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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3) 배는 빛나는 상아 같도다
신부성도는 주님을 깊이 경험하였고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으로 주님을 5:10부터 계속 담대히증거하고 있다.또 그의 배는 사파이어로 입힌 빛나는 상아같다. 그의배는 몸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이는 11절부터 나의 사랑하는 이의 머리와 눈과 뺨, 입술, 손을 뺀 나머지 몸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님의 몸이 빛나는 상아 같다는 것은 주님의 몸이 한 번 죽었다가 다시 부활 하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상아는 코끼리의 이빨인데 그 상아를 얻으려면 코끼리가 죽어야 한다. 코끼리의 몸은 죽어서 썩어 없어져도 상아는 영원히 남아 있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의 몸은 상아처럼 영원히 썩지 않는 몸을 가리킨다. 또 사파이어를 입힌 빛나는 상아 같다는 것은 그 모습이 사파이어 같이 광채로 빛나는 영광의 몸이라고 신부성도가 증거하는 것이다. 출24:10에 하나님의 모습이 마치 사파이어 돌로 포장한 것 같고 그 청명함은 하늘같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본 모습이 아니라 지나가는 모습이 이렇게 신비스럽고 아름답고 영광된 모습이라고 하였다. 신부성도는 이러한 주님을 신랑으로서 함께 하며 경험하고 있다. 그 주님 안에서 자기 자신도 주님과 하나 된 믿음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순교를 통해서 부활하게 될 때 사파이어로 단장한 것 같은 영광의 몸으로 될 것을 소망하며 믿음의 실상으로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다. 5:15 그의 양 다리는 정금 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으며, 그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들처럼 수려하도다. 신부성도가 신랑 예수님을 경험했기에 그분의 다리를 잘 알고있다. 다리는 걷기도 하고 서서 밟기도 한다. 정금은 예수님의 머리가 정금 같다고 말씀하셨듯이 (11절) 신성을 상징한다. 즉 신랑 예수님의 양 다리가 ‘정금 받침대’ 같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의 양 다리가 대리석 기둥 같다.’는 것은 웅장하고 부서지지 않는 강한 대리석 같이 주님이 아주 견고하고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랑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가장 강하시고 존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빌2:10~11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고전15:25~27에 주께서 모든 원수를 자기 발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되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하셨고, 모든 만물을 예수님의 발아래 복종케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다리가 정금 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기 때문이다. 또 ‘그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들처럼 수려하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의 외적인 전체적인 모습을 말씀한 것이다. 레바논을 대표하는 헤르몬산은 그 용모가 웅장하고 듬직해 보인다. 이와같이 신부성도의 남편인 예수님은 듬직하고 미쁘신 분이시다. 또 의지할 수 있고 전혀 걱정되지 않는 분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끊임없이 경험해야 된다. 한편 레바논의 내적인 모습은 백향목들로 숲을 이루고 있듯이 예수님의 내적인 용모가 백향목들 같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내적인 성품(속성)이 백향목들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말씀한다.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이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고결하시고, 진실하시고, 사랑이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온유·겸손하시고···,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하면 그분 안에서 그와 같은 성품으로 우리의 속을 바꿔주신다.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는 역사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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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51회) –그리스도인의 영성 기쁨의 영성
성도가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영적 생명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하나님의 영은 기쁨의 영이기 때문에 성도에게 기쁨의 삶으로 인도한다. 기쁨의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믿음으로 사는 자를 보며 교통함이 그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경우이다.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롬16:19) 순종하는 성도들을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이 더욱 선한데 지혜롭고 악을 버릴 줄 아는 소망의 기쁨으로 나아간다. 또 다른 기쁨은 일반적인 기쁨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쾌락을 통한 기쁨이 아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마13:44,눅13:17,요일3:22)라는 삶에 있다. 이러한 기쁨은 참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길이다. 믿음으로 기뻐하는 것이다.(행16:34)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삶에 있다. 이러한 기쁨은 나의 사상을 다 무익한 것으로 내려놓을 때 만이 가능한 길이 된다. 실로 이 길은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시다. 박해를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십자가의 길을 생각할 때 그는 일상적인 삶의 기쁨이 결여 된 삶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행하는 길을 걷는 큰 기쁨의 길을 가신 분이시다. 이러한 기쁨은 크고 높은 기쁨이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이러한 기쁨을 누린 사람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에 머물게 하기 위해 육체의 약함을 기뻐한 사람이다.(고후12:9) 지체를 섬기며 사랑하는 고난을 기뻐했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는 기쁨을 추구한 바울사도였다. (고후12:15)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1:18) 이러한 사도바울의 기쁨은 주님께 있던 기쁨과 같은 종류이다. 믿는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했다.(행5:41) 믿음의 사도들 또한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추구했다. 악한자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은 온전한 성도들이다.(계19:7) 주안에서의 기쁨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신다.(빌4:4,살전5:16) 성도의 기쁨 중에 헌신의 기쁨이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기쁨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성도의 기쁨은 나의 길을 가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가며 즐거워함에 있다.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기 보다는 하늘에 속한 자로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주의 은혜를 누리는 삶은 큰 기쁨의 영성에서 나온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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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2) 그의 뺨은 또 입술은? 손은? 배는?
