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칼럼
-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
구원은 하나님께
-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
- 오피니언
- 칼럼
-
구원은 하나님께
-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실시간 칼럼 기사
-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26
- 구한말(舊韓末) 한국교회의 시작과 발전, 부흥의 과정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영혼을 사랑했으며, 초기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쌓아올린 성과 때문에 교만에 빠져 있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사역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을 담아 우리나라에 입국한 소중한 선교사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데 테레사보다도 18년 앞서 여성들과 소외되고 외면 받는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소록도에 한센병 요양시설을 만들게 한 장본인으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생애를 살았던 진정한 예수의 제자인 주인공 서서평 선교사이다. 서서평(徐舒平)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남부 비스바덴에서 미혼모 안나 셰핑의 딸로 출생했다. 그녀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으로 미국에 있던 어머니에게 가톨릭 신앙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의절을 당했다. 그러나 1911년에 동료 선교사 포사이더(Forsythe)로부터 그녀의 인생에 최대 터닝 포인트가 되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태평양 건너에 있는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이 있는데, 그곳에는 의료시설, 위생관념조차 부족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의사에 의해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은 엘리자베스는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그 소명으로 간호사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송하는 해외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다. 드디어 엘리자베스가 32세 때인 1912년 2월 20일에 조선으로 향하는 여객선 코리아호(S.S.Korea)를 탔다. 약 20여 일 동안의 항해 끝에 그녀가 한 번도 그곳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조선의 땅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녀는 성격이 급하고 활발하여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자국어를 최대한 절제하고 한국어로 조선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열심히 배웠다. 조선에 입국한 서서평은 파송선교회의 스케줄에 의해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 양성 교육과 기독교 선교활동에 임무를 받아 최선을 다해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 후 1919년 전국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불길같이 터지자 서서평은 만세운동에서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친절히 치료해 주었다. 또한 투옥된 독립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하며 예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 일제가 서울 세브란스 의료 활동을 금지시키자 그녀는 전라남도 광주로 내려가 선교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광주 제중원의 간호사로 의료,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서서평 선교사는 지방으로 내려온 후부터는 목포, 제주도, 전주와 군산, 광주 등지에서 활동을 하면서 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여성들에게 성경공부와 삶에 절대 필요한 것들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군산에 있는 구암 예수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그녀의 탁월한 기획력과 사업 수완을 동원하여 타병원에 비해 한국인 조수, 입원 환자 수, 진료횟수가 월등히 높은 성과를 내는 병원 경영의 발전을 보였다. 그녀는 병자, 간호학교, 육아사업, 윤락여성구조, 빈민구제, 이일학교 설립의 사역으로 헌신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된장국에 보리밥을 좋아하고 검은 고무신을 싣고 다니며 전도와 교육, 사랑의 실천을 하는 동안 만성 풍토병과 영양실조, 극도의 약한 체력의 상태로 그녀는 54세인 1934년 6월 광주에서 22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소천 하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 담요 반장, 다른 반장은 다리 밑에서 자고 있는 걸인에게 나눠졌다. 마지막까지 조선 땅에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시신마저 병원에 의학연구용으로 기증하였고 그녀의 장례는 광주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한센병 환자, 노숙자 수천 명의 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광주의 ‘어머니’라고 울부짖으며 애도의 장례식이 엄수되었다. 그녀는 전라남도 광주시 양림동 108번지 선교사 묘원에 고이 잠들어 있다. 