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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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8) 주 재림과 나팔절[8]
         오늘날은 은혜 시대요, 이방인들의 구원의 날이다. 그다음은 큰 환란이 있은 후, 인자가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환란과 재림 시(時)를 대비해야 한다. ⑥재림 주를 맞이할 대비책은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팔절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은 곧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주님이 [마24:37]에 말씀하신 것에서 그 대비책을 찾을 수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만일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려면 우리는 지난 노아의 날들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 또 그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영적으로 예비해야만 한다.    [히11:7]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므로 그의 집을 구원하였다. 또 [히3:6]에서 만일 우리가 끝까지 견고한 확신과 굳건한 소망의 기쁨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 대비책은바로그리스도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노아 방주와 같은 심령 성전을 세워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집이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노아 당시에 철갑선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든 더 튼튼한 배들이 존재했을지라도 홍수 심판 시, 모든 배가 부서졌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만든 노아의 방주만이 온전히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튼튼한 배가 아닌, 하나님 말씀을 믿은 노아에게 주님이 지어준 방주만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의 우리에게는 노아 방주가 곧 우리의 심령 성전을 의미한다. 이 심령 성전의 짓는 재료는 무엇인가? 바로 오늘 이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다. 즉, 잣나무 같은 진리이다. 잣나무 특성은 절대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고, 위로 곧바로 자라는 것이다. 산에 있는 것이 잣나무요, 들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잣나무는 마치 천수답(天水畓)같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빗물을 흡수하여 자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사는 것을 계시한다. 한마디로, 잣나무 같은 진리는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는 말씀이다. 즉, ‘첫째 부활의 진리’를 가리킨다.     [계20:4~6]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목 베임 받은 자들의 영혼들이 주 재림 시 부활 되리라. 그리고 그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천 년 동안 통치하리라.이 말씀은 우리의 심령 성전을 세우는 성전 재료와 똑같다. 즉 환란 날에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 정절을 굳게 지키며 순교하게 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첫째 부활의 진리’이다. 이 진리로 우리 심령이 무장되어 있으면 우리는 장차 7년 환란 날에 능히 승리할 수 있다. 즉, 순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큰 환란과 주 재림 시, 재림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대비책이다. 할렐루야! ⑦결론신학적으로 주 재림 시 죽은 성도가 모두 부활한다는 주장도, 또 7년 환란이 되기 전에 휴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천년왕국에서 부활체요, 영체로서 유대인인 혈육체와 함께 살아간다는 주장도 모두 성경에 맞지 않는다.     이는 인본적이고, 학문적인 주장일 뿐 하나님 말씀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을 절대 최종권위로 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에서 요한 계시록을 중심으로 예언의 비밀을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요컨대 반드시 하나님 하신 말씀대로, 나팔절의 실현이 모든 성도님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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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1
  • 성서와 생활(91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주님이 오신 목적은 다만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을 영원히 찬양해야 할 이유는 그분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위해 오셨다는 데 있다.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지 않기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자신이 먼저 죽음을 거쳐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 나셔야만했다. 이것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의 종노릇에서 건지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이다. 십자가는 죄를 그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위한 길이 되었다.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은 영원한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그 이상의 뜻이 있다. 바로 자신이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영원한 성령으로 다시 임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 영광의 아름다움은 바로 성령이 되셔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함에 있다. 자신을 속죄양으로 내어 주시고 죽으심이 끝이 아니셨다. 다시 부활하사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요7:38-39)    주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통해 그의 권세도 주셨다. (마16:19)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셔서 그의 부르는 자는 구원받게 하셨다. 이처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우리는 천국의 은혜를 맛보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증거하는 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게 하셨다.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을 전함으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이 되어 주셨다. 천국의 열쇠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증거하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성령이 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이로써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나고 호흡할 수 있는 교통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위해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4:23)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사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엡1“23)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언제나 교통할 수 있는 ‘길’(요14:6)이 되어 주셨다. 이로써 우리는 진리를 통해 자유에 이르게 한 것이다.(요8:32)      주님은 구원의 힘이시며(요3:16),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의 떡’(요6:35,48)이시며 ‘생명수의 샘물이’(렘17:13,계21:6)이 되어 주셨다. 또한 교회의 몸이 되어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 나가는 은혜를 날마다 더하고 계신다. 교회는 단순히 주님만을 예배하는 곳이 아닌 주님을 닮아 가고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높은 뜻을 주신 아름다움을 보는 전진이 필요하다./대전반석교회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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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1
