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5

실시간 칼럼 기사

  • [건강교실] 외이도염
      여름철에는 휴가를 맞아 바닷가에 다녀온 후 달콤한 휴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귀에 심한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기온이 높고 습한 여름철에는 세균이나 곰팡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 되며, 특히 물놀이나 잦은 샤워 등으로 귀에 물이 들어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귓병이 잘 생긴다.   흔히 귀가 아프면 다 중이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귀는 외이(귓구멍), 중이(고막과 고막안쪽 공간), 내이(달팽이관과 반고리관) 등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여름철에 흔히 병이 생기는 곳이 외이와 중이이다. 흔히 귓구멍이라고 부르는 터널 구조가 외이가 되며 이곳에 염증이 생기면 외이도염이라고 부른다. 중이는 고막과 고막 안쪽의 공기가 차 있는 공간을 의미하며 귀가 아프면 모두 중이염이 아니고 이곳에 염증이 생기는 경우를 중이염이라고 한다.    즉 귓병은 모두 중이염이 아니며 여름철에 흔히 생기는 귓병은 중이염 보다는 귀의 입구인 귓구멍의 피부에 염증이 생기는 외이도염이 훨씬 많다. 외이도염은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10명중 1명이 경험하는 흔한 질병이다.   물놀이 후에 생기는 귓병은 거의 대부분이 귓구멍의 피부에 염증을 일으켜 생긴 경우가 많다. 귀에 물이 들어가서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 들어간 물을 빼기 위해 귀를 무리하게 후비다가 물러진 귓구멍의 피부에 상처를 내서 이 상처 부위를 통해 세균이 침투하면서 염증이 생겨 발생한다. 수영장의 물 표면에 많이 있는 녹농균은 수영장의 소독약인 염소에 쉽게 죽지 않고 30도가 넘을 때 잘 자라기 때문에 여름철 귓병의 주 원인균이다. 습한 환경에서는 세균 이외에도 가려움, 통증 등을 유발하는 곰팡이가 귓구멍에 자라기도 한다.   물놀이 이후에 귀가 가렵고 먹먹하거나 잘 안 들리는 경우, 귀를 후빈 후 귀가 아프고 붓는 경우, 진물이 흐르다가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프고 입을 벌리기 힘든 경우도 있다. 특히 귓바퀴를 당길 때 통증이 심해지면 외이도염을 강력히 의심할 수 있다.   물놀이 후에는 더러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거나 금속성의 귀이개를 사용해 귀를 후비지 말고 깨끗한 물로 샤워를 하고 깨끗한 면봉으로 긁지 않고 물기만 흡수해 내든지 선풍기를 틀고 귀를 대고 말리는 것이 좋다.   이비인후과를 방문하여 귀를 깨끗이 소독을 하고 항생제와 진통소염제를 복용하면 깨끗이 나을 수 있으나 병원에 가지 않고 그냥 방치할 경우 만성적인 가려움을 호소하는 만성외이도염이나 중이 쪽으로 균이 파급되어 중이염을 일으킬 수도 있다.   통증이 심하지 않고 가려움증이 심한 외이도염의 경우 가정에서 쓸 수 있는 방법으로 식초 세척법이 있다. 귓구멍의 피부는 원래 산성보호막이 있어 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므로 일반 식초를 생리식염수와 1:1로 섞어 귀를 세척하여 산성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세척액의 온도를 체온으로 맞추면 큰 불편함 없이 할 수 있다. 단 고막에 구멍이 있는 만성중이염 환자에서는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염두에 둘 것은, 여름철에 야외활동을 하는 시간이 늘어 귀안에 벌레가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종류로는 파리, 모기, 개미, 하루살이, 나방, 바퀴벌레 등이 들어갈 수 있다. 귀는 아주 예민한 기관이기 때문에 귀에 벌레가 들어가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생긴다. /한양대 구리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 오피니언
    • 칼럼
    2023-07-24
  •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갈등 양태①-김원일 중편소설
      김원일(1942- ) 작가의 중편소설 <믿음의 충돌>(1994)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여로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주인공 성문규가 그의 친구 신주엽의 초청 편지를 받고서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해 경남 창원에 이르고, 고향인 갯마을 삼포를 거쳐 여객선을 타고 남해를 여행하여 욕지도 근처인 쑥섬(봉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일종의 여행기 형식으로 차분히 전개된다. 그 점에 있어서 이 소설은 앞서 나온 염상섭의 <만세전>(1924)의 여로소설 특성을 십분 살려 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충돌>은 소설의 시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인 소설가 ‘나’(성문규)를 주인공으로 볼 경우 이 시점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작가 성문규를 단독 주인공으로 보기에는 여러 난점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비중 있는 다른 인물들이 무게를 지닌 채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새로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문제라고 하겠다. 성문규에 의해 관찰의 대상이 되는 인물 신주엽에게 무게 중심이 놓일 경우 이 시점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인물의 의미가 너무 강조된다면 이 소설의 주제 문제는 매우 취약해져 버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인물이 그 자신 단독적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피게 될 시점은 이른바 ‘일인칭 회고자 시점’이다. 이 시점은 한마디로 말해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한 변이형태라고 볼 수 있다. 