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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30)
    ▲ 최종인목사   시편 101편은 다윗왕의 명세를 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방식을 따라 의롭게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결심한다. 다윗왕의 결심을 들어보면 지도자의 인격이 어떠해야 할지 알려준다. 모두 알다시피 지도자의 실력보다 인격이 더 중요하다. 특히 현대와 같이 타락한 시대에서 종교 지도자의 인격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인격은 삶의 원자재이다. 건축물을 짓는데 있어 레미콘, 골재, 철근, 벽돌, 석재 등 원자재 품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설계를 안전하게 하고 규정에 맞게 시공을 하더라도 자재 자체가 불량하면 사고 위험성은 급격하게 높아진다. 원자재는 사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나 같은 건축 문외한에게는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원자재를 무엇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집을 지을 때 모양은 비슷해도 결국 품위가 결정된다. 인격도 마찬가지, 밖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결국 인생의 품위가 달라진다.   완전한 길로 가야 한다(2절). 여기서 완전한 길이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길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안 되기에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고 질문한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완전한 길로 갈 수 없다는 고백이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도 “아닙니다”고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모세가 숱한 어려움 난관에도 인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오래도록 인도한 것은 걸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3절). 다윗은 자신이 비천한 것을 눈앞에 두지 않겠다고 했다. 비천한 것은 천하고, 악하고, 무법적인 것이다. 즉, 왕으로 그런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인격은 밖으로 드러나기보다 은밀한 부분에 속한다. 거짓말을 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 누군가 맡아야 할 책임을 대신 지는 것,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바른 인격이다. 지도자들이 타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버려야 할 악한 것에 주목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다(4-5절). 왕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두게 된다.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정치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가까이 둘 사람과 멀리할 사람을 잘 살피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다윗왕은 사악한 마음을 멀리하겠다고 결심한다. 비뚤어지고 왜곡된 마음이다. 2절에서 언급된 완전한 마음과 반대의 말이다. 헐뜯는 자와 교만한 자도 멀리하겠다고 했다(5절). 7절을 추가한다면 ‘거짓을 행하는 자’ ‘거짓말을 하는 자’도 곁에 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성된 사람을 주변에 두고 가깝게 지낸다(6절). 미주집회와 미주총회 세미나를 위해, 그리고 가을 부흥회를 위해 사무엘상을 중심으로 교재를 만들고 있어 책을 펴놓고 연구하고 있다. 여기엔 대조되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나와 엘리, 사무엘과 사울, 아비가일과 나발이다. 특히 사울 왕과 다윗을 비교하며 주목하게 된다.   두 사람에게는 많은 차이점이 있는데 다윗왕 주변에는 충성된 좋은 인물들이 많았으나 사울왕 곁에는 거의 없다. 지도자는 누구를 곁에 두느냐에 따라 지도력이 달라진다. 정신건강에도 유익한 사람이 있고 해로운 사람이 있다. 누구를 가깝게 할 것인가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인격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세월이 흘러 나의 인격이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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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9
  • [목회자 칼럼] 한국 기독교, 한글로 소통하다 (1)
    ▲ 이효상원장   1446년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글자임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암클’, ‘아랫글’이라 불리며 무시당한 훈민정음은 갑오개혁 때 비로소 공식적인 나라 글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천대받고 있을 때, 기독교는 한글만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전파되며, ‘한글’이 전파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인과관계를 가져왔다. ‘기독교’는 ‘한글’이라는 통로를 통해 민족에게 전파되었다.   한말, 더군다나 구식교육 즉 한문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있던 대중이 새로운 진리인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므로 심령의 구원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한글을 깨치어 처음으로 글눈을 뜨고서 지식과 개화의 거듭난 기쁨을 동시에 체험하니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의 뜻이 실현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복음전파는 한글로 소통하며 개막되었다. 1880년대 만주에서 시작된 존 로스의 ‘예수성교전서’나 일본에서 쓰인 이수정의 현토 신약성경이 다 한글을 사용하며 시작했으니 한국 기독교의 첫 사업인 성경보급이 근본부터 한글운동의 시대를 열게 된 셈이다. 그 뒤에 한자를 섞어 쓴 이른바 국한문 성경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이는 일부 한자 지식인의 요구를 수용한 것일 뿐 전체적인 흐름은 아니었다.   