5:13 그의 뺨은 향나무밭 같으며 향기로운 꽃 같고, 그의 입술은 향기로운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꽃 같도다. 이는 신랑 예수님의 뺨이 향으로 풍성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의 향기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다(고후2:14~16).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향기이나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온몸으로 이루신 일의 결과는 주님의 얼굴(뺨)에 나타난다.따라서 ‘그의 뺨이 향나무밭 같고 향기로운 꽃 같다’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살리시는 분이요, 열매 맺는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시한다. 그 생명은 나를 살리고 영생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셨다. 또 이 주님의 뺨으로 인하여 신부성도의 뺨이 석류 한쪽이 된 것이다(아 4:3). 또 ‘그의 입술은 향기로운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꽃 같다.’고 하였다. 주님의 입술은 입을 맞추어 하나 되게 하시는 입술이다. 아1:2에 주님의 입술에 입맞춤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 주님의 입에서는 말씀이 나온다. 또 몰약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 예수님이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해주신 복음이 곧 예수님의 입술이 몰약이 떨어지는 향기로운 백합화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가지고 사는 신부성도의 입술이 주홍색 실 같다고 하였다(아4:3). 주홍색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맥을 같이 한다. 주님의 피로 영원히 죄사함 받은 은혜를 고백하고 증거하는 입술이 주홍색 실 같은 신부성도의 입술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입술에 두 번째 입맞춤이 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같이(골1:24), 미리 우리에게 보여준 하늘나라 영광을 소망하면서 주님과 같은 피 흘림의 고난을 본받아 기쁘게 뒤따르게 하는 것, 즉 영광의 복음이 주님의 입술에 몰약이 뚝뚝 떨어지는 향기로운 백합화 같은 것이다. 주님의 남은 고난 중에 순교까지 하게 해주시는 그 길을 따라가게 되므로 최고의 첫째부활의 영광까지 주시는 분이 곧 주님의 입술에 몰약이 떨어지는 백합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의 동지들은 서로 문안할 때 사랑의 입맞춤을 한다. 만일 예수님의 입과 내 입이 하나가 됐고 자기 자신이 순교의 제물로 준비가 됐다면 그 하나 된 믿음의 동지들과 뜨겁게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하지 않으랴? 5:14 그의 손은 녹보석이 박힌 금 고리들 같으며, 그의 배는 사파이어들로 입힌 빛나는 상아 같도다. 주님의 손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신 손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주님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재림하실 주님이 금촛대 교회의 주인이 되셔서 일곱별을 붙잡고 금촛대교회 가운데서 일하시는 분으로 계신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님의 손은 일곱 금촛대교회의 일곱별을 붙잡고 계신 그 손이다. 즉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를 통해서 환란날에 이기는 자로 세우시는 계시이다.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끌어서 감추인 만나와 새이름이 새겨진 흰 돌까지 주시는 역사를 통해서 금촛대교회의 이기는 자로 세워서 결국은 금면류관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손이 금 고리들 같은 것이다. 또 금고리에 녹보석이 박힌 것은, 첫째부활의 영광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지면 그 영광이 아버지 집에서 영원토록 계속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계시한 것이다. 계4:3에 하나님의 보좌를 두른 무지개가 녹보석 같다고 하신 것이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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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50회] 그리스도인의 영성-순종의 영성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영광을 돌리셨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서 기사 이적을 일으켰지만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님은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셨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6) 라며 불평하지 않았다. 어떤 반대와 실패에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리셨다. 이러한 실패의 사건이 연속되어 질 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이 평안함을 노래하였다. 사람은 실패가 계속된다면 아마도 불안하고 실망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패와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셨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러한 길을 가도록 권고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라고 하셨다. 계속되는 전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이 실패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온유한 마음으로 낙심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의 길을 가려면 이러한 성품을 소유해한다. 마음이 온유하다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된다.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되지 않아도 겸손히 실패를 받아들일 것이다. 마음이 온유한 자라야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게 된다, 역경을 만나도 겸손히 그 길을 받아 들이게 된다. 온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꺽어 버리고 겸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고라신과 벳새다가 환영하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마음이 청결하시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마음이 청결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볼 수 있기에 안식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11:27) 하나님께서 주님을 알아 주셨기 때문에 만족하며 순종할 수 있었다. 우리도 성공과 자랑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알아줄 때 만족할 수 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자유하며 안식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하여 주님으로 만족한 자는 순종의 영성으로 충만하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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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41) 그의 머리는 정금 같고
‘나의 사랑하는 이가 희다’라고 주님을 증거한다. 반면에 신부성도 자신은 주님과 달리 원래 죄성과 부패성으로 가득한 시커먼 죄인이었다. 즉 희지 못한 자이다. 그러나 자신을 희게 하시고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신랑 예수님을 체험함으로써 이를 증거 하는 것이다.또10절 하반절에 ‘나의 사랑하는 이가 붉다’라고 자랑한다. 이는 주님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가지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삼상16:12에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그 아이의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붉다는 것은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것을 말하는데 곧 생명이 충만한 영원성을 의미한다. 피조물에는 영원함이 없으나 신랑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시는 분으로 신부 성도가 경험하여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이는 일만 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 라고 자랑한다. 신랑 예수님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도 없는 유일무이한 분임을 말한다. 일만 명 속에는 공자, 맹자, 철학자 등 훌륭한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아무리 많을찌라도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는 그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라고 했다. 이는 주님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분이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만일 일만 명에 속한 훌륭한 사람들이 촛불이라면,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는 이 촛불과 전혀 비교할 수조차 없는 곧 태양이라고 증거 하는 것과 같다. 5:11 그의 머리는 가장 좋은 정금 같고 그의 머리 타래는 많아 까마귀처럼 검도다. ‘그의 머리는 가장 좋은 정금 같다’고 했으니 이는 모든 금속과 피조물은 변하는데 정금은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이 신부 성도의 남편인 예수님은 불변하시는 영원불변성, 즉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이다. 또 ‘그의 머리 타래는 많아 까마귀처럼 검다’고 하였다. 머리가 희어지면 나이가 들고 힘이 빠졌다는 징조이다. 그런데 나의 사랑하는 이의 머리는 검으므로 힘이 빠지지 않고 왕성하고 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진주 중에 가장 아름답고 비싼 진주는 까마귀처럼 검은 흑진주이다. 이와 같이 신부 성도의 남편인 예수님은 힘있고 왕성하시며 또 존귀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심을 친히 경험했고 이를 증거하는 것이다. 5:12 그의 눈은 강가의 비둘기들의 눈처럼 젖으로 씻겨 알맞게 박혀있도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의 눈은 강가의 비둘기들의 눈 같다고 하였다. 비둘기가 하수구에 앉아있으면 그 비둘기조차 더럽게 보인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강가에 앉아있는 비둘기는 아주 깨끗해 보인다. 노아 홍수 후에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더러운 곳에 앉지 않고 방주로 돌아왔듯이 비둘기는 순결·정결을 상징한다. 또 비둘기는 온유·평화로움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자하고 온유, 겸손, 순결하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그 눈이 젖으로 씻겨 알맞게 박혀있다.’고 하였다. 눈병이 나면 안약 대신 민간요법으로 젖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적으로 문제 있는 자,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안약이 필요한 자에게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시고 바로 세우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고 하신 말씀이 그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의 심령 속까지 꿰뚫어 보셔서 잘못된 것들을 드러내 주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치료해주시는 눈이 불꽃 같은 주님의 눈이다. 신부 성도가 주님의 눈과 마주치면 그분의 눈 속으로 신부 성도의 눈이 빨려 들어가면서 주님의 온유, 겸손, 순결함과 똑같이 만들어주시는 분이시다. 