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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8) 주 재림과 나팔절[8]
오늘날은 은혜 시대요, 이방인들의 구원의 날이다. 그다음은 큰 환란이 있은 후, 인자가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환란과 재림 시(時)를 대비해야 한다. ⑥재림 주를 맞이할 대비책은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팔절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은 곧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주님이 [마24:37]에 말씀하신 것에서 그 대비책을 찾을 수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만일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려면 우리는 지난 노아의 날들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 또 그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영적으로 예비해야만 한다. [히11:7]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므로 그의 집을 구원하였다. 또 [히3:6]에서 만일 우리가 끝까지 견고한 확신과 굳건한 소망의 기쁨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 대비책은바로그리스도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노아 방주와 같은 심령 성전을 세워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집이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노아 당시에 철갑선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든 더 튼튼한 배들이 존재했을지라도 홍수 심판 시, 모든 배가 부서졌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만든 노아의 방주만이 온전히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튼튼한 배가 아닌, 하나님 말씀을 믿은 노아에게 주님이 지어준 방주만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의 우리에게는 노아 방주가 곧 우리의 심령 성전을 의미한다. 이 심령 성전의 짓는 재료는 무엇인가? 바로 오늘 이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다. 즉, 잣나무 같은 진리이다. 잣나무 특성은 절대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고, 위로 곧바로 자라는 것이다. 산에 있는 것이 잣나무요, 들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잣나무는 마치 천수답(天水畓)같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빗물을 흡수하여 자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사는 것을 계시한다. 한마디로, 잣나무 같은 진리는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는 말씀이다. 즉, ‘첫째 부활의 진리’를 가리킨다. [계20:4~6]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목 베임 받은 자들의 영혼들이 주 재림 시 부활 되리라. 그리고 그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천 년 동안 통치하리라.이 말씀은 우리의 심령 성전을 세우는 성전 재료와 똑같다. 즉 환란 날에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 정절을 굳게 지키며 순교하게 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첫째 부활의 진리’이다. 이 진리로 우리 심령이 무장되어 있으면 우리는 장차 7년 환란 날에 능히 승리할 수 있다. 즉, 순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큰 환란과 주 재림 시, 재림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대비책이다. 할렐루야! ⑦결론신학적으로 주 재림 시 죽은 성도가 모두 부활한다는 주장도, 또 7년 환란이 되기 전에 휴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천년왕국에서 부활체요, 영체로서 유대인인 혈육체와 함께 살아간다는 주장도 모두 성경에 맞지 않는다. 이는 인본적이고, 학문적인 주장일 뿐 하나님 말씀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을 절대 최종권위로 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에서 요한 계시록을 중심으로 예언의 비밀을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요컨대 반드시 하나님 하신 말씀대로, 나팔절의 실현이 모든 성도님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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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91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주님이 오신 목적은 다만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을 영원히 찬양해야 할 이유는 그분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위해 오셨다는 데 있다.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지 않기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자신이 먼저 죽음을 거쳐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 나셔야만했다. 이것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의 종노릇에서 건지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이다. 십자가는 죄를 그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위한 길이 되었다.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은 영원한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그 이상의 뜻이 있다. 바로 자신이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영원한 성령으로 다시 임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 영광의 아름다움은 바로 성령이 되셔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함에 있다. 자신을 속죄양으로 내어 주시고 죽으심이 끝이 아니셨다. 다시 부활하사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요7:38-39) 주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통해 그의 권세도 주셨다. (마16:19)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셔서 그의 부르는 자는 구원받게 하셨다. 이처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우리는 천국의 은혜를 맛보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증거하는 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게 하셨다.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을 전함으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이 되어 주셨다. 천국의 열쇠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증거하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성령이 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이로써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나고 호흡할 수 있는 교통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위해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4:23)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사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엡1“23)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언제나 교통할 수 있는 ‘길’(요14:6)이 되어 주셨다. 이로써 우리는 진리를 통해 자유에 이르게 한 것이다.(요8:32) 주님은 구원의 힘이시며(요3:16),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의 떡’(요6:35,48)이시며 ‘생명수의 샘물이’(렘17:13,계21:6)이 되어 주셨다. 또한 교회의 몸이 되어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 나가는 은혜를 날마다 더하고 계신다. 교회는 단순히 주님만을 예배하는 곳이 아닌 주님을 닮아 가고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높은 뜻을 주신 아름다움을 보는 전진이 필요하다./대전반석교회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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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해마와 함께 주변에 있는 비피질 영역들은 해마와 함께 기억형성을 담당한다. 또한 해마는 파페츠 회로라고 알려진 기억회로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파페츠 회로는 유두체-유두시상로-시상전핵-대상회-해마방회-해마-유두체 감정과 기억형성에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뇌 회로이다. 후두엽은 뒤통수엽이라고도 하며 바깥쪽 표면에서 두정후두고랑 위쪽 끝부분과 후두전 패임을 잇는 가상적인 선의 뒤쪽 부분이고, 안쪽 표면에서는 두정후두고랑의 뒤쪽 부분이다. 시각연합영역과 시각피질이라고 하는 시각중추가 있어 시각정보의 처리를 담당한다.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각피질에 도착하면 사물의 위치, 모양, 운동 상태를 분석한다. 눈의 시력이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후두엽에 이상이 있으면 시각정보가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된다. (2) 소뇌와 뇌간 소뇌는 감각 인지의 통합과 운동근육의 조정과 제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으로 교뇌 등쪽의 제4뇌실에 들씌워지듯이 존재하는 큰 구조이며, 가로 10cm, 세로 5cm, 높이 3cm, 무게는 약 150g 정도이다. 소뇌의 주된 작용은 골격근의 활동 조절을 하는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지,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은 대뇌 피질의 전두엽에서 하지만, 실제로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그 계획대로 여러 활동이 세밀하게 실현하도록 하는 것은 피드백 기구로 관여하는 것은 소뇌이다. 소뇌로 들어갈 감각정보는 몸의 주변부에 있는 체성 수용체와 내이 안에 위치한 반고리관과 전정기관으로부터 보내진다. 또한 소뇌는 대뇌 피질의 뉴런으로부터 오는 운동정보를 받아 움직임을 조절하게 된다. 소뇌는 근육운동, 평형감각 조절을 한다. 만약에 소뇌가 없다면 땅에 있는 물건을 잡으려고 할 때 손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더라도 조절할 수 없고,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서 있지도 못한다. 뇌간은 뇌의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부분으로 척수가 확대 팽창해서 생겼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뇌간의 무게는 약 200g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 뇌간은 중뇌, 교뇌, 연수가 있다. 뇌간의 가장 아래쪽인 연수 부분은 호흡과 심장 운동을 조절하는 생명 중추가 있다. 그 외에도 혈관의 수축과 이완, 하품, 기침, 재채기, 구토 등의 반사 작용도 뇌간에서 이루어진다. 연수 위에 있는 뇌교는 온 몸의 신경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전달하고 두개의 소뇌 사이의 정보를 교환하는 역할을 한다. 중뇌는 뇌간의 가장 앞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뇌의 앞에는 시상과 시상하부라 불리는 곳이 존재한다. 시상은 두 개의 작은 타원형 모양이고, 이것이 좌우 대뇌반구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시각, 청각, 피부 감각 등의 주요 감각계가 바로 시상을 거쳐서 대뇌 피질로 이어지게 된다. 시상하부는 대뇌 아랫부분과와 시상, 중뇌의 교차점에 존재하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콩알만한 크기에 4g에 불과한 조직이지만 자율 신경의 중추가 모여있어서 생명과 직결되는 곳이다./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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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
