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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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선작가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춘선작가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매일 만족하셔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기록들을 볼수 있는데 6일동안 만물을 지으시고 7째 날에 쉬신 것이다. 물론 6일이라는 시간이 사람들이 계산 하는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간과 다름을 학자들이 말하고 지질 연구가들이나 과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것을 알라고 했다.(벧후 3:8 ) 하나님의 영원하신 시간에는 천 년이 한 점에 불과한 것을 얘기하고 있다. 여기의 작품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생기 넘치는 만물 들 위에 무지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노아의 홀수 때 노아와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견고하듯이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하여 보시기에 더 좋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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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8)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진 상태에 있는 것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되고, 우리 심령 성전을 잦나무와 같은 진리의 특성, 즉 첫째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말씀으로 완공해야 하는 것이다.   2:1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샤론' 은 엘리야가 이적을 베푼 갈멜산에서부터 욥바 사이에 있는 비옥한 평야이다. 이는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하는 애굽 땅과 달리 그곳은 하늘에서 비를 흡수하는 땅이다. 위에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받으며 오직 그것으로 만족하며 위에 계신 하나님만 앙망하는 땅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샤론의 평야같이 많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것을 가리켜 장미라고 하는 것이다. 재림하실 주님의 신부 신앙에 올려 세워진 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한량없이 많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로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부된 자는 "나는 사론의 장미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샤론의 장미다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올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한량없이 많은 것이다.   '골짜기'는 낮은 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백합화는 꽃 중에 향기가 가장 진동하는 백색의 꽃이다.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가장 낮고, 낮은 데서 향기를 최고로 발하는 신부의 신앙 모습을 가리킨다. 내가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지고 낮아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또 더욱더 낮아지게 되어져서 겸손과 온유가 충만하여 오직 신랑이 되는 주님만을 지극히 높이면 최고로 향기를 발하는 백합화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골짜기의 백합화이다. 최고로 주님을 높이고 높이되 자신들은 최고로 낮아지고 낮아진 것이 바로 풀무 불에 들어가는 데까지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이 자기 자신이 골짜기의 백합화가 되어지면 주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는 자로서 100% 순교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2:2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나의 사랑도 딸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딸들'은 1:5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은 예수 믿는 신자들을 지칭한다. 예수를 믿는 대다수의 교인 중에 신부 성도는 특별한 다른 무엇이 있다. 신부 성도는 주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자이다. 그래서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특별하다.’ 고 말하는 것이다.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는 바람이 불 때 가시나무가 백합화를 사방에서 찌르게 된다. 문맥상 ‘가시나무’ 와 ‘딸들’ 은 동격이므로 딸, 즉 육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신부 성도를 핍박하고 괴롭게 하여 가시나무처럼 찌르는 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백합화는 가시나무에 찔림을 당하는 신부 성도를 계시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인 백합화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서 주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마치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가 되는 것은 순교자의 명부에 녹명이 된 자를 가리킨다. 바람이 세차게 불수록 가시나무가 백합화를 찔러대는 것이 심하다. 장차 주 재림전에 있을 7년 환란에 들어가면 더욱더 찌르는 핍박이 심하게 된다. 그러면 백합화는 향기를 더욱 토해 내게 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육적인 요소가 있으면 가시나무와 같은 딸들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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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8
  • [향유옥합] 그 사랑 신비의 거룩