관찰의 주체인 화자가 관찰의 객체(대상)인 주인공을 문자 그대로 직접 관찰할 수 있을 경우에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 성립될 수 있는데, 결국 이때의 관찰 대상자는 생존인물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관찰’의 대상인 것 같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대상이 망자(또는 행불자)일 경우 그는 관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회고’(회상)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인칭 회고자 시점’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겠다.   이 시점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하근찬의 <슬픈 장난감>(2000)을 예시할 수 있다. 이 작품 속의, 일본의 요절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위치가 이를테면 ‘회고’의 대상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회상(회고)의 주체인 화자가 여행 중에 주인공 다쿠보쿠 시인의 과거사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바로 그 <슬픈 장난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의 충돌> 속에서는 화자 성문규의 어머니(윤 권사)가 바로 이 회고의 대상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성문규와 신주엽은 현재 살아있는 인물들이지만, 화자인 성문규의 어머니(윤 권사)는 현세에 살아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의 회상(회고) 속에서 그녀는 무시로 출몰하고 있다. 동시에 그녀의 번다한 출현이 이 소설의 주제와 크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일인칭 회고자 시점이 성립된다고 보겠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세 가지의 일인칭 시점들이 복합되어 있는 형국이라고 할 것이다. 즉 일인칭 서술자(주인공) 시점, 일인칭 관찰자 시점, 그리고 일인칭 회고자 시점 등이 서로 얽혀서 어우러져 있는 ‘일인칭 복합 시점’의 작품이라고 말이다. 이런 복합 시점의 설정은 작가 자신이 상당히 오래전에 발표한바 있는 같은 중편소설 <도요새에 관한 명상>(1979) 속에서도 이미 유사하게 선보인바 있었음이 참고 될 수도 있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오피니언
    • 칼럼
    2023-07-24
  • 거리낌 없는 양심의 소망
      사도행전 24장 5절부터 16절에서 대제사장과 장로가 변사를 대동, 총독의 재판정에 출석, 바울을 고소하였다. 그가 전염병자요, 나사렛 이단의 두목이다. 그가 소요를 일으킨 자요, 성전을 더럽히려 했으니 그를 처단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소한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구약에서부터 예언했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이다. 또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한 자들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여 죽인 자들이니 그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다.   문둥병자와 같은 자들이다. 한편 바울은 예수 믿는 하나님의 참 종이요, 말씀을 증거 하여 영혼을 살리는 분이다. 이를 두고 전염병자요, 나사렛 이단의 두목이라고 정죄, 고소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일어나는 영적 흑암의 역사이다. 이는 교회에서 걸핏하면 세상 법정으로 송사한다.   이는 마귀의 하수인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심판해 달라는 것과 같다. 이는 세상 법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 함과 같으니 너무도 슬픈 일이다. 바울이 자신의 신앙으로써 그들의 고소에 낱낱이 소명하며 반박한다. 즉 예루살렘에 귀국 한지 겨우 12일밖에 안 됐으니 소요나 성전을 더럽힐 수 있는 시간이 아예 없었다.   또 소요를 일으켰다면 본 자들이 있어야 하나 아무도 없으니 무고이다. 또 고소자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바울도 똑같이 섬겨 왔고 고소자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율법과 선지서의 말씀을 바울이 똑같이 믿고 있으니 바울이 이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을 바울도 믿으니 아브라함과 함께 유업을 받는 자이다.    즉 율법의 실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바울이다. 이는 오히려 고소자들이 율법의 실상인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고 외식한 그들보다 바울이 더욱 온전함을 강조한다. 즉 고소자들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율법을 지킨다하나 결국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들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소자들이 믿고 있는 죽은 자들의 부활의 소망을 똑같이 바울도 믿고 있다는 것이요, 이 소망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쓴다고 바울이 고백한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들도 바울처럼 똑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이 이 소송사건으로 인해 결국 로마 황제 가이샤 앞에 서게 됐다. 또 그에게 담대히 예수를 증거한 후 바울이 기쁘게 순교했듯이 우리도 똑같다. 우리도 더 좋은 부활의 소망 때문에 거리낌 없는 양심으로 늘 주님의 증인이 되십시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3-07-24
  • [‘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4회] 주신 은혜로 장성하는 믿음의 성화
