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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⑤] 유익한 고난
인류 역사에 사람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천로역정>이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 존 번연이 12년 수감 생활 중에 감옥에서 쓴 책이다. 인류사에 최고의 음악이라고 꼽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야」도 헨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영감을 받아 쓰여 졌다. 그 위대한 54곡 전체를 26일 만에 작곡했으니, 하루에 2곡을 쓴 셈이다. 번연과 헨델은 자신들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들을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다. 특별히 헨델은 건강에도 큰 타격이 시작된 때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마비가 오면서,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여, 온수로 몇 시간씩 몸을 녹여야 했고, 오르간 앞에 앉아서 오랜 동안 손가락 재활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헨델은 그 고난의 시기 이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귀품있게 살았다. 공연 수익이 많았지만, 「메시아」를 통한 수익을 한 푼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시야 공연 수익금들을 모두 자선 단체와 병원에 기부했다고 한다. 어려운 중에도 작품을 쓸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대의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그런 헨델을 존경하며 높였다고 한다. 우리는 힘들 때마다, ‘문제를 넘으려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을 허락하셔서 그 때만 볼 수 있는 빛을 준비하신다. 뜻을 가지고 우리를 그런 형편에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려운 형편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해 보면 도움이 된다. 곤란할 때의 생각은 번민과 염려를 일으켜 마음을 더 복잡하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왜 그렇게 하시는 걸까? 나의 원하는 답만 찾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길,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질문을 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죄의 결과인가?’이다. 죄의 결과라면 회개하고, 고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된다. 세 번의 다른 시험을 통과하면, 세 개의 서로 다른 경험과 지혜가 쌓인다. 그러나 같은 시험을 세 번 겪으면, 같은 고생과 실수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탄이 확인하려고 하는 나의 ’순전함‘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욥 2:9). 거짓 증거로 억울한 입장인가? 반사적 반응과 구차한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며,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믿음을 잘 지켰다‘며 칭찬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에 참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선을 행했는데 고난을 받는다면, 악을 행하고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돌이키게 만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일까 살핀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사탄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방해하여 못되게 하려는 선한 일이 무엇인가?’ 해내야 한다. ‘나를 쳐서 교회와 가정에 주려는 피해가 무엇인가?’ 지켜야 한다. ‘잡아먹고 먹히는 영혼들이 누구인가?’ 구원과 경고를 선포해야 한다. 이 모든 사역들도 중요하지만, 고난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듬으신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믿음의 불순물이 걸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뜨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새롭게 다시 뵙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나는 가끔 말한다. “그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 때의 영성은 그립다.” 주님이 주신, 나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나를 사랑하사 가까이 부르시는 것이다. 아플수록, 외로울수록, 하나님만 더 분명히 바라는가? 좋은 때인 거, 맞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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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1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종으로 수고하여 성화된 참 행복의 새 패러다임 성경은 모든 인류가 불순종한 아담의 후예들로 원죄를 갖고 태어난 죄인이며 영적 사망에 놓였음을 증거한다. 주께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죄인들을 사단에서 구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속사역의 십자가를 지셨다. 이를 갈라디아서 1장4~5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 밝히 증거한다. 죽으시고 부활을 나타내시어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구원자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신 이유와 목적이다. 새 언약이 도래된 그리스도의 출현,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오신 주를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이다. 이를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케 될 수 있는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고 하셨다. 이후 그리스도의 사신이 된 주의 제자들에게 화평케 하는 복음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구원의 도를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곧 주의 종들로 회복하실 새 언약이다. 곧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좁은 길로 들어오는 자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의 동행으로 구속이다. 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입게 하는 일에 참예임을 확증케 한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할 자들이 세상에 많기에 부르심의 목적을 담아 깨닫고 주의 자녀로 사는 전도의 몫을 찾아 행케 하심이다. 베드로전서 2장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주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임을 연계하여 깨닫고 주 안에 삶을 살게 하심이다. 그러기에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안에 다 들었느니라’ 하셨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라 하심이다. 영혼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한 종들로 몫을 배우고 행하게 하시어 기도와 말씀으로 선한 열매를 맺혀 가도록 이를 확증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한 주종의 관계를 갖고 부르심에 선한 뜻을 위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몫이다.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한 거듭나게 하심과 부르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뜻은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 주의 자녀로 회복하는 거룩한 일로써 착한 일이며 선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온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며 이 일에 참여가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도록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임을 확증케 한다. 이를 위해 거듭나게 하심이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심이라고 함이다. 곧 거듭나게 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쓰시기 위함임을 연계해 준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도록 하시는 주의 기쁘신 뜻에 순복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로서 주의 마음을 알고 주와 한영을 이룬 주의 백성들이 주를 닮아가는 여정임을 새긴다. 종들이 이를 알고 실현하여 주의 나라가 확장되고 주의 백성들이 많아지도록 서로 사랑을 하며 부르신 목적대로 충성이다. 주와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기에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한 일에 행복함을 갖고 복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선한 일꾼들로 견인하신다. 구속사역에 참예함으로 성화된 새 패러다임의 행복이며 은혜의 여정에 말씀에 순복하케 하신 주 시링임을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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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2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이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가치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 중 보화임을 마태복음 13장 44절은 증거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하신 비유이다. 보화로 발견과 그 소유하는 비유를 통해 천국의 소중성에 대한 새 가치관을 찾도록 교훈한다. 성경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살 수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영생을 주시는 유일신이신 주님과의 만남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발견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열심하는 천국백성으로 선을 이루어 가도록 교훈한다. 그러기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기록목적을 깨닫게 하심이다. 나그네의 여정에 기쁨과 감사로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는 새 가치관의 선함을 얻는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를 아는 자로서의 자존감의 상승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새 생명을 얻게하여 여호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이김으로 영원성이다. 곧 유다서 1장 1절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주의 종들의 정체성이다. 이들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임을 확증케 한다. 요한계시록 14장 3~5절 “이 사람들은 ~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는 증거와 같은 착함이다. 곧 새 가치관을 가진 거룩한 자들로 주의 나라 확장을 실현하는 일에 충성케 한다. 그리하여 주께서 기록하신 말씀 안에 거하게 된 자들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는 지식이 앎이 되어 승리하는 성화이다. 