       성경은 최고의 사랑에 증거이다. 무엇이 사랑인지 지혜로 알게 하신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도덕과 윤리로 적용한다. 주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면 주를 헛되이 경배하게 함임을 성경은 경고한다. 이는 주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가르쳐 지키게 하여 죄사함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몫을 하게 하는 주의 제자화를 위함이다. 이를 위해 주님의 멍에를 메고 나와 배우라고 하셨다. 온유와 겸손한 자는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복음을 전하여 사랑의 실천을 하는 종으로 두 계명 지킴의 살리는 몫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거룩과 주의 제자화로 믿음과 성화임을 깨닫게 한다. 성령과 동행하여 구속 사역에 참예한다면 영적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의 나라 확장을 가져온다. 이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다. 롬8장5~8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증거 하셨다.    즉 거듭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의 사랑 적용은 도덕과 윤리로 육체를 중심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사랑의 뜻을 알 수 있으며 행할 수 있음을 발견케 한다. 곧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실천은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는 구속 사역의 몫이며 생명으로 살리는 사랑이다. 도덕과 윤리의 사랑을 한다면 거듭나게 하지 못하기에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심을 깨닫게 된다.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셨다. 로마서에는 많은 부분 이를 분별하도록 증거한다.    곧 성경 해석 적용은 육을 중심으로 한 도덕과 윤리가 아니다. 영혼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영생을 상고하는 목적이다. 오직 주를 믿고 좇아 성령으로 거듭나면, 사랑의 개념을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알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 살리는 진리를 가르쳐 주 안에 속하도록 지키게 할 것이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하신 확증이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계명을 실천한 사랑의 결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의 나라 확장을 이룬다. 사랑의 기준은 도덕과  윤리로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어 육체대로 판단 적용이아니다. 원죄를 입고 태어난 자들의 그릇된 선과 악에 대한 육의 기준이다. 복 음으로 사람 살리는 일의 시작이 되도록 주께서 본을 보이신대로 그 자취를 좇아야 한다.   주의 마음을 품은 자들의 사랑은 주의 영이 없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푼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그 행함으로 믿음이 온 전하게 되었느니라’ 하신 말씀에 입각한 사랑을 실천해 살리는 몫을 함이다. 곧 사랑은 주를 믿고 좇아 아버지의 뜻대로 사람을 살 리어 주의 제자화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신비의 거룩을 바로 알게 되는 지혜의 사랑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 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아멘/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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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7
  • 성서와 생활 [16] 그리스도인의 영성- 십자가의 영성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따르는 자들이어야한다. 이는 십자가의 은혜를 넘어 ‘은혜 위에 은혜’요1:16의 역사에 참여하기위함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다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사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함을 최종목적으로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 요3:36을 주시려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알게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영성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 생명수로 흘러 넘치는 생활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이 있는 분은 오직 예수 한 분 뿐이시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요5:12라고 하신 것이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믿어야한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상태로 만족할 것이 아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의 열매에 이르러야만 한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얼마나 애통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라고 하셨다.    주님이 받을 세례는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이셨다. ‘한 알의 밀알’요12:24 이 되어 죽으심을 통해 많은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주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분의 성령에 의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라고 하셨다. 주님의 살을 주심으로 우리로 주님의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51 이러한 진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어야 한다.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진리가운데로 나아가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참 생명되신 우리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셔야만 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훈련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사람이기보다 주님의 영을 의지하여 사는 진리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대전 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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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7