이렇게 한글은 성경과 찬송가뿐만 아니라, 쪽복음과 전도지 등에도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고 1895년 기산 김준근의 삽화와 함께 출판된 소설 ‘천로역정’등 기독교문학의 번역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예수교회보’ 등 신문과 ‘신학월보’, ‘신생’ 등 잡지를 내며 빠르게 대중속으로 파고들며 확장되었다.   최초의 장로교공의회는 모든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였다. 한글만으로도 넉넉히 모든 진리를 적어내며, 한글만으로도 아무런 불편 없이 소통이 되며 오히려 편리하다는 생각이 선교사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성도들과 대중에게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기독교의 모든 인쇄물도 대부분 한글만으로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한국기독교는 한글의 보급을 위해 말본, 사전 등의 연구와 출판에 더 주력하였다. 그런 사례로 볼 것 같으면 1874년 프랑스 선교사 달레 선교사의 ‘조선교회사’와 파리 외방선교회가 출판한 1880년 ‘한불자전‘ 그리고 1877년 존 로스의 ‘조선어 첫걸음’은 한글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한글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높이 평가하게 된다.   이렇게 한글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자리하게 되자 한글에 대한 존중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한글을 지키려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한글을 통해 복음을 접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심리라 할 것이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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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8
  • [더불어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조영민목사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에베소서가 말하는 교회의 정의다. 성도의 성숙에 관한 모든 것이 ‘교회 안에’ 있다.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다. 어떤 분들은 “요즘은 시대가 좋아서 굳이 교회에 가지 않아도 좋은 설교를 들을 수 있다”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설교만으로는 결코 성숙해질 수 없다. 성도는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만 온전해진다. 성도로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교회에 거하며 교회가 공급하는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온 우주를 가득 채우시고 소유하신 예수님이지만 아직 그분 안에 ‘충만함’이 없다. 그분의 마음 한켠에 비어 있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 곳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교회’이다. 주님의 마음은 온통 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 있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가 승리하면 주님도 웃으시고, 이 땅의 교회가 무너지고 있으면 주님은 더 서럽게 우신다. 주님을 울게도 웃게도 만들 수 있는 게 누구인가? 바로 교회, 바로 우리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수없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부족한 우리가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란 말이다.   히브리서 10장은 로마의 핍박 가운데 있는 기독교인들을 향한 권면이다. 점점 더 심해지는 핍박에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가 “이제는 더 이상 모이지 말자”는 말을 했다.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그 시대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이다. 점점 더 다가오는 우리 주님의 오심의 날까지 이런 어려움들은 계속 있을 것인데, 지금 모이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더 힘을 쓰라는 것이다. 더 모이라는 것이다. 모이지 않으면 이 땅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개인주의 시대이고, 점점 더 모이지 말라고 하는 시대이다. 움직이지 않아도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따로 따로 떨어져서는 절대 우리는 ‘우리’일 수 없다. 모이지 않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든 모여야 한다.   건강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항상 공적으로 모이는 대그룹과 사적으로 모이는 소그룹 모임이 공존했다. 대그룹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경험하는 것이 주가 된다면, 소그룹에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경험하는 것이 주가 된다. 교회 공동체가 이 두가지 모임이 성경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규모와 상관없이 그 교회는 좋은 교회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참교회이다.   연일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여려 매체를 통해 들려온다. 우리 주변에 있는 가까운 크고 작은 교회들에서 들리는 소리들도 때로 우리를 낙담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교회에서 들리는 소리들 때문에 상처 받는다. 그리고 때로 그런 교회들을 향해 하고 싶은 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쉽게 교회를 향해 독한 말을 뿜어내서는 안된다 믿는다.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이 교회를 품고 계시는 까닭이다. 교회를 향해 비난하기 전에, 교회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시기 바란다. 교회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주님을 건드리는 것이다. 교회를 무시한다는 것은 곧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교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상처를 가하는 것이다. 이 ‘못난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유일한 당신의 ‘충만’이기 때문이다.  /나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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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1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9)