생전에 서선교사는 ‘조선의 어머니’로서 14명을 양아들, 딸로 입양하고, 매년 4만 여명 이상의 여성들을 만나 교육시켰다. 여자 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학교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조선여성절제회, 여성전도회연합회, 조선간호부회, 부인조력회 등을 조직하여 소중한 한 여성으로 성장하도록 기독교 정신으로 선교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2017년 4월에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영화관에서 개봉되어 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미혼의 몸으로 타국에 와서 진정한 십자가 희생과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며 무소유의 생활로 나보다 더 약한 자를 위해 살다가 천국으로 이사한 서서평 선교사를 기리며 우리도 그녀의 신앙과 삶에서 교훈을 얻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
- 오피니언
- 칼럼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26
-
-
[실로암] 후회하지 않을 만한 가치
-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내게 어린놈이 분수에 맞지 않게 유난떤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나는 종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시간이 되면 죽게 되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사고를 위해서 보험도 드는데 분명히 일어날 일에 대해서 덮어두는 것은 내 성격이 견디기 힘들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유는 그리 오랜 삶을 살아보지 않았음에도 지독하게 후회스러운 지난 시간들 때문이다. 방문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집을 난장판을 벌이고 돌아가는 어린 조카처럼(난 아직 조카가 없다만) 잘 다스리고 있는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내 속에서 난장판을 벌일 때가 있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지난 시간들이 혹시라도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길 바라는 미래의 내가 되지 않도록 나를 건드린다. 과거의 것들을 마주하는 것은 지금도 괴롭지만 그나마 성장한 것은 괴로움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후회하는가’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는가’와도 같다. 내가 이전 어린 시절에 후회하던 것들은 다른 청년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 되지 못한 것’, ‘내가 무언가 가지지 못한 것’, ‘내가 무언가 누리지 못한 것들이다.’ 지금도 이러한 것들에 완전히 자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한 가지 통찰을 얻은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 몸이 변하면서 취향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후회하게 될 내용도 변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고 이 말은 또 이전에 후회하던 것들 중에는 ‘내가 왜 그런 것을 후회했지?’ 생각하게 될 것들도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 바라기 때문에 내게 고통이 되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없어도 덤덤한 것들, 저것을 소유하기 위해 목숨 걸었다면 큰일 날 뻔했을 것들이 있을 것이란 말이다. 이렇게 후회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난 마지막 때에 후회하긴 싫다. 난 소위 ‘세상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다. 물질이나 쾌락이나 권력이나 하는 따위의 것들(이것을 죄악시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도 자유롭지는 않기에 나름 이 마음가짐에 거짓이 없도록 노력한다. 마치 실수로 유튜브로 결말을 봐버린 영화가 재미없고 따분한 것처럼 가질 만큼 가져보고 놀 만큼 놀아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들로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빠듯한 점심시간에 아내와 식사하고 10분 낮잠 자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낭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후회하지 않을 만한 가치가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행복감은 이해와 사랑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럴 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존재방식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처음 지음 받았을 때처럼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러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믿는다. 나는 나의 가정과 내가 속한 공동체가 이해와 사랑이 가득하길 원한다. 그래서 그렇지 못할 때 마음이 많이 아프다. 깨어진 것들이 사역의 짐으로 느껴진다. 복구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지만 건드리지도 못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훗날 마지막에 후회를 하게 된다면 이러한 공동체를 더 많이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싶고 그렇게 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사랑을 잘 모르고 때로는 진흙탕 물을 솟구쳐 올리는 땅처럼 후회할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리고 뒤늦게라도 배우고자 한다. 어리석고 한심한 내 자신을 깨닫게 하는 사건들이 종종 일어난다. 스멀스멀 내가 나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이끌어 주실 것을 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신뢰한다. 또한 나를 이끌어주듯이 저 사람도 이끌고 계실 것이기에 난 후회할 짓을 좀 덜했으면 좋겠다. /강릉중앙교회 전도사