  • 뇌 (2)
         해마와 함께 주변에 있는 비피질 영역들은 해마와 함께 기억형성을 담당한다. 또한 해마는 파페츠 회로라고 알려진 기억회로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파페츠 회로는 유두체-유두시상로-시상전핵-대상회-해마방회-해마-유두체 감정과 기억형성에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뇌 회로이다.    후두엽은 뒤통수엽이라고도 하며 바깥쪽 표면에서 두정후두고랑 위쪽 끝부분과 후두전 패임을 잇는 가상적인 선의 뒤쪽 부분이고, 안쪽 표면에서는 두정후두고랑의 뒤쪽 부분이다. 시각연합영역과 시각피질이라고 하는 시각중추가 있어 시각정보의 처리를 담당한다.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각피질에 도착하면 사물의 위치, 모양, 운동 상태를 분석한다. 눈의 시력이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후두엽에 이상이 있으면 시각정보가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된다.    (2) 소뇌와 뇌간    소뇌는 감각 인지의 통합과 운동근육의 조정과 제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으로 교뇌 등쪽의 제4뇌실에 들씌워지듯이 존재하는 큰 구조이며, 가로 10cm, 세로 5cm, 높이 3cm, 무게는 약 150g 정도이다. 소뇌의 주된 작용은 골격근의 활동 조절을 하는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지,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은 대뇌 피질의 전두엽에서 하지만, 실제로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그 계획대로 여러 활동이 세밀하게 실현하도록 하는 것은 피드백 기구로 관여하는 것은 소뇌이다.    소뇌로 들어갈 감각정보는 몸의 주변부에 있는 체성 수용체와 내이 안에 위치한 반고리관과 전정기관으로부터 보내진다. 또한 소뇌는 대뇌 피질의 뉴런으로부터 오는 운동정보를 받아 움직임을 조절하게 된다. 소뇌는 근육운동, 평형감각 조절을 한다. 만약에 소뇌가 없다면 땅에 있는 물건을 잡으려고 할 때 손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더라도 조절할 수 없고,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서 있지도 못한다.    뇌간은 뇌의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부분으로 척수가 확대 팽창해서 생겼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뇌간의 무게는 약 200g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 뇌간은 중뇌, 교뇌, 연수가 있다. 뇌간의 가장 아래쪽인 연수 부분은 호흡과 심장 운동을 조절하는 생명 중추가 있다. 그 외에도 혈관의 수축과 이완, 하품, 기침, 재채기, 구토 등의 반사 작용도 뇌간에서 이루어진다. 연수 위에 있는 뇌교는 온 몸의 신경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전달하고 두개의 소뇌 사이의 정보를 교환하는 역할을 한다. 중뇌는 뇌간의 가장 앞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뇌의 앞에는 시상과 시상하부라 불리는 곳이 존재한다. 시상은 두 개의 작은 타원형 모양이고, 이것이 좌우 대뇌반구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시각, 청각, 피부 감각 등의 주요 감각계가 바로 시상을 거쳐서 대뇌 피질로 이어지게 된다. 시상하부는 대뇌 아랫부분과와 시상, 중뇌의 교차점에 존재하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콩알만한 크기에 4g에 불과한 조직이지만 자율 신경의 중추가 모여있어서 생명과 직결되는 곳이다./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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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1
  • 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
     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빛은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을 뜻한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고 4절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셨다. 이토록 예수님과 말씀과 빛은 같은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원래 말씀(헬,로고스)은 그리스 사람들이 이성이라고 해석하는데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그리스)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예배 드리는 장소인 교회 당이 하단에 위치하고,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이 은혜의 빛을 비추시는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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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1
  • [향유옥합] 간절을 간청하라
        김미선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어린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곳으로 마음이 향했다. 이내, 내 시야권으로 들어온 그 울음의 주인공은 이제 제법 자기 고집을 부릴법한 ‘미운 네 살’의 귀여운 공주님이었다. 그보다 더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아이 엄마는 꽤 지쳐 보였지만 아주 단호하게 우는 아이를 훈육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실랑이의 시작은 엄마 손에 들려있는 빵 봉지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우는 아이는 지금 당장 그 빵을 달라고 생떼를 부렸고, 엄마는 아이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단호함으로 일관했다. 둘의 신경전이 어찌나 팽팽하던지,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이 들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그들에게 다가갔다.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차분히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리 공주님, 뭐가 그렇게 속상할까? 빵이 너무 먹고 싶은데, 엄마가 안 줘서 속상하구나?” 지원군을 만났다는 희망과 위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더는 울 힘조차 남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이내 생떼를 그쳤고, 빵이 진짜 먹고 싶다고 꺼이꺼이 남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지켜보던 나도, 단호했던 엄마도 일순간 무장해제를 당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는데,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빵 봉지를 주섬주섬 열어 빵 하나를 아이 손에 들려주었다. 젊은 날의 내 모습 같았던 그 ‘어린 엄마’의 등을 토닥여 주며 잘하고 계시는 거라고, 힘내시라고 응원하며 두 모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한 주간 묵상했던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말씀이 떠오르며 예수님의 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11:10)”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어떤 벗의 비유’를 들며 간절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어떤 한 사람에게 긴 여행으로 지쳤던 친구가 찾아왔는데, 그를 돌보며 먹이고 싶었으나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늦은 밤 염치 불고하고 이웃에게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려 떡을 빌리고자 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간청함을 인하여어느 누가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지 않겠느냐? 당연히 일어나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잠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울 만큼의 간절한 간청의 기도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기도 제목이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고, 개인적인 소망이라도 그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일이라면 더 담대하고 끈질기도록 간절하게 간청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자세이자 응답받는 기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어린 아이에겐 빵 한 조각이 너무나 간절했을 수 있다. 그래서 엄마도 주변 사람도 개의치 않고 부끄러움 없는 생떼를 부려가며 간절한 용기로 빵 한 조각을 얻어낸 것일 테다. 나에겐 그 ‘간절을 간청하는 기도의 자세’가 그 아이만큼 있기는 한 것일까. 그날, 아이를 통해 내 기도의 자세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간절(懇切)을 간청(懇請)하라. 다시금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그날까지 간청의 자세로 기도하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 권사, 말씀 굽는 타자기 블로거, 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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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1