이는 골로새서 2장 3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는 확증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1장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하심과 같은 가치관의 형성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하는 자로써 주를 사랑한 자임을 확증케 한다. 주로 인한 고난은 마땅히 받아야 할 나그네 여정임을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앎의 참예로 충성과 섬김에 대한 연계이다. 주의 종으로서 몫을 하기위한 일꾼의 지혜이다. 곧 주께서 본을 보이심과 같이 사람 살리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의 목적을 알고 행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도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이전보다 더 주를 사랑하는 실천임을 확증케 한다. 누구든지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임을 함께 확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복으로 인하여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케 되어 살아도 주의 것으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도록 주를 사랑하는 자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믿음의 성화이다. 주는 하나님이 되시고 종들은 주의 백성이 됨이기에 주종의 관계를 성립한 일꾼들의 존재목적과 정체성의 연계이다. 곧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성령의 내주로 말씀 안에 거하여 평안에 평안을 덧입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충성과 이김의 영원성의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말씀을 상고하는 목적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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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4]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생태적 삶의 실천
국민일보 김재중 부국장 성경이나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왔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는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동물을 위해 방주를 설계했다. 하나님은 노아의 희생으로 만든 방주를 이용해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고 이 땅을 새롭게 하셨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노아와 같이 녹색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생태학적 창조론과 통전적 생명선교론을 회복하고 목회적으로는 녹색교회, 생명목회, 생태 영성 훈련, 생태 환경교육 등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태적 영성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서 생태적 관점과 태도를 배워 삶으로 실천하도록 이끄는 신앙적 힘이다. 즉,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의 생명 그물망 안에 연결된 존재이며 이 그물망 안에서 각각의 존재는 상호 연계되어 서로를 살린다는 믿음이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일상에서 생태적 삶을 실천할 때 지구의 창조적 질서를 보전할 수 있다. 생태적 삶의 실천은 거창한 게 아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레이스벨은 올해 100% 생분해성 수지 원료로 만든 달걀 포장지를 사용하는 ‘부활절 그린 캠페인’을 펼쳤다. 일반 비닐 포장지는 분해되는 데 100년 이상 걸리지만, 생분해 비닐봉지는 180일이면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건강한 자연환경을 만들기 위한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다. 교회들이 주보나 전도지를 만들 때 재생 종이를 사용하는 것도 생태적 삶의 실천이다. 서울의 한 교회는 1층 주차장에 전기자동차 급속 충전기를 설치하고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였다. 인근에 전기차를 위한 급속 충전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충전시설을 지역에 제공함으로써 탄소중립에 동참하고 있다. 최근 기독기업 이엔포스가 교회의 전기요금을 평균 10% 절감할 수 있는 절전 장비를 개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엔포스의 절전 장비 ‘포스’는 교회의 분전함에 설치해 사용하는 것으로, 설치비 없이 렌탈 방식이어서 초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렌탈비는 줄어든 전기료의 50%를 가져가기 때문에 교회의 부담은 없다. 한국교회의 에너지를 절감해 미자립교회와 선교지를 돕고, 저탄소 녹색 성장을 실천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탄소포인트제(에코마일리지)에 가입하는 것이 친환경 실천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가정에서 에너지 사용량(전기·수도·도시가스) 절감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 실적에 따라 탄소포인트를 산정하고 환경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전 국민 온실가스 감축 실천 프로그램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건물 에너지효율 개선 사업은 교회가 주목할 만하다. 교회가 적극 협력하면 시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민·관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 중심적인 역할을 앞장서 실천할 때 창조 생태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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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3] 기후 위기와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삶의 변화
장신대학교 신현태 교수 기후 위기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극단적인 기후 현상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보다 빈번히 발생하는 폭염과 폭우, 극심한 가뭄, 강해진 태풍과 홍수 등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자연재해와 인명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제 기후 위기는 모든 창조물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긴박한 문제이며 인류가 해결해야 할 숙제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기후 위기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며 성경에서는 어떠한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 특히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사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정체성과 사회 속에서의 역할을 구성해 왔다. 현재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성경적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개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의 영역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토대를 설립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장 15절~20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또는 모든 “피조물”을 화해시키는 유일하신 그리스도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회복과 화해가 시작되는 사건이며 이러한 화해의 완성은 미래적이며, 비밀 안에 감추어져 있다(20절).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모든 피조물의 해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인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로마서 8장 18절~25절에서는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운명공동체임을 알릴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선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자녀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분명히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14절에서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고 있다. 신약학자 로버트 제웨트(Robert Jewett)는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생활 습관(생태친화적인 삶의 방식)과 개정된 윤리(타자 중심적인 삶의 윤리)는 생태 체계를 회복하기 시작하고 잘못된 불균형과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기에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을 고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비록 창조세계의 궁극적인 해방과 구원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겠지만 사도바울은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창조세계를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구원의 드라마에서 단순한 엑스트라가 아닌 인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이 구원의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공동주연이다. 창조세계의 회복과 화해에 대한 강조를 통해 지나치게 인류를 향해 기울였던 무게추를 옮겨, 이제는 우주적 구원을 고려한 기후 위기 대응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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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스토리의 미학
미학을 연구하다 보면 그 방대한 예술의 스펙트럼과 내용에 갈피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바나나를 테이프로 미술과 전시벽에 붙여 놓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되고, 2억이라는 고가에 팔리는 일들을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러나 고민하고 공부하고 경험을 쌓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세계’를 이해하는 순간이 오는데, 이 과정 또한 미학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내용’을 알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개개인에게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터무니없고 어처구니가 없어보이는 예술 작품이 인정받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작품에 심겨진 ‘내용’ 또는 ‘개념,’ 즉, ‘스토리’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은 ‘개념’ 예술의 시대이며, ‘스토리’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중세 시대 시의 미학을 정립했던 빈사우프의 고드프리(Godfrey)는 일찍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시라는 예술에 대해 “마음, 귀, 그리고 관습에 의해서 판단되게 하라”고 말했다. 