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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성구 칼럼
      1960년대 초였다. 필자가 신학대학원 시절,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영어 한 문장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Don’t beat around bush”란 말이었다. 그 뜻은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마라!’는 것이다. 즉 <핵심>을 말하라는 뜻이다. 이런 문장이 생기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잔디 가운데 방귀벌레 한 마리가 있는 것을 쫓아내기 위해서 주인이 막대기를 가지고 잔디 주변을 계속 두들기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이 말하기를 “Don’t beat around bush”라고 했다. 즉 직접 그 방귀벌레를 잡아서 처리하면 될 것을 그 주변을 자꾸 두들긴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핵심>이다. 우선 국회 청문회만 보더라도, <핵심>은 빠지고 불필요하고 시시콜콜한 언설로 상대에게 무안을 주고, 기를 꺾고, 말문을 막고, 말 같지도 않는 말을 하면서 공격한다. 그래서 상대가 당황하면 마치 대단한 것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을 거의 매일 보고 있다. 상대 당이나 국무위원들을 말로써 제압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약점을 조사해서 언성을 높이지만, 정작 내용도 알맹이도 없는, 즉 <핵심>은 말하지 못하고 시간 때우기 일쑤다. 언론들도 야당과 한통속이 되어 국익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것을 사건화 하고 기사화 해서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을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언론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의 약점 캐기에 올인하는 듯하다. 세상에 중립이란 없다. 모두가 자기의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으며, 그것을 요즘은 SNS에 얼마나 동원되는가를 선악의 표준으로 삼는 모양이다.   이태원 압사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나고 있고, 추모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는데 정작 문제의 핵심은 없다. 각 종교단체에서는 아까운 목숨을 위해서 애도하는 것은 많지만, 사건의 원인 규명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어떤 이는 관계 기관장을 처벌하라는 사람도 있고, 야당에서는 이 사건의 원인을 대통령에게 덮어씌워 탄핵에 불을 지피려고 하고 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그 숨쉴 수도 없는 밀집 공간에 무슨 기름을 뿌렸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증인들은 ‘마약을 섞은 알사탕을 나누어 주어서 의도적으로 살해 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이태원 압사 사고는 누군가의 기획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설도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철저히 수사를 통해서 아까운 1020세대들의 죽음과 유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야 할 것이다. 만약 덮어놓고 정치 공세를 한다거나, 탄핵을 들먹인다면 사건의 <핵심>은 오간 대 없고, 혼란의 변죽만 울리는 꼴이 된다.   제도권 언론에서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 이번 사건에서 언론들은 <핵심>은 빼놓고, 변죽만 울리고, 정작 경찰서장의 이름과 용산 경찰서의 이름마저 빠져있다. 그러니 참으로 의도적인 언론 플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언론은 상인들의 장사속은 말도 안하고 있고, 마약 사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있다. 또 언론이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고, 행안장관과 대통령 탄핵만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사건의 핵심은 빼버리고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건의 본질은 없어지고 야당과 언론의 충동질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MBC는 <국가가 왜 있나?>라고 부추기고 선동함으로써 대통령을 가해자로 프레임을 만들어 과거 촛불시위나 세월호를 재현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다. 언론이 조명해야 할 것은 안하고 오히려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언론은 국가의 재난을 중립적으로 보도해야 하는데, 지금의 언론은 좌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할로윈데이를 부추긴 것도 언론이고, 심지어 몇 주 전 어떤 방송사는 방송내용은 좋았으나, 성조기를 불태우는 배경을 끝까지 방영하고 있었고, 금 년 초 음악회의 배경에는 인공기와 비슷한 영상을 띄워서 시청자를 오도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기자가 되려면 먼저 좌파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설득력이 있다.   사건, 사고는 언제라도 날 수 있다. 9·11테러 사건 때 나는 캐나다와 미국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끔찍한 장면을 T.V로 보았다. 그때 그 사고로 죽은 사람은 3000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 시민들은 아무도 부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양키스타디움에 모여 기도하는 대통령에게 힘을 모았고, 국가적 재난 중에도 대통령을 위로함으로써, 미국의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역시 미국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북한과 대치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정권탈취와 혁명으로 나라를 뒤집어엎으려는 자(者)들과 언론의 행태는, 사건의 <핵심>을 벗어나고 본질을 벗어난 비애국적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메시지도 <핵심>보다는, 변죽만 자꾸 두들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역사적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대로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목회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고, 어떻게 하면 물질의 축복을 받는지, 그리고 신앙보다는 삶의 윤리를 설교한다. 