-
- 오피니언
- 칼럼
-
[실로암] 후회하지 않을 만한 가치
-
-
[쉽게 배우는 한의학 27] 아토피성 피부염(2) - 아토피의 원인
- 주지하다시피 아토피는 단순히 피부질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유전적 배경에서부터 음식에 대한 알레르기, 면역학적 이상, 피부 장벽의 이상, 환경적ㆍ사회적 인자 및 심인성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토피는 아직 그 원인이 규명되어 있지 않은 난치성 질환으로 위에서 언급한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치료가 어려운 질환이다. 이제 아토피를 유발하는 원인들을 찾아보고 그 내용을 살펴보는데, 아토피를 유발하는 원인들은 동시에 아토피의 악화 요인이기도 하다. 1) 환경적 요인: 먼저 공기오염 문제로 오존층 파괴되어 햇빛은 옛날의 햇빛이 아니고, 냉난방을 위해서 실내 공기를 밀폐하며, 더구나 현대인은 야외활동이 거의 없이 대부분을 실내에서 생활하는 것이 문제이다. 환경오염 물질로는 각종 해로운 화학 물질과 합성세제 외에도 화학약품으로 처리된 종이와 플라스틱용기와 음식물을 담는 스티로폼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다양한 생활용품들에서 화학 물질이 나오고 있다. 생활환경과 작업환경에 의해 의류와 먼지의 자극에 의해서 가려움이 심해지고 긁으면 표피가 벗겨지고 출혈이 생기며 2차 감염이 될 수 있다. 피부에 직접 작용하는 세제는 보건위생의 입장에서 보면 필수적인 생활용품에 해당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세제를 과도하게 사용하다 보니 피부가 약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렇다고 세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같은 차원에서 화장품도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또한 시멘트 구조물은 습도조절이 쉽지 않아서 생활환경을 건조하게 하는데, 이것이 아토피성 피부염을 유발하는 인자가 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새 책, 새 장난감, 새 가구, 새 옷 심지어는 신문 등 수많은 환경오염이 아토피를 유발하고 악화시킨다. 새집증후군: 건물을 구성하는 건축자재에서 각종 오염 물질이 발생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새집증후군을 야기하는 시멘트이다. 신축 가옥이나 빌딩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현기증, 구토, 안통(眼痛), 가려움증 등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는 건축 자재에 사용되는 포름알데히드나 휘발성 유기화합물, 라돈과 석면 등이 원인 물질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내 공기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오염 물질에 대한 규제와 기준치 설정 등 적극적인 정책과 연구가 필요하며, 각 가정에서는 창문을 자주 열어 환기가 잘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확실한 대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집먼지진드기(헌집증후군): 주거환경의 관리를 위한 생활 개선 중 중요한 것은 집먼지진드기의 사체와 배설물이 호흡기관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부에 닿으면 가려움과 습진 등의 피부질환을 유발하고 아토피는 60% 이상이 이 때문에 발병한다고도 한다. 또한 헌집증후군이라 하여 오래되고 낡은 주거환경에서 발생하는 집 안의 먼지에 집먼지진드기가 기생하면서 발생하는 배설물과 진드기의 사체가, 인체의 호흡기관으로 흡입되어 알레르겐으로 작용하여 면역력을 떨어뜨려서 자가면역성 질환을 유발한다는 설도 있다. 진드기가 서식하기 쉬운 환경을 개선해 주고, 진드기가 기피하는 초극세사로 만들어진 침구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경희신창한의원 원장
-
- 오피니언
- 칼럼
-
[쉽게 배우는 한의학 27] 아토피성 피부염(2) - 아토피의 원인
-
-
인간관계의 원리 (5)
- 3. 이웃을 기쁘게 한 기쁨은 사랑으로 충만한 기쁨이어야 합니다.빌레몬 1:7에 “내가 너희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위로를 얻었노라”고 하였습니다. 기쁨은 사랑으로 충만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전제로 기쁨만이 남을 기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사랑이 없는 기쁨은 진정으로 기쁨이 아닙니다. 사랑 가득한 가슴이 우리 이웃에 많은 기쁨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4.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은 상대를 대접한 행위입니다.인간관계의 기독교의 황금율이 있습니다. “무엇이 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데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눅6:31)입니다. 대접하다의 원어는 포이에오(poievw)인데 ‘베풀다’의 뜻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으면 합니다.남이 자신에게 베풀 때 저절로 기쁨이 넘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상대를 대접하는 행위입니다.5.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은 결국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본문 2절에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성경에 보면 주의 일을 염려하며 어찌하여 주를 기쁘게 할꼬(골전8:32)하는 자가 있습니다. 