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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5] 그리스도인의 영성 -기억의 영성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레26:42.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을 기억하는 자들에게 약속을 성취하신다.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찬양해야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기백성과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26:45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 민15:39 해야한다.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심,시111:5은 하나님이 그 자녀와 언약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셔서 그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시111:4.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신7:19 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언약 곧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돌보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로 그의 심판아래 두셨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20:8는 명령은 순종의 여부를 알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으로 만족한 안식을 통해 육신의 일을 쉬고 성령안에서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인자하심(사랑)을 찬미하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알게하신다. 오늘날 주의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영원한 사랑을 기억하며 찬미 드리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멘 예배자를 찾으신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함이 우리의 삶이며 예배이다. 우리가 사망에서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 딤후2:8하는 일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23:42라는 강도의 고백 속에 주의 나라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약속한 나라를 구할 때 그 나라를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구제를 기억해 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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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⑨] 동행 속도
외국에서 서울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역동성이다. 그 느낌이 상쾌하다. 내 걸음도 빨라지고, 마음도 활발해 진다. 나보다 늦게 걷는 이들이 있으면, 추월도 한다. 아내와 함께 걸으면, 거의 매번 듣는 말이 ‘천천히 걸으라’는 것이다. 따라 걷기가 힘들단다. 그래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힘들다’고 말하면 속도를 조금 줄이게 된다. 2022년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국민생활체육조사’ 결과는 한국인의 보행 속도를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완보, 산보, 속보, 급보, 강보, 그리고, 경보이다. 이들 중에 급보부터 올림픽 종목에도 들어 있던 경보 수준까지의 세 단계는 일상적 보행 속도는 아니다.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시간당 4.8km 라고 한다. 노인의 평균 보행속도는 1분에 64m 로, 시속 3.8km 였다. 완보와 산보 사이에서 완보에 가까운 속도이다. 속보에 근접한 젊은이들의 속도에 비하면, 시간당 1km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호주, 나이지리아, 탄자니아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노인 6,472명을 비교한 결과, 가장 빠른 속도였다(The Journals of Gerontology, 2023.04.08, 분당서울대병원). 한국 국민 모두가 빠르게 걷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현상과도 비슷하다. 이전 세대에서 빠르게 달려 왔던 노년층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 세대와의 조화에 신경이 쓰이고 눈치도 보이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지금의 노인들이 젊은 시절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 만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낙심한다. 청년들과 노년들이 열심과 성취에 대해 비교 할 때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의 생물학 교수 카라 월 셰플러는 걷는 속도로 대인관계에 대한 문화적 영향을 실험했다. 시애틀과 우간다 중부의 무코노(Mukono)라는 타운의 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1,700명이상의 사람들이 걷는 시간을 재고, 분석하여, 2018년 9월 호 <PeerJ-Life and Environment>에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혼자 걸을 때의 속도는 우간다의 사람들이 시애틀 사람들의 걷는 속도보다 평균 11%가 빨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는 그 속도가 느려졌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동반했을 때의 속도는 혼자일 때보다 약 16%가 더 느렸다고 한다. (2018.10.02. 뉴욕타임스 특약-한국일보 기사 참조) 환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시애틀은 여유로운 도시였다. 나도 대학 시절을 보내고,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든 곳이다. 그런데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앞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시애틀의 주민들이 걷는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오히려 빨랐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와 걸을 때 빨랐고, 다른 남성보다 앞에 서면, 그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남녀 모두 아이들과 함께일 때도 속도가 빨랐다. 자녀를 안고 동행할 때의 보행 속도가 혼자 걸을 때보다 20% 빨랐다는 부분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셰플러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의 사정까지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사회의 대인 관계 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는 자료이다. 걷다가, 가끔 연상되는 말이 있다. ‘혼자 가려면 빨리 가고, 함께 가려면 천천히 가라.’ 빠른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인도의 격언이다. 우리 사회는 늘 앞에 가는 사람, 위에 있는 사람, 일등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 사는 사회는 뒤쳐진 이들을 기다려 줄 수 없고, 후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남들을 제치며 치열하게 얻어낸 내 승리의 보상을 가족 외의 남들에게 ‘준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불렸던 썬다 싱이 30살 때, 티베트의 눈 산을 넘게 되었다.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와 높이 쌓인 눈길을 걷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가파른 비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를 구조하여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동행하던 동료는 나도 힘들다며, 먼저 가 버렸다. 썬다 싱은 그 부상한 사람을 등에 업고 아주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어렵게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걷는 중에, 얼어 죽어서 쓰러져 있는, 앞서 먼저 떠났던 친구를 보게 되었다. 자신만의 체온으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 싱은 부상자를 업고 힘들게 걷는 동안, 더워진 체온 때문에 부상자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회도 잘 사는 자들의 힘과 젊은이들의 희망이 손을 맞잡아야 따뜻해 수 있다. 먼저 살면서 쌓은 것들을 나누는 자들과 뒤에서 뛰는 자들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회가 어두워진다. 지치도록 달려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청년들에게 그 연령대를 살면서 많은 것을 갖게 된 어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녀에게만 돈을 주면 자기들끼리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 사회에 빵을 나누면, 좋은 나라에서 그 후손들도 함께 잘 살게 된다. 먼저 얻은 부가 사회의 공존 자원으로 흘러야 한다. 그 격차가 줄어야, 서로의 손이 닿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진한 속도가 시속 2~3마일(4~4.8km) 정도였다고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는 답답한 속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대열에서 어떻게 남는 시간을 썼을까? 그들은 가끔 뒤돌아 보며, 뒤에 오는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부축하거나, 업기도 하고, 마차에 앉히느라 그 속도가 느려졌을 것이다. 노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청년들을 잠잠히 축복했을 것이다.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시지만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서, 그들과 함께 가시던 하나님도 그런 그들을 보시며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하여, 그 마음에 흐르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한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 한국이 함께 잘 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1:31, 29:5).