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빛은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을 뜻한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고 4절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셨다. 이토록 예수님과 말씀과 빛은 같은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원래 말씀(헬,로고스)은 그리스 사람들이 이성이라고 해석하는데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그리스)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예배 드리는 장소인 교회 당이 하단에 위치하고,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이 은혜의 빛을 비추시는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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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간절을 간청하라
김미선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어린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곳으로 마음이 향했다. 이내, 내 시야권으로 들어온 그 울음의 주인공은 이제 제법 자기 고집을 부릴법한 ‘미운 네 살’의 귀여운 공주님이었다. 그보다 더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아이 엄마는 꽤 지쳐 보였지만 아주 단호하게 우는 아이를 훈육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실랑이의 시작은 엄마 손에 들려있는 빵 봉지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우는 아이는 지금 당장 그 빵을 달라고 생떼를 부렸고, 엄마는 아이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단호함으로 일관했다. 둘의 신경전이 어찌나 팽팽하던지,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이 들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그들에게 다가갔다.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차분히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리 공주님, 뭐가 그렇게 속상할까? 빵이 너무 먹고 싶은데, 엄마가 안 줘서 속상하구나?” 지원군을 만났다는 희망과 위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더는 울 힘조차 남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이내 생떼를 그쳤고, 빵이 진짜 먹고 싶다고 꺼이꺼이 남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지켜보던 나도, 단호했던 엄마도 일순간 무장해제를 당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는데,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빵 봉지를 주섬주섬 열어 빵 하나를 아이 손에 들려주었다. 젊은 날의 내 모습 같았던 그 ‘어린 엄마’의 등을 토닥여 주며 잘하고 계시는 거라고, 힘내시라고 응원하며 두 모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한 주간 묵상했던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말씀이 떠오르며 예수님의 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11:10)”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어떤 벗의 비유’를 들며 간절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어떤 한 사람에게 긴 여행으로 지쳤던 친구가 찾아왔는데, 그를 돌보며 먹이고 싶었으나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늦은 밤 염치 불고하고 이웃에게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려 떡을 빌리고자 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간청함을 인하여어느 누가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지 않겠느냐? 당연히 일어나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잠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울 만큼의 간절한 간청의 기도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기도 제목이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고, 개인적인 소망이라도 그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일이라면 더 담대하고 끈질기도록 간절하게 간청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자세이자 응답받는 기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어린 아이에겐 빵 한 조각이 너무나 간절했을 수 있다. 그래서 엄마도 주변 사람도 개의치 않고 부끄러움 없는 생떼를 부려가며 간절한 용기로 빵 한 조각을 얻어낸 것일 테다. 나에겐 그 ‘간절을 간청하는 기도의 자세’가 그 아이만큼 있기는 한 것일까. 그날, 아이를 통해 내 기도의 자세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간절(懇切)을 간청(懇請)하라. 다시금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그날까지 간청의 자세로 기도하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 권사, 말씀 굽는 타자기 블로거, 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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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구원에 대하여 – 영화 8번 출구를 보고 나서 -
우린 “나는 중 2 때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나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걸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영화 8번 출구는 시간이 나서 볼 게 없어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담겨있을 줄 저는 몰랐습니다.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원래 이 영화의 원제목은 쇼생크구원 혹은 쇼생크구속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탈출이라는 단어의 속에는 ‘어떤 곳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탈출이라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더 큽니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속을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뜻인데 우리는 이것은 혼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그 단어의 의미가 많이 상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쇼생크탈출에서 탈출이 의미하는 바는 구속입니다. 주인공 엔디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다가 그곳을 벗어났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냥 단순히 그곳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단어가 바로 탈출, 다시 말해 구속이라는 뜻이고 구원이라는 말의 뜻은 구속 이후의 단계까지 내포하는 더 포괄적이고 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 8번 출구라는 영화에는 구원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6하 원칙 중 주인공과 아저씨와 어린 소년(누가)과 지하철 0~8번 출구(어디서)와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는가라는 세 가지 원칙이 중요하게 깔리며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갑니다. 주인공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저씨와 똑같이 둘 다 소년과 함께 같은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게 있게 되는 상황에 맞딱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정이 탈출의 성패를 결정 짓게 됩니다. 그들의 결정은 그 소년의 말을 듣는가, 아님 거부하는가에 따라 나뉘는데 그 소년의 의미는 제가 볼 때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여자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구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구속을 얻기 위해 우리가 동행하는 존재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나오는 아저씨의 경우처럼 자신의 결정에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구속을 얻을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이 아닌 종교의 힘을 빌어 수행하고 선행을 베풀기만 하면 마치 구속을 얻고 더 나아가 천국에 도달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영화의 내용처럼 한 인간을 지옥이라는 공간, 다시 말해 출구 탈출불가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인공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게 되면 그때는 구속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으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나의 몸을 던져 희생하고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하고 견대내고 마침내 나아가서는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온유한 한 사람의 몸부림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구속 이후에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이루어나가는 삶의 여정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나 혼자 이루어내는 구원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사람의 실패한 존재인 아저씨의 초라하고 반복되는 형상으로 나타내어 놓은 것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성경말씀은 이 영화의 설정처럼 예수님은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이 가을 여러분에게 좋은 영화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몇 자 적어봤습니다./새맘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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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8) 주 재림과 나팔절[8]