장가 간 자가 세상을 염려하며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고전 8:33)하는 자가 있습니다. 시집 간 자가 세상을 염려하여 어찌하여 남편을 기쁘게 할꼬(고전8:34)하는 자도 있습니다.이런 사람은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의 덕도 세울 수 없습니다. 신앙의 덕도 세울 수 없습니다. 진실로 네 이웃(약자)을 기쁘게 하는 것은 정신건강의 제일 가는 조건입니다.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자는 정서가 안정된 자요,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는 자입니다. 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자는 감정과 지성을 잘 조절하는데서 생깁니다. 인간관계를 이루는 일은 이웃의 필요로 알고 채워 주는 그런 관계가 될 때 선을 이루고 덕을 이룰 수 있습니다.세 번째 원리는 서로 수용하는 일입니다.본문 7절에 “이러므로 그리스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였습니다.강한 자나 약한 자나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인간관계의 원리는 서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수용은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것입니다. 성격이나 환경 그리고 습관이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것이 수용입니다.1. 서로 다른 성격을 그대로 수용해야 합니다.인간관계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성격입니다. 성격유형은 Enneagram에서는 9가지 성격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모든 성격마다 강점이 있는 반면에 약점이 있는 법입니다.이러한 점을 거부할 때 부부갈등이나 조직의 갈등, 사회적 갈등까지 야기 시키는 것입니다. 8유형은 지도자형으로서 힘이 강하고 지배적인 사람으로서 모든 성격유형 중에서도 가장 독립적이며 타고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지만 타협은 못하고 “욱”하는 성격의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9유형은 조정자형으로써 평화롭고 편안하며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모든 성격 유형 중에서 가장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는 유형이지만 우유부단하고 끔적도 않는 곰같은 고집을 지닌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1유형은 개혁자형으로써 합리적이며 원칙적이며 완벽주의 사람으로 모든 성격유형 중에서 타고난 부지러움과 근면을 바탕으로 빈틈없이 근검절약하는 유형이지만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고 과도한 비판과 지적을 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인간관계의 원리 (5)
-
-
[성경의 죽음 28] 풀과 같은 인생일진대
- 월요일에 훌쩍 가족과 함께 춘천에 와서 강원대학교 앞 유유자작, 조용한 카페에 앉았다. 오늘은 공지천을 걷고 싶어 왔다. 여기 춘천에는 예전에 잠깐 군 생활을 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아는 이도 없고 만날 이도 없어서 편안하게, 자유롭게 걸었다. 춘천은 봄의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 ‘봄내골’ 춘천이라 하지 않는가? 여기 마을버스 뒤 꽁무니에도 ‘봄봄’이란 글이 정겹게 새겨져 있다. 그런데 여기는 가을도 좋다. 이제 제법 서늘해진 가을날씨에 공지천을 걸으면 매우 좋다. 졸졸 흐르는 공지천 맑은 물소리도 좋고, 풀벌레 소리도 좋다. 무엇보다 가을 초입의 파란 하늘이 보기 좋다. 대부분 하천 주변이 그렇듯 공지천에도 풀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강아지 풀이 반갑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반갑다고 손짓을 한다. 들꽃들은 대부분 작게 수줍게 소박하게 피어있다. 그래서 애잔하기도 하고, 더 마음이 쓰이는 꽃이기도 하다. 이사야 40장 6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우리 인생들은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생은 누구나랄 것이 없이 풀이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보면 놀라운 업적을 남기거나 남들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성과를 거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단언하기를, 그런 모든 인생들도 풀이라고 하신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창세기의 설명처럼 여호와의 기운이 처음 붊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운이 다시 불 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봄바람 같은 여호와의 기운이 온 들판에 불기 시작하면 움트고 싹들이 돋아나지만, 여름 바람 불어오면 짙게 녹색으로 물들고, 가을바람 불어오면 하나둘 시들어 버리고, 초겨울 바람 불면 들꽃은 하나둘씩 땅에 떨어지고 만다. 뉴스를 보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겁을 먹거나 불안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뉴스를 보며 기도하자고 권한다. 지금도 뉴스에는 온통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다. 권력이 오래갈 줄 알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 동참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고, 남들을 비방하며 외치는 사람들이 뉴스 화면에 가득하다. 