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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유옥합] '희년'오늘,다시
     이 소영       “오랫동안 꿈을 그리던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13년 전에 처음으로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적어 놓은 글귀이다. 20세기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지드(André Gide)가 남긴 명언이다. 그 당시 좋아했던 문구였는데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 문득 생각이 났다. 이 글을 페이스북에 처음 남긴 그 날의 나를 기억해 보면, 지금 내가 ‘희년함께’라는 단체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 꿈같이 여겨진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적었을까? 그때가 아마 나의 꿈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신앙이라 믿었던 나에게 새로운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여러 기독교 단체와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성경의 희년 정신을 바탕으로 토지정의를 위한 실천운동을 하고 있는 ‘희년함께’를 만나게 되었다. 사적인 믿음에서 공적인 믿음(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참여한 독서 모임에서 내 인생의 책들을 마주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예수원 설립자인 故 대천덕 신부의 《토지와 경제정의》와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진보와 빈곤》이었다. 희년 강의가 너무 좋아서 한 번도 빠지지 않으려,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트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성경을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공부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공부하고 훈련하며 배움의 열정과 기쁨이 있던 시절이었다.   “나팔 소리가 울리고 또 울려서 드디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끓어오른다. 지금 세계에는 강한 정신과 고결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감옥에 갇혀있고, 인생에서 피어나는 진선미를 철의 수레바퀴가 깔아뭉개고 있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中 -   그 이후로 오랫동안 희년함께 회원의 자리에 머무르다 지난 2022년 2월부터 정식으로 희년함께 실무자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 희년함께/희년은행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며 간사로 근무한 지 어느덧 2년이지나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13년 전에 처음 참여했던 독서 모임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지난 주부터 ‘헨리조지와 함께 기도하기’라는 주제로 희년함께 실무진뿐만 아니라 단체회원들도 함께 《진보와 빈곤》 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13년 만에 인생의 책을 다시 만나니 처음 이 책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있다. 그동안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새로움과 깨달음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특별히 “왜 사회가 진보할수록 빈곤이 생기는가”에 대해서 사회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그 시대가 지닌 과거 경제사상을 깨뜨리고 자신의 논리를 펼쳐가는 헨리조지의 노력에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서 헨리조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멋진 글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진보와 빈곤》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함께 읽고 대화하고 나의 인생 구절을 만나기도 하면서 서로의 기도가 되어 지금 우리 시대에서 제2의 헨리조지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땀의 가치는 땀 흘린 이에게, 땅의 가치는 모두에게”   올해는 특별히 희년함께가 출범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희년함께가 걸어온 역사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며 새롭게 그려갈 그림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내가 희년함께에서 일하고 있는 자리는 2년 전 하나님 품으로 떠난 남편이 오랫동안 담당했던 일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며 아픈 몸에도 꾸준히 성실하게 자신의 숨이 다할 때까지 희년의 사역을 감당해온 남편의 자리였다. 그리고 내가 남편의 자리를 대신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희년함께’는 40년 동안 희년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분들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 땅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려운 숙제들을 잘 감당하며 풀어가고 어려운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이끌어주고 배려해주는 헨리조지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 틈에서, 올해부터 새로운 멤버로 합류하게 된 사역팀장과 함께, 단체의 역사를 배우고 책 모임을 하면서 새롭게 알아가며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희년함께의 사역 활동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며 공부하는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13년 전 내가 희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마주했던 기쁨과 열정으로 한 구절 한 구절 놓치지 않으려 노트에 빼곡히 적었던 것처럼, 헨리조지가 가진 열정과 따뜻한 마음으로 희년함께가 땀 흘려 걸어왔던 길을 희년의 사람들과 함께 오늘도 힘차게 나아가려 한다. 천천히 오래 꼭꼭 씹으면서.. / 희년함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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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향유옥합]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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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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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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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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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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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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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들레헴에서 베다니로 (2)
