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8(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8)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진 상태에 있는 것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되고, 우리 심령 성전을 잦나무와 같은 진리의 특성, 즉 첫째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말씀으로 완공해야 하는 것이다.   2:1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샤론' 은 엘리야가 이적을 베푼 갈멜산에서부터 욥바 사이에 있는 비옥한 평야이다. 이는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하는 애굽 땅과 달리 그곳은 하늘에서 비를 흡수하는 땅이다. 위에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받으며 오직 그것으로 만족하며 위에 계신 하나님만 앙망하는 땅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샤론의 평야같이 많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것을 가리켜 장미라고 하는 것이다. 재림하실 주님의 신부 신앙에 올려 세워진 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한량없이 많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로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부된 자는 "나는 사론의 장미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샤론의 장미다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올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한량없이 많은 것이다.   '골짜기'는 낮은 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백합화는 꽃 중에 향기가 가장 진동하는 백색의 꽃이다.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가장 낮고, 낮은 데서 향기를 최고로 발하는 신부의 신앙 모습을 가리킨다. 내가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지고 낮아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또 더욱더 낮아지게 되어져서 겸손과 온유가 충만하여 오직 신랑이 되는 주님만을 지극히 높이면 최고로 향기를 발하는 백합화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골짜기의 백합화이다. 최고로 주님을 높이고 높이되 자신들은 최고로 낮아지고 낮아진 것이 바로 풀무 불에 들어가는 데까지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이 자기 자신이 골짜기의 백합화가 되어지면 주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는 자로서 100% 순교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2:2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나의 사랑도 딸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딸들'은 1:5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은 예수 믿는 신자들을 지칭한다. 예수를 믿는 대다수의 교인 중에 신부 성도는 특별한 다른 무엇이 있다. 신부 성도는 주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자이다. 그래서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특별하다.’ 고 말하는 것이다.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는 바람이 불 때 가시나무가 백합화를 사방에서 찌르게 된다. 문맥상 ‘가시나무’ 와 ‘딸들’ 은 동격이므로 딸, 즉 육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신부 성도를 핍박하고 괴롭게 하여 가시나무처럼 찌르는 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백합화는 가시나무에 찔림을 당하는 신부 성도를 계시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인 백합화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서 주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마치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가 되는 것은 순교자의 명부에 녹명이 된 자를 가리킨다. 바람이 세차게 불수록 가시나무가 백합화를 찔러대는 것이 심하다. 장차 주 재림전에 있을 7년 환란에 들어가면 더욱더 찌르는 핍박이 심하게 된다. 그러면 백합화는 향기를 더욱 토해 내게 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육적인 요소가 있으면 가시나무와 같은 딸들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2-28
  • [향유옥합] 그 사랑 신비의 거룩
       성경은 최고의 사랑에 증거이다. 무엇이 사랑인지 지혜로 알게 하신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도덕과 윤리로 적용한다. 주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면 주를 헛되이 경배하게 함임을 성경은 경고한다. 이는 주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가르쳐 지키게 하여 죄사함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몫을 하게 하는 주의 제자화를 위함이다. 이를 위해 주님의 멍에를 메고 나와 배우라고 하셨다. 온유와 겸손한 자는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복음을 전하여 사랑의 실천을 하는 종으로 두 계명 지킴의 살리는 몫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거룩과 주의 제자화로 믿음과 성화임을 깨닫게 한다. 성령과 동행하여 구속 사역에 참예한다면 영적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의 나라 확장을 가져온다. 이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다. 롬8장5~8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증거 하셨다.    즉 거듭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의 사랑 적용은 도덕과 윤리로 육체를 중심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사랑의 뜻을 알 수 있으며 행할 수 있음을 발견케 한다. 곧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실천은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는 구속 사역의 몫이며 생명으로 살리는 사랑이다. 도덕과 윤리의 사랑을 한다면 거듭나게 하지 못하기에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심을 깨닫게 된다.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셨다. 로마서에는 많은 부분 이를 분별하도록 증거한다.    곧 성경 해석 적용은 육을 중심으로 한 도덕과 윤리가 아니다. 영혼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영생을 상고하는 목적이다. 