  • [향유옥합] 구원에 대하여 – 영화 8번 출구를 보고 나서 -
       우린 “나는 중 2 때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나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걸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영화 8번 출구는 시간이 나서 볼 게 없어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담겨있을 줄 저는 몰랐습니다.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원래 이 영화의 원제목은 쇼생크구원 혹은 쇼생크구속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탈출이라는 단어의 속에는 ‘어떤 곳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탈출이라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더 큽니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속을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뜻인데 우리는 이것은 혼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그 단어의 의미가 많이 상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쇼생크탈출에서 탈출이 의미하는 바는 구속입니다. 주인공 엔디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다가 그곳을 벗어났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냥 단순히 그곳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단어가 바로 탈출, 다시 말해 구속이라는 뜻이고 구원이라는 말의 뜻은 구속 이후의 단계까지 내포하는 더 포괄적이고 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 8번 출구라는 영화에는 구원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6하 원칙 중 주인공과 아저씨와 어린 소년(누가)과 지하철 0~8번 출구(어디서)와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는가라는 세 가지 원칙이 중요하게 깔리며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갑니다. 주인공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저씨와 똑같이 둘 다 소년과 함께 같은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게 있게 되는 상황에 맞딱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정이 탈출의 성패를 결정 짓게 됩니다. 그들의 결정은 그 소년의 말을 듣는가, 아님 거부하는가에 따라 나뉘는데 그 소년의 의미는 제가 볼 때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여자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구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구속을 얻기 위해 우리가 동행하는 존재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나오는 아저씨의 경우처럼 자신의 결정에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구속을 얻을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이 아닌 종교의 힘을 빌어 수행하고 선행을 베풀기만 하면 마치 구속을 얻고 더 나아가 천국에 도달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영화의 내용처럼 한 인간을 지옥이라는 공간, 다시 말해 출구 탈출불가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인공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게 되면 그때는 구속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으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나의 몸을 던져 희생하고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하고 견대내고 마침내 나아가서는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온유한 한 사람의 몸부림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구속 이후에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이루어나가는 삶의 여정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나 혼자 이루어내는 구원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사람의 실패한 존재인 아저씨의 초라하고 반복되는 형상으로 나타내어 놓은 것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성경말씀은 이 영화의 설정처럼 예수님은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이 가을 여러분에게 좋은 영화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몇 자 적어봤습니다./새맘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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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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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칼럼] 추수와 감사의 계절
    ▲ 이원돈목사   지난 여름 우리는 폭염과 태풍이후 폭우를 만났다. 지금 우리는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빛 가을 들녘을 바라보고 있다. 이번 여름 태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듯이 풍요로운 가을들녘을 눈앞에 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을 본다, 그런데 넘어진 후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고 넘어진 후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올 가을 우리가 꿈꾸어야할 추수와 감사의 계절은 우리가 가족과 마을 공동체와 함께 일어서서 가을 하늘만큼 높은 추수와 감사의 계절일 것이다.   어떤 익명의 분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집값은 떨어져야하는데 내 집은 올라야 하고 비정규직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 자식은 정규직이어야 하고 중소기업을 키워야 하는데 나는 대기업에 다녀야 하고 최저임금 오르면 안되는데 내 임금은 올라야한다”는 이 글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사회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공적의식과 사적이해가 충돌하고 있다. 시대적 공적의식과 개인의 사적 욕망이 충돌하고 있고, 특별히 사적욕망이 공적의식을 앞도 하면서 사회적, 회복적 탄력성이 저하되기 시작하면서 넘어진 후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이 추수와 감사의 계절을 맞이하는 우리 시대의 고민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핫한 사회 이슈는 우선 서울에서 집값이 오르면서 다시 부동산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고 또 다른 이슈는 출산 문제이다. 이 모든 이슈는 모두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과 관련된 일들인데 소득주도 성장에 대해 야당 대표가 출산주도성장이라는 코믹한 성장론을 제안할 수밖에 없을 만큼 오늘 젊은이들의 주거문제와 출산 문제가 심각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러한 지역과 마을의 소 공동체 없이 모든 것을 혼자 다 처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들은 상위 10%의 사람들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주거 출산 육아 건강문제를 공동체적으로 공유하지 않고서는 출산과 육아와 교육과 살림이 불가능한 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이다.   이러한 회복적 탄력성을 가진 마을 공동체 없이 늙은 사람들은 은퇴후 그 오랜 세월 외로워서 못살것이고, 젊은이들은 홀로 주택을 만들고 애를 낳고 애를 키우고 건강과 여가를 즐기는 이 모든 것을 나홀로 살아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확행의 마을 공동체를 통해서만이 고독한 노인들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청춘들의 결혼 출산 육아의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마을학교에 기초한 교육자립 시스템을 만들 수 있고, 의료 자립 돌봄마을을 형성할 수 있으며, 교회와 마을 공동체에 기초한 세대 공감 잔치마당과 마을을 만들어 낼 수 있다.올 가을은 이러한 회복적 탄력성을 가진 작은 마을 공동체로 우리는 이제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이런 꿈을 한번 꾸어 보는 아름다운 추수와 감사의 계절이 되기를 기도한다.  /부천새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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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4