    베다니는 고난, 슬픔의 집이라는 뜻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다. 그곳에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병환자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로 추정하기도 한다.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자주 이 베다니에 머무셨다. 주님께서도 생전에 율법을 잘 지키신 것 같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에 있었다.(행 1:12)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서 …‥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제자들을 데리시고 베다니에 가서 유하시니라,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마 21:18, 막 11:12) 베다니에 유하셨는데 조반도 들지 못하셨을까? 무화과나무로 가셨는데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 무화과는 말 그대로 꽃이 없고 열매부터 맺기 때문에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이미 열매가 맺혀 있어야 했다(마 21:19, 막 11:11~14).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요한복음에서도 11장과 12장에만 기록되어 있다. 그 이튼날 유월절, 베다니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종려나무 가지 들고 환영하는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시었다. 오히려 유월절 전에 행하신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이 13장에 있으니 마치 나중에 끼워 넣은 듯하다.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 것은 AD 66~68년경이라 하고, 예루살렘은 AD 70년에 무너져 내렸다. 요한이 복음서를 집필한 것은 AD 90년경 에베소였을 것으로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요한도 세월이 지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축복 하시더니 축복 하실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눅 24:50) 예수님은 베다니 앞에서 승천하셨다.예수님께서 다시오실 때 베다니 하늘 위로 오실까?슬픔의 마을은 축제의 마을이 되고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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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9
  • [더 하나되는 새날들] 온전케 하는 서로 사랑
    새해 새 날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라는 은혜의 말씀을 신앙의 규범과 행함에 바른 자세로 정하여 성경 기록목적에 입각한 지혜를 찾는다. 말씀에 순복하는 주의 종들은 주님의 자취를 본받아 새 생명으로 살리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지체들로써 소금과 빛의 합당한 몫을 해야 함이다. 이에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고 특별히 믿는 성도들을 더욱 사랑해야 하는 마땅함을 말씀 하셨다. 곧 주의 종들에게 전도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 선한 일을 하고 특별히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더욱 서로 사랑을 하라고 하심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거듭난 지체들은 주를 사랑하여 공의로 생명 살리는 구속사역에 힘쓰는 몫을 해야 하며 특별히 주의 뜻을 위해 거듭난 자의 서로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곧 거듭난 지체들의 서로 사랑은 주를 사랑하는 일로써 이웃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는 주의 백성들이 많아지도록 온전케 하는 목적이다. 요한일서5장1~3절 거듭난 자들의 서로 사랑에 실천 여부는 주를 사랑하는 것과 연계되어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증거 하셨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하시어 두 계명의 실천 유무와 연계하셨다. 곧 거듭나게 하신 주를 사랑하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주의 지체를 사랑하며,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임을 계명들을 지키는 것으로 들어 증거해 주셨다. 거듭난 지체들의 서로 사랑은 결론적으로 한 몸을 이룬 주의 지체들의 머리되신 주를 사랑하는 계명과 연계시켰으며 또한 서로 사랑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하기위한 목적이기에 이를 실천하여 주를 사랑한 계명으로 깨닫게 하심이다. 즉 주의 영으로 거듭난 자는 이웃사랑으로 주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주의 섭리를 알고 한 몸을 이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계명들임을 사랑에 몫으로 연계한 말씀이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의 뜻과 섭리를 알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 자이며,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주의 지체들의 서로 사랑은 곧 주를 사랑한 일로 연계시켜 계명들 지킴임을 확증해 주심이다. 그러기에 거듭난 지체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주를 사랑하지 아니한 자이며 또한 전도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여 주를 사랑하지 아니한 자라는 결론이기에 이에서 돌이켜 계명을 지키도록 권면해야 한다. 곧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의 마음을 품고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성전의 기능을 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 되게 하고 주의 나라 확장하는 일에 성도로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한 서로 사랑을 지키도록 깨닫게 하심이다. 그러므로 새해를 열어 주신 선물의 날들을 서로 사랑으로 더해가며 심령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온전케 새 계명으로 확장해 감을 알게 된다. 새 계명의 실천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섭리임을 깨달아 더 하나 되는 새날들로 주를 사랑하여 이웃 사랑으로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서로 사랑의 실천을 더욱 지켜가길 소망한다. 주님의 경륜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새기며.../오이코스대학 객원교수, 바이블아카데미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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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9
  • [신년에세이] 또다시 매일 충만한 삶
    “지금의 어려움은 끝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매일 봄으로 가고 있다” ▨ 누구에게든지 아침은 온다 새로운 시작이란 우리 인생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축복인가. 누구에게든지 이 새로운 시작은 동시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새로운 시작은 매일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고 하셨다. 이렇게 우리에겐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며 일곱째 날까지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일곱째가 되는 날 충만함에 이르러서야 안식이 찾아온다.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약1:17)온다는 축복이 예약되었음을 알려 준다.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께서 약속하셨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잠22:4) 우리들은 약속이라는 무한한 축복의 씨를 소유한 하늘의 자녀들이다.  온 세상은 하나님이 낳으셨으니 신께로 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가! 