사실 이런 종류의 설교를 윤리적 설교(Ethical Preaching) 또는 도덕적 설교(Moralistic Preaching)라고 한다.   이 칼럼의 <핵심>은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종교이든 간에 핵심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핵심은 곧 <본질>이요, <노른자>이고 <뼈대>이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 <핵심>을 놓쳐버리면 모든 것이 허공이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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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행복신앙세미나 21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www.bog.or.kr) 불행의 생각과 행복의 시각     “그러나 오노다는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른 채 밀림에서 전쟁을 벌였다. 필리핀 정부가 ‘전쟁은 끝났다’며 전단을 뿌리고 방송을 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미군의 유인 작전으로 오인한 것이다. 이번엔 일본 정부가 나섰다. 패잔병들의 가족 사진을 전단으로 만들어 공중에서 살포하면서 가족 품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시빅뉴스, 2018.2.12)   위 기사는,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었던 일본의 패전을 알지 못한 채 필리핀 정글에서 30여 년간 숨어 지낸 일본군 패잔병인 오노다 히로 소위에 대한 내용입니다. 전쟁을 빨리 종결 짓기 위해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 두 도시를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러자 8월 15일 낮 12시에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함으로 전쟁이 끝납니다.   그로 인해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도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일본군들은 점령지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기사처럼,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했던 패잔병들은 괌이나 동남아시아 정글 곳곳에 숨어 지내며 수십 년 동안 헛된 인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실제는 전쟁이 끝났지만 그들의 생각 속에서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현지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전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하나님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불행의 근원인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킴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하신 후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불신의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믿지 않고 자신에게 여전히 죄가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죄 사함의 행복을 누릴 수 없기에 성경은“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사 55:7)고 거듭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가 아닌, 불신을 품은 불행의 생각이 사람들을 여전히 불의한 자로 불행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마구 풀어놓은 팔레트와 같았고, 그 주위에는 창백한 푸른 후광이 둘러 있었다. 이 띠는 점차 어두워졌다가 다시 청록색 푸른색 보라색으로 변했다.’ 1961년 4월 12일 오전. 소련 우주선 보스토크 1호기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며 유리 가가린이 한 말이다. 훗날 이 말은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로 요약돼 시대의 명언으로 기록됐다.”(경기일보, 2013.1.31)   위의 기사처럼,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은 아름다운 지구의 전체 모습을 인류 최초로 보았습니다. 물론,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둥글고 푸르른 지구의 전체 모양을 알고 있지만,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전체 모습이 담긴 사진이 나오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구에서 평생 살았어도 지구를 몰랐습니다.   그들이 알았던 지구는 부분적인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푸르른 둥근 모양이라는 사실이 진리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인류의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 역시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볼 수 있다면, 완전한 속죄를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시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범한 여인의 모습만 보고 있지, 그 여인의 죄를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는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인이 죄를 범했지만, 그 죄의 값을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무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요 8:11)라고 한 것입니다. ‘정죄 받지 않는 여인’ 즉 ‘무죄한 여인’이 그 여인의 참 모습으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라! 