  • 완전한 안식처
    ▲ 추영춘목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안식이라는 것이다. 기계도 쉬지 않으면 열을 받아서 작동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쉬지 않으면 이상이 생긴다.   안식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안식처이다. 가장 훌륭한 곳은 내 집이다. 세계애창곡인 ‘즐거운 나의 집’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그만큼 집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훌륭한 안식처가 되기 때문이다. 또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발생하는 것도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고향에서 안식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나 완전한 안식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저마다 각자 죄악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인간이란 완전한 존재가 못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에는 항상 부담과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가까운 인간관계라도 항상 부담과 갈등이 있는 것이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이다. 비록 그들은 부자지간이었지만, 서로의 뜻이 맞지 않아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다윗을 향하여 요나단은 호의적이었지만, 사울은 그렇지가 못했다. 또 후에 왕이 된 다윗과 아들 압살롬과의 관계도 갈등의 연속이었다. 결국은 압살롬은 아버지를 향해 칼을 들게 된다.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고, 아버지의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붉게 물들어 있는 결함이 많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세상과 사람에서 완전한 안식을 얻을 수가 없다. 때로는 가정조차도 완전한 안식처가 될 수가 없다. 종종 사람들이 가출을 감행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아는 분 가운데 미국 이민 생활에서 엄청 고생을 하는 것을 보았다. 미국이란 나라라 할지라도 완전한 안식처가 될 수는 없다.    미국 복음주의의 선구자이자 미국 교회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로 손꼽히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드 목사와 어머니 에스더의 11자녀 중 5번 째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교도적 경건성이 있는 목사였다. 어머니도 노스햄프턴 회중교회 목사인 솔로몬 스토타드의 딸이었으므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훈련 받을 수 환경이 주어졌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여섯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 디모데에 의하여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13세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장배경으로 살아온 에드워즈에게 1757년 9월 53세 때 가장 적합한 일이 부여되었다.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정 재능과 학식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천연두로 인해 1758년 3월 22일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들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는 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두려워말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의 인생은 교회로부터 입은 큰 상실감과 여러 수고로 말미암아 지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영원한 안식처로 초대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처는 하늘에 있다. 사람은 안식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땅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은 안식 속에서 남아 있는 인류를 이끄는데,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영이고 사람은 여전히 육신이기에, 하나님과 사람은 각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안식한다. 하나님은 안식 중에 사람들 가운데 와서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고, 사람 또한 안식 중에 하나님께 이끌려 하늘에 올라가 유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천상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완전한 안식처는 오직 주님의 품이다. 주님은 나의 어떤 허물과 죄와 실수도 다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죄까지도 주님은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신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에 마음에 큰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의 완전한 안식처는 오직 주님의 품이다. /순복음신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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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4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7)
    ▲ 최종인목사   인생들이 짊어지는 무거운 짐들이 있다. 과거의 실패이다. 누구든지 실패한다. 능력이 있어도, 공부를 잘해도, 월등하게 뛰어난 재산이 있어도 실패는 한 두번은 겪는다. 공부에 실패하고, 연애에 실패한다. 사업에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임에도 그 실패는 오늘 내 인생의 발목을 잡는다.   두번째 짐은 현재의 문제들이다. 심방을 다니다보면 문제없는 성도는 없어 보인다. 건강때문에 고생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야 거의 대부분 호소한다. 겉으로 볼때 참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어 보임에도 실상 들여다보면 문제 투성이인 가정들이 의외로 많다. 정말 사는 것이 힘들고 고단하다.   세번째 짐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전혀 알 수 없다(약 4:14).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그 모든 일의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잠 16:1). 땅을 사두지만 땅이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돈을 저축하고 투자하기도 하나 하룻밤 사이에 무슨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만(마 6:31) 매일 염려가 떠나지 않는다.   시편의 저자는 고단한 인생을 묘사한다. 2절에 교만한 자들 때문에 고단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교만한 자들에게 벌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3절에서 악인들 때문에 고단하다. 그래서 “악인들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릅니까?”하고 호소한다. 4절에 보면 그들의 기세는 전혀 꺽일 것 같지 않다.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다”고 고발한다. 5절에 그들은 인생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는다.