우리는 매일 새 아침을 맞이하며 매일 예약된 축복을 누리며 충만한 날을 계수하며 달려가는 자들이다. ▨ 누구에게든지 천국을 주셨다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신 축복을 계수할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약속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축복하고 계신가. 그 음성을 알아들을 줄 아는 할례 받은 귀(계2:11)가 될 때 말씀이라는 축복의 씨를 믿음으로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는 즐거운 매일이 거듭되는 것이다.   이 축복의 씨를 ‘레마’라고 이른다. 객관적인 진리는 지식으로 오지만 주관적인 진리는 믿음으로 인친 것이 되어 나를 이끌고 축복하게 된다. 누구든지 요한복은 3장 16절을 다 객관적 지식으로 그치기 쉽다. 이 구원의 말씀이 주관적인 진리로 듣는 귀가 있다면 기뻐 뛰며 이렇게 외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에게 독생자를 주셨으니 나는 멸망치 않고 나에게 영생을 주셨으니 나는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레마’는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주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천국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누구든 ‘하나님의 뜻’ 알수 있다매일 새로움을 맞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살아 간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라고 하셨다. 바로 그렇다 우리의 낡아지는 생각으로 슬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는 매일 새로워지는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성경, 설교, 꿈,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알기 쉬운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의 환경에 있다. 환경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읽고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질서를 펼치시는 주님과 나란히 갈등 없이 화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 속에서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매일 충만으로 가득할 것이다. ▨ 누구든지 주님을 알아야 한다“~참 신과 참 사람이 되시려고~(찬송가122장) 예수님은 이 세상의 열악한 유대의 말세에 태어 나셨다. 주님이 태어난 환경은 죽기위한 환경이셨다. 그래서 죽기에 합당한 유대 땅에 오셨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회복하시려고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그 분의 권위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오늘날 교회가 이 순복의 길을 가도록 하기위해 오셨다. 우리는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음으로(약1:20) 온유한 주님의 성품이야말로 새로운 그릇이 되는 필수 조건임을 알수 있다. 겨울의 끝에서 우리는 찬란한 봄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의 어려움은 끝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매일 봄으로 가고 있다. 반드시 매일 저녁이 되고 새 아침이 찾아온다. 벌써 좋은 새날이다.   /수필가·대전 반석교회 목사·한국기독교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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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9
  • 연말 연시 이웃사랑에 힘쓰자 (2)
      나의 외국인 돌봄 이야기는 핀란드 자매 돌봄이다.   2,000년 부활 주일에 서초구 양재동, 남편 목사와 함께 개척한 ‘베델교회’에 영어 교회가 탄생하였다. 한 건물 두 교회 개념이다. ‘베델교회’ 와 ‘베델국제루터교회’가 그것이다. 이 국제 교회의 초대 담임 목사는 남편과 친구인 미국루터교회 목사인 벤 웬드목사로 남편 목사의 초대에 큰 결단으로 화답하여 한국으로 건너와 세운 교회이다.     이 국제루터교회에 핀란드에서 온 자매가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폴란드인으로서 삼성에 스카우트되어서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중에, 국제루터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안타깝게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리고 남편은 새벽별을 보고 나가서 한밤중에 퇴근하게 되어서, 너무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별히 스칸디나비아인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는 루터교 국가이다. 당연히 이 핀란드 자매도 루터교인이다. 그리고 부러운 것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모국어 외에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배워서 영어에 정말 능수능란했다. 그래서 국제루터교회가 낯설지가 않았고, 미국인 목사가 인도하는 주일 예배에 잘 참석하였다. 사실 한국으로 건너 오기전에 미국에 ‘스데반 사역원’에서 지도자 자격을 획득하고 오라고 하여, 스데반 돌봄 지도자가 되어 왔지만, 사람과의 만남을 기피하는 것은 아니나, 친화력이나 사회성은 많이 부족하였다. 물론 영어로 개설된 스데반 돌봄 강습회에서는 탁월하게 가르치는 능력을 보였으나, 실천적으로 돌보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리하여 외국인 교인 돌봄, 특별히 이 핀란드 자매는 스데반 돌봄 사역의 원장인 나의 몫이 되었다. 처음 만날 때, 그 자매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 그리고 외로움을 극복하게 도와줄 돌봄자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성경 공부와 예배 외에 일주일에 한 번 거의 두 시간씩 돌보기 시작하였다. 돌보면서, 나는 한국에 오래 있을 것 같으니, 한국 말을 배우라고 하여 시도는 했으나 이내 포기하였다. 한국 말 배우기가 참으로 어렵다면서, 그래서 영어로 소통할 친구를 찾기가 어려워, 결국 이 자매를 지속적으로 돌보게 되었다. 나의 영어가 외국인 자매를 돌보는데 이렇게 쓰임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돌봄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많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이 자매의 외로움과 고독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였고, 혹 스데반 돌봄을 받지 못했다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잘못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시아에 있는 나라를 여행해보지도 않았고 언어와 문화의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취미 생활로 농악을 배우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었는데 같이 배우는 수강생들이 영어로 소통이 되지 않으니까 서로 오해도 했지만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서 공연에도 여러 번 가서 응원해주었다. 이 일이 이 자매에게는 외로움 치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돌봄을 종결하여,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이 자매와 가끔 연락하여 기쁨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가끔, 그때 언니가 없었더라면, 내 인생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고 고백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하나님, 이 땅에 스데반 돌봄 사역이 잘 정착되게 하여, 돌봄으로 많은 이들이 주님 앞에 바로 서게 하옵소서! /스데반돌봄사역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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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9
  • 서사라 목사는 몽사가(夢思家)인가?
