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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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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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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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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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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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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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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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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민식작가의 「사랑이 머무는 곳
          윤민식작가의 「사랑이 머무는 곳」은 아크릴 작품으로 조형화 된 자연이 인상적이다. 사랑은 기독교에서 가장 큰 은사(헬,카리스마)이다. 즉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사랑이 식어져 가는 말세의 징조가 보이는 때에 우리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세상의 어느 성인 군자도 이를 행한 사람은 없다. 오직 인간으로 오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 뿐인 것이다. 우리도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꽃과 식물과 물 속의 생물들까지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아름답게 피워내고 있다.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최고인 사랑을 항상 우리 주위에 머물게 하고픈 마음이 읽힌다./정재규(미술평론가·대석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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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0
  • [향유옥합]생명 윤리의 성벽을 재건하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의 무너진 생명윤리를 우리가 어떻게 세워갈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고향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도록 필요한 곳에 세워주시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왕의 술 맡은 자가 되게 하셨고 결국 왕의 은총을 입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방해와 위협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 영역 별로 담당자들을 세워 성벽을 재건하였고 밤낮으로 성벽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윤리가 무너진 이 세상을 보며 애통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자살, 안락사, 낙태 등 각 영역별로 전문가들을 세워야 합니다. 낙태는 여성 인권이라고 외치고 같은 크리스천들조차 낙태를 찬성하며 이 운동을 비아냥거리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공격에도 적들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한민국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으로 최근 들어 몇몇 교단에서 저출산 대책 위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산 장려만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아기들이 없을 때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여 명의 아기들이 낙태로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낙태의 위험성과 태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교육해야 합니다. 뜻하지 않은 임신이라도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힘겨워 하는 여성들을 찾고 도와야 합니다. 또한 느헤미야가 각 지역 위치별로 성벽 재건을 담당하도록 했던 것처럼, 내 교회가 속한 지역만큼은 낙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회 인근 지역에서 생명 존중 문화 캠페인을 진행하며 내 교회가 속한 지역의 생명 윤리에 대해 거룩한 부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생명 윤리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때 리더들과 백성들이 건축 기금을 내고 헌신한 것과 같이 생명 윤리를 회복시키는 이 사역에 많은 재정적 헌신도 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위기 임신 지원 센터를 교회가 세워야 합니다.   생명 윤리의 성벽이 무너진 것은 모두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죄 때문입니다. 무지하고 방관했던 죄악을 회개하고, 이제는 생명 윤리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모든 교회와 성도가 앞장서야 합니다./아름다운 피켓 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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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0
  • [칼럼] 새 일을 행하리라
       사사기 43장 18~20절에서 하나님은 이전 일을 기억지 말라. 옛적 일을 생각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로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힘써 지키었으나 결국 율법인 옛 언약 안에 머물지 못하고 실패했다. 또 ‘옛사람의 일을 생각지 말라.’ 하셨으니 우리 이방인들은 과거에는 마귀의 종으로 하나님과 원수로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이요, 더 이상 이전일, 옛적일과 상관없다. 이에 하나님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나타내리라.’ 하신다. 이 새 일이 무엇인가? 이는 짐승피로 세운 옛 언약, 율법과 전혀 달리 하나님 아들이 피 흘려 새 언약을 세우시는 것을 가리킨다. 이 새 언약 안에 있게 된 자들은 새 창조를 하시는 것이 또 새 일이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썩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새 창조된 새사람을 입으라(엡5:22-24)고 하심이 곧 새 창조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최초로 창조하신 만물을 창세기 1장 3절부터 재창조 하셨고 엿새 후 하나님이 안식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겐 안식이 이뤄지고 있지 아니하므로 새 창조된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를 안식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 새 일을 마지막에는 새 하늘, 새 땅으로 새 창조 하신다. 