마11:29에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는 말씀이 주님의 눈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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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49회] 그리스도인의 영성-그리스도 주권의 영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다. 하늘은 영역이라는 의미보다 하늘의 속성을 나타낸다. 하늘의 능력을 힘입어 사는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하늘은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이며 부활 안에 속한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곳이며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곳이다. 이러한 하늘을 우리는 교회를 통해 알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의 부활로 인해 세워진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늘에 속한 곳이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엡1:2)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다. 교회는 사랑 안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교회가 하늘에 속한 속성을 가진 곳이다. 이러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마다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엡1:4)는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하셨다. 이러한 “은혜의 영광을 찬송”(엡1:6)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마땅한 본분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 속한 곳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심으로 서로 연합하게 하신다. “모든 지혜와 총명을”(엡1:8) 부어 주심으로 교회 안에서는 주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는 충돌이 있을 수 없다. 연합의 강한 힘으로 작용하게 하신다. 성령의 주권에 의해 개인적인 의지나 지위나 능력을 뛰어 넘는다. 교회가 하늘에 속했다는 의미는 바로 주님의 주권이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그의 주권 아래 나의 모든 것이 다스림을 받는 다는 의미이다. 그의 주권을 인지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역을 하게 된다. 사사로운 능력이 좌우되는 독단적인 길로 치우지지 않게된다. 주님의 주권 아래 있을 때 “그리스도의 경륜”을 이루는 길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엡1:19) 안에서 하늘에 속한 길을 갈 수 있게 하셨다. 교회는 부활안에 속한 하늘의 속성으로 충만케 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며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 모든 주권을 이 세상 위에 뛰어나게 하심으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이 교회를 통해서 완성되게 하셨기에 “교회는 그의 몸”(엡1:23)으로 주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곳이다. 주님의 주권 아래 순종하는 통제를 받아야 만이 성령 안에 부활 안에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가 하늘에 속한 것임을 증명하는 영적인 길을 가게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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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3) 배는 빛나는 상아 같도다
- 신부성도는 주님을 깊이 경험하였고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으로 주님을 5:10부터 계속 담대히증거하고 있다.또 그의 배는 사파이어로 입힌 빛나는 상아같다. 그의배는 몸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이는 11절부터 나의 사랑하는 이의 머리와 눈과 뺨, 입술, 손을 뺀 나머지 몸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님의 몸이 빛나는 상아 같다는 것은 주님의 몸이 한 번 죽었다가 다시 부활 하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상아는 코끼리의 이빨인데 그 상아를 얻으려면 코끼리가 죽어야 한다. 코끼리의 몸은 죽어서 썩어 없어져도 상아는 영원히 남아 있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의 몸은 상아처럼 영원히 썩지 않는 몸을 가리킨다. 또 사파이어를 입힌 빛나는 상아 같다는 것은 그 모습이 사파이어 같이 광채로 빛나는 영광의 몸이라고 신부성도가 증거하는 것이다. 출24:10에 하나님의 모습이 마치 사파이어 돌로 포장한 것 같고 그 청명함은 하늘같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본 모습이 아니라 지나가는 모습이 이렇게 신비스럽고 아름답고 영광된 모습이라고 하였다. 신부성도는 이러한 주님을 신랑으로서 함께 하며 경험하고 있다. 그 주님 안에서 자기 자신도 주님과 하나 된 믿음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순교를 통해서 부활하게 될 때 사파이어로 단장한 것 같은 영광의 몸으로 될 것을 소망하며 믿음의 실상으로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다. 5:15 그의 양 다리는 정금 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으며, 그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들처럼 수려하도다. 신부성도가 신랑 예수님을 경험했기에 그분의 다리를 잘 알고있다. 다리는 걷기도 하고 서서 밟기도 한다. 정금은 예수님의 머리가 정금 같다고 말씀하셨듯이 (11절) 신성을 상징한다. 즉 신랑 예수님의 양 다리가 ‘정금 받침대’ 같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의 양 다리가 대리석 기둥 같다.’는 것은 웅장하고 부서지지 않는 강한 대리석 같이 주님이 아주 견고하고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랑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가장 강하시고 존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빌2:10~11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고전15:25~27에 주께서 모든 원수를 자기 발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되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하셨고, 모든 만물을 예수님의 발아래 복종케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다리가 정금 받침대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기 때문이다. 또 ‘그의 용모는 레바논 같고 백향목들처럼 수려하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의 외적인 전체적인 모습을 말씀한 것이다. 레바논을 대표하는 헤르몬산은 그 용모가 웅장하고 듬직해 보인다. 이와같이 신부성도의 남편인 예수님은 듬직하고 미쁘신 분이시다. 또 의지할 수 있고 전혀 걱정되지 않는 분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끊임없이 경험해야 된다. 한편 레바논의 내적인 모습은 백향목들로 숲을 이루고 있듯이 예수님의 내적인 용모가 백향목들 같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내적인 성품(속성)이 백향목들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말씀한다.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이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고결하시고, 진실하시고, 사랑이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온유·겸손하시고···,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하면 그분 안에서 그와 같은 성품으로 우리의 속을 바꿔주신다.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는 역사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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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51회) –그리스도인의 영성 기쁨의 영성
- 성도가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영적 생명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하나님의 영은 기쁨의 영이기 때문에 성도에게 기쁨의 삶으로 인도한다. 기쁨의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믿음으로 사는 자를 보며 교통함이 그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경우이다.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롬16:19) 순종하는 성도들을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이 더욱 선한데 지혜롭고 악을 버릴 줄 아는 소망의 기쁨으로 나아간다. 또 다른 기쁨은 일반적인 기쁨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쾌락을 통한 기쁨이 아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마13:44,눅13:17,요일3:22)라는 삶에 있다. 이러한 기쁨은 참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길이다. 믿음으로 기뻐하는 것이다.(행16:34)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삶에 있다. 이러한 기쁨은 나의 사상을 다 무익한 것으로 내려놓을 때 만이 가능한 길이 된다. 실로 이 길은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시다. 박해를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십자가의 길을 생각할 때 그는 일상적인 삶의 기쁨이 결여 된 삶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행하는 길을 걷는 큰 기쁨의 길을 가신 분이시다. 이러한 기쁨은 크고 높은 기쁨이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이러한 기쁨을 누린 사람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에 머물게 하기 위해 육체의 약함을 기뻐한 사람이다.(고후12:9) 지체를 섬기며 사랑하는 고난을 기뻐했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는 기쁨을 추구한 바울사도였다. (고후12:15)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1:18) 이러한 사도바울의 기쁨은 주님께 있던 기쁨과 같은 종류이다. 믿는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했다.(행5:41) 믿음의 사도들 또한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추구했다. 악한자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은 온전한 성도들이다.(계19:7) 주안에서의 기쁨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신다.(빌4:4,살전5:16) 성도의 기쁨 중에 헌신의 기쁨이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기쁨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성도의 기쁨은 나의 길을 가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가며 즐거워함에 있다.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기 보다는 하늘에 속한 자로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주의 은혜를 누리는 삶은 큰 기쁨의 영성에서 나온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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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51회) –그리스도인의 영성 기쁨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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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2) 그의 뺨은 또 입술은? 손은? 배는?