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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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4]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4)-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크나큰 복음에 대한 것임을 시편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게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 대로 사는 길이 바로 성취된 복음 안에서 사는 길이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 생명이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말한다.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고 주님의 생명이 나로 천국생활을 구현하게 하실 것이다 이미 성취된 사실인 복음에 감사함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신다. 이로인해 우리의 마음은 생명수 샘물이 흘러나와 청결함을 얻게 된다. 마음이 청결함은 매우 중요하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감사가 우리로 풍성한 승리를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승리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을 때 만이 가능하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우리를 다음과 같이 부탁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주님의 간구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선지자의 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의 승리로 인해 믿을 수 있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왕으로부터 구원받은 시점에서 감사함이 종료되지 않는다. 애굽에서의 구원 이후에 오는 보호하심의 더 큰 구원의 섭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사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우리의 처지이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시136:23)고 하신 점이다. 우리는 육에 속한 비천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죄에 매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천한 자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돌보시사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셨다.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할 자는 바로 그의 자녀들 뿐이기 때문이다. 매일의 생활에 감사로 깨어있는 자가 그분의 자녀이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구속 함을 받은 그의 자녀들의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늘의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의무이며 성품이 되어야 한다. 감사를 배우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신다. 감사가 없는 삶은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된다. 감사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는 믿음의 역사를 소망할 뿐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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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8회] 주님의 뜻을 위해 부르신 선한 목적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성화로 순복케 하시는 은혜, 감사와 감격의 여정 성경은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을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성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신다는 말씀에서 발견케 한다. 새 피조물의 존재 목적은 주와 복음을 위해 쓰시기 위함임을 찾는다. 주의 뜻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의 길로 인도이다. 죄인들이 복음을 듣고 돌이켜 예수를 창조주 구원 주로 믿어 새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선을 위함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들에게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구속사역에 순복케 함이다. 이는 주를 믿지 아니하여 거듭나지 못한 채 죄에 머물러 있는 죄인들을 주의 백성으로 회복하시어 주의 나라 확장이 주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몫에 참예이다.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육신이 이끄는대로 사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구속이다. 말씀으로 견인하시는 섭리의 화답이다.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도록 하는 몫이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죄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전도의 몫이 존재의 목적으로 사명임을.... 이에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하려 하심이라”고 몫을 발견케 하신다. 거듭난 자들은 주의 영이 있기에 주의 뜻과 요구하심을 믿음으로 순복할 수 있다. 주께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어주신 그 자취를 좇도록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곧 주께 받은 새 생명의 가치와 새 피조물의 몫은 주의 제자화이다. 이를 알고 선하신 뜻에 몫을 존재의 목적에 두는 새 가치관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사랑을 주께로부터 받았기에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구속함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이다. 모두가 주의 제자가 되게 하는 제자화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주를 믿고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그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심과 더불어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 죄라 하신 의미를 연계하여 본다. 또 어떻게 하여야 주의 일을 하오리이까? 묻는 물음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살피도록 이끄신다. 믿는 것이란 단순한 예수의 그리스되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다. 주께서 본을 보이신 그의 자취를 좇는 것까지이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이를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이 이를 확증해 준다. 곧 성경 기록 목적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다. 또 디모데후서 4장 17절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하심과 같은 사명 감당이다. 그러므로 거듭나게 하심의 선하신 목적대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이웃 사랑을 행하는 사명의 여정임을 알고 실현케 하신다. 복음을 전하여 전도로 승리하는 감사의 여정이 되도록 주님을 위해, 주님을 향해, 주님에 의한 순복의 그리스도 사신의 삶이다. 거듭나게 하시어 말씀으로 견인하시는 은혜 위에 은혜이다. 곧 주와 복음을 위하여 순복하는 삶이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일이며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감사와 감격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새기며..../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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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3]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주 예수그리스도가 베풀 세례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나온 것처럼 장차 아들도 사망을 이기고 나옴을 보여 주신다. 우리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심을 받았다. 죄의 종살이에서 주님의 승리로 자유함을 얻게 된 사실을 감사하게 하신다. 먼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감사는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감사로 끝나지 않는다. 실로 감사는 구원의 관문인 세례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다. 수많은 악의 세력에서 건지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모든 악으로부터 보전하여 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이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구속의 감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예표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를 원수 마귀 대적에게서 건지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주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되어 감사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시편 136편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라고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음의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신다. 