시의 미학은 운율로 귀를 즐겁게 하고, 상징적 ‘내용’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 ‘내용’은 아름다운 스토리여야만 하며, 이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된다는 것이 당시 시학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시뿐 아니라 보이는 예술의 가시적(可視的)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非可視的) 아름다움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보이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지속되기 힘든 성질이 있으며 그 깊이에 한계가 있지만, 그 안에 스토리가 있는 작품의 아름다움은 그 유기적 관계로 인해 더 깊고 밝게 빛나는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면은 아름답지 않고 더럽게 내버려둔 채 겉만 치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마 23:27). “먼저 안을 깨끗이” 하면 “겉도 깨끗”해지는 것이 예수가 가르쳐주신 ‘아름다움의 순서’인 것이다(마 23:26). 성경은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자 축복임을 말하고 있다(빌 1:23). 죄로 타락한 인간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중심을 바꾸게 되는 계기, 그 엄청난 사건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요 3:3). 그리고 그 거듭남의 사건 후에도 우리는 ‘순례의 길’을 가며 끊임없이 연습하고 단련해야 하는데, 그 중요한 훈련은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스토리를 보는 훈련’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고난들 속에 새겨지는 ‘그의 스토리(His Story)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바로, 그 삶 속에 ‘진정성 있는 내용’을 지니는 것이다.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의 주권자가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여 죄인을 구하시고, 그 하찮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소통해 나가는 ‘그의 스토리’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언어와 행동과 매일의 삶의 흔적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상실의 연속이며, 때로는 탄식 가득한 눈물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생명을 구하는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일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려퍼질 것이다. 아직 아름답지 않은 자, 겉만 아름다운 자, 아름답고 싶은 자, 먼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들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총신대 객원교수,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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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⑤] 유익한 고난
- 인류 역사에 사람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천로역정>이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 존 번연이 12년 수감 생활 중에 감옥에서 쓴 책이다. 인류사에 최고의 음악이라고 꼽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야」도 헨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영감을 받아 쓰여 졌다. 그 위대한 54곡 전체를 26일 만에 작곡했으니, 하루에 2곡을 쓴 셈이다. 번연과 헨델은 자신들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들을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다. 특별히 헨델은 건강에도 큰 타격이 시작된 때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마비가 오면서,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여, 온수로 몇 시간씩 몸을 녹여야 했고, 오르간 앞에 앉아서 오랜 동안 손가락 재활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헨델은 그 고난의 시기 이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귀품있게 살았다. 공연 수익이 많았지만, 「메시아」를 통한 수익을 한 푼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시야 공연 수익금들을 모두 자선 단체와 병원에 기부했다고 한다. 어려운 중에도 작품을 쓸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대의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그런 헨델을 존경하며 높였다고 한다. 우리는 힘들 때마다, ‘문제를 넘으려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을 허락하셔서 그 때만 볼 수 있는 빛을 준비하신다. 뜻을 가지고 우리를 그런 형편에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려운 형편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해 보면 도움이 된다. 곤란할 때의 생각은 번민과 염려를 일으켜 마음을 더 복잡하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왜 그렇게 하시는 걸까? 나의 원하는 답만 찾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길,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질문을 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죄의 결과인가?’이다. 죄의 결과라면 회개하고, 고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된다. 세 번의 다른 시험을 통과하면, 세 개의 서로 다른 경험과 지혜가 쌓인다. 그러나 같은 시험을 세 번 겪으면, 같은 고생과 실수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탄이 확인하려고 하는 나의 ’순전함‘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욥 2:9). 거짓 증거로 억울한 입장인가? 반사적 반응과 구차한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며,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믿음을 잘 지켰다‘며 칭찬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에 참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선을 행했는데 고난을 받는다면, 악을 행하고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돌이키게 만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일까 살핀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사탄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방해하여 못되게 하려는 선한 일이 무엇인가?’ 해내야 한다. ‘나를 쳐서 교회와 가정에 주려는 피해가 무엇인가?’ 지켜야 한다. ‘잡아먹고 먹히는 영혼들이 누구인가?’ 구원과 경고를 선포해야 한다. 이 모든 사역들도 중요하지만, 고난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듬으신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믿음의 불순물이 걸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뜨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새롭게 다시 뵙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나는 가끔 말한다. “그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 때의 영성은 그립다.” 주님이 주신, 나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나를 사랑하사 가까이 부르시는 것이다. 아플수록, 외로울수록, 하나님만 더 분명히 바라는가? 좋은 때인 거, 맞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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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⑤] 유익한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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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③-이건숙의
- 화자 ‘나’는 그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심양을 거쳐 단동 시내를 경유해 압록강변의 신의주 근처에 당도한다. 그러나 신의주는 그 이상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고, 철조망 안은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학실이 아빠)에게 철조망 안으로 두 발을 들여 넣어 보라고 하였다. “여기가 바로 신의주입니다. 할아버지의 고향 땅입니다.…어서요. 여기가 바로 신의주 땅이라니까요.” 그 뒤의 상황 진전을 소설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노인의 팔을 강제로 잡아 끌어당겼다. 어서 철조망 밑으로 두 발을 넣으라고 재촉했다. 노란색이 살짝 도는 국방색 군복을 입고 붉은 테를 두른 군모를 쓴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총을 메고 다가왔다. 노인의 어디에 그런 날렵함이 숨어 있었을까. 잽싸게 양쪽 발을 철조망 밑으로 집어넣어 쿵쿵 디뎌 보고는 냅다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학실이 아빠, 도망가지 마세요. 괜찮아요. 북한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학실이 엄마 소식을 물어봐도 된다니까요. 나는 북한 경비병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고 노인이 던져버린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놀라 달아나는 할아버지 이상(以上)으로, 또 갑작스런 결과에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뒤쫓기 시작한 화자 ‘나’의 놀라움 이상으로, 우리 독자들도 함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굉장한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가 이 소설의 마지막 장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는 이 소설 초반에 이미 사실상의 복선이 깔림으로써 일종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의 서프라이즈 엔딩 효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비행기 안에서 할아버지가 아직도 못 미더워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꾸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대화의 장면에서 그 면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북한 땅을 밟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잡아가지 않을까. …자네 혹시 정보부에서 나온 정보원 아닌가?” 두 발로 북한의 신의주 땅을 밟아 보는 게 소원이었던 이 할아버지는, 그러나 실제로 그 땅을 밟는 순간 무엇인가 모를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팔순 노인이 달아난다고 해서 얼마나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심리적 공포감은 그를 한 발짝이라도 더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있다. 북한 경비병이 그를 잡으러 오는 것 같고, 혹시 이 동행 청년이 그(할아버지)로 하여금 북한 땅을 밟게 만든 다음 증거를 잡았다고 정보부로 연행할 것만 같기도 하고, 또 포로병 생활 때의 과거 악몽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그를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정이 아직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누구든 이 할아버지와 같은 불안한 기억 속에서 결코 헤어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이 노인의 고초를 통해, 우리가 어떤 국가적 환경(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해 준 이 작품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민족적 현실 문제에 그 메스를 들이대려고 한 기독교 현실주의(리얼리즘) 소설이라 하겠으며, 또한 통일 지향적 정신의 기독교 민족문학 작품으로 우리 기독교문학사에서 그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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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③-이건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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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그의 배는 상아같다