  • [에레모스 영성 4] 시험의 땅, 광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마태 4:3)    여러 날 먹지 못하여 주린 상태에 있는 예수에게 사탄은 말했다. 인간의 욕구 가운데 으뜸은 식욕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모습을 보면서 이를 실감한다. 먹어야 산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한다. 이런 굶주림으로 연명하는 이들을 제쳐놓고 왕 노릇으로서의 메시아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당신이 나라님이 되어서 우리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에게 향하는 당연한 요구이며 따라서 사탄은 민중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먹는 빵으로 사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인가? 내가 빵을 만들어 민중을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왔는가? 내가 백성들을 만족 시켜야 하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나? 그분은 때로 5병2어의 기적을 베풀며 수천 명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하였으나 배불리 먹고 난 사람들이 그런 기적 때문에 예수를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했다. 왜냐하면 빵 때문에 따르는 사람은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메시아적 공생애 기간은 빵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빵이 되는 길이었다. 그분의 가장 큰 관심은 육적 생명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참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명을 위한 영적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깨닫기를 원하였다. 그분 자신도 바로 ‘그 말씀’으로 사탄과의 대척점을 유지 할 수 있었으며 끝내 유대인의 왕을 넘어서는 온 인류의 왕, 왕 중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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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7) 우리집은 백향목과 잣나무다
      부활체이신 주님과 우리가 함께 누워있는 침상이 푸르르다   주님이 신부 성도에게는 엔게디 포도원에 있는 캠퍼송이로다.   1:16 보라, 너는 어여쁘며 나의 사랑하는 자야, 참으로 사랑스러우니, 우리의 침상도 푸르도다.   ‘우리의 침상’이니 신랑 예수님과 신부 성도가 함께 사용하는 침상이다. 침상에 들기 전에 입맞춤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1:2). 또 목자를 찾아갔다. 또 집을 짓는 단계를 거친다. 침상이 푸르리니 생명이 자라남이다. 활기차게 약동한다. 계속하여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영적 의미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녹보석 같다(계 4:3)고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의 보좌임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영광을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입혀주실 것을 계시하신다. 장차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받을 때 받은 그대로가 아니라 항상 푸른 초목의 녹색과 같이 새롭게 된다. 즉 처음 받은 영광에서 기하급수적으로 계속 자라게 하신다. 재림하실 주님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 분은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임당했었다. 그 결과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다. 한없이 존귀하게 되시어 하늘보좌에 좌정하신다. 우리도 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는 자들이다. 장차 7년 환란날에 신앙 정절을 지킴으로 반드시 순교하게 되리라. 이 순교는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순교케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주 재림때 첫째부활의 영광(계 20:4~6)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부활체이신 영광의 주님과 우리가 함께 누워있는 침상이 푸르르다. 나도 부활체, 즉 첫째부활의 영광을 받은 자이다. 첫째부활의 영광이 성도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요, 복이다. 성도의 부활 순서가 고전 15장에 나온다. 주 재림때 부활하는 자들이 있다. 그 다음은 나중에 부활한다- 주님 재림때 순교자들이 먼저 첫째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온다. 신랑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 바울도 이것을 더 좋은 부활이라고 증거했다(히11:35). 그러므로 첫째 부활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는 우리의 침상이 푸르르다. 곧 녹보석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1:17 우리 집의 들보들은 백향목이요, 우리의 서까래들은 잣나무로다.    우리 집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성도가 함께 사는 집을 가리킨다. 복되고 환희가 넘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 자리에 나는 순교를 통하여 첫째 부활의 영광을 입은 신부가 된다. 또한 재림하시는 영광의 주님은 신랑이 되어 함께 사는 우리집이 되는 것이다. 백향목은 백색의 향나무 같아서 수명이 천년까지 산다. 우리집의 대들보가 백향목이라함은 우리집이 천년간 향을 발한다는 것이다. 이향이 무엇인가? 7년 환란 때 하나님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해 순교한 성도들의 찬양이다.     이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첫 번째 부활한 자들이다. 재림주님이 세운 왕국에서 천년동안 주님과 함께 백성들을 통치하며 감사찬송하는 것이 백향목의 향이다. 재림하신 주님과 첫째 부활한 신부 성도가 부활체로 함께 사는 기쁨과 행복의 날들이 우리집의 대들보라고 한다. 우리가 이를 미리 믿음의 실상으로 누려야 한다. 또한 우리의 서까래들은 잣나무라고 했다. 잣나무는 성전재료이다. 노아방주도 잣나무로 지었다. 잣나무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고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     또 물에 잘 썩지 않는다. 