우리도 전에는 악이요, 육이요, 죄인이요, 멸망할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악을 주님이 이기신 사실로 인해 이길 수 있음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감사는 오늘날 주님의 승리로 완전한 감사에 이르게 하셨다.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눅10:19)주심을 감사함으로 아들의 영으로 충만케 하셨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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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2]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2)-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시136:6) 천지창조의 둘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그러나 이 땅은 죄가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에 노아를 통해 새로운 땅으로 조성되어진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땅에 대한 비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도래를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땅에 대한 감사를 배우게 하신다. 땅을 물 위에 펴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질 나라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권위가 충만한 땅에 대한 약속을 감사하기를 바라신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해로 낮을 주관하신 자에게’,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를 더욱 강조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주께서 빛으로,그의 몸된 교회로 큰 광명이 되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손과 팔로 인한 것임을 기억하게 하신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친히 구원하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어머니가 그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오직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낳으시고 돌보신다. 이에 대해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일이다. 그 일은 아들의 영으로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일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그의 인자한 사랑을 아는 아들을 통해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난 아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해 준다. 감사의 위치는 구원받은 자들로 아들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는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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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5] 그리스도인의 영성 -기억의 영성
-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레26:42.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을 기억하는 자들에게 약속을 성취하신다.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찬양해야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기백성과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26:45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 민15:39 해야한다.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심,시111:5은 하나님이 그 자녀와 언약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셔서 그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시111:4.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신7:19 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언약 곧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돌보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로 그의 심판아래 두셨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20:8는 명령은 순종의 여부를 알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으로 만족한 안식을 통해 육신의 일을 쉬고 성령안에서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인자하심(사랑)을 찬미하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알게하신다. 오늘날 주의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영원한 사랑을 기억하며 찬미 드리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멘 예배자를 찾으신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함이 우리의 삶이며 예배이다. 우리가 사망에서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 딤후2:8하는 일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23:42라는 강도의 고백 속에 주의 나라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약속한 나라를 구할 때 그 나라를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구제를 기억해 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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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⑨] 동행 속도
- 외국에서 서울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역동성이다. 그 느낌이 상쾌하다. 내 걸음도 빨라지고, 마음도 활발해 진다. 나보다 늦게 걷는 이들이 있으면, 추월도 한다. 아내와 함께 걸으면, 거의 매번 듣는 말이 ‘천천히 걸으라’는 것이다. 따라 걷기가 힘들단다. 그래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힘들다’고 말하면 속도를 조금 줄이게 된다. 2022년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국민생활체육조사’ 결과는 한국인의 보행 속도를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완보, 산보, 속보, 급보, 강보, 그리고, 경보이다. 이들 중에 급보부터 올림픽 종목에도 들어 있던 경보 수준까지의 세 단계는 일상적 보행 속도는 아니다.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시간당 4.8km 라고 한다. 노인의 평균 보행속도는 1분에 64m 로, 시속 3.8km 였다. 완보와 산보 사이에서 완보에 가까운 속도이다. 속보에 근접한 젊은이들의 속도에 비하면, 시간당 1km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호주, 나이지리아, 탄자니아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노인 6,472명을 비교한 결과, 가장 빠른 속도였다(The Journals of Gerontology, 2023.04.08, 분당서울대병원). 한국 국민 모두가 빠르게 걷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현상과도 비슷하다. 이전 세대에서 빠르게 달려 왔던 노년층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 세대와의 조화에 신경이 쓰이고 눈치도 보이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지금의 노인들이 젊은 시절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 만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낙심한다. 청년들과 노년들이 열심과 성취에 대해 비교 할 때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의 생물학 교수 카라 월 셰플러는 걷는 속도로 대인관계에 대한 문화적 영향을 실험했다. 시애틀과 우간다 중부의 무코노(Mukono)라는 타운의 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1,700명이상의 사람들이 걷는 시간을 재고, 분석하여, 2018년 9월 호 <PeerJ-Life and Environment>에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혼자 걸을 때의 속도는 우간다의 사람들이 시애틀 사람들의 걷는 속도보다 평균 11%가 빨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는 그 속도가 느려졌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동반했을 때의 속도는 혼자일 때보다 약 16%가 더 느렸다고 한다. (2018.10.02. 뉴욕타임스 특약-한국일보 기사 참조) 환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시애틀은 여유로운 도시였다. 나도 대학 시절을 보내고,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든 곳이다. 그런데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앞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시애틀의 주민들이 걷는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오히려 빨랐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와 걸을 때 빨랐고, 다른 남성보다 앞에 서면, 그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남녀 모두 아이들과 함께일 때도 속도가 빨랐다. 자녀를 안고 동행할 때의 보행 속도가 혼자 걸을 때보다 20% 빨랐다는 부분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셰플러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의 사정까지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사회의 대인 관계 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는 자료이다. 걷다가, 가끔 연상되는 말이 있다. ‘혼자 가려면 빨리 가고, 함께 가려면 천천히 가라.’ 빠른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인도의 격언이다. 