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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유옥합] 예수님의 부활 나의 산 소망
       ‘겟세마네 기도를 하라’ 마음에 감동이 왔다. “아니, 왜요?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기위해 드리는 기도인데.. 내가 십자가에 죽을 것도 아니고” 어린 신앙을 가졌던 나는 기도 할 생각도 못했다. 그 이후로 나는 때때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기절을 하면 잠깐 의식이 없다. 길에서 쓰러지면 아스팔트에 얼굴이 찢어진다. 화장실 문턱에 찢기기도 하고, 병원 가서 봉합수술 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면 어느 날 또 마음에 감동이 왔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가지고 기도 하라. 나는 밤낮으로 고백했다. “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정기적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경험을 했다. 그렇게 5년여가 지난 어느 날 지인 전도사님과 대화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나에게 ‘죽는 훈련’이란 표현을 하며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겟세마네 기도를 하라던 마음의 감동과 아브라함이 이삭을 등에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떠 올려주셨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이후로도 5년여의 시간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순간순간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혹시 운전하다가 이런 증상이 일어나서 기절하고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장거리 운전도 할 수 없었고, 멀리 여행을 할 기회가 생겨도 겁이 나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더 심해졌고, 그때마다 회복되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이 생각이 났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롬6:8) ” 아멘    아~~내가 그동안 반쪽 신앙으로 살았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었으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지식이었구나. 내가 믿지 못했구나. 믿지 못하는 말씀은 나를 살리는 말씀이 되지 못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나는 더 이상 기절을 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들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주님은 나에게 부활의 소망이 죽은 소망이 아닌 산 소망이 되게 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이 후로 나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죽음은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일 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우리 주님은 이 작은 경험을 통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나의 삶속에 들여놓으셨다.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되었다. 맛을 본 자만이 그 나라를 사모하며 살 수 있다. 맛을 본 자만이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장래의 부활을 보장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누구라도, 지금, 이곳에서, 일부나마, 실제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한 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 천국은 그들의 것이다./구미 꿈꾸는교회 목사·여성사역자 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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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3
  • 성서와 생활 (74회) 그리스도인의 삶- 영생의 아름다움
       예수님은 사역의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지상을 떠날 때가 왔음을 알고 비밀을 말씀해 주신다. 바로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길을 알려 주셨다. 곧 영생이 무엇이며 그 영생을 얻는 길을 알려주셨다. 영생의 생명을 취하는 일이 부족하면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움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 영생을 취하는 길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우리가 영생을 소유한 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있는 일이 너무 작고 약한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일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엡1:17)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아는 일이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일이 온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영생의 구원은 사람의 지식이나 열심으로 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 주시기를 바래야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나 지식이 내면적으로 확신이 없을 때는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감정이 뜨거울 때나 우리의 환경이 순탄할 때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곤란한 일을 겪을 때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기 쉽다. 의심하면서 믿거나, 흔들리면서 믿거나, 원망과 불평하면서 믿게 된다면 시험에 빠지게 되고 만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내적으로 견고하다면 흔들림 없는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내적 증거로 가능하다.    수많은 의심이 일어나서 우리 믿음이 흔들릴 때는 동요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때 불안한 믿음은 여러 가지로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 문제를 견고한 신학의 논리나 교리가 해결할 수 없다. 