    ▲ 최종인목사   시편 99편은 위대하신 왕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기 위해 ‘여호와’라는 호칭이 일곱번이나 등장한다. 역시 여호와를 가리키는 인칭대명사 그, 당신 이란 호칭도 일곱번 등장하고 있다. 특별히 6-7절에 중보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심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중보자로서 목회자의 역할을 찾아보게 된다.   이미 교회안에서 경험하겠지만 목회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목사는 목자이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눅 2:12). 성지순례중에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베들레헴에 가 본적이 있다. 지금도 그곳은 황냥한 광야이다. 목자들은 밖에서 밤에도 양떼들을 지켰다. 목회자는 교사이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즉 가르치고 먹이게 하신 것이다. 목회자는 청지기이다. 청지기로서의 목사는 잘 가르치고 권면하며, 신실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주님의 가족들에게 먹이를 주고 필요한 것을 때에 따라 잘 공급해 주어야 한다. 본문에서 목회자의 역할을 찾아본다.   그의 제사장이라고 부르신다(6절). 하나님이 세우는 종이 있고, 사람이 세우는 종이 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며 때에 따라 사용하신다. 그러나 사람의 종은 하나님이 부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자천한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역하려 한다. 하나님이 사용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이용하게 된다. 이단 사이비 종파에서 얼마나 많은 사례를 발견하는가? 정말 아쉬운 것은 정통 기독교 안에서도 사람이 세우는 종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세월이 갈 수록 사람의 종이 되는 이들을 본다. 목회자의 역할은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을 따라 일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6절). 본문에서는 제사장으로 모세와 아론을 언급하고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자 즉 기도자로 사무엘을 언급하고 있다. 제사장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고 증언한다(6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중보자들을 세우셔서 말씀을 주셨으며, 기도하게 하셨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 민족을 이끄셨다.    오늘날 목회자의 제일가는 역할은 무엇인가? 기도중보자이다. 나는 종종 성도들에게 설교한다. 각 사람이 자신의 직업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 가장 멋있다고, 그의 자리에서 수고하는 모습이 가장 귀하다고 했다. 언젠가 영등포 근처에서 차를 기다리는데 그곳은 철공소가 몇 군데 있었다. 우연히 뒤를 돌아보니 아저씨가 땀을 흘리며 쇠를 두드리고 있는게다. 망치로 붉어진 쇳덩이를 두드리는 그 모습이 어찌 멋있었는지 모른다. 목회자는 호텔이나 거리, 광장에서가 아니라 기도의 자리에서 가장 멋있다.   말씀을 받는다(7절). 모세와 아론의 예를 들어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다고 했다. 사무옐도 하나님의 선지자적 사역에 부름 받아 ‘하나님의 궤’가 있었던 성소(삼상 3:3: 12:23)에서 그 사역을 감당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중보자들로부터 말씀을 듣고 그 말씀들을 지켰다. 목회자의 역할 가운데 가장 최고의 역할은 말씀 선포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말씀선포이다. 자신이 준비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받은 말씀이다. 좋은 설교자를 두고 말씀을 듣는 것은 정말 복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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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1
  • 소통이 주는 축복(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최근 우리 사회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소통’이라는 말입니다. 소통은 정치를 비롯해 우리 사회 전반에 필요합니다. 하물며 우리 몸도 서로 소통이 잘 되어야 건강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혈액의 흐름이 잘 되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혈관부터 늙는다는 말이 있듯이 혈액 흐름의 소통이 잘 되어야 우리 몸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몸도 소통이 안 되면 병이 나듯이 소통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소통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과 종의 소통이 잘 되어 축복을 누린 종이 소개된 성경이 있습니다. 주인이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주인의 마음을 알고 행동하는 종이야 말로 소통이 잘된 관계인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있었습니다. 타국에 여행을 떠나면서 어떤 종에게는 5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2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훗날 주인이 돌아와 결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5달란트를 받은 종은 바로 가서 장사를 하여 5달란트를 남겼고, 2달란트를 받은 종은 2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돈을 그대로 감추어 두었다가 꺼내놨습니다.   