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한다. 6절에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인한다. 그러면서도 7절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보지 못할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고 자만해 한다.   고단한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첫번째,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복수를 두번이나 거듭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도울 사람없는 인생들에게 그래도 희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니 든든하다.   두번째, 세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넓은 세상 끝을 심판하는 범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세계, 즉 어떤 상황도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가끔 야구경기나 축구경기를 보면 심판에게 불만이 있다. 분명히 상대 선수가 파울을 했는데도 심판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재판장에 가보면, 때도 죄 없는 사람이 붙들려가고, 죄인들은 웃으면서 풀려날때도 있다. 세상의 심판은 틀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비디오 판독을 하지 않아도 매우 정확하다.   세번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9절에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하신다. 나 때문에 고단한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께 할말이 없다. 그러나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어렵거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자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뢰할 대상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이다.   네번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버려진 애완견들이 거리에 나뒹군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않으신다”(14절). 하나님을 생각하면 오늘 고단한 것? 아무것도 아니다. 힘있게 이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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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2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2)
    ▲ 함정호목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양식은 우리말로는 음식이며, 일용할 양식은 일하는 낮에 일하면서 먹을 양식을 구하란 말씀이다. 성도는 육의 양식을 구하기에 앞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영의 양식을 구해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한다. 베드로는 의식주를 구하는 일을 할 때 먼저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영의 양식을 먹었다. 죄를 고백하며 자기 구원 이루니 두 배에 채우는 육의 의식주가 성공했다.    예수님은 목수 일을 하시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고 보이지 않는 예정하시고 택한 자들을 중생·성화·영화시키는 영의 양식을 먹이셨다.   육의 양식은 씹어 소화시키지만 영의 양식은 영생하는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함으로 먹고 소화시켜 먹어야 한다(요12:49-50).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담이 처음으로 범죄 할 때 육이 영을 버리고 마귀와 결합하여 간음한 것이다. 이때 육은 마귀의 죄성으로 오염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란 말씀대로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져 사망권자 마귀와 결합한 것이다. 이때 영은 범죄 하지 않아 온전하게 깨끗한 상태였지만 지체요 소유인 육이 범죄 했기 때문에 육과 함께 사망했다. 하지만 이 사망은 깨끗한 상태로 기능이 정지된 사망이다.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입고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 할 때 단일성인 영과 종합체인 육이 법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난다(고전6:19-20). 이때 깨끗한 상태로 있던 영 안에 하나님이 들어가심으로 영은 법적이나 실상적으로 온전한 성전 되었으나 육은 실상적으로 죄악에 차있다. 우리가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서 자타 성화를 이루란 말씀이다. 또한 성삼위 하나님께서 구원과 섭리의 역사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구원을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 서로가 연결하여 육에 채워져 있는 죄악을 멸하는 구원을 이루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함께 건축해 가라는 말씀이다(엡2:19-22).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은 하나님이 중생시킨 신령한 새사람을 연단시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실력자, 영광스러운 자, 존귀한 자, 온전한 자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다. 또한 대립하고 충돌하는 환경을 만나 세상 떠날 때까지 통과해야하는 세상현실이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너희 믿음의 시련이(약1:2-4)…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1:3-7) 시험은 믿음의 사람에게 붙어있는 죄악을 제거하고 강하고 반석과 같은 견고한 인내의 사람을 만들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다(약1:2-4).   또한 시험은 성도에게 충격을 주어 흔드는 현실이다. 구정물이 들어있는 통을 흔들면 가라앉아있던 오물이 드러나듯 성도가 시험을 만나면 자신도 타인도 알지 못하던 죄악의 오물이 드러나고 약하고 모자라는 부분이 드러나는데 그 죄를 제거하여 강하게 하고 보완해서 온전케 하라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섭리 구원 역사인 것이다.    시험에 드는 것은 오늘날 세상속에서 살아 갈 때 거듭나지 않고 현실에 휘둘리고, 어느 순간 세상사람들과 동화되어 멸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별된 삶을 원하시고, 항상 깨어있어 기도하라(마26:41)고 하셨다.  /영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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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2
  • 목회적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 송일현목사
    ▲ 송일현목사   얼마 전에 한 교회에서 사임한 목회자들이 교회를 상대로 노동청에 진정을 넣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참으로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목회자들은 교회에 시간외수당과 퇴직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교회를 ‘사업장’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주님의 사명을 받아 맡겨주신 양들을 돌보아야 할 목사가 자신의 목회를 노동이라 부르고, 목회활동을 펼치는 자신을 노동자라 부르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업장이라 부르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전대미문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자 거룩한 공동체다. 그런 공동체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목회자이고, 그것이 바로 목사다. 목회는 단순노동이라 할 수 없다. 주님의 거룩한 일이자, 기꺼이 감당해야 할 희생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회자들은 자신을 노동자로 지칭하면서 스스로를 폄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세상에서는 노동을 신성시하기도 한다. 노동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자 생존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 3:19)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간의 삶의 방법이기에 가치있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인간의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서의 가치다. 