      얼마 전에 지인의 소개로 ‘성도 티비’(SungDo TV)라는 유튜브를 시청한 적 있다. 필자는 이 여자 목사(성도님)가 서사라 목사를 몽사가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비판 아니 비방하는 것을 보고 이런 행위가 합당한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그녀의 발언은 신학적으로 타당성을 지니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기가 지닌 비판기준으로 상대방을 몰아세우는 것 같았다.   필자가 서사라 목사를 알게 된 것은 2019년초로 기억된다. 총신대원 선배이고 고교 후배 목사 한 분이 서목사의 서적을 읽어볼 것을 권고했다. 필자는 즉시 신청하여 그 당시 7권의 저서를 구입하여 두세 주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읽었다. 성경은 지옥과 천국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는 제공해 주지 않는다. 아마 바벨탑 사건과 더불어 더욱 파괴된 인간의 언어로서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리고 성경에서 우선 급한 일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을 받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이전에 재임시 종말론을 강의하면서 기존 가르침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에 관심이 쏠린 것으로 여겨진다. 마라나다 정신이 미흡하고 현실중심적인 경향이 농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뉴톤 시대의 그에 방불한 스웨덴 과학자인 스웨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고 저술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과 미국 하바드 의과대학 교수이던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가 쓴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도 읽어보았다. 그리고 지옥과 천국에 대해 간증하는 여러 유튜브도 들어보았다. 서목사의 간증수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대부분은 본 것을 기행문식으로 열거하지만 서목사는 천국에 있는 주님과 믿음의 선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한번은 필자의 거주지 근방에서 서목사의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살짝 참석하며 설교를 들은 적 있다. 서목사의 관심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하는 일에 있었음을 감지했다. 저녁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지인 한 분이 참석한다길래 나중에 내용을 전해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집회에는 인(印)침을 받는 집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 지인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필자는 듣고 매우 놀랐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참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들 이마에 십자가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에스겔서 9:3-4에 기록된 내용과 너무나 같았다. “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7장은 이마에 인을 친다는 말만 한다. 그런데 서목사가 본 이마의 인은 십자가였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인을 ‘십자가’라고 하는가? 필자는 2012년 초여름 구약학자이던 고(故) 최의원 박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을 기억했다. 한국 최초로 히브리 원어에서 순수 우리말로 구약성경(새즈믄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한 최박사는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구약에서 유일하게 십자가가 나오는 구절이라고 하시며 자기는 “곱셈 표시”(✕)로 번역했다고 한다. 최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싫어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추었다고 말했다. 사실 에스겔서 9:4의 ‘이마에 표하라’는 것의 히브리 원문에는 ‘이마에 타우(ת)를 그리라’이다. 필자는 여러 가지 번역 성경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이마에 표하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독일어권의 유명한 성경인 ‘츄리숴 비벨’(Züriche Bibel)에는 ‘십자가를 그리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 다음 필자는 여러 가지 주석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카일과 델리취는 이 표를 십자가라(cross)고 지적한다. 카일과 델리취는 본문의 타우(ת)가 히브리어 알파베트 맨 나중 글자임을 지적하면서 히브리어 더 초기 문헌에서는 ‘십자가 형태’(×)를 가졌다고 한다. 현대 주석가인 Block도 본문의 타우(ת)가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임을 지적하며 고대 문서에는 Χ 형태 또는 십자가 형태를 취했음과 아람어로부터 문자를 채용하기까지는 초기에는 이 형태를 취했음을 주장했다.   필자는 문득 독일 유학시절 히브리어를 배울 때 사용한 문법책이 생각났다. 그 당시 독일 대부분 신학교에서는 독일의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 예니(Ernst Jenni)가 저술한 문법책을 사용했다. 예니는 독일 구약주석가 베스터만(Claus Westermann)과 함께 두 권으로 된 구약히브리어 사전까지 저술한 바 있다. 예니의 히브리어 문법책은 먼저 히브리어가 어떻게 발전해 나왔는지를 설명하면서 문자 발전사 도표를 제시했다. 첫째 단계는 페니키아어 알파벳, 둘째 단계는 옛 히브리어 알파벳, 셋째 단계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 성경(BHS)의 알파벳이 표시되어 있었다. 필자는 에스겔시대의 문자는 둘째 단계임을 파악하고 둘째 단계 알파벳의 맨 끝자인 타우를 찾으니 ×였다. 에스겔은 그 당시에 ‘이마에 타우(ת)를 그리라’고 한 것이 ‘십자가를 그리라’고 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의원 박사와 츄리숴 비벨은 잘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카일 델리춰와 블록(Blook)의 주석은 옳은 것이다. 나는 매우 놀랐다. 2,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예언이 하나의 상징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지금도 지금 이런 집회에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이마에 인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만일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주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 긴박하게 준비해야 되는 시기가 아닌가?   필자는 서목사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어서 궁금하던 여러 가지 문제를 물었다. 