- 오늘날은 은혜 시대요, 이방인들의 구원의 날이다. 그다음은 큰 환란이 있은 후, 인자가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환란과 재림 시(時)를 대비해야 한다. ⑥재림 주를 맞이할 대비책은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팔절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은 곧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주님이 [마24:37]에 말씀하신 것에서 그 대비책을 찾을 수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만일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려면 우리는 지난 노아의 날들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 또 그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영적으로 예비해야만 한다. [히11:7]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므로 그의 집을 구원하였다. 또 [히3:6]에서 만일 우리가 끝까지 견고한 확신과 굳건한 소망의 기쁨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 대비책은바로그리스도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노아 방주와 같은 심령 성전을 세워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집이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노아 당시에 철갑선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든 더 튼튼한 배들이 존재했을지라도 홍수 심판 시, 모든 배가 부서졌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만든 노아의 방주만이 온전히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튼튼한 배가 아닌, 하나님 말씀을 믿은 노아에게 주님이 지어준 방주만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의 우리에게는 노아 방주가 곧 우리의 심령 성전을 의미한다. 이 심령 성전의 짓는 재료는 무엇인가? 바로 오늘 이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다. 즉, 잣나무 같은 진리이다. 잣나무 특성은 절대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고, 위로 곧바로 자라는 것이다. 산에 있는 것이 잣나무요, 들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잣나무는 마치 천수답(天水畓)같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빗물을 흡수하여 자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사는 것을 계시한다. 한마디로, 잣나무 같은 진리는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는 말씀이다. 즉, ‘첫째 부활의 진리’를 가리킨다. [계20:4~6]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목 베임 받은 자들의 영혼들이 주 재림 시 부활 되리라. 그리고 그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천 년 동안 통치하리라.이 말씀은 우리의 심령 성전을 세우는 성전 재료와 똑같다. 즉 환란 날에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 정절을 굳게 지키며 순교하게 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첫째 부활의 진리’이다. 이 진리로 우리 심령이 무장되어 있으면 우리는 장차 7년 환란 날에 능히 승리할 수 있다. 즉, 순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큰 환란과 주 재림 시, 재림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대비책이다. 할렐루야! ⑦결론신학적으로 주 재림 시 죽은 성도가 모두 부활한다는 주장도, 또 7년 환란이 되기 전에 휴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천년왕국에서 부활체요, 영체로서 유대인인 혈육체와 함께 살아간다는 주장도 모두 성경에 맞지 않는다. 이는 인본적이고, 학문적인 주장일 뿐 하나님 말씀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을 절대 최종권위로 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에서 요한 계시록을 중심으로 예언의 비밀을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요컨대 반드시 하나님 하신 말씀대로, 나팔절의 실현이 모든 성도님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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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8) 주 재림과 나팔절[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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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91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 주님이 오신 목적은 다만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을 영원히 찬양해야 할 이유는 그분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위해 오셨다는 데 있다.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지 않기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자신이 먼저 죽음을 거쳐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 나셔야만했다. 이것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의 종노릇에서 건지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이다. 십자가는 죄를 그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위한 길이 되었다.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은 영원한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그 이상의 뜻이 있다. 바로 자신이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영원한 성령으로 다시 임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 영광의 아름다움은 바로 성령이 되셔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함에 있다. 자신을 속죄양으로 내어 주시고 죽으심이 끝이 아니셨다. 다시 부활하사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요7:38-39) 주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통해 그의 권세도 주셨다. (마16:19)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셔서 그의 부르는 자는 구원받게 하셨다. 이처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우리는 천국의 은혜를 맛보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증거하는 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게 하셨다.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을 전함으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이 되어 주셨다. 천국의 열쇠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증거하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성령이 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이로써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나고 호흡할 수 있는 교통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위해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4:23)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사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엡1“23)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언제나 교통할 수 있는 ‘길’(요14:6)이 되어 주셨다. 이로써 우리는 진리를 통해 자유에 이르게 한 것이다.(요8:32) 주님은 구원의 힘이시며(요3:16),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의 떡’(요6:35,48)이시며 ‘생명수의 샘물이’(렘17:13,계21:6)이 되어 주셨다. 또한 교회의 몸이 되어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 나가는 은혜를 날마다 더하고 계신다. 교회는 단순히 주님만을 예배하는 곳이 아닌 주님을 닮아 가고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높은 뜻을 주신 아름다움을 보는 전진이 필요하다./대전반석교회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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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91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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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 해마와 함께 주변에 있는 비피질 영역들은 해마와 함께 기억형성을 담당한다. 또한 해마는 파페츠 회로라고 알려진 기억회로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파페츠 회로는 유두체-유두시상로-시상전핵-대상회-해마방회-해마-유두체 감정과 기억형성에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뇌 회로이다. 후두엽은 뒤통수엽이라고도 하며 바깥쪽 표면에서 두정후두고랑 위쪽 끝부분과 후두전 패임을 잇는 가상적인 선의 뒤쪽 부분이고, 안쪽 표면에서는 두정후두고랑의 뒤쪽 부분이다. 시각연합영역과 시각피질이라고 하는 시각중추가 있어 시각정보의 처리를 담당한다.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각피질에 도착하면 사물의 위치, 모양, 운동 상태를 분석한다. 눈의 시력이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후두엽에 이상이 있으면 시각정보가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된다. (2) 소뇌와 뇌간 소뇌는 감각 인지의 통합과 운동근육의 조정과 제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으로 교뇌 등쪽의 제4뇌실에 들씌워지듯이 존재하는 큰 구조이며, 가로 10cm, 세로 5cm, 높이 3cm, 무게는 약 150g 정도이다. 소뇌의 주된 작용은 골격근의 활동 조절을 하는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지,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은 대뇌 피질의 전두엽에서 하지만, 실제로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그 계획대로 여러 활동이 세밀하게 실현하도록 하는 것은 피드백 기구로 관여하는 것은 소뇌이다. 소뇌로 들어갈 감각정보는 몸의 주변부에 있는 체성 수용체와 내이 안에 위치한 반고리관과 전정기관으로부터 보내진다. 또한 소뇌는 대뇌 피질의 뉴런으로부터 오는 운동정보를 받아 움직임을 조절하게 된다. 소뇌는 근육운동, 평형감각 조절을 한다. 만약에 소뇌가 없다면 땅에 있는 물건을 잡으려고 할 때 손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더라도 조절할 수 없고,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서 있지도 못한다. 뇌간은 뇌의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부분으로 척수가 확대 팽창해서 생겼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뇌간의 무게는 약 200g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 뇌간은 중뇌, 교뇌, 연수가 있다. 뇌간의 가장 아래쪽인 연수 부분은 호흡과 심장 운동을 조절하는 생명 중추가 있다. 그 외에도 혈관의 수축과 이완, 하품, 기침, 재채기, 구토 등의 반사 작용도 뇌간에서 이루어진다. 연수 위에 있는 뇌교는 온 몸의 신경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전달하고 두개의 소뇌 사이의 정보를 교환하는 역할을 한다. 중뇌는 뇌간의 가장 앞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뇌의 앞에는 시상과 시상하부라 불리는 곳이 존재한다. 시상은 두 개의 작은 타원형 모양이고, 이것이 좌우 대뇌반구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시각, 청각, 피부 감각 등의 주요 감각계가 바로 시상을 거쳐서 대뇌 피질로 이어지게 된다. 시상하부는 대뇌 아랫부분과와 시상, 중뇌의 교차점에 존재하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콩알만한 크기에 4g에 불과한 조직이지만 자율 신경의 중추가 모여있어서 생명과 직결되는 곳이다./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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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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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