세상 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 죄를 담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시각을 가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은 물론, 인류를 볼 때 비로소 자신과 인류의 참 모습을 보는 행복의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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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0
  • [‘그 사랑’ 율법의 요구 5화]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 하나님의 의
      주께서 온 세상 죄를 위해 대속제물 되어 예언대로 성취하시는 새 언약   구약 성경은 절대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이루어질 일들을 신약에 연계시켜 예수의 구원자 되심과 앞으로 이루실 일에 대한 확증의 말씀이다. 곧 구약에 예언해 놓으시고 신약에 성취해 가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다. 그러기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하신 일을 주께서 온전케 하시어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찾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구원주의 사역이다. 복음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영원한 유업을 얻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히브리서10장9절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는 오심의 이유와 하실 일을 선포하셨다. 그리스도의 출현은 새 언약의 도래이다. 첫 것은 유대인만이 죄사함을 입을 수 있었던 구약의 제사제도이다. 이를 폐하시고 둘째 것 곧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받는 죄사함의 시작이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함이다. 주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온갖 제사제도에 필요한 물품들을 뒤집어 엎으시고 내쫓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이다. 이 사건이 연계된 첫 것의 폐함에 메시지이다. 둘째 것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심과 같이 주로 인한 영혼 구원이다. 곧 이사야53장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라 하심의 성취로 열리는 영혼구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원죄를 입고 영적 죄인들로 태어나기에 이들을 위한 대속제물로써 이루실 구속사역을 확증해 주심이다. 이에 대한 로마서3장 대략의 증거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곧 이 때에 ~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는 증거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함임을 확증케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죄를 입고 태어난 죄인들임을 깨닫게 한다. 또 이들을 살리셔서 생명주시기 위한 주의 십자가 사역임을 확증해 준다. 주께서 새 언약을 예언대로 이루어가심이다. 곧 영혼구원자로 오시어 좇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시는 주님의 구속 섭리이다.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예언대로 구속사역에 관한 둘째 것의 세움임을 확증해 준다. 즉 주의 십자가 사역을 통한 새 생명을 얻게 함이 아버지의 명령으로 경륜을 이루어가는 주의 일이다. 또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 없이 새 언약대로 성취해 가시는 구속임을 확증케 한다. 오직 예수로.../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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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9
  • 태초에… (창1:1, 요1:1, 엡1:4)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고 창세기는 시작한다. 어느 날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 “네 아비 집을 떠나라 너로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같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란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됐다. 범죄한 아담을 찾아 오셨고 많은 민족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며, 그중에서도 선지자와 제사장에게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속에 직접 주관하신 성부 하나님의 시대였다.   신약의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고 시작한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을 당시 갈릴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직접 눈으로 뵐수 있었고 만날수 있었다. 우리를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책임, 무한사랑이 되셔서 인류의 대속을 이루신 성자 하나님의 세계였다.   바울은 “창세 전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엡1:4~5)고 기록한다. 우리를 택하셔서 아들 삼아주신 성령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시작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1:26) 태초의 창조계획 속에 우리는 이미 예정됐으며 우리는 존재했다.   