이것은 잣나무 같은 진리의 특성을 계시하는 것이다. 즉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것같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영광을 바라보며 생명 길로만 나아가는 진리이다. 또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는 것은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켜 순교할지언정 비진리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진리이다.    또한 물에 썩지 않는다는 것도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진리 특성을 가리킨다. 이 잣나무진리는 곧 첫째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의 심령성전을 잣나무의 특성과 같은 진리의 말씀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즉 첫째부활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 우리의 서까래가 되며 우리집 짓는 재료인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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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2-20

실시간 칼럼 기사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4) 여인들중의 가장 어여쁜 자야
      재림하실 예수와 입맞춘 자는 아내되는 영광으로 행복       정오에 양 떼를 먹이고 안식하는 그곳으로 가면 재림 예수를 만나리라.  1:8 오 너 여자들 중에서 가장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네 염소 새끼들을 먹이라. 모든성도들 가운데 재림하실 예수님의 신부 되는 자가 가장 어여쁜 자이다. ‘여자들 중에서’는 ‘예루살렘의 딸들’과 ‘내 어머니의 자녀들’이 포함된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라 함은 무엇인가? 이는 양떼를 먹이는 곳을 찾지 못했으면 역으로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양들은 목자인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기 때문에 양떼를 따라가면 된다. 어떻게 하는가? 이는 내 지혜와 내 힘으로가 아니다. 반드시 주님의 말씀이 내게 주어져야 한다. 또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 또 주님이 따라가게 해 주셔야 한다. 그러나 오라비의 포도원 지기로 매여 있으면 이렇게 따라갈 수가 없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먼저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된다. 그 다음은 목자들의 장막들 곁에서 네 염소새끼들을 먹이라고 했다. ‘네 염소 새끼들을 먹이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신후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다. 그에게 주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내 양들을 먹이라. 그러면 최종적으로 순교하리라고 하셨다. 내 양들을 먹이지 못하면 순교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주님의 심정을 알려면 주님이 하셨던 일을 해보아야 하리라.    1:9 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파라오의 병거의 준마 무리에 비교하였노라. 재림하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자, 신부의 신앙으로 세워지길 사모하는 자를 가리켜 8절에 '오 너 여자들중에서 가장 어여쁜 자야'라고 하셨다. 9절에는 이러한 자를 예수께서 파라오의 병거의 준마에 비교하신다. 이집트에서 가장훌륭한 말은 파라오가 타는 병거의 말이다. 말의 입장에서는 이집트의 최고 높은 파라오를 태우는 것이 가장 영광되고 복된 것이리라. 파라오의 준마는 그 영광으로 인해 더 힘 있고 용맹스럽게 천리마같이 달린다. 이와같이 재림하실 예수님과 입맞춘 자는 그분의 아내가 되는 영광으로 인하여 기쁘고 행복하다. 그래서 파라오의 준마보다 더 빨리 달리되 지치지 않는다. 세상의 영광인 파라오의 영광보다 하늘나라의 영광인 재림하실 예수님의 영광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애굽 사람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기를 더 많이 낳았다. 왜 그런가? 비록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노예생활 이지만 하나님이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했기 때문이다. 고통도 피곤도 다 녹아지고 애굽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아기를 많이 낳은 것이다.      1:10 네 두 뺨은 보석 줄로, 네 목은 금 목걸이로 아름답도다. 신랑 예수님의 아내가 될 여인의 두 뺨에 보석 줄같이 흘러내려져 있는 것은 바로 긴 머리카락이다. 이는 그리스도 신부의 영적인 모습을 말씀한다. 두 뺨에 길게 흘러 내려져 아름답다. 주께서 신부성도의 머리카락을 보석 줄같이 아름답게 보신다. 왜 그런가? 머리카락은 지혜를 상징한다. 재림하실 예수가 주실 행복과 영화를 깨닫고 기뻐하고 있는 네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깨닫는 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도 다 초월하고 오직 그분이 주시는 행복과 영광으로만 기뻐하는 네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구나. 이렇게 주님께서 칭찬하신다. 목은 목숨을 상징한다. 신부성도가 살아가고 있는 목숨은 금 면류관을 받는 순교 신앙이다. 그들은 장차의 순교를 아주 기쁘게 여기며 살고 있다. 주께서 그런 성도의 중심을 보시고 참으로 “네 목은 금목걸이로 아름답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들의 목숨이 바로 이와같이 되자/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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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7