이는 주 재림 때 될 새 일인 것이다.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는 것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다. 그래서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신다. 우리 심령이 광야 같고 사막 같음을 가리킨다. 이런 우리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주셨다. 또 생수의 샘, 생수의 강이 넘치게 하신다. 이는 주님으로 인한 영원 속죄, 영생에 합당한 열매맺는 생명이요, 또 재림 예수의 예언의 생수의 말씀과 이를 이루시게 하시는 일곱 영의 역사가 곧 생수의 강이다. 이와 같이 새 일의 파노라마는 계속되며 바로 최근에 행하시는 SDBF가 새 일이다.      이 SDBF는 사사기 2장 2절 말세지말에 하나님의 산들중의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성전을 세우리라.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와서 하나님말씀을 들으리라. 또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길을 찾으리라. 이것이 전민족성경신앙박사교육원이요, 하나님이 2023년에 세우시어 일하시고 계시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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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6
  • [변두리 소수자⑤] 유익한 고난
      인류 역사에 사람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천로역정>이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 존 번연이 12년 수감 생활 중에 감옥에서 쓴 책이다. 인류사에 최고의 음악이라고 꼽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야」도 헨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영감을 받아 쓰여 졌다. 그 위대한 54곡 전체를 26일 만에 작곡했으니, 하루에 2곡을 쓴 셈이다.   번연과 헨델은 자신들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들을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다. 특별히 헨델은 건강에도 큰 타격이 시작된 때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마비가 오면서,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여, 온수로 몇 시간씩 몸을 녹여야 했고, 오르간 앞에 앉아서 오랜 동안 손가락 재활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헨델은 그 고난의 시기 이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귀품있게 살았다. 공연 수익이 많았지만, 「메시아」를 통한 수익을 한 푼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시야 공연 수익금들을 모두 자선 단체와 병원에 기부했다고 한다. 어려운 중에도 작품을 쓸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대의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그런 헨델을 존경하며 높였다고 한다.   우리는 힘들 때마다, ‘문제를 넘으려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을 허락하셔서 그 때만 볼 수 있는 빛을 준비하신다. 뜻을 가지고 우리를 그런 형편에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려운 형편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해 보면 도움이 된다. 곤란할 때의 생각은 번민과 염려를 일으켜 마음을 더 복잡하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왜  그렇게 하시는 걸까? 나의 원하는 답만 찾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길,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질문을 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죄의 결과인가?’이다. 죄의 결과라면 회개하고, 고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된다. 세 번의 다른 시험을 통과하면, 세 개의 서로 다른 경험과 지혜가 쌓인다. 그러나 같은 시험을 세 번 겪으면, 같은 고생과 실수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탄이 확인하려고 하는 나의 ’순전함‘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욥 2:9). 거짓 증거로 억울한 입장인가? 반사적 반응과 구차한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며,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믿음을 잘 지켰다‘며 칭찬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에 참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선을 행했는데 고난을 받는다면, 악을 행하고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돌이키게 만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일까 살핀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사탄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방해하여 못되게 하려는 선한 일이 무엇인가?’ 해내야 한다. ‘나를 쳐서 교회와 가정에 주려는 피해가 무엇인가?’ 지켜야 한다. ‘잡아먹고 먹히는 영혼들이 누구인가?’ 구원과 경고를 선포해야 한다.   이 모든 사역들도 중요하지만, 고난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듬으신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믿음의 불순물이 걸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뜨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새롭게 다시 뵙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나는 가끔 말한다. “그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 때의 영성은 그립다.” 주님이 주신, 나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나를 사랑하사 가까이 부르시는 것이다. 아플수록, 외로울수록, 하나님만 더 분명히 바라는가? 좋은 때인 거, 맞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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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1
  • [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③-이건숙의