구약은 성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사람하고만 말씀하셨다. 마치 예전에 전화하려면 우체국에 가서 교환원에게 신청하고 기다려야 통화를 할 수 있었음과 같다. 신약은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믿음이라는 유선 전화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통화 할 수 있다. 오순절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오신 후, 우리는 이제 언제 어디서나 성삼위 하나님께 통화할 수 있는 각자의 핸드폰을 갖고 우리의 모든 것을 직접 아뢸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을 닮았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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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8
  • [향유옥합]종교개혁자 카타리나 폰 짐머른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에서 도보로 멀지 않은 곳에 마크 샤갈의 스테인드글래스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더 잘 알려진 프라우뮌스터 교회가 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훌드리히 츠빙글리가 시무했던 그로스 뮌스터와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베네딕트회에 속하여 있었던 프라우 뮌스터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여성 수녀원장 카타리나 폰 짐머(Katharina von Zimmern 1478-1547)이 시무했던 곳이다.    그녀는 츠빙글리를 도와 종교개혁이 취리히 시 안에서 가능하게 하였으며, 도시 정부와 교회가 협력하여 사회와 교회의 개혁을 이루어 가도록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이었다. 카타리나 폰 짐머른은 중세기 당시에 많은 자산을 소유했던 프라우 뮌스터 수녀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사회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1519년 1월 1일 그로스뮌스터에서 담임목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종교개혁에 합류했던 카타리나는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1524년 12월 7일에 프라우 뮌스터 수녀원을 취리히 시에 공식적으로 기증하였다. 이렇게 해서 취리히 시는 공적 자산을 만들어서 사회적 약자를 돕는 구체적 체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결단으로 인하여 취리히와 그 근방의 여러 수도원과 수녀원들이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에 동참하게 하였고 츠빙글리의 개혁 사상이 민중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여 주었다. 이러한 여성 종교개혁자의 의지와 당찬 행보가 없었더라면 취리히 안에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러한 유형의 여성들의 활약은 종교개혁의 역사를 활기차게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한국 개신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의 근본 바탕에는 이러한 여성들의 지혜와 용기가 스며들어 있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이러한 시각은 숫자적으로 부족한 한국 교회 여성 리더십을 활성화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주춧돌이 되어 줄 수 있을 듯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교회 구성원의 성비와 목회자, 결정권을 가진 당회조직에서의 성비가 심한 불균형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안수에 대한 오래된 논쟁에서도 실질적이며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교단도 많이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여성안수가 허용된 교단이라고 할지라도 할당제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가시적이며 구조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청년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노령화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있으나, 청년들이 그들의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장치와 구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물론 여성이나 청년이 결정권을 갖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변화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별, 연령별 장벽을 너머 자격과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권리와 책임, 대표성을 부여함으로써 다양성을 풍성하게 하고 정체된 한국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연세대 교목실장·연합신대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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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7
  • 사랑과 정의, 그 변증법적 통일의 명제(6) -이청준의