이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월은 흐르고 멸망의 때는 가까이 오는데 여전히 회개하지 못하는 인생들을 향해 선언한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선지자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인생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사야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인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장 8절). 이사야의 예언은 고레스 왕의 해방선언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 도저히 구원의 날이 올 것같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날이 선포된 것이다. ‘말씀의 성취’ 오늘 이 시대에 불안하고 두려움이 많은 인생들에게 선지자처럼 여전히 외쳐야 한다. 풀은 마르고 꽃이 떨어지듯 어느덧 우리 인생에 죽음은 가깝게 다가오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것이기에 오늘도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죽음 앞에서 여러분이 붙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 오피니언
- 칼럼
-
[성경의 죽음 28] 풀과 같은 인생일진대
-
-
[마라나타 13] 장자의 명분
- 리브가는 아들들이 태 속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여호와께 여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는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리브가는 먼저 여호와께 묻고 여호와께 대답을 받았다(창 25:22). 어머니로부터 태교의 교훈을 받으며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태아 때부터 알고 마음으로 소원한 것 같다. 아브라함 할아버지하고 15년을 함께 살았고, 어머니 리브가를 고향 땅에서 맞이하신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하나님 중심 장자의 특권을 가슴 깊이 새긴 것 같다. 부모의 명에 따라 밧단하람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던 중 벧엘에서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도 꿈에 보고, 하나님도 만나고, 약속하신 축복의 계승도 확인받고, 베개 삼았던 돌에 기름을 부어 제단을 쌓았다. 우물가에서 곱고 아리따운 라헬을 만나 첫눈에 사랑하고, 삼촌이 제안한 14년의 품삯을 단 며칠처럼 여기고 섬겼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지만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나님의 편애는 어디서 오는가 ?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훔쳤다고 말하지 않고, 에서가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으며, 그것은 망령된 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12:16~17) 에서는 자신의 아내를 맞는 일에도 에서 “스러웠다.” “에서가 헷 족속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니, 에서의 아내들로 말미암아 나는 나의 생명이 싫어졌다.” 리브가는 탄식을 한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천사를 놓지 않았고, 이스라엘이라 칭함을 받았다. 그에게서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계승되었다. 장자의 특권을 누리려면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다짐하고 실천해야 한다.
-
- 오피니언
- 칼럼
-
[마라나타 13] 장자의 명분
-
-
[목회자 칼럼] 마땅히 아이에게 가르쳐라
- 현대의 교육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그 문제의 근본은 어떤 제도가 아닌 가정교육에 있다. 일전에 일생을 교육에 바치고 정년퇴직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선생님의 대답이 애들보다 부모를 재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우리나라 속담에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듯이 학교에 입학 전 가정에서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옛 어른들 까지도 강조한 것이 새삼 새로운 느낌을 준다. 현대의 가정교육에서 가장 잘못된 점 셋을 지적 한다면 과잉보호, 무책임한 방관주의 그리고 가정에서의 부모부재라고 한다. 특히 요사이 너무나도 이상할 정도로 과잉보호가 심각하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의 본능이지만 도가 지나친 사랑은 자녀의 미래를 망하는 길로 인도하게 된다. 선생님께 책망만 받아도 내자녀의 기를 꺾고 왕따를 시킨다고 학교에 찾아가서 선생님께 욕하고 때리고 교장선생님께 가서는 사과를 받아내고 한다면 아이는 그 부모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부모가 돈이나 권력만 있으면 자식은 특별대우를 받는 과잉보호. 그와 반대로 아이들은 유아원이나 유치원 등 학교에 맡기면 그것으로 다 된다는 방임주의와 맞벌이 부부들의 부모의 부재가 결국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삐뚤어지게 하는 무서운 독약을 먹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교육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교육이란 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들의 경건한 생활이 곧 마음의 교육이다. 특별히 우리나라 자녀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인식이 부족하고 없으니 학교에서 전교조의 잘못된 역사교육으로 어린 자녀들이 부모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외에도 많은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있다. 이제는 학교에다 자녀들을 100% 맡길 것이 아니라 가정교육이 꼭 필요하기에 부모의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학교를 믿어야 되겠으나 요즘은 그럴 수가 없다. 