우리 사회는 늘 앞에 가는 사람, 위에 있는 사람, 일등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 사는 사회는 뒤쳐진 이들을 기다려 줄 수 없고, 후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남들을 제치며 치열하게 얻어낸 내 승리의 보상을 가족 외의 남들에게 ‘준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불렸던 썬다 싱이 30살 때, 티베트의 눈 산을 넘게 되었다.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와 높이 쌓인 눈길을 걷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가파른 비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를 구조하여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동행하던 동료는 나도 힘들다며, 먼저 가 버렸다. 썬다 싱은 그 부상한 사람을 등에 업고 아주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어렵게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걷는 중에, 얼어 죽어서 쓰러져 있는, 앞서 먼저 떠났던 친구를 보게 되었다. 자신만의 체온으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 싱은 부상자를 업고 힘들게 걷는 동안, 더워진 체온 때문에 부상자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회도 잘 사는 자들의 힘과 젊은이들의 희망이 손을 맞잡아야 따뜻해 수 있다. 먼저 살면서 쌓은 것들을 나누는 자들과 뒤에서 뛰는 자들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회가 어두워진다. 지치도록 달려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청년들에게 그 연령대를 살면서 많은 것을 갖게 된 어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녀에게만 돈을 주면 자기들끼리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 사회에 빵을 나누면, 좋은 나라에서 그 후손들도 함께 잘 살게 된다. 먼저 얻은 부가 사회의 공존 자원으로 흘러야 한다. 그 격차가 줄어야, 서로의 손이 닿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진한 속도가 시속 2~3마일(4~4.8km) 정도였다고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는 답답한 속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대열에서 어떻게 남는 시간을 썼을까? 그들은 가끔 뒤돌아 보며, 뒤에 오는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부축하거나, 업기도 하고, 마차에 앉히느라 그 속도가 느려졌을 것이다. 노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청년들을 잠잠히 축복했을 것이다.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시지만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서, 그들과 함께 가시던 하나님도 그런 그들을 보시며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하여, 그 마음에 흐르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한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 한국이 함께 잘 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1:31, 29:5).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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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⑨] 동행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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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4]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4)-
-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크나큰 복음에 대한 것임을 시편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게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 대로 사는 길이 바로 성취된 복음 안에서 사는 길이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 생명이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말한다.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고 주님의 생명이 나로 천국생활을 구현하게 하실 것이다 이미 성취된 사실인 복음에 감사함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신다. 이로인해 우리의 마음은 생명수 샘물이 흘러나와 청결함을 얻게 된다. 마음이 청결함은 매우 중요하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감사가 우리로 풍성한 승리를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승리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을 때 만이 가능하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우리를 다음과 같이 부탁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주님의 간구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선지자의 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의 승리로 인해 믿을 수 있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왕으로부터 구원받은 시점에서 감사함이 종료되지 않는다. 애굽에서의 구원 이후에 오는 보호하심의 더 큰 구원의 섭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사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우리의 처지이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시136:23)고 하신 점이다. 우리는 육에 속한 비천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죄에 매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천한 자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돌보시사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셨다.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할 자는 바로 그의 자녀들 뿐이기 때문이다. 매일의 생활에 감사로 깨어있는 자가 그분의 자녀이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구속 함을 받은 그의 자녀들의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늘의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의무이며 성품이 되어야 한다. 감사를 배우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신다. 감사가 없는 삶은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된다. 감사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는 믿음의 역사를 소망할 뿐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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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4]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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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8회] 주님의 뜻을 위해 부르신 선한 목적
-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성화로 순복케 하시는 은혜, 감사와 감격의 여정 성경은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을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성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신다는 말씀에서 발견케 한다. 새 피조물의 존재 목적은 주와 복음을 위해 쓰시기 위함임을 찾는다. 주의 뜻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의 길로 인도이다. 죄인들이 복음을 듣고 돌이켜 예수를 창조주 구원 주로 믿어 새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선을 위함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들에게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구속사역에 순복케 함이다. 이는 주를 믿지 아니하여 거듭나지 못한 채 죄에 머물러 있는 죄인들을 주의 백성으로 회복하시어 주의 나라 확장이 주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몫에 참예이다.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육신이 이끄는대로 사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구속이다. 말씀으로 견인하시는 섭리의 화답이다.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도록 하는 몫이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죄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전도의 몫이 존재의 목적으로 사명임을.... 이에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하려 하심이라”고 몫을 발견케 하신다. 거듭난 자들은 주의 영이 있기에 주의 뜻과 요구하심을 믿음으로 순복할 수 있다. 주께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어주신 그 자취를 좇도록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곧 주께 받은 새 생명의 가치와 새 피조물의 몫은 주의 제자화이다. 이를 알고 선하신 뜻에 몫을 존재의 목적에 두는 새 가치관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사랑을 주께로부터 받았기에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구속함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이다. 모두가 주의 제자가 되게 하는 제자화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주를 믿고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그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심과 더불어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 죄라 하신 의미를 연계하여 본다. 