- 5:13 그의 뺨은 향나무밭 같으며 향기로운 꽃 같고, 그의 입술은 향기로운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꽃 같도다. 이는 신랑 예수님의 뺨이 향으로 풍성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의 향기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다(고후2:14~16).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향기이나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온몸으로 이루신 일의 결과는 주님의 얼굴(뺨)에 나타난다.따라서 ‘그의 뺨이 향나무밭 같고 향기로운 꽃 같다’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살리시는 분이요, 열매 맺는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시한다. 그 생명은 나를 살리고 영생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셨다. 또 이 주님의 뺨으로 인하여 신부성도의 뺨이 석류 한쪽이 된 것이다(아 4:3). 또 ‘그의 입술은 향기로운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꽃 같다.’고 하였다. 주님의 입술은 입을 맞추어 하나 되게 하시는 입술이다. 아1:2에 주님의 입술에 입맞춤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 주님의 입에서는 말씀이 나온다. 또 몰약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 예수님이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해주신 복음이 곧 예수님의 입술이 몰약이 떨어지는 향기로운 백합화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가지고 사는 신부성도의 입술이 주홍색 실 같다고 하였다(아4:3). 주홍색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맥을 같이 한다. 주님의 피로 영원히 죄사함 받은 은혜를 고백하고 증거하는 입술이 주홍색 실 같은 신부성도의 입술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입술에 두 번째 입맞춤이 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같이(골1:24), 미리 우리에게 보여준 하늘나라 영광을 소망하면서 주님과 같은 피 흘림의 고난을 본받아 기쁘게 뒤따르게 하는 것, 즉 영광의 복음이 주님의 입술에 몰약이 뚝뚝 떨어지는 향기로운 백합화 같은 것이다. 주님의 남은 고난 중에 순교까지 하게 해주시는 그 길을 따라가게 되므로 최고의 첫째부활의 영광까지 주시는 분이 곧 주님의 입술에 몰약이 떨어지는 백합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의 동지들은 서로 문안할 때 사랑의 입맞춤을 한다. 만일 예수님의 입과 내 입이 하나가 됐고 자기 자신이 순교의 제물로 준비가 됐다면 그 하나 된 믿음의 동지들과 뜨겁게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하지 않으랴? 5:14 그의 손은 녹보석이 박힌 금 고리들 같으며, 그의 배는 사파이어들로 입힌 빛나는 상아 같도다. 주님의 손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신 손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주님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재림하실 주님이 금촛대 교회의 주인이 되셔서 일곱별을 붙잡고 금촛대교회 가운데서 일하시는 분으로 계신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님의 손은 일곱 금촛대교회의 일곱별을 붙잡고 계신 그 손이다. 즉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를 통해서 환란날에 이기는 자로 세우시는 계시이다.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끌어서 감추인 만나와 새이름이 새겨진 흰 돌까지 주시는 역사를 통해서 금촛대교회의 이기는 자로 세워서 결국은 금면류관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손이 금 고리들 같은 것이다. 또 금고리에 녹보석이 박힌 것은, 첫째부활의 영광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지면 그 영광이 아버지 집에서 영원토록 계속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계시한 것이다. 계4:3에 하나님의 보좌를 두른 무지개가 녹보석 같다고 하신 것이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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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2) 그의 뺨은 또 입술은? 손은? 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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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50회] 그리스도인의 영성-순종의 영성
-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영광을 돌리셨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서 기사 이적을 일으켰지만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님은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셨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6) 라며 불평하지 않았다. 어떤 반대와 실패에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리셨다. 이러한 실패의 사건이 연속되어 질 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이 평안함을 노래하였다. 사람은 실패가 계속된다면 아마도 불안하고 실망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패와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셨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러한 길을 가도록 권고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라고 하셨다. 계속되는 전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이 실패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온유한 마음으로 낙심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의 길을 가려면 이러한 성품을 소유해한다. 마음이 온유하다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된다.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되지 않아도 겸손히 실패를 받아들일 것이다. 마음이 온유한 자라야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게 된다, 역경을 만나도 겸손히 그 길을 받아 들이게 된다. 온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꺽어 버리고 겸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고라신과 벳새다가 환영하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마음이 청결하시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마음이 청결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볼 수 있기에 안식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11:27) 하나님께서 주님을 알아 주셨기 때문에 만족하며 순종할 수 있었다. 우리도 성공과 자랑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알아줄 때 만족할 수 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자유하며 안식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하여 주님으로 만족한 자는 순종의 영성으로 충만하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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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50회] 그리스도인의 영성-순종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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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41) 그의 머리는 정금 같고
- ‘나의 사랑하는 이가 희다’라고 주님을 증거한다. 반면에 신부성도 자신은 주님과 달리 원래 죄성과 부패성으로 가득한 시커먼 죄인이었다. 즉 희지 못한 자이다. 그러나 자신을 희게 하시고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신랑 예수님을 체험함으로써 이를 증거 하는 것이다.또10절 하반절에 ‘나의 사랑하는 이가 붉다’라고 자랑한다. 이는 주님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가지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삼상16:12에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그 아이의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붉다는 것은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것을 말하는데 곧 생명이 충만한 영원성을 의미한다. 피조물에는 영원함이 없으나 신랑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시는 분으로 신부 성도가 경험하여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이는 일만 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 라고 자랑한다. 신랑 예수님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도 없는 유일무이한 분임을 말한다. 일만 명 속에는 공자, 맹자, 철학자 등 훌륭한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아무리 많을찌라도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는 그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라고 했다. 이는 주님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분이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만일 일만 명에 속한 훌륭한 사람들이 촛불이라면,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는 이 촛불과 전혀 비교할 수조차 없는 곧 태양이라고 증거 하는 것과 같다. 5:11 그의 머리는 가장 좋은 정금 같고 그의 머리 타래는 많아 까마귀처럼 검도다. ‘그의 머리는 가장 좋은 정금 같다’고 했으니 이는 모든 금속과 피조물은 변하는데 정금은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이 신부 성도의 남편인 예수님은 불변하시는 영원불변성, 즉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이다. 또 ‘그의 머리 타래는 많아 까마귀처럼 검다’고 하였다. 머리가 희어지면 나이가 들고 힘이 빠졌다는 징조이다. 그런데 나의 사랑하는 이의 머리는 검으므로 힘이 빠지지 않고 왕성하고 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진주 중에 가장 아름답고 비싼 진주는 까마귀처럼 검은 흑진주이다. 