잘못된 선생님이 있어 잘못된 교육을 시키기 때문이다. 뇌의 생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진 학자의 발표에 의하면 뇌의 모든 사람이 다 140억으로 갓난아기 때부터 140억 세포는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뇌세포의 성숙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첫 단계는 갓 출생해서 세 살까지이고 두 번째 단계는 네 살에서 열 살까지라고 한다. (잠언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대로 과연 성경은 교육의 귀중한 책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갓난아기가 세 살까지는 보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때는 부모의 정면을 보기 보다는 뒷면을 보고 자란다고 했다. 즉 생활 자체가 교육이 된다는 말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의 교육을 시키는데 위대한 스승인가 악한을 만드는 교육자인가 반성하는 기회를 만들자. 또한 마음의 교육이란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발견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 인간이 범죄 하여 타락함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그러기에 (엡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라”고 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이외의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기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육체의 자기 모습도 그러하고 심지어 속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사실 자기의 모습을 바로 안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오직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가 계속 자기를 알려주어 자기를 바로 보도록 하는 것이 곧 마음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하느냐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모르고 욕심만 내게 되는 인간은 주제파악을 못하는 인간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된다. 부모들은 이제라도 철저하게 세상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나라 사랑과 백성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 받도록 자녀를 키우자. 학교에다만 의존하지 말고 가정에서 마땅히 아이들에게 자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도록 가르치자. /생명의빛교회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 칼럼] 마땅히 아이에게 가르쳐라
-
-
[건강교실] 노인성 백내장
- 백내장은 유전이나 임신 초기의 풍진 등 태내 감염, 대사 이상에 의해 선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노화나 외상, 전신질환, 눈 속 염증, 독소 등에 의해 발생하는 후천 백내장이다. 후천 백내장에서도 나이가 들면서 노화의 일부로 발생하는 노년 백내장이 흔한 질환이다. 후천 백내장의 위험요인으로 노화가 가장 많으며 당뇨병, 아토피 등 전신 질환과 염증, 출혈 등의 안과 질환이나 안과 수술, 흡연, 음주 등 생활습관, 자외선, 방사선의 과도한 노출과 유전적인 요인, 스테로이드 등의 약물 등이 있다. 백내장의 대표적인 증상은 시력 저하이며 물체가 겹쳐 보이거나 빛 번짐, 눈부심을 호소할 수 있다. 백내장 환자는 수정체가 뿌옇게 혼탁해져 있어 마치 흐린 유리창을 통해 외부를 바라보는 것처럼 흐리거나 왜곡되어 보일 수 있다. 수정체의 혼탁 정도, 위치와 범위에 따라 증상과 시력 감소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혼탁이 수정체 중앙에 발생한 경우에는 밝은 곳에서는 동공이 축소되어 시력저하가 심해지고 어두운 곳에서는 동공이 확장되어 시력이 좋아지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백내장이 진행되어 전체가 혼탁해진 경우에는 밝고 어두움에 관계 없이 항상 시력 저하가 나타난다. 백내장의 진행으로 인해 수정체의 굴절률이 증가하면서 시력이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백내장 치료는 크게 약물 요법과 수술 요법으로 나뉜다. 약물 치료는 백내장 초기에 점안약이나 내복약을 사용하여 백내장 진행 속도를 지연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약물 치료는 큰 부작용은 없지만 아직까지 치료보다는 예방의 목적이 크며 백내장의 진행을 완전히 억제하지 못하고 약물치료만으로 이미 혼탁이 발생한 수정체를 원래의 투명한 상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진행된 백내장의 가장 확실한 치료 방법은 수술 요법이라 할 수 있다. 수술 치료는 진행된 백내장에 대한 가장 효과적이며 확실한 치료 방법이다. 일반적인 수술 방법은 각막의 작은 절개창을 통해 초음파기구로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개개인의 시력 도수에 맞는 인공수정체를 삽입하게 된다. 예전보다 수술 방법이 발달함에 따라 수술 시간이나 회복 시간이 단축되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경우 당일에 퇴원이 가능하다. 백내장이 양쪽 눈 모두에 있는 경우 한쪽 눈을 먼저 수술하여 회복 시킨 후 반대쪽 눈을 수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백내장은 일반적으로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초기에는 특별한 이상증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초기 백내장의 경우 위험 인자들을 조절하며 경과 관찰할 수 있다. 