- 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빛은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을 뜻한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고 4절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셨다. 이토록 예수님과 말씀과 빛은 같은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원래 말씀(헬,로고스)은 그리스 사람들이 이성이라고 해석하는데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그리스)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예배 드리는 장소인 교회 당이 하단에 위치하고,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이 은혜의 빛을 비추시는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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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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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간절을 간청하라
- 김미선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어린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곳으로 마음이 향했다. 이내, 내 시야권으로 들어온 그 울음의 주인공은 이제 제법 자기 고집을 부릴법한 ‘미운 네 살’의 귀여운 공주님이었다. 그보다 더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아이 엄마는 꽤 지쳐 보였지만 아주 단호하게 우는 아이를 훈육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실랑이의 시작은 엄마 손에 들려있는 빵 봉지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우는 아이는 지금 당장 그 빵을 달라고 생떼를 부렸고, 엄마는 아이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단호함으로 일관했다. 둘의 신경전이 어찌나 팽팽하던지,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이 들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그들에게 다가갔다.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차분히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리 공주님, 뭐가 그렇게 속상할까? 빵이 너무 먹고 싶은데, 엄마가 안 줘서 속상하구나?” 지원군을 만났다는 희망과 위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더는 울 힘조차 남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이내 생떼를 그쳤고, 빵이 진짜 먹고 싶다고 꺼이꺼이 남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지켜보던 나도, 단호했던 엄마도 일순간 무장해제를 당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는데,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빵 봉지를 주섬주섬 열어 빵 하나를 아이 손에 들려주었다. 젊은 날의 내 모습 같았던 그 ‘어린 엄마’의 등을 토닥여 주며 잘하고 계시는 거라고, 힘내시라고 응원하며 두 모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한 주간 묵상했던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말씀이 떠오르며 예수님의 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11:10)”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어떤 벗의 비유’를 들며 간절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어떤 한 사람에게 긴 여행으로 지쳤던 친구가 찾아왔는데, 그를 돌보며 먹이고 싶었으나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늦은 밤 염치 불고하고 이웃에게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려 떡을 빌리고자 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간청함을 인하여어느 누가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지 않겠느냐? 당연히 일어나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잠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울 만큼의 간절한 간청의 기도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기도 제목이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고, 개인적인 소망이라도 그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일이라면 더 담대하고 끈질기도록 간절하게 간청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자세이자 응답받는 기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어린 아이에겐 빵 한 조각이 너무나 간절했을 수 있다. 그래서 엄마도 주변 사람도 개의치 않고 부끄러움 없는 생떼를 부려가며 간절한 용기로 빵 한 조각을 얻어낸 것일 테다. 나에겐 그 ‘간절을 간청하는 기도의 자세’가 그 아이만큼 있기는 한 것일까. 그날, 아이를 통해 내 기도의 자세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간절(懇切)을 간청(懇請)하라. 다시금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그날까지 간청의 자세로 기도하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 권사, 말씀 굽는 타자기 블로거, 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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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간절을 간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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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구원에 대하여 – 영화 8번 출구를 보고 나서 -
- 우린 “나는 중 2 때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나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걸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영화 8번 출구는 시간이 나서 볼 게 없어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담겨있을 줄 저는 몰랐습니다.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원래 이 영화의 원제목은 쇼생크구원 혹은 쇼생크구속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탈출이라는 단어의 속에는 ‘어떤 곳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탈출이라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더 큽니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속을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뜻인데 우리는 이것은 혼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그 단어의 의미가 많이 상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쇼생크탈출에서 탈출이 의미하는 바는 구속입니다. 주인공 엔디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다가 그곳을 벗어났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냥 단순히 그곳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단어가 바로 탈출, 다시 말해 구속이라는 뜻이고 구원이라는 말의 뜻은 구속 이후의 단계까지 내포하는 더 포괄적이고 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 8번 출구라는 영화에는 구원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6하 원칙 중 주인공과 아저씨와 어린 소년(누가)과 지하철 0~8번 출구(어디서)와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는가라는 세 가지 원칙이 중요하게 깔리며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갑니다. 주인공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저씨와 똑같이 둘 다 소년과 함께 같은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게 있게 되는 상황에 맞딱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정이 탈출의 성패를 결정 짓게 됩니다. 그들의 결정은 그 소년의 말을 듣는가, 아님 거부하는가에 따라 나뉘는데 그 소년의 의미는 제가 볼 때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여자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구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구속을 얻기 위해 우리가 동행하는 존재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나오는 아저씨의 경우처럼 자신의 결정에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구속을 얻을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이 아닌 종교의 힘을 빌어 수행하고 선행을 베풀기만 하면 마치 구속을 얻고 더 나아가 천국에 도달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영화의 내용처럼 한 인간을 지옥이라는 공간, 다시 말해 출구 탈출불가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인공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게 되면 그때는 구속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으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나의 몸을 던져 희생하고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하고 견대내고 마침내 나아가서는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온유한 한 사람의 몸부림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구속 이후에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이루어나가는 삶의 여정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나 혼자 이루어내는 구원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사람의 실패한 존재인 아저씨의 초라하고 반복되는 형상으로 나타내어 놓은 것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성경말씀은 이 영화의 설정처럼 예수님은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이 가을 여러분에게 좋은 영화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몇 자 적어봤습니다./새맘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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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구원에 대하여 – 영화 8번 출구를 보고 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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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6)