이와 같이 신부 성도의 남편인 예수님은 힘있고 왕성하시며 또 존귀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심을 친히 경험했고 이를 증거하는 것이다. 5:12 그의 눈은 강가의 비둘기들의 눈처럼 젖으로 씻겨 알맞게 박혀있도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의 눈은 강가의 비둘기들의 눈 같다고 하였다. 비둘기가 하수구에 앉아있으면 그 비둘기조차 더럽게 보인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강가에 앉아있는 비둘기는 아주 깨끗해 보인다. 노아 홍수 후에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더러운 곳에 앉지 않고 방주로 돌아왔듯이 비둘기는 순결·정결을 상징한다. 또 비둘기는 온유·평화로움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자하고 온유, 겸손, 순결하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그 눈이 젖으로 씻겨 알맞게 박혀있다.’고 하였다. 눈병이 나면 안약 대신 민간요법으로 젖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적으로 문제 있는 자,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안약이 필요한 자에게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시고 바로 세우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고 하신 말씀이 그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의 심령 속까지 꿰뚫어 보셔서 잘못된 것들을 드러내 주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치료해주시는 눈이 불꽃 같은 주님의 눈이다. 신부 성도가 주님의 눈과 마주치면 그분의 눈 속으로 신부 성도의 눈이 빨려 들어가면서 주님의 온유, 겸손, 순결함과 똑같이 만들어주시는 분이시다. 마11:29에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는 말씀이 주님의 눈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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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41) 그의 머리는 정금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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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49회] 그리스도인의 영성-그리스도 주권의 영성
-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다. 하늘은 영역이라는 의미보다 하늘의 속성을 나타낸다. 하늘의 능력을 힘입어 사는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하늘은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이며 부활 안에 속한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곳이며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곳이다. 이러한 하늘을 우리는 교회를 통해 알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의 부활로 인해 세워진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늘에 속한 곳이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엡1:2)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다. 교회는 사랑 안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교회가 하늘에 속한 속성을 가진 곳이다. 이러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마다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엡1:4)는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하셨다. 이러한 “은혜의 영광을 찬송”(엡1:6)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마땅한 본분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 속한 곳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심으로 서로 연합하게 하신다. “모든 지혜와 총명을”(엡1:8) 부어 주심으로 교회 안에서는 주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는 충돌이 있을 수 없다. 연합의 강한 힘으로 작용하게 하신다. 성령의 주권에 의해 개인적인 의지나 지위나 능력을 뛰어 넘는다. 교회가 하늘에 속했다는 의미는 바로 주님의 주권이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그의 주권 아래 나의 모든 것이 다스림을 받는 다는 의미이다. 그의 주권을 인지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역을 하게 된다. 사사로운 능력이 좌우되는 독단적인 길로 치우지지 않게된다. 주님의 주권 아래 있을 때 “그리스도의 경륜”을 이루는 길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엡1:19) 안에서 하늘에 속한 길을 갈 수 있게 하셨다. 교회는 부활안에 속한 하늘의 속성으로 충만케 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며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 모든 주권을 이 세상 위에 뛰어나게 하심으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이 교회를 통해서 완성되게 하셨기에 “교회는 그의 몸”(엡1:23)으로 주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곳이다. 주님의 주권 아래 순종하는 통제를 받아야 만이 성령 안에 부활 안에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가 하늘에 속한 것임을 증명하는 영적인 길을 가게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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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49회] 그리스도인의 영성-그리스도 주권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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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4) 비둘기 눈, 염소 떼 같은 머리카락
- 우리 몸의 전체 부분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눈이라고 본다. 네 눈이 순전하면 온몸이 빛으로 가득하고 네 눈이 악하면 온몸이 어두워진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마6:22). 주님이 신부 성도를 가리켜 네 눈이 비둘기 눈을 가졌다고 하신다. 이는 눈이 순전하다는 것이다. 순전한 눈은 그리스도의 눈을 가리킨다. 이 순전한 눈의 반대는 악한 눈이다. 이는 마귀의 눈을 가리킨다. '마귀의 눈'은 넓은 문, 넓은 길로 인도한다. 순전한의 어원은 아폴루스이다. 이는 ‘가시면류관을 엮어 쓰다, 고난받다’의 의미가 담겨있다. 즉 예수님이 가시면류관 쓰고 고난받은 것이 ‘순전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눈을 가진 자는 주님과 똑같은 안목을 가지고 주님이 가신 발자취를 따라가게 된다. 주님이 어떤 길을 가셨는가?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고난의 길, 좁고 협착한 그 길을 가셨다. 신부 성도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주님과 똑같은 안목으로 가고 있다. 이를 신랑 예수께서 ‘네 눈이 비둘기 눈으로 아름답다.’고 감탄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각오와 신앙으로 나아가는 자는 실제로 눈빛이 강렬하다. 또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띤다. 비둘기 같은 신앙은 신앙의 절개, 지조를 의미하고, 눈이 비둘기 같다는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안목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께서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너희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양과 같도다.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양이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결국 이리한테 죽임당하는 것이된다. 이는 비록 육신은 죽임당할지라도 신앙 승리이다. 이것이 비둘기 눈을 가진 것이다. 4:1下 네 머리카락은 길르앗 산에서 나타나는 염소 떼 같구나. 염소는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생축이다. 염소 떼가 쉬는 모습을 보면 물결이 굽이치듯 열을 지어서 앉는다. 반면 양 떼는 미련해서 무리를 지어 다니다가 양들끼리 서로 밟기도 한다. 염소를 양 떼들 사이에 집어넣는 것은 양들이 무리를 지어 뭉칠 때 양끼리 서로 밟혀 죽지 않도록 염소가 흩어놓는 일을 한다. 염소는 자기의 고집이 없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전체의 조화·화목을 도모한다. 머리카락은 지혜를 상징한다. 신부 성도의 지혜가 길르앗 산의 염소 떼와 같다는 것이 무엇인가? 길르앗 산은 창31:23에 야곱이 외삼촌 라반 몰래 자기의 가족과 가축을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7일간을 도주하여 머문 곳이 길르앗 산이다. 야곱의 양이 밤낮 쉼 없이 7일간을 달려도 넘어지거나 다치거나 지치는 양이 없었다. 이와 같이 신부의 지혜는 길르앗 산에 도달한 양과 같이 연단된 신앙의 사람이다. 즉 강건한 신앙으로 세워지는 말씀의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신부의 영적 모습이다. 신앙의 연단이 많이 이루어져서 강건한 신앙에 이르는 지혜를 가졌으면 이것이 길르앗 산의 머리카락이다. 또 길르앗 산의 염소 떼 같은 머리카락은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화목하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지혜이다. 히12:14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화목하게 하는 자라야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의 뜻을 위해서 화목케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바로 그것이 염소 떼 같은 머리카락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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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4) 비둘기 눈, 염소 떼 같은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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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32] 그리스도인의 영성-성령 보증의 영성