목회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노동과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되는 신성한 일이 바로 목회다. 그래서 목사는 사명감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주님께 사명을 받은 자만이 목회를 해야 한다. 목회는 자기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목사가 목회를 노동이라고 부르며 교회에 그에 따른 수당을 달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사명없이 신학을 하고 목회에 나섰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다. 목회자가 아닌 노동자로서 자신을 바라보고 돈을 요구하며 세상의 힘을 빌어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작금의 한국교회가 얼마나 타락하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갈등과 싸움을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세상 법정에 가져가 다투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교회의 일은 교회 안에서 해결하려 했던 우리의 신앙선배들과는 전혀 달리 교회의 일을 세상으로 가져가 호소하는 일들이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을 통해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일을 세상 법에 호소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질타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은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교회의 일을 세상이 판단하게끔 해서는 안된다. 목회를 노동으로 생각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노동의 가치를 운운하며 그 대가를 세상 법을 통해 호소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닌 세상의 법이요,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되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목회자들은 주께서 주신 사명을 받들어 맡겨주신 양들을 잘 돌보고,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희생하는 주님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기부 이사장·보라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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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5
  • 디지털매체의 예배학적 관점
    ▲ 김진오목사  B. 선행연구   현대목회의 변화에 대한 연구가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는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목회를 수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장의 필요와 소통방식을 연구하여 그 대안들을 제시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 앞에 놓여 있다. 그동안 ‘현대목회 환경의 변화’와 ‘상황적 대응’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던 학자들과 학문적 논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디지털매체에 대한 예배학적 관점   1990년대부터 교회 예배 시 디지털매체 활용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와 관련된 연구물들이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김진년 외의 다수의 편저인 「영상예배와 멀티미디어 교육」에서 박영근은 교회의 멀티미디어 활용을 통한 ‘보여주는 예배’를 주장하면서, 예배가 디지털매체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하나님과 신자간의 소통의 장(場)이 되기를 제안하고 있다.    1) 이는 멀티미디어를 활용하여 개인적 차원을 넘어 회중적 차원으로 예배의 커뮤니케이션을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예배 시 디지털매체를 활용하여 예배를 적극적인 입장의 연구물들이 이어지게 된다. 김세광은 컴퓨터의 테크놀로지는 물론 영상 비디오 같은 현대 미디어 사용을 ‘멀티미디어 예배’라고 규정하면서, 예배에 있어서 멀티미디어의 활용을 권장했다.   2) 김진년 외의 다수의 편저인 「크리스챤, 인터넷, 멀티미디어」에서 황인돈은 멀티미디어 활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방안으로 교회적 활용법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다. 그는 멀티미디어의 소리, 그림, 동영상을 교회에서 어떻게 활용할지, 그 방법론적 활용법을 제시하면서 교회의 특별 예배나, 교회 자료들, 설교 모음들 등에서 멀티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권장한다.   3) 가장 최근에 나온 박한수의 박사논문 또한 멀티미디어를 예배에 선용할 것을 주장하는 논문으로, 박한수는 현재 여섯 개 교회(울산감리교회, 온누리교회, 돈암동교회, 행복한교회, 법동제일교회, 충남제일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예배의 사례연구를 구체적으로 싣고 있다.   4) 이것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교회 예배에서 디지털매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활용할 것을 주장하는 논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멀티미디어 활용에 대해 주의를 요하면서 그에 대한 대응방안을 제시하려는 연구자들의 노력들이 있어 왔다.   최인식은 서울신학대학교 「교수논총」(1995년)에서 오늘날 멀티미디어가 주는 사회적, 신학적 충격에 대해 지적하면서 급속히 발전된 멀티미디어로 인해 교회와 신학이 변하게 되었음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화신학이라 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복음을 담아 낼 수 있는 ‘새 부대’(마 9:17)로서의 교회와 신학에 대한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함을 강조했다.   5)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조기연은 「영상예배(멀티미디어예배)의 예배학적 이해」(2002년)라는 논문에서 현재 울산감리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영상예배 분석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교회는 현대 기술문명을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수용하느냐”이다. 이 문제제기에 대해 조기연은 멀티미디어를 예배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즉 멀티미디어를 기독교교육, 전도와 선교, 친교, 상담, 봉사 등에서 활용하고, 가급적 멀티미디어를 예배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한다. 6) 이것은 예배에서 디지털매체를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빛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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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5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6)
    ▲ 최종인목사  연약한 인간에게 능력·권세 입고 오시어 손길 내미시는 주님 위기의 순간, 성도를 지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 발견   갈릴리바다에서 항해하던 제자들이 있었다. 매우 숙련된 뱃사람들임에도 풍랑을 만났을 때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해 했다.   광풍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 그들은 예수님이 안 계시면 자신들이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우리 인생 앞에 폭풍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하나님께서는 풍랑과 같은 위기를 보내실 때가 있다. 위기를 만날 때 성도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   인생의 거친 풍랑과 같은 위기를 만날 때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믿음의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서 떠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불신의 반응을 보일 것인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신의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눈을 들어보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평안한 생활 중에 하나님의 실존을 깨닫기 어렵다. 눈앞에 온갖 유혹과 시험에 빠질만한 것들을 많아 가져다 놓아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한다. 시편 93편은 익명의 저자가 하나님의 왕권을 찬양하고 있다. 