바로 참 하나님을 아는 진리로, 실제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계시의 정신’이 필요하다. 계시로 아는 것만이 믿는 자의 지식이며 기초인 것이다. 흔들리며 의심하여 불안한 믿음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계시를 구해야한다. 처음 믿을 때 보다 더욱 성령 충만함을 통해 모든 일을 수행할 능력이 입혀지도록 구해야 한다. 이 일에 주님은 하나님을 밝히 아는 계시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능력임을 말해주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계시로 얻은 영생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주님의 뜻을 시행하기 때문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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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9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66) 신부에게 더 주실 큰 기쁨
         아가서8:4절에서 주님은 신부 성도에게 사랑을 채워 주신다. 또 큰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이는 곧 바알하몬 포도원에 은 일천 개의 열매를 받는 것이다. 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한 포도원을 가졌는데, 그가 그 포도원을 지키는 자들에게 내어주고 각자 그 열매로 은 일천 개를 가져오게 하였도다”를 가리킨다. 바알하몬 포도원이 무엇인가? 이는 주 재림후 세워질 천년왕국 교회를 말한다. 또 은 일천 개의 열매는 일천 년 동안 맺은 열매를 말하는 것이다. 솔로몬 왕 시대에 솔로몬이 소유한 포도밭이란 지명의 바알하몬이 없다. 지금도 지구상에 없는 이름이다. 이는 바알하몬이 오직 천년왕국에 있는 지명임을 가리킨다.     아가서1:1절부터 솔로몬의 노래는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신부의 기쁨의 찬송이다. 옛날 솔로몬 왕의 노래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신부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포도원 바알하몬이 옛날 솔로몬 왕의 포도원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말씀을 받는 우리 자신이 신부 성도를 계시한 솔로몬 같은 자리에 있어야 된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진 자는 그가 믿는 믿음의 실상으로써 장차 있을 천년왕국에서 그가 살면서 열매 맺는 포도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도 천년왕국에서 살게 될 것이 느껴지고 있나? 예수님은 신부 성도와 함께 기쁨이 하나된 합환채로 영적 자녀를 낳는 역사를 하시면서 어떤 것을 느끼실까? 또 어떤 기쁨이 충만하실까?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통치하시는 것을 느끼며 기뻐하심이 틀림없으시다. 그러면 천년왕국에서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과 함께 통치하면서 살 만왕들인 신부 성도들도 예수님이 누리는 그 기쁨이 당연히 함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이를 예수님이 8:4절에서 채우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채움을 받은 신부 성도는 아직 천년왕국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솔로몬의 바알하몬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자가 된다. 믿음의 실상으로써 은 일천 개를 받은 자가 된다. 예수님은 요15: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는 제자들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표로써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이것이 주님의 기쁨이다. 주님 안에 이 기쁨이 충만하시므로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5:11). 예수님의 기쁨은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당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임당하는 그 자체가 기쁜 것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구원받고 생명이 살아나는 그 생명들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16-17장에서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주기를 원한다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친구인 제자들도 순교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이 순교당할 때 순교의 죽음의 고통보다도 오히려 예수님의 이 기쁨을 제자들이 가져서 제자들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도하셨던 대로 결국 주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기쁨에 같이 하나 되어 순교제물로 드려졌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기쁨을 8:4절의 신부 성도에게 채워주시기 위하여 사랑하시는 것이다. 이 기쁨으로 충만한 신부 성도가 되어지면 순교의 고통, 환란 날에 고난받는 것 등에 대해서 벌써 초월 되어지고 순교의 건너편에 바알하몬 포도원의 은 일천 개로 기뻐하는 자가 된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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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9
  • 강진주작가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강진주작가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는 시편42:1에 기록된 말씀을 표현한 것인데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라고 고백한 이스라엘 다윗 왕의 시를 인용했다. 하나님은 사시사철 부족함이 없이 필요할 때 비를 내려 주셔서 우리가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시기에 농부들은 농사는 하늘과 함께 짓는다는 말을 한다. 그 하늘이 천지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직도 이 참된 진리를 모르고 헤매는 불쌍한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이 작가는 옛날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탕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불로 망한 것을 생각하며 방탕의 도시가 하나님을 갈급히 찾아 나아 오기를 염원한다/미술평론가·대석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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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9