오직 주를 믿고 좇아 성령으로 거듭나면, 사랑의 개념을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알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 살리는 진리를 가르쳐 주 안에 속하도록 지키게 할 것이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하신 확증이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계명을 실천한 사랑의 결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의 나라 확장을 이룬다. 사랑의 기준은 도덕과  윤리로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어 육체대로 판단 적용이아니다. 원죄를 입고 태어난 자들의 그릇된 선과 악에 대한 육의 기준이다. 복 음으로 사람 살리는 일의 시작이 되도록 주께서 본을 보이신대로 그 자취를 좇아야 한다.   주의 마음을 품은 자들의 사랑은 주의 영이 없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푼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그 행함으로 믿음이 온 전하게 되었느니라’ 하신 말씀에 입각한 사랑을 실천해 살리는 몫을 함이다. 곧 사랑은 주를 믿고 좇아 아버지의 뜻대로 사람을 살 리어 주의 제자화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신비의 거룩을 바로 알게 되는 지혜의 사랑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 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아멘/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2-27
  • 성서와 생활 [16] 그리스도인의 영성- 십자가의 영성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따르는 자들이어야한다. 이는 십자가의 은혜를 넘어 ‘은혜 위에 은혜’요1:16의 역사에 참여하기위함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다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사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함을 최종목적으로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 요3:36을 주시려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알게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영성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 생명수로 흘러 넘치는 생활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이 있는 분은 오직 예수 한 분 뿐이시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요5:12라고 하신 것이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믿어야한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상태로 만족할 것이 아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의 열매에 이르러야만 한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얼마나 애통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라고 하셨다.    주님이 받을 세례는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이셨다. ‘한 알의 밀알’요12:24 이 되어 죽으심을 통해 많은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주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분의 성령에 의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라고 하셨다. 주님의 살을 주심으로 우리로 주님의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51 이러한 진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어야 한다.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진리가운데로 나아가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참 생명되신 우리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셔야만 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훈련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사람이기보다 주님의 영을 의지하여 사는 진리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대전 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2-27
  • [에레모스 영성 4] 시험의 땅, 광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마태 4:3)    여러 날 먹지 못하여 주린 상태에 있는 예수에게 사탄은 말했다. 인간의 욕구 가운데 으뜸은 식욕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모습을 보면서 이를 실감한다. 먹어야 산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한다. 이런 굶주림으로 연명하는 이들을 제쳐놓고 왕 노릇으로서의 메시아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당신이 나라님이 되어서 우리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에게 향하는 당연한 요구이며 따라서 사탄은 민중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먹는 빵으로 사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인가? 내가 빵을 만들어 민중을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왔는가? 내가 백성들을 만족 시켜야 하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나? 그분은 때로 5병2어의 기적을 베풀며 수천 명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하였으나 배불리 먹고 난 사람들이 그런 기적 때문에 예수를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했다. 왜냐하면 빵 때문에 따르는 사람은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메시아적 공생애 기간은 빵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빵이 되는 길이었다. 그분의 가장 큰 관심은 육적 생명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참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명을 위한 영적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깨닫기를 원하였다. 그분 자신도 바로 ‘그 말씀’으로 사탄과의 대척점을 유지 할 수 있었으며 끝내 유대인의 왕을 넘어서는 온 인류의 왕, 왕 중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      
    • 오피니언
    • 칼럼
    2024-02-26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7) 우리집은 백향목과 잣나무다