불과 5절에 불과하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한다. 바로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신앙의 기본 중 기본은 “하나님이 계신가?”란 질문에 “아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다스리신다(1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역 가운데 우리 인생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역사하신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역사하신다. 인생의 위기는 우리가 연약한 존재들이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한다. 1절에서 하나님을 소개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권위를 입으시고, 능력의 옷을 입으신다.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셨으므로 견고할 수밖에 없다.   태풍이 불어 집이 흔들리고 나무들이 넘어간다. 간판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 태풍을 다스리시고 잠잠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3절에는 큰물을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보통 히브리어에서는 강조하거나 최상급 표현을 하려면 두 번 또는 세 번 같은 단어를 언급한다. 세 번 되풀이 하는 것은 강조를 넘어 최상급이다. 즉 큰물이 어마어마한 세력으로 덮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큰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난 대적들을 의미한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큰물은 인생의 위기일 것이다. 이스라엘이 만난 대적들과 우리 인생이 경험하는 위기는 하나님 앞에서는 쩔쩔매고 말 것이다. 인생 중에서 위기를 만났는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기회로 여겨야 한다.   위기의 순간이 오면 인간은 절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절대자의 구원을 기대한다. 바로 위기의 순간이 올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심을 경험할 것이다. 4절에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다”고 고백했다.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물소리와 파도를 이기게 하셨다. 오늘의 인생들이 경험하는 많은 위기에서도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영원토록 견고하신다(2절). 문제는 오늘의 성도들이다.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오늘도 우리를 낙심하고 넘어진다. 과거에 큰 죄와 허물로 인해 자주 넘어진 인생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바로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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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5
  • 영적 술취함을 경계하라
    ▲ 이재기목사   요즘 우리는 술에 취해 큰 재앙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종종 듣는다. 음주운전으로 인명살상의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고 술에 만취하여 지갑을 갈취당하거나 성폭행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은 술에 취하게 될 때 우리가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술 취함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죄, 특히 정욕이 우리 마음을 얼마나 취하게 만들 수 있는지 경고한다. 사도 요한은 큰 창녀에 대해 말하면서 계시록 17:2에서 이렇게 썼다.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여자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그렇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이 정욕으로 취하게 유혹한다. 죄와 정욕에 취하면 우리는 분별력을 잃고 제대로 현실을 보지도 못한다.    성적 정욕만이 아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도 우리의 마음을 멀게 한다. 앞에서 언급한 계시록의 창녀는 물질만능주의의 한 도시를 상징한다. 사탄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여 우리의 마음을 취하게 만든다. 일단 물질에 대한 욕심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면 성적인 정욕과 마찬가지로 마음은 분별력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도 없다. 예배 시간에도 돈벌이에 대해 생각하거나 명품 가방을 떠올린다. 우리는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하나님을 밀쳐두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나누는 것에 인색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가 취해놓고도 취한 줄 모른다는 것이다. 술 취한 사람이 나는 안 취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노리는 마음 도둑을 경계해야 한다. 사탄은 이 세상과 우리의 정욕을 이용하여 우리 마음을 취하게 하고 눈멀게 하며 완악하게 한다. 우리가 경계하며 우리 마음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게 늘 간수하지 않는다면 우리 영혼이 거짓 친밀함인 불륜과 성적 범죄와 물질 사랑으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14-15에서 마음의 무디어짐에 대해 말씀하셨다. 게리 토마스가 통찰력을 발휘해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가 아니라 무디어질 때 문제가 생긴다고 하셨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된다. 굳은살은 한순간에 생겨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점점 굳어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관리하지 않으면 마음은 점점 무디어지고 사랑은 식어갈 것이다. 우리는 영적 진리들에 대해 깨닫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술 취함을 경계하자. 자주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정기적으로 영적 건강검진을 할 필요가 있다. 사탄의 유혹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사모할 필요가 있겠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18에서 우리를 방탕에 빠트리고 마는 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면서 술에 취하지 말고 오히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술의 알코올 성분에 취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겠지만 더더욱 마음의 정욕에 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취함을 막는 가장 좋은 길은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죄와 욕심에 취하지 않고 거룩한 성령님에 취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럼으로써 더욱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한다.  /사랑빚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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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5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1)