  • 이한나작가의 「기다림」
         이한나작가의 「기다림」은 어린아이들의 감성이 묻어 나는 맑고 깨끗함이 엿보인다. 그야말로 해맑고 투명한 장면이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이다. 푸른 들판이 있고 곡식이 무르익어가는 아름다운 밭이 널려 있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과 붉은 지붕이 있는 교회당도 보인다. 아름다운 나무들과 연못도 있다. 동시가 흐르고 있다. 쓸모없는 꾸밈이 없다. 이 작가는 기다림 속에 무르익어가는 열매를 보고 있다 아니 어떤 일이든지 기다림이 없이는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사람 사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농부들이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님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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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9
  • 성서와 생활 (73회) 그리스도인의 삶- 사랑의 생명의 아름다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4:8) 하나님은 사랑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구원해 주셨다. 이 사랑의 생명으로 태어난 자마다 ‘서로 사랑’함이 가능하다. 이러한 생명이 우리 속에 없다면 감히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는 명령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함을 알게 하셨다. 믿기만 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실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요일4:7)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생명의 길을 갈 때 하나님께로 난 자임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은 마태복음의 “긍휼히 여기는”(마5:7)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긍휼히 여김으로써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복을 누리도록 하셨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잃어도 영생의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요일3:10) 주님 안에 거함을 영원한 성령으로 알 수 있게 하셨다.(요일3:24) 이 사랑의 생명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비로소 사망에서 옮겨져서 생명에 거하게 된다.(요일3:14,15)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사망의 세력을 이길 수 없게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영적인 가족을 통해 서로 사랑함으로 그리스도 생명에 이르게 하셨다. 믿음과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공존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서로 사랑함으로 완성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사랑이 식어지는 불법이 활동을 하게 된다. (마24:12,13) 예수님은 천국의 가르침만으로 우리를 구원하거나 완성시킨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을 속죄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었다.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어 그의 생명을 나눠 줄 수 있었다.    우리도 이러한 계명 아래 있을 때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게 하셨다.(요일3:22)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자는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사랑의 참된 아름다움인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이 마음의 소원을 다 이루게 하셨다. 믿기만 하지 않고, 기도만 하지 않고, 사랑함으로 믿고, 사랑함으로 기도할 때 아름다운 믿음으로 흠이 없게 하신다. 그리하여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영생하는 사랑의 생명이 중요함을 알개 하셨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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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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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64회] 그리스도인의 삶- 십자가의 아름다움
       십자가의 아름다움은 바로 하나님이 승리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죄가 들어온 어둠의 세력을 십자가로 멸하셨다. “일생에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히2:14) 구원한 것은 십자가의 은혜이다. 이 구속의 희생양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를 보내셨다. 이 아름다운 희생과 손해는 하나님의 권위와 완전하심을 드러내신 십자가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승리를 기억함이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사역을 기억함으로 믿음은 성장한다. 십자가의 토대 위에 세워진 믿음만이 하나님의 뜻이 적용되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를 통해 죄의 심판 아래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셨다. 인류는 에덴에서 시작된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믿는 악이 드러났다. 뱀은 사람들로 죄를 알게 하였고 고통이 따르는 삶으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인류를 죄의 종에서 해방시키는 길이다. 또한 의의 종이 되게 하는 십자가의 생명을 주신다.    십자가의 아름다움은 다만 구원을 예비한 것만이 아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때 마다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로 마귀가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참소하는 자며, ‘거짓과 악행’(행13:10)이 가득한 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원수로 행한다. 