것임을 시편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게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 대로 사는 길이 바로 성취된 복음 안에서 사는 길이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 생명이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말한다.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고 주님의 생명이 나로 천국생활을 구현하게 하실 것이다 이미 성취된 사실인 복음에 감사함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신다. 이로인해 우리의 마음은 생명수 샘물이 흘러나와 청결함을 얻게 된다. 마음이 청결함은 매우 중요하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감사가 우리로 풍성한 승리를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승리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을 때 만이 가능하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우리를 다음과 같이 부탁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주님의 간구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선지자의 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의 승리로 인해 믿을 수 있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왕으로부터 구원받은 시점에서 감사함이 종료되지 않는다. 애굽에서의 구원 이후에 오는 보호하심의 더 큰 구원의 섭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사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우리의 처지이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시136:23)고 하신 점이다. 우리는 육에 속한 비천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죄에 매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천한 자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돌보시사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셨다.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할 자는 바로 그의 자녀들 뿐이기 때문이다. 매일의 생활에 감사로 깨어있는 자가 그분의 자녀이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구속 함을 받은 그의 자녀들의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늘의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의무이며 성품이 되어야 한다. 감사를 배우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신다.  감사가 없는 삶은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된다. 감사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는 믿음의 역사를 소망할 뿐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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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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