주인과 소통이 가장 잘된 종은 그야말로 두말 할 것 없이 5달란트를 받은 종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맡은 것을 더 맡기고(21절) 1달란트를 받은 자의 것까지 빼앗아 그에게 주어” 풍족하게 되는(29절) +α(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 시간 “소통이 주는 축복”의 원리를 통해 함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일(업무)을 통한 소통의 축복입니다. 본문 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도 네게 맡기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작은 일을 종에게 맡겼습니다. 그것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를 시키면 열을 아는 사람은 소통이 잘 된 사람입니다.   과거 브라질 월드컵이 세계인의 관심 속에 경기가 진행되었습니다. 선수들은 감독과의 소통이 잘 되어야 하고 선수들은 선수들끼리 소통이 잘 되어야 패스가 잘 되는 것입니다. 승리는 소통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무리 개인 기술이 좋아도, 소통이 안 되면 패하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래서 강호 스페인은 예선전에서 패한 것입니다.   가정사도 부모와 자녀, 아니면 부부간의 소통이 잘 되어야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소통이 안 되는 가정은 늘 싸우고 갈등을 겪고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병원에서도 의사와 환자간의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의사가 50% 치료하고 환자가 50% 치료 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 사촌동생이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신장염으로 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짠 음식을 먹지 말라고 주의를 몇 번 주었지만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16세 나이로 병원에서 숨졌습니다. 소통이 안 되면 불행이 찾아옵니다. 경기대학교 상담, 심리치료 전문 교수, 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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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8
  • 디지털시대 종교의 사명감
     3. 디지털매체에 대한 목회행정적 관점   20세기 말 세계 권력구도의 변화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세계는 정보사회에서 지식사회로 전환되었다. 이성희는 목회구조에서 미래목회의 당면과제와 기회를 성장구조에서 성숙구조로 바꾸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피에르 바뱅(Pierre Babin)은 21세기 종교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21세기 미디어 시대는 세상 사람들의 필요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종교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점과, 상업과 인터넷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지배하는 문화 속에서 인간은 더욱 정치, 기업, 종교, 학교 등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그 능력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가 인류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고, 그런 종교는 결국 우리에게서 잊힐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현재 우리 사회의 구조와 문화가 변화와 변혁을 겪는 결정적인 원인을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으로 본 것이며, 또한 디지털 시대에 종교가 유연하게 대처해야 할 사명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김진년은 정보사회를 컴퓨터의 발달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이 가치를 가지고 유통되고, 활용되는 사회로 보았다. 그는 오늘날 정보화 사회 속에서 목회와 선교활동에 디지털매체를 능동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행정에서도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컴퓨터 활용과 대처를 주장한다. 이는 정보화 사회라는 시대적 변화에 맞게 목회상황, 혹은 목회행정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한편 조태희는 정보화 시대가 가져다주는 장단점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는 21세기 사회구조의 다변화 속에서 정보화 시대가 목회에 이로운 점도 가져다주지만, 어려운 난제도 가져다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정보화 시대는 목회자들의 목회정보 교환과 세계 목회상황에 대한 빠른 인지라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뒤쳐진 목회자의 교회행정과 교인관리 그리고 영상매체 운영의 역량을 통해 비교될 수밖에 없는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태희는 정보화 사회에서 목회구조와 예배와 설교와 행정 등에 대한 현대 목회적 대안들을 찾도록 제안하고 있다.   이와 같은 디지털 방법론이 선용되는 목회적 관점에서 더 나아가 장용호는 교육적 관점과 선교적 관점으로 확장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제안한다. 이와 관련하여 장용호는 기독교 공동체 내의 디지털화 교육의 중요성, 사이버 공동체가 진화한 만큼 현실 공동체 모임의 강화, 교회의 공동체성 강화, 기독교 공동체의 쌍방향 상호작용을 통한 가치공유를 강조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사회의 변화에 따른 현대목회적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연구를 기반으로 디지털 시대에 대한 현대목회의 한 제언으로 디지털 방법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정보화 사회, 멀티미디어 시대, 디지털 시대에 대한 현대목회적 대안으로 예배, 설교, 목회행정에 관한 디지털 방법론에 관해 목회현장의 구체적인 실천적 지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최인식은 현 시대에 대한 목회적 대처 미흡의 요인으로 목회자의 자질과 목회자의 변화 능력 부족을 손꼽았다. /한빛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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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8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8)