특히 유체이탈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서목사는 유체이탈은 두 번 경험했고 대부분 몸은 땅에 있으면서 하늘 세계를 본다는 것이다. 그녀의 저서는 그녀의 인격적 주체는 땅에 있는데 그녀의 영적인 실체가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녀의 영이 하늘로 올라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신비한 사건으로 보인다. 필자는 성경에서 이런 경험을 한 선지자들이나 사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있으면서 예루살렘을 오간 기록이나 사도요한이 하늘 세계를 보며 장소를 이동하는 것과 유사한 것인가? 그렇다면 에스겔의 영적 실체의 움직임이나 사도요한의 이런 장소이동은 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서목사가 단순한 夢想家(몽상가)가 아니라 깊은 영적인 체험을 곧 물리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체험을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무모한 비판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녀는 성경에 충실하고 경건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목사가 66권 성경 이외의 성경을 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저서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서목사는 성경을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녀 나름대로 영적인 체험을 통해 난해구절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목사가 내어 놓은 이런 새로운 해석들은 신학적인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학회나 포럼이 필요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서목사를 비판한 글들을 읽어보았는데, 더러는 매우 좁은 비판 기준으로 가치없는 비난 수준의 글도 볼 수 있었고 더러는 나름대로 한국교회를 위하여 비판하는 글도 있었다. 필자는 포럼 주관체측이 이들로 하여금 다음 포럼에서 발표하고 신중한 논쟁이 있으면 신학 발전을 위해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비판가들이 서목사의 발언을 비판하기 위해 해당 구절을 주석하는 내용에는 전문가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사람의 신학은 그 사람의 믿음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비판할 때는 그 사람의 믿음이 바른가를 살펴야 한다. 진보적 신학이든 보수신학이든 믿음이 바르다면 결국 그의 신학은 건전한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경건한 믿음은 바른 신학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다.   사실 서목사의 저서에는 기존 신학의 시각으로 볼 때는 당황 캐 하는 내용도 많이 나온다. 그런 내용들은 신학적인 고찰과 비판을 요할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신학자들이 그 동안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파악하게 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비판할 것이 있다면 서목사의 발언을 매우 세심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에 비판한다면 실수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성도티비’의 여목사가 비판하는 자세는 천로역정의 아볼리온을 생각나게 했다. 그녀의 쏟아놓는 발언에는 자신만이 심판자로서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오만함도 엿보였다. 이런 사람이 신학자를 함부로 비판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런 사람의 사고의 근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필자의 눈에 비친 서목사는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한, 경건한 한 사람의 전도자로 보였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의 천국지옥 간증은 몽상가가 아닌 전도자로서 큰 역할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권호덕 교수(콜부루게연구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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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12-26
  • 연말 연시 이웃사랑에 힘쓰자 (1)
      금년 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폐렴으로 인해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해보다 여러모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스데반 돌봄 사역도 어려움을 겪기는 매 일반이다. 스데반 돌봄 사역 지도자 강습회를 열 수가 없었다. 돌봄 사역의 확산이 막힌 듯하여 어렵기도 하지만 돌봄 사역원 운영에도 큰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어 주실 주님의 섭리를 믿으며, 돌봄 사역의 재개를 소망하고 있다. ‘이웃사랑에 힘쓰자’라는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 ‘외국인 돌봄”의 케이스’를 소개하려고 한다.   편인 책임 목사께서 미국 ‘컨콜디아 신학 대학원’ 에서 선교학 박사 과정을 공부할 때 백인 총각 목사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가 심장 내과 의사이며 형들 다섯 명 모두가 의사이다. 그러나 이 백인 목사는 중학교 때 여름 신앙 수련회인 유스 리트릿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깊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으로 인해 목회자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학을 진학할 때, 의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학과를 지원하지 않고, 목사가 되기에 도움이 되는 학과를 지원하였다.그러면서 부모님과 형들에게 자신은 목사가 되겠다고, 뜻을 밝힐 때,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모두가 의사인 가문을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의 반대가 유독 심했다고 한다. 어머니도 반대했지만 그 이유가 달랐다고 한다. ‘힘든 목회자의 길‘을 가려는 막내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만류를 하셨단다.   대학 시절에는 미국 사회의 소외 계층인 흑인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또한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완전 백인인 우리 가정에 흑인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반대로 심한 상처를 입으며 헤어 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늘 흑인 사랑이 커서 흑인이 많은 교회를 찾아 다니며 목회를 하고 그들을 섬겼다. 