  • 연초부터 연말까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 11:12)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땅에 사는 것이 축복이다.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는 자가 행복하다.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에서 연초부터 연말까지 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이며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는 행복의 뿌리이며, 감사하므로 행복이 쌓인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  감사는 기적과 축복을 가져온다. 누가복음에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2~19) 나병이 고침을 받은 것 이상의 복이 영혼 구원의 축복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늘의 곱셈법 축복이다.  자녀를 길러본 부모들은 다 안다.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어도 자녀의 목소리를 구분한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듣고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다. 하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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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6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2)
    그래서 해마를 기억의 제조공장이라고 부른다.   해마의 신경세포는 증가하며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뇌의 신경세포는 갓난아기 때 그 수가 가장 많고, 성장해가면서 그 수는 감소하는데 1초에 1개 정도 줄어든다.   반면에 해마에서는 끊임없이 신경세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나이가 70세가 지나는 노년기에도 해마의 신경세포는 만들어진다. 물론 세포가 죽어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긴 하지만 새로운 신경세포가 만들어져 교체된다. 해마의 신경세포가 죽는 속도보다 새로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면 해마는 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는 속도가 더 빠르면 오므라들기 때문에 뇌는 쓰지 않으면 죽는다는 원리처럼 해마를 쓰지 않으면 작아지게 된다.   해마는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해마의 신경세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대량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해마는 기억을 보존하고 축적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해마가 커지면 기억력이 향상될 수 있는 까닭은 동시에 많은 판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해마가 발달하면 기억력이 상승된다. 신경세포의 수는 사람에 따라 10~20%정도 차이가 있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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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5
  • [변두리 소수자12] 절망 위를 나는 나비 인생
      '주변국들과의 충돌이 빈번하다. 사상과 정치, 그리고, 체제 대립이 살벌하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가 활발하여 도시화가 가속화 된다. 감정 표현과 본능 추구의 자유로운 로맨티시즘이 예술, 문학, 가치관 등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그런데 개인들은 더욱 외롭다. 교통과 통신 기술이 놀랍도록 발전하며 새로워지지만, 사람들의 간극은 더해지고, 삶은 더 절망적이다. 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분노가 더욱 제기되며, 거부한다.'   오늘의 세상을 말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유럽 사회의 현상이다. 그렇게 혼란한 시대를 고민하며 살던 청년 키르케고르(1813~1855)에게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셨다. 사람들을 위하는 사명감도 주셨다. 그 후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42세에 건강 악화로 죽기까지 헌신하며, 기독교 사상을 다시 정립하게 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간극으로 인해 불안과 절망을 벗어 날 수 없으며, 절망은 곧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곧 자기 상실이라 했다. 이는 죄와 죽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선 구원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은 추상적 교리나 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근거하는 것이며, 존재와 행동이 통일된 것이다”고 했다. 영성과 실행이 일치하는 실천 신앙과 실존 철학을 명확히 세워 준 것이다. 그 당시 못지않은 이 시대에 우리도 다시 서서, 강건하기를 소원한다.   키르케고르는 삶을 세 모습으로 구분했다(‘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의 단상’). △감각과 충동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미적(美的) 존재 (aesthetic existence) △도덕적으로 살지만 신앙 세계에는 미치지 못하는 윤리적인 존재(ethical existence) △종교적 가치로 살면서 신앙을 통해 본래적 자기를 찾으려는 종교적인 존재 (religious existence)이다. 인생은 또한 ‘다이브’(dive)와 ‘점프’(Jump)의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라 했다.   ‘다이브’가 목표와 계획을 위해 뛰는 행위라면, ‘점프’는 예측과 보장이 없이, 뛰어내리는 모험적 선택이다. 안정과 불안, 예측 가능성과 무작위성 사이에서, 선택하고, 만들어진 결과가 인생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다이브’와 ‘점프’ 하는 삶의 모습 외에, 요즘에는 ‘레이드’(laid; 안주)를 선택하는 생활 모습도 있다. 그렇게 다르게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 생활을 거미와 개미, 나비로 비유해서 생각해 본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 놓고, 그 망에 걸리는 것을 잡아 먹고 산다. 누구나 거미처럼 ‘레이드’하며 사는 시절이 있다. 특별히 갓 태어난 생명은 다른 사람들을 통한 도움을 받으며 산다. 그러나 거미줄을 한번 쳐 놓고 앉아서, ‘다이브’도 ‘점프’도 안 하며, 들어오는 것만 먹고 산다면 어떨까? 더 이상 자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생과 함께 시작된 의미는 ‘안정’ 속에 녹아 버린다. 예수 믿고, 구원 받고, 물세례를 받은 것은 새로 태어난 생명의 ‘시작’이지, 완성품이 아니다. 복음에 위배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을 계속 받아들이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   개미는 열심히 일한다. 항상 바쁘다. 부지런하다. 좋다고 하는 것을 취하는 즐거움으로 산다.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정적인 것이 거미보다는 훨씬 낫다. 