- 노년에 기도할 제목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17절) 다윗은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았다. 하나나님께서 그를 교훈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시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또 내 신을 너회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 36: 27). 둘째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목자로 있을 때에는 목자의 지팡이로 가르치셨다. 또한 사울 왕의 막대기와 창을 가지고 그를 가르치셨고, 군중이 외치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소리를 통해서도 가르치셨다. 그 분은 또한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궁중에 있을 때에는 그들의 멸시를 통해서 가르치셨다. 그분은 요나단의 우정과 화살을 통해서도 가르치셨고, 그를 향해 던지는 사울의 창을 통해서도 가르치셨다. 아비아달의 충성스러움, 충성스러웠던 요압의 신실치 못함, 아비새와 므비보셋의 충성스러움을 통해서도 가르치신 하나님은, 또한 압살롬의 반역, 아도니야의 이기심을 통해서도 가르치셨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분의 종을 교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가르치시는데 당신의 삶 속에서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년에도 우리를 계속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셋째는 어려서부터 교훈받으며 사는 것이다. 로마서에는 바울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칭찬하는 말이 나온다. “저희는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롬 16: 7) 그들은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에 칭찬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젊은 시절부터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또한 중년에 이르러서도, 그리고 나이가 들어 노년에 이르러서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진정 명예롭고 아름다운 일이다. 먼저 믿었던 것을 감사하고, 후에 믿었다면 앞으로 잘 믿고 살도록 충성해야 한다. 넷째는 성도로 살면서 나이 들어 노년기에 이른 이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영혼을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당신 앞에서 깨어져 나간 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믿음과 선한 양심”(딤전 1:19)의 파선을 당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잘못된 교리에 휩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잘못을 범하며, 거짓된 신앙을 따르다 믿음의 파선을 당하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수렁에 빠져 죽고, 바위에 깨어져 죽어 갔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보존하셨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엘리는 노년에 이르러서 자식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다 실족했다(삼상 2 장). 유다는 노년기에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다(창 38장). 다윗은 나이 들어서 밧세바를 범했다. 늙은 아사는 하나님보다 의사를 더 신뢰했다(대하 16:12). 솔로몬은 나이 들어서 산당을 지었다. 어떤 그룹은 화광석 사이를 왕래하며 그 행위가 완전했으나 후에는 하나님께 더럽게 여겨져서 하나님의 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겔 28:14, 16). 연극을 잘 하다가도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실수하여 아무런 박수도 받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인생은 마지막 피니시라인까지 잘 들어가야 한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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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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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목회 단상
- ▲ 유병용목사 우리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해 왔다. 그리고, 음으로 양으로 북한의 선교와 인권을 위해서도 앞장서고 있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현재 한반도는 평화로운 공존과 통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극단적인 대치와 충돌로 갈 것인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남북간, 북미간, 북중간의 치열한 외교전이 이뤄지면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미한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깨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도와 동시에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때에 오고야 말 통일을 바라보며, 통일을 준비하라고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바로 3만명이 넘는 탈북민들이다. 북과 남을 다 경험한 그들은 우리가 남과 북이 하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앞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내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탈북민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통일준비이다. 나는 지난달 12일에 교회 교우들과 사단법인 남북사랑네트워크에서 진행한 임진각 나들이에 다녀왔다. 6개 교회 이상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탈북민들과 함께 북한이 바라다보이는 임진각에서 함께 어우러져 교제하며 기도하는 자리였다. 아쉽게도 당일에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려서 임진각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급하게 일산에 있는 한 교회 소극장을 빌려서 진행하였다. 비록 임진각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행사를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탈북민들과 함께 여러 교회들이 주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 가운데 내게 마음에 남았던 시간은 북녘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낭독하는 시간이었다. 탈북하신 분들은 편지를 쓰기 시작하자 이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것을 보았다. 편지를 쓴 가운데 다섯 편의 편지를 선정해서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탈북하신 분들이 가족에게 쓴 편지는 눈물 없이 읽기 힘들고, 눈물 없이 듣기도 힘들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쓴 편지의 한 문구가 계속 제 맘을 맴돌았다. “살아만 있어줘요” 이보다 더 간절하게 북쪽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문구는 없다고 여겨졌다. 그 간절한 절규에 가까운 낭독을 들으면서 남북분단은 어떤 이론이 아니라 그냥 우리의 현재적인 고통이고 진행 중인 아픔이라는 것을 진하게 느꼈다. 바로 그런 아픔을 또 다른 분은 이렇게 표현했다. “지병처럼 가슴을 찌르는 고통” 가슴에서 온 몸으로 느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 표현을 들으면서, 나는 나의 무감각함에 대해 애통함이 생겼다. 통일을 위한 기도가 더욱 구체적이고 절실한 것이 되어야 함을 배웠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함께 느끼고 나의 기도 속에 담는 것에서부터 작은 통일이 시작된다는 것도 확인했다. 나는 탈북민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고 구제의 대상으로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되는 목회를 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먼저 탈북민들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우리 교회에 담기기를 소망하며 목회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통일목회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이 땅에 이 일을 함께 감당하며 기도할 많은 교회들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로뎀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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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목회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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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5)