목회를 하던 중에 자신이 돌보는 흑인 청소년들과 농구를 하던 중에 깡패를 만나게 되고, 그 깡패들로부터 자신의 학생들을 보호하려다가 칼로 허벅지에 찔려 큰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큰 교통 사고도 만나게 된다. 그 일로 인해 병원에 오래 입원하게 되고, 퇴원한 후에는 걷는 데는 지장이 없으나, 더 이상 달리면서 그 좋아하는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입원하고 있을 때, 네 시간 비행기를 타고 남편과 함께 병문안을 하며 기도로 위로한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또한 그 일로 목회를 잠시 쉴 수밖에 없었고, 깊은 슬픔 속에 빠지게 된다. 동시에 우울증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때는 이미 스데반 돌봄 교육을 미국에서 받고 돌봄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는 남편은 이 백인 목사를 친구이면서도 피돌봄자로 마음에 품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돌보기를 시작하였다. 이미 한국에 돌아와서 서초구 양재동에서 목회하던 남편이 돌보는 도구는 주로 이메일과 가끔은 당시에 비싼 경비가 요하는 전화 통화를 하면서 돌봄을 지속하였다.   그렇게 돌봄을 지속하던 중에 기도를 통해 영감을 받아 같은 교회 안에 영어 교회를 병설로 세우기로 하고, 초청하고, 그 초청을 승낙하여 양재동에 베델국제루터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 머무르는 동안 미국 백인 목사의 돌봄은 자연스럽게 나의 돌봄이 되었다. 성경에 지속적으로 나그네 돌봄을 명령하고 있다. 이 백인 목사는 나에게 첫번째 나그네 돌봄이 되었다. /스데반돌봄사역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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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12-24
  • [쉽게 배우는 한의학] 화식면역요법을 통한 아토피치료(6)
      자가면역질환엔 체질개선제인 ‘윤피청’이 탁월   ‘화식면역요법’이란 그 원인이 정확히 밝혀져 있지도 않으면서 완화와 재발이 반복되는 자가면역질환인 아토피 건선·습진 등 난치성피부질환에 효과가 높은 경희신창한의원만의 새로운 치료법으로, 말 그대로 모든 음식을 익혀 먹으며 동물성 음식을 금하는 치료법이다. 아래와 같은 3요소가 충족될 때 피부질환의 치료 효과가 나타난다.   1. 체질개선 관리 (면역증강 한약: 윤피청) 몸의 면역력이 약해져 있는 자가면역질환 환자에게 체질 개선제인 한약(윤피청)은 효과 면에 있어서는 스테로이드제제 정도의 강력한 효과와 무엇보다도 빠른 작용발현, 그리고 지속적으로 피부증상을 완화, 개선시켜 주는 효과를 보여준다. 또한 장기간 복용시에도 인체에 부작용 없이 면역체계 이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체질 개선제로써 역할을 확실히 한다. 우리나라 특허청에 ‘피부질환개선용 조성물’로 물질 특허 2개가 등록되어 있으며, 15년 이상을 동일한 한약으로 치료를 하고 있고, 특히 난치성 피부질환의 특징상 장기치료를 요함에 따라 간기능검사(GOT, GPT)를 진행하고 있으며, 염려하는 간기능에 해악을 끼치기보다는 오히려 간기능이 호전됨이 수없이 관찰된다.   2. 피부보호 관리 (피부 외용제) 부드럽고 윤기있는 피부는 건조함이 거의 없으며, 피부가 건조한 건성 피부에 가려움증이 많이 생겨서 아토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아토피 환자에 있어서 보습제의 사용은 필수이다. 보습제와 세제를 선택함에 있어서 아토피 환자는 화학성분들이 피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화학성분이 없는 천연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3. 식이요법 관리 (화식 요법) 모든 음식을 기본적으로 익혀서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본인의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을 찾아내어 먹지 않음으로써 다시 몸의 면역력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화식면역요법은 음식을 섭취하는데 있어서 약해진 면역력을 높여주기 위해 반드시 화식을 강조한다. 생식을 주장하는 이들은 화식이 영양소를 파괴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면역력이 정상인 일반인과는 달리 면역력이 약한 아토피 환자들이 생식을 하면 이를 중화하고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져 증상이 더 심해지며, 게다가 현대는 토질과 공기ㆍ수질 등의 환경오염으로 그 독소가 그대로 음식물을 통해 인체에 섭취되어 그 증상을 더욱 악화시킨다.   화식은 바로 이런 독소 제거에 가장 쉽고도 원천적인 방법이다. 자연계의 모든 동식물은 어느 정도의 독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한의학에서는 이들 동식물의 독성 부분을 약으로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화식을 하면 일정 정도의 독성을 중화하고 해독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 100℃만 유지해도 인체에 해로운 세균의 90% 이상이 사라진다. 단지 ‘화식’이라는 하나의 행위로 우리는 섭취 가능한 독소와 세균의 90%를 제거하는 셈이다.   화식면역요법이란 위의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인체의 약해진 면역 기능을 증강시킴으로써 망가진 아토피 부위의 피부를 신속하게 재생시켜 준다. 재생된 신생 피부는 두꺼운 각질을 밀어내고 점차 정상 피부의 모습을 나타내어 궁극적으로 피부에서 땀이 나고 솜털이 자라나야 비로소 완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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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3
  • [실로암] 소통과 토론이 중요하다
    최근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 분노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쏟아내는 저주와 환멸들이 난무한다. 또 반대편은 국힘당을 비롯한 검찰과 보수언론, 보수 기독교를 적폐라 규정하며 비판한다. 암세포에게 스스로 알아서 사라져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저쪽이나 이쪽이나 서로에게 암세포이자 좀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에 이르렀다.   과거에는 노무현 정부가 일방적으로 비판받는 것을 보며, 언론개혁, 검찰개혁, 정치개혁, 국정원개혁을 아무리 외쳐봐야 결국은 안 바뀐다는 패배주의만 쌓여갈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완전 다르다. 이제는 바뀐다는 희망 가득이다. 전에는 보수 세력과 싸움조차 안 됐다. 언론이, 보수당이, 검찰이, 국정원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이 곧 여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적어도 무슨 말을 하든 반반으로 갈리는 사회가 됐다. 난 이게 더 흥미롭다.   문재인대통령 지지자들을 저쪽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문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든 다 지지할 것이라고 판단하며 대깨문이라 욕한다. 