예수를 믿고 성령의 맛을 보고, 성령 세례를 받은 후, 안정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열심히 ‘다이브’한다. 그러나 그 열정이 또 다른 ‘레이드’를 위한 것이라면, 부자 거미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이미 얻은 것들을 쌓아 놓고, 더 찾기 위해 부지런 할 뿐이다. 세워놓은 목표와 계획을 위해, 열심히 뛰느라, 주님과 주님의 마음을 알아 볼 수 없다. 주님의 뜻을 보고 ‘점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나비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꽃가루를 찾아다니지만, 자기의 것을 모으기 위한 열심이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안정을 위한 부지런함이 아니다. 나비가 날아다닐 때마다 다른 꽃들은 생명을 시작하고, 살아난다. 나비가 이런 모습이 되기까지는 거듭나는 과정이 있다. 그동안 안전하게 지켜준 고치 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성장했지만, 새로워지기 위해서, 껍데기를 깨고 나온다. 연약한 애벌레가 부서지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며, 두꺼운 껍질을 깨느라 찢기는 살에서 날개가 나온다. 그리고 넓고 높은 세상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전한다.   최근 세바시 강연에서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세대는 시간과 노력을 바치기 전에, 당장 주어질 보상과 결과를 먼저 확인한다”고 말이다. 생존과 안정, 축적과 목표, 이러한 것들을 좇는 것일까?   유대인의 지도자 A.J.헤셀은 “인간이 절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데 있다”고 했다. 절망하는 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 신앙을 세워 주는 한국의 키르케고르가 많이 나타나길 기대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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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2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3) 내가 검어도
      말씀에 사로잡히면 자기 그림자가 없어지고 주 안에서 안식  입맞추고 또 입맞추다. 첫 번째 입맞춤은 초림 주님을, 두 번째는 재림주님을 맞는 것이다.  1:5 내가 검어도,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케달의 장막들처럼 솔로몬의 휘장들처럼 나는 아름다우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 죄성과 부패성으로 죄가 가득한 자이다. 이것이 검은 자이다.  오직 예수의 피로 죄 사함받은 은혜와 그의 의로 칭의 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반면에 자기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써, 사람의 의로 의롭다 여기는 신앙이 예루살렘의 딸들이다. 내가 케달의 장막 같아도(창25:13), 즉 검은 염소털로 만든 장막같이 검을지라도 오직 예수, 초림 예수에 입맞춘 나는 그분의 의로 의롭게 되어 아름답다. 또 나는 솔로몬의 휘장들처럼 아름답다. 이는 솔로몬 궁전의 휘장이 아니다. 이는 그의 육체의 휘장 같다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 검은 죄의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시니 나는 아름다우니라.   1:6 햇볕이 내게 내리쬠으로 내가 검게 되었다고 나를 흘겨보지 말라. 내 어머니의 자녀들이 내게 노하여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으나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햇볕’은 하나님 말씀(시84:11,요1:4-5)을 상징한다. 하나님 말씀이 내 심령 안에 비취면 나의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이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검은 것이다. 바로 이토록 죄인인 나이지만 주님께서는 나로 두번째 입맞추게 하신다. 즉 재림하실 예수님의 신부되게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흘겨보지 말라는 것이다. 포도원은 교회요, 또 성도의 심령성전을 상징한다. 오라비의 포도원은 5절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은 율법교회이다. 믿음이 아닌 행함으로 치우치는 교회이다. 두번째 입맞춤을 한 성도의 포도원은 재림하실 주님과 영교하는 교회이다. 즉 신부되는 심령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두번째 입맞춤을 한 성도가 오라비의 포도원지기가 되었도다. 오라비의 포도원은 행함으로 치우치고 사람의 의로 사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에 매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믿음이 아닌 자기 힘으로 열심히 일하고 복 받는다는 신앙에 매어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재림하실 예수님과 깊은 영적교제가 이뤄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신부성도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다.  1:7 오, 내 혼이 사랑하는 당신이여, 정오에 당신의 양떼를 어디에서 먹이며 어디에서 쉬게할지 내게 말해주소서. 어찌하여 내가 당신의 동료들 양떼에서 벗어난 한 마리처럼 되어야 하리이까?   신부성도가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래서 두 번째 입맞춘 주님을 찾기 위해 ‘오 내 혼이 사랑하는 당신이여’하며 찾는다. 재림 예수를 맞이할 신부신앙, 즉 자기의 포도원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그 주를 찾고있다. 신부성도로 인도받다가 이처럼 영적침체 상태로 빠졌도다. 어찌해야 다시 신부신앙 차원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이는 당신의 양떼를 이끄는 목자를 만나면 해결되리라. 바로 정오에 양떼를 먹이는 곳을 알면 찾으리라. 정오 낮12시는 그림자가 없는 시간이다. 사마리아 여인(요4:6)이 정오에 예수님을 만났다. 나의 영적상태가 정오가 됨은 내 그림자가 없는 상태이다. 즉 예수로 100% 충만하여 그분만을 의지하면 내 모습이 없어진다. 자기 그림자가 생길수록 그만큼, 이는 자기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자기 그림자가 없어지고 주 안에서 안식한다. 그런데 자신이 장차 순교할 때 주를 부인하지 아니할까? 불안해하면 아직 정오에 쉬는 곳을 알지 못함이다. ‘당신의 동료들’이 누구인가? 먼저 초림예수의 동료는 열두 사도이다. 이들을 통해 초림예수를 맞이했었다. 이들이 양떼를 이끄는 예수님의 동료들이었다. 두 번째 입맞춤을 한 재림하실 예수님의 동료는 바로 두 증인이다(계11;3). 두증인이 증거하는 말씀을 통하여 재림예수를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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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2