믿음의 길을 어그러뜨리고 불순종의 세력자들이며 교만의 영들이다. ‘죄를 짓는 자요’(요일3:8) 사망의 세력을 가진 자이다.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요일 3:10)들이다. 십자가를 통해 ‘마귀의 일을 멸하신’것을 알 수 있게 됨으로 이러한 죄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십자가의 아름다움은 사탄이 패배했음에 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셨다.골2:15 사탄의 궤계와 술수로 인해 온갖 환경의 어려움을 당하게 하는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할 때 환난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십자가로 인해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시는.(눅10:19) 십자가의 승리를 알아야한다.    십자가의 아름다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천하심에 있다. 이러한 진리를 알게 된다면 우리 성도들도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1:23)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동참하는 생활 속에서 십자가의 아름다움은 지속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승리를 “증거하는 말”,(계12:11)로 ’용‘(옛 뱀, 마귀, 사탄)(계20:2)을 이긴 진리를 누리게 하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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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56) 네 가슴은 포도송이같다
         신부성도의 키가 종려나무 같다고 주님이 칭찬하셨다. 이는 주의 말씀을 믿고 경험하면서 계속 영적으로 크게 자라난 것을 가리킨다. 또 종려 성읍에서 외치라는 말씀에 의해서 외친 것처럼 그녀가 말씀 증거하여 승리한 체험을 한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신앙의 키가 종려나무처럼 커진 것을 가리킨다. 이는 아7:5에 신부성도의 머리가 칼멜 산 같다고 말씀한 것과 같은 맥이다. 선한 싸움을 계속 싸워 이기고 또 이겨서 금면류관 받은 모습이 칼멜 산 같은 머리이다. 또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다’고 하였다. 이는 포도 한 송이를 정탐꾼 두 명이 막대기로 꿰어 메고 올 정도로 크다(민13:23) 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맺은 것과 같다. 이처럼 신부성도가 신령한 젖으로 영혼을 살리고 양육하며 많은 열매를 맺음을 계시한 것이다.     7:8 내가 말하기를 “내가 종려나무에 올라가 그 가지들을 잡으리라." 하였도다. 이제 네 가슴은 또한 포도송이같이 되고, 네 코의 냄새는 사과같이 될 것이요. 종려나무는 신부성도를 가리키며 신랑 예수님이 그 나무에 올라가 가지들을 잡는다 했다. 무슨 뜻일까? 이는 주님이 순교하는 신부를 기쁘게 영접한다는 의미이다. 스테판이 돌 맞아 순교하는 장업한 순간에 주님이 어찌했나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이 벌떡 일어나셨다고 하였다(행7:55-56). 이는 주님께서 기쁘게 그를 맞이하는 것이요. 금면류관을 씌워주시려는 엄숙한 순간인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종려나무에 올라가 그 가지들을 잡는다는 말씀이다. 주의 재림 때 스테판은 신부가 된다. 우리도 순교 당하는 그때가 곧 신부로 확정되는 시점이다. 그 때에 주님은 너무나도 기뻐하시리라. 이제 네 유방은 또한 포도송이 같다고 한다. 이는 7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반복하였는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강조하신 것이다. 즉 ‘네가 먹이고 있는 신령한 젖으로 너와 똑같은 신부를 세우는 역사를 많이 하고 있구나!’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포도송이를 포도즙들에 넣어 찧으면 포도즙이 나온다. 신부성도의 유방이 포도송이 같다는 것은 그녀가 증거하는 말씀이 참포도주가 됨을 의미한다. 신부성도가 먹이는 참포도주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물로 된 포도주(요2:1 이하)로 살리는 역사를 한다. 가나 혼인식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열려지는 어린양의 혼인식을 계시하고 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어린양의 혼인잔치 자리에 신부로 인도하는 말씀, 곧 영광의 복음이 물로 된 포도주이다. 둘째는 멜기세덱 구원을 증거하여 살리는 역사를 한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으로서 영원히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계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오신 대제사장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아래 끓게 하신다.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타락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 그 죽은자 된 아담의 영과 또 모든 하나님의 아들의 영들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는 구원을 해 주신 분이 곧 멜기세덱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제사장 직분인 멜기세덱으로 계시면서 죽은 자였던 자기백성들의 영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셨다. 성자 하나님이 그의 제사장 직분인 멜기세덱으로 이루신 이구원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 신부 성도의 유방이 포도송이 같다고 하신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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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 [향유옥합] 봄은 온다.