    말씀대로 승리케 하시는 전능한 구원의 주, 나의 방패와 산성되신 예수 시편18편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전능성의 증거로 위로와 강력한 힘의 근원이신 주로 말미암는 승리가 담겨있다. 더불어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종들의 영혼을 어느 때나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케 한다. 전능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좇을 수 있도록 밝히 주신 은혜의 말씀이다. 곧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끝까지 승리하게 하심에 증거들이다. 이긴 자들의 고백과 기도와 인내의 요인을 깨닫게 된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는 은혜의 고백들이다. 그러기에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른 상황에서도 주를 바랄 수 있는 믿음의 성화로 이김의 마땅함이다. 다시 말해서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자에게 닥친 모든 것은 주로 인한 믿음의 승리임을 확증해 준다.    그 말씀이 반석이 되어 그 어떤 풍파가 불어온다 하더라도 끝내 주께서 요새시요 산성이시니 말씀대로 견인하실 약속을 주심이다. 곧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있는 믿음의 힘을 확증케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보람되고 행복하게 하며 살 수 있는 삶인지 깨닫고 하나님이 유일신 구원자되심을 발견케 하여 섬기게 한다. 이러한 앎을 갖고 역경을 이겨내며 성령과 함께하는 자들은 새 가치관으로 존재의 목적을 알기에 육체의 정욕을 이미 못박은 이유임을 확증해 준다.    즉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 인도하심으로 견인 받는 주의 종들이 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실 하나님이심을 확증케 한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으로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일꾼들로 선을 이룬다. 이처럼 말씀의 순복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게 한다. 받은 자밖에 알 수 없는 성령의 내주가 힘이 되며 견인하시기 때문이다. 곧 말씀은 힘이 되고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되기에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더욱 주를 사랑할 수 있는 성화이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로 표현된 모든 것들이 어느 상황에서나 주의 지체들에게 믿음이 되어 승리로 확증해 간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신 증거처럼...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기에 만일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고 하심이다. 곧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라” 하시어 이를 분별케 하셨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며 짐을 서로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도록 주신 말씀이다. 또 자기의 일을 살피고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하셨다. 오직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지혜로 제 십자가를 지고 서로 사랑의 실천을 원하심이다. 주의 뜻대로 사람을 살리도록 말씀에 입각한 행함으로 주의 법을 완성해가길 원하심이다.    곧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연계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의도이며 같은 뜻임을 확증해 준다.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주 사랑함과 하나이다. 곧 이런 자를 부르신 주께서 주 뜻대로 성취해 가시는 계시를 응하게 하는 지체들의 순복이다.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이에 성화로 승리케 하시는 은혜이며 주의 거룩한 말씀대로 성취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말씀으로 계시하신 주의 뜻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3-07-19
  • [향유옥합] 오래된 새 이웃
         우리는 인구가 집중돼있는 대도시에 모여 삽니다. 대도시는 세계 육지 면적의 약 2%에 불과한데 탄소발자국은 상당합니다. 탄소 배출에 책임이 있는 도시에서 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과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다” 하셨듯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참 좋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네 몸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우리에게 ‘다스리고 지키라(till the earth and keep it)’고 하셨는데, 원문을 보면 ‘보살피고 보호하라(care for the earth and protect it)’고 하는 게 맞습니다. ‘keep’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주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고 여러분을 지키신다(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고 할 때 쓰는 단어로 ‘보호한다(protect)’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러니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땅을 ‘정복(subdue)’하거나 해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 만큼이라면 마음껏 취해도 무방하나, 그것이 하나님이 ‘좋다’, ‘참, 좋다’ 하시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서로 돌보는 이웃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 이웃임을 고백하고, 자기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주께 하듯 모든 생명의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빌2:4-8).