- 아가 5장 14절부터 16절에서 신부 성도가 자랑하며 증거하는 신랑 예수님은 한미디로 가장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의 머리와 머리타래, 그의 눈, 그의 뺨을 자랑했다. 또 계속하여 그의 손은 녹보석 박힌 금고리 같다고 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손이 나 신부성도를 죄에서 영원 속죄구원 시켜주신 분이다. 그의 의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고 이끌어 주시어 하늘 영광 보좌 우편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또 그의 손은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와 일곱 영을 붙잡고 계신 손이시다. 즉 일곱 영을 부어 주시어 순교케 하시고 그 전에 환란 날 1260일 동안 재림하실 나의 신랑 예수 오심을 예언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금면류관 씌워 주시는 분이시다. 더욱이 그 영광을 하늘에서 계속 새롭게 더해주실 분이시다. 이는 그의 손이 녹보석 박힌 금고리 같다고 증거하는 바로 그것이다. 또 그의 배는 사파이어들을 입힌 빛나는 상아 같다고 하신다. 상아같이 썩지 않는 몸, 즉 부활체이신 신랑 예수님은 찬란한 영광을 입으신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또 그의 양 다리는 정금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고 그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수려하도다. 정금 받침대 위의 다리 같다함은 변함없으시고 신성,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존귀하신 주님이시다. 그의 발아래 모든 무릎이 꿇며 그의 원수들을 짓밟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주님 다리가 정금 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같다는 것이다. 그분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수려하도다. 주님의 외적 모습이 레바논 산 같이 듬직하고 엄위가 있으며 가장 고상하신 분이시다. 그의 내적 모습, 즉 나의 신랑 예수님의 내적 성품은 마치 백향목같이 수려하시니 오직 신(神) 만의 성품을 가지셨다. 즉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시고, 온유·겸손하시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1천 년간 아니 영원히 발하시는 분이시다. 또 그의 입은 지극히 달콤하니 참으로 그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도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영생의 말씀이니 이것이 달콤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신다. 그중에서도 첫째부활의 영광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주님의 입이 달콤하니 참으로 그 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나의 신랑이 되신 주님은 육적 신자들인 예루살렘 여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훌륭하시고 가장 뛰어나신 분으로서 나를 그분의 형상에 일치케 해주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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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그의 배는 상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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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1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종으로 수고하여 성화된 참 행복의 새 패러다임 성경은 모든 인류가 불순종한 아담의 후예들로 원죄를 갖고 태어난 죄인이며 영적 사망에 놓였음을 증거한다. 주께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죄인들을 사단에서 구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속사역의 십자가를 지셨다. 이를 갈라디아서 1장4~5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 밝히 증거한다. 죽으시고 부활을 나타내시어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구원자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신 이유와 목적이다. 새 언약이 도래된 그리스도의 출현,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오신 주를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이다. 이를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케 될 수 있는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고 하셨다. 이후 그리스도의 사신이 된 주의 제자들에게 화평케 하는 복음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구원의 도를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곧 주의 종들로 회복하실 새 언약이다. 곧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좁은 길로 들어오는 자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의 동행으로 구속이다. 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입게 하는 일에 참예임을 확증케 한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할 자들이 세상에 많기에 부르심의 목적을 담아 깨닫고 주의 자녀로 사는 전도의 몫을 찾아 행케 하심이다. 베드로전서 2장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주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임을 연계하여 깨닫고 주 안에 삶을 살게 하심이다. 그러기에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안에 다 들었느니라’ 하셨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라 하심이다. 영혼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한 종들로 몫을 배우고 행하게 하시어 기도와 말씀으로 선한 열매를 맺혀 가도록 이를 확증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한 주종의 관계를 갖고 부르심에 선한 뜻을 위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몫이다.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한 거듭나게 하심과 부르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뜻은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 주의 자녀로 회복하는 거룩한 일로써 착한 일이며 선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온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며 이 일에 참여가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도록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임을 확증케 한다. 이를 위해 거듭나게 하심이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심이라고 함이다. 곧 거듭나게 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쓰시기 위함임을 연계해 준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도록 하시는 주의 기쁘신 뜻에 순복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로서 주의 마음을 알고 주와 한영을 이룬 주의 백성들이 주를 닮아가는 여정임을 새긴다. 종들이 이를 알고 실현하여 주의 나라가 확장되고 주의 백성들이 많아지도록 서로 사랑을 하며 부르신 목적대로 충성이다. 주와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기에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한 일에 행복함을 갖고 복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선한 일꾼들로 견인하신다. 구속사역에 참예함으로 성화된 새 패러다임의 행복이며 은혜의 여정에 말씀에 순복하케 하신 주 시링임을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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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1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혼을 소성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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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2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이김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가치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 중 보화임을 마태복음 13장 44절은 증거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하신 비유이다. 보화로 발견과 그 소유하는 비유를 통해 천국의 소중성에 대한 새 가치관을 찾도록 교훈한다. 성경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살 수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영생을 주시는 유일신이신 주님과의 만남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발견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에 열심하는 천국백성으로 선을 이루어 가도록 교훈한다. 그러기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기록목적을 깨닫게 하심이다. 나그네의 여정에 기쁨과 감사로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는 새 가치관의 선함을 얻는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를 아는 자로서의 자존감의 상승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새 생명을 얻게하여 여호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이김으로 영원성이다. 곧 유다서 1장 1절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주의 종들의 정체성이다. 이들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임을 확증케 한다. 요한계시록 14장 3~5절 “이 사람들은 ~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는 증거와 같은 착함이다. 곧 새 가치관을 가진 거룩한 자들로 주의 나라 확장을 실현하는 일에 충성케 한다. 그리하여 주께서 기록하신 말씀 안에 거하게 된 자들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는 지식이 앎이 되어 승리하는 성화이다. 이는 골로새서 2장 3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는 확증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1장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하심과 같은 가치관의 형성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하는 자로써 주를 사랑한 자임을 확증케 한다. 주로 인한 고난은 마땅히 받아야 할 나그네 여정임을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앎의 참예로 충성과 섬김에 대한 연계이다. 주의 종으로서 몫을 하기위한 일꾼의 지혜이다. 곧 주께서 본을 보이심과 같이 사람 살리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의 목적을 알고 행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도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이전보다 더 주를 사랑하는 실천임을 확증케 한다. 누구든지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임을 함께 확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복으로 인하여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케 되어 살아도 주의 것으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도록 주를 사랑하는 자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믿음의 성화이다. 주는 하나님이 되시고 종들은 주의 백성이 됨이기에 주종의 관계를 성립한 일꾼들의 존재목적과 정체성의 연계이다. 곧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성령의 내주로 말씀 안에 거하여 평안에 평안을 덧입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충성과 이김의 영원성의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주의 말씀을 상고하는 목적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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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2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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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4]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생태적 삶의 실천