      부활체이신 주님과 우리가 함께 누워있는 침상이 푸르르다   주님이 신부 성도에게는 엔게디 포도원에 있는 캠퍼송이로다.   1:16 보라, 너는 어여쁘며 나의 사랑하는 자야, 참으로 사랑스러우니, 우리의 침상도 푸르도다.   ‘우리의 침상’이니 신랑 예수님과 신부 성도가 함께 사용하는 침상이다. 침상에 들기 전에 입맞춤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1:2). 또 목자를 찾아갔다. 또 집을 짓는 단계를 거친다. 침상이 푸르리니 생명이 자라남이다. 활기차게 약동한다. 계속하여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영적 의미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녹보석 같다(계 4:3)고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의 보좌임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영광을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입혀주실 것을 계시하신다. 장차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받을 때 받은 그대로가 아니라 항상 푸른 초목의 녹색과 같이 새롭게 된다. 즉 처음 받은 영광에서 기하급수적으로 계속 자라게 하신다. 재림하실 주님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 분은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임당했었다. 그 결과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다. 한없이 존귀하게 되시어 하늘보좌에 좌정하신다. 우리도 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는 자들이다. 장차 7년 환란날에 신앙 정절을 지킴으로 반드시 순교하게 되리라. 이 순교는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순교케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주 재림때 첫째부활의 영광(계 20:4~6)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부활체이신 영광의 주님과 우리가 함께 누워있는 침상이 푸르르다. 나도 부활체, 즉 첫째부활의 영광을 받은 자이다. 첫째부활의 영광이 성도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요, 복이다. 성도의 부활 순서가 고전 15장에 나온다. 주 재림때 부활하는 자들이 있다. 그 다음은 나중에 부활한다- 주님 재림때 순교자들이 먼저 첫째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온다. 신랑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 바울도 이것을 더 좋은 부활이라고 증거했다(히11:35). 그러므로 첫째 부활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는 우리의 침상이 푸르르다. 곧 녹보석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1:17 우리 집의 들보들은 백향목이요, 우리의 서까래들은 잣나무로다.    우리 집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성도가 함께 사는 집을 가리킨다. 복되고 환희가 넘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 자리에 나는 순교를 통하여 첫째 부활의 영광을 입은 신부가 된다. 또한 재림하시는 영광의 주님은 신랑이 되어 함께 사는 우리집이 되는 것이다. 백향목은 백색의 향나무 같아서 수명이 천년까지 산다. 우리집의 대들보가 백향목이라함은 우리집이 천년간 향을 발한다는 것이다. 이향이 무엇인가? 7년 환란 때 하나님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해 순교한 성도들의 찬양이다.     이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첫 번째 부활한 자들이다. 재림주님이 세운 왕국에서 천년동안 주님과 함께 백성들을 통치하며 감사찬송하는 것이 백향목의 향이다. 재림하신 주님과 첫째 부활한 신부 성도가 부활체로 함께 사는 기쁨과 행복의 날들이 우리집의 대들보라고 한다. 우리가 이를 미리 믿음의 실상으로 누려야 한다. 또한 우리의 서까래들은 잣나무라고 했다. 잣나무는 성전재료이다. 노아방주도 잣나무로 지었다. 잣나무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고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     또 물에 잘 썩지 않는다. 이것은 잣나무 같은 진리의 특성을 계시하는 것이다. 즉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것같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영광을 바라보며 생명 길로만 나아가는 진리이다. 또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는 것은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켜 순교할지언정 비진리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진리이다.    또한 물에 썩지 않는다는 것도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진리 특성을 가리킨다. 이 잣나무진리는 곧 첫째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의 심령성전을 잣나무의 특성과 같은 진리의 말씀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즉 첫째부활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 우리의 서까래가 되며 우리집 짓는 재료인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2-20
  • 성서와 생활 [15] 그리스도인의 영성예절의 영성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고전14:3 아니시다.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품위있고 질서있는 삶’고전14:40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 이 사랑의 생명은 고린도전서에 이름과 같이 선한 열매를 풍성히 나타내는 능력이다. 그 중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라는 말씀이 있다. 사랑은 예절을 알게 한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예절이 없다는 말이며 이것은 곧 혼란과 무질서를 의미한다. 사랑의 생명이 있는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예절을 잃지 않게 한다.    이러한 질서에는 말의 예절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부터 예의 있는 말을 배워야 한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의 예절을 통해 가정에 천국의 질서를 세워야한다. 부부의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부의 도리가 된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해야한다. 이러한 가정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예의 바른 가정이 되게한다.    행동과 태도와 의복에도 마땅한 예절이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의복을 가정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입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향한 예의이다. 특별히 문둥병에 걸린 옷과 같은 형태나 남녀 구분이 없는 옷을 피해야한다.신22:5 물건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에는 던지지 말아야한다. 쟁반에 받히거나 공손히 손으로 전달해야한다. 칼이나 가위 등은 위험한 부분을 돌려서 전달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특별히 가정 안에서 이러한 예의를 잘 행하여 평안한 가정을 세워야한다. 가장 친밀한 가족 간에 마땅한 예절이 실종되면 악한 본능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예절에는 음성의 예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말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음성에 미움과 사랑이 드러난다. 악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합당한 음성의 예절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말에는 부드러운 어조가 필요하다. 함부로 말하거나 거짓된 것을 말해서는 안된다. 거친 어조와 교만한 억양도 예의가 없다. 자신을 동정하는 억양이나 자신을 사랑하는 억양도 합당한 표현이 되기 어렵다. 자신의 희생을 나타내는 표현도 합당하지 않다. 오직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무례하지 않은 언어의 영성을 갖춘 예절을 필요로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2-20