또 어떻게 하여야 주의 일을 하오리이까? 묻는 물음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살피도록 이끄신다. 믿는 것이란 단순한 예수의 그리스되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다. 주께서 본을 보이신 그의 자취를 좇는 것까지이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이를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이 이를 확증해 준다. 곧 성경 기록 목적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다. 또 디모데후서 4장 17절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하심과 같은 사명 감당이다. 그러므로 거듭나게 하심의 선하신 목적대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이웃 사랑을 행하는 사명의 여정임을 알고 실현케 하신다. 복음을 전하여 전도로 승리하는 감사의 여정이 되도록 주님을 위해, 주님을 향해, 주님에 의한 순복의 그리스도 사신의 삶이다. 거듭나게 하시어 말씀으로 견인하시는 은혜 위에 은혜이다. 곧 주와 복음을 위하여 순복하는 삶이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일이며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감사와 감격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새기며..../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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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8회] 주님의 뜻을 위해 부르신 선한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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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3]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3)-
-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주 예수그리스도가 베풀 세례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나온 것처럼 장차 아들도 사망을 이기고 나옴을 보여 주신다. 우리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심을 받았다. 죄의 종살이에서 주님의 승리로 자유함을 얻게 된 사실을 감사하게 하신다. 먼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감사는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감사로 끝나지 않는다. 실로 감사는 구원의 관문인 세례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다. 수많은 악의 세력에서 건지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모든 악으로부터 보전하여 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이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구속의 감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예표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를 원수 마귀 대적에게서 건지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주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되어 감사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시편 136편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라고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음의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신다. 우리도 전에는 악이요, 육이요, 죄인이요, 멸망할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악을 주님이 이기신 사실로 인해 이길 수 있음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감사는 오늘날 주님의 승리로 완전한 감사에 이르게 하셨다.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눅10:19)주심을 감사함으로 아들의 영으로 충만케 하셨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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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3]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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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2]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2)-
-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시136:6) 천지창조의 둘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그러나 이 땅은 죄가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에 노아를 통해 새로운 땅으로 조성되어진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땅에 대한 비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도래를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땅에 대한 감사를 배우게 하신다. 땅을 물 위에 펴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질 나라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권위가 충만한 땅에 대한 약속을 감사하기를 바라신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해로 낮을 주관하신 자에게’,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를 더욱 강조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주께서 빛으로,그의 몸된 교회로 큰 광명이 되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손과 팔로 인한 것임을 기억하게 하신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친히 구원하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어머니가 그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오직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낳으시고 돌보신다. 이에 대해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일이다. 그 일은 아들의 영으로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일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그의 인자한 사랑을 아는 아들을 통해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난 아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해 준다. 감사의 위치는 구원받은 자들로 아들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는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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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2]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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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한국사회, 돌봄목회의 필요성
- “상담하면 좋아질 수 있나요?” 20대 중반의 한 자매가 센터에 와 울며 한 질문이다. 반팔 티셔츠가 무거워 보일 만큼 그녀의 팔은 얇았고, 얼굴은 창백했다. 3년 전 자살 시도를 했고 2년 전부터 강박과 우울로 약을 복용 중이라고 했다. 교회에 상담센터가 생겼으니 제발 한번 가보자는 엄마의 권유에 할 수 없이 방문한 상황이었다. 얼른 물 한 잔을 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자매는 컵에 손을 대기도 전에 울었다. 낯선 이를 마주하는 지금이 몹시도 긴장됐나 보다. 우는 자매 앞에 앉아 그저 한참을 머물며 바라보았더니 그녀는 내가 아닌 컵에 눈을 맞추며 물었다. “제가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마음이 저렸다. 꽃같이 예쁜 아이가 왜 저리도 슬픈 눈으로 살 수 있는지 물을까? “너에게 약을 줄 수는 없지만, 같이 아파해 줄 수는 있을 것 같아. 뭐가 힘든지 내게 말해줄 수 있어?” 그렇게 시작한 상담을 40회기 정도 진행했고 정기적인 만남도 이어가고 있다. 상담을 통해 20여개가 넘는 강박증상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그리도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 교회에 출석하며 예배드리는 자매를 볼 때면 ‘아, 살았다. 너도 가정도 교회도…. 우리 모두가 살았다’ 혼잣말을 하며 미소 짓게 된다. 모든 생명은 생존을 위해 싸운다. 환경을 변화시키든 나를 성장시키든 인류는 환경에 맞추어 생존해 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는 변화와 성장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자들로 가득차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낮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약 10년 동안 자살율이 100%이상 증가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며, 현재는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자살 공화국’이 되어버렸다. 며칠 전 보건복지부에서는 유의미한 통계 하나를 내놓았다. 지난 3년간(2020-2022) 팬데믹 질병 사망자 수(32,156명)보다 동일한 기간 자살 사망자 수(39,435명)가 더 많다는 보고이다. 이제 한국의 재난은 지진, 홍수, 질병이 아니라 ‘자살’이다. 10대부터 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며 원인은 ‘정신과적 질환’이라고 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동네 병원에서도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국가 지원으로 상담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이런 사회가 되었을까?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 하나는 내놓을 수 있다. 바로 ‘돌봄 목회’의 회복이다. 한 사람이 자살에 이르기까지 많게는 40번의 시도가 있다고 한다. 이 시도 중에 그 사람을 돌보는 따뜻한 손길을 한번이라도 만난다면, 희망을 선물하는 교회를 만난다면, 환경을 극복하는 생존자가 되지 않을까? 과거 한국교회가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사회복지사업으로 민중의 고통에 동참했다면, 이제는 우울, 불안, 죽음의 자리에 내몰린 이들을 돌봄으로 사회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함께 웃고 함께 울 자가 필요하다. 우울증 약을 처방할 수는 없지만 상담과 돌봄은 교회가 제공할 수 있다. 자살이라는 재난 속에서 생명 살림을 실천하기 위해 이제 교회가 돌봄으로 응답해야 할 때다. /목사·과천교회 시냇가 상담센터 총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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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한국사회, 돌봄목회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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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교실] 현대인의 발과 건강 (하)