      베드로가 소록도 나환자병원의 지도자 조백헌 원장의 실제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이하에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조백헌은 그 병원의 원장이면서 그 원생 집단을 통치하는 지배자 상을 강하게 풍기는 인물이다. 의무(醫務) 장교(현역 대령) 출신으로서 병원의 원생들을 치료·위무하는, 의사로서의 본질적인 업무에만 정열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인데, 그는 그 의료 업무 외에도 병원 원생들에게 병원장으로서의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통치자 상마저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낙원을 건설하겠다는 미명 하에 끊임없이 원생들을 간척지 개발(득량만 매립) 공사에 강제 동원하는 데에서 그 면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결국 그의 막강한 행동반경이 원생들에게는 하나의 권력욕(‘동상에의 욕망’)으로 비침으로써 이를 막으려는 내부 세력, 곧 황희백 장로 등의 무리가 그를 철저히 견제하게 되는 것이다. 황희백 장로들의 저항에 부딪친 조백헌 원장은 막바지에 그 병원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고야 만다.   조백헌의 모델이랄 수 있는 베드로, 그는 예수 부활 이후 과거의 여러 잘못들을 뉘우치고, 대오각성을 하여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세우고 열성적인 교역(敎役)에 종사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점차 커 나가면서 베드로의 위상도 그만큼 격상하게 되지만, 그러나 공동체의 성장에 따른 내부의 문제, 곧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내분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히브리파는 히브리어(또는 아람어)를 쓰는 유다 본토박이들로서 베드로가 그 수장이었으며, 헬라파는 헬라(로마)지역에서 헬라어를 쓰고 헬라문화에 익숙해져 살다가 유다 본국으로 되돌아온 디아스포라 출신들로서 스데반이 그 대표였다.   차별대우에 대한 헬라파 여신도들의 불만 토로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교회 개혁의 열망을 품기 시작한 스데반은 베드로의 자기(히브리파) 옹호적 교권주의자 상에 저항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스데반 집사들의 개혁의지를 수용하지 못하고 내부분열 상을 노정하던 초대교회는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아 결국 모두 흩어져버리고 만 것이다(행8:2). 그렇게 무너지게 되는 데에 그 집단의 수장 베드로의 책임이 그만큼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以上) 베드로와 조백헌 사례의 상호 비교를 통해 우리는 양자의 유사성을 확실히 지적해 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결국 신약성서 속의 인물 베드로가 현세 조백헌 인물상의 한 모델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다음의 문제가 더 추가되지 않고서는 이 모델 설은 다소 헐거운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 점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이 말부터 해 놓고 나아가고 싶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전반부 1장~12장)은 대체로 베드로 개인의 신앙 성장을 그린 기독교 전기문학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실수를 지속적으로 범해 가면서도 마지막에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베드로의 인격 변화와 신앙 성장이 압도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 사도행전의 전반부, 곧 베드로의 주된 활동 무대라고 하겠다. 자신은 잘 한다고 하면서도 스데반과의 갈등 관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결국은 교회공동체의 분열과 이산(離散)마저 겪지 않을 수 없게 된 베드로였지만, 그러나 네 발 가진 부정한 짐승의 환상을 본 후 이방인 고넬료 백부장에게 세례를 베풀고 나서, 베드로는 무섭게 변화된 이방인 선교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바로 베드로의 이런 변화된 인물상이 하나의 모델이 되어, 조백헌 원장의 소록도 회귀 이후의 인격변화와 성장으로써 문학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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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마리아를 바꾼 부활 예수
          요한복음 20장 1절의 그 주의 첫날은 유월절 지난 후 안식일이 지난 첫날이다. 이는 곧 초실절 명절이다. 이 초실절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예수님이 묻힌 무덤이 빈 무덤이 된 것이다. 이를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보고 놀랐다. 베드로와 요한도 급히 와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님의 수의인 세마포만 잘 개켜있고 빈 무덤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임을 믿지 않았다.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에서 울면서 무덤 안을 본다. 그때 천사가 “여인아 어찌하여 우느냐?” 고 묻는다. 왜요? 예수그리스도의 시체가 없다면 그분은 당연히 부활하셨는데 어찌 우는가?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주를 가져갔는데 어디에 모셔 두었는지 모릅니다.” 라고 대답한다.   오직 예수의 시체만 찾으려 골몰하는 자신의 생각과 또 사람이 죽으면 다 썩고 만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마리아이다. 그녀가 이렇게 말한 후 뒤돌아보자 바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봤다. 그러나 예수이신 줄 몰라본다. 예수께서 “여인아 어찌하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말씀하시는데 무어라 답하지요? 주님을 동산지기로만 생각하여 “당신이 주님을 옮겼으면 어디에 두었는지 말해주면 내가 옮기겠나이다.” 라고 말한다.   주님에게 주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느냐? 묻는 것이 말이 되나요? 어찌 이러할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절대로 믿지 않고 있는 불신앙의 중심이 그녀의 눈을 감기고 귀를 막았다. 믿지 않는 자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크나큰 반전이 생긴다.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시며 레게이(λεγει)하신다.    이 레게이는 헬라어 원문의 직설법·현재·능동으로써 지금 현재적으로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이 죽은 시체가 아닌 바로 그녀 앞에 서 계신 살아나신 분이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리아야, 이름 부르심은 이미 예수님 손바닥에 새겨진 그녀 이름(사49:16)임을 가리킴을 믿는 그녀이지요.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녀의 죄의 몸도 함께 죽고 그녀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믿었다.   그 주님이 지금 자기 이름을 부르심은 부활하신 주님의 손바닥에 여전히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확신하게 됐다. 이는 “주님이 살아나셨구나.” 그녀의 생각과 신앙중심이 바뀌었다. 그러자 마리아의 눈이 열리고 드디어 주님을 알아본다. 우리도 마리아와 똑같이 이처럼 바꿔 놓으시는 부활의 주님이시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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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뇌 건강의 길은 운동 (1)