- 믿음의 참된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만이 다가 아니다. 죽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을 덧입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하려 함이라”(고후5:4)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보증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 안에 참된 소망을 보증하셔서 변치않게 하신다. 이러한 믿음 위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만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업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온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구원의 완성을 복음을 통해 확립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돕는 보혜사는 진리의 영(요14:17)이시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의 기업임을 확증하시고 하나님의 기업을 속량하신다. 속량을 받은 자마다 기업의 “~영광을 찬송하게”(엡1:14) 됨으로 기복적 신앙에 치우치지 않는다.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이 변하지 않도록 확정하시기 위해 “맹세로 보증”(히6:17)하셨다. 이 일에 아브라함은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보증을 받게 된다. “~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히6:14) 약속을 주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일컫음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며 그 뜻이 변하지 않으시는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소망의 피난처가 되신다. 이러한 약속의 소망을 받은 자들은 “영혼의 닻”(히6:19) 같아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의 말씀으로 인을 치시고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고후1:20) 하셨다. 약속을 기업으로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받은 자를 위해 “마음에 성령을”(고후1:22) 주셔서 보증하심으로 우리로 인침의 기쁨을 알게하신다. 이 일에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7:22)이 되셔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고 하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시편 기자가 고백함과 같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을 보증하는 영적 권위자이시다.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시119:122) 약속의 말씀을 믿는 자마다 성령으로 보증하사 영성을 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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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32] 그리스도인의 영성-성령 보증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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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3) 보라, 나의 사랑
- 시온의 딸들인 그리스도의 신부 된 자들은 왕관 쓴 솔로몬 왕을 보라고 하신다. 이는 신부 성도가 그토록 사모하던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라는 것이다. 신랑으로 맞아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 마침내 되라 하신다. 이 신부 될 성도는 누구인가? 예수님이 구주요, 남편이 되기까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산제물 되었고 성화를 거쳐 드디어 순교제물로 바칠 수 있게 된 자로다. 그의 어머니가 그의 혼인식 날, 그의 마음의 기쁨의 날에 그에게 씌워준 왕관이로다. 혼인식 날 예수께 왕관을 씌워준 그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예수님이 이 땅에 임마누엘 하실 때 성령으로 잉태되시었다. 또 행10:38에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부음 받아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게 하셨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도, 또 십자가에 죽임당하실 때도 성령으로 이기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부활하실 때도 오직 성령이 부활시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어머니는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이 예수님을 고난과 죽음에서 이기게 하시고 영광도 받게 하시었다. 즉 성령이 예수님께 왕관을 씌워준 것이 된다. 자식을 낳은 어머니는 어떤 날을 가장 사모하고 기뻐하는가? 이는 아이를 잘 키워서 결혼시키는 때를 가장 기대한다. 결혼은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이 한 몸이 되는 것이라(창2:24). 혼인식 날에 왕관 씌워주어 혼인하는 것을 그토록 기쁘게 여기는 그의 어머니이다.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어린양의 혼인식 잔치에 신부를 초대하여 혼인하는 것을 최고로 기쁘게 여기신다. 찬란한 왕위인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에수님이 누구이신가? 광야에서 짐승들도 쳐 멸하시고 병거를 타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오시는 분이시다. 이는 혼인식에 신부와 혼인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4:1 보라,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보라, 너는 어여쁘도다. 너는 네 머리타래 안에 비둘기들 의 눈을 가졌고, 네 머리카락은 길르앗 산에서 나타나는 염소떼 같구나. 신랑 예수님이 그의 아내가 될 신부성도에게 ‘보라,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보라, 너는 어여쁘도다.’하고 찬탄을 아끼지 않고 있다. 1절부터 5절까지 신랑 예수님이 신부 성도의 영적인 아름다움을 감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부성도 스스로 아름다워진 것이 아니다. 신부성도 안에 계시는 흠 없고 완전한 그리스도가 바로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다. 그분으로 인하여 그의 아내로 아름답게 변모시켜 주신 것이다. 그분은 1~3장까지 신부성도에게 여러 번에 걸쳐서 부족한 것을 계속 채워주셨으니 그것이 곧 아름답게 하신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종국에는 그분의 형상과 일치 되어지도록 아름답게 하시는 것이다. 이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눈, 머리 카락, 이, 입술, 뺨, 목, 유방의 순서대로 나타내고 있다. 먼저, 네 머리타래 안에 비둘기들의 눈을 가졌구나, 이 머리타래는 진리 지식을 상징한다. 이 진리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진리 지식,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지는 바로 그 말씀인것이다. 즉 신부의 안목은 그리스도를 아는 진리지식 안에 있는 비둘기 눈 같다는 것이다. 신랑 예수님이 신부성도의 그 눈을 바라보게 되면 마치 "네 눈에 내가 빠져 들어간다!" 라고 황홀해 하신다. 감탄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신부의 눈이 왜 비둘기의 눈이라고 했을까? 주님은 마6:22에서 네 눈이 순전하면 온몸이 빛으로 가득 차고, 네 눈이 악 하면 온몸이 어두워진다고 말씀하셨다. 몸 전체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눈이다. 여기서 '순전한 눈'은 그리스도의 눈을 가리킨다. 신랑 예수님과 신부 성도는 하나로 연합됐으니 그들의 눈도 하나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보는 안목과 신부 성도의 안목이 일치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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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3) 보라,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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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근작가의 「베드로의 통곡」
- 박병근작가의 「베드로의 통곡」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그를 따르던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는 말하길 다른 사람은 모두 주님을 버릴지언정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3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다. 예언하신 그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할 때 닭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 통곡한다. (마 26:74,75) 그래서 작가는 닭이 우는 장면을 「베드로의 통곡」이라고 재미있게 제목을 붙이고 있다. 우리도 상황이 어려울 때에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배신하게 되는 나약한 믿음의 사람은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은 것이다. 항상 성령을 힘입어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해 주는 작품이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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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근작가의 「베드로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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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31] 그리스도인의 영성-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영성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21,롬10:13)고 하셨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가 되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주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이미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밝히 나타내주셨다. 영원한 비밀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신 주님은 우리의 친구로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이 나의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됨으로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영성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곤란을 당할 때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다. 