실시간 칼럼 기사

  • [변두리 소수자⑧] 마음건강
      요즘 여러 나라에서 인종갈등과 차별문제 등으로 인한 부당한 일과, 심지어는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공존을 위한 긍정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좋은 시민들이 함께 좋은 노력을 할수록, 좋은 사회를 이뤄서, 나와 내 가족도 그 좋은 사회에서 함께 좋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분위기가 험악하면, 시민들도 각박해 진다. 특히 타 인종과 타 문화권의 사람들과 갈등이 심해진다.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과 개인적인 습관, 표현하는 모습 등을 부정적으로 받는 피해의식을 가질 수 있다(Victim Mentality). 상대방의 평범한 시선을 의도적인 비하로 판단하기도 한다(State of Mind). 그러나 어떤 경험도 성장하는 기회로 삼는 마음을 갖도록 훈련이 필요하다(Falling Forward). 한국 사회는 그런 면에서 이전보다 많이 좋아진 듯하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들도 좋은 시민이 되면 좋겠다.   이를 위해, 나는 한국사회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나의 이민 생활과 학업, 사역을 통하여 배운 경험들을 나누고 있다. 그들의 정서와 정체성이 건강하게 훈련되어, 이 사회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잘 살아 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또한 그들의 시민의식이 건강해야 이 사회가 평안해 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 첫 해에 경험한 일이다. ‘Jafco’라는 전자제품 백화점에 가서, 사용하던 전자시계의 건전지를 바꿔달라고 점원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 백인 여성은 나의 발음을 흉내 낸 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나를 놀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한 중년 신사가 오더니, 그들에게 비켜달라고 한 후 내 앞에 서서, 정중히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려 진열장 안의 모든 시계들을 보여 주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했다. 그 분은 그 백화점의 당시 책임자였던 것 같았다. 그 분은 직원이 고객에게 잘못을 했으니, 대신 사과하고 보상을 하고 싶다는 뜻으로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분에게 ‘나는 지금 시계의 건전지를 바꾸려고 왔으니, 그렇게만 해 주면 된다’고 말하자, 그는 손수 내 시계를 열고, 건전지를 바꾸고, 세척까지 한 다음, 정중하게 서서, 상냥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시 사과를 하였다.   이 일은 당시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내 마음을 잘 지키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값진 승리였다. 이후의 이민 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마음 대신 좋은 사람과 기억을 마음에 담는 선례가 된 것이었다.   콜린스 영어사전과 대부분의 사전은 이런 ‘마음 상태’를 ‘특정한 순간’에서의 내 기분과 정신 상태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마음 상태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예시했다.    “I want you to get into a whole new state of mind.” 때에 맞는 새 마음으로 나를 늘 조정해야 한다. 마음에 있던 상처와 피해의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면 상대의 의도를 왜곡할 수 있고, 불신을 깔아 놓고, 남을 대하면 도리어 피해를 줄 수 있다. 나는 소수자, 피해자, 연약자의 입장이니, 다른 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저항하고, 권리를 주장하면 상대편은 공연히 매도되는 억울한 입장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갑질 못지 않은 ‘을질’의 저지름이 되는 것이다. '피해의식'은 나쁜 경험으로 인해 두려움과 거부감이 마음에 자리잡는 동안, 그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면, 그로 인해 인생의 어느 때에, 부정적인 거부감, 방어의식, 분노, 불평, 불만 표현으로 ‘피해자’ 입장을 정당화하며, 책임의식도 약해진다. 마음에 있는 부정적 에너지를 표출하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피해자 입장의 자기 요구를 ‘정당한’ 권리라 생각하고 투쟁하는 동안, 남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으니 그야말로 아픔을 사회에 악순환 시키는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며칠 전에 동남아 국가의 어느 민족단체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에 이런 이슈를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수업을 마치기 전에, 공부 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젊은이들이 이해 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내가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의 입장으로 오래 사는 동안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한 방법을 소개하고 나누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백화점에서의 경험을 했던 청년시절에 내 마음을 지키려고 했던 한 습관이었다. 당시 나의 좌우명격인 말씀을 손수 크게 써서, 내 방 문지방에 붙여 놓고, 외출하기 전에 복창하였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이 사회에서 각 개인이 건강한 마음으로 살고 대한민국이 더욱 강건하길 소원함으로 기도한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 오피니언
    • 칼럼
    2023-11-10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수면이 보인다 (3)