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여겨 왔습니다. 지구상의 가난과 질병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만을 이웃으로 여기며 돌봐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래된 이웃’이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의 때에 먼저 좋은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모두가 다 “참 좋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존재들입니다. 기후위기가 그들 오래된 이웃을 보게 해주었고, 우리는 이들이 없는 지구에서는 사람인들 건강할 수 없음을 압니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하나님의 자녀를 애타게 기다리며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피조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게 될 영광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그들을 다시 보게 합니다. 우리의 오래된 새 이웃입니다. 그들이 없는 지구에서는 사람인들 좋은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음은커녕 건강하게 존재할 수조차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도 이들을 잊고 욕심껏 살아온 탓에, 수많은 생명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생태적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빈곤의 피해자이자, 환경오염으로 인한 희생양이 된 이들 자연을 오래된 ‘새로운 이웃’으로 다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탐욕에 희생하고 쓰러져 죽어가는 강도 만난 이웃입니다.    이제라도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가 주께서 요구하신 두 가지 큰 계명 중 하나인 ‘이웃 사랑’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생명)에게 하지 않은 게 주께 하지 않은 것”(마 25:45)이라 하시는 주의 말씀을 다시금 깊이 새깁니다.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센터장
    • 오피니언
    • 칼럼
    2023-07-18
  • 근원적 욕심(행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였고 초대교회 교인이었다. 자기 소유를 팔아 그중의 일부를 감추고 전부인 것처럼 속여 베드로의 발 앞에 드렸으나 그 자리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났다.  재산의 일부를 감추고 속인 것이 잘못이지만, 실제적 죄명은 “성령을 속이고, 주의 영을 시험”(행5:3~9)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함을 얻지 못한다.(마12:31, 막3:29, 눅12:10)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가룟 유다가 주님의 사랑하시는 눈길을 한번만이라도 마주했더라면 그 밤에 나가지 않았으리라. 골고다 십자가 보혈로 대속 받지 못할 죄인은 하나도 없으나 주님 사랑을 거부하면 사함이 없다. 베드로는 주님과 눈을 맞추고 (눅22:61) 심히 통곡하였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러나 어느 날 욕심이 싹트고 그 나무의 이름이 선악과였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해서”(창3:6) 먹지 말라 하신 말씀을 거역하였으나 근원적 원인은  “이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리라”(창3:5) “하나님처럼”되고 싶었다. 아담의 원죄 후에 인간은 스스로 의로움을 잃어버렸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는 성부 하나님께 교만했고 가룟 유다는 성자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고 아나니아 삽비라는 성령 하나님을 모독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7~8)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3-07-18
  • [건강교실] 중족골통
       우리 발은 발가락 끝부터 발꿈치까지 병이 안 생기는 부위가 없다. 그 중에서도 발의 볼이 있는 부위는 가장 흔하게 통증을 일으키는 부위이다. 여기서 발의 볼이란 흔히 신발을 고를 때 볼이 좁다 혹은 넓다고 하는 그 부위이다. 그 중에서 둘째, 셋째, 넷째 발가락 뿌리 쪽의 발바닥이 아픈 경우를 의학적으로 ‘중족골통’이라고 한다.   가만히 서있을 때나 걸어다닐 때, 이 부위에 통증을 보이고, 손가락으로 발바닥과 발등을 쥐고 누르면 통증을 나타난다. 흔히 통증을 호소하는 부위에 굳은살이나 티눈이 있고, 발가락들은 갈퀴모양이나 망치모양으로 변형되거나 발가락 등에 굳은살이 많이 생기게 된다. 중족골통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중족골에 과도한 압력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경우에 잘 생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원인들이 있다. 첫째 원인은 장딴지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져 있거나 아킬레스건이 짧아져서 발목관절이 발등 쪽으로 젖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흔히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는 경우, 사무실 의자에 앉았을 때 의자가 다리 길이보다 높아서 발뒤꿈치가 바닥에서 떨어져 있는 경우 등에 흔하다. 이러한 사람들의 경우 걸어가면서 바닥에 발을 내딛을 때 무게중심이 발바닥 전체에 골고루 분산되지 않고 발의 앞부리와 볼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지게 된다.   둘째 원인은 발의 횡아치가 무너지는 경우이다. 