- 발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는 잘못된 관습을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의 생활 때문에 우리나라 30대 이상 여성의 엄지발가락 외반증의 유병율이 70%에 이르고 있다. 10명중의 7명은 엄지발가락이 새끼발가락 쪽으로 기울어지는 변형을 가지고 있다. 옛날에는 버선발이라고 해서 버선을 오랫동안 신은 사람에서 볼 수 있었고, 지금은 하이힐 때문에 많아졌다. 둘째로, 어쩔 수 없이 하이힐을 신은 경우에는 자주 구두를 벗고 발가락운동을 해야 한다. 발가락을 구부렸다 위로 젖혔다 하는 운동도 좋지만, 발가락을 벌리는 운동을 자주해야 한다. 특히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과 멀어지도록 벌려야 한다. 이것이 잘 안되는 사람은 이미 엄지발가락외반증이 시작된 것으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엄지발가락이 잘 안 벌어진다고 해서 손가락을 이용해서 벌려서는 안된다. 손가락으로 벌리면 오히려 엄지발가락외반증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보조기를 이용해서 꾸준히 벌려야 한다. 발바닥을 주물러서 발근육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도 발의 건강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다. 셋째로, 가능하면 운동화를 신거나 앞이 둥근 구두를 신는 것이다. 구두를 신었을 때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발등에 끈을 묶는 형태의 신발이 발에 좋고, 신을 벗고 신을 때에는 끈을 조였다 풀었다 해야 한다. 끈을 풀지 않고 신을 신고 벗고 하는 경우에 신이 발에 착 달라붙지 못하고 헐거워지게 되고, 신발이 상대적으로 무겁게 느껴지게 된다. 발뒤꿈치가 꽉 조여지지 않아서 신발이 크게 느껴진다. 이런 분들은 자주 발등이 아프다. 병원에 찾아가도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발목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발목을 위로 젖히는 근육에 무리가 가서 이런 증상들이 생긴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가벼운 신발이지만 장시간 헐겁게 신게 되면, 발목을 위로 젖히는 근육에 무리가 가고, 따라서 발등이 아픈 증상이 생기게 된다. 이런 분들은 무릎아래 정강이뼈 바깥 쪽에 있는 근육들을 자주 주물러서 근육을 풀어주어야 한다. 넷째로,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길이도 적당하고, 볼도 알맞는 신을 신어야 한다. 신발바닥에는 허리쇠가 들어가 있어서 신발 형태가 틀어지는 것을 막고, 일정한 부위에서 바닥이 구부러지게 한다. 걸어갈 때 엄지발가락 뿌리관절(중족지절관절)과 신발바닥의 구부러지는 부위가 일치해야 하는데, 신발이 발길이보다 길어서 이것이 일치하지 않으면 엄지발가락 중간에 힘이 실리게 되고, 이곳에 굳은살이 생기게 된다. 걸을 때마다 엄지발가락 끝에 힘을 주게 되므로 엄지발가락 뿌리관절은 점점 굳어지게 되고 위로 젖히면 통증이 생기는 ‘엄지발가락 강직증’이라는 병이 생길 수 있다. 길이는 발가락의 제일 긴 길이보다 1센티미터정도는 신발이 길어야 한다. 길이와 볼에 꼭 신경을 써서 신발을 골라야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신발 깔창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발의 뼈가 둥글게 아치형태를 이루기 때문에 사람의 발바닥은 올록볼록 굴곡이 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발 바닥은 편평하다. 구두바닥을 자신의 발바닥 모양처럼 굴곡지게 만들면 체중이 고르게 분산되기 때문에 발이 굉장히 편해진다. 특히 오래 걸어다니는 사람이나 오래 서있는 사람의 발은 발의 종아치나 횡아치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발이 변형된 다음에 원상태로 회복시켜 놓는 것은 아주 힘들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좋아지기 때문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라’라는 말처럼 발이 정상처럼 보일 때, 올바른 신발을 신는다면 발이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예쁘고 건강한 발을 간직할 수 있다. /한양대 류마티스병원 관절재활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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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교실] 현대인의 발과 건강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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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⓵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1)-
- 살고자 하는 자의 인격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는 말씀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는 본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사의 생명은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게 된다. 감사는 언제 어떻게하는 것인가? 라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원자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를 시편 136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이유가 26번이나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심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사랑에 오직 감사함으로 화답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측량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은 오직 아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감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감사의 친밀하고도 완전함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한 당연한 요구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감사는 예수그리스도의 또 다른 몸인 교회에 부여된 사명으로 이어진다. 시편에서의 감사의 내용은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이다. 세상을 발아래 두신 주님의 승리 안에서 주어지는 감사이다. 이러한 감사는 단순히 우리가 접할 수 없는 감사의 세계로 인도한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한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가능하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고 하신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가능하다. 만물 위에 뛰어나신 주님께 대한 감사이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심에’,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아들이신 주께서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 있는 감사이다. 이러한 깊은 감사를 우리에게도 명령하셨다. 이는 우리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찬미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의 인격으로 완성하기 위함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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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⓵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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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창조의 계절과 생명의 물