- 국민일보 김재중 부국장 성경이나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왔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는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동물을 위해 방주를 설계했다. 하나님은 노아의 희생으로 만든 방주를 이용해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고 이 땅을 새롭게 하셨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노아와 같이 녹색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생태학적 창조론과 통전적 생명선교론을 회복하고 목회적으로는 녹색교회, 생명목회, 생태 영성 훈련, 생태 환경교육 등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태적 영성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서 생태적 관점과 태도를 배워 삶으로 실천하도록 이끄는 신앙적 힘이다. 즉,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의 생명 그물망 안에 연결된 존재이며 이 그물망 안에서 각각의 존재는 상호 연계되어 서로를 살린다는 믿음이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일상에서 생태적 삶을 실천할 때 지구의 창조적 질서를 보전할 수 있다. 생태적 삶의 실천은 거창한 게 아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레이스벨은 올해 100% 생분해성 수지 원료로 만든 달걀 포장지를 사용하는 ‘부활절 그린 캠페인’을 펼쳤다. 일반 비닐 포장지는 분해되는 데 100년 이상 걸리지만, 생분해 비닐봉지는 180일이면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건강한 자연환경을 만들기 위한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다. 교회들이 주보나 전도지를 만들 때 재생 종이를 사용하는 것도 생태적 삶의 실천이다. 서울의 한 교회는 1층 주차장에 전기자동차 급속 충전기를 설치하고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였다. 인근에 전기차를 위한 급속 충전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충전시설을 지역에 제공함으로써 탄소중립에 동참하고 있다. 최근 기독기업 이엔포스가 교회의 전기요금을 평균 10% 절감할 수 있는 절전 장비를 개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엔포스의 절전 장비 ‘포스’는 교회의 분전함에 설치해 사용하는 것으로, 설치비 없이 렌탈 방식이어서 초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렌탈비는 줄어든 전기료의 50%를 가져가기 때문에 교회의 부담은 없다. 한국교회의 에너지를 절감해 미자립교회와 선교지를 돕고, 저탄소 녹색 성장을 실천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탄소포인트제(에코마일리지)에 가입하는 것이 친환경 실천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가정에서 에너지 사용량(전기·수도·도시가스) 절감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 실적에 따라 탄소포인트를 산정하고 환경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전 국민 온실가스 감축 실천 프로그램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건물 에너지효율 개선 사업은 교회가 주목할 만하다. 교회가 적극 협력하면 시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민·관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 중심적인 역할을 앞장서 실천할 때 창조 생태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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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4]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생태적 삶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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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 일치의 필요성과 당위
- 한국교회가 연합하여야 한다는 사실은 지난 코로나19 기간에 뼈저리게 느꼈다. 정부에서는 한국교회에 다양한 지침을 내려보냈다. 10%, 30%, 50% 등으로 표현된 참석인원에 대한 통제였다. 모이지 말라는 기본적인 방침에서 그 숫자만 오고갔던 때가 있었다. 그때 정부를 상대로 이러한 논의를 한 주체는 한국교회총연합이었다. 계속 밀고 당기며 해놓은 결과들이 지난 3년 동안 한국교회를 움직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연합기관이 이러한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한국교회는 매주 토요일마다 정해지는 모임인원 방침에 따라 큰 혼란을 겪어야 했었다. 하지만 교회를 대변하는 이러한 기관 덕에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정말 이때 한국교회가 연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으로는 한국교회봉사단이 있다. 2007년 태안 바닷가에서 기름때를 닦으며 대한민국을 위해서 봉사하던 한국교회가 기구를 만들고, 연합하여 수고한 결과이다. 특히 그해 여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던 한국교회가 불과 5개월여 만에 그 이미지를 반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교회의 헌신적인 수고 덕분이다. 당시 태안군청의 담당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 그가 한국교회에 감사하다는 말을 꼭 넣어달라고 하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연합하여 봉사한 한국교회봉사단은 이후 그 전통에서 참 많은 일을 감당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연합은 참 어렵고 힘든 과제였는데, 봉사로 인해 열매를 맺고 연합된 기관을 만든 것은 큰 은혜였다. 당시 ‘교리는 교회를 나누지만 봉사는 교회를 하나로 만듭니다’는 말씀이 진리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한국교회가 힘을 합치고 연합할 때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경험했다. 100여 년 전 3.1운동이 그러했고, 부활절연합예배의 귀한 유산도 있다. 그런데 이제 연합기관들이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연합의 상징인 기구들이 오히려 분열의 상징이 되고 있다. 연합기관들의 총회 때마다 분열과 다툼의 소식이 들려오고, 각 기관마다 서로를 향한 반목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더군다나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연합기관이 누구의 기관이라는 소리가 들릴 때다. 나 같은 필부의 입장에서는 그 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교회를 대표하겠다는 기관이 특정 개인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것은 분명 한국교회와 그 기관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보면 한국교회는 연합이라는 당위에, 권력이라는 현실의 부조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주의 몸된 교회가 연합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연합을 하고 보면 누군가 그 연합된 주의 몸에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한 욕망을 가진 이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될 때 그러한 기관들은 연합이 아니라 분열과 다툼의 기관이 되고 만다. 슬픈 사실은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보아 왔다는 점이다. 요즘 한국교회는 분열의 영이 내린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정죄하고 저주를 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기준에 있어서 믿음이 신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교리가 교회를 나눈다고 하던데, 그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건 사회적 잣대이고, 정치적 잣대이다. 교회에서 사용할 수 없는 잣대를 들이밀며 서로를 반목하고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연합은 당위이다. 주의 몸된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기관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회는 그 특성상 하나의 교리나 신조로 연합될 수 없다. 본질상 통일된 교리나 신조를 잣대로 하여 하나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렇다면 좀 더 느슨한 형태의 연합이어야 한다. 개인을 향하여서는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사실과 세상을 향하여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서로를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가 되길 기대한다. /실천신대 교수·라이프호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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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 일치의 필요성과 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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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②-이건숙의