사람의 발에는 두 개의 아치, 즉 종아치와 횡아치(중족골아치)가 있다. 정상적으로 첫번째와 다섯번째 발가락이 다른 중간의 세 발가락보다 더 많은 체중부하를 받게 되는 아치형태의 횡아치를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이 발가락뼈들을 연결하고 지지하는 인대가 약해지거나 파열된 경우, 혹은 발의 고유 굴곡근육이 약해져있는 경우에 횡아치가 무너져서 통증을 유발하게 된다.   셋째 원인은 요족 변형이 있는 경우이다. 발의 종아치가 정상보다 더 굴곡돼 발의 볼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지게 된다. 이는 대개 유전성이다.   그외 원인은 발목관절에 생기는 관절염으로 인해 발목 관절이 굳어져 걸을 때 발의 앞부리로 걸을 수밖에 없는 경우, 시멘트나 타일로 만든 딱딱한 바닥에서 오래 걷는 경우, 작업용 장화와 같이 바닥이 단단한 신을 착용할 경우 등이다.   병의 진단은 발의 진찰 검사, 엑스레이 촬영(체중부하상태), 혈액 검사, 발바닥압력검사, 핵의학검사(골주사검사) 등으로 한다. 필요하면 초음파촬영, MRI, 근전도검사 등을 시행하여 정확히 진단한다.   특별한 원인이 없이 근육이 뭉쳐서 생긴 것이라면, 운동치료만으로도 증상이 좋아질 수 있는데 장딴지 근육을 스트레칭 시켜야 한다. 중족골통이 있는 경우 통증 부위의 압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흔히 발가락을 갈퀴 모양으로 반사적으로 굴곡시키게 된다. 이러한 경우, 능동적인 발가락 굴곡운동을 통해 발의 고유근육을 튼튼하게 하는 운동을 시행하여 중족골두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일 수 있으나, 평소에는 이런 운동을 안 하다가 갑자기 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발가락 굽힘 근육이 뭉쳐서 증상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뚱뚱한 사람은 체중을 줄여야 통증이 없어진다.    또한 실리콘 등의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구두 밑창은 발바닥에 쿠션효과를 줄 수 있어 통증을 해소할 수 있다. /한양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 오피니언
    • 칼럼
    2023-07-18
  • 메시아적 자기각성 –예수의 성장 과정③ -조기탁의
                                                                그러나 논의의 방향을 바꿔, 그런 중차대한 문제의 추구에 있어서 작가가 결과적으로 득의하고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만 답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 작품 자체의 한 맹점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청소년기의 인간 예수의 평범한 삶을 그리는 데는 비교적 성공하고 있다.”는 식의 평가는 족히 내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잠깐 시사된 바 있듯이, 이 소설의 매력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서로 만나게 되는 두 사람, 곧 ‘가룟 유다’와 ‘바라바’의 인물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바라바가 독자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의 말은 앞서도 이미 피력한 바 있다. 그처럼 바라바란 인물이 독자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형상화했다는 점은 이 작품의 매우 특징적인 면(아니,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서도 필자는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라바란 인물이 이 소설에서처럼 살아 움직이는 생생하고도 매력적인 인물상으로 부각되어 있는 작품이 이 작품 말고 다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그런데, 작가는 예수의 공생애 진입을 앞에 두고서 이 작품을 일단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예수의 공생애 때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일 작가가 이것의 후속편을 내어 예수의 공생애까지 다루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독자로서의 희망(기대감)이 없지 않다는 게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만일 그 일이 이뤄졌더라면 필자가 궁금해 하는 그 부분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되었을까, 필자는 상상해 본다. 아기 예수가 애굽의 피난살이를 끝내고 고국으로 귀환하던 때 일단의 불한당을 만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라바가 구해줌으로써 그는 예수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생의 말년에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바라바)를 살리시고 대신 자신이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를 구원하셨던 것이다. (생명의 은인에 대한 ‘은혜 갚기’로 이만한 게 또 있겠는가.)     또한 아래와 같은 말도 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룟 유다의 성장 과정에 나타난 그의 모습이 이만큼 성공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부조된 소설 작품을 다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가고…. (그러나 후속 편에서나 그들의 전적인 인물상을 볼 수 있을 것이었는데, 속편 발간이 성사되지 못했으니 매우 아쉬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이 때문에 다음의 정보도 독자 제위께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미리 말하기로 하면, 조 작가는 <목수의 아들>이란 이 작품을 내기 2년 전(1980)에 이미 <가룟 유다의 재판>이란 작품을 한 기독교 월간지에 연재물로 발표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 권의 단행본 분량으로 그(유다)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가룟 유다의 재판’)을 따로 