-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했던' 창조의 때를 떠올린다. 그때 그 기운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바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느낀다. 그런데 자꾸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들녘의 모든 풀이 말라 죽어야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죄악 때문에, 짐승과 새도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내려다보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렘12:4)”는 안타까움에 내밷는 탄식이 터져나온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지 12년이 지났지만, 우리 일상은 여전히 핵발전으로 인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발생한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그 안전성을 보증했다고 말하는데, IAEA는 핵 산업의 촉진과 확산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구다. 태평양에 새로운 방사능 물질을 풀어놓는 것이 지금도 바다로 흘러들고 있는 방사능 오염수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무겁다. 후쿠시마 어민들과 일본 전국어민연합도 방류를 반대했다. 방류는 결국 일본은 물론이고 주변국 시민들의 건강, 바다 생태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오염수 투기에서 얻을 이익은 전혀 없다. 태평양 주변국들의 연합인 태평양도서국포럼(PIF)의 전문가 패널들의 질문에, IAEA도 정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며칠 전 일본은 핵 오염수의 방류를 시작했다. 사고가 아닌 국가라는 이름으로 합의 하에 버렸다.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앞으로 30년 동안 방류하면서 후손과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떠넘길 수 있을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마음이 추스려질지 가늠이 안된다. 핵, 방사능 오염수는 눈을 뜨고 바다를 봐도 바다로 흘러드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육안으로 볼 수는 없을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바다 생물들과 그에 기대어 사는 이들과 어떻게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누구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바다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우리 삶은 물론이거니와 지구 이야기는 이어질 수 없다. 잠시 멈추어 마음을 바다로 향해보자.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방류를 멈출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특별히 지금 우리는 창조의 계절을 살고 있다. 호주의 노먼 하벨이 구상한 후로 미국의 데이비드 로드와 H. 폴 샌트마이어가 협력하여 더욱 발전시킨 절기다. 보통 교회력은 예수님의 생애를 따르기에 창조주 하나님께 집중할 특정한 시기가 없지만, 기후위기 시대이니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그리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의 시선을 두어야 한다. 몇 해 전부터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은 이 시기에 하나님의 창조를 묵상하는 ‘풀꽃과 나무, 일상 속 물건’ 등을 묵상하게 하는 40-50편씩 편지를 나눴다. 올해는 ‘화성으로 간 책방’과 함께 세계교회가 한 마음으로 ‘생명의 물’을 묵상하면서 묵상꾸러미와 함께 13주간의 묵상레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문의 [ecochrist@hanmail.net](mailto:ecochrist@hanmail.net)). 주님이 오시는 대림절이 오기 전까지, 물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톺아보며, 온 천지를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을 되새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지어다(암 5:24)" 우리 모두는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강에 합류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를 ‘마신’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시냇물이 되어야 한다. 기후 불의와 생물 다양성 파괴에 취약한 공동체를 위해 생태 정의를 실천할 때이다./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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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창조의 계절과 생명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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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5회] 주의 뜻과 바람이 지혜로 미션 되어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주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의 말씀임을 성경은 입증하여 확증케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하신 말씀에서 적용의 지혜를 얻는다. 주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셨다. 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셨으며 요한일서2장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는 말씀에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을 발견한다. 그러기에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고 하시어 새 패러다임으로 사랑이란 개념을 아가페 사랑으로 연계하여 실행케 하신다. 주의 자취를 좇는 삶이다. 새 생명을 주는 사랑이 영원한 사람의 본분이며 주의 뜻임을 확증케 한다. 갈라디아서 2장19~20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심과 같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신앙의 지침이다. 곧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 복음으로 이웃을 사랑하여 살리는 주 경외함에 두는 삶임을 확증해 준다. 새 피조물된 종들로 거듭났기에 자신을 살리신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함을 원칙으로 삼는 주종의 관계 성립이다. 곧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속사역에 참예이다. 이럴 때 주의 거룩한 자녀들이 탄생하여 주의 나라가 확장 되어지기에 주의 자녀로 회복은 주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을 좇아 사는 몫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이 거듭난 자들의 일용할 양식으로써 산제물로 드려져 많은 과실을 맺게 되는 착한 행실이 된다. 더불어 주님의 기쁨이 충만케 되어 자신의 기쁨 또한 충만케 되는 행복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이다. 이를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시며 그 결과 희락을 누릴 수 있는 일임을 확증해 주었다. 야고보서2장22절 “행함이 믿음과 함께 일하고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느니라”하신 말씀에 화답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셨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시어 그 안에 담긴 의도를 알고 좇게 하셨음을 확증하는 바이다. 새 피조물들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살리신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함을 확증케 한다. 이와같이 주종의 관계를 성립한 자들이 종의 몫을 바로 하여 많은 이들이 의에 이를 수 있도록 사람의 본분을 하며 지키는 일이다. 곧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일임을 확증해 준다. 즉 사람 살리는 일을 하여 주의 제자화로 주를 사랑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드려지는 삶을 일컫는다. 아무리 땅에서 많은 자녀를 낳고 장수하였다 할지라도 전도서 6장3절은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라고 하시어 무엇이 진정한 행복의 양식과 비결인지 지혜로 확증해 준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알고 종으로 사는 몫의 주께서 약속하신 행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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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5회] 주의 뜻과 바람이 지혜로 미션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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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4회] 여호와 집에서 영원한 생명의 행복
-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후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주님과의 대면을 기대 성경 말씀은 참 행복을 알게 하시어 말씀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신다.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 안에 거하는 일이며 계명을 지키는 일로써 주를 사랑하는 일과 연계이다. 이를 위해 나를 따르려면 각기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신 말씀에 순복을 해야 한다. 누구든지 주 안에 종의 몫을 배워야 함을 발견케 하여 지혜를 얻게 하심이다. 종의 몫의 실현은 주인을 기쁘시게 섬기는 자로 지체들을 세울 수 있는 비결이다. 주님은 창조주로서 믿고 좇는 자에게 죄사함을 주시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영혼 구원자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심과 같다. 곧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신 언약대로 이루어짐이다. 이를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해석 적용해야 함을 찾게 하시어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영혼 구원으로 적용을 한다. 영생에 소망을 가진 자들은 위에 것에 목적을 두고 사는 자들이다. 영에 속한 자로서 주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소원하며 몫을 하는 주의 종들이다. 곧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구속사역에 참예하여 살리는 몫에 주를 경외하는 자로 사는 자이다. 복음을 알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덕을 끼치며 남의 유익을 위하여 주께 하듯 섬기는 자라 할 수 있다. 곧 골로새서 1장9~10절 “이로써 ~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는 기도를 드리며 좇는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는 연계된 공동체를 확장케 하는 사랑을 확증하는 바이다. 다시말해서 주의 뜻을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하신 말씀을 좇아 복음으로 살리는 주 말씀 안에 순복을 확증케 한다. 주께서 강건케 하심은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하심의 몫이다. 