      화자 ‘나’는 그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심양을 거쳐 단동 시내를 경유해 압록강변의 신의주 근처에 당도한다. 그러나 신의주는 그 이상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고, 철조망 안은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학실이 아빠)에게 철조망 안으로 두 발을 들여 넣어 보라고 하였다. “여기가 바로 신의주입니다. 할아버지의 고향 땅입니다.…어서요. 여기가 바로 신의주 땅이라니까요.” 그 뒤의 상황 진전을 소설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노인의 팔을 강제로 잡아 끌어당겼다. 어서 철조망 밑으로 두 발을 넣으라고 재촉했다. 노란색이 살짝 도는 국방색 군복을 입고 붉은 테를 두른 군모를 쓴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총을 메고 다가왔다. 노인의 어디에 그런 날렵함이 숨어 있었을까. 잽싸게 양쪽 발을 철조망 밑으로 집어넣어 쿵쿵 디뎌 보고는 냅다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학실이 아빠, 도망가지 마세요. 괜찮아요. 북한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학실이 엄마 소식을 물어봐도 된다니까요. 나는 북한 경비병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고 노인이 던져버린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놀라 달아나는 할아버지 이상(以上)으로, 또 갑작스런 결과에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뒤쫓기 시작한 화자 ‘나’의 놀라움 이상으로, 우리 독자들도 함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굉장한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가 이 소설의 마지막 장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는 이 소설 초반에 이미 사실상의 복선이 깔림으로써 일종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의 서프라이즈 엔딩 효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비행기 안에서 할아버지가 아직도 못 미더워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꾸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대화의 장면에서 그 면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북한 땅을 밟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잡아가지 않을까. …자네 혹시 정보부에서 나온 정보원 아닌가?”   두 발로 북한의 신의주 땅을 밟아 보는 게 소원이었던 이 할아버지는, 그러나 실제로 그 땅을 밟는 순간 무엇인가 모를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팔순 노인이 달아난다고 해서 얼마나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심리적 공포감은 그를 한 발짝이라도 더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있다.   북한 경비병이 그를 잡으러 오는 것 같고, 혹시 이 동행 청년이 그(할아버지)로 하여금 북한 땅을 밟게 만든 다음 증거를 잡았다고 정보부로 연행할 것만 같기도 하고, 또 포로병 생활 때의 과거 악몽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그를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정이 아직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누구든 이 할아버지와 같은 불안한 기억 속에서 결코 헤어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이 노인의 고초를 통해, 우리가 어떤 국가적 환경(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해 준 이 작품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민족적 현실 문제에 그 메스를 들이대려고 한 기독교 현실주의(리얼리즘) 소설이라 하겠으며, 또한 통일 지향적 정신의 기독교 민족문학 작품으로 우리 기독교문학사에서 그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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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칼럼]그의 배는 상아같다
      아가 5장 14절부터 16절에서 신부 성도가 자랑하며 증거하는 신랑 예수님은 한미디로 가장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의 머리와 머리타래, 그의 눈, 그의 뺨을 자랑했다. 또 계속하여 그의 손은 녹보석 박힌 금고리 같다고 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손이 나 신부성도를 죄에서 영원 속죄구원 시켜주신 분이다.    그의 의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고 이끌어 주시어 하늘 영광 보좌 우편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또 그의 손은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와 일곱 영을 붙잡고 계신 손이시다. 즉 일곱 영을 부어 주시어 순교케 하시고 그 전에 환란 날 1260일 동안 재림하실 나의 신랑 예수 오심을 예언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금면류관 씌워 주시는 분이시다. 더욱이 그 영광을 하늘에서 계속 새롭게 더해주실 분이시다. 이는 그의 손이 녹보석 박힌 금고리 같다고 증거하는 바로 그것이다.   또 그의 배는 사파이어들을 입힌 빛나는 상아 같다고 하신다. 상아같이 썩지 않는 몸, 즉 부활체이신 신랑 예수님은 찬란한 영광을 입으신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또 그의 양 다리는 정금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고 그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수려하도다. 정금 받침대 위의 다리 같다함은 변함없으시고 신성,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존귀하신 주님이시다. 그의 발아래 모든 무릎이 꿇며 그의 원수들을 짓밟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주님 다리가 정금 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같다는 것이다. 그분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수려하도다. 주님의 외적 모습이 레바논 산 같이 듬직하고 엄위가 있으며 가장 고상하신 분이시다. 그의 내적 모습, 즉 나의 신랑 예수님의 내적 성품은 마치 백향목같이 수려하시니 오직 신(神) 만의 성품을 가지셨다. 즉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시고, 온유·겸손하시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1천 년간 아니 영원히 발하시는 분이시다.   또 그의 입은 지극히 달콤하니 참으로 그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도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영생의 말씀이니 이것이 달콤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신다. 그중에서도 첫째부활의 영광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주님의 입이 달콤하니 참으로 그 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나의 신랑이 되신 주님은 육적 신자들인 예루살렘 여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훌륭하시고 가장 뛰어나신 분으로서 나를 그분의 형상에 일치케 해주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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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1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종으로 수고하여 성화된 참 행복의 새 패러다임    성경은 모든 인류가 불순종한 아담의 후예들로 원죄를 갖고 태어난 죄인이며 영적 사망에 놓였음을 증거한다. 