    뇌파는 인간의 특정한 정신 상태를 반영하며, 정신 상태의 변화를 뇌파의 변화로 관찰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이오피드백의 원리를 적용시키면 인간의 마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뉴로피드백의 원리이다. 현재 뉴로피드백의 훈련을 통해 학습부진, ADHD, 우울증, 중독치 유 등의 상담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정신건강은 뇌의 건강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먼저, 정신운동이 뇌를 젊게 한다. 뇌는 근육과 같아 계속 사용하지 않으면 쇠퇴한다. 그래서 새로운 학습은 정신운동과 뇌에 총체적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 적절한 자극과 환경으로 어떤 연령에서든 계속 발전시킬 수 있다. 가장 좋은 정신운동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일이다. 학습은 결국 뉴런들을 점화하고 시냅스를 강화 한다.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는 곳이 해마이다. 해마의 뉴런들은 그들의 시냅스를 훨씬 더 강화시켜 효율성을 증가시킨다. 배운 것을 시행하고 기억하면 전두엽의 뉴런들은 그들의 시냅스를 훨씬 강화시킨다.   다음으로 신체운동이다. 신체운동은 뇌를 보호하고 향상시킨다. 신체의 운동은 높은 스트레스 상태에서 해마의 단기기억구조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스트레스는 해마의 세포를 죽이고 기억을 해친다. 운동은 혈관의 상태를 좋게 하고 고혈압, 뇌졸중, 심장병의 위험을 감소시키고 치매의 위험을 감소시킨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 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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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건강교실] 겨울철 운동 (상)
      낙엽이 떨어지는 짧은 가을이 지나면, 추운 겨울이 다가온다. 추운 날씨는 인간이 생활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지면 활동이 줄어들고, 좀 더 체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섭취하는 열량은 자연히 높아지고 불필요한 움직임이 줄어들게 되며, 결국 남는 열량은 지방으로 바뀌어 피부 아래에 축적된다. 이런 메커니즘은 인류의 선조들이 야생에서 생존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다만 현대를 살며 과체중과 항상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는 전혀 고맙지 않은 현상이다.   겨울철에는 평균 2-3 킬로그램 정도의 체중증가가 발생한다. 체중은 늘기는 쉬우나 빼기는 정말 어렵다. 봄이 되어 여름철의 수영복 몸매를 생각하고 다시 다이어트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 괴롭기도 하거니와 건강에도 좋지 않다. 애당초 겨울철의 체중증가를 방지하는 편이 건강에도 좋고, 훨씬 체중을 관리하는 데 유리한 것이다. 겨울철 체중유지를 위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섭취하는 열량의 감소이다.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가 끼어있는 겨울철의 특성상 단 것(탄수화물), 고기(지방), 알코올의 섭취가 늘어난다. 여기에 덧붙여 추우니까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는 현상까지 겹치면 주체하지 못할 체중의 증가를 경험할 수 있다.   음식조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시 활동량을 늘리는 것이다. 신진대사율은 많이 움직이면 증가하고, 가만히 있으면 감소한다. 겨울철 일조량이 감소하면 체내의 호르몬 균형이 바뀌고, 생체시계가 작동하면서 누구나 우울해 진다. 추우니까 나가기 싫은데, 기분까지 울적하면 더욱 움직이기 싫어지며, 이것이 몇 년 반복되면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겨울철 운동을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동기부여이다. 그냥 ‘이번 겨울에는 운동을 좀 해야지’란 마음가짐으로는 백 명 중 구십오 명 이상이 실패한다. 인체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동기부여를 위해서 같이 운동할 사람을 찾자. 배우자나 직장 동료, 친구, 자녀 등 누구라도 좋으니 서로 북돋아 가며 겨울을 넘길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동반자를 찾았다면 이제 계획을 짤 시간이다.   두 번째로, 어떤 운동을 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한다. 가장 무난한 것은 실내에서 하는 운동이다. 헬스클럽을 등록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다. 겨울철의 남는 칼로리는 여름철보다 쉽게 근육으로 바뀐다. 가까운 곳에 실내수영장이 있다면 수영장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수영은 체중조절 효과는 떨어지나 유연성을 기르고 체력을 증가시키는 좋은 운동이다. 불경기에 비용이 부담된다면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기구를 이용하자. 고정식 자전거는 생각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이 가능하며, 아래층에 가해지는 소음도 없는 좋은 운동기구이다.   윈도우쇼핑을 좋아한다면 대형 쇼핑몰을 한두시간 걸어 다니는 것도 좋은 운동이 된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아파트나 회사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좋은 운동이다.  /한양대학교구리병원 재활의학과 다음 회에는 구체적인 운동법과 유념사항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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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행복신앙세미나 20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www.bog.or.kr) 사랑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대속      “내가 왕위를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는 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또한 여러분께서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위는 1936년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이임사로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채 1년이 안되어 미국 출신의 이혼녀인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내놓았습니다. 당시 영국법상 이혼한 여인이 왕비가 되는 것을 금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 국왕의 자리를 포기한 그의 이야기는 세기의 사랑이라 일컬어집니다.   오래 전 한 왕이 백성들의 풍기가 날로 문란해져가는 것을 매우 걱정하며 고심하다가 국법을 만들고 가장 먼저 어기는 사람에게는 눈을 빼내는 벌을 내리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때부터 백성들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속에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법을 어긴 사람이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왕이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왕자였습니다.   “왕자라 할지라도 국법을 어긴 이상 마땅히 형벌을 받는 것이 도리이니라. 왕자를 끌고 와라! 내가 직접 벌을 내리리라!”   추상같은 왕의 명령에 신하들이 왕자를 결박시킨 채 끌고 왔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자리에서 왕은 왕자 앞에서 칼을 치켜들었습니다. 차마 왕자의 눈을 빼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신하들과 백성들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곧 비명이 들려 눈을 떠보니 왕의 눈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위는 사랑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성경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인류가 죄로 인한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래와 같이 인류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해야 되는 담당자로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한 사랑의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위핑보이란 영국 왕조에서 왕자의 훈육을 위해 도입한 방법이며 튜더 왕조 시대에 왕실에서 그 직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일컫는 공식 명칭이었다. 이는 또 왕자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 그의 충실한 신하이자, 벗인 위핑보이를 대신 체벌해 그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다시는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는 교육법이었다.”(여성신문, 2016.11.3.)   위는 ‘대신 매 맞는 소년’이란 의미의 ‘위핑 보이(whipping boy)’에 대한 기사입니다. 왕이 사랑하는 왕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도 죄에 대해 합당한 심판을 행하는 법을 지키기 위해 왕자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는 소년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프랑스 왕실에서 시작됐던 이 관습을 영국 왕실도 본받았는데, 마크 트웨인의 동화 ‘왕자와 거지’에도 위핑 보이가 등장합니다. 이 관습은 명예혁명 이후 자연적으로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핑 보이와 같은 희생양(scapegoat)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여년 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온 뒤부터 백성들이 범죄하면 심판이 뒤따랐는데 이 희생양을 통해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범죄를 하면 그 죄로 인해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자기 대신 흠 없는 양을 끌고 와서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한 후 그 양을 죽임으로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양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불하기 위해 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위와 같이 그리스도는 어느 개인을 위한 희생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영원히 대속하는 희생양으로 이 땅에 임했습니다. 인류의 죄를 넘겨 받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려 인류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함으로 인류를 영원한 속죄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길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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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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