  • 성서와 생활[10] 그리스도인의 영성-구제의 영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에는 찬송의 제사임을 알고 있다. 히13:15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영적인 제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함이요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않는 제사인 것이다. 히13:16 예배와 구제는 나눌 수 없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인 새예루살렘성을 약속으로 받은 자녀들은 이 지상에서 이런 영적 예배의 길을 가게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성도마다 이런 삶을 살기를 배워야 한다. 구약시대부터 축복의 절기마다 이방인들과 나그네들에게 축제의 음식을 공궤하게 하였다.    구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하신다. 어려운 자들을 돌보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길이며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자녀의 길을 가르치며 배우게 하셨으니 이 계명을 영적인 인격으로 삼아야한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11:25 이와 같은 계명으로 살지 못한다면 다음의 계명을 통해 순종할 수 있어야 하겠다 .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잠28:27.    구제를 하지 않는 삶은 저주에 이를 뿐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구제와 예배, 구제와 기도, 구제와 선행은 같은 짝이다. 구제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 카톨릭 신자들은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도 그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사회에 선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구제를 은밀히’ 하라는 말씀을 잘못 적용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빛을 발하는 문이 닫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고전13:3    구제가 얼마나 중요한 영적가치인지를 알 수 있는 성경말씀이 있다. “너희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눅12:33-34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구제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천국을 사모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의미와 같은 맥락이다. 그리하여 구제는 영적인 자녀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녀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이며 가장 소중한 신의 성품이라 할 수 있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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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9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1)
    우리의 모든 정보는 일차적으로 해마에 의해 기억 작업이 시작된다. 해마의 신경세포가 작동되면 기억이 시작된다.   그러나 해마는 기억의 최종 저장장소는 결코 아니다. 기억은 오감을 통해 받은 외부의 정보를 해마에서 받아 전기 신호를 통해 대뇌피질에 저장되는 것이다. 해마는 단기기억의 저장고이며, 우뇌와 좌뇌 사이의 안쪽에 변연계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기억과 감정을 다스리는 뇌이다.   변연계는 시상과 대뇌반구를 연결해 주는 중간역할을 하는데 변연계의 가장 중요한 중추가 바로 해마이다. 기억은 해마에서 만들어지는데 기억은 가까운 신경섬유를 타고 대뇌피질로 간다. 쉴 새 없이 정보가 쏟아지는 가운데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해마는 기억을 만들고 기억을 분류하는 구조물이다. 해마에서 기억을 분류하여 장기기억으로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해마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개입되면 기억을 한다. 이것은 해마가 편도체의 감정을 참조하면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평소에 기억을 만들기 위해서 즐겁고 슬픈 감정의 자극을 받게 되면 해마의 기억능력을 늘려주는 것이다. 해마는 정보의 필요와 불필요를 판단 해서 다른 부위에 기억을 저장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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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 입맞추고 또 입맞추다.
      포도주 마시고 기뻐했던 때보다 예수사랑이 황홀함을 고백    앞서 솔로몬이 성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노래한 것이 아가서임을 깨달았다.1:2 그로 그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맞추게 하소서. 이는 당신의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니이다. 1절에 솔로몬이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이므로 2절의 ‘내게’는 솔로몬을, ‘그’와 ‘당신’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로 그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맞추게 하소서.’는 ‘입맞추고 또 입 맞추게 하소서’로 하는것이 원문에 의한 표현이다. 성도인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의 시작이 첫 입맞춤이다. 입맞춤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또 입맞추고 또 입을 맞춘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노하실 것이요, 그가 조금만 격분하셔도 너희가 그 길에서 망하리라.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2:12).     ‘그 아들’은 시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낳았노라.”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모든열방이 ‘그 아들’을 학대하고 죽였지만 너희는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즉 초림하신 예수, 하나님아들을 믿고 영접하라는 말씀이다. 이와같이 처음 입맞춤이 이루어진 자는, 또 그 아들에게 두번째 입맞춘다. 