      렘수면은 신체는 잠자고 있으나 꿈을 꾼다거나 안구가 움직이는 등 뇌는 깨어 있을 때와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렘수면은 깨어날 준비 상태라 할 수 있어서 깨우면 쉽게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48시간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정상적인 뇌 활동이 되지만 그 이상이 되면 정상적인 활동이 어렵게 된다.   그러면 왜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신경세포는 다른 신체조직의 세포와 달라 일단 망가지면 재생될 수 없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잠을 잔다는 것은 뇌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잠을 자지 않는 동안에도 뇌파의 기록을 보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수면뇌파가 기록된다. 이를 미세 수면이라고 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전혀 잠을 자지 않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뇌는 적당한 수면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보통 7~8시간의 수면이 적당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수면이란 필요에 따라 가감될 수 있어서 엄격하게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처해진 환경에 따라 각각 정해진 범위의 리듬생활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휴식을 취하는 1일의 리듬생활을 한다. 즉 명암의 빛 리듬에 동조하는 생활을 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 오피니언
    • 칼럼
    2023-11-09
  • 정성구박사 칼럼
      국민의 힘 혁신위원장 인요한 박사가 요즘 큰일들을 하고 있다. 그는 전국을 누비며 상상도 못 할 신선한 아이디어로 정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요한 박사의 행보에 대해서 국민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다음 선거의 유, 불리를 따져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요한 박사는 미국인이면서도 토종 한국인이다. 또 그는 의사임과 동시에 교수이며, 남 장로교(P.C.A) 선교사이기도 하다.   나는 인요한이 남 장로교회의 보수신앙을 그대로 고백하고 간증하고 있기에 마음에 평안이 왔다. 그는 그의 선대 선교사들의 뒤를 이어서 66권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은 <성경>이라는 것을 명백히 간증하고 있다. 사실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켜 오던 북 장로교는 자유주의 물결로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종교다원주의로, 혼합주의 사상으로 변질되어 이른바 연합장로교회(PCUSA)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하는 메이첸이 중심이 되어 정통 장로교회(OPC)가 생겼다. 연합장로교 사람들은 대부분 ‘모든 종교는 같다’는 사상을 가진 이른바 에큐메니컬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 교회는 유럽교회처럼 무너져 가고 있다. 신학의 자유화가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 왔다. 미국 교회는 청교도 신앙 위에 세워졌다고 하지만, 청교도 신앙은 이미 18세기에 병들기 시작해서 무너지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은 청교도적 신앙을 찾을 수가 없고, 대부분 신학교에서는 자유주의 사상, 성경 비평주의, 종교 다원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형국이다.   남 장로교회도 한때 큰 어려움에 빠졌으나, 남 장로교회는 북 장로교회에서 이탈한 교회와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바로 남 장로교회에 뿌리를 둔 P.C.A(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이다. P.C.A 교단을 만드는데 숨은 역할을 한 지도자는 금세기 대 전도자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였다. 그는 몰락하는 유럽교회의 선교사로서 스위스의 알프스 길 몫에 라브리(L’abri) 곧 피난처를 만들어 알프스를 찾는 신학자, 목사, 교수, 예술가, 정치가, 대학생들에게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이고 <성경>만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유럽과 미국과 세계를 깨웠다. 나는 52년 전에 프란시스 쉐퍼 박사와 함께 <라브리 공동체>에서 그의 메시지를 듣기도 하고, 쉐퍼 박사를 껴안고 함께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그 한 사람 쉐퍼 박사가 남 장로교회 후신인 P.C.A 교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인요한 의료 선교사의 입에서 오직 성경(Sola Script- ura)이라는 말이 나와서 기뻤다. 특별히 그는 인휴 목사 선교사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사람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말한 대로, 나는 인휴 목사님을 미국 에틀란타 조지아에 있는 남 장로교 선교부에서 만났었다.   인요한 박사가 영적으로 완전히 깨어지고 변화된 것은 다름 아니라, 여수에 있는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였다.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5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소록도의 나환자를 위한 목회를 하고 있었다. 6.25때 공산주의자들은 여수를 점령하고, 당시 손 목사님에게는 장래가 촉망되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는 공산당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순교를 당했다. 그런데 손 목사님은 천벌을 받아도 마땅할 그 공산당 청년을 용서하고 오히려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남대문 교회에서 두 아들의 장례식을 치를 때 오히려 그는 하나님 앞에서 <9가지 감사>를 한 것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인용준 목사님(전 고신대, 총신대 교수)이 손 목사님의 말씀을 받아 쓴 것을 필자가 가지고 있다. “또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의 순교를 주시니 감사합니다”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 자신도 퇴각하는 공산당에 의해서 복숭아밭에서 순교 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인요한은 “여수 손양원 목사의 순교기념관은 예루살렘 성지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고백하면서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있게 된 것은 순교 성자 손양원 목사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가는 곳곳마다 간증하고 있다. 인요한의 가슴 속에는 앞선 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뜨거운 가슴으로 손양원의 순교 신앙과 삶을 간증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40년 전부터 한국교회의 위대한 선각자들, 길선주, 김익두, 김화식, 주기철, 손양원, 박형룡, 박윤선, 한상동 등의 사상과 삶과 그들의 메시지를 책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10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2002년 헝가리에서 그 책이 출판되었을 때, 내 책 가운데 「손양원 목사의 순교 신앙과 설교」라는 곳을 읽고 그들은 “손양원 목사의 모델”이라고 말하며, 과거 공산당의 앞잡이 하던 자들을 어찌 처리할는지 고민하던 중, 손양원 목사님이 보여준 <사랑>, <희생>, <통합>, <용서>를 자신들의 모델로 삼았다고 했다.   인요한 박사는 ‘여수 애양원 손양원 목사의 3 부자(父子)의 순교’를 깨달으면서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고, 한국의 위대한 성자요, 대 전도자요, 사랑의 사도인 손양원 목사님을 그의 정신적 멘토로 삼았다. 지금 그는 의료 선교사에 걸맞지 않게 국민의 당(혁신위원장)이 되어 <용서> <사랑> <희생> <통합>을 외치며 일하고 있다. 안용준 목사는 손양원 목사의 전기를 쓰면서 그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했다.   인요한의 정신적 멘토인 손양원 목사를 한국사회와 정치계와 한국교회가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칼럼