- 그 할아버지의 소원이란, 처자를 남겨두고 온 고향 땅 신의주를 생전에 자기 두 발로 한번 밟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화자 ‘나’는 어느 무역회사의 과장 직분을 맡고 있었으며, 그 회사가 중국 심양 지역에 공장을 하나 차리게 된 일로 거기에 출장을 가야 했으므로, 그는 자신과 할아버지의 공통 일정을 잘 조절해서 결국 할아버지를 비행기에 동승시켜, 마침내 심양을 향해 떠났다. 화자 ‘나’가 이렇게 과중한 부담을 안고서 그 할아버지를 직접 신의주로 모시기로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 할아버지의 사연이 참으로 기구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독자의 처지에서 생각해 내린 판단이지만, 화자 ‘나’가 그 할아버지와 동병상련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첫째(기구한 사연)에 관해서 보자면 이러하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신의주에서 살고 있었을 때 아내를 몹시 구박했다. 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그의 요구를 아내가 거역해서였다. 가지 말라는데도 아내가 계속 교회에 나가자 그는 어느 날 부엌에서 아내의 등짝을 불로 지졌다. 어린 딸 학실이가 직접 현장을 목도하고 기겁을 해 놀라 소리 질렀다. 그 뒤로 아내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못하는) 대신, 틈만 나면 집에서 찬송가를 불러댔다. 그러나 실제로 딱 두 가지 곡만 불렀다. ‘예수 사랑하심은’과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이 두 곡뿐이었다. 아내가 하도 찬송을 불러대는 것이 귀찮았지만, 그러나 그 곡들이 그의 귀에 못이 박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두 곡의 찬송을 다 암기하게 돼버렸다. 그런데 결국 이 두 가지 찬송이 어느 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게 될 줄이야 그 자신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6·25동란 때 북군으로 동원되었던 그는 어느 전투 현장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미군 지휘관이, 예수 믿는 사람 외엔 다 죽이겠다며, 신자라면 다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포로들 거의 전부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려고 손을 들고 나왔다. 그들에게 신자인 증거로 찬송을 불러 보라고 하자, 많은 이들이 별수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학실이 아빠는, 이때다 싶게, 평소 아내가 부르던 찬송가 하나를 자신 있게 불렀다. 그러자 미군 장교가 한 곡만 가지고서는 확실치가 않으니 한 곡 더 불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머지 한 곡도 힘차게 불렀다. 그는 그렇게 하여 석방되었다. 자기가 평소에 그렇게도 구박했던 아내가 이 위급한 때 자기 목숨을 살려주게 될 줄이야. 미군 포로 신세에서 풀려난 그는 후에 남한에 정착한 뒤 교회에 잘 나가 장로 직분도 받게 되었고, 정년 이후 지금은 은퇴 장로의 신분이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할아버지는 북에 남아 있는 아내에 대한 감사와 속죄의 심정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이 이야기가 ‘나’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다음은 둘째(독자의 처지에서 판단한바)에 관해서이다. 화자 ‘나’도 할아버지와 다소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북에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학실이의 경우는 헤어진 아버지가 남에 있었다. ‘나’와 학실이는 동갑내기이며, ‘나’의 아버지가 북에 살아 계시다면, 학실이 아빠(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정황이 어쩌면 한 가족이라고 착각될 만큼 두 가족은 서로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다. ‘나’가 그 할아버지에 대하여 연민의 정, 다른 말로 표현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보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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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②-이건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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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그분은 가장 뛰어난 자라
- 아가 5장 9절부터 13절에서 예루살렘 여자들, 즉 육적인 신앙인들이 영적인 성도, 즉 신부 성도를 향해 묻는다. 네가 사랑하는 자가 무엇이 더 나으냐? 이는 네가 그리스도의 신부 된 자로 그리 어여쁘고 잘났느냐? 그러면 네가 사랑하는 자가 우리가 믿는 주님보다 무엇이 더 나으냐? 도대체 무엇이 특별한지 말해 보라. 이들 말 속에는 신부 성도를 비방하며 업신여기고 있다. 또한 신부가 믿는 그 신랑 예수까지 비방하는 것이 된다. 왜요? 육적인 그들은 신랑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하고 또 그분의 사랑을 전혀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종말에 육적 교회가 영적교회 즉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를 비방하고 정죄함도 이와 똑같다. 특히 주 재림 예언인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다. 신학적 잣대로만 보면서 무조건 잘못됐다고 정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신부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로써 신랑 예수님을 자랑하며 증거한다. 나의 사랑하는 이는 희고도 붉어 1만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분이다. 희다고 함은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이요, 붉다 함은 힘차고 왕성하신 분, 즉 생명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다는 것이다. 성인군자나 훌륭한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분이시다. 왜요? 날 구원하시고 생명으로 살린 후 계속하여 생명 충만케 해주시기 때문이다. 또 그의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 타래는 많아 까마귀처럼 검으시다. 즉 정금 같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날 인도하시는 분이요, 또 그분의 머리 타래가 많고 검으니 힘있고 전능하신 분이시오, 존귀하신 분이시다. 또 그분의 눈은 강가의 비둘기 같다. 이는 순결하신 분 그리고 온유, 겸손하고 화평케 하시는 주님이심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나로 신앙 정절을 죽기까지 끝까지 지키게 해주시는 분이요, 또한 나를 온유 겸손케 해주신다. 또한 그분의 눈은 젖으로 씻어 알맞게 박힌듯하다. 이는 주님은 나를 치료하시고 또 회개시켜 잘못된 것을 온전히 빼내어 주시며 신부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뺨은 향나무밭 같고 향기로운 꽃 같다. 이 향기는 신랑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이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것에서 그리스도의 신부 되게 하시는 것이 곧 그가 하시는 생명의 향기이다. 그의 입술은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꽃 같도다. 주님 입술은 나와 두 번 입맞춤한 입술이니 초림 예수를 영접한 후 재림 주님을 맞이할 것을 가리킨다. 나는 몰약, 즉 주님과 똑같은 순교 제물로 드려 그의 신부가 되리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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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그분은 가장 뛰어난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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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2] 기후 위기 시대, 가정-교회-마을이 함께하는 창조세계 회복운동
- 목원대학교 조은하 교수 자연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생태계 구성원 전체의 것이며 아직 오지 않은 다음 세대의 것이다. 그렇기에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하며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신앙고백이자 실천이다. 그러나 최근 이상기온, 미세먼지, 수질오염 등이 급속히 진행되며 전 세계적으로 산불, 가뭄, 폭염, 홍수 등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고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상황까지 겹쳐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들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신학자 매튜 팍스(Mathew Fox)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초록빛 은총’(Green Blessing, 창조 은총)과 ‘붉은빛 은총’(Red Blessing, 구원 은총)이다. 창조의 은총은 구원의 은총에 선행하여 창조세계에 내리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더불어 사는 생태적 동반자(eco-fellows)들과 온전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붉은빛 은총’(Red Blessing, 구원 은총)에 응답하는 삶은 곧 ‘초록빛 은총’(Green Blessing, 창조 은총)의 감동을 일상 속에 구현하며 사는 삶이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초록빛 은총을 생태계 구성원 모두가 누리기 위하여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일상생활의 작은 실천운동으로 시작해 생태적 삶이 가능한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과 교회, 교회와 마을이 함께 연대하고 협력해야 한다. 지역 주민을 위한 생태감수성 교육, 마을의 정원과 인근의 산 가꾸기, 아나바다를 통한 재활용품 사용, 녹색가게 운영, 마을 공터에 텃밭 가꾸기, 농촌교회와 연대한 농산물 직거래, 절수와 절전, 일회용품 사용절제 운동 등 가정과 교회와 마을이 힘을 합하여 할 수 있는 기후 위기 대응의 탄소중립 운동은 다양하다. 여름이면 교회마다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있고 이러한 행사 속에서 무분별하게 일회용품이 사용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지는 것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플라스틱 빨대(straw) 퇴출 운동은 미국 한 소년의 제안에서 출발했다. 2011년 “마일로 크레스(당시 9세)”는 음료를 살 때마다 나오는 빨대가 자원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 스트로 프리(Be Straw Free)'라는 슬로건을 걸고 자신이 살던 버몬트주 식당들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이 운동에 동참한 식당 중에는 플라스틱 빨대 사용량을 50~80%까지 줄인 곳도 있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여 생명, 생태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는 근본적 신앙고백이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책무이며 선교적 삶은 바로 ‘변화된 실천’이다. 초록빛 은총을 고백하고, 초록빛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함께 실천하는 것, 창조세계 회복과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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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2] 기후 위기 시대, 가정-교회-마을이 함께하는 창조세계 회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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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1] 기후 환경 보호는 크리스천의 시대적 미션이다.