    ▲ 함정호목사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과 택함, 구속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중생한(엡 1:3-23, 벧전 1:3-7) 자가 되어 몸의 성화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제시하는 영의 양식이자 지혜의 원천이요 지식의 보고이며 선한 능력을 갖추게 하는 말씀이다(딤후 3:15-17).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한다. 기도는 성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기본이다. 그중에서도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의 기본이자 모범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구절은 성부·성자·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부 하나님을 지칭한다. 성부께서는 믿는 자와 함께 하신 분이시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키우시는 분이시며,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분이다. 우리를 축복하시어 천국에 거하는 것을 허락하신 아버지께 성도는 마땅히 기도드려야 한다. 기도는 내 중심, 육신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길 간구하는 기도여야 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이름’은 성삼위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예택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사역자의 이름이다(마 1:21, 벧전 1:3-7)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분이다(사 6:3). 거룩이란 온전, 영원, 깨끗, 성결을 뜻한다. 거룩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속성이 빛이 되어 세상에 계시된다. 계시된 빛을 받아 중생한 성도는 몸의 성화를 이루어 거룩하게 된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요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진 나라이다. 동시에 구속된 성도의 몸 안에 성전이 된 천국이다. 그렇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하늘뿐만이 아니라 성도의 몸 안에 계신다(눅 17:17-21). 예택자의 성화된 심신은 천국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라가 임하는 것은 말씀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어 내 안에 천국을 확장하는 것이다(마 13:31-33).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마 4:17, 5:3)라고 하신 것은 자기중심적인 옛사람을 죽이고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왕으로 영접할 때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마 13:44).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중생은 주님께서 성도에게 영생과 천국 시민권을 주고 그분의 아들이 인정하시어 주님의 후사로 받아들이시겠다는 증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중생은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의 죄로 죽었던 인간의 영이 살아나 온전히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성도를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하신다. 하지만 성도가 죄의 오염에서 완전히 깨끗해진 것은 아니다. 심신의 성화는 아직 남아있는 죄를 회개함으로써 깨끗한 성전, 천국이 되는 것이다. 즉 성도 안에 중생·성화된 부분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성전이자 천국이지만, 아직 성화를 이루지 못한 성도의 일부분인 ‘땅’이 성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으로 친히 오신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위해 고난의 생애를 보내시고 십자가의 사활을 통해 예택한 자들이 중생과 성화를 이루고 영화롭게 될 수 있는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다 이루셨다(요 19:30). 그 후 금의환향하시며 하늘로 돌아가셨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면서 성화를 이루고 주변에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전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영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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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5
  • 디지털 목회방법 고민 증대 - 김진오
    ▲ 김진오목사   예를 들면, 일본 총무성에서 2010년 발표한 “정보통신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달성했다. 그리고 2009년부터 정보통신 백서를 통해 세계 주요국가의 정보통신 국가경쟁력 순위를 발표해 왔는데, 2010년 자료 기준에 따르면, 25개 주요 국가들 중 우리나라가 정부의 ICT 활용도, 유선 인터넷, 인프라의 안정성 등 3개 부문에서 1위, 모바일 환경, 인프라의 선진성 등 2개 부문에서 2위를 기록해 종합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셋째로 이러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비해, 오늘날 교회와 목회현장은 일부 중대형 교회를 제외하면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소수의 헌신으로 ‘예배’, ‘설교’, ‘목회행정’ 등의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실례로 현대 한국교회의 상황은 1년 예산 1억 미만의 미자립 교회가 70%에 육박한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절박한 현실은 목회자 혼자서 일인다역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을 낳았고,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목회자는 이런 절망스러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형 교회 목회자들에 버금가는 목회역량을 보여주어야만 교회가 현상유지 할 수 있는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 목회자가 목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일도 벅찬데 주변 환경의 변화에 걸맞은 예배와 목회 혹은 행정의 전략적 변용의 구체적 방법까지 일일이 신경 쓰며 관리해 나간다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일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비일비재한 현실이다. 필자가 처음 담임목사로 부임했던 사역지 또한 이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절박한 상황적 필요성 때문에 일인다역의 목회자가 목회적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대안으로 ‘디지털 목회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던 것을 상기해 본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한 한국교회가 앞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어떻게 바람직한 진로를 찾아 나갈 것인가를 모색하고자 하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 이 글의 주제가 된다. 또한 오늘날 교회현장은 외부 문화들을 수용하면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세대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기 시작했으며 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방법은 음악과 영상 등을 포함한 문화적 매체의 적극적 수용을 불러왔다. 이런 맥락에서 첨단 디지털 정보와 통신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적 대세 가운데 새로운 문화와 차별성을 추구하여 성공적 목회의 목적달성과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현대교회의 새로운 흐름은 많은 부분 공감하는 바가 되었다고 본다.   이 글은 제목에서 이미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현대교회의 목회에서는 이미 현장의 다급한 목회적 필요에 따라 ‘영상 매체’나 ‘디지털 방법론’이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다만 이런 현상에 대한 신학분야에서 연구와 제언이 여전히 미진하다고 판단하는 바, 학문적으로 공론화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정립되어 하나의 전통과 매뉴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의 예배와 목회전반의 양상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필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따라서 본 글은 현대예배와 목회에서 디지털매체의 방법론에 대한 비중의 실체를 밝히고, 유기적 관계의 ‘영상 매체’나 ‘디지털매체’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더욱 전문적이고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그 ‘공(功)’과 ‘실(失)’을 가려내어 좀 더 발전적인 제안을 함으로 현대 목회에서 디지털매체 역할이 중요하다는 일반적 명제의 가치를 좀 더 명확히 드러내고 그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공감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한빛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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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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