    2023-11-08
  • 바람같은 성령
    가을이다. 바람이 분다. 오색단풍이 온산을 덮고 나뭇잎들이 가지위에 펄럭인다. 아침 햇살에 땅위에 떨어진 낙엽들은 팔랑이며 재잘대며 바람과 함께 이리저리 구르며 골목길을 누비고 어깨동무 마주 보고 까르르 웃음꽃 피운다. 목소리 높여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다. 나뭇잎새들이 가지위에 펄럭이는 것을 보며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알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되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은 바람 같고, 불의 혀 같고, 물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비 같고,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으며, 비둘기같이 임하셨다. (행2:3, 요4:14, 7:37, 시72:6, 마 3:16) 삼위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언제나 항상 함께 일하신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셨고(창1:2)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요 1:1~14)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며(마1:18~20) 잡히시던 날밤 겟세마네 동산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더하셨고(눅22:43)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4:1)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다. (요14:9~10)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성령도 이와 같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3-11-07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수면이 보인다 (2)
      이 시점에서 깨어나면 자신이 잠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단계에서는 호흡과 맥박은 느려지고 근육은 이완된다. 제 2단계는 조용하게 잠든 상태로써 이 시점에서 깨어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질 때까지 2~3초 걸린다. 그래서 자신이 잠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들고 나서 30분정도 지나면 제 3, 4단계가 되는데 뇌파는 진폭이 커지고 느리게 된다. 이때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이다. 아주 깊은 잠에 빠진 후 30분정도 지나면 다시 제 3, 2, 1단계로 되돌아간다. 잠자는 동안에 이 같은 리듬이 반복되는 것이다. 잠의 제 1단계 때에는 팔다리의 근육은 힘이 빠져서 마비상태처럼 된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안구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인다. 물론 이 단계도 잠자는 상태이다.   잠자는 동안에도 뇌는 활발히 움직이고 신경세포의 재생도 일어난다. 잠자는 동안에도 뇌는 활발하게 활동하며 안구에 명령을 내린다. 이 단계에서 뇌는 안구에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도 명령을 내려서 맥박이나 호흡이 빨라지고 얼굴이나 손발이 꿈틀꿈틀 움직인다. 이 단계가 렘수면이다. 잠들고 나서 3시간 정도 사이에 비렘수면인 깊은 잠에 빠져든다.    거의 90분 간격으로 렘수면과 비렘수면이 교대로 4~5회 반복된다. 아침이 가까워지면 비렘수면도 얕아지고 렘수면은 40~60분 간격으로 빈번해진다. 그래서 깨어나기 쉬워진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 오피니언
    • 칼럼
    2023-11-06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수면이 보인다 (1)
      오늘날의 인간은 원시수렵 사회는 물론 농경사회에서도 벗어났지만 최근의 달라진 생활양식이 뇌구조나 성 차이에 반영되기에는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의 역사가 너무 짧다고 볼 수 있다.   잠은 깊은 잠과 얕은 잠의 리듬으로 이루어진다. 잠자는 동안에 뇌와 몸은 보통 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잠은 깊어졌다 얕아졌다 하는 리듬이 있고 성질이 다른 두 종류의 잠이 있다. 그 하나는 뇌도 잠잔다고 할 수 있는 상태이다. 뇌파를 보면 뇌의 활동이 휴식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의 리듬으로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에 해당한다. 맥박과 호흡은 느려지고 규칙적이 되며 조용하게 잠들어 외부 자극으로 쉽게 깨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는 뇌가 약간 활동하고 있어서 뇌파를 보면 빠르고 잠의 리듬으로는 얕은 잠 상태이다. 이 시기에 꿈을 꾸게 되고 안구가 빠르게 움직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 때를 급속안구운동수면, REM(렘)수면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급속안구운동이 없는 잠을NREM(비렘)수면이라고 한다. 이처럼 잠을 잔다는 것은 렘수면과 비렘수면이 반복되는 것이다.   우선 잠자리에 들면 전신의 근육은 이완되고 머리가 멍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빠르게 잠에 빠져든다. 이것이 잠의 제 1단계이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 오피니언
    • 칼럼
    2023-11-03
  • [향유옥합] 한국사회, 돌봄목회의 필요성