       시편 98편은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명령어로 시작한다. 이미 앞에서 초청한 내용이 중복되어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1절에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찬양하라는 것이다. 역시 1절에 거룩한 팔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시니 찬양하라고 한다. 3절에서는 ‘인자와 성실’ 때문에 찬양하라고 초청한다. 특이한 것은 본문 시편에는 ‘소리치라’는 말씀이 많이 등장한다.   4절에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라고 했다. 5절에 ‘음성으로 노래하라’고 하셨다. 6절에는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고 한다. 7절에는 ‘다 외칠지어다’고 했다. 8절에 ‘큰물은 박수하라’고 했는데 바닷물을 의인화한 시적 표현이다. 박수 역시 소리 내는 것이다. 당연히 시편 98편은 찬양하되 소리쳐 찬양하라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찬양뿐이랴? 기도할 때도 소리내어 통성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사무엘상 7장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소집하여 기도회를 연다. 그들은 금식하며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삼상 7:8).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고 했다(삼상 7:9). 그날에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우레를 발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셨다(삼상 7:10).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셨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이 말씀에 의지하여 통성기도 할 때 기도가 응답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통성기도가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들은 침묵기도로 대신하면 된다. 누구에게는 이런 기도가, 누구에게는 저런 기도가 응답이 빠르다고 여기므로 자신이 좋은 편을 택하면 된다. 그러나 통성기도를 배우고 싶고, 통성기도를 통해 응답받기 원하는 이들을 위해 몇 가지 조언을 드린다.   첫째로 기왕이면 즐겁게 소리 내어 기도한다. 4절에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고 했다. 땅 역시 의인화한 시적 표현이다. 모든 인생들이 그렇게 기도하라는 명령이다. 즐겁게라는 말은 자원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통성기도를 억지로 할 수 없다. 꼭 괴로운 일이 있거나, 힘든 고난의 때에, 혹은 막힌 문제가 있을 때만 통성기도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마음이 움직일 때 통성으로 기도한다.   둘째로 여럿이 함께 소리 내어 기도한다. 본문에서 찬양할 때 동원되는 악기를 보라. 다양한 악기와 형태로 찬양을 요구하신다. 기도 역시 혼자보다는 함께 기도할 때 힘이 난다. 사도행전에 합심기도가 여러 번 소개되어 있다. 1장에서 성령 받을 때 합심기도 하지 않았는가? 4장에서도 핍박을 받을 때 예루살렘교회는 합심기도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4:31). 12장에서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때에 교회가 간절히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옥에서 해방되는 기적을 경험했다(행 12:12).   셋째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소리 내어 기도한다. 9절을 보면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고 했다. 찬양하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이들도 심판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할 때 기도가 더욱 힘이 있다. 나는 종종 성도들과 말씀을 나눌 때 ‘어린아이같이 믿자’고 권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부자인지 가난한지 알지 못한다. 무조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졸라댄다. 아이들은 부모가 약속하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 통성기도를 시작하라. 큰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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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4
  • [목회자 칼럼] 추수와 감사의 계절
    ▲ 이원돈목사   지난 여름 우리는 폭염과 태풍이후 폭우를 만났다. 지금 우리는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빛 가을 들녘을 바라보고 있다. 이번 여름 태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듯이 풍요로운 가을들녘을 눈앞에 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을 본다, 그런데 넘어진 후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고 넘어진 후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올 가을 우리가 꿈꾸어야할 추수와 감사의 계절은 우리가 가족과 마을 공동체와 함께 일어서서 가을 하늘만큼 높은 추수와 감사의 계절일 것이다.   어떤 익명의 분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집값은 떨어져야하는데 내 집은 올라야 하고 비정규직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 자식은 정규직이어야 하고 중소기업을 키워야 하는데 나는 대기업에 다녀야 하고 최저임금 오르면 안되는데 내 임금은 올라야한다”는 이 글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사회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공적의식과 사적이해가 충돌하고 있다. 