      봄이 왔다. 얼었던 땅이 녹고, 움츠렸던 새싹이 새 생명으로 꿈틀대며 돋아나고, 아직 피지 못한 꽃송이들은 꽃봉오리를 벗고 반짝이는 빛처럼 피어난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때아닌 3월 대설 특보와 함께 꽃샘추위의 기세가 맹렬했다.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밤사이 하얀 눈이 세상을 덮고, 다시금 외투를 꽁꽁 싸매야 했다.   꽃샘추위! 말 그대로 꽃이 피는 시기를 시샘하는 추위로, 때로는 남이 자기보다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샘의 준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봄이 오면 추위는 당연히 물러가야 하는데, 동(冬)장군은 화창한 봄날에 꽃이 피는 것이 왠지 아쉽고 샘이 나서 한바탕 추위를 몰고 온다.   꽃샘추위를 보낼 때마다, 나는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은 시기가 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때가 임하기 전, 사탄은 이와 같은 ‘시샘’을 꼭 부린다. 어떻게든 방해하고, 세속적인 좋은 것으로 유혹하며 타협하게 하고, 어려움에 기진맥진하도록 총공세를 퍼붓는다.   약속의 축복이 클수록 이 시샘과 방해는 더욱 커진다. 물론 예수님은 사탄의 이러한 방해를 능히 진멸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때로는 우리가 믿음의 싸움으로 능히 이 고난을 이겨내도록 허락하기도 하신다. 또는 꽃샘추위와도 같은 고난을 통해 인내와 연단을 가르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도록(히10:36) 고난의 은혜를 먼저 주기도 하신다.     그 과정이야 어떠하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그 꽃샘추위와도 같은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인데,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단 한 가지! ‘우리의 믿음’이다. 봄이 올 것 같은 기대가 무색하게, 난데없이 불어닥친 어려움이 소망을 절망으로 바꿔버린다 할지라도, 언제 끝날지 모를 추위와 고통이 불안과 염려로 엄습할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능력’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욱 기도하게 하시고 연단케 하신다면, 나는 그저 순종하며 ‘더’ 기도의 분량을 쌓아가고, ‘더’ 인내하며, 나에게 허락하신 영적인 책임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이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르고도 쉬운 길이다. 그렇게 믿음의 장성한 분량을 쌓아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문제 해결보다 더 큰 축복이 된다.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나에게 허락하신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히12:2).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능력은 분명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 결국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인류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다.    그 예수님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만드는 것은 ‘이미’ 허락하신 믿음의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느냐에 달려있다.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말씀 가운데, 사명 가운데, 주님의 뜻을 맞추어 가는 삶! 그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 나의 성품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경건하고도 순종적인 ‘아비투스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봄은 반드시 온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봄과 같은 나날은 무한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한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기 때문이다(이사야 55장 9절).     /‘말씀 굽는 타자기’ 블로거,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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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 [향유옥합] 주께 우리를 드리는 성화의 사순절
       사순절에 묵상, 대 자연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단장으로 한창이다. 우리의 신앙에도 사랑 더하기의 날들을 고대하며,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인한 새 언약 성취에 감사를 더한다. 그 사랑을 본받는 신앙, 주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어주신 것처럼 겸손과 주를 사랑하는 일에 성화의 날들로 드려지길 기도드린다. 묵상의 기도는 말씀대로 행함을 불러 일으킨다. 성경의 기록목적(딤후3:15~17)과 주께서 대속제물이 되어주신 이유를 (벧전2:21)연계케 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곧 주를 본받아 좇는 십자가의 몫에 증거이다. 거듭나게 하신 목적과 부르신 몫에 테인 십자가, 이를 행할 때 충만한 기쁨이 온다. 흠 없으신 주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언약대로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 창조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되심을 확증시켜 좇게 하셨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드리신 주의 그 사랑의 확증이다. 우리가 행할 사랑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속사역에 순복이다. 영생에 소망을 둔 새 가치관으로 져야 할 멍에이다. 주의 자녀들은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으로 주의 복음이 편만히 펼쳐지도록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쉬지 않는 기도로 말씀에 화답케 하신다. 주님과 동행하는 여정, 은혜의 날들은 날마다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이웃을 위한 사랑에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성화이다. 이 몫에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마땅함이다. 성령과 동행하는 십자가의 몫은 복음을 들었던 자들이 주의 자녀가 되게하는 긍휼로 선한 일이다. 주님을 상고하며 동행하는 사순절, 주의 백성으로 회복하게 하는 몫에 십자가를 지는 사랑 실천을 알고 좇게 하시는 묵상이다. 먼저 된 자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전도에 십자가를 진다. 서로 사랑으로 도모케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지혜로 그 뜻을 좇는다. 한 몸을 이룬 거룩한 자들로 함께 웃고 함께 울며 보배로운 십자가 복음을 세워가는 연합이다. 사랑을 더하려 겸손히 기도드리는 사순절. 생명 주시어 맡겨주신 몫에 화답하는 성화의 기간이다.    주님의 그 자취를 좇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계명 지킴에 사랑을 실천케 하신다. 새로운 피조물로써 주님의 뜻에 화답이다. 