- ▲ 최종인목사 자랑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장점을 말하거나 자기 가족, 조직, 소유 등을 좋게 표현하는 것이다.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의 자랑을 듣게 된다. 나는 목회자로 성도들의 자랑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랑거리가 많아졌으면 한다. 나 역시 조심스럽지만, 자랑할 때가 있다. 교회를 자랑하고 교단과 신학교를 자랑한다. 필요한 경우 외부 설교나 특강시에 우리 성도들을 자랑할 때도 많다. 할수 있으면 나가서 부교역자들도 많이 자랑한다. 실제로 내가 시무하는 교회나 교역자들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교만과 연관되어 있으며 특별히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것을 말할 때 주로 사용하고 있다. 성도들이 무엇을 어떻게 자랑해야 하는지 예레미야를 통해 가르쳐 주셨는데,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평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 9:23-24)고 했다. 성경사전을 보면, 구약에서 ‘자랑하다’라는 의미만을 지닌 히브리어 단어는 없다. 다만 ‘자랑하다’는 의미는 ‘높이다, 기리다, 영화롭게 하다’는 뜻과 연관되어 있다. 암몬은 그의 비옥한 골짜기를 자랑했고(렘 49:4) 강포한 자는 그의 악함을 자랑했다(시 52:1). 또한 자신의 재물을 의지하는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했다(시 49:6). 그러나 성경은 내일의 일을 자랑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잠 27:1). 구약에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은 종종 기쁨이나 즐거움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의인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정직한 자는 여호와를 자랑한다(시 64:10). 또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은 함께 연결되어 있다(시 34:2).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으로 인해 복을 받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된다(렘 4:2; 슥 10:12). 신약에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것’(고후 11:18)과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고후 10:17)을 구별하여 강조한 바 있다. ‘육체를 따라 자랑함’은 곧 ‘육체를 신뢰하는 것’(빌 3:3-4)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며 자신의 공로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죄악된 표현이다. 대신 바울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 17)고 한다. 믿는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고’(갈 6: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자랑)’(롬 5:11)해야 한다. 시편 66편은 성도들이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자랑한다. 즐거운 소리를 내어 자랑하라고 한다(1절). 정말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할 수 있는대로 기회를 보아 자랑하려 한다. 오늘도 옆에 있는 사람에게 구주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는가? 나를 자랑하는 것은 허망하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그의 이름, 즉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자랑하는 것이다(2절). 엄마들 모임에 가면 대부분 자식 자랑을 한다. 그러다보면, 현재 좋은 대학에 못갔거나, 취업이 안된 자녀, 결혼을 미룬 자녀를 둔 엄마는 상처를 받는다. 모임에서 인기받는 비결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능력, 그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곧 자랑이다. 즉 그의 엄위하심과 큰 권능을 자랑하는 것이다(3절). 은혜로 병고침 받는 사람은 주를 자랑하게 되어 있다. 구원의 기쁨을 잘아는 성도는 주의 능력을 자랑한다. 나는 지난주 교단의 총회에서 많은 목회자, 장로들을 만났다. 한결같이 교회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반갑다. 자신의 교회, 목사를 칭찬하고 자랑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러나 더 나아가 많은 사람 앞에서 주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고 증거하는 것이 참 자랑이다(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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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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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믿나이다 (59)
- ▲ 정성진목사 ‘영이 다시 사는 것’이라 하지 않고 ‘몸이 다시 사는 것’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구원받아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 다음에 나오는 신앙고백이 “몸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죄의 삵은 死亡”이라면, 죄 용서 받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을 때에는 “다시 사는 것”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일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모든 사람 위에 그 지배력을 행사하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죄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된 사람에게는 당연한 귀결인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고백에서 ‘영이 다시 사는 것’이라 하지 않고 ‘몸이 다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우리 안에는 놀라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을 성령님께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영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겠는데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해서는 얼른 납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주로 헬라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많이 발견되어집니다. 헬라의 철학사상에서는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한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가치는 영에 있는데 사람의 영이 육체(몸)의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 자체를 악하게 보는데서 나온 사상이요. 육체와 영을 따로 구분하려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런 헬라적 사고가 교회 안에 침투하여 적지 않은 혼란과 폐해를 입혔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들 사상의 요지가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것 자체도 육체를 악하게 보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선한 것은 오직 영이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것은 영이요 영만이 불멸하고 선한 존재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영혼만 가진 존재일 수 없습니다. 몸과 영이 조화를 이루므로 완전한 인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영만 가진 사람을 생각할 수 없고, 육체만 있는 사람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날도 그렇습니다만 초대교회 당시에도 영지주의자들은 사람의 가치를 영혼만의 것으로 보려고 했기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영혼만 창조하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영만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체만의 것도 아닙니다. 영과 육의 종합이요, 전체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즉,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체만이 아니요, 영적인 존재, 또 영만이 아닌 육체를 지닌 존재, 이것이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 할 때도 영혼만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까지도 영광스런 몸으로 구원받는 날이 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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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믿나이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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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4)
- ▲ 최종인목사 풍성한 삶이란, 일반적으로 “풍부하고 넉넉하며 부족함이 없는 삶”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0:10에서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준다. 첫째, 죄인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고, 둘째,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 하여금 풍성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 풍성함은 훗날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펼쳐질 영원한 시대에서 누리게 될 미래의 영광뿐 아니라, ‘바로 지금’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풍성함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에베소서 3:8에서는 성도들이 누리는 풍요함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이라고 말씀한다. 시편 34:10에 의하면, 주를 찾는 자들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 신명기 28:12에 따르면, 하나님께는 풍성한 보물창고가 있다. 주께서는 언제든지 이 창고를 여시어 성도들에게 풍성한 복을 부어 주길 원하신다. 그리고 다윗은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들이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고 고백했다(시 40:5).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도록 많은 풍요한 것들을 예비해 주셨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시 145:3),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평강(빌 4:7),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고후 9:15),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벧전 1:8,9),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고후 12:4, 시 119:89), 천상의 모든 영적인 복(엡 1:3), 풍성한 자비(엡 2:4), 지극히 풍요한 은혜(엡 2:7), 선하심과 관용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롬 2:4) 등의 것들을 값없이 누릴 수 있도록 주신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시편 65편 9절에서는 “윤택하게” “가득하게” “예비하신후에 곡식을 주신다”고 했다. 10절에는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이랑을 평평하게”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며, 11절에는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씌우시니” “기름방울이 떨어지며”라고 약속하셨다. 13절에 “초장은 양때로 덮였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다” “다 즐거이 외치고 노래한다”고 약속하셨다. 한마디로 풍성한 삶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나 이런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이들의 삶이 풍성한가? 첫째, 주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1절에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라고 했다. 풍성함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신 줄 알고 기다리는 자에게 주신 약속이다. 둘째, 기도하는 사람이다. 2절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라고 했다. 기도하는 자가 얻고 또 얻는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함으로 풍성함을 경험했다. 셋째, 주의 뜰에 사는 사람이다(4절). 풍성을 경험하려면 주님을 만나야 한다. 바로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얼마동안 미국에서 산 적이 있었다. 많은 지역들을 돌아보며 감탄했고, 또 부러웠다. 어쩌면 그렇게 땅이 넓은가? 그 넓고 비옥한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넓은 도로가 부러웠고, 큰 호수가 부러웠다. 오늘날 미국 사회를 단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미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여전히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기다리면 지나가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해준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축복한다. 주를 소망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주를 바라는 이들이 많다. 주께 기도하는 이들이 많기에 여전히 축복받은 땅에서 산다고 믿는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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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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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믿나이다 (58)