그런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만일 오늘 문재인대통령이 부동산은 공급의 부족으로 가격이 폭등했다며 갑자기 건설업의 규제를 풀고, 또 수요가 확보되어야 거래량이 유지된다며 가계 대출의 규제를 푼다고 말한다면 많은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또 문대통령이 오늘 갑자기 검찰개혁과 언론개혁, 경제민주화, 국정원개혁은 필요없다며 검찰총장을 독대하여 법무부장관 인사를 상의하고, 전경련 인사들을 독대해 대기업 규제 완하를 논의하며, 조선일보 방성훈을 따로 만나 국가가 나가야 할 바를 협의하고, 국정원장과 독대해 첩보라는 이름으로 각종 정보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면, 거의 모든 지지자들은 문대통령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적어도 국민의 40%가 문재인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그와 따로 친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니면 일방적으로 호도되어서 혹은 무식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며 언제나 희망했던 혹은 만들어보고 싶었던 사회상을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대통령과 민주당 의원들은 별에서 온 외계인들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그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대표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대표를 지지한다. 내가 나의 생각을 대변하는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이 대깨문이라면, 그래서 욕먹어야 한다면 정말 이상하다. 나의 생각을 문 대통령이 먼저 지지하고 내 생각을 따라 정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지지와 박수를 돌려보내고 있다. 기분이 좋다. 내 말 잘 따르는 대통령이라서!   그런데 나는 잘난 것이 하나도 없기에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늘상 공유하며 나의 생각을 수정해 나간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정확히 말하면 나의 개인적 의견을 따른다기 보다는 그렇게 형성되는 다중지성의 여론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더 나아가 문 대통령은 국힘당을 지지하는 나머지 절반의 대통령이기도 하기에 그들의 생각도 따라야 한다. 그래서 문 대통령이 오직 나만, 우리만의 생각에 따르지는 않는다는 생각에 조금은 섭섭하고,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래도 우리의 대표가 이렇게 전체의 대표가 된 마당에, 내 생각에 조금 맞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나의 대표를 비난하고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대표가 내린 결정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내가 이해 못하는 그 결정은, 대통령이 반드시 고민해야만 하는 더 넓은 공동체의 어떠한 문제에 대면하는데 따른 것이라는 신뢰를 지키는 수밖에.   ‘옳음 자체’가 있음 좋겠지만 그것은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절대반지와 유사하기에 아예 욕심내지 않고 버려버리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나 보수 세력은 자신들이 곧 법이고, 옳음 자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아닐까. 특히 평생 토론이 아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기만 해왔던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담론은 모두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디 서로 생각이 달라도 대화와 토론이 가능한 사회 구성원들이 될 수 있길 기대한다.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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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3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36
        우리나라는 매년마다 어김없이 뚜렷한 사계절을 체험하고 있다. 때때로 세계 각국의 여러 가지 기상 이변이 들려오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12월 최근에 홍수와 폭설이 동시다발로 내리는 곳도 있었다. 정상적이지 않는 계절의 기사를 보면서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자연의 막강한 힘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진리를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남북한의 노력들도 한겨울을 맞고 있다.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유엔의 대북압박이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평화를 위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두를 행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향한 목표를 향해 사심 없이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위와 같은 염원을 안고 몇 해 전에 청소년들과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남북이 대치하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안보교육 차원으로 역사문화 탐방을 다녀왔다. 임진각을 향해 달려가는 한강변 통일 자유로는 철새들이 유유히 겨울을 마음껏 즐기며 창공을 날고 있었다. 연무가 짙게 깔려 있어 멀리는 볼 수 없었지만 비극적인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안고 살아오신 어머니 아버지 세대가 피부로 경험한 그 현장을 발견하고 싶었다.   역사적인 1950년 6.25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국민들은 위기를 슬기롭게 잘 극복했다. 그 역사 현장 가운데 비무장 지대 안의 녹슨 증기 기관차는 70년의 세월을 거쳐 외롭게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임진강 철교를 건너 DMZ 경의선이 지나는 비무장 지대 남측 최북단 도라산역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라산역을 기점으로 서울까지는 56km이며, 평양까지는 205km라고 글귀가 붙어있다. 남북 철도 연결과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역 안에는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상징적인 통일호 승차권을 볼 수 있었다. 문산역에서 도라산역을 거쳐 판문·개성공단 그리고 손하, 개성까지의 연결 구간은 24km라고 하였다. 도라산역과 판문(개성공단) 사이를 ‘MDL’이라는 철길 명을 사용했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목에 민간인 통제 구역 안에 있는 자유의 마을 “통일촌”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아는지 모르는지 수많은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힘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 팀은 이어 제3땅굴을 방문하였다. 이 굴은 1978. 6. 10. 아군에게 발견되었다고 했다. 총 길이는 1,635m이며, 남쪽으로는 435m 북쪽으로는 1,200m로서 연간 22만 내지 25만의 내외국인이 방문하는 통일 안보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상부 탑승장에서 300m를 내려갔다. 