믿지 아니하는 이웃들을 복음으로 주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사랑하여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의 제자화이다. 딛2장14절로 인도이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의 본분이다. 곧 주님의 자취를 좇는 사람의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선이다. 이는 지식의 근본이며 성경을 알고 좇게 하신 목적이다. 주께서 지체들의 서로 사랑으로 이웃 사랑하여 복음으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원하셨다. 화목케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이 말씀에 순복이다. 이를 지켜 주의 제자화가 되도록 십자가로 행케 하심이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하심에 주의 동역자들로 화답하게 하시는 여정, 더 성화의 날들 사순절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하심에 지혜를 주셨다. 믿음의 온전은 복음을 전하여 주의 계명을 지키는 일로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의 본분, 거룩한 십자가를 지고 주와 동행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존재의 목적이다. 사랑은 주의 말씀이 능력이 되어 온전히 성화의 날들로 하나님에 의한 겸손이다. 사순절의 묵상이 제자화로 푯대를 향해 달리게 한다. 주님을 본받아.../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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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5
  • 조명숙작가의 「예수님의 고난」
      조명숙작가의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내려서 무덤에 안치 하기 직전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예수님의 시체는 자신이 묻히기 위하여 미리 예비한 부자의 무덤에 들어가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53:9에 예언 하였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7:57-60 에 아리마대의 부자였던 요셉이라는 제자가 시체를 인수하여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파 놓은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아 놓음으로 성취 되었다. 작가는 원래 일본 동경에서 미술 수업을 하고 단국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유학파로서 자유분방한 선과 음영을 구사하고 있는데 특히 이야기 형식의 구도가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더해 주고 있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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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5
  • 성서와 생활 (63회) 그리스도인의 삶- 인자와 진리의 아름다움
       하나님은 인자(사랑)와 진리이신 주님을 통해 구원함을 받게 하셨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죄악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오직 주님의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떠나게 하신다.(잠16:6) 주님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우리의 죄악을 소멸하는 길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죄악이 주장하지 못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를 사도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악에서 떠나게’ 됨을 알 수 있다. 사람의 행위는 자신이 만족을 구함이 아니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행위라야 한다. 이로인해 원수도 무릎을 꿇게 하신다.(잠16:7) 주님의 행위는 살아생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그의 기쁨이 되었기에 사망에서 부활로 나올 수 있었음을 계시하셨다.    믿음의 근거는 십자가의 사랑에서 시작한다. 이 사랑을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셨다. 이러한 믿음은 참으로 안정적이며 우리로 영적인 부를 누리게한다.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를 복이 있게 하셨다. 십자가의 원리를 믿는 자들에게는 좋은 것을 얻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의지하여 겸손히 그의 길을 걷는 자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에 이른다. 항상 십자가의 은혜를 경외하는 자마다 복되게 하신다.(잠28:14)    주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생명에 이르며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잠19:23)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할수록 복되게 하시나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가 악에서 떠나는 길은 오직 주의 길을 묵상하고 경외하여 우러러보는 것이다.(잠19:23)      신자가 마음에 요구하는 많은 욕심은 교만하여 정죄를 받게 한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잠23:17) 하셨다. 오직 주의 십자가의 승리를 경외하며 묵상할 때 ‘풍족하게 하신다.(잠28:25)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것을 알아야한다.”(렘2:19) 우리가 주의 십자가의 길에서 떠나면 완고해 질 수 밖에 없다. 주의 십자가의 사랑을 힘입어 그를 경외하며 선을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선을 행함으로 해함이 없게 하셨다”(벧전3:13) ‘선한 눈을 가진 자’(잠22:9)로 사는 것이 인자와 진리의 아름다움이다. 이 땅에 ‘생명의 떡’(요6:48)으로 오신 주님을 경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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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4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55) 오 사랑아