또한 목적임을 확증한다. 곧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는 말씀에 아멘 한다.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이 몫에 드려지는 지체들임을 확증해 준다. 그러므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하심을 확증하는 바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지체로 주의 말씀에 순복하는 자가 되어 생명에 이르게 하는 여호와 경외함을 하는 제자로 확증이다. 행복의 결국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자가 받을 생명의 면류관 주실 주님과의 대면이다. ‘주님을 생각만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죽음 앞에서도 설렘을 갖게 한다. 부르심의 선하신 뜻대로 땅에서도 참 행복을 알고 누리게 하신 주님을 찬송하는 나그네 여정이다. 기뻐하며 천국에 소망을 갖고 산 믿음의 결국 이긴 자의 영혼이 되어 사람의 본분을 하고 주께 돌아감을 행복의 참 의미로 누리고 이를 경험케 하신다. 주를 뵐 수 있는 천국에 가는 여정이기에 행복한 이 땅의 마침이 설렘으로 벅찬 시간임을 확증케 된다./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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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4회] 여호와 집에서 영원한 생명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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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은 작가의 「the unexpected beauty」
- 최 은 작가의 「the unexpected beauty」는 십자가 형태의 공간 속에 생동하는 꽃을 표현하고 있는데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있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인한 기쁨을 나타내는 듯 하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의 길이 어디있는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아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가를 연구하고 공부를 해서 그 길을 찾게 된 것이 아니라 전 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9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고 하셨다.(마22:14) 모든 사람이 청함 받았을 때에 회개하여 주님을 온전히 믿고 변화를 받아 갑자기 마음속에 기쁨의 꽃이 피어나기를 작가는 염원하고 있다/정재규(미술평론가 · 대석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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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은 작가의 「the unexpected 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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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복음
- 구약은 온전히 하나님과 유대민족의 역사 이야기이고, 하나님께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함이니라”(사43:21)하시고 그들에게 계명과 말씀을 맡겼으며 그들의 역사 속에 직접 간섭하셨다. 신약의 복음, 기쁜 소식은 메시야의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상의 죄를 책임져 주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며, 예수님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3:16) 누구든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도 초기 기독교에서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리도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그의 복음서에 하나의 숨겨놓은 비밀이 있다고 말한다. 이 비밀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그리스도의 비밀인데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며 내게 주신 하나님 은혜의 선물로 내가 그 일꾼이 되었다고 기록한다.(엡3:3~13)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롬11:25~26, 롬11:11, 행28:28)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으니,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8~9)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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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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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⑦] 뒷골목의 전도사
- 깜깜한 새벽에 동네가 요란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섰던 청년 전도사가 차에 치어 숨졌단다. 그러자, 그 근방에서 호객하며 살아가는 한 젊은 여인이 달려 나와 그 남자를 부둥켜 안고 펑펑 운다. 그 전도사는 그 여자의 방에서 함께 지내던 관계이다. 그 전도사는 며칠 전에 그 여인을 찾아 와 “소년 시절에 잘못 했다”하며 용서를 빌고, 실컷 두들겨 맞았었다… 김성일의 단편소설 <뒷골목의 전도사>를 거꾸로 정리한 내용이다. 만약 이런 사건이 오늘 일어 났다면, 미디어는 어떤 부분을 부각하여, 어떻게 기사화 했을까? 그 기사를 읽은 성도들과 시민들의 관심은 무엇일까? 전도사와 그 여인? 그 관계? 그들의 속사정? 그 얽힌 내용? 그 전도사가 소속한 교단의 어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고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분이었다. 그 분이 어느 해 연초에 윤락가를 찾아가, 그곳 여인들과 화투 놀이를 하였다는 기사가 있었다. 화기애애한 사진과 함께 인간미 있는 분으로 평가하여 사람들이 흐뭇해 한 내용이었다. 아마 그 중에 어떤 여인은 즐거움과 함께 눈물이 났을 것 같다. 나도 그 신문 기사를 오려 내 노트에 붙여 보관하였는데, 얼마 전에 그 사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저 사진 속에 누구에게 주목을 하셨을까?’ 나는 얼마 전 이주민들의 예배를 위해 교회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왜 우리는 저 뒷골목, 저 아래 동네로 쉽게 들어가지 못할까?’, ‘성스러운 곳에 가까이 오지 못한 그들에게 그러면 누가 갈까?’ 평지에 안전하게 머무르며 아래로 내려가지 못한 이들, 그리고 죄인들을 만난다고 예수님을 불경하다고 했던 이들…. 나도 그 부류의 범주를 벗어나기를 어려워했었다. 성경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 앞에 끌어다 놓고 참소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종교인들은 예수에게 의도적으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함께 했던 사람들도 참소자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죄인의 곁에 함께 서있을 수 있을까?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는 길은 일반적 사역으로 안 된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불경하다’고 정죄할 구실을 많이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을 사흘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동할 수 있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은 “사람들아 자신들을 보라”하며, 그 죄 많은 여인을 구하셨다. 구원에 관심 없는 종교인들은 모래를 씹으며 갔을 것이고, 군중들은 ‘아니면 말고’하며 흩어졌다. 주님은 어제도, 오늘도, 양들을 찾아 뒷골목으로, 아래로 내려 가셨다. 나도 그래서 주님을 만났다. 나를 부르셨다. ‘저 건너편에도 가자’고. “우리가 저 뒷골목과 저 아래로 내려가도 괜찮을까?” “예수님만 그럴 수 있지...” 친구 목사의 답이다. 그렇다면, 사역은 교회 안에서 안전하게... 몸은 여기에 마음만은 저 건너편에... 아, 저 동네에도 불이 켜져 있다! 저 뒷골목과 저 아래에도...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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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⑦] 뒷골목의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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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뇌] 성 호르몬과 정신건강(3)
- 뇌 크기와 피질 두께, 수용기 분포 등의 차이로 인해서 남자와 여자의 전두엽은 아주 다르게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좌측 전두엽은 우측 전두엽과 달리 기능하며, 이런 차이는 여자보다 남자에게서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여자의 경우 뇌량이 더 두꺼워 두 반구간의 기능이 더 통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들의 뇌는 대부분 반구간의 교류가 우수한 반면, 남자들의 뇌는 대부분 반 구내의 교류가 우수하다. 그런가 하면 인지수행에 대한 검사에서는 언어 과제일 경우에는 여자가 더 우수한 반면, 시공간 과제일 경우에는 남자가 더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외 남녀 간의 행동과 뇌의 차이는 유전과 환경 요인의 산물이다. 남녀 각 성의 유전적 특성은 전혀 다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유전자는 생물학적 과정을 시작하고 점검할 뿐만 아니라 뇌구조의 해부학적 성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뇌 부위로는 기억, 사회적 행동, 정서처리 및 정서반응과 관련된 부위를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자와 여자들이 보이는 행동이나 기능의 차이는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전해 내려온 과거 생활양식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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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뇌] 성 호르몬과 정신건강(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