시험을 당할 때 마다 우리는 “주께 피하는” 삶을 통해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주께 피하는 자는 소망 중에 기쁨으로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환난 중에 부르는 자는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시5:11) 외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주님이 위험 중에 부르는 소망의 이름이 되기도 하지만 그를 사랑함으로 불러야한다. 친구이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부를 때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5:11)라는 교통을 얻게 된다. 주를 사랑함으로 부르는 자는 친밀함의 영성을 누린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반드시 살리시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신다. 친구이신 주님은 그의 공의로 우리를 죄악의 유혹에서 끌어내시는 분이시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 (시92:3)하는 삶을 통해 겸손히 모든 영광을 주님이 하셨다는 고백의 자리로 이끄신다. 날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시92:3)그의 성실함을 증거하는 삶을 누리게 하신다. 그러나 주님을 부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주의 진노하심에 이를 뿐이다. 그의 친밀함을 체험할 수 없음으로 인해 감사와 찬미를 잃게 될 것이다.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9:10) 주의 이름을 알고 의지하는 자를 큰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마음의 서원으로 그를 가까이 섬기는 성장을 허락하신다.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닮아가는 서원을 품게 하신다. 그로 인해 마침내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시61:5)라고 찬미하게 된다. 이는 믿는 자의 기업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에 이르는 큰 영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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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31] 그리스도인의 영성-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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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의 「쉴만한 물가」
- 김선희의 「쉴만한 물가」는 여름이면 찾고 싶어하는 계곡 풍경이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발을 담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풍경이다. 자동차 매연에 찌든 사람들은 상당히 동경하는 휴식 처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바빠서 이런 곳에 가고 싶지만 마음 뿐이지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작가는 성경 시편 23편 다윗의 시를 떠올리며 제목을 붙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했듯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양들이요 이 양들을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은유적으로 읊었는데 이를 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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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의 「쉴만한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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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2) 나가서 솔로몬 왕을 보라
- 솔로몬 왕이 자신을 위하여 레바논 나무로 병거를 만들었도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잣나무 같은 진리로 우리의 성전을 지으시고 영광 받으심이요. 그 영광을 입고 재림하시는 것이다. 3:10 그 기둥들은 은으로, 바닥은 금으로, 그 덮개는 자주색으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는 예루살렘의 딸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입혔도다. 병거의 기둥들이 은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은과 같다는 것을 계시한다. 은은 거룩성을 의미한다. 그는 흠과 티가 없이 거룩한 분이다. 또 바닥은 금으로 만들었다. 이는 예수님의 영원불변하심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금과 같이 변치 않는 신성(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다. 또 그 덮개는 자주색으로 만들었다. 이 자주색은 왕복의 외투 색깔이다. 이는 사람들이 볼 때는 영광중에 재림하시는 주님이 왕의 신분으로 오심을 가리켜 자주색으로 계시하신다. 우리가 만왕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오는 만왕들 중에 속한 자가 되면 더 명확히 자주색 덮개를 볼 수 있다. 여기의 예루살렘의 딸들은 11절의 시온의 딸들(신부성도)과 구별된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딸들을 위해 병거 가운데 사랑으로 입혔다는 것은 재림하실 주님이 그들도 사랑하심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딸들이 비록 순교는 못했어도 믿음으로 열매를 맺은 것에 대해서는 영광으로 입혀 주시는 영광의 주가 되신다. 휴거되는 성도들이 이 예루살렘의 딸들 중에 속한다. 재림하시는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 또 성도들 중 의로운 자들은 화액 전에 미리 데려가는 역사도 있다. 이들은 주님 안에서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산 자들이지만 순교의 신앙에 서지는 못한 자들이다. 따라서 큰 환란 날에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큰 환란 전에 미리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3:11 오 너희 시온의 딸들아, 나가서 왕관을 쓴 솔로몬 왕을 보라. 그의 어머니가 그의 혼인식 날, 그의 마음의 기쁨의 날에 그에게 씌워준 왕관이로다. 7절과 같이 본문의 솔로몬 왕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오 너희 시온의 딸들아, 이는 오 순교한 자들아, 오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들아, 나가서 왕관 쓴 솔로몬 왕을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왜 재림하시는 예수를 보라고 하는가? 그것은 꿈에도 그리던 너희 남편이지 않는가? 육신의 남편은 그림자이고 진짜 남편은 그리스도가 그 실상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생육 번성케 하기위해 육신을 입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들의 육신 속에는 아들의 영들이 있다. 이 아들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은 자들이다. 또 이 생명을 충만케 하기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육 번성하는 것이 복이었다. 그러나 오신 후에는 이 복이 교회를 통해 영적인 자녀를 낳는 것으로 바뀌어졌다.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엡4:22~33에 말씀하신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을 말씀한 것이다. 이처럼 신부성도가 그토록 의지하고 그리던 남편이 왕관을 쓰고 오시니 그를 보라. 이는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라는 것은 아니다. 재림 예수님을 맞아서 그분과 함께하는 혼인식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제일 먼저 자신이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성화를 거쳐 나의 100%는 당신의 것이요. 당신의 사랑에 사로잡혀 내 몸을 초개같이 불사르리라. 즉 순교 제물로 바쳐질 수 있게 되어 신부가 되리라. 할렐루야.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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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2) 나가서 솔로몬 왕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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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30] 그리스도인의 영성-부르심의 영성
-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복을 아는 것은 믿음의 큰 유익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목적은 자신의 기업으로 얻으시기 위해서이다. “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1: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5의 하나님은 사람들중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을 얻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써 신자들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다만 속죄의 단계인 구원에만 그친다면 우리들은 엄청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육신에 속하여 영적인 축복의 삶을 놓친다면 큰 손해가 될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닮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흠없는 자들이 되도록 하셨다. “~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믿은 자들에게 나타내실 하나님의 위력과 그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주님을 보내주심으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생명을 받은 자로 그의 형상대로 지음받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주님을 통해 우리로 같은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하셨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가 있어야만한다. 우리의 지식과 교리로 내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환난이나 시험이 올 때 오래가지 못하고 흔들기가 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알게 해주시는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서 알게 해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게된다.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주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위해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을 바로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믿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영생이 곧 사랑임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랑의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닮아 사랑의 길을 가게 된다. 그 결과 심판날에 두려움없이 거룩하게 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게 되는 영성을 소유하게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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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30] 그리스도인의 영성-부르심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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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진리를 아는 자는 하나님 장막구축에 동참한다