- ▲ 정성진목사 거룩하신 성품에서 나오는 율법은 죄인의 죽음을 요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길 마련 어떤 사람의 인생이든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시급한 일도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결코 용납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의 손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1장12절에서 “여호와는 눈이 정결하시어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외면하고 애써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까지 그를 줄곧 따라 다니며 정죄를 선포하고 죄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소리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서 나오는 율법은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죄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죄는 반드시 죽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값으로 범죄자인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모든 희망은 사라져 버리는 것인데 용서받는 길은 없는 것입니까? 죄로 절망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18절에서 시몬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시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불의한 우리 대신 죄 범한 대가를 치루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21절에서도 이 점에 관한 진술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용서가 있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용서가 필요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 없는 어떤 안정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사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죄 용서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확신 없이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말갛게 씻기시며, 용서 받은 자로써 받아주신다는 것을 믿기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보좌는 거룩한 보좌요, 의의 보좌이기 때문에 죄인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므로 그 피를 의지하여 나아가면 그 보좌는 구원과 용서와 평화가 넘치는 은혜의 보좌인 것입니다. /지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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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믿나이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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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3)
- ▲ 최종인목사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게 된다. 늘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가 존재하고 사는 줄 알면서 더욱 감사하게 된다. 반면에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들을 만나면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사람인 것이다. 영적으로도 혼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공격적인 사람들이다. 3절과 같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공격하는 사람이다. 담이 넘어지거나 울타리가 넘어지면 지나는 사람이 위험하다. 그런 이들은 폭력적인 언행으로 사람을 위협하고 괴롭히는 사람이다. 툭하면 고함을 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다든지, 주변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공격적 성향의 인물이다. 최대한 그들과 함께 하는 기회를 피해야 한다. 신경 쓰지 말고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좋다. 모함하는 사람이다. 4절에 나오는 인물처럼 상대를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려 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남에게 험담을 유도하거나 본인은 직접 표현하지 않지만, 나중에 교묘하게 소문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앞에서는 선의로 대하는 척 포장한다. 그러나 다른 쪽으로는 들어나지 않게 비방한다. 그런 사람에게 당했다고 마음 아파하지 말자. 오히려 그런 이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 그런 이들과 싸워 이기려하지 말자. 나를 모함하는 사람을 위해 오히려 기도해 주자.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된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다. 역시 4절에, “거짓을 즐겨하니”라고 했다. UCLA의 브라이언 킹(Brian King) 박사가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다가 거짓말을 분석하게 되었다. 그가 연구한 바로는 성인이 보통 일주일 동안 열 세 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첫째, 속이는 거짓말. 나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사기꾼들의 거짓말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감상적인 거짓말. 내가 느낀 감정을 마치 사실처럼 말하는 것이다. 꿈과 현실을 혼동할 때, 자신이 들은 말을 자신의 느낌으로 바꾸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이런 거짓말을 한다. 흔히 설교자들도 이런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셋째, 과장하는 거짓말. 조금씩 보태는 것이다 과장인 것이다. 학력위조, 경력위조자들 역시 과장하는 사람이다. 넷째, 둘러대는 거짓말. 남들로부터 비난받기 두려워서 이런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비밀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 드러나면 곤란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더라는 것, 살면서 이런 이들을 만나면 괴롭다.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마음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4절을 계속 읽자.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심하게 말하면 이중인격자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 믿음이 안가고 피하게 된다. 다윗은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경험했고, 흔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자신만의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그렇다. 사람들을 만나면 상처를 입게 되고, 사람에게 기대하면 실망하게 된다. 오히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좋다. 둘째, 하나님을 반석으로, 인생의 기초로 삼는다. 그러므로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2절). 셋째,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9절에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고 했다. 입김보다 가벼운 인생들을 의지할쏘냐? 그런데 말씀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을 의지하고 있다. 넷째, 내 인생은 하나님이 진행하신다고 믿는다. 11절을 보라.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권능뿐이랴? 내 모든 인생의 길은 하나님께 속했다. 당장에 한 두 마디 들었다고 흔들리지 말자. 인생 누구나 경험하는 실패를 한 두 번 경험했다고 포기하지 말자. 인생이 강하기도하고 때로 약하기도 하다. 한 두마디에 흔들릴때가 얼머나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 말씀으로 든든할 수 있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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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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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2)