원하는 경우 백내장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 안약이나 복용약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약물 치료는 효과가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며 안약을 넣지 않았다고 하여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약물 치료를 놓쳤다고 하여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정기적인 안과 검진과 함께 백내장 진행 상태를 관찰하며 적절한 수술 시기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내장의 수술시기는 환자의 주관적인 증상이 중요하며 환자의 시력과 기능적 시력 요구 정도, 환경을 고려하여 정하게 된다. 증상이 진행되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나빠진 경우, 백내장이 원인이 되어 포도막염이나 녹내장 등 합병증 위험이 있는 경우 수술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시신경 질환, 약시, 회복되지 않은 다른 안과 질환이 동반되는 등 백내장 수술 후에도 시력 개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수술을 시행하지 않게 된다. 합병증을 동반한 외상성 백내장이나 수정체 부종으로 인한 급성 녹내장 발작, 심한 약시가 우려되는 유아의 편측 백내장과 같은 특수한 경우는 빠른 수술이 필요하다. 진행된 백내장을 방치할 경우 수정체 혼탁이 심하게 진행되어 과숙백내장이 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수술 중 합병증 발생이 높고 안내 구조물 관찰이 어려워 수술 후 시력 예후를 예측하기 어렵다. 또한 백내장이 진행되어 방수의 이동을 막아 수정체성 녹내장이 생기거나 수정체 용해로 인한 이차성 급성 녹내장이 생기는 경우도 드물게 있어 백내장이 있는 경우 정기적인 안과 검진을 통해 적절한 치료시기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된 생활 습관과 환경은 눈의 노화를 가속화시켜 백내장을 초래하고 증상을 악화시킬 있으므로 백내장의 위험 인자를 줄이는 생활 습관이 백내장 예방에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 자외선 차단 선글라스를 착용하거나 과도한 음주를 피하고 지나친 흡연 삼가면서 비타민 E, 비타민 C, 베타카로틴 등 황산화 비타민과 무기질과 토마토, 시금치, 베리류, 견과류 등 항산화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또한 당뇨병이 있는 경우 적절한 당 조절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예방법만으로는 노화로 인한 백내장을 예방할 수 없으므로 정기적인 검진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한양대병원 안과 교수
-
- 오피니언
- 칼럼
-
[건강교실] 노인성 백내장
-
-
교회가 이웃을 돌보는 공동체가 되자 (2)
- 나는 ‘성 베드로 루터교회’ 스데반 돌봄 사역부가 주관하는 ‘돌봄자 회의’ 촉매자에게 한국인 모녀를 돌보게 되었다 하며 돌본 사례를 나누곤 했는데 이 사례의 경우 왼쪽 편 마비환자인 어르신은 대화 상대 한 명 없는 아파트에 방임된 것이다. 오로지 음식이나 좀 갖다 주고 운동 갈 때 가끔 모시고 가며 젊어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언어폭력을 하며 정서적인 학대를 하고 있었다. 또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 집에 가끔 오셔서 딸이 자신에게 하는 행동에 관하여 두려워하며 하소연을 해서 경청해주었다. 시간이 흘러가며 나와 친숙해진 어르신은 과거에 자신이 했던 직업을 따님이 모르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랬다. 이 사실을 따님이 알면 더 학대할 것이라 이야기를 못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주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비밀을 내게 폭로한 것이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돌봄을 계속해야 되나? 회의감이 다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돌봄이니 정기적으로 어르신을 1주일에 1번 그녀의 집을 방문해서 함께 있었고, 큰 따님과는 수시로 그녀가 전화를 하며 텔레 케어도 하고 때로는 만나서 교제를 했다. 이렇게 친정어머니와 큰따님 사이에 같이 있어 주고 들어주며, 비밀을 지키며 돌봄을 한 지 3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고국으로 돌아가시게 되어 돌봄을 종결했다. 무엇보다도 큰 딸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마음 한복판에 가득 차 있었다. 분노는 2차 기분이라고 하는데 1차 기분으로 그녀가 한국에서 어머니와 살 때 어머니의 도덕적으로 단정하지 못한 생활 태도로 말미암아 많은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어머니 얼굴만 보면 그 때 상황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작은 도시라 한국인이 많지 않아 한인 교회에 나가서 어머니가 행여나 말로 실수해서 가족의 비밀이 폭로될까 두려워 교회에도 모시고 나가지 않으며 일만하고 지내는데 상담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를 만나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속이 후련하고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가 풀리는지 끊임없이 물어보지도 않은 가족사를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한국음식 요리해서 1주일에 1번 방문하여 같이 있어주고, 들어주고, 비밀을 지켜주니까 좋으셔서 그동안 미국에 와서 손자 돌봐 주며 최선을 다하는데 딸이 몰라주고 언어폭력만 하니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과거의 비밀을 내게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나는 두 모녀 관계를 놓고 기도를 하면서 주님께 지혜를 구했다. 1주일 내내 집안에 갇혀 생활하는 모습이 불쌍해서 목사님께 부탁해서 큰 따님에게 허락을 받고 비록 영어를 몰라서 갑갑하지만 1주일에 1번 우리 가족이 나가는 ‘성 베드로 루터교회’에 모시고 나갔다. 교회에 같이 나가는 첫날 옷차림도 평소와 달리 화려해서 놀랐는데, 왼쪽 편 마비환자라 거동이 불편해서 자동차 앞자리, 늘 내가 앉는 자리에 앉혀드렸는데 향수를 어찌나 강하게 뿌렸는지 운전하는 목사님과 내가 머리가 띵했던 적도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내가 아내와 장모님을 돌보는 것을 모르시니까 외로운 유학생 가족을 명절마다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셨는데 그녀가 어머니와 자신을 돌보아주니 감사의 표현으로 남편에게 부탁을 한 것 같다. /스데반돌봄사역원 원장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가 이웃을 돌보는 공동체가 되자 (2)