         아7:5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신부성도의 머리는 칼멜산 같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자주빛 같으니 왕이 그 흘러넘친 것에 매여 있도다. 신부성도의 머리카락을 칭찬하신다. 또 왕이 신부의 흘러넘치는 머리카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왜 그럴까? 이는 말씀을 증거하여 한생명, 한생명 다른 영혼을 살리고 있으니 그 말씀의 지혜와 지식의 영적 부요가 넘치고 있음을 가리킨다. 신부성도의 머리카락이 자줏빛을 내며 한 올, 한 올 굽이쳐 흘러 내려진 모습에 왕의 마음이 매료되었다. 신부성도의 머리카락이 엉켜 붙거나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한 올, 한 올 굽이쳐졌다는 것은 주님이 주신 말씀, 즉 말씀의 지혜와 말씀의 지식이 충만하게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 신랑 예수님이 주신 그 말씀을 증거하여 한 생명, 한 생명 살리는 역사를 계속 하는 신부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를 한 올, 한 올 흘러넘친 자주빛 같은 머리타래로 계시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는 왕이신 신랑 예수님의 마음이 홀딱 신부에게 빼앗긴 것이다. 7:6 오 사랑아, 너는 어찌 그리 어여쁘고 아름다워 즐겁게 하는가! 지금까지는 신부를 ‘나의 사랑’이라고 호칭하였는데(아1:9, 4:1, 6:4등) 이제는 ‘나’와 ‘너’의 구별이 없어지고 ‘사랑아’ 하나로 호칭했다.     이렇게 발전된 것은 신부성도의 신앙이 계속 성숙 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종전에는 신부가 신랑을 사랑할 때 ‘나의 사랑하는 이여’라고 하였고, 또 신랑이 신부를 사랑할 때 ‘나의 사랑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나와 너의 구별이 없어지고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이다. 이는 요17:21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 모두를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말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구별 없이 하나이신 것같이 제자들도 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이다. 현재 신부성도의 신앙 위치는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주님과 내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된 것이다. 또 신부성도를 보고 ‘어여쁘다’고 하신 것은 1~5절의 지금까지 신부의 모습 때문이다. 특히 신부성도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환경에 놓여있든지 주저 없이 담대하게 신랑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이를 어여쁘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또한 신부성도가 ‘아름답다’는 것은 신부가 오직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며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신앙으로 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이 다 주신 것으로써 좋게 여기며 은혜로 받고 있다. 또 ‘즐겁게 한다’는 것은 그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있음을 가리킨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분이 존재하시는 것과 그 분이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히11:6). 이와같이 신부성도는 주께서 재림하셔서 자기에게 첫째부활의 영광을 주실 분으로 믿고 달려감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있는 것이다. 7:7 네 이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가슴은 포도송이 같구나. 신부성도의 영적인 키가 종려나무 같이 쭉 뻗어나 있다는 것이다. 종려나무는 신34:3에 ‘여리고 성읍은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하였다. 즉 승리의 의미가 종려나무이다.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는 주의 말씀과 주의 방법으로 정복했기 때문이다. 즉 7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돌고 마지막 날은 일곱 번 돌고 외치라는 하나님 말씀대로 외쳤더니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다.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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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4
  • 이순배작가의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순배작가의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작품은 이사야서 53장 5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표현한 것인데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 탄생 약 700 년 전의 인물로서 다른 선지자(예언자)들 보다 많은 예수님의 일생을 정확히 예언하여 대 선지자로 일러지는 인물인 것이다. 특히 이사야서 53장은 고난에 대하여 상세히 예언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장면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는 말씀을 표현하고 있는데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표정을 아크릴 물감으로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가시 관에 찔림으로 피를 흘리시는 장면이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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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1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54] 네 머리는 갈멜산 같다