시대적 공적의식과 개인의 사적 욕망이 충돌하고 있고, 특별히 사적욕망이 공적의식을 앞도 하면서 사회적, 회복적 탄력성이 저하되기 시작하면서 넘어진 후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이 추수와 감사의 계절을 맞이하는 우리 시대의 고민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핫한 사회 이슈는 우선 서울에서 집값이 오르면서 다시 부동산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고 또 다른 이슈는 출산 문제이다. 이 모든 이슈는 모두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과 관련된 일들인데 소득주도 성장에 대해 야당 대표가 출산주도성장이라는 코믹한 성장론을 제안할 수밖에 없을 만큼 오늘 젊은이들의 주거문제와 출산 문제가 심각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러한 지역과 마을의 소 공동체 없이 모든 것을 혼자 다 처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들은 상위 10%의 사람들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주거 출산 육아 건강문제를 공동체적으로 공유하지 않고서는 출산과 육아와 교육과 살림이 불가능한 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이다.   이러한 회복적 탄력성을 가진 마을 공동체 없이 늙은 사람들은 은퇴후 그 오랜 세월 외로워서 못살것이고, 젊은이들은 홀로 주택을 만들고 애를 낳고 애를 키우고 건강과 여가를 즐기는 이 모든 것을 나홀로 살아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확행의 마을 공동체를 통해서만이 고독한 노인들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청춘들의 결혼 출산 육아의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마을학교에 기초한 교육자립 시스템을 만들 수 있고, 의료 자립 돌봄마을을 형성할 수 있으며, 교회와 마을 공동체에 기초한 세대 공감 잔치마당과 마을을 만들어 낼 수 있다.올 가을은 이러한 회복적 탄력성을 가진 작은 마을 공동체로 우리는 이제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이런 꿈을 한번 꾸어 보는 아름다운 추수와 감사의 계절이 되기를 기도한다.  /부천새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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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4
  • 완전한 안식처
    ▲ 추영춘목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안식이라는 것이다. 기계도 쉬지 않으면 열을 받아서 작동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쉬지 않으면 이상이 생긴다.   안식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안식처이다. 가장 훌륭한 곳은 내 집이다. 세계애창곡인 ‘즐거운 나의 집’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그만큼 집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훌륭한 안식처가 되기 때문이다. 또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발생하는 것도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고향에서 안식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나 완전한 안식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저마다 각자 죄악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인간이란 완전한 존재가 못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에는 항상 부담과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가까운 인간관계라도 항상 부담과 갈등이 있는 것이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이다. 비록 그들은 부자지간이었지만, 서로의 뜻이 맞지 않아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다윗을 향하여 요나단은 호의적이었지만, 사울은 그렇지가 못했다. 또 후에 왕이 된 다윗과 아들 압살롬과의 관계도 갈등의 연속이었다. 결국은 압살롬은 아버지를 향해 칼을 들게 된다.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고, 아버지의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붉게 물들어 있는 결함이 많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세상과 사람에서 완전한 안식을 얻을 수가 없다. 때로는 가정조차도 완전한 안식처가 될 수가 없다. 종종 사람들이 가출을 감행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아는 분 가운데 미국 이민 생활에서 엄청 고생을 하는 것을 보았다. 미국이란 나라라 할지라도 완전한 안식처가 될 수는 없다.    미국 복음주의의 선구자이자 미국 교회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로 손꼽히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드 목사와 어머니 에스더의 11자녀 중 5번 째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교도적 경건성이 있는 목사였다. 어머니도 노스햄프턴 회중교회 목사인 솔로몬 스토타드의 딸이었으므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훈련 받을 수 환경이 주어졌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여섯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 디모데에 의하여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13세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장배경으로 살아온 에드워즈에게 1757년 9월 53세 때 가장 적합한 일이 부여되었다.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정 재능과 학식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천연두로 인해 1758년 3월 22일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들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는 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두려워말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의 인생은 교회로부터 입은 큰 상실감과 여러 수고로 말미암아 지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영원한 안식처로 초대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처는 하늘에 있다. 