주께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죄인들을 사단에서 구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속사역의 십자가를 지셨다. 이를 갈라디아서 1장4~5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 밝히 증거한다. 죽으시고 부활을 나타내시어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구원자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신 이유와 목적이다. 새 언약이 도래된 그리스도의 출현,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오신 주를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이다. 이를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케 될 수 있는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고 하셨다. 이후 그리스도의 사신이 된 주의 제자들에게 화평케 하는 복음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구원의 도를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곧 주의 종들로 회복하실 새 언약이다.    곧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좁은 길로 들어오는 자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의 동행으로 구속이다. 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입게 하는 일에 참예임을 확증케 한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할 자들이 세상에 많기에 부르심의 목적을 담아 깨닫고 주의 자녀로 사는 전도의 몫을 찾아 행케 하심이다. 베드로전서 2장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주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임을 연계하여 깨닫고 주 안에 삶을 살게 하심이다.    그러기에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안에 다 들었느니라’ 하셨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라 하심이다. 영혼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한 종들로 몫을 배우고 행하게 하시어 기도와 말씀으로 선한 열매를 맺혀 가도록 이를 확증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한 주종의 관계를 갖고 부르심에 선한 뜻을 위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몫이다.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한 거듭나게 하심과 부르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뜻은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 주의 자녀로 회복하는 거룩한 일로써 착한 일이며 선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온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며 이 일에 참여가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도록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임을 확증케 한다. 이를 위해 거듭나게 하심이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심이라고 함이다. 곧 거듭나게 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쓰시기 위함임을 연계해 준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도록 하시는 주의 기쁘신 뜻에 순복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로서 주의 마음을 알고 주와 한영을 이룬 주의 백성들이 주를 닮아가는 여정임을 새긴다. 종들이 이를 알고 실현하여 주의 나라가 확장되고 주의 백성들이 많아지도록 서로 사랑을 하며 부르신 목적대로 충성이다. 주와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기에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한 일에 행복함을 갖고 복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선한 일꾼들로 견인하신다. 구속사역에 참예함으로 성화된 새 패러다임의 행복이며 은혜의 여정에 말씀에 순복하케 하신 주 시링임을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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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2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이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가치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 중 보화임을 마태복음 13장 44절은 증거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하신 비유이다. 보화로 발견과 그 소유하는 비유를 통해 천국의 소중성에 대한 새 가치관을 찾도록 교훈한다. 성경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살 수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영생을 주시는 유일신이신 주님과의 만남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발견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열심하는 천국백성으로 선을 이루어 가도록 교훈한다. 그러기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기록목적을 깨닫게 하심이다. 나그네의 여정에 기쁨과 감사로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는 새 가치관의 선함을 얻는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를 아는 자로서의 자존감의 상승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새 생명을 얻게하여 여호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이김으로 영원성이다. 곧 유다서 1장 1절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주의 종들의 정체성이다. 이들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임을 확증케 한다. 요한계시록 14장 3~5절 “이 사람들은 ~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는 증거와 같은 착함이다. 곧 새 가치관을 가진 거룩한 자들로 주의 나라 확장을 실현하는 일에 충성케 한다. 그리하여 주께서 기록하신 말씀 안에 거하게 된 자들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는 지식이 앎이 되어 승리하는 성화이다. 이는 골로새서 2장 3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는 확증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1장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하심과 같은 가치관의 형성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하는 자로써 주를 사랑한 자임을 확증케 한다. 