         7:4에 ‘신부성도의 눈은 바드랍빔 성문 곁에 있는 헤스본의 고기 연못같이 아름답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모리 땅 헤스본에서 이루신 역사가 전부 헤스본의 연못에 비춰졌다는 것을 계시한다. 즉 하나님께서 시혼 왕을 격동시키고 그를 진멸하여 그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주신 사건이 헤스본의 연못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는 눈이 신부성도의 눈이다. 헤스본의 과거 역사처럼 영광의 복음을 증거하고, 주 재림의 예언의 말씀을 증거할 때, 헤스본 왕과 같이 대적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증거하는 자신에게 영광을 더하게 하시는 복된 역사임을 보는 것이다. 또 대적자를 멸해버리고 그 기업을 자신에게 주신 것을 믿는 신부성도이다. 이같은 신앙안목이 곧 일원론적 신앙관이다. 장차 7년 환란날에 적그리스도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잔인무도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짓밟게 될 때 바드랍빔 성문 곁에 있는 헤스본 연못에 비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은 신앙안목을 가졌다면 절대 위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세웠다는 것과 하나님의 종과 백성들을 그에게 붙였고 그로 대적하고 짓밟게 하셨다는 것과 이런 역사가 곧 우리에게 영광을 더해주시기 위한 복된 것으로 받게 된다. 이것이 일원론적 구원관을 가진 신부의 안목인 것이다. 또한 신부성도의 코는 다마스커스를 향해 보는 레바논의 망대같이 아름답다고 하셨다. 다마스커스는 해발 700미터 고원지대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도시로서 역사와 전통이 유수한 곳이다. 이곳에 세워진 망대는 훌륭한 다마스커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다마스커스를 내려다보고 있다. 다마스커스를 내려다보는 망대같이 신부성도의 콧대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신부성도가 지극히 높은 소망, 즉 하나님의 종의 높은 차원의 위엄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계시한 것이다. 그러한고로 신부성도는 헤프게 행동하지 않으며 지극히 위엄과 존귀함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신부의 코가 레바논의 망대 같다고 하신다.    7:5 네 위에 있는 머리는 칼멜 산 같고 네 머리의 머리카락은 자주빛 같으니, 왕이 그 흘러넘친 것에 매여 있도다. 모든 거짓선지자들을 멸하고 승리한 산이 갈멜산이다. 왕상18:19에 엘리야가 칼멜산으로 모든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명을 모으게 하였다. 그곳에서 바알 선지자들의 신은 가짜이고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여서 믿게 하였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붙잡아 키손시내에서 죽였다. 이와같이 신부성도의 머리가 칼멜산 같다는 것은 늘 선한싸움을 싸워서 이기는 것을 말한다. 엘리야처럼 우리도 영적싸움을 싸우는 자들이다. 마귀를 향하여 영광의 복음과 진리로 싸우되 날마다 승리만 있게 된다. 그리고 최고의 승리는 환란날 순교로 이기는 자에게 주는 금면류관이 있다. 칼멜산 같은 머리로 단장한 신부성도는 이 금면류관의 신앙으로 단장되어 있다. 왕이 그 흘러넘친 신부의 머리카락에 매여 있도다.이는 머리카락은 말씀의 지혜 지식을 상징한다. 신부성도에게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이 자줏빛 같다는 것이다. 자줏빛은 자색 옷, 즉 부자가 입는 옷을 상징한다. 따라서 자주빛 머리카락은 영적으로 부요한 신부의 모습이다. 그 자주빛의 광채가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 영광만을 비추며, 하늘영생을 소망케 하는 광채이다. 이 하늘나라 영광을 더하게 하시는 말씀을 믿고 신부성도가 믿음의 실상으로 누리며 든든히 서 있으니 그것이 바로 권능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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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7
  • 성서와 생활 [62회] 그리스도인의 삶- 성경 회복의 아름다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 말씀을 통해 “영과 진리로 예배”(요4:23)를 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설교를 통해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주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리라”(롬10:17)고 하셨다. 또한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사랑의 관점으로 바뀌게 된다. 성경을 통해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하셨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는 충성된 자들에게 번영의 복을 약속하셨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잘못된 습관에서 고침을 받고 지혜와 명철과 생명을 주신다. 말씀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에게는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의롭게 하신다.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 일은 어둠에 다니는 바와 다를 것이 없다. 모든 일이 무익하며 허공을 치는 일이 된다. 그러나 말씀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은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신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며 기회를 잃지 않게 하신다. 아무리 어려운 말씀이라도 경외하여 묵상하고 가까이해야한다. 반드시 묵상한 말씀들은 그에게 적용되는 날이 오기 때문이다. 말씀의 씨앗을 심령 밭에 뿌리지 않는 자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 성경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참된 목적은 진리가 내 안에 거하는데 있다.  성경말씀을 지식으로만 무장한다면 유대인들과 같이 진리가운데로 나아갈 수가 없다.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어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내 안에 있도록 성경을 회복해야만한다. 마음이 거칠고 강퍅하여 사랑이 없는 자는 진리에 이를 수가 없음을 알고 회개함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말씀 회복을 위해 주야로 묵상해야한다. 큰 소리로 단어들을 강조하며 읽어야한다. 나를 향한 약속의 말씀을 발견하고 내 것으로 삼아야한다. 나를 위한 축복의 말씀으로 받아야한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회개해야한다. 자신이 실천해야 할 계명을 알고 의를 구해야한다. 나를 축복하고 타인을 축복할 말씀을 알아야한다. 말씀인 진리가 내 안에 거할 수 있는 영적 아름다움은 사랑의 마음이 있는 자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없을 때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 말씀을 회복하는 길은 사랑의 마음인 좋은 심령 밭으로 읽고 받을 때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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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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