- ▲ 최종인목사 현대인들 가운데 탈진(burnout)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다. 직무수행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외 긴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업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감정적 반응이다. 탈진감은 대인관계에서 지속적, 반복적 관계를 중시하는 간호사, 사회복지사, 텔레마케터 등의 직종에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적 환경은 탈진하게 만든다. 즉 근무환경이나 직무의 위험 정도가 종사자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때로 직무 요구가 과도한 부담을 주기도 한다. 업무량이 증가한다든지, 시간적 압박을 느끼게 되거나, 업무 중단 사태에 이른다는지, 직무불안정, 즉 구직 기회가 적거나, 고용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책임이나 직무에서 오는 과도한 부담이 탈진하게 만든다. 육체적 피로는 쉽게 탈진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몸에는 업무를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는데, 때로는 조직내에서 자신에게만 더 많은 업무량이 부가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직무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육체적, 심리적으로 힘들어지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육체적 피로는 직무만족과 직무동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때로는 직무자율성의 결여가 탈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의사결정의 권한이 없거나, 조직에서 자신의 직무 재량이 낮을때 쉽게 피로하고 탈진하게 된다. 특히 고수준의 직무요구를 받으면서도 직무자율권이 낮은 종사자들은 심리적으로 긴장하게 되어 탈진감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가장 많은 비율은 조직내에서의 갈등이 탈진감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상급자 및 동료간의 협조, 지지부족 등 대인관계의 문제는 쉽게 탈진에 이르게 한다. 경직성이 있는 조직이나 가정, 단체에서 불평등한 관계를 조장하고, 상급자의 일방적 지시를 강요할 때, 인격이 무시되거나 소통이 안될때는 심리적 탈진을 느끼는 경우가 잦다. 보상이 부적절한 경우도 탈진하게 만든다. 개인을 무시하거나, 기대에 부적합한다든지 하는 내적 동기의 결여가 보상 성취감을 낮게 만들고, 자기실현욕구가 좌절될 때, 성장욕구가 거절될 때 탈진감을 느끼게 된다. 대부분 직장문화는 서구와 다르게 한국만의 고유특성을 갖고 있어서 집단주의, 권위주의, 불신, 의사소통의 비합리성, 비공식적 조직문화 등에 반발하게 되면 쉽게 탈진에 빠진다. 시편 56편은 탈진감에 빠질때 다시 일어서게 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우선 시인이 경험하는 탈진 상황은 어떤가? 2절에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고 탄식”한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가 힘들게 한다(3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 괴롭다(4절). “두려움, 떨림, 공포가 나를 덮었다”(5절).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 편히 쉬고 싶다(6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내 친구들이다(13절). 탈진 상황에서 부르짖어야 한다(17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하는 것이다.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것이 탈진에서 해방되는 비결이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탈진에서 이기게 한다.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18절). 평안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내 힘든 상황에서 이기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신다. 어리석은 사람은 탈진 상황에서 도울 사람을 붙든다. 그러나 성도는 탈진 상황을 만날 때 믿음을 붙든다. 탈진 상황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22절). 하나님께 맡기는 자는 하나님이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 현대사회의 특성상 어린아이, 학생, 청년, 장년, 노년 할것없이 일터로 내몰리고, 학교에서도 심각한 경쟁을 가져야 한다. 그러다보니 탈진하기 쉽다. 그러나 탈진의 원인을 찾고, 고충을 공유하고 해소 방법을 만들고,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탈진감이 찾아올 때 쉬어야 한다. 가급적이면 탈진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갈등을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고 해결받자. 탈진에서 해방되는 성도들이 되길 소원한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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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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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믿나이다 (57)
- ▲ 장성진목사 죄 용서를 받아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우선 예수님은 병 고침에 앞서 죄 사함을 먼저 말씀하셨던 것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오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깨끗케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온 몸이 중풍 병으로 마비된 자신의 몸도 정상을 찾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온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건강한 몸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메고 온 사람들 역시 중풍병자의 병을 낫게 하고자 하는 바램 때문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은 병 고침에 앞서 죄 사함을 먼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예수님의 제 1차적 관심사는 이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아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죄 문제가 다른 어느 것보다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죄가 가진 파괴성에 있습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달아나고 싶어 하는 것이며, 결국 이런 현실은 생명의 주님과 단절되어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더할 나위 없는 절망에 이르고야 마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거나, 건강을 잃어 버리고 살게 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가난을 벗어나 잘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것인가?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 때문에 가난하면 저주를 받은 것 같고, 또 부자를 보면 굉장한 부러움을 느끼고,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열등감까지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것은 이것들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실존적 영향에서 해방되고야 행복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편32편의 기자는 한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해결 받은 사람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에게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32:1~2)”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가 인생에서 누리는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없고, 그가 소유한 모든 것도 그에게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대답을 얻기 전까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영원한 멸망의 장소인 지옥을 향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를 받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복음의 중심 내용이 ‘죄 용서’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감림 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과 대면하여 결단을 촉구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0)” 이 외에도 사도행전 13장 38절과 22장 16절도 역시 죄로부터 용서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 ‘죄를 용서함 받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지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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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성진 목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죄를 범한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 중요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고백입니다. 죄가 없고, 죄인이 아닌데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죄’라는 것이 있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그 죄에 대한 용서가 있어야 한다는 요청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로마서3장23절에서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느 지역이나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현실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죄 범한 사람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엄연한 실존입니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이 죄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성경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 만연하여 있는 일반적 현상에 대하여 “죄는 사람들이 원치 않는 어떤 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만 죄는 사람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원치 않는 것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몰아낼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죄는 사실이요, 엄연한 실존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죄를 지었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하거나 외면한다고 명백한 사실이 없어지거나 지워지기라도 하던가요? 병든 사람이 자기 안에 침투해 들어 온 병균의 존재를 애써 없는 것으로 부정한다고 질병 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부정하는 그 순간에도 병균은 자기 안에서 여전히 그 존재를 지속해 나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질병에서 치유받기 위해서 먼저 해야 될 일은 자신이 병들었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병들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도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일단은 죄 범한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죄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교육이나, 경제, 정치나 건강 등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생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 가운데 드러난 모든 잘못된 현상들을 보면 문제가 현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원인에 기인하는 것인데 나타난 결과에만 관심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한 집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네 명의 사람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운집하였던지 도저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중풍 환자를 메고 지붕 위에 올라가 지붕을 뚫고 침상 채로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정상적인 루트로는 접근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이런 변칙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서 “인자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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