-
-
코로나로 깨닫는 시대의 소리
- 코로나 바이러스의 역습으로 결국 팬데믹 현상이 가시화되고 있어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영적 팬데믹 현상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데 지도자들은 아직 이러한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말씀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기에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교회가 회복시켜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정체성이 퇴색되어 맛 잃은 교회가 되고 있다. 교회의 위기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코로나가 가져온 역기능으로 세계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고 패러다임이 바뀌어지고 있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질서가 세워지고 정상의 위치로 회복 될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는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세계가 셧다운 되고 있어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기존의 시스템이 붕괴되고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함몰되며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일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생활해야 하며, 사회적 거리를 준수하는 등 일체의 모임을 자제하고 있다. 세계가 봉쇄되어 일시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비상사태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연일 매스미디어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있고 평안이 사라진 시대로 보이게 하고 있다. 핵무기도 바이러스 앞에서 숨을 죽이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 그 동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을 위해 살아왔지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력 앞에 의술도 과학도 무력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살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일어나고 있어 불확실성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세계를 초토화 시킨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사람을 만나도 경계해야 하며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가 된 것이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 속에 영혼이 있기에 사랑의 대상이다. 다시한번 하나님만이 믿음의대상이라는 명제 앞에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점검해야 할 때이다. 코로나가 가져온 생태계의 변화는 이제는 거리두기로 인해 얼마가 지나야 자유로이 세계가 일상적으로 회복될지 미지수로 남고 있다. 많은 교회가 예배를 드리지 않음으로 인해 예배의 중요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동안 우리가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현재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양분되고 있어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돌입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직접적으로 생명을 빼앗아가며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여 2차 대전이후에 천문학적 손실을 가져오고 있다. 지금 우리는 선교와 목회 그리고 일상적 사회생활까지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생존까지도 담보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마치 중세 암흑기와 같은 시대현상이 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의 우상화가 되었지만 지금은 기피대상이 되어 위상이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 목회와 세계선교가 이제는 코로나 전후로 양분되면서 불확실성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시대가 급변하고 있어 일상의 트렌드가 전반적으로 판도를 바꾸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화로 인해 그동안 지구촌 시대가 되었지만 이제는 바이러스로 인해 장벽을 쌓아가는 폐쇄사회로 가고 있다. 개혁과 개방사회가 가져온 순기능과 역기능은 차지하고라도 오늘 우리는 근시안적인 시각을 탈피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각 교정이 필요한 때이다. /세계선교연대 대표, 서울명동교회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코로나로 깨닫는 시대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