사람은 안식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땅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은 안식 속에서 남아 있는 인류를 이끄는데,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영이고 사람은 여전히 육신이기에, 하나님과 사람은 각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안식한다. 하나님은 안식 중에 사람들 가운데 와서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고, 사람 또한 안식 중에 하나님께 이끌려 하늘에 올라가 유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천상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완전한 안식처는 오직 주님의 품이다. 주님은 나의 어떤 허물과 죄와 실수도 다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죄까지도 주님은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신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에 마음에 큰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의 완전한 안식처는 오직 주님의 품이다. /순복음신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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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4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7)
    ▲ 최종인목사   인생들이 짊어지는 무거운 짐들이 있다. 과거의 실패이다. 누구든지 실패한다. 능력이 있어도, 공부를 잘해도, 월등하게 뛰어난 재산이 있어도 실패는 한 두번은 겪는다. 공부에 실패하고, 연애에 실패한다. 사업에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임에도 그 실패는 오늘 내 인생의 발목을 잡는다.   두번째 짐은 현재의 문제들이다. 심방을 다니다보면 문제없는 성도는 없어 보인다. 건강때문에 고생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야 거의 대부분 호소한다. 겉으로 볼때 참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어 보임에도 실상 들여다보면 문제 투성이인 가정들이 의외로 많다. 정말 사는 것이 힘들고 고단하다.   세번째 짐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전혀 알 수 없다(약 4:14).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그 모든 일의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잠 16:1). 땅을 사두지만 땅이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돈을 저축하고 투자하기도 하나 하룻밤 사이에 무슨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만(마 6:31) 매일 염려가 떠나지 않는다.   시편의 저자는 고단한 인생을 묘사한다. 2절에 교만한 자들 때문에 고단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교만한 자들에게 벌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3절에서 악인들 때문에 고단하다. 그래서 “악인들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릅니까?”하고 호소한다. 4절에 보면 그들의 기세는 전혀 꺽일 것 같지 않다.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다”고 고발한다. 5절에 그들은 인생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는다.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한다. 6절에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인한다. 그러면서도 7절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보지 못할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고 자만해 한다.   고단한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첫번째,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복수를 두번이나 거듭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도울 사람없는 인생들에게 그래도 희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니 든든하다.   두번째, 세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넓은 세상 끝을 심판하는 범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세계, 즉 어떤 상황도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가끔 야구경기나 축구경기를 보면 심판에게 불만이 있다. 분명히 상대 선수가 파울을 했는데도 심판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재판장에 가보면, 때도 죄 없는 사람이 붙들려가고, 죄인들은 웃으면서 풀려날때도 있다. 세상의 심판은 틀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비디오 판독을 하지 않아도 매우 정확하다.   세번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9절에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하신다. 나 때문에 고단한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께 할말이 없다. 그러나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어렵거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자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뢰할 대상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이다.   네번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버려진 애완견들이 거리에 나뒹군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않으신다”(14절). 하나님을 생각하면 오늘 고단한 것? 아무것도 아니다. 힘있게 이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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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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