        “상담하면 좋아질 수 있나요?”   20대 중반의 한 자매가 센터에 와 울며 한 질문이다. 반팔 티셔츠가 무거워 보일 만큼 그녀의 팔은 얇았고, 얼굴은 창백했다. 3년 전 자살 시도를 했고 2년 전부터 강박과 우울로 약을 복용 중이라고 했다. 교회에 상담센터가 생겼으니 제발 한번 가보자는 엄마의 권유에 할 수 없이 방문한 상황이었다.   얼른 물 한 잔을 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자매는 컵에 손을 대기도 전에 울었다. 낯선 이를 마주하는 지금이 몹시도 긴장됐나 보다. 우는 자매 앞에 앉아 그저 한참을 머물며 바라보았더니 그녀는 내가 아닌 컵에 눈을 맞추며 물었다.   “제가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마음이 저렸다. 꽃같이 예쁜 아이가 왜 저리도 슬픈 눈으로 살 수 있는지 물을까?  “너에게 약을 줄 수는 없지만, 같이 아파해 줄 수는 있을 것 같아. 뭐가 힘든지 내게 말해줄 수 있어?”   그렇게 시작한 상담을 40회기 정도 진행했고 정기적인 만남도 이어가고 있다. 상담을 통해 20여개가 넘는 강박증상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그리도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 교회에 출석하며 예배드리는 자매를 볼 때면 ‘아, 살았다. 너도 가정도 교회도…. 우리 모두가 살았다’ 혼잣말을 하며 미소 짓게 된다.   모든 생명은 생존을 위해 싸운다. 환경을 변화시키든 나를 성장시키든 인류는 환경에 맞추어 생존해 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는 변화와 성장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자들로 가득차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낮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약 10년 동안 자살율이 100%이상 증가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며, 현재는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자살 공화국’이 되어버렸다.   며칠 전 보건복지부에서는 유의미한 통계 하나를 내놓았다. 지난 3년간(2020-2022) 팬데믹 질병 사망자 수(32,156명)보다 동일한 기간 자살 사망자 수(39,435명)가 더 많다는 보고이다.   이제 한국의 재난은 지진, 홍수, 질병이 아니라 ‘자살’이다. 10대부터 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며 원인은 ‘정신과적 질환’이라고 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동네 병원에서도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국가 지원으로 상담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이런 사회가 되었을까?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 하나는 내놓을 수 있다. 바로 ‘돌봄 목회’의 회복이다.   한 사람이 자살에 이르기까지 많게는 40번의 시도가 있다고 한다. 이 시도 중에 그 사람을 돌보는 따뜻한 손길을 한번이라도 만난다면, 희망을 선물하는 교회를 만난다면, 환경을 극복하는 생존자가 되지 않을까?   과거 한국교회가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사회복지사업으로 민중의 고통에 동참했다면, 이제는 우울, 불안, 죽음의 자리에 내몰린 이들을 돌봄으로 사회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함께 웃고 함께 울 자가 필요하다. 우울증 약을 처방할 수는 없지만 상담과 돌봄은 교회가 제공할 수 있다. 자살이라는 재난 속에서 생명 살림을 실천하기 위해 이제 교회가 돌봄으로 응답해야 할 때다. /목사·과천교회 시냇가 상담센터 총괄팀장    
    • 오피니언
    • 칼럼
    2023-11-03
  • [건강교실] 현대인의 발과 건강 (하)
      발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는 잘못된 관습을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의 생활 때문에 우리나라 30대 이상 여성의 엄지발가락 외반증의 유병율이 70%에 이르고 있다. 10명중의 7명은 엄지발가락이 새끼발가락 쪽으로 기울어지는 변형을 가지고 있다. 옛날에는 버선발이라고 해서 버선을 오랫동안 신은 사람에서 볼 수 있었고, 지금은 하이힐 때문에 많아졌다.   둘째로, 어쩔 수 없이 하이힐을 신은 경우에는 자주 구두를 벗고 발가락운동을 해야 한다. 발가락을 구부렸다 위로 젖혔다 하는 운동도 좋지만, 발가락을 벌리는 운동을 자주해야 한다. 특히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과 멀어지도록 벌려야 한다. 이것이 잘 안되는 사람은 이미 엄지발가락외반증이 시작된 것으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엄지발가락이 잘 안 벌어진다고 해서 손가락을 이용해서 벌려서는 안된다. 손가락으로 벌리면 오히려 엄지발가락외반증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보조기를 이용해서 꾸준히 벌려야 한다. 발바닥을 주물러서 발근육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도 발의 건강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다.   셋째로, 가능하면 운동화를 신거나 앞이 둥근 구두를 신는 것이다. 구두를 신었을 때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발등에 끈을 묶는 형태의 신발이 발에 좋고, 신을 벗고 신을 때에는 끈을 조였다 풀었다 해야 한다. 끈을 풀지 않고 신을 신고 벗고 하는 경우에 신이 발에 착 달라붙지 못하고 헐거워지게 되고, 신발이 상대적으로 무겁게 느껴지게 된다. 발뒤꿈치가 꽉 조여지지 않아서 신발이 크게 느껴진다. 이런 분들은 자주 발등이 아프다. 병원에 찾아가도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발목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발목을 위로 젖히는 근육에 무리가 가서 이런 증상들이 생긴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가벼운 신발이지만 장시간 헐겁게 신게 되면, 발목을 위로 젖히는 근육에 무리가 가고, 따라서 발등이 아픈 증상이 생기게 된다. 이런 분들은 무릎아래 정강이뼈 바깥 쪽에 있는 근육들을 자주 주물러서 근육을 풀어주어야 한다.   넷째로,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길이도 적당하고, 볼도 알맞는 신을 신어야 한다. 신발바닥에는 허리쇠가 들어가 있어서 신발 형태가 틀어지는 것을 막고, 일정한 부위에서 바닥이 구부러지게 한다. 걸어갈 때 엄지발가락 뿌리관절(중족지절관절)과 신발바닥의 구부러지는 부위가 일치해야 하는데, 신발이 발길이보다 길어서 이것이 일치하지 않으면 엄지발가락 중간에 힘이 실리게 되고, 이곳에 굳은살이 생기게 된다. 걸을 때마다 엄지발가락 끝에 힘을 주게 되므로 엄지발가락 뿌리관절은 점점 굳어지게 되고 위로 젖히면 통증이 생기는 ‘엄지발가락 강직증’이라는 병이 생길 수 있다.   길이는 발가락의 제일 긴 길이보다 1센티미터정도는 신발이 길어야 한다. 길이와 볼에 꼭 신경을 써서 신발을 골라야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신발 깔창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발의 뼈가 둥글게 아치형태를 이루기 때문에 사람의 발바닥은 올록볼록 굴곡이 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발 바닥은 편평하다. 구두바닥을 자신의 발바닥 모양처럼 굴곡지게 만들면 체중이 고르게 분산되기 때문에 발이 굉장히 편해진다. 특히 오래 걸어다니는 사람이나 오래 서있는 사람의 발은 발의 종아치나 횡아치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발이 변형된 다음에 원상태로 회복시켜 놓는 것은 아주 힘들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좋아지기 때문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라’라는 말처럼 발이 정상처럼 보일 때, 올바른 신발을 신는다면 발이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예쁘고 건강한 발을 간직할 수 있다. /한양대 류마티스병원 관절재활의학과
    • 오피니언
    • 칼럼
    2023-11-03
  • 성서와 생활⓵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1)-