펴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가룟 유다에 대한 관심을 남달리 지니고 있던 작가가 바로 조기탁이란 말도 되겠는데, 가룟 유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의 일환으로 작가는 그를 그 2년 뒤에 나온 그의 장편 <목수의 아들>(1982)에 다시 등장시켜 더욱 살아있는 인물상으로, 비록 성장기의 인물상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부조하는 데 성공했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예수를 명실공히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해서 이끌어 나가는 서사물이 과연 이 작품 말고도 또 달리 있느냐 하는 물음이 가능할 정도로 이 소설은 명실상부한 ‘예수소설’로서의 뚜렷하고도 굵은 선을 그어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오피니언
    • 칼럼
    2023-07-14
  • 문 열어다오
      아가 5장 2절부터 7절에서 먼저 주님은 ‘나의 누이야!’ 부르신다. 이는 신부의 믿음이 장차 주 재림 시 자신이 부활할 것과 그때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있음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님과 똑같은 부활체요, 아들이요, 주님과 형제지간이 될 것임을 믿는 아주 높은 신앙이다. 이때 예수님은 신랑이요, 오라비요, 자신은 그의 신부요, 동시에 누이가 될 것임을 믿는다. 이 신앙으로 살고 있는 신부 성도에게 주님이 ‘ 나의 누이야!’ 부르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며 ‘문 열어다오.’ 하신다. 주님은 머리 타래에 밤이슬이 가득했다. 이는 밤이 깊도록 신부를 위하여 달려오셨고, 또 문 앞에 오래도록 서 계셨음을 나타낸다. 이 상황은? 늘 신랑을 맞이하려고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할 터인데 어찌 막혀 있는가? 이는 자신은 이제 부족함이 없으니 더 이상 주님의 은혜가 필요 없다. ‘아주 만족하고 이만하면 충분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꼭 필요한 것들이 그녀에게 있음을 아시고 더해 주시려 하신다. 즉 주님의 생각과 성도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 ‘내가 겉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으리요,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리오.’ 라고 성도가 핑계한다. ‘겉옷을 벗었다.’ 함은 죄악의 겉옷을 상징한다. 이 세상의 죄악 속에서 사는 몸을 벗은 것처럼 ‘이제 순교할 그 날만을 바라며 거룩하게 됐다.’ 라는 고백이다.   또 내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리요.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고 모든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여 온전하게 되었으니 또다시 더럽힐 수는 없다. 지금 이대로 쭉 가서 순교하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성도에게 비록 지금 높은 신앙에 올라 왔을찌라도 더 높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 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고자 하신다.   또 성도가 지금까지 주님 안에서 이뤄진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 주시고, 역사해 주시리니 어찌 더렵혀질 수 있겠는가? 주님은 결국 문구멍으로 몰약떨어지는 손을 내미신다. 이를 본 그 성도가 정신이 들어 일어나 문을 연다. 이 주님의 손은? 십자가에 못 박힌 손이요, 구원의 손이다. 그 성도를 순교시켜 주실 신랑 예수님의 손이다. 문을 열었지만 주님은 물러갔고 안 계셨다. 왜요? 때늦은 회개였다. 때늦게 주님을 찾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똑같다.    ‘하나님을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8) 성령의 감화 감동을 주시면 즉각 화답하고 순종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성령을 거역, 불순종하면 어찌되나요? 다시돌이킬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문 열어다오 하실 때 속히 일어나 그분을 맞으라고 교훈하신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3-07-14
  • [당신의 뇌] 모성박탈의 뇌와 정신건강(3)
      옥시토신이란 무엇인가? 엄마가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어르고 토닥이며 귀여워 어쩔 줄 모른다. 사랑이 넘친다. 세상에 이보다 행복한 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최고의 행복이다. 인류 역사 이래 이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장면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체적으로 엄마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여기에 옥시토신이라는 물질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1906년 영국의 헨리 데일에 의해 발견됐다. 옥시토신이라 명명한 것도 분만을 촉진한다는 뜻으로 그가 붙인 것이다. 그 후 1953년 미국의 뒤비뇨가 옥시토신은 아미노산 9개의 배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합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옥시토신은 첫째는 신경전달물질로서 뇌 내에서, 둘째는 호르몬으로서 혈중에 방출되는 두 가지 경로를 갖고 있다. 생명의 중추인 시상하부에서 생성되며, 분만 중 최고조로 분비되고 분만을 촉진한다. 소위 '모성애'의 핵심 요인이 된다. 여성의 모성애는 분만을 통해 육아를 함으로써 발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옥시토신이 최고조로 분비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 오피니언
    • 칼럼
    2023-07-1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