-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알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에 감동받으면, 자신의 이기적인 장막에 갇혀있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결국 자신의 이기적인 장막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모르면, 자신의 이기적인 장막 구축에 멈춰있게 된다. 이건 일부 크리스찬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 다니면서도, 진정한 진리를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일전에 교회 청년부에서 리더까지 한 형제와 잠깐 일을 해본 적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교회에 온 이유가, 사람들을 자기 사업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비즈니스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얘기로만 들었었는데, 그러한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있어서 매우 놀랐다. 잠깐 같이 일하면서도, 이 형제가 권모술수를 쓰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화를 통해 이 형제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더라도, 교회생활을 십 수년간 다니면서 교회리더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러한 예시와 같이, 하나님 장막 구축에 동참하는 자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매우 깊이있게 묵상해보아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에 더욱 집중하며 살아가게 축복하여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직 준비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일에 크게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실력을 먼저 쌓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크게 사용되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실력이 없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노력도 하지 않고, 헌신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큰 열매를 바라는 자들이다. 일을 하면서, 이러한 free-rider같은 크리스찬들을 너무 많이 봐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실력은 쌓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급을 바라는 헛된 꿈을 꾸는 자들이다! 다윗과 요셉과 다니엘을 보라. 이들은 어릴 때부터 누가 보지 않아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자신의 실력을 쌓은 자들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때가 다다랐을 때, 능한 실력으로 크게 쓰임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굴러다니는 돌조각으로도 일을 실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에 모든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역할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느냐는, 자신의 그릇을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달려 있다. 엘리사와 과부의 이야기에서, 과부가 부지런히 그릇을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모아온 것 같이, 우리도 평소에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키워야 한다. 평소에 자신의 능력을 함양하고, 크게 쓰임받기 위해 자신의 그릇을 넓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평소의 우리의 삶의 태도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시고, 그 역할을 맡기신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콜링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엘리사가 과부에게 그릇들을 가져오라고 시켰을 때, 과부는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모아온 그릇만큼 과부는 기름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릇을 가져오라는 엘리사의 명령에 과부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과부는 양식인 기름을 하나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의 일은 다 각각의 시기가 있으며, 그 시기가 지나가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끝난다! 따라서, 즉각적인 순종이 중요한데, 즉각적인 순종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평소에 하나님께 즉시 순종하는 것을 훈련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명령하실 때, 그 뜻을 즉시 따르지 못한다. 자기자신에게 올 이익에 대해 계산기를 눌러보느냐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살아가면서, 더욱 더 명확해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육체를 타고 태어나서, 육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결국, 남는 모든 것은 영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모두 육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영적인 세계에서 모든 것들이 미리 성취되고 현실에서는 그것이 드러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이 끝날 때에도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친밀한 관계가 남을 것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의 통치 안에 거하게 축복하여주시기를 오늘도 기도드린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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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진리를 아는 자는 하나님 장막구축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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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2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부의 영성
- 부부의 길은 성경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성되는 법이 부부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향하여 먼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명하셨다. 엡5:22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엡5:23 의 원칙을 따라 그의 머리에 복종하는 길이 아내의 길이다. 아내의 위치는 교회의 위치라야만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라고 하셨다. 주께서 몸의 구주 되심과 같이 아내는 남편의 권위 아래 두셨다는 사실이다. 성경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자라야한다.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엡6:25라는 말씀처럼 행해야한다. 즉 남편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위치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하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는 분이시다. 이로써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여 귀히 여김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영광이 된다.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라고 하셨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도록 하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야한다. 이는 주님의 사랑으로 보호하며 존경을 잃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엡5:31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다. 부부가 되는 계명은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2 하셨다. 남편의 길은 그리스도의 길이며 아내의 길은 교회의 길임을 알아야한다. 부부가 이 관계를 깨뜨리지 않으려면 지켜야할 계명이 있다. 그건 바로 남편은 아내를 경시하거나, 괴롭게 하지 말고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길이다. 아내는 교회의 위치에서 남편을 존경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최초의 가정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원죄인 되어 두려움과 수치심을 알게된다. 에덴의 문은 닫히고 추방당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의 가정에서 가인 살인자가 나와 천국가정의 질서는 파괴되고 만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의 위치를 지킴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하려는 뜻을 두셨다. 이를 아는 것이 천국을 회복하는 지름길이 되는 부부의 영성이며 사명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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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2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부의 영성