    살고자 하는 자의 인격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는 말씀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는 본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사의 생명은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게 된다. 감사는 언제 어떻게하는 것인가? 라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원자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를 시편 136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이유가 26번이나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심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사랑에 오직 감사함으로 화답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측량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은 오직 아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감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감사의 친밀하고도 완전함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한 당연한 요구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감사는 예수그리스도의 또 다른 몸인 교회에 부여된 사명으로 이어진다.   시편에서의 감사의 내용은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이다. 세상을 발아래 두신 주님의 승리 안에서 주어지는 감사이다. 이러한 감사는 단순히 우리가 접할 수 없는 감사의 세계로 인도한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한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가능하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고 하신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가능하다. 만물 위에 뛰어나신 주님께 대한 감사이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심에’,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아들이신 주께서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 있는 감사이다. 이러한 깊은 감사를 우리에게도 명령하셨다. 이는 우리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찬미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의 인격으로 완성하기 위함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3-11-01
  • [향유옥합] 창조의 계절과 생명의 물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했던' 창조의 때를 떠올린다. 그때 그 기운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바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느낀다. 그런데 자꾸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들녘의 모든 풀이 말라 죽어야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죄악 때문에, 짐승과 새도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내려다보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렘12:4)”는 안타까움에 내밷는 탄식이 터져나온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지 12년이 지났지만, 우리 일상은 여전히 핵발전으로 인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발생한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그 안전성을 보증했다고 말하는데, IAEA는 핵 산업의 촉진과 확산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구다. 태평양에 새로운 방사능 물질을 풀어놓는 것이 지금도 바다로 흘러들고 있는 방사능 오염수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무겁다. 후쿠시마 어민들과 일본 전국어민연합도 방류를 반대했다. 방류는 결국 일본은 물론이고 주변국 시민들의 건강, 바다 생태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오염수 투기에서 얻을 이익은 전혀 없다. 태평양 주변국들의 연합인 태평양도서국포럼(PIF)의 전문가 패널들의 질문에, IAEA도 정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며칠 전 일본은 핵 오염수의 방류를 시작했다. 사고가 아닌 국가라는 이름으로 합의 하에 버렸다.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앞으로 30년 동안 방류하면서 후손과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떠넘길 수 있을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마음이 추스려질지 가늠이 안된다. 핵, 방사능 오염수는 눈을 뜨고 바다를 봐도 바다로 흘러드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육안으로 볼 수는 없을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바다 생물들과 그에 기대어 사는 이들과 어떻게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누구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바다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우리 삶은 물론이거니와 지구 이야기는 이어질 수 없다. 잠시 멈추어 마음을 바다로 향해보자.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방류를 멈출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특별히 지금 우리는 창조의 계절을 살고 있다. 호주의 노먼 하벨이 구상한 후로 미국의 데이비드 로드와 H. 폴 샌트마이어가 협력하여 더욱 발전시킨 절기다. 보통 교회력은 예수님의 생애를 따르기에 창조주 하나님께 집중할 특정한 시기가 없지만, 기후위기 시대이니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그리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의 시선을 두어야 한다. 몇 해 전부터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은 이 시기에 하나님의 창조를 묵상하는 ‘풀꽃과 나무, 일상 속 물건’ 등을 묵상하게 하는 40-50편씩 편지를 나눴다. 올해는 ‘화성으로 간 책방’과 함께 세계교회가 한 마음으로 ‘생명의 물’을 묵상하면서 묵상꾸러미와 함께 13주간의 묵상레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문의 [ecochrist@hanmail.net](mailto:ecochrist@hanmail.net)). 주님이 오시는 대림절이 오기 전까지, 물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톺아보며, 온 천지를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을 되새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지어다(암 5:24)" 우리 모두는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강에 합류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를 ‘마신’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시냇물이 되어야 한다. 기후 불의와 생물 다양성 파괴에 취약한 공동체를 위해 생태 정의를 실천할 때이다./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센터장
    • 오피니언
    • 칼럼
    2023-10-3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