이는 재림하실 예수를 맞이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는 그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써 사랑이 시작되며 그것이 첫 입맞춤이다. 또 재림하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맞이하는 것은 두 번째 입맞추는 것이다. 즉 신부가 신랑을 맞는 것이다. 이는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니이다. 포도주를 마시고 기뻐했던 때보다 지금 당신의 사랑이 더 황홀하다고 고백한다. 이는 두 번째 입맞춤이요. 재림후 신랑으로 맞는 그 사랑이 더 크다. 이 포도주는 예수께서 잔을 가지고 축사 후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마26:27-28)라고 하신 그것이다. 즉 속죄 복음을 계시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초림 하셔서 세우신 이 새 언약보다 더 지금의 당신의 사랑이 크다는 것이다. 즉 재림하실 주님의 엄청난 은혜와 사랑이 더 크도다.    1:3 당신의 좋은 향기름 냄으로 인하여 당신의 이름이 쏟아 놓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당신의 좋은향기름’은 예수께서 부어준 성령을 말한다. 예수님과 두번째로 입맞춤한 성도는 이제 재림하실 예수께 초점이 맞춰진다. 재림하실 예수를 맞이할 수 있게 부어주는 ‘당신의 좋은 향기름’은 곧 일곱 영(계1:4)이다. ‘당신의 이름이 쏟아 놓은 향기름’은 예수이름으로 죄 사함 받고, 기도하고 예배한다. 그리고 더 깊은 그분 이름이 곧 쏟아 놓은 향기름이다. 이는 재림하실 예수의 새이름이니 ‘만왕의 왕 만주의 주’를 가리킨다(계19:16). 성도인 솔로몬이 신부의 자리에 서 있으면 그는 ‘만왕’중에 속하게 되고 재림하실 예수는 이 만왕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 되신다. ‘만왕의 왕’의 이름을 가지신 예수가 나를 ‘만왕’이 되게 하신다. 이들에게 일곱 영을 부어주셔서 순교케 해주시니 만왕이 되게 하신다. 이러하니 너무 좋고 너무 황홀한 일이다. 이것이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말씀이다. ‘처녀들’은 한밤중에 신랑을 맞이하는 슬기로운 처녀(마25:2)와 같다.    1:4 내게 다가오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 가리이다. 왕이 나를 그의 방들로 이끌어 들이셨으니 우리가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이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뻐하리이다. 정직한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여기 ‘왕’은 물론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키스하므로 사랑이 시작됐고, 이제 이끌어 그의 깊은 침실로 들이어 깊은 사랑을 나눈다. 우리가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이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신부성도가 이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정직한 자들’은 2절의 처녀들이요, 이들이 재림하실 신랑 예수님을 사랑하며 기뻐 노래하는 것이다. 할렐루야./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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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 사랑의 언약
      구약은 옛 약속이고 신약은 새 약속이다.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한다. 그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이다. 내일의 약속이 있는 사람은 오늘 행복하다. 어제의 서러움과 힘들었던 모든 일들을 이겨낼수 있는 힘은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약속이 신실할수록 우리의 인내는 오히려 기쁨이고 소망이고 살아가는 힘이다.   옛 약속이나 새 약속의 내용은 오직 하나이다. 영원한 사랑이 오실 것을 믿고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사랑을 기다리는 것이다. 약속을 믿으면 기다릴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다림은 주께서 이 땅에 임하셨음으로 이루어졌다. 수천 년의 구약이 이날을 기다리며 신약의 첫날을 기다렸다. 이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시고 선택한 사람들을 곳간에 들이신다.   오늘날 세상이 자꾸 어두워진다. 전쟁과 기근과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구약의 약속이 첫 번째 성탄으로 이루어졌듯이 신약의 약속이 재림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언약을 믿으며 우리는 환란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요즈음, 새로운 마음의 설레임으로 새날을 준비 해야겠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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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5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수면이 보인다 (5)
      끊임없이 몰아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성공을 향한 현대인들의 엄청난 발명품 앞에 생체 시계의 본질이 본격적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컴퓨터 중독이 25%에 이를 정도이다.   또 하나의 환경은 밤 문화의 등장이다. 오랜 과거엔 해가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농사일을 하고 해가 지면 자연스레 잠을 자는 형태로 살아왔다. 그러나 현대의 밤거리는 낮처럼 환하다.   통행금지가 없어지면서 잠의 문화가 자유로워지고 술집, 바, 노래방, 야간학습까지 등장할 정도로 밤 문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현대인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의 70%는 밤 12시 이후에 잠자리에 들고, 평균 6시간 18분(권장시간 7시간 30분)을 잔다고 하였다.   늦게 집에 들어와 늦게 취침하다 보니 아침이 더욱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현대인들에게 계속 되면서 불규칙한 수면 습관과 불균형한 식습관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차(jet lag)와 교대근무의 생활이 크게 생체리듬에 영향을 준다. 인간의 신체는 규칙성을 갈구한다. 매일 동일한 일정을 지키는 것은 일주기 리듬을 순조롭게 진행시킨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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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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