주로 인한 고난은 마땅히 받아야 할 나그네 여정임을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앎의 참예로 충성과 섬김에 대한 연계이다. 주의 종으로서 몫을 하기위한 일꾼의 지혜이다. 곧 주께서 본을 보이심과 같이 사람 살리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의 목적을 알고 행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도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이전보다 더 주를 사랑하는 실천임을 확증케 한다. 누구든지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임을 함께 확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복으로 인하여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케 되어 살아도 주의 것으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도록 주를 사랑하는 자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믿음의 성화이다. 주는 하나님이 되시고 종들은 주의 백성이 됨이기에 주종의 관계를 성립한 일꾼들의 존재목적과 정체성의 연계이다. 곧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성령의 내주로 말씀 안에 거하여 평안에 평안을 덧입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충성과 이김의 영원성의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말씀을 상고하는 목적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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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칼럼 14]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생태적 삶의 실천
    국민일보 김재중 부국장  성경이나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왔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는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동물을 위해 방주를 설계했다.  하나님은 노아의 희생으로 만든 방주를 이용해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고 이 땅을 새롭게 하셨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노아와 같이 녹색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생태학적 창조론과 통전적 생명선교론을 회복하고 목회적으로는 녹색교회, 생명목회, 생태 영성 훈련, 생태 환경교육 등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태적 영성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서 생태적 관점과 태도를 배워 삶으로 실천하도록 이끄는 신앙적 힘이다. 즉,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의 생명 그물망 안에 연결된 존재이며 이 그물망 안에서 각각의 존재는 상호 연계되어 서로를 살린다는 믿음이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일상에서 생태적 삶을 실천할 때 지구의 창조적 질서를 보전할 수 있다.    생태적 삶의 실천은 거창한 게 아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레이스벨은 올해 100% 생분해성 수지 원료로 만든 달걀 포장지를 사용하는 ‘부활절 그린 캠페인’을 펼쳤다. 일반 비닐 포장지는 분해되는 데 100년 이상 걸리지만, 생분해 비닐봉지는 180일이면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건강한 자연환경을 만들기 위한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다. 교회들이 주보나 전도지를 만들 때 재생 종이를 사용하는 것도 생태적 삶의 실천이다.     서울의 한 교회는 1층 주차장에 전기자동차 급속 충전기를 설치하고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였다. 인근에 전기차를 위한 급속 충전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충전시설을 지역에 제공함으로써 탄소중립에 동참하고 있다.     최근 기독기업 이엔포스가 교회의 전기요금을 평균 10% 절감할 수 있는 절전 장비를 개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엔포스의 절전 장비 ‘포스’는 교회의 분전함에 설치해 사용하는 것으로, 설치비 없이 렌탈 방식이어서 초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렌탈비는 줄어든 전기료의 50%를 가져가기 때문에 교회의 부담은 없다. 한국교회의 에너지를 절감해 미자립교회와 선교지를 돕고, 저탄소 녹색 성장을 실천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탄소포인트제(에코마일리지)에 가입하는 것이 친환경 실천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가정에서 에너지 사용량(전기·수도·도시가스) 절감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 실적에 따라 탄소포인트를 산정하고 환경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전 국민 온실가스 감축 실천 프로그램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건물 에너지효율 개선 사업은 교회가 주목할 만하다. 교회가 적극 협력하면 시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민·관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 중심적인 역할을 앞장서 실천할 때 창조 생태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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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22
  • 기적은 오늘도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그 손에서 쇠사슬이 벗어지더라.(행12:5~7) 바울과 실라를 깊은 옥중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매인 것이 다 벗겨졌다.(행16:24~26) 1952년 6월 25일 전쟁중에 군목으로 군 복무 중이시던 아버지는 빨치산 포로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한 사람씩 포승줄로 손목을 묶인 채 산속으로 이동하였는데, 그날 총살당할 것을 예감하며 찬양을 불렀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바로 그때 그 마을의 표지판을 보았다. 신 광 ( 神 光 ). 하나님의 빛.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하나님의 빛이 비치었고 마음이 뜨거워지며 힘차게 찬양을 하였다. 잠시 후 “모두 그 자리에 서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이라고 직감했다. 바로 그 순간, 또 하나의 음성이 들렸다. “ 운 !  상 !  아 ! 뛰어라 ~ !!!” 누군가가 앞으로 내달릴 수 있게 오른쪽 등을 힘있게 쳐 주었다. 당시 포로가 십여 명이 넘었고, 양 손목은 두꺼운 줄로 묶였으며 앞뒤로 줄줄이 엮여 한 줄로 끌려가고 있었는데, 어떻게 포승줄이 풀렸는지, 등 뒤에서 수없이 발사되는 총소리를 들으며 무조건 산속으로 뛰었다. 머나먼 길을 헤치고 한밤중에 해골이 다되어 돌아오셨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바울의 기적은 1952년 그 가을에도 그리고 오늘도 계속된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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