그 현장을 보면서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는 것 같지만 이와 같은 땅굴을 파면서 무력으로 적화 통일을 획책하는 그들의 이중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도발 사건을 경험했듯이 우리 국민들의 안보 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민통선 안에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비무장 지대를 관통하는 272km의 ‘임진강’, 한국 전쟁 후 국군과 유엔 포로 12,799명이 귀환한 ‘자유의 다리’, 남측 최북단 ‘도라산역’, 전쟁 중 파괴된 ‘녹슨 증기 기관차’, 반세기 동안 묻힌 ‘장단면사무소’, 남북 연결 DMZ 내 ‘철도와 도로’, 분단의 상징 ‘판문점’, 남측 자유의 마을 ‘대성동’ 등을 역사 문화 탐방을 통해 생각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평화를 생각하며 고귀한 국가 안보 의식을 다지게 되었다.   지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인 펜데믹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심지어 국내 일일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서는 등 확산세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수도권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도 안전지대가 없을 정도로 어디에서든지 간염될 수 있는 상황이 급증하는 가운데 의료진의 탈진과 시스템 붕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앞으로 수천의 확진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의료 전문가의 발언도 있었다. 이처럼 코로나19와의 힘겨운 싸움과 더불어 기상 이변과 혹한 겨울이 국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확신한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나 아름답게 흰 눈으로 온 산과 들을 덮을 것이다. 지구촌 동방의 작은 나라 한반도에도 진정한 자유의 꽃, 평화가 만발하는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 기대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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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8
  • [향유옥합] 실력으로 준비하자
    많은 교단에서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가운데 한국교회에서 여성 목회자의 수는 날로 늘어가고 있으나 이들이 교회 사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역할은 극히 미미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단과 개교회의 여성 정책에 변화도 필요하지만, 여성 목회자들이 먼저 급변하는 교회 환경에 발맞추어 실력으로 준비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안수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31년 감리회에서 여성 안수를 결의하면서부터이다. 당시 감리교는 14명의 외국인 여선교사들에게 안수했으며, 한국인에게는 1955년 명화용목사와 전밀라목사가 교단 처음으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재건교회에서 1951년 최덕지목사에게 한국인 여성 최초로 목사로 안수함으로 최초의 한국인 여성목사는 감리교보다 앞선 기록이 존재한다.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온 시기가 여타 서구 국가와 비교할 때 상당히 늦은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교회의 여성 안수는 늦게 추진됐다. 예장 통합측의 경우 여성 안수 안건이 총회에서 처음 논의된 지 17년이 지난 1994년 허용됐으며 기독교한국침례회도 2004년 여성 안수 청원이 올라간 이래 9년 동안 다사다난한 논의를 거쳐 2013년 가결된 사례가 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해방파의 경우 여성에게 목사 직분과 기타 모든 직분을 허용하기로 하는 등 서구의 보수적인 교단 또한 여성 사역자의 존재와 가치를 정식으로 받아드리며 급진적인 변화를 꾀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여성의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도 교회 여성은 뭇 남성이 수행하지 못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냈다. 스트라스부르의 카트리네 첼은 자신의 남편을 파문한 로마가톨릭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며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했으며, 개혁으로 인해 이단자로 몰린 사람들의 아내들을 위로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도왔다. 위그노의 여왕으로 불렸던 잔 달브레 역시 프랑스 위그노에게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영지 내에서 칼뱅주의 신앙을 옹호하고 로마 교황청과 대립하며 종교개혁의 성공을 이끄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마리 당티에르는 칼뱅이 활동하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운 개혁의 숨은 기둥이 되었다.   당티에르는 1536년 제네바가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 과정을 기술하면서 최초의 개신교 역사서를 저술한 인물로 기록되었으며, 성서해석에 관한 저술을 펼치며 종교개혁시대의 여성들을 대변했다. 종교개혁시대 이러한 여성들의 활약상은 결코 종교개혁이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시사해 주는 부분이다. 특히 당시 여성들은 지금과 비교하여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낮은 지위와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들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력이라는 것은 지금의 여성안수 논란이 현실화될 때 미칠 파급력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여성의 자리가 없었던 현실에서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여성 목회자들도 연구하고 신학적으로 준비하면 이를 바꿀 수 있다. 여성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반열에 있을 때 실력과 섭리를 실천하고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으로부터도 검증을 받아야 한다.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품는 것에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리에 서도록 노력하자.  /예장 피어선 증경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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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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