- 인터서브 조샘 대표 “저는 오랫동안 환경 연구와 운동을 해 온 과학자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고요. 이 크리스천 공동체에 온 것은 번아웃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기후 위기를 돌이킬 수 있을 전망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하던 행태를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공동체에 와서 한 달을 지냈을 때, 이 사람들에게는 제게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치열하게 현실과 부딪히지만, 이들에게는 제게 없는 소망과 기쁨이 있었어요.” 지난 6월 첫 주, 캐나다 아로샤(A Rocha) 국제본부를 일주일간 방문했다. 아로샤는 40년 전에 시작한 크리스천 환경운동 공동체이다. 이 방문 기간 중, 알게 된 한 과학자의 간증이다. 창조 세계 돌봄(Creation Care)으로도 불리는 이 크리스천 운동에 있어서 아로샤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 전 세계적 네트워크는 영국의 한 선교사 부부로부터 시작되었다. 피터 해리스와 미란다 해리스 부부는 1980년대 초,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포르투갈에서 일하게 되었다. 북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나가는 철새들이 머무는 습지가 심각하게 오염되었음을 알고, 이에 관한 연구와 개선을 시작했다. 신학자 존 스토트는 이들을 격려하였고 이 지역의 생태 보존을 미션으로 삼게 되었다. 10년이 지나며, 자연환경 보존과 신앙을 통합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알려지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아로샤를 찾기 시작했다. 이들을 환대하고 안내하는 일이 또 다른 사역의 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아로샤의 환경보호 운동이 이제는 영국, 인도, 레바논, 르완다, 케냐 등등 세계 20여 곳, 수십 개의 환경 프로젝트와 공동체로 확산하였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크리스천 환경보호 운동이 1980년 말부터 시작되어, 미약하지만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6월의 아로샤 방문 일정은 외롭게 이 일을 해온 환경운동가들과 농부, 목회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 이 방문은 여러 가지로 유익했지만, 무엇보다 함께 간 10여 명 모두 한 마음으로 깨달은 메시지가 있었다. 그것은 환경을 보호하고 지킴이 복음의 증거요, 선교라는 것이었다. 선교란 무엇인가? 영어로 미션(Mission)은 라틴어 미씨오(Missio)에서 온 단어이며 그 뜻은 “보낸다”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낸 사람이다. 무엇을 위해서 보내셨을까?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전하기 위함이다. 선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복음의 선포이며, 증거이다. 이 망가져 가는 지구 생태계와 기후 위기 가운데,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뜻과 통치는 다르다는 것을 전하고 증거해야 할 선교적 사명이 있다. 이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가장 큰 증거의 도구는 바로 우리의 삶이다. 이 망가진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지 않는다. 동시에, 현실의 어두움에 지지 않고, 미래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우리 안에 새롭게 한다. 기후 위기의 시대, 크리스천들이 나서면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은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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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1] 기후 환경 보호는 크리스천의 시대적 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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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④] 나만 몰랐던 세 가지
- 한국에서 며칠 동안 생활해 보니, 편리하고, 좋다. 언어가 편하고, 음식도 맛있고, 무엇보다 대중교통 수단은 역시 최고 수준이다. 이렇게 좋은 고국 생활을 즐기는 동안 가끔, 10년 전에 조선일보의 김대중 칼럼니스트가 쓴 「한국인만 모르는 세 가지」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난다. 개발도상국 관료들이 한국 사람들을 평한 내용인데, 그의 표현대로 ‘섬뜩한 지적’ 이다. 한국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얼마나 위험한 대치 상황에 있는지, 주변에 있는 강국들이 얼마나 두려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표현하면, 다른 나라에서 보기에 한국인들의 생활이 아주 풍요롭고, 부유한 수준인데, 국민들은 자국을 ‘헬 조선’이라 자칭한다. 붙어 사는 북한이 미사일을 자주 쏘아 올리는데도, 국민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두려워 하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데, 오히려 그들을 우습게 보는 국민은 한국인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엔에서 발표하는 「행복 보고서」는 히말라야 산맥의 작고 가난한 나라 ‘부탄’을 배워서 시작했다고 한다. 부탄의 1인당 국내 총 생산과 평균 교육수준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그런데 이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2010년 (당시에는 영국 신경제 재단 NEF 발표) 세계 1위였다. 열악한 생활 환경과 수준에 비해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는 당시의 부탄 왕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부탄 국민들의 1인당 소득이 향상 된다고 해서 행복이 그만큼 더 커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 국가 총 생산 보다 국가 총 행복(GNH)이 더 중요하다”며 국민들의 행복을 경제 성장보다 더 중시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행복 국가론’을 1987 년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보도하였고, 연구 끝에 2011년 유엔의 결의안이 나와, 이듬해부터 매년 발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5.951점이었다. 유엔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에서 발표한 「2023년도 국가 행복지수」에서 한국의 행복지수는 전 세계 137개국 중 57위이다. 금년도 통계에는 특별히, 코로나19 로 인한 ‘긍정적인 감정’ 과 ‘부정적인 감정’의 항목도 추가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소위 ‘K 방역’의 자부심도 작용한 듯, 한국의 그 순위는 작년보다 2단계 상승했다. 세계 최고 강국인 미국의 ‘독립 선언문’에는 '행복추구권'이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5위 강국인 영국과 함께 늘 10위권 밖에 있었다. 국민이 가장 행복한 핀란드의 날씨는 아주 어둡고, 추운 겨울이 매우 길다. 이런 기후 환경으로 인해, 한 시절에는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였고, 국민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한다(2019년). 그 나라가 2018년 이래, 5년 연속, 행복지수 1위를 고수하는 데에는 정부와 국민에게 그 비결 세 가지가 있었다. 남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을 즐겁게 누리며, 정부를 높게 신뢰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처지에 자족하며, 자연 그대로 환경을 즐기며, 정치인과 공무원이 신뢰를 받으니, 국민들도 의무와 책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핀란드 국민의 정부 신뢰율은 64%라 한다. 이렇게 높은 정치 신뢰도로 인한 시너지 효과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정부를 신뢰하니, 국민은 국가로부터 합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긴다. 그리고 정책을 믿고 함께 노력하여, 상호적인 삶을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민들의 결속력과 관용, 그리고 국민의 환원 습관으로 이어져서, 그에 대한 높은 세금 등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납부한다고 한다. 한국의 안타까운 현재 행복지수도 올라갔으면 좋겠다.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차를 고를 때, ‘승차감’이 중요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문을 열고 내렸을 때, 사람들이 봐 주는 ‘하차감’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교 습관과 과시욕은 어떤 차를 타고 다녀도 충족되지 못할 것 같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비싼 제품을 흔들며 살아야 한다면, 고급 명품으로도 자족할 수 없을 것이다. 인구 대비 정치인의 수와 그 누리는 보상이 세계 최고인데, 그 정책들이 정쟁의 결과들이라면, 그들의 신뢰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결혼의 조건보다 배우자가 귀해야 행복하다. 가정의 시작이 미약할지라도 함께 노력하며 사는 과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배고픈 시절, 굶어 죽는 사람들이 꽤 있던 형편에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계산을 하지 않으니 행복했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 40 주년을 맞았다. 사역과 생활로 매일 함께 산 그 세월 후, 요즘, 알게 된다. 같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 늘 함께 있었건만, 나와 아내의 행복 만족도는 전혀 다르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한 모습으로 아내는 그 믿음을 늘 증명했다. 언젠가, 어디에서, 그 무엇을 기대하느라, 지금, 여기서, 가진 것을 누리지 못 한 나의 ‘믿음지수’는 낮아졌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 3:13).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 남과 비교하지 말자! 가진 것으로 감사하며 즐기자! 주님 나라를 누리며 살자!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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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④] 나만 몰랐던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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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0] 나무,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에 공감하는 교회 되길
-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권수영 교수 나는 지난 20년 동안 수없이 같은 주제로 강의를 해 왔다. 대학뿐 아니라, 다양한 단체나 기업, 방송에서 같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같은 주제로 책도 여러 권 썼다. 그 주제는 바로 ‘공감’(共感)이다. 상담학자이면서 신학자인 나에게 이 ‘공감’이란 주제는 매우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공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을 향한 신(神)의 마음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연합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밑바닥 감정까지 스스로 내려오셨다. 예수의 십자가는 소외되고 아파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느끼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공감’을 설명하기 위해 가끔 권정생 작가를 떠올린다. 그의 문학 작품은 대한민국 아동들에게 스테디셀러이다. 어린 세대가 그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공감’이었다. 그의 한 수필집 머리말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고 싶을 텐데, 앉아서 책을 읽으라고 하기가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읽고 싶을 때만 아주 조금씩만 읽으세요.” 순간 나는 아이의 숨은 애로를 느끼는 작가의 공감에 눈물이 찔끔 났다. 분명 아이들은 그 공감의 마음에 끌려 마법처럼 그의 책에 빠질 수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기후재난이 난무하는 지금, 권정생 작가가 생태주의자였다는 점이 또다시 내 마음을 훔쳤다. 유명한 작가가 된 이후에도 그는 “변변치 않은 책 하나 내는 건 나무한테 참 미안한 일”이란 말을 자주 하였다. 그는 아동뿐만 아니라 나무의 아픔까지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참 어른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참 많이 닮은 분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참 좋다 하셨던 자연이 인간의 손에 훼손되고 기후재난으로 신음하는 요즘, 나는 더더욱 권정생 작가의 유별난 공감 능력을 배우고 싶어졌다. 어느 날 문득, 난 한국교회가 이런 공감 능력을 발휘하여 종이 주보 없애기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몇 교회 목회자들과 상의를 하기도 했다. 종이 주보의 전통을 갑자기 접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다행히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종이 주보를 과감하게 없애고 디지털 주보를 시작하는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 나는 종이 자체를 무조건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책은, 그리고 권정생 작가의 책은 계속 종이책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배를 드린 후, 두고 나오는 종이 주보는 이제 과감하게 없애도 되지 않을까? 스크린과 홈페이지에 띄우기만 해도 나무에 덜 미안해도 될 텐데 말이다. 묵상하면, 나무의 아픔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다. 나무의 아픔을 공감한다면 곧 하나님의 아픔을 공감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이 공감의 자세로 생태계를 사랑하고 기후재난을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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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0] 나무,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에 공감하는 교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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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 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2~19) 하나님 앞에 서면 누구나 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기까지 험한 골짜기를 헤매고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친구들을 불러 기뻐 잔치를 한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은 기쁨보다 더 기뻐하신다(눅15:3~7) 이 땅에 악이 가득하여 노아의 여덟 가족만 구원 얻어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되게 하셨지만, 소돔 고모라는 죄인이 넘쳐서 벌하신 것이 아니라 의인 열명이 없어서 그 땅을 엎으셨다. 태양계를 승용차 핸들 크기만큼 축소하면 지구는 한 점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이시기는 하실까? 하나님은 티끌 같은 나 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나 하나 위하여 하늘 땅 만드시고 나 하나 위하여 해와 달 만드시고 나 하나 위하여 시간과 역사 이루시고 나 하나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 지시고 나 하나 위하여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셨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전 우주만큼 사랑하신다. 나의 몸무게는 우주 전체 무게와 같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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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교실] 백내장
- 백내장은 안구의 수정체가 혼탁해져서 시력 장애를 일으키는 병이다. 이에 따라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 수정체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시야가 뿌옇거나 침침한 증상을 호소하며, 시력이 떨어지게 된다. 백내장의 원인은 후천성이 대부분인데, 노화에 의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다만, 드물게 선천성 원인이 있을 수 있고, 이외에도 외상, 염증 질환, 장기간 스테로이드 제제 사용 등이 백내장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질환이 60,70대에 많이 발병하는 이유가 있다. ‘노화’에 의해 수정체의 혼탁이 발생하게 되므로 나이가 들면서 발병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보통 50세 이후 발생하기 시작해 60대 이후부터는 절반 이상에게 동반되는 질환이다. 따라서 60,70대에 이로 인한 시야 흐림 및 시력 저하를 호소하여 병원을 많이 찾고, 진닫 받아 수술을 많이 받는다. 60,70대에 백내장과 혼동되기 쉬운 질환은 바로 ‘노안’이다. 노안과 백내장을 많이들 혼동한다. 우리 눈은 가까운 물체를 볼 때 수정체의 조절이 일어나는데, 노화에 의해 수정체가 딱딱해지고 탄력과 조절력이 감소되어 멀리 잘 보는 사람이 근거리 시력에는 장애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돋보기를 착용함으로써 가까이 보는 것을 잘 보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백내장은 수정체의 혼탁이 있으므로, 멀리 보는 것도 뿌옇고, 가까운 것에 돋보기를 써도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겠지’ 하면서 침침하고 불편해도 그냥 참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참다가 너무 불편한 상태가 되어서 병원을 방문하면 통상적인 수술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질환이 진행된 경우가 있다. 따라서 증상이 있다면 안과를 방문하여 백내장 여부 및 기타 안과 질환 여부를 진단받는 것이 좋다. 물론 시야 흐림이나 시력 저하는 망막의 질환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 백내장을 의심하여 오는 분들 중에 망막 질환을 갖고 계신 분들을 흔하게 접한다. 노화에 의해 발생하는 흔한 망막 질환인 황반변성의 경우 시력 저하가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외 망막 혈관 질환도 젊은 연령보다 60,70대에 더 잘 발생할 수 있고, 증상이 비슷해 감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백내장이 많이 진행된 경우, 이로 인한 합병증으로 녹내장이 발생할 수 있다. 또, 수정체 단백에 의한 포도막염 등이 발생하게 되며, 이 경우 수술도 어렵고 수술 후 회복 기간 및 부작용 가능성이 증가하게 된다. 백내장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줄만큼 진행된 경우에 보통 수술하게 된다. 여기서, 시력 저하가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증상인데, 이외에도 낮에는 눈부심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가끔 한눈을 가려도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증상(단안 복시) 등을 불편감으로 호소할 수 있다. 백내장 진행을 지연시키는 안약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백내장을 좋아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방법으로는 과도한 자외선 노출을 피하며, 당뇨가 있는 경우 당뇨 조절을 잘하고, 금연은 눈을 위해서도 좋다. 하지만 이는 노화에 의한 현상인 백내장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는 없다. 수술적으로 ‘초음파 유화술’을 가장 많이 쓰이는데, 초음파 에너지를 사용하여 수정체를 깨고 흡인하여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수정체와 유사하게 생긴 인공 수정체를 삽입하게 된다. 이때 인공수정체는 수술 받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가까운 곳 또는 먼 곳이 잘 보이도록 도수를 선택하여 눈 안에 삽입한다. 난시가 심한 경우 난시 교정 렌즈나, 노안에 대한 교정도 함께 원하는 경우 다초점렌즈를 인공 수정체로 삽입하는 수술도 시행하는 경우가 있다. /한양대병원 안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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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교실] 백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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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1회] 앎의 힘,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비결
- 새 생명의 가치를 알고 빈부나 귀천에 처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 성경은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맡겨주신 일에 전념하며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앎의 힘에 두었음을 발견케 한다. 빌립보서4장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확증이다. 이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줄 알고 종의 몫에 순복하며 지킬 수 있는 비결이 앎임을 확증케 한다. 믿음이 있는 자나 없는자 모두에게 공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날 수 있음의 사실이다. 이를 마태복음 7장에서 반석 위에 세운 자나 모래 위에 세운 자에게 내려 부딪히고 미칠 수 있음을 확증하고 있다. 실족하지 아니하는 힘은 영혼 구원자이신 하나님에 관해 바로 알고 좇기에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연고라 하셨다. 말씀을 들었으나 지킨 자는 주를 좇으려면, 따르려면, 믿으려면의 조건에 순복을 한 자이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고 각기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신 말씀에 화답 함이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영혼 구원의 도는 신본주의 자세를 갖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한다. 곧 십자가의 사역에 동참키 위한 종의 몫을 바로 배워 알고 이를 행하는 일임을 연계하여 새긴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을 구원받음이라 하신 말씀대로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새 가치관 정립임을 확증한다. 그러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셨으며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고 주를 좇는 순복임을 확증케 한다. 중요한 앎으로써 하나님의 영혼 구원자이심을 연계하여 깨닫게 한다. 새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에게도 똑같이 비도, 창수도, 바람도 부딪힘을 강조한다. 이를 전도서9장 2~3절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실족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혼 구원자로 믿음이며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이 영생에 있음을 알고 좇은 반석 위에 세운 연고이다. 영생은 예언된 구원의 도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지킴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의 목적을 두 계명의 실천에 두고 충성하는 믿음이다. 그 결과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새 생명의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겨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리는 몫에 충성이다. 또한 죄사함의 결과는 사단이 그 영혼을 절대 헤치지 못한다는 영적인 영생의 복으로 약속이다. 그러기에 시편 23편 3~4절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함이다. 그러므로 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은 어느 상황에서도 실족하지 아니하고 굳건한 믿음과 끝까지 인내로 맡겨주신 몫에 화답을 한다. 곧 이김의 비결이 앎의 힘이기에 빈부나 귀천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로써 끝까지 충성할 수 있